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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함께 2024. 10. 4. 11:39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더불어 함께 계셔요. 사람들은 율법으로 헌금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헌금을 하거든요. 헌금할 때 하나님은 보이는 이 사람을 경유해서 나한테 헌금하라는 거에요. 이 사람을. 이들을 통해서 나한테 헌금하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고아와 과부의 생산 또는 출현은 바로 뭐냐 하면은 출애굽 정신의 유효성을 말하거든요. 출애굽 정신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뜻에서 그 시대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가 계속해서 만들어져요

 

예수님은 이 땅에 일가친척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어요.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가 고아고 내가 과부고 내가 나그네다. 왜 그렇게 하는가? 그래야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되는 쪽으로 이 세상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들추어내고 거기에 대해서 정당한 심판을 행사하기 위해서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가 있어요. 왜 하나님께서 이런 불의를 보고 왜 가만히 있느냐? 왜 하나님께서 가만 두시느냐? 서기관들 목을 치던지 하지 왜 가만 두시느냐. 이 서기관들 못된 사람이 있어야 고아와 과부 나그네가 생성될 게 아니겠습니까. 듣는 고아와 과부 나그네 기분 되게 나쁘지만. 네가 있음으로서 세상 심판할 수 있는 근거 마련이기 때문에 너 좀 참아라. 팔자려니 하고 생각해라. 내가 갚아줄께.문제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가 자기 신세에 대해서 이걸 흔쾌히 하나님의 뜻으로 안 받아들인다는 게 문제에요. 나도 언젠가 떵떵 거리며 살겠다는 그런 의도를 갖고 있는 거예요. 그렇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어요. 가난하다 한마디로 그 당시에 최빈곤층이잖아요. 최빈곤층의 소망은 이것보다 빈곤할 수 없을까? 이걸 소망하지 않아요. 대를 이어서 내 자식은 이렇게 살면 안 된다 이런 거지 자식 불러놓고 자식아 우리 가난하지. 어머니 너무 가난해요. 다 내 덕인 줄 알아라 이것아. 뭐 이렇게 자식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없잖아요. 

 

 출애굽 정신은 이겁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이게 출애굽 정신이에요.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는 것처럼. 출애굽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는 거기서 애굽에서 빠져나올 힘도 없었고 재주도 없었고 단합도 안됐을 뿐더러 애굽에서 나온다는 자체가 인간의 아이디어가 결코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 누가복음 21장에 나오는 그 과부는 내가 헌금하면 마지막 생활되는 것은 이거는 본인의 의지가 아니에요. 출애굽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나는 나의 의지에 의해 사는 게 아니다. 이 정신입니다. 나는 내 뜻에 의해서 살아가는 게 아니다.

 

이걸 달리하면 사는 게 기적이다. 여기 앞에 하나 더 붙이면 더 좋지요. 출애굽 정신 안에서 사는 게 기적이다. 그냥 사는 건 기적이 아니에요. 출애굽 정신 안에서 사는 게 기적이에요. 출애굽 정신이라는 그 위치, 아까 첫째 시간에 위치 이야기했지요. 그 위치 안에서 사는 거예요. 그걸 신약에서는 예수 안에 사는 겁니다. 내가 홀로 살지 않고 예수님의 보호를 받고 용서를 받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사는 게 이게 기적이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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