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기에 왜 왔는가?"
어제 모인 분들에게 던진 질문이다. 다들 잠시 당황해 하셨다. 요청에 따라 못내 몇 자 적지만, 평가받는 것 같고 또 무슨 시비를 초청하려는 것인지 꿍꿍이가 수상했을 것이다.
고전 1:22에 따르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이방인)은 지혜를 구한다. 유대인과 헬라인이 구하는 표적과 지혜는 사실 그 용도가 매 한가지이다. 구원용이다. '나 구원 받았음!'을 증명하는 것으로서 표적과 지혜를 구한다.
그렇다면 소위 성경모임을 만들거나 참석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왜 구할까? 십자가 복음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의 이러한 움직임은 과연 유대인과 헬라인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우리 역시 유대인과 헬라인과 같은 처지이다. 같은 처지란 이런 의미이다.
1.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는 처지. 아예 깨닫거나 알아차려서 돌이키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몸소 방해하시는 신세(마 13:15, 사 6:9~10)
2. 보인다고 하니 여전히 소경인 처지(요 9:41)
십자가 복음은 생뚱맞다. 표적으로 구원받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지혜로 승부수를 던지는 헬라인에게는 미련하기 때문이다. 표적을 달라고 해서 십자가를 주니까 차마 받을 수없는 끔찍한 것이다. 지혜를 달라고 해서 주니까 미련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왜일까? 십자가는 하나님 아들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표적을 달라는 사람도 죽이고, 지혜를 구하는 사람도 죽여버린다. 그래서 거리끼고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다. 눈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일단 나는 살아남고 나서 표적도 지혜도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나는 건들지 말란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십자가 복음 때문에 모였다는 사람들은 수상하다.
그 수상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정체는 단순하다. 유대인, 헬라인과 함께 우리도 육에 속한 인간일 뿐이다. 내가 구하고 있는 십자가 복음이란 나의 구원용에 지나지 않는다. 대놓고 인정하기는 싫겠지만 내 몸의 세포 하나 하나가 구원을 열망한다. DNA에 기록되어 있는 정보는 단 하나이다.
"너 스스로 구원하라!"
스스로 구원하기 위한 십자가에 대해 설명듣고 싶은 것이다. 바울 서신에 대한 참신한 해석을 통해 나를 팽창시키고 싶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지 않고는 못배기시도록.
역설적인 것은 나를 스스로 구원하려고 찾은 것이 나를 죽이는 십자가라는 점이다. 십자가가 정답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구원이 날아가 버린다.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한 자에게 구원은 해도 너무 한 처분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천국이란 언감생시이기 때문이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게는 지옥이 딱 제자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말로 설명되어지는 십자가의 정체는 무엇인가?
인간의 말로 설명되어지는 십자가는 죄사함 받지 않아도 되는가?
그것도 죄다. 십자가의 그것도 넉넉히 용서하신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다. 인간과 나누기 위한 공유물이 아니다. 철저하게 인간을 죄인으로 발견하게 하시는 탁월한 전략이다. 용서받은 죄를 발견하는 기쁨이 있기에 죽어도 괜찮은 처지.
그러나, 육도 만만치 않다. 계속 죄사함의 피를 분출한다. 이분법과 인과관계라는 창끝으로 성경을 짜집기 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지심만을 알기 원하지 않는다. 내가 이해한 구원용 십자가를 원한다. 이미 이해하고 있는 논리 중에 십자가를 어디에 위치시킬까 고민한다. 그런데 자꾸 나를 죽인다. 나를 찾을 길이 없다. 우리라고 덥썩 물어는데, 그 우리 속에는 내가 없다. 결국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복음은? "어.렵.다!" 사실 복음이 어렵다는 말은 나는 구원받고 싶다는 의미이다.
예수안이라는 말이 내겐 구원용이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에 등장한 "밖"이라는 단어가 충격이었다. 예수안이라는 것만큼은 무너지면 안되었다. 그런데 구원 전과 구원 후가 십자가에 의해 붕괴되듯, 예수안과 밖도 십자가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다.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 밖에 있다가 예수 안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단 말인가? 십자가는 안과 밖을 연결하는 통로가 아니다. 십자가는 통일이다. 전 우주가 예수 안에서 통일되는 것이다. 전우주가 십자가 안에서 통일되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남는다. 그렇다면 예수님 말고는 다른 것이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말고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은 예수 안과 밖이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약속도 언약도 죄도 십자가 앞에서 모두 사라진다. 십자가지신 예수님만 남는다.
예수님은 안과 밖이 따로 없다. 안과 밖은 우리에게만 덫이다. 예수님에게는 구원 전과 구원 후가 없다. 전후 관계는 우리에게만 효과적인 속임수가 된다. 그래서 내가 예수 안에 있소이다라는 것이 성립하지 않게 된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노린다. 사도바울이 예수 밖와 안을 구별하여 기록한 이유는 "죄사함의 피흘림"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이다. 안과 밖에 묶인 채, "나의 예수 안"을 고집하는 육체들에게 안과 밖이라는 공간 개념을 이용하여 찢어진 주님의 몸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이다.
에베소서 2:12~13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안과 밖, 전과 후는 인간이 살아서 판단하는 기본틀이다. 이 틀과 틀 사이를 메우는 것이 인과관계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분법과 인과관계에 매달려 결국 스스로를 구원하고자 복음까지 학습한다.
그런데 십자가 위에서 여전히 담담한 말씀만 들려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 2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