광주강의20250822a 로마서 8장 3절(아담과 나)-이 근호 목사
오늘은『기독교와 허상』을 다 합니다. 오늘로써 떼고 다음 9월에는『신구약성경에 대한 질문과 답변』그 책을 하겠습니다. 없으신 분은 책을 가져오든지 주문하든지 하시면 되는 겁니다. 오늘은 <하나님과 사단의 차이> 212페이지 하겠습니다.
하나님과 사탄의 차이에 대해서 대략적인 것은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사탄은 눈에 안 보이기 때문에 인간들은 사탄을 의식하지 못하죠. 안 보이는 건 없는 거예요. 하나님도 안 보이니까 ‘없다’가 되죠. 그럼 하나님 쪽에서 누가 나타났습니까? ‘주님’이 나타났죠. 그러면 보이지 않는 악마 자리에서는 누가 나타났죠? ‘인간류’가 나타나죠.
이 인간류에서 흐르고 있는 것이 나의 기억이고, 나의 기억이 바로 악마의 기억이에요. 악마의 기억에 준해서 또는 악마의 기억에 지배받으면서 기억하게 되어있고,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이 땅에 하는 일은 악마의 권세에 눌린 자들을 해방하는 것이다.”(행 26:18)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이 있으면 세상 사람은 사람을 보잖아요. “너 똑바로 해. 너 이렇게 해야 돼. 이건 네가 이렇게 행동해야 좋은 결과 나와.” 항상 눈에 보이는 사람보고 지적하잖아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인간을 안 봐요. 안 보고 인간 배후에 있는 아우라 같은 어떤 더러운 기운을 바라보면서 “내가 온 것은 사단의 권세에서 해방시키고 죄 사함을 받게 하기 위해서 내가 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여기 더러운 기운에 농락당하는 것이 나니까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 나는 나의 기억대로 살아가는 거예요. 누적된 기억대로 살아가고 거기에 대해서 주님의 기억은 또 따로 있다 이 말이에요. 주님의 기억은 따로 있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과 사탄의 차이는 주님이 알고 있는 기억과 인간들이 알고 있는 기억과의 차이남이에요.
주님만 알고 있는 기억은 성경책 내용에 거기 주님이 알고 있는 기억이 나와요. 이에 관해서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여러분 사도행전 아시죠? 사도들이 움직였던 것, 행했던 이야기들이 쭉 나오잖아요. 사도행전을 바라보면 거기에 누가 보이느냐? 사도라는 사람이 보여요. 사도라는 사람. 그래서 사도행전보고 이야기하라 하면, 베드로는 이렇게 했고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교여행을 세 번 다녔고 하는 그런 이야기들이 쭉 나온단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되면 무엇을 놓치느냐? “사도 바울이 그렇게 여행 다니고 선교하면서 했던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데?” 물어보면 답변을 못해요. 왜? 겉모습을 봤기 때문에 사도가 직접 무슨 이야기했는가에 대해서 그 내용에 대해서는 별로 안 중요하고 “내가 사도에 대해서 잘 알지. 사도가 옛날에 예루살렘에 있다가 성령을 받아서 선교하러 간다고 아시아까지 갔고 그다음 마케도니아, 고린도까지 가서 이런 활동, 이런 핍박 받았다.” 그 이야기만 늘어놓는 거예요. 정작 사도가 무슨 말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어요.
그래서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로마서 8장 3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 있어요.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이렇게 되어 있죠.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그러니까 인간의 육신 자체는 어떻게 됐다는 말입니까, 사도 바울의 말에 의하면? 연약하다는 거예요. 그러면 사도가 전도하면서 사람을 볼 때 어떻게 봐요? 너는 지금 육신으로 태어난 자체가 연약하기 짝이 없어서 네가 하는 행위로 네가 어떤 일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해준 거예요.
그럼 사도 바울이 사람을 볼 때 “너는 무능해. 연약해.”라고 이야기하는데, 사도행전을 바라보는 오늘날은 ‘내가 사도에 대해서 알지. 내가 사도 바울에 대해서 알고 베드로에 대해서도 알고 요한에 대해서 알고 있어. 왜? 사도행전에 나오니까 내가 익히 알고 있다고.’ 그렇게 되어버리면 어때요? 그 사람이 유능한 거예요, 무능한 거예요? 강한 거예요, 연약한 겁니까? 어떻게 됩니까? 안다 하니까 이것은 강한 것이 되고 유능한 것이 되어버렸죠.
성경을 읽고 성경을 아는데 성경을 읽고 아는 것을 통해서 자신이 무엇으로 전환되고 있습니까? 유능한 자, 강한 자로 어느새 바뀌어져 있죠. 문제 있죠. 문제 있는 겁니다. 내가 일반 사람들 보듯이 사도를 그렇게 평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건 왜 그러냐? 인간의 기억이란 내가 나를 보듯이, 나를 좋게 보듯이, 좋게 본다는 것은 유능하고 능력 있는 자로 보듯이, 내가 타인을 그런 식으로 봤고 거기서 나오는 지식이 나의 기억의 창고 속에 차곡차곡 쌓여 간 거예요.
출애굽기 13장 9절을 누가 한번 읽어주세요.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고 여호와의 율법으로 네 입에 있게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능하신 손으로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 여기서 “여호와의” 그다음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여호와의 능하신 손”으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했죠. 그 뒤에 시편 같은 데 보면 이것을 ‘여호와의 능력, 권능’이라 해요. 능력.
그러니까 출애굽된 것, 이스라엘 나라가 건국된 것은 누구 능력입니까? 인간의 능력입니까? 히브리인들이 애쓰고 노력해서 얻은 나라가 아니고 여호와의 권능이죠. 아까 봤던 로마서 8장 3절에서 인간의 육신은 어떻다 했습니까? 연약하죠. 연약하잖아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의 말이 일관성 있잖아요.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된 것은 인간의 능력이 하나도 가미되지 않았죠? 그리고 로마서 8장 3절에서 이 땅에서 천국 가는 것은 순전하게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불가능하죠. 왜? 인간은 연약하니까. 해낼 수가 없죠.
따라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오늘 하나님과 사탄의 차이인데, 하나님과 사탄의 차이는 뭐냐? 사탄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했어요. 사탄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사탄의 모든 행동은 인간을 통해서 나타나죠. 그럼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모든 것은 누구를 통해 나타납니까?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죠. 그러면 그 하나님과 사탄의 차이는 이 땅에서는 인간과 누구의 차이? ‘인간과 주님의 기억의 차이’. 이렇게 정립이 된다 이 말입니다.
일단 정리가 됐죠? 정리되었지만 믿을 내가 아니죠. 인간의 기억에 문제, 하자가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있다는 말이죠. 인간의 기억에 문제가 있고 오류가 있다는 말은 누구한테 문제가 있다? 내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 3절에서 인간의 육신이 연약하다 할 때는, 인간이 해낼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받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거부한다.
하나님께서 빛으로 천지 창조했죠, 창세기 1장에. 빛으로 창조해놓고 그 창조된 것에 인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빛으로 만드는 원리원칙이 인간의 내부까지 들어가 인간을 만들어 놓고 주님께서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네가 갖게 되면 너는 죽는다.” 했어요. 너는 죽는다. 어떤 지식이요? 선과 악에 대해서 지식을 갖게 되면 너는 죽는다. 창세기 2장 17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따먹으면 너는 죽는다고 되어 있잖아요.
이것은 인간에게 있는 빛의 원리와 그리고 선악과 따먹고 난 뒤 선과 악을 알게 된 인간의 내부와 차이가 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이 인간은 하나님이 빛으로 만든 인간이겠어요, 아니겠습니까? 인간이 아니죠. 크게 쓸게요. ‘인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그 인간이 아니다.’가 되죠.
그러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인간들은 뭐냐? 인간의 기억 속에 보이지 않는 사탄의 기억이 들어가죠. 그러면 인간들은 뭐냐? ‘나=인간이다.’ 이런 공식이 나오죠. 이런 공식이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는 인간이 아닌데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인간이라 보고 억지로 우기는 식에 돌입된 거예요, 선악과를 따먹고.
‘선과 악의 지식을 품고 있는 이 내 자신을 나는 인간이라고 규정하고 싶다.’ 이게 인간 속에 들어있는 사탄의 기억입니다. 사탄의 기억이에요. 주님 보시기에는 사람도 아닌데, 인간들이 사람이라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들은 ‘나’에서 인간이 나왔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그 개념을 더 파고 들어가면 이 ‘나’가 나와요. 나. ‘절대자아적인 나’가 나옵니다.
인간들의 삶은 하나님에 의해서 고통스럽거든요. 고통스러우면서 인간들은 뭘 원하느냐? 자유를 원합니다. 자유에 두 종류의 자유가 있는데 하나는 freedom이 있고 또 liberty가 있어요. freedom이라 하는 것은 주변에서 나를 압박하는 모든 압제, 정치적 힘, 어떤 힘으로부터 내가 벗어나는 것을 freedom(~에서 자유)이라 합니다. 어떤 세력으로부터 본인이 벗어나는 것을 freedom, 자유라고 이해하고 있어요.
liberty도 자유인데 이 자유 개념은 ‘내가 무엇을 새롭게 선택할 수 있느냐?’, 선택권이 있다는 게 liberty에요. 내가 선택할 수 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라고 했잖아요.(미국 정치인 페트릭 헨리(1736-1799)의 연설 中) 이게 바로 인간의 기억 속에 있는 자유 개념입니다.
그럼 성경에서는 뭐냐? 성경에서의 자유는 ‘죄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 그게 자유에요. 인간의 자유는 완전한 절대 나를 추구해서 ‘인간→나’로 가는 거예요. ‘네 까짓 게 나하고 같은 부류인줄 알아? 난 너하고 달라. 난 개성 있단 말이야.’ 이게 인간이거든요. 인간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되 기존의 인간과 다른 특별한 인간으로 자기를 대우하고 싶은 거예요, 자기 생각은.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 세상에 나보다 더 귀한 건 없는 거예요. 같이 인간이라고 맞먹을 생각하지 마란 말이죠. ‘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라는 건 인정하는데 그러나 선택하라면 너라는 인간보다 나라는 인간을 선택하겠다.’ 이거에요.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개념이 어디서 나왔다 했어요? ‘나’로부터 나왔으니까. 나부터. 그것은 선악과 따먹을 때 마귀가 약속한 거예요. 네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너는 신처럼 된다. 하나님처럼 된다.
freedom은 소극적 자유라면, liberty는 내 인생은 내가 꾸려서 앞으로 내가 한다는 거예요. ‘당신들이 날 도와주면 고맙게 여기겠지만 도와준다는 걸 핑계로 해서 나한테 간섭질 할 생각하지 마라. 나는 소중하니까.’ 이게 liberty에요.
그럼 성경에서의 자유는 뭐죠? 간단하죠. 이 개념 자체가 뭐라고요? 죄에요. 이 자체가 죄에요. 하나님은 나를 인간으로 취급 안하는데 내가 나를 인간으로 여기는 그 자체가 뭐라고요? 죄가 된다는 겁니다. 그 죄로부터 벗어나는 거예요. 그 죄로부터의 벗어남이죠.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뜻은 이렇습니다. ‘성경을 봐라.’ 이유가 뭐냐? 왜 성경을 봐야 되냐? ‘이제 내가 더 살 필요가 없게 되었기 때문에.’ 성경을 보게 되면 내가 내일까지 살 이유가 없어요. 안 살아도 돼요. 뭐 짐도 꾸리지 마세요. 있는 대로 그냥 죽으면 돼요. 성경의 모든 구절은 우리로 하여금 “너의 그 가짜 인생을 오늘로 끝내줄게. 이제는 더 이상 힘든 가짜, 인간도 아니면서 인간 행세하는 것을 내가 끝내줄게.”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말씀에 속해있는 백성과 현재 나는 절대자라 하는 그것을 내가 말씀으로 바꿔줄게.” 그게 성경내용이에요. 어떻게 성경 볼 마음이 듭니까? 볼 마음이 드십니까? 오늘로서 인생 끝내줄게.
그럼 우리는 발칵 발작하죠. 대들죠. “왜요?” 이렇게 하잖아요. “너는 연약하니까.” 너는 연약하니까. 연약한 게 안 연약한 것처럼 연약한 게 강한 것처럼 행세하니까 무엇을 자꾸 방해 놓습니까? 여호와의 권능이 자꾸 마귀에 속한 졸개, 앞잡이 나로 인하여 주님의 권능이 훼손되고 있어요.
아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뭐로 나온다 했어요? 권능으로 나왔죠, 권능으로. 주님의 힘으로 나왔잖아요. 그런데 이걸 누가 방해합니까? ‘나도 인간인데. 내가 좀 보탤 수 있었는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데.’ 자꾸 이런 잡생각 또는… 요새 아침에 운동하십니까? 아침에 운동할 때 산에 가면 눈앞에 자꾸 들끓는 거 있죠? 뭡니까? 날파리. 자꾸 날파리처럼 내 자아가 무능한 자아, 연약한 자아, 아무것도 할 가치도 없는 자아가 주님이 주신 그 권능의 선물과 은혜를 훼손하고 가리고 있는 거예요. 그걸 비문증이라 하죠. 비문증 아세요? 눈에 뭐 날파리 날아다니는 증상. 실핏줄이 문제됐는지 유리체강 내에 출혈이 떠다녀서 가만있는데도 뭐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여요.
주님이 주신 은혜와 선물로 오롯이 감사, 찬양해야 될 우리가, 그게 빛이거든요, 빛이 빛으로 나타나야 되는데 자꾸 어두움이 훼방을 놓고 있어요. ‘열심히 교회 나갔는데 내 인생 왜 이 모양 이 꼴이냐.’ 이런 식으로 자꾸 훼방을 놓고 있는 거예요.
지금까지 성경이 무슨 뜻인지 여러분 대충 아시겠죠? “그만 살아도 됩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럼 오늘 진짜 교통사고 나서 진짜 오늘 죽으면 나 어떻게 해?’ 이런 걱정이 되죠. 내일의 삶은 주님의 권능으로 살아요. 혹시,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 더 산다면, 주님의 권능으로 삽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사는 게 아니고. 우리가 악바리처럼 산다고 해서 더 살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문장을 크게 쓰겠습니다. 크게 쓸 때는 이 문장을 여러분들이 마음에 새기라고 쓰는 거예요. ‘내일 해가 뜰 필요가 없다.’ 내일 해가 뜰 필요가 없어요. 내일의 해가 뜬다~ 하는 노래 있잖아요. 그럴 필요가 없다니까요. 내일의 해가 뜨든 안 뜨든 그건 누구 소관입니까? 권능 있는 주님의 소관이지, 내가 해 뜨는 것까지 신경을 꼭 써야 돼요? 이 무능한 내가? 연약하기 짝이 없는 내가? 내 힘으로 살 수 없는 내가 왜 해 뜨는 것까지 신경을 써야 돼요? 해 뜨든 말든 나와 무슨 상관있어요? 상관없죠.
그래서 이 문장에서 자유란 뭐냐? ‘나는 나와 상관없음’. 나는 나와 상관없습니다. 나는 나와 헤어져야 되죠. 내가 나와 헤어져야 돼요. 이별해야 돼요. 전별금 얼마? 56만원. 56만원 주는 것은 ‘아, 그거 잘 치웠다’는 뜻이에요. ‘이제는 내 할 도리 다했기 때문에 당신 선배 선생님은 내 기억에서 좀 사라져줘. 그것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줘. 전별금을 받아먹었잖아요. 그 황금을 받아먹었잖아. 받아놓고 후회하든 말든 간에.’
사람은 누구와 헤어질 때 그 사람에게 내가 인간답게 인간도리 다 한 결과로서 당신한테는 어떤 부채, 어떤 짐을 느끼지 않는다는 뜻으로 헤어지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내 기억 속에는 나에게 이익된 것, 내가 나를 좋게 한 것만 내 기억 속에 남아있기 때문에. 불순한 것 이런 것들은 다 내쫓아야 되고. 쫓는 방법은 역시 돈이 최고죠. 돈 좀 쥐어주고 앞으로 우리 후배들 생각할 때 좋게 생각해주세요, 선배 선생님.
어떤 행동을 해도 이 ‘나’라는 중심에 좋은 기억으로 되돌아오는 행위만 인간은 하게 되어 있어요. 좋은 기억으로. 왜냐하면 내가 제일 중요하니까요. ‘나’에서 ‘인간’ 개념이 나오고 나에게서 ‘하나님’ 개념 나오고 ‘성경’ 개념, ‘교회’ 개념, ‘착함’ 개념, ‘국가’ 개념 다 어디서 나와요? 나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 나의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마귀가 있죠. 마귀는 자기가 전지전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걸 빼다 박았죠. 마귀가 전지전능하다고 여기는 그 속성을 받았기 때문에 나는 나에게 전지전능한 신으로 행세할 때까지 우리는 마음에 평안이 없어요.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나 좋은 대로 돌아가야 돼요.
방금 이야기한 것을 또 문장으로 하겠어요. 아까 무슨 문장 했습니까? ‘내일의 해는 굳이 뜰 필요 없다.’였죠. 또 문장 하나 나갑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말만 생산한다.’ 모든 인간은 자기 말만 생산해요. 60이고 70이고 80이고, 90까지 거론하진 않겠습니다, 안 계시기 때문에 80까지 할게요, 모든 80 평생 한 것은 ‘내 말 들어봐. 내가 너한테 할 말이 있거든’. 자기 말을 생산하는 데에 일평생을 다 보냈어요. 자기 이야기 생산하는 데. 내 인생 소설로 쓰면 소설 10권 쓸 수 있어, 이런 거 있잖아요.
이것은 아까와 같은 말이에요. ‘모든 인간은 자기 말만 생산한다.’는 말은 ‘모든 인간은 자기 기억에 매진한다.’ 자기 안에 좋은 기억만 있기를 매진하고요. 마귀가 인간을 그렇게 만든 거예요, 마귀가. 하루하루 산다는 것은 내 이야기, 또는 내 언어, 내가 생산한 내 의미를 내가 만들어내는 데에 거기 충실하기 위해서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누가 이야기하면 “됐고! 그만하고. 얼마 받았어, 그래? 다 치우고 얼마 받았어? 다른 건 듣기 싫고!” 그거 딱 이야기하시는 게 나는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내가 만들어낸 말만 자동적으로 생산하는 공장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럼 두 사람 만나면 어떻게 되겠어요? 각자 각자 뭡니까? 자기 말만 생산하는 중소기업사장 둘이 만난 거예요. “친구야, 내 이야기 들어봐.” “아, 고만하고. 내 이야기부터 먼저 듣고.” 만나면 자기 이야기하는데 서로서로 번갈아가면서 또 양보할 때 양보하면서 하다 보면 카페서 벌써 세 시간 지났어요. 전화할 때 한 시간 지나버리고. 자기 이야기하다가.
자기 이야기가 뭐냐 하면 ‘자기 계시’에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계시화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숭고한 말씀으로 자기를 포장하는 식으로 이렇게 인간은 살아갑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마귀죠. 마귀는 이겁니다. “신으로부터 독립해라. 너 선악과 따먹었는데 독립해. 네가 신이 될 수 있어. 왜 그 기회를 놓쳐? 네 속성, 네 품성, 네 마음가짐은 신을 따르는 마음가짐으로부터 벌써 떠났어. 이제부터 남아있는 선택지는 뭐냐? 네가 신이 되는 것, 그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어.” 이게 마귀가 우리한테 이야기하는 거고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동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우리의 성깔이 마귀화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을 백독해도 안 들어와요. 안 들어오고,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쏙!쏙! 들어오죠. 쏙쏙 들어오는 겁니다. 선배 선생님이 전별금 이런 악습제도를 폐지하자 해도 후배 교사 선생님들이 그걸 반대하는 이유가 ‘그러면 나의 의는 어디서 생기느냐? 나의 의는? 누구한테 섭섭지 않게 하는 그러한 나의 자질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선배 선생님은 뭔데 지가 막느냐? 우리가 주면 주는 대로 그냥 받아 잡수세요. 그래야 우리가 훌륭해지잖아. 우리가 착해지잖아. 왜 우리를 부끄럽게 만듭니까?’ 그래서 인간은 신도 아니면서 신 행세를 하고 있는 거예요.
또 문장 나갑니다. 아까 문장 몇 개 했죠? 첫 번째 문장은, 내일 해 뜰 필요 없다는 것. 두 번째 문장은, 자기 말을 생산한다. 인간이 가짜인데 신으로 행세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이겁니다. “송구합니다”. ‘송구합니다,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이 소리 하는 거예요. 인간은 이 소리할 자격이 안 됩니다.
‘미안합니다. 송구합니다.’ 이 말을 왜 하는 거예요? 이 말을 한 자가 가룟 유다에요. 얼마나 송구했으면 자살했겠어요? 내가 선생님을 팔아먹다니. 이게 전형적인 마귀 모습이에요. 우리는 남한테 미안하다고 말할 자격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 인공지능이 ‘송구하다’는 말을 했어요? 인공지능이 인간한테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하던가요? 쉽게 말해서, 인공지능이 자기의 오류를 인정하던가요? 안하죠. 인간은 ‘송구합니다.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통해서 자기가 전번에 했던 자기의 실수와 오류와 잘못을 반전의 기회로 삼아요. 내 잘못을 내가 안다는 그만큼 나는 이제 인격화되었고 훌륭하다는 것으로, 새롭게 훌륭할 수 있는 건덕지를 자기가 만들어낸 겁니다. ‘나는 반성할 줄 아는 인간다운 인간이다. 나는 짐승이 아니야. 정말 나는 인격적으로 반성까지 할 수 있는, 마음 낮출 수 있는 그런 훌륭한 사람이야.’ 스스로 자기가 남한테 내세울 만한 자기 말을 생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보다 내일이 더 훌륭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에 내일의 해는 떠야 돼요, 안 떠야 돼요? 떠야죠. 떠서 내가 더 살아남아야죠. 더 살아남아야 돼요.
다시 한번 처음으로 돌아와 봅시다. 성경은 언어로 되어있죠, 여러분 아시다시피. 아는 것을 하겠어요. 하나님께서 인간의 언어로 이야기했어요. 이제부터는 좀 골치 아파요. 누구한테 이야기했습니까? 아담한테 이야기했죠, 아담한테.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따먹지 말라고 언어로 이야기했다고요. 언어로. 언어로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따먹지 마라’ 이것은 인간세계에서 이미 사라졌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악마와 한통속이 되어서 ‘아담’이 된 게 아니고 ‘나’가 된 거예요. ‘아담’으로 살아야 될 자가 갑자기 ‘나’로 사는 거예요. 따먹고 신처럼 사는 거예요. ‘나’라는 이름의 신이 된 거예요. 절대신이 된 겁니다.
내가 신이기 때문에…하나님께서 언어를 누구한테 줬습니까? 아담에게 줬잖아요. 그럼 아담은 없어요.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으니까 아담은 죽어버렸어요. 아담은 없으니까 아담 자리에 선악과 따먹은 마귀의 졸개, ‘나’가 등장해서 ‘나’가 언어를 생산해서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신의 자리까지 갑니다. 할 말이 되게 많아요. 인간들은 할 말이 되게 많습니다. 궁시렁 궁시렁 하면서 ‘내 인생을 왜 이렇게 만들었냐?’ 그렇게 할 말이 많아요.
어디서 나온 할 말이에요? 아담의 자리가 아니고 인간(나)의 자리에서 나왔거든요. 차이점이 뭐냐? 아담의 자리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어요. 그런데 나의 자리는 언약을 절대적으로 거부하는… 그게 마귀거든요. 왜냐하면 사탄은 언약에 의해서 이미 잘리게 되어 있기 때문에 언약을 지워버리는 데에 총력을 다 기울입니다.
나의 자리에는 언약이 없어요. 언약이 없어서 언약이 없는 채 언어를 사용해 신으로 나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연약한 인간을 구원한다는 말은 뭐를 집어넣는 거예요? 아담에게 이야기한 언약을 이 나에게 집어넣는 겁니다. 그럼 나에게 집어넣으려면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있었던 언어, 언약이죠, 하나님의 약속, 약속을 위한 나에게 찾아오는 거예요. 집어넣으면 언약, 약속에 의하여 나는 이미 죽은 자가 돼요.
그게 로마서 8장 2절에 나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죄와 사망의 법이 나오죠.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예수님께서 약속을 주면 약속을 받은 당사자가 어떤 상태에 있다는 말입니까?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있는 상태로 보는 거예요. 로마서 8장 2절에.
그러면 말씀이 우리하고 상대해요, 안 해요? 상대 안하죠. 상대할 가치가 없기 때문에. 그다음에 아까 보신 것처럼 육신은 연약하다고 이야기했고. 3절 끝에 계속 보면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누가 하신다? 주님이 하시죠. 그럼 아까 출애굽기 13장 9절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뭐로 나왔다 했습니까? 여호와의 권능이죠. 그 권능이 ‘인간은 못하는데 주님께서는 하신다’가 되잖아요.
주께서는 뭘 하십니까?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게 건져낸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생명의 법이 죽음의 법 안에 있는 우리를, 인간은 못하고 우리는 못하고 주님께서 그걸 해내시는데 해내시는 방법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셔서 아버지께서 그 육신을 죽이고 죽은 예수님을 살려내면서 발생된 성령의 능력이 오늘날 예수님과 동일한 죄의 몸에 있는 우리를 살려낸다 이 말입니다.
이게 사도행전 보면 나옵니까? 이게 나오던가요, 사도행전에? 사도 바울이 왔다 갔다 하는 그것만 나오지, 이게 나오던가요? 오순절에 성령 받아서 사람들이 기뻐했다, 주변에 날뛰었다, 하는 어떤 경향성, 사람들의 반응이 나와 있지만 그들이 성령 받아서 한 이야기가 나오던가요? 상세하게 안 나오죠. 구체적으로 안 나오죠.
구체적으로 나온 것이 바로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아닙니까. 에베소서, 갈라디아서, 골로새서 보면요, 사도행전에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그것은 별로 안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안 중요하다. 없어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안 중요한 거예요. 진짜 본래의 내용은 이렇게 방금 했던 로마서 8장.
다시 말해서 인간과 인간의 모든 눈에 보이는 만남은 전부다 껍데기에 불과하고 허물에 불과하고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이 말이죠. 실제적으로 그들과 그들 사이에 무슨 권능이 오고갔느냐, 무슨 내용이 오고갔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이유가 뭐냐? 우리의 기억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자꾸 내가 사람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나를 인품 좋은 사람답게 만들기 위해서 뭔가 내 안에 괜찮은 기억들이 나를 사람으로 대우해줄 것이라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데, 우리의 기억은 마귀가 만들어낸 그 말, 나를 절대화시키는 그런 기억 외에 다른 기억은 없습니다, 우리 기억 속에. 나를 절대화시키는 거예요.
자, 그럼 이제부터 좀 더 깊숙이 들어갈게요. 말씀이, 우리에게 약속이 온다 했죠. 우리한테 약속이 오게 되면 우리의 무엇을 공격한다고 했습니까? 우리의 무엇을 공격하죠? 아까 한 것 기억나는 사람 있습니까? 무엇을 공격하죠? 말씀이 우리한테 들어오면 우리의 자아를 공격하죠. 나를 공격합니다.
말씀이 무엇하고 무엇을 바꾼다 했습니까? 아담하고 나를 바꿔치기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담보고 약속을 줬지, 나라는 생면부지한테 준 게 아니에요. 나란 없어요. 나보고 말씀을 주지 않아요. 약속이 약속대로 하면 나 자리에 누가 들어와요? 아담의 자리가 들어와야 되고, 아담의 자리는 하나님의 언약의 자리가 거기에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그럼 나 있던 자리는 뭐가 되겠어요? 이건 성도한테만 해당되는데…. 아담은 이제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죽었기 때문에.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으니까 아담은 없는 거예요. 아담은 죽고 거기에 나타난 것은 나 또는 자아죠. 이 자아는 죄와 사망의 힘에 눌렸어요. 권세에 ‘꼼짝마라’ 된 거예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이 자아 자리에 언약이 와버리면 자아 자리는 빵꾸 나겠죠. 말씀, 언약과 자아가 교체되기 위해서는 빵꾸가 나는 겁니다.
‘빵꾸’라는 것이 별로 좋은 말은 아니기 때문에 이걸 고상한 말로 바꾸겠습니다. ‘공백’. ‘빈자리’. 빈자리가 만들어져요. 이 빈자리가 생기는데 빈자리는 일종의 정신적인 구멍이죠. 평면적으로 동그라미가 자아라면 말씀이 와서 자아의 한 구석이 찢어지고 여기에 구멍이 생기면 나머지 자아가 가만있겠습니까,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아는 힘이 있죠. 무슨 힘? 죄와 사망의 힘 또는 악마의 힘이 있죠. 이 힘이 가만두지 않고 뭐하겠습니까? 구멍을 봉합하죠. 이걸 덮으려 하죠. 바람이 슝슝 들어오는데 그걸 가만두면 안 되잖아요. 내 자아가 찢어지게 되면 절대적인 자아가 못되잖아요. 약점이 되고 허점이 되잖아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착한 일을 하든지 뭘 하든지 선악체계, 윤리도덕 다 동원해서 ‘나 이렇게 착해’ 하는 식으로, 행여나 누구한테 나라는 자아가 사실은 찢어진, 쓸모없는, 구멍 난 걸레 같은 자아라는 걸로 들킬까 싶어서 봉합하죠. 착함과 윤리도덕으로 선악체계로, 아는 게 선악이니까, 이걸 덮고자 하죠.
봉합, 이것을 ‘증상’이라 해요. 무슨 증상? 정신병 증상. 이게 정신병 증상이에요. 공백(∅)이죠. 자아가 구멍 난 거예요. 구멍 났을 때 보통 정신과에서는 정신병 종류를 세 가지로 나눠요. 하나는, 잡신들. 증상이 하나의 증상이 아니에요. ‘증상’이란 말은, 말로 어떻게 설명될 수 없고 덮을 수 없는 그 무엇. 해결되지 않으면서 무슨 뜻인지는 아는데 집에 가면 마찬가지 되는 것, 그게 증상이에요. 증상이라 하는 것은 지금 내가 생산한 말로써 납득되고 논리적으로 설명은 가능한데 설명이 가능하다고 그 증상이 사라지는 게 아닌 그것이 증상이에요. 알기는 되게 아는데 하나도 기쁘질 않아. 마음에 해결점이 없어.
뭐 쉬운 예로 그렇죠. 목에 가래가 끓는다. 다른 사람은 담배 고만 피우라 하지만 난 담배 안 피우는데도 불구하고 가래가 끓는다. 원인이 뭐냐? 병원에 갔다. 의사가 “이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약 잡수세요.”해서 약 먹었어요. 약 먹고 다 했는데 계속 가래가 끓거나 딸꾹질이 나거나 하는 증상이 없어지지 않는 그걸 증상이라 해요.
인간의 자아의 무능함을 티내는 게 증상이에요. 내 안에 찢어짐이 있기 때문에. 내가 빵꾸 났기 때문에. 그런데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모든 인간이 다 그런데 자아가 자아에게 민감한 사람은 나만 그렇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만.
‘잡신들’. 증상이 하나같으면 하나만 덮겠는데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에 그때마다 온갖 동작을 다 하면서 이게 정신병이 되는 겁니다. 정신병은 분열적 정신병과 편집증적 정신병이 있어요.
그리고 이 공백에서 또 나온 게 뭐냐 하면 ‘아버지의 이름’. 이것은 빵꾸가 난 것을 왜 빵꾸 났다고 보느냐 하면 옛날 내가 아버지한테 훈계 받은 게 있기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내가 듬직하게 믿을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래서 마음이 허했다는 거예요. 아버지 있을 때는 증상이 없었는데 아버지 떠나고 난 뒤에 또는 나한테 믿음직한 어머니 돌아가시고 난 뒤에는 자꾸 내가 떠난 그 자리를 메꿀 수 없어서 마음이 허전해서 어떤 취미생활, 어떤 종교생활을 해도 마음이 다 덮이질 않을 때 아버지의 이름 때문에 이런 현상이 있는 거예요.
이것은 정신병이라 보기보다는 ‘신경증’이라 합니다. 신경증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히스테리에요. 증상을 생각하면 몸이 갑자기 아프다든지 통증이 온다든지. 또 하나는 강박증. 강박증은 아버지의 이름이 허한 그 자리를 메꾸기 위해서 밤새도록 독일 프로축구 보는 것. 또는 손흥민이 LA로 갔으니까 미국 축구를 보든지, 야구, 삼성, 기아, 잘 치고 있는 한화 거기에 매진하는 것. 안 그러면 강박증은 도박, 비트코인, 주식투자 이런 것으로 채우는 것. 전부다 뭡니까? 공백에서 찢어진 그 증상을 메꾸기 위해서에요.
또 하나는 도착증인데요. 비슷한 건데 물신(物神), 사물을 신으로 섬기는 거예요. 자기 신체도 그렇고 금이나 이런 거, 아니면 유명한 명화를 수집한다든지 이런 거. 도착증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사도 마조. 사도(sado). 사디즘(sadism), 남을 패는 것. 마조(maso). 마조히즘(masochism), 남한테 얻어맞으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 페타시즘(fetishism), 성적(性的)으로 해소가 안 될 때 해결하는 방법.
공백이 깨어졌을 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 공백 하나하나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이것은 10분 쉬고 하겠습니다.
광주강의20250822b 로마서 8장 3절(아담과 나)-이 근호 목사
증상이 계속 일어나게 되면 사람은 가만있지 않아요. 인간에게 증상이 일어나고 찢어짐이 있다는 것은 인간은 이미 하나님과 있으면 자족하는 그런 아담은 아니죠. 그리고 수상하기 짝이 없는, 하나님이 만들지도 않았는데 마귀가 만들어낸 자아를 떡 쥐고 자기가 신처럼 행세하는 그 자체가 이미 문제 있거든요. 문제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가만두지 않고 언약을 가지고 쏘아대니까 인간마다 자기는 신이고 싶은데 빵꾸가 나는 거죠.
이건 어렵지 않아요. 왜 어렵지 않냐 하면 인간은 자아기 때문에 자아는 자아중심이잖아요. 그런데 “인간이 자아중심인 이것이 뭐가 나쁘냐? 모든 인간 다 물어봐. 인간은 다 자아중심이야. 그러니까 내가 내 중심으로 사는 게 뭐가 나쁜데?” 할 때, 그 사람한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달한테 물어봤나? 별한테 물어봤어? 해한테 물어봤어요?”
그러니까 자아가 되고 난 뒤에는 이 자연세계가 누구 손에 의해서 지금도 운영되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거예요.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이 여호수아 전쟁할 때 그때 해가 멈췄잖아요. 해가 누구 편들었습니까? 이스라엘 편들었잖아요(수 10:12-14). 요단강 갈라졌죠(수 3:16). 이것은 이스라엘이 자아가 아니고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의 언약이 있었고 그 언약과 이 대자연이 결탁되어 있다는 거예요. 움직일 때 같이 움직인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정신의학부터 해서 이 세상의 모든 과학은 누구중심입니까? 나부터 출발해서, 비는 와야 되고 뭐 가뭄 들면 안 되고 온난화되면 안 되고. 누가 누구한테 명령질 하고 있어요, 지금? 해수면 높으면 안 되고 기온이 46도 높아지면 안 되고 그리고 처서(處暑)가 되면 서늘해야 된다는 거예요. ‘처서’라는 언어를 누가 생산했어요? 인간이 만들어놨죠. 소위 인간이에요, 인간. 자아들이 만들어놨잖아요. 그러니 그것 따라서 철이 그렇게 인간의 요구에 동의해야 된다는 거예요. 정말 이거는 시건방지기 짝이 없는 거예요.
내 인생은 항상 멀쩡해야 되고 내 인생은 항상 행복해야 된다는 겁니다. 누가 누구보고 명령질이에요? 그 해와 달이 인간에게 명령받을 군번입니까? 받겠어요? 안 받죠. 인간은 자기의 정신 안에서만 움직이거든요. 정신 안에서. 갈수록 그 증상이 심화돼요.
아까 했던 것 이어서 해보겠습니다. ∅(공백)입니다.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인간은 봉합을 하려 하죠. 봉합을 하는데 거기에 정신병이 있고 신경증이라는 게 있죠. 신경증은 무엇을 도입하느냐? 문화와 문명, 기존의 인간이 말하는 현실의 규범 또는 원칙, 그리고 다 합쳐서 상식을 여기에 동원해서 이 공백을 메꾸려 해요.
친한 친구가 결혼을 한다. 그런데 친한 친구가 호텔에서 결혼을 한다. 부조 얼마 해야 됩니까? 부조 얼마 해야 되겠죠? 친한 친구가 호텔에서 결혼하면 1번 5만원, 2번 10만원, 3번 20만원. 몇 번해야 됩니까? 호텔 식사비가 14만원인데 얼마 해야 되겠죠? 만약에 5만원했다는 게 들키면 이거는 친구가 “너는 인간도 아니다.” 이렇게 되겠죠. 20만원 했다. 그러면 “마음에 안 들지만 내가 그냥 넘어가줄게. 다음에는 그렇게 적게 하지 말고 50만원해라.” 뭐 이렇게 나오겠죠.
이게 뭐냐 하면 현재 이 사회에서 돌아가는 일반원칙과 상식에 준해서 나의 증상, 찢어진 나의 증상을 그걸 동원해서 감추는 거예요. 덮는 것. 내 말 말고 현 문명화된 사회에 돌아다니는 개념을 가지고 나의 마음의 허전함을 메꾸려고 하는 시도, 이게 신경증이라 하는 거예요. 진짜 교양 있고 상식적이어 보이죠? 정신병의 일종이에요.
이게 히스테리거든요. 히스테리의 특징은 항상 ‘아버지의 이름’을 동원해요.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시고, 어릴 때 아버지께 받은 그 훈계를 누가 대신하느냐? 회사나 일반 사회나 사회에서 통용되는 그 상식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명령받던 그 명령을 대체하는 거예요. 그 규칙으로 대체되는 거예요. 그래야 사람 대우받으니까요. 자칫 이상한 행동하게 되면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볼따귀 잡히면서 이런 소리 듣는다니까요. “도대체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았길래 저거밖에 안 돼?” 이런 소리 막 듣잖아요. 그런 소리를 들을까봐 자기 신체에 스스로 변화가 일어나는 걸 히스테리라 해요.
특히 히스테리 강도가 아주 심한 자리가 상견례 하는 자리. 상견례 아직 안 해봤죠? 긴장도가 보통 높은 게 아니에요. 저 집안 상식도 없다는 소리 들을까 싶어서 옷차림부터 바짝 긴장해요. 찻잔 잡은 손도 벌벌 떨어요. 말할 때도 잘 못하고. 안경도 썼다 벗었다 닦았다가. 삐질삐질 막 땀나고. “여기 물 갖다 주세요.” 물 자꾸 마시게 되고. 히스테리 증상이죠. 남이 우리 집안을 욕되게 할까봐 사전에 자체적인 방어체제에 나서는 걸 히스테리라 합니다.
강박증은 뭐냐 하면, 아버지의 이름을 사회보다 더 큰 어른으로 갖다 대는 것.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여!” 부르짖는 것, 이게 바로 강박증이에요. 잃어버린 아버지를 대신해서 큰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에다가 그 주님의 말씀으로 나의 공백을 메꾸려고 시도하는 거예요. 이게 강박증이에요.
그리고 물리학자들. 물리학자들이 급하면 동원하는 이름이 있어요. 아인슈타인하고 호킹 박사. 계속해서 권위 있는 학자들의 말을 댐으로써 자기가 이 바닥에서 유식한 자로 계속 남아있고자 하는 그러한 강박증 같은 거예요. 그리고 정치하는 사람들은 뭐 국회의원만 되면 김대중 묘소에 가서 절하는 것, 강박증이죠. 조국하고 아는 척하고 문재인하고 아는 척하는 것. 전부다 강박증이에요. 보다 더 센 유명한 자에게 기댐으로써 나의 허함을 메꾸려고 하는 이게 바로 강박증이에요.
아까 정신병은 조현병이라 해서 자기에게 나오는 증상을 자기가 감당 못하는 거예요. 본인이 아버지가 되고 본인이 신이 되어버리고. 남들은 “내가 무슨 신이야. 나는 주님의 종이지.” 이렇게 신을 높이고 자기를 낮추는데 이 증상은 신경증이에요. 정신병은 그게 아니고 “내가 나폴레옹이다.” 이렇게 하고 돌아다니는 거예요. 나는 나폴레옹이다. 목사를 오래하면 정신병 되어버려요. “나는 신이다. 나는 주의 종이다.” 이러고 돌아다닌다니까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막 질문하고 싶을 거예요. 정신병자 아니고 멀쩡한 사람이 누구냐 하는데 이미 인간 자체가 공백이 있기 때문에 멀쩡한 사람은 없어요. 이 세상에 정상적인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도 문장 하나 써야 되겠다. ‘다 같이 죽어가는 입장에서 남을 부러워하지 말자.’ 전부다 죽는 사람 아니에요? 다 죽잖아요. 왜 죽는 사람을 부러워합니까? 그럴 필요가 없어요. 다 죽잖아요. 죽는 데는 이유가 있잖아요. 죄지어서 죽잖아요. 벌 받아 죽잖아요. 그런데 왜 그 사람들을 부러워해요?
나눠드린 교재 한번 봅시다. ‘공감의 어두운 면’. 남하고 공감하는데 자폐적이고 폐쇄적인 그런 경우. 어떤 경우가 있는가? 인간을 하나의 개별자로 보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를 개별자로 보는데 개별자가 모여 있는 집단의 예에 적당한 동물이 바로 개미입니다. 그래서 ‘개미’라 하는 거예요.
1. 일반적 개미 : 상황을 지나치게 과장하여 ‘항상, 절대, 누구나, 매번’이라는 말을 남발. ‘항상, 절대, 누구나, 매번’이라는 말을 말할 때마다 남발하는 사람이 있어요. 마치 자기가 보편적인 지식을 갖고 있음으로써 자기의 공백, 자기의 찢어진 것을 메꾸는 높은 안목을 지닌 것처럼 남한테 비취는 거예요. “사람들은 말이야, 그리고 저 사람 말이야. 매번 그렇더라.” 진짜 매번 그래요? 진짜 누구나 그렇습니까? 그건 ‘내가 전체를 안단 말이야.’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2. 부정적 개미 : 상황을 좋게 볼 수 있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나쁜 점을 본다. 계속 나쁜 점만 보는 거예요. 2번은 그냥 넘어갑시다.
3. 운명적 개미 : 앞으로 일어날 일을 부정적으로 단정한다.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부정적으로 단정하는 것.
4. 맹신 개미 : 자신의 부정적인 느낌을 근거 없이 믿는다. ‘나는 안 돼.’ 이런 거 있잖아요. ‘나는 망했어.’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아까 나온 것처럼 모든 인간이 다 찢어졌어요. 그런데 본인 인생만 완전히 작살났다고 하는 거예요. 본인 인생만. 그것도 아무 근거도 없어. 남들은 다 행복한데 본인만 불행하다고 하는 거예요.
5. 독심술 개미 : 다른 사람이 말하지도 않았는데 점 보듯이 그 사람의 마음을 단정 짓는다. 사람 만났다 하면 점을 쳐요.
6. 죄책감 개미 : 스스로에게 부당한 뭔가를 계속 강요하고 스스로를 위축시킨다. 성경은 죄인이지, 죄책감을 가지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죄책감은 자아가 강할 때 죄책감이 생기거든요. 그런데 지금 성경은 바꿔치기하죠. 자아와 뭐와 바꿉니까? 약속하고 바꾸죠. 주님이 내 자리에 들어와서 나를 찢어버린다 이 말이죠.
7. 꼬리표 개미 : 자신이나 남에 부정적인 꼬리표를 붙인다. “그거 잘했어. 그런데 말이야…” 꼭 ‘그런데 말이야’. 영어로 But, 이런 거.
8. 개인화 개미 : 별일 아닌 것에 개인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야, 손흥민 그 사람 정말 돈 많이 벌어서 또 LA로 옮겼단다. 그런데 손흥민이가 여자 하나 또 건드려가지고…” 꼭 그런 토를 달아야 속이 시원한가요? “돈 뺏겼대. 3억 뺏겼대.”
9. 남 탓 개미 : 자신의 문제를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린다.
심리학에서 이걸 다 이야기하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이걸 들으면 기쁩니까? 이 말 들으니 기뻐요? ‘아, 논리적으로 이게 맞구나.’하는 이게 기뻐요? 하나도 안 기쁘죠. 증상이니까요. 증상이라 하는 것은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득해도 그것이 나의 허전함을 메꾸지 못하는 게 증상이에요, 증상. 공백이라는 것이. 공백은 우리가 아담임에도 불구하고 자아라고 행세하기 때문에 갖고 있는 질병 같은 거예요. 정신적인 질병이에요.
아담으로 돌아가면 되는데 돌아갈 능력이 없어요. 돌아갈 수 없어요. 돌아가는 방법은 아까 말씀 있죠. 주님의 권능으로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죄와 사망의 법을 빼돌리고 바꿔치기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성령의 법은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 내가 아니에요. 우리 주님이 주인공입니다.
그러니까 이러나저러나 나는 뭡니까? 나 자체는 이제 성립되지 않습니다. 성립될 수 없어요. 그래서 이 신경증에서 제일 중요한 개념은 ‘법’이에요, 법. 문장 또 나갑니다. ‘인간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법에 의해서 처벌받는다.’ 인생 자체가 처벌이에요. 그런데 처벌받을 짓을 했어요, 안 했어요? 알아요, 몰라요? 몰라요. 왜 처벌받습니까? 법이 있기 때문에.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어요. 법이 있어요. 인간에 대한 처벌법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이미 아담을 떠났기 때문에 아담이 누군지 몰라요. 아담을 모른다는 것은 인간은 내가 누군지 모른다는 거예요. 다만 증상만 나타날 뿐이에요. ‘뭘 해도 나의 찢어진 것은 봉합되지 않는다.’ 이 증상만 평생 동안 그냥 안고 살아갈 뿐이에요. 다만 웃으면서 상식적으로 살면서 안 그런 척 사는 그런 요령꾼이 있는 반면에 그런 요령이 없어서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트리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그건 요령이지, 그 사람의 형편이 나아지고 안 나아지고와는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병 고치는 의사도 정신병이고 정신병이라고 앉아있는 사람도 정신병이에요. 둘 다 정신병인데, 정신병자로 둘 다 연약한데요. 둘 다 사망과 죄의 법에 갇혀있는데 누가 누굴 고칩니까? 고친다는 것은 성립 안 됩니다. 그리고 고치겠다는 자체가 인간이 자기가 만들어낸 잘못된 기억에서 나온 그런 행동이죠. 희망이고 기대에요. 욕심입니다.
그 예가 연애감정이에요. 연애감정은 그때 그 당시 일시적인데, 인간의 기억 속에 들어가면 그때를 사모하게 돼요. 그때 참 좋았다. 뭐? 때가 지났어요. 뭘 좋아요? 안 좋아요.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법에 의해 처벌받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 안에는 법이 들어있어요.
약속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법이 들어가 있고 또 죄 사함이 들어있어요. 율법으로 오셔서 죄 사함을 주시는 거죠. 이게 약속입니다. 법이 왔다 이 말이죠. 법이 왔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죄인이거든요. 모든 인간은 죄와 사망의 법 안에 죄인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법이 온다는 말은 ‘약속의 능력이 오게 되면 법에 대해서 네가 규정짓지 마라’. 다시 말해서 난 법을 지켰다, 안 지켰다 할 수 있는 권한과 자격이 우리 자신에게 없습니다.
카프카(1883-1924)라는 작가가 쓴 『법 앞에서』라는 소설을 보면 카프카가 여기에 말려들었어요. 법원 통지서가 왔는데 재판받으러 오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소설에 보면 도대체 자기가 잘못한 게 없어요. 잘못한 게 없는데 이미 위반자로 법 쪽에서 규정을 해버렸어요. 그럼 오늘날 우리 성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법이 규정했으면 ‘아, 내가 죄인 맞구나.’ 이러면 될 문제를, 그 소설에서는 ‘내가 당최 무슨 죄를 지었단 말입니까?’를 그 법 앞에 나가서 계속 하소연하고 달려드는 거예요.
그러면 누가 괴로워요? 인간은 아담을 몰라요. 왜? 아담 시기가 끝났기 때문에. 아담 때부터 우리 자체가 이미 변질되었어요. 아담은 더 이상 아담이 아니고 우리는 하나의 마귀의 종이고 마귀는 없으니까 아예 없다 치면 나는 신이에요. 내가 신이라고, 신! 비록 모든 것을 liberty,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진 않지만, 그러나 내 안에서 나는 ‘작은 제국’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누구나. 모든 사람이 작은 제국을 갖고 있어요. 자기만이 다스리는 제국을 갖고 있어요.
지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했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 의가 있는 층까지 그걸 박살내고 파괴시키기 위해서 계속 공격하고 있다고요. 자기 의. ‘나의 작은 제국만큼은 제발 제가 갖고 있도록 좀 봐주면 안돼요?’ 하는 그런 것. 그게 자기 의거든요. 내가 있음으로써 세상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가 여기 있다는 그것만으로 내가 숨 쉴 수 있는 마지막 최후의 공간, 아지트. 이게 나의 제국이에요.
그게 아까 분류에서 어디에 해당한다고 했습니까? 이게 바로 강박증이에요. 신경증. 그래서 조현병, 정신분열증은 몇몇이 그렇지만 신경증은 모든 인류가 다 그래요, 모든 인류가. 아담의 후손들은 다 신경증 병자에요. 어릴 때 아버지한테 받았던 명령이 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거나 또는 독립해서 사회에 나가니까 아버지 같은 권위자들이 많아요. 거기에 줄을 서야 자기가 밥 벌어먹고 살거든요. 직업을 가지고 생업에 종사해서 월급 받고 살 수 있기 때문에 결국은 사회가 좋은 게 아니고 누가 누구를 살려야 돼요? 내가 나를 안 살리면 누가 나를 살려줘요, 이 세상에서? 여러분이 살려줍니까? ‘여러분’ 그건 윤복희 이야기고요.
나를 살리는 것은 나지, 누가 살려줘요? 안되니까 누구한테 빕니까? 교회 나가서 누구한테 빌어요? 하나님한테 빌잖아요. 그게 바로 강박증 아닙니까, 강박증. ‘하나님, 저 좀 살려주세요. 힘들어 못 살겠습니다. 이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겠습니다.’ 죽는다는 그것, 세 번째 도착증. 자기 자신의 신체를 하나의 신으로 보는 거예요. 물신(物神). 물체를 신으로 봄으로써 내가 희생함으로써 내가 구원받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 매조히즘. 내가 이 사회에 당함으로써 희생자가 되는 쾌감을 느끼는 거예요. 자살이죠. 가룟 유다. 가룟 유다를 자살로 보는데 주님은 자살로 보지 않고 배신으로 보는 거예요. 왜 배신으로 보느냐 하면, 주께서 가룟 유다를 열두 제자 중 하나로 뽑아줬잖아요. 거기에 대한 배신이죠.
다시 한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이 만든 현실은 구멍이 나 있다. 구멍이 공백이 돼요. 중간에 찢어져 있어요. 그러니까 현실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찢어진 공백을 봉합시키려 애쓰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약속 속에 뭐가 들어 있어요? 율법이 들어있죠. 율법은 뭡니까? 갈라디아서나 성경에서 보면 모든 율법을 다 지켜도 하나를 어기면 모든 게 무효가 되어버려요. 덩어리져있어서 그런 거예요. 덩어리져서 하나를 어기면 다른 것도 영향이 있어서 그래요. 다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40년 동안 교회 다니면서 열심히 율법대로 살았는데, 어느 날 자기가 보기에 율법위반이 되어버리면 나머지 99%는 살아있는 게 아니고 다 허물어져요. 다 허물어지게 된다고요. 그러니까 율법을 준 것은 아담이 아니고 악마가 만들어낸, 인간처럼 생긴 그 존재가 얼마나 허약한가를 율법을 통해 탁 건드리면서 와르르 다 무너지게 만든 겁니다.
인간들은 이 현실 속에서 자기가 안 무너지고 제대로 봉합된 것을 믿기 위해서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하는데 이 변화를 ‘개선’ 또는 ‘진화, 발전’이라는 용어를 동원해 쓰는 거예요. “우리 가정 옛날보다 많이 나아졌지? 그치?” 또는 개인적으로 “내가 보기에 네 신수가 훤하네. 많이 나아졌다.” 많이 나아졌다는 말은, ‘이 현실이 충분하게 얼추 나의 허점과 약점을 이제는 메꿀만하게 된 상태에 있다.’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현실이 그만큼 되었다는 말은 곧 인간의 불안감을 묘사한 거예요. 그래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계속 있으니까 그들은 이 변화를 계속 추구해서 ‘앞으로는 잘 될 거야.’ 하잖아요. 그걸 보통 위로 또는 소망이라 하죠. ‘앞으로는 잘 될 거야. 아마 앞으로는 좋은 일이 있을 거야.’ 이것은 현재의 문제점을 미래로 비겁하게 지연시키고 도피시키고 도망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 모습일 뿐이죠.
자, 이렇게 보니까 하나님과 사탄의 차이가 분명하죠. 그러면 해결점이 뭐냐? 해결책이 뭐냐? 그 차이에서 나와요. 해결책이. 우리보고 뭐하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잖아요. 주시고 예수님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의 복음을 보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알아요, 몰라요? 모르죠. 예수님에 대해서 몰라요.
누가복음 9장 봅시다.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하시되 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나니 이는 저희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 또 저희는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9:44-45)
마태복음(17:22-23), 누가복음(9:44-45), 마가복음(9:30-32)에 다 나오는 이야기인데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했어요. 마태복음 16장에도 그런 말씀이 나오는데 인간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인자에 대해서 뭘 모르느냐 하면 내가 죽고 난 뒤에 부활되어야 한다는 것, 그 사실은 어떤 인간도 알지 못하고 감추어진 비밀이라는 거예요. 비밀.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 현재 인간이 아니고 자아죠, 자아의 세계, 인간은 그걸 현실로 봅니다, 자아의 세계와 하나님의 세계 그 사이에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새로운 현실을 주께서 마련해주셨다 이 말입니다. 마련하신 거예요. 그래서 인간들은 뭔가 예수님이 좋은 소리하니까 어떻게 해요? 자꾸 믿고자 하죠. 믿고자 하는 거예요.
믿고자 하는데 막상 어떤 사람의 아들이 귀신들려 죽으니까 믿고자 했던 제자들이 귀신 쫓아내려 했을 때 귀신이 나갔어요, 안 나갔어요? 안 나갔어요. 그래서 그 아버지가 하는 말이 “예수님은 되는데 예수님 제자들은 왜 안 됩니까?”하고 불만이 늘어졌어요.(마 17:14-20, 막 9:14-29, 눅 9:37-43) 참 그 현장에 제가 있었다면 “너 같으면 하겠는가?”
어떤 인간도 예수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차이에서 나와야 하기 때문에. 차이라는 것이 부각되어야 되지, ‘내가 믿었습니다.’ 하면 안돼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죄로 규정해서 우리의 믿음을 안 받아줍니다. ‘내가 주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이건 베드로의 생각이에요. 베드로의 이것은 주님 앞에 거부당하죠.
그럼 로마서나 에베소서나 또는 오순절 성령 이후에 나온 표현은 뭐냐 하면 ‘내가 믿음으로 구원’받죠. 이 ‘믿음’이란 내가 주님을 믿는 이것도 거부당하고 내가 하나님을 아는 이것도 이건 아는 게 아니고, 나와 하나님 사이에 믿음의 주체가 여기 끼어든 거예요. 개입한 거예요.
‘내가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말은 ‘내가 주님으로 구원받았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주님의 믿음으로 구원받았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능력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어야 나와 주님이 바꿔치기 되었다는 그런 결과가 나오잖아요.
여기 다른 교재 한번 보겠습니다.
Can't Help Falling In Love
by Elvis Presley
현명한 사람들은 말하죠 오직 바보들만이 서두른다고요
하지만 나는 당신과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어요
내가 머물러도 될까요? 그게 죄가 될까요?
내가 당신과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다면요?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확실히 바다로 향하듯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듯이 어떤 것들은 그렇게 정해져 있어요
내 손을 잡아요 내 모든 삶도 함께 가져가요
왜냐하면 나도 당신과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 노래가 ‘Can't Help Falling in Love’ 엘비스 프레슬리(1935-1977)의 유명한 노래인데 이거 노래 틀면 또 저작권 어쩌고 해서 내가 직접 한번 불러볼게요. 이 노래 부를 때는 웃어야 돼요.
Wise men say
only fools rush in
But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내가 당신과 머물러도 되겠습니까 Shall I stay
Would it be a sin 그게 죄가 될까요
If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Like a river flows
surely to the sea
Darling so it goes
somethings are meant to be 어떤 것들은 그렇게 정해져있다는 거예요. 모든 것들은.
여기 그다음 가사보세요.
Take my hand 손 한번 잡아주이소, 그거에요. 손 잡아주세요. 그 손만 말고
take my whole life too 내 인생 전부를 가져가 주세요. 교체, 바꿔치기죠.
차이.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오신 주님이 내 모든 삶도 다 가져가세요. 내가 엉망진창이 되든 내가 개판이 되든 내가 찢어지고 또 찢어지든 날마다 증상이 올라오든 그런 것 문제 삼지 말고 그냥 가져가세요. 당근마켓에 그냥 주는 것도 있잖아요.
Cause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왜냐하면 나도 당신과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게 여호와의 권능 아닙니까. 권능.
사랑. 이것이 성경 요한일서에서 그리고 고린도전서, 이번에 수련회 했잖아요, 성경 전체에서 끝까지, 요한복음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너를 끝까지 사랑한다. 주님은 계속 사랑만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랑만. 사랑은 너희들이 나를 사랑한 적도 없고 사랑할 능력도 없다. 너희들은 죄와 사망에 빠져있으니까. 사랑해봤자 결국은 네가 너 사랑하는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나는 너희들이 하는 사랑을 일체 받지 않는다. 기타 있으면 노래 더 잘 부를 건데….
212페이지 보겠습니다. 밑에서 네 번째 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악마가 통치하는 세상에서 잔인하게 거절당하고 죽어야만 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바는 궁극적으로 민중들에게 무엇을 제공하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모든 것을 빼앗는 분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찢어버린다. 우리 자신을. 이 자아가 자아로서 행세하려는 모든 판단을 찢어버리는 거예요.
문장 하나 또 쓰겠습니다. ‘제발, 너 자신에 대해 설명하거나 해석하지 마라.’ 전별금이고 뭐고. 제발 너 자신에 대해서 설명하거나 해석하지 마라는 거예요. 자꾸 자신에 대해서 의미를 솜사탕처럼 자꾸 부풀리면 안돼요. 그건 뭐냐? 내가 내 제국을 위해서 작은 나의 제국을 위해서 안에 통용되는 말을 내가 생산하는 것밖에 안되니까요.
너 자신을 해석하고 설명하지 말란 말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뭘 제공하시는 분이 아니고 212페이지, [반대로 모든 것을 빼앗는 분]이죠. 무엇을 빼앗는가? 뒤에 나오죠. 뭘 빼앗습니까? [가족을 빼앗고] 그다음 213페이지, 무엇을 빼앗고? [소유를 빼앗고, 명예와 지위와 심지어 목숨까지 빼앗아 버리고] 이것을 빼앗기 위해서 왔다는 거예요.
그러면 사탄의 세계에서 이런 사람, 이런 분을 가만두겠습니까, ‘너나 죽어라’해서 목숨을 빼앗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공격해서 목숨을 빼앗았잖아요. 빼앗았는데 인간이 빼앗은 그분의 목숨을 주님이 사흘 만에 다시 원상복귀 시켰잖아요. ‘그만큼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적대적이었다. 천국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마라. 지옥이 딱 맞다.’ 이런 거죠. 그걸 알려주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213페이지, [그러나 마귀가 만들어 놓은 종교는 민중들에게 그런 식으로 교육해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와도 같아서 열심히 떼쓰고 기도하고 겸손하게 신앙생활에 열심 내고 윤리적인 마음씨를 가지고 있으면, 항상 칭찬하고 복 주는 하나님으로 소개해 왔었다. 즉 빼앗는 분이 아니라 더욱 주시고자 하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이었다.] 주시고자 환장하신 분이라는 식으로 가르친 거죠.
자, 이 생각이 어디서 깨지는가? 구약성경 욥기에서는 욥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 생각이 반대라는 것을 알리죠. 그럼 욥은 하나님 생각과 인간 생각의 어디에 끼어있습니까? 경계면, 그 차이. 그래서 욥은 선지자에요. 욥은 선지자. 본인이 벌 받는 이유를 몰라요. 인간이 망가질 때 죽어가는 이유에 대해서 전혀 몰라요. 자기가 벌 받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했지만, 자기가 착하고 바르게 한 것만 생각나지, 이렇게 힘든 인생을 살 이유는 아무리 노력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욥이 태어난 이 세상에 아담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뭐라고 합니까? 두 번째 아담, 마지막 아담. 진짜 인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지난 낮 설교에 제가 시편 8편한 것 여러분 혹시 기억나십니까? 낮 설교에서 했는데 시편 8편을 보면서 어떤 대목이 제 마음에 새겨졌느냐 하면 8편 3절요,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그다음 4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사람이 무엇이관대.
다시 말해서 아무 인공적 치장 없이 생것, 날것 그대로도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것이 분명히 드러났건만, 인간은 어떻단 말입니까? 인간은 자꾸 인위적이고 자기 생각으로 완전히 이중 삼중 백 겹 자기가 자기를 조작해왔잖아요. 꾸며왔잖아요. 아닌 것처럼. 정신병자 아닌 것처럼. 마치 사람 대우받아야 마땅한 자격이 있는 것처럼 복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것처럼 오해했단 말이죠.
그런데 그런 것들이, 인간들의 그러한 자기 꾸밈의 모습이 날것 그대로 영광을 돌리는 해와 달과 별과는 갈수록 너무나 거리가 멀어진 거예요. 그걸 알고 다윗이 말하기를 뭐라고 합니까?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 같은 거 왜 찾아오십니까? 이 쓰레기만도 못한 걸 왜 찾아오십니까?’라고 감격해서 이 말을 하는 거예요.
계속해서 교재 봅시다. 213페이지 밑에서 여섯 번째, 욥기에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빌닷은 다음과 같이 하나님에 대해서 크게 오해한다.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5-7).] 이 고백이 뭡니까? 바로 악마의 발언이죠. 마귀가 발언한 겁니다. 악마가 오늘날 종교라는 마이크를 통해서 세상에 전파하는 거죠.
그다음 214페이지, [예수님의 죽음이 단순히 몇몇 사람들의 적극적인 정치력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대다수의 민중들의 비호응 속에서 그 가치성을 짓밟힌 가운데 쓸쓸하게 세상을 (홀로) 하직하신 것이다.] 그 가치성, 예수님이 하신 모든 것은 결국 인간에게 아무 도움 되지 않고 쓸데없는 것만 예수님이 하셨어요. [예수님이 가르치신 내용은 지금까지 민중들 마음 속에 자리잡은 하나님과 전혀]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전혀 판이하고 낯선 것이었다.] 전혀 판이했다. 완전히 달랐다.
그다음 218페이지 하겠습니다. <서로가 죄인들로서>라는 제목이에요. [학문에 관한 책들을 보면 죄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죄책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만 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아요. 죄가 뭔지 몰라요. 왜냐하면 죄를 알려면 죄를 죄로 규정하는 법을 알아야 되는데 그 법은 아담 때는 알지만, 그 이후인 우리는 자기가 신처럼 행세하는 때이기 때문에 본인이 법이고 본인이 신이에요. 그래서 죄를 몰라요.
“그래, 미안하다.” 아까 “미안합니다. 송구합니다. 내가 실수했네요. 내가 밥 빌어먹고 살라 하니까 내가 좀 오바했네요. 내가 사과하잖아요.” 그럼 끝나는 거예요. 평생 자기 지키는 게 자기에 대한 임무니까요. 나만 지키면 되거든요, 인간은. 그게 자기에 대한 책무이고 사명감이란 말이죠. 나 지키는 데에 사명감으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에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사는 이런 게 없어요. 인간에게는 그런 게 없어요.
그 밑에 봅시다. 인간은 죄도 모르고 진리를 모르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진리는 아까 비밀스럽다 했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비밀이라서 인간은 몰라요. […죄를 모르면 진리를 모르도록 되어 있다. 진리가 비밀스런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는 이유는, 인간에게는 항상 죄가 있기 때문이다.]
[오이는 어느 부분을 토막 내어도 오이이다.] 그걸 달리 하면, 오이는 어느 부분을 깨물어도 오이다. 인간은 몇 살 때 나쁜 짓했는데 그다음부터는 개과천선했다는 말하지 마세요. 인간은 팔십 넘어, 팔십 조금 넘어까지 어떻게 살아도 인간은 죄만 짓습니다. 인간은 죄만 지어요. 왜? 봉합해야 되니까. 내가 나 되는데 허점을 보이면 안 되니까. 온전하고 완벽해야 되니까. 내가 아는 온갖 것 다 동원하고 성경구절 다 동원하고 교회 다니는 공로 다 동원해서 내가 보기에 의젓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자기 방어에 나서는 것. 그래야 작은 제국이 되기 때문에. 그 안에서 자기가 신이 되기 때문에. 정신병이죠. 그런데 모든 인간이 다 정신병이에요.
219페이지 보겠습니다. 중간에 [십자가는 모든 존재에 대한]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중지’와 ‘금지’를 뜻한다.] 금지. ‘금지된 것을 금지하심’. 금지된 것을 금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게 뭐냐 하면, 율법을 딱 줬을 때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킨다 했죠. 그걸 금지한 거예요. 바리새인이 성전에서 기도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구제했습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잘했다 하십니까? “그게 바로 죄야.”(눅 18:9-14)
하나님이 금지한 것, 하지 말라는 것, 하라 하는 것에 대해서 금지한 것은 안하고 하라는 것은 함으로써 그다음 나온 결과가 뭐에요? ‘나는 주의 법을 지켜서 주님 앞에서 오롯이 온전하다.’라는 생각을 내가 염원하고 있었던 거예요. 때려죽어도 십자가 앞에서 죄인 되기 싫은 거예요.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법을 받음으로써 죄와 사망의 법에서 마치 내 힘으로 탈출이 가능한 것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그리고 아까 강박증처럼 날마다 뭘 추구합니까? 변화를 추구해서 오늘보다 내일이 더 발전하고 더 나아지기를, 보다 더 좋은 쪽으로 개선의 여지를 보임으로써 내 안의 우수함을 통해 난 괜찮은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자기 자신을 믿고 싶은 겁니다.
219페이지 밑에서 네 번째 줄에, [성도의 사귐이란, 사실상 서로가 죄인과 죄인들로서 사귀는 것이다.] 따라서 제가 쓴 마지막 문장 있죠? 다시 써볼까요? 나에 대해서 뭐하지 마라 했습니까? 해석과 해설을 하지 마라 했죠. 나에 대해서 그렇게 하지 말라 했죠. 이제는 남에 대해서도 해석과 해설을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그 죄가 내가 좋은 소리한다고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자, 그러면 둘이 만나서 입 다물고 있을까요? 그럼 가만있으면 되네요. 223페이지 밑에서 네 번째 줄, [‘조용하게’ 사는 것이 인간에게 어려운 윤리임을 알아야 한다.] 조용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윤리인지. 뭐 이야기해야 돼. 금반지 받은 이야기해야 돼. 조용하게 있으면 안돼요. 뭐라도 해야 돼요. 그래야 숨통이라도 트일 것 같아.
자, 그러면 정말 구원받은 자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찢어진 공백은 봉합이 안돼요.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 공백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드러내야 되죠. 드러내는데 어떻게 드러내는가? 224페이지, 이게 『기독교와 허상』의 결론입니다. 제목은 <신에 향한 인간의 분노>라고 되어 있는데 인간의 분노가 아니고 나의 분노에요. 나의 분노를 드러내세요, 하나님에 대해서.
자꾸 착한 체하지 말고 하나님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야 돼요. 공백을 감추려하지 말고 공백, 내 찢어진 것, 허한 것을 드러내야 돼요. 드러내야 뭐가 딸려 나오겠어요? 그동안 나를 종 부리듯 했던 마귀가 드디어 자기 정체를 감추지 못하고 나를 통해서 자기 정체를 드러내는 것, 그 매개자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죠. “나는 포행자요. 나는 살인자요. 나는 많은 사람을 죽였어.” 사도행전에 나오는 그 대목을 보면서, 많은 사람을 옥에 넣는 것까지만이 아니에요. 사람을 죽인 거예요. 그렇다면 여러분 이런 것 한번 생각해봤어요? 사도 바울이 사도되고 난 뒤에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그때 제가 예수님을 몰라서 댁의 귀한 아드님을 옥에서 죽게 했습니다. 내가 사형시키는 데 앞장섰습니다. 죄송합니다.” 사과했습니까?
인간은 사과 받을 위인이 없어요. 어떤 누구도 남한테 사과 받을 필요도 없고 사과할 필요도 없어요. 이 모든 것은 누가 하신 거예요? 주의 권능이 주께서 사도로 하여금 일말의 사과 없이, “나는 옛날에 사람들 많이 죽였다.” 구원받은 살인강도가 일말의 사과도 없이 “주여, 오늘밤에 주와 함께 있을 수 있습니까?” “그래, 너 오늘밤에 천국가거라.”
이게 어떻게 가능해요? 남한테 미안하다는 사과도 없이. 남을 그렇게 짓밟아놓고. 악독하면 다에요? 잔인하면 다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악독과 잔인이 어느 정도 깊은지 우리가 감 잡을 수 없습니다. 어설픈 사과, ‘송구스럽습니다. 미안합니다.’ 앞으로는 남한테 그런 이야기하지 않기. 전화로 네 시간 반 동안 해놓고 미안하다고 하지 말기. 새벽 한시에 전화해놓고는 미안하다는 얘기하지 않기. 그런데 ‘하지 않기’ 해야 되는데 이게 안돼요. 그럼 하나님께 분노하죠. “하나님 뜻 때문에 새벽 2시에 전화해서 저를 이렇게 엉망진창 만들 거예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자신의 망가짐이 마땅함을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말씀을 주실 때 정말 우리보고 준 게 아니고 예수님께 넘겨준 말씀을 주께서 다 실행에 옮겨서 다 이루어서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과정에서 우리가 얼마나 악마의 앞잡이인 것이 드러나니 세상에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음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