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8/19-남 탓하지 말고,불평하지 말고

아빠와 함께 2025. 8. 19. 09:39

 고린도전서 8장 3절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누구든지’라는 인간은 배후에서 주께서 조성한 사람이죠. ‘없는 데서 새로 만들어진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능력. 악마와의 대결에서 승리했다는 증거물로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뽑아낼 수 있는 T/O를 확보했고, 그 T/O에 준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생성되게 되면 그 생성된 자에 한해서는 ‘누구든지’(everybody)가 돼요.
그래서 ‘누구든지’는 결과적 용어가 돼요. 결과적으로 생성되는, 드러나는 이게 바로 ‘누구든지’가 되죠. 이 ‘누구든지’가 되면 하나님이라는 주체는 기존의 하나님과 차별성을 띄죠. 내가 알던 그 하나님이 아니죠. 따라서 그 뒤에 나오는 이것은 하나님께 속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누구든지’를 만들 권한을 제공하는, 그러한 권한을 갖게 되는 거예요.

이 사랑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준비된 사랑이에요. 준비된 사랑, 이것만 거룩이 되는 겁니다. 왜? ‘거룩’이라는 말은 차별화된 다른 영역에 속한 그 속성을 두고 거룩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사랑이고. 착함과 관계없이 인간은 모르고 하나님이 따로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이 준비한 속성을 ‘누구든지’에게 “쏘세요!” 하고 쏘면 이걸 가지고 ‘은사’ 또는 다른 말로 ‘은혜’라고 합니다.

이 ‘은사’의 특징이 뭐냐? 이것은 단편적이 아니고 영원성, 영원적 속성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한 번 주면 취소가 안 되는 겁니다. 취소가 안 돼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은사를 줘놓고 “네 힘으로 네가 범죄 해서 취소가 되는지 해 봐. 네가 죄지은 것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가 취소되는지 한 번 버텨봐. 해 봐, 그게 되는지!”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다’라는 이 말은 시편 23편 전편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  
목자잖아요. 아무도 초청한 사람이 없어요. 양들은 계속해서 목자의 기능을 위해 모집될 뿐이에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래서 나머지 종속되는 뒤따라오는 모든 기능은 목자의 일방성입니다. 일방성, 일방적인 조치에요.
내가 목자를 선택할 권리가 없고 일방적으로 목자가 양을 선택하는 겁니다. 주체가 바뀌죠.이 사실을 에베소서에서는 ‘창세 전’(엡 1:4)까지 가져가요. 창세 전의 특징이 뭐냐? 누가 없다? 내가 없어요. 내가 없기 때문에 내 의견이 끼어들 여지도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없는 데서 이미 구원은 확정이 되어 버렸어요. 그런데 이걸 실시하기 위해서 주께서 뭘 없앴습니까? 있는 나를 ‘없다’, ‘죽었다’로 전환 시켰죠. 주께서 멀쩡하게 살아있는 나를 없는 존재로, 죽은 존재로 이렇게 바꾸는 이유는 ‘내가 있음’으로 인하여 고린도전서 8장 3절의 이 말씀이 계속 방해받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전혀 모릅니다.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듣습니다. 못 알아듣는데 일은 잘 풀려요. 희한해요. 참 희한해요. 뒷북 치는 식으로 되돌아보게 되면 ‘합력하여 선을 이뤘고 또 합력해서 선을 이루었다.’(롬 8:30) 합력하여 선과 선의 코스가 중지되지 않고 이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가면 갈수록 발견하게 됩니다.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나름대로 자기의 코스, 인생길이 있다고 보는 거예요. 기억이 축적된 인생길이 있다. 그런데 주께서 마중을 나와요.  “넌 인생길을 잘못 살아왔다.”가 아니라 “너는 없다.”가 돼요. ‘네 인생이 아니고 내가 목자 되기 위한 내 양에 관한 일이기 때문에 내 책임하에 너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끊임없이 내 관리하에 있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신 바 된다”라는 그 말씀은 언제 가서 최종적으로 마감이 되어서 진짜 하나님이 아신 바 된 그 앎, 아신 바 되었다는 그 사실에 내가 동참할 수 있는가? 그것은 죽고 난 뒤에 주님의 천국 갈 때 그걸 알게 돼요. ‘아, 이게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고 나를 재료로 해서 말씀이 살아있게 했구나. 주인공이 말씀이지 내가 아니구나.’ 그때 후다닥 자기 받은 면류관을, ‘이런 걸 왜 내가 갖고 있어?’ 후딱 벗어서 누구한테 줍니까? 주님의 일이니까 주님께 반납하는 그 쇼가 마지막 천국 입성할 때 있습니다.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간다”라는 말씀, 로마서 11장 36절의 말씀이 이게 장난이 아니고 그게 곧 현실이라는 사실을 그때 가서 발견하게 됩니다.

이건 하나님에 의해서 말씀대로 생성된 새로운 사람이지 ‘이 사람’이 ‘나’라고 여기에 끼어들 수 없는 ‘이 사람’이에요. 분명히 ‘나’를 재료로 한 건 맞는데 날 재료로 했다고 해서 이 사람이 ‘나’라고 동질성을 유지할 수 없다, 이 말이죠.
그걸 고린도전서에서는 ‘주의 것’이라고 하고요, 그 주의 것에는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나만 들어있는 게 아니고 패티로 들어온 다른 형제도 있어요. 어떤 이는 케첩 어떤 사람은 손, 어떤 사람은 발, 어떤 사람은 눈으로 해서 결국 어느 누가 뭘 했다고 말 못 하는 그 이야기를 해야 한다, 는 그걸 가지고 교회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요.  

3장 5절에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3장 5절 보기 전에 8장 4절로 다시 한번 돌아가 봅시다. 우상 언급하면서 그것과 연관을 시켜야 해요.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그다음에 뭡니까? “아무것도 아니며”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내부에 있는 자기 형상이 바깥으로 드러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우상을 섬기는 것은 그 우상, 그 대상체와 내 속에 보이지 않는 형상과 서로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우상을 섬긴다”  결국 우상은 자기 안에 들어있고 그 우상을 ‘탐심’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탐심의 특징은 단일하다는 거예요.  아담의 형상이기 때문에 모든 탐심은 단일하고 공통점이 있어서 이 사회는 협동이 가능한 겁니다. 다수가 원하는 것이 진리로 취급받는 이 더러운 세상, 각자 있는 탐심이 동일하게 작동하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자가 영웅이 되는 이 세상, 1등만 기억하는 이 더러운 세상, 1등과 2등의 차이점을 발견하는 이 더러운 세상, 사실은 똑같은데  우수한 게 아니고 똑같이 개뿔도 아무것도 아닌데 너와 나의 가치를 차별화시키는 이 세상, 그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가지고, 우상의 단일성을 가지고 집요하게 말씀으로 공격합니다. “똑같은 의식과 사고방식으로 너희는 무장되어 있다, 똑같은 의식. 다르다고 하지 마. 나는 전체를 ‘아담 안’, ‘죄 안’, ‘죽음 안’이라는 동일함으로 너를 다루겠다.”

 
고린도전서 3장 7절 계속 봅시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이는 오직…” ‘오직’ 뭡니까? 자라나게 하는 거죠. becoming, 존재가 아니고,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죠, ‘아무것도 아닌 것 + 생성, 부지런히 활동하시는 분’, 그런데 이 분은 안 보여요. 보이질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히브리서 11장 1절에 의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뭡니까? 리얼리티, 실상이라고 하죠. 그다음에 리얼리티 말고 보이는 것은 뭡니까? 가상이죠. 그 가상 심볼, 상상이라고 합니다. 허상이란 말이죠.

그래서 어떤 학자는 말하죠. ‘인간의 모든 행위 + 언어’는 제스쳐에 불과하다. 욕망을 현실이 받쳐주지 않는데 현실은 말씀대로 되기 때문에 내 욕망을 안 들어줘요. 우리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이유가, 기도 응답을 하지 않는 그것이 사랑인 이유가, 기도하는 자 따로 있고 주님의 응답은 따로 펼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어긋남, 안 맞다는 것이 기도의 응답입니다.
기도를 하셔야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새삼 느끼게 돼요. 그걸 제스쳐라 하지만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몸부림치는 거예요. 자아를 버리기 싫은, 자아를 포기하기 싫은 몸부림, 내가 원하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얻고자 하는 제스쳐, 몸부림치는 이 사회, 그런 인간관계가 곧 이 세상의 관계입니다. 인위적 관계, 자연적 관계가 아니고 ‘자연적 관계 + 인간의 몸부림’ 이렇게 더하면 그걸 문화라고 하고 문명이라고 합니다.

몸부림 쳐보는 거예요. 세상에 나오는 모든 뉴스가 몸부림입니다, ‘자연’은 서울 섭씨 38도, 그다음에 거리에 물 뿌리는 것은 ‘몸부림’. 몸부림과 몸부림 사이의 질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인간이 보여주는 이 몸부림을 이미 사도 바울도 알고 주님이 아시기 때문에 인간 세계가 어떤 식으로든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데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내 몸부림이나 내 기도 응답도 어떤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고 억지를 부리는 그 시도, 고린도전서에서 이미 말씀이 주어졌기에 그게 벌어지고 있었던 거예요.

내가 어떠한 식으로 평소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지’ 그것을 우리 자신이 먼저 알아야 하겠죠?  

인간은 자신의 단일성을 증명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의 단일성, ‘나는 나다.’ 어디서 많이 들었죠? 출애굽기 3장 14절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건데 이미 악마의 형상이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금 모방하고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내가 규정하고 싶어요. 남들이 동의하든 관계없어요. ‘나만 옳으면 그만이야.’ 그걸 가지고 증명, ‘자기 존재 증명’이라고 해요. 여기에 성경 말씀을 합하면 그대로 들어가요. 종교라는 것이 얼마나 악마의 탈을 쓴 것인지가 들통나요. 기독교, 불교 이런 것들의 속내가 다 드러나는 겁니다. 그 점에 대해서 하나 이야기하고 계속 이야기를 끌어가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9장 14-16절,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주라 하매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들이더라 마병대의 수는 이만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그렇게 되어 있죠.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을 믿는 신자라고 주장한다면 요한계시록 9장 14절 이 뒤에 나오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여러분들이 아셔야 해요. 압니까?  

 ‘내가 해석한다’가 아니죠. 해석된 것은 실제 이뤄진 것과 별개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결과적으로 이 말씀이 말씀대로 그대로 꾸준하게 이뤄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이 말씀에 대해서 해석 못 한다고 걱정할 문제가 있습니까? 걱정할 문제가 아니고 “내가 너한테 준 은사를 받기나 해라.” 이러는 거예요. 그러면 ‘말씀 해석’과 반대에 위치한 것이 뭐냐?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너 해석 못 하면 지옥 가는 거야. 지금까지 믿은 거 소용없어.” 이런 식으로 나오다가 맞은편에 뭡니까? 사랑이 나오죠. 이 사랑이 십자가의 사랑이에요. 그러면 해석은 누가 한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서 이 현실을 만들기도, 해석도 하시는 거예요.  이 해석이 며칠 걸립니까? 평생 가죠, 평생 갑니다. 평생을 다 살고 면류관 반납할 때 요한복음 3장 16절에 대한 해석은 누구 담당이냐? 바로 주님께서 이 말씀대로 실시한 결과물로 내가 천국에 오게 된 거예요. 해석을 제대로 해야 합격이 아니고, 우리는 그것을 뭐로 이해합니까? 주님이 해석하는 것을 뭐로 이해한다? 그걸 사랑으로 이해하는 거예요, 사랑으로.

인간은 끊임없이 분류합니다. 분류 작업을 해요. 세밀하게 회 뜨듯이 ‘이것은 착한 일, 이건 나쁜 짓, 이건 개선의 여지가 있는 일, 이건 좀 두고 바르게 하면 이제는 괜찮아지는 것’ 이것을 계속해서 합니다.

분류를 왜 하느냐? 자꾸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내가 누구인지를 계속 파헤치고, 또 파헤치고 그걸 환원주의라고 하는데 끊임없이 파헤치는 거예요. 심지어 어떤 물리학자는 이런 수치를 계산해 냈습니다. ‘2.6×10⁻²²kg’ 이게 놀랍게도 자아의 무게래요. 여러분, 무게를 재도 자아의 무게를 재본 적이 있어요? 프랑스와 이탈리아 학자들이 실험해서 자아의 무게가 ‘2.6×10⁻²²kg’라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말하는 건, 그래서 뭐? 이걸 연구했다. 나이 50에 이걸 연구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게 있어요. 뭐가 째깍째깍, 하고 있습니까? 시간이 흐르죠. 그 시간은 이렇게 연구하는 사람을 어디로 몰아세웁니까? “정녕 죽으리라.”(창 2:17) 자아 연구, 이거 몇 킬로그램, 이런 것 하지 말고, 두뇌 분석하지 말고 근본적으로 이렇게 잘나고 이렇게 살고 싶어서 자기를 증명하는 나를 왜, 왜! 왜 나를 죽이느냐 하는 거예요.
‘왜 죽어야 되는데?’ 정답은 ‘아무것도 아님’이 드러날 때 죽는 것조차 누구의 일이냐 . 적극적으로 주께서 죽여주시는 것은 주께서 살아계셔서 내 일에 개입을 해주니까 주께서 감히, 그냥 버려둬도 되는데 적극적으로 날 죽여주시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드러나니까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냥 주께서 지정한 여러분의 그 위치, 현재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리인 줄 알고 남 탓하지 말고 불평하지 말고 그렇게 하시되 ‘죽는 것도 기적이지만 이 일에 꽂아준 것도 멋진 하나님의 계획에서 나왔다’라고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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