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성도는 소리

아빠와 함께 2025. 10. 23. 22:29

사건의 혜택을 입은 종족은 사건의 종족 새로운 종족이고 사건의 혜택을 입지 못한 종족은 기존의 종족이 되는 겁니다. 이처럼 기존의 종족을 두고 새로운 종족이 출현하는 것을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종말이라고 합니다. ‘종말’. 새로운 인류의 출현. 종말 또는 종말의 현상입니다. 종말의 현상이 되면서 새로운 종족이 출현하면서 이것은 하나님과 통한다 하면서 영적 존재가 되고 자동적으로 기존 종족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육이 되겠지요.
기존 종족에서 영의 존재로 넘어갈 때 중간에 기계가 됩니다. ‘기계’. 기계라고 하는 것은 자아가 빠진 거예요. 자아의 누락병의 힘이 자아가 버티는 힘을 이깁니다. 무능력 되게 되면 무의미자가 돼요. 아프니까 병 나아서 나도 남들처럼 살고 싶고 인간답게 살면 의미 있는데 앞으로 나의 인생 계획은 이렇다 저렇다 펼칠 수 있는데 너무 아파버리면 자기가 자기를 조절 못하니까 어떻게 대처를 못하니까 나는 있으나마나가 되지요. 의미가 없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누가 해석을 하느냐 하면은 사건의 종족 쪽에서 해석을 해요. 병든 자에게 네가 병든 것은 종말의 현상이다. 종말이라는 말은 다 같이 죽는다. 다 같이 다 죽는 게 종말이에요.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종말의 줬다는 말은 살 가치가 있는 인간은 일괄적으로 아무도 없음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세상을 더 이어갈 이유가 없어요. 싸그리 다 없애버리니까 이게 종말이잖아요. 다 같이 죽는다를 사도들이 말씀 또는 계시 또는 복음. 말씀을 전해요 사도들이. 사도들이 말씀을 전한다는 말은 사도들이 소리를 내는 거예요.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모든 자아를 없애버리고 하나님은 자기 성도를 소리만 남기는 존재로 만들어요. 그게 사건의 종족입니다.  사람답게 살고 싶은 목표가 있는데 사도가 주는 것은 목표가 아니고 의미입니다. 의미. 그러면 목표가 목표로서 멈추지 않고 어디에 합류되어야 돼요? 의미에 합류되어야지요. 의미라고 하는 것은 소리의 의미. 왜 사도는 남들처럼 살지 못하고 자아 다 잘리고 기계 아닙니까. 소리로만 이 땅에 마지막 때에 소리로만 작동해야 하는가 소리로만 쓰여지는가. 그것은 그 의미가 모든 의미는 말씀이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말씀이 다 가져갔기 때문에 그래요. 말씀이 가져갔거든 말씀이.
지금 마지막 때는 목표는 없어요. 기계이기 때문에 목표에서 어디로 가야 돼요? 의미로 가야 돼요. 그 의미는 누가 독점하고 있다고요? 말씀이 독점하고 있어요. 말씀에 의해서 의미를 퍼트리기 위해서 어떤 해경이 물에 빠져 죽는 일이 벌어진 거예요.


전도서 3장 1-3절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2절 보세요. 날 때 있으면 무슨 때 있다? 죽을 때 있잖아요. 뭐 문제 있어요? 위로를 하면 안돼요. 인간은 위로를 받을 자격이 없어요. 인간은 위로를 받는 것이 아니고 자아가 삭제가 되어서 목표에서 의미로 넘어가줘야 돼요. 목표에서 의미로.   

사무엘상 2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의미는 누가 갖고 있느냐 하면은 어떤 모든 일도 누가 하셨다? 여호와께서 하셨다 그게 의미입니다.

구원은 소리가 되어야 된다. 나 예수님 덕분에 멀쩡하게 되었어 건강하게 되었어 이거는 역시 자아지요. 소리가 아니라고요. 은근한 자기의 목표를 발산한 거예요. 예수님 만나서 나의 병을 고쳤으니까 나는 구원받았다. 이거는 본인의 목적이에요. 본인의 목적이고 목표고 거기에 하나님을 이용한 거예요. 소리가 아니라고요.
소리가 되려면 앞에 항상 붙는 게 있어요. 나는 아니다. 너 인간이야? 나 인간도 아니야. 인간이 아니면 뭐야? 나는 소리야. 나는 성령이 움직이는 그냥 기계다. 그러니까 자아가 없으니까 어떻게 돼요? 분노하는 게 있습니까? 분노? 없지요. 우리 손자가 가는 유치원에 이번 달 멘트가 있어요. 아침에 데려가면 선생님하고 인사하고 학부모한테 이번 달 다짐을 말하는 거예요. 예의 바른 어린이가 되겠습니다. 이게 이번 달이에요. 지난달은 배려하는 어린이가 되겠습니다. 자, 예의가 언제 깨집니까? 분노할 때 깨지지요. 왜 분노하지요? 자아가 있기 때문에. 자아의 어떤 목표가 있기 때문에.

만약 여러분들이 영적 사람이 되가지고 목표는 없고 기계가 무슨 목표가 있습니까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지. 로봇이 목표가 있습니까? 없잖아요. 말씀이 살아있지 인간이 살아있는 게 아니잖아요. 인간은 죽어있고 살아있는 것은 말씀밖에 없어요. 이걸 사도가 전하는 거예요. 그게 종말 현상이에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진짜 주의 말씀을 전하는 소리가 된다면 어떤 혜택이 주어지느냐 하면은 소리한테는 모든 걸 용납해줘요. 모든 걸 용서해주고 모든 걸 용납해줘요. 용납 안되는 게 하나도 없어요. 주님께서 뽑아낼 중요한 것은 소리가 중요하지 너 인간성 인격이 얼마나 훌륭하냐 그런 것은 애초당시 그건 삭제한 거예요. 너 한달 수입이 얼마야? 너 몇 평짜리 아파트 살아? 그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몇 평짜리 아파트 묻지 않는다는 말은 200평짜리 아파트 살아도 상관없다는 말이에요. 살짝 기분 좀 좋아지죠.

주님이 병을 줬다는 말은 네 본래의 모습은 살아야 마땅함이 아니고 반대로 죽어야 마땅함이 네 원해 모습이다. 이걸 알려주기 위해서 병을 준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병 낫기를 목표로 하다가 말씀이 와버리니까 병이 하나의 목표에 소속되는 게 아니고 의미에 소속되지요. 의미에 소속되었으니까 병을 통해서 뭐냐? 나는 애초부터 병 들어야 마땅하고 병 안 들어도 죽고 병 들어도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내 진짜 모습이라는 것을 알지요. 진짜 모습을 알기 때문에 병 낫고 병 안 낫고는 누구 소관으로 넘어갔습니까? 이건 내 소관이 아니고 누구 소관입니까? 주님 소관으로 넘어갔잖아요. 이게 의미잖아요.
주님은 내가 실제야 보이지 않는 내가 실제고 너는 나를 전하는 소리에 불과한 거야. 그러니까 너는 날마다 아니다 아니다를 계속해서 하는 그런 사건의 연발 속에 있어야 한다. 그게 바로 영적환경이에요. 의미의 세계는 아니다만 계속 되는 겁니다.

야곱이 원하는 것을 주께서 주시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야곱에게 심어버리죠. 그것은 바로 건강한 야곱, 하나님을 사랑하는 야곱으로 변하지 않고 야곱이라는 껍질 안에 이스라엘을 심어버려요. 이스라엘을. 그래서 여기서 내린 결론은 성도란 언약의 종입니다. 언약이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가는 거예요. 그 언약의 내용이 뭡니까 물어본다면 신약에 나오지요. 언약의 내용은 아버지에 의해서 죽는 아들의 죽음, 이게 언약입니다. 인간은 죽어도 안 죽어요. 결국은 나중에 지옥 가기 위해서 다 살려냅니다. 그러니까 언약 안에 있는 아들의 죽음, 아버지에 의해서 죽는 아들의 죽음이 같이 먼저 거기에 합류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영원한 지옥에 갑니다.
하나님은 살리시기도 하고 죽이시기도 한다. 이게 바로 나의 죽음과 나의 삶조차도 의미 속에서 포함되지 않고 삭제 당한다. 삭제 당하면 뭐가 되느냐? 하나의 소리가 되고 기계가 되지요. 배알도 없어요 배알도 없어. 내세울 것도 없어요. 몸을 불사를지라도 의미 없어요. 산을 옮길만한 믿음 있더라도 의미 없습니다.
내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대드는 거예요. 그럼 나의 의미는 뭡니까 그걸 근거로 해서 대드는 거예요. 야곱이 얼마나 씨름 잘하는지 이만기보다 더 잘해. 막 붙들고 나의 의미를 돌려달라는 말입니다. 나의 의미를. 도대체 나는 뭡니까. 때를 쓰지요. 너는 아무것도 아니지 뭐. 아무것도 아니기 위해서는 나를 껍데기로 삼고 나를 대체물로 대신하심으로 예수님이 야곱 속에 들어와버리면 되는 거예요.  

영적이라는 말은 언약의 종이라는 말이에요. 그 근거는 창세기 32장, 영적인 존재와 육적인 야곱이 이건 만난 정도가 아니고 한판 씨름을 했잖아요. 그 씨름의 의미를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낮추었다. 씨름 상대가 되도록 그만큼 낮추어서 야곱에게 영과 육의 차이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낮추신 거예요 주께서. 그 취지에 따라서 예수님 이 땅에 오신 거예요. 함부로 대해도 함부로 대함을 감수하고 받아주시는 분. 어느 인간이 태어나서 나 죽어야 된다 그런 인간은 없어요.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죽어 마땅한 죄악 된 요소, 다시 말해서 자아를 사수하기 위해서 모든 것들 이용하고 자아 굳히기에 들어가는 인간을 주께서는 구원하기 위해서 낮추고 낮췄다는 이야기가 빌립보서 나오잖아요.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추었다.

그래서 성경에서 재미나는 일은 아버지에 의해서 죽었던 죽음이 십자가죠. 그런데 현상적으로 사람들 눈에 뭐로 보이느냐 하면은 사람에 의해서 죽었던 예수님이 되요. 그러니까 이 육은 아무리 이해해도 영적으로 넘어올 수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 죽은 거 사람이 죽였어. 그러나 성경은 아버지가 죽였다는 거예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에 의한 죽음이냐 아니면 사람에 의한 죽음이냐? 요한복음 10장에서는 너희들이 나를 죽이는 게 아니고 내가 알아서 죽는다. 이건 또 예수님이 알아서 죽는데.

내가 성경말씀이 이해해서 구원에 성공했다? 안돼요. 그건 안 됩니다. 어느 인간도 성경말씀 이해해서 그 이해로 구원에 성공한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건 뭐냐? 우리의 육의 한계가 창세기 32장을 생각해보세요.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주께 항의하고 주께 대들고 나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나의 가치와 자존심과 명예는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시도 때도 없이 주님 붙들고 싸우고 있는 나의 일상입니다 라고 발견하는 자가 이미 구원받은 자입니다. 아 나는 이 자아가 있기에 내 목표만 챙기고 그걸 내가 존재의 의미라고 착각을 했구나. 따라서 그걸 아는 사람은 주님의 나를 처참하게 파괴하는 자리에 가게 한다 할지라도 그게 바로 예수님 십자가 가신 자리잖아요. 처참하게 파괴했잖아요. 뺨 맞고 옷 벗기고 처참하게 할지라도 주님은 아버지의 아들인 것은 변함이 없지요.

내 자리에 뭐가 들어와야 돼요?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아버지의 뜻이다 라는 말씀이 들어와버리면 이 사람은 병이 나았든 안 나았든 이 사람은 기계가 되고 소리가 되는 거예요. 광야에 외치는 소리가 되죠.

. 요한일서 1장 8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여기서 스스로 속인다. 스스로 속인다는 것은 성령이 와야 '아 평생 동안 나는 나한테 속았구나. 내 자아한테 내가 속았구나' 그걸 성령이 와야 알아요. 성령이 없어버리면, 이 '나'를 깨끗하게 보존하려고 애를 쓸 거예요.

나는 부처나 예수님 그리고 하나님 중에서 내가 누굴 믿느냐 할 때 의도 없이 목적 없이 믿는 건 없어요. 그분을 믿는 이유는 나를 아끼기 때문이에요. 나를 아끼고 보존하고 지키기 위해서 내가 지금보다 더 나은 나를 위해서 나는 하나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나는 부처보다 예수님이 필요하다. 왜? 예수님 십자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성령이 없어도 육이 성경책 보고 육이 얼마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못하느냐 하면은 그런 생각이 이게 나한테 스스로 속아 넘어가는 생각이라는 것을 성령 없이는 알 수가 없어요.

십자가 안에서 주는 능력이 내가 마이크가 돼서 외치면 그 소리를 듣고 지옥 갈 사람은 반대할 거고, 천국 갈 사람 같으면 거기에 반응을 나타낼 거고, 그거는 내 소관 아니죠. 나는 소리로서 스피커로서 할 뿐이고 그 능력은 주님께서 알아서 하시겠죠. 심지어 사도 바울은 나같이 잘린다는 생각을 하고 하라. 그렇게 외쳤다는 거예요. 내가 나한테 복음 전하고 그 복음에 내가 짤릴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고 했다는 거예요. 이 말은 철저하게 모든 일은 주께서 하셨다는 주님의 주권사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죽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나는 죽어 있다. 왜 죽어 있는가? 죄 뿐이니깐요. 그래서 요한일서 1장 8절에 뭐라 돼 있습니까?
내가 나한테 속은 것도 모르고 나 위주로 살아온 이것이 바로 육이었구나. 얼마나 즐겁고 감사하고 기쁩니까? 내가 누군지를 알았으니까.   

이 추상성은 첫 번째는 '사회'에서 와요. 이 사회라 하는 것은 가까운 부모죠. '너는 커서 이렇게 해야 돼. 이건 내 소원이야. 너 때문에 이렇게 밥이나 먹여주고 옷을 입혀준 거야. 다 너한테는 내가 기대하는 바가 있어' 이게 사회 부모로 보는 추상성. 그것들이 애한테 쌓여서 자아를 비추는 거울이 되는 거예요. "너 뭐 될래?" "나는 엄마 소원대로 나는 훌륭한 사람이 되겠어요" 이런 거예요. 지금 그 애가 지금 놓치고 있는 게 뭡니까? 훌륭한 사람 되겠다는 것은 이미 자기 안에 훌륭할 수 있는 씨앗과 잠재력이 본인한테 있다고 여기잖아요. 그게 바로 자기가 자기한테 속아 넘어가는 거예요. 부하게도 하고 가난하게 하는 권한은 누구한테 있다 했습니까? 사무엘상 2장 6절에서. 여호와한테 있죠? 그래서 두 번째 추상성 어디서 오는가? 말씀에서 와요.


말씀은 이 추상성은 이 거울이 이쪽을 공격해버려요.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지? 내가 제일 예쁘지. 그지? 나 잘났지. 그지?" 거울이 "죽을래?" 야곱이 창세기 32장에서 천사와 씨름 했던 것은 그 천사가 자기를 죽이러 온 걸로 여기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자아가 의미 있는 자아가 무의미로 오늘 이 자리에서 완전히 파괴되는 것을 두려워했던 거예요. 지금껏 하나님의 약속대로 내가 살아야 된다고 악착같이 살아왔는데 내가 여기서 내인생 끝내는구나. 나 이렇게 끝낼 수가 없어. 나 악착같이 내가 이 싸움을 내가 이겨서 나를 지키고 싶다.


그것 때문에 야곱은 밤새도록 시험한 거예요. 나중에는 천사가 가려하니까 이번에는 또 반대로 밤새도록 붙들고 또 뭐합니까? 살려주고 가세요. 축복해 살려주고 내 의미를 돌려놓고 가세요. 하나님이 내 의미를 돌려 달라고 합니다. 주께서는 야곱을 죽이고 그 안에다가 이스라엘을 만들어버리죠.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내가 달라는 걸 주지 않고 주께서 주시고자 하는 걸 줬기 때문에 여러분의 모든 인생은 성령받은 여러분의 모든 인생은 여러분 것이 아니고 주의 것입니다. 그걸 가지고 제가 주일날 설교에 뭐라 했냐 '법인카드'라 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평생 살아오면서 모든 비용 앞으로 70, 90, 100 까지 살 때의 모든 비용은 하늘나라에서 다 댑니다.


이 목표가 있는 한 속음이 없죠. 왜? 멀쩡한 목표가 있는데, 왜 속아요? 중도에 포기할 필요가 없어요. 돈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여기 자본주의라는 사회 속에 뭐도 포함 돼요? 종교 포함되겠죠. 말씀 계시 이런 것도 종교에서 다 포함됩니다.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천주교에서 이번 일만 잘 성사된다면 제일 큰 재단을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재단 만들면 어떻게 되는가? 사람들 거기 모일 거다 이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 거의 재단하고 모이면서 '나는 나한테 속았어' 라는 말 생각을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할 필요 없지요. 왜? 성공해서 재단을 했으니까 자기는 성공한 사람이니까. 안 속았지요? 실제적으로 성공을 했으니까 이 사회에서 볼 때 성공을 했으니까 안 속은 거예요.

두 번째, 추상성이 오는데 이게 뭐냐면 영적 세계예요. 영적 세계에서 옵니다. 거울이. 아까 이야기했던 이 거울이 오게 되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창세 32장의 야곱의 경우처럼 너는 너한테 속고 있다. 스스로 죄 없다 하는 자는 속고 있는 자다. 너는 처음부터 죄였어. 네가 뭘 고대하고 뭘 희망하고 기대하든 간에 그것마저 죄였어. 알려주죠. 이 거울이. 이 거울에 오게 되면 이 사람은 내가 거울을 쳐다보는 게 아니고 거울이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게 되면 언약에 의해서 종이 되는 겁니다. 지금 제가 1번하고 2번 나눴잖아요. 2번 영적 세계를 거울로 사용한다 이 점에 대해서 좀 더 한번 그 내용을 살펴봅시다.

신약의 성도는 폼 조차 안 돼요. 내가 나한테 속았다는 것은 마귀한테 속았다는 것은 폼으로 안 됩니다. 그게 성도를 기쁘게 해요. 내가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거예요.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비로소 성도는 다 같이 외칩니다. "성령님이여. 도대체 왜 오셨습니까?" 비로소 기쁨으로 감탄하면서 성령을 언급하는 거예요.

주님이 십자가 지시고 부활한 것. 그거 내가 믿으면 구원받겠다.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걸 알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나에 대해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나를 책망한다는 그 능력이 오지 아니하면 내가 전에 알던 예수님이나 십자가나 부활이 그 부활의 십자가가 아니라는 겁니다. 나의 어설픔과 나의 소급을 당한 것과 결부되어서 나온 십자가일 때 비로소 십자가가 나의 모든 행위에 대해서 이미 용납했다는 거예요. 다 용납한 거예요. 주님께서의 관심사는 내가 무슨 뭘 하든 간에 그걸 하든 그것도 안 하든 의미 없는 거예요.
끝부분인데 난해한 것도 보겠습니다. 빛이 인간 속에 들어오게 되면 여기에 인간에게는 생명이 있어요. 생명이 있는데, 이게 왜 어렵다 한 이유가 빛이 인간 속에 들어오면 이거는 쉽고요. 쉬운데 인간 속에 뭐가 있느냐를 고려를 사람 안 하게 되면 이 말이 뭔 뜻인지 몰라요. 인간 속에 뭐가 있습니까? 어두움이 있어요. 내 속의 어두움을 인간들이 모른다니깐요.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다 뭐밖에 없다? 어두움밖에 없는 거예요. 어두움이고 빛이 왔는데 어두움과 빛의 만남이 무슨 사건입니까? 십자가 피흘림이잖아요.

그래서 요한일서 아까 1장 8절에 뭡니까? 인간은 어둠에서 속아 넘어가는데 그 어둠에서 속아 넘어가는 게 뭐냐? 나는 빛이다. 이게 어둠에 속아 넘어간 거예요. 십자가라는 것은 내가 죽을 뻔해서 살리는 게 아니고 확연하게 우리를 나로 취급하지 않고 어두움의 일부로 취급해서 빛과 어두움을 이렇게 잘라내는 거예요. 그 잘라내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나의 자아를 잘라내는 작업을 한다고요. 누가요? 빛이. 그래서 주님은 내빼듯이 간 거예요. 내빼듯이 사람 손 뿌리치고 혼자서 도망치듯이 이 세상을 빠져나온 겁니다. 어디서 감히 어두움이 빛을 붙잡아요? 붙잡을 수 없죠.

제자들은 예수님을 못 붙들었어요. 무서워서도 못 붙들고. 나중에 요한복음 1장에 보니까 그게 왜 못 붙들는가? 자기 인간 속에 있는 인간을 지배하는 어두움이 못 붙들게 했지요. 또다시 뭐가 와야 돼요? 누가 와야 돼요? 성령이 오셔야 되죠. 또다시. 그래서 모든 기초는 예수님이 다 이루었고 이제는 어떻게 적용하고 혜택을 주느냐는 그 몫은 역시 인간 몫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이렇게 하시면 우리가 제대로 정신 바짝 차리고 정결한 마음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성경 읽으면서 믿습니다. 믿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성령이 와야 돼요. 성령이. 성령이 와서 하는 일은 뭐냐? 네가 너 자아에 대해서 모르는 상태에서 구원을 받고자 하는 모든 짓이 마귀 짓이라는 것을 성령이 와서 알려주는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이 아무리 처참히 망가져도 구원될 수 없고 아무리 몹쓸 병에 걸린다 하더라도 구원될 수 없고 성령이 임해야 비로소 마귀한테 속아 넘어간 우리를 위해서 주께서 대신 희생했다는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이제는 내가 어떻게 되느냐가 아니라 주님의 의미만 담기는 그러한 소리로만 외치는 자유로운 기계로서 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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