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창고

관통

아빠와 함께 2024. 9. 25. 19:08

안양20181012a야4장8절(관통)-이 근호

야고보서4장8절, 오늘 강의는 초반에 약간 정신 차려야 돼요. 초반이 많이 난해해요. 8절에 보면,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요 대목이 왜 어려우냐 하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죽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죽어요. 멀찍이 떨어져야 돼요. 멀찍이. 멀찍이 떨어져서 지킬 것은 지키고 순종할 건 순종하면 되는데 너무 가까이 가버리면 구약에는 죽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죽으라는 이야기에요. 죽음이 무서워서 가까이 안 오는 그런 행위는 하지 말라는 거예요. 끝장 보자는 이야기죠. 끝장 보자.

사람이 멀리서 펜팔 할 때는 얼굴을 안 보잖아요. 우리 시대에서는 펜팔 했어요. 그냥 글로 봐가지고 그래서 실패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지만. 글만 보고 얼굴은 안 보고 자기가 혼자 상상하는 거예요. 이런 글 솜씨에 얼마나 멋있을까, 이렇게 하는데 막상 보게 되면 그 다음에는 대 실망이죠. 멀리 있을 때, 안 보일 때는 신을 상상하게 되어있어요. ‘내가 하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흡족케 하실까, 그래, 나는 하나님 만나길 잘했어. 하나님은 늘 은혜를 주셔서...’

제가 얼마 전에 영천 화복이라는 곳에 갔어요. 화복에 가면 우리나라에 초창기 기독교 교회가 있어요. 그 교회를 유적지로 해서 50억을 들여 가지고 경상북도 도지사가 예산으로 해서 옛날 예배당을 그대로 복원을 해놨습니다. 거기 가서 사진도 찍었지요. 남자석 여자석 따로 있어요. 그대로 칸막이로 해서. 칸막이가 있어가지고.

제가 설교단에 올라가봤어요. 남자석, 여자석 해가지고 보이겠는가 싶어서 보니까 다 보여요. 설교단에서는 다 보이는데. 남자와 여자는 서로 못 보게 했습니다. 이 칸막이. 칸막이가 있는 게 좋을까요? 없는 게 좋을까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이 칸막이가 뭐였느냐 하면, 이제부터 상당히 정신 좀 차려야 돼요. 어려워요. 이게 바로 율법이거든요. 칸막이가 율법입니다.

칸막이가 율법이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에 말씀대로 순종을 하게 되면 하나님 보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게 중요하니까, 율법에 보면 뭐로 되어있어요? “O”하면 복이고, ‘NO.’하면 뭐가 됩니까? 저주가 되거든요. 칸막이에 그런 기능이 있다는 겁니다. 칸막이가 웨하스 과자로 생각하신다면 거기서 축복이 스며 나올 가능성도 있고, 저주가 스며 나올 가능성도 있고. 이스라엘은 도망치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율법에 의해서 이미 가두어졌기 때문에 도망칠 수가 없는 입장에 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운명은 ‘도’아니면 ‘모’에요. 축복 아니면 저주, 저주 아니면 축복, 어중간 한 건 용납이 안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데 칸막이 있는 채로 함께 있는 그러한 상당히 난처한 처지에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세상 다른 민족은 하나님이 안 계시지요. 하나님은 안 계시고 자기들끼리 거기서 법을 만들고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살아가지요. 이 자체가 저주가 되고 이스라엘 백성은 이 저주에서 벗어나되 율법이라는 조건하에서 벗어났거든요. 하나님과의 자기의 어떤 칸막이 조건하에.

이 칸막이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가지고 옛 언약이라고 합니다. 옛 언약을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율법이지요.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함께 할 수가 없다. 이거 분명히 해야 돼요. 함께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칸막이를 통해서 애들이 먹는 과자, 웨하스같이 거기서 복이 스며나올지 저주가 스며나올지 그들이 하나님의 이 언약에 대한 취지를 알게 되면 복이 나오고 언약의 취지를 모르게 되면 이방민족과 동일하게 됩니다. 이방민족과.

사람이 이렇게 살다보면 잔소리하고 간섭받는 거 싫어하잖아요. 나, 내 마음대로 살래! 이렇게 하잖아요. 그건 이방민족에게는 늘 상 그래요.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아이고~ 뭐, 이제는 하나님도 귀찮고 집도 아파트도 하나 해놨겠다 이제는 뭐~ 하나님 다 잊어버리고 그냥 내 평소에 하고 싶은 대로 살래.’ 이리 나오면 갑자기 주변에서 농약이 날아온다든지 갑자기 집값이 내려가든지 해가지고 엉망진창이 된다든지 사고가 난다든지 이래가지고 빼도 박도 못하고 저주를 받는 거예요.

이 정도하면 살겠다고 생각했는데 주변에 일어나는 벌어지는 사태가 그냥 언약 없이 못 살도록 사람들을 궁지로 몰아넣는 작용을 주께서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자체가 복이 될 수도 있고 함께 없으면 저주 받는데 다만, 함께 있음으로 말미암아 복고 저주가 어디서부터 결정되느냐는 그 정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민족과 차이 나게 그걸 아는 거예요.

복과 저주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 정도는 알아요. 예레미야에 보면 내일 죽기 때문에 오늘 마음대로 살자. 지 맘대로 사는 그러한 투가 저주받는 투라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그래도 하나님과 함께 있어서 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얻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어려운 게 없어요.

그럼 뭐가 어려우냐 하면 인간은 율법을 못 지킨다는 거예요. 이게 어려워요. 왜냐하면 율법이라 하는 것을 이제부터 한 5분간 정신 차리면 됩니다. 율법은 뭐로 환원되느냐 하면 말로 환원됩니다. 말로 돼요. 말 또는 문자. 하나님의 말이 율법이에요. 방금 제가 누구 말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 율법을 못 지키게 되어있어요. 출제위원이 교무부장이 아니에요. 출제위원이 따로 있다니까요. 그 분이 문제 출제하고 우리보고 맞추라고 했기 때문에. 지키라고 하기 때문에. 출제하신 분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못 지킵니다. 지킬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지킬 수도 없는데 지키라고 이 율법을 줬다. 이건 무슨 뜻이냐 하면, 어렵지만 쉽게 가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민족하고 같은 인간이기에 똑같아요. 어떤 법이 있고, 말이 있고, 법이 있으면 이걸 지키려고 덤벼듭니다. 지켜야지! 십계명 지켜야지! 암~ 지켜야지. 탐내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해야지. 지키려고 덤벼들거든요.

그런데 말씀과 법은 어떠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관통을 해요. 관통. 뚫어버려요. 구멍을 내고 이걸 작대기가지고 차고 들어오는 거예요. 말씀이 우리 속에 차고 들어오면 지키려고 하는 나에게 제일 본질 되는 그 자리에 텅하니 어떤 터널, 구멍이 생겨버립니다. 뻥하니 뚫리지요. 종이로 이렇게 사람 모양을 해놓고 날카로운 작대기가지고 이 종이로 만든 사람을 인형을 한 번 쫙 꿰어보자 말이죠. 쫙 꿰어보면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뭐가 되느냐 하면 죄인이 되면서 죄인 되게 하신 그 기준이 뭐냐 하면 주어진 말씀이 인간을 관통해서 이건 하나의 꼬치가 되지요. 일본요리의 하나의 꼬치가 되지요. 오뎅. 어묵꽂이가 되는 거예요. 어묵꽂이가.

그러니 그동안 우리가 성경 말씀보고 교회에서 성경말씀 지키자고 하는 게 얼마나 잘못된 거예요. 이게 근원적인 사고방식 출발자체가 이게 터무니없이 우리는 잘못 살아온 거예요. 우리는 어떤 신약의 착각이 있었느냐 하면, 신약의 사도바울의 명령이나 성경이 이만큼 두꺼우니까 지키려고 들춰본다 말이죠.

그렇게 되면 이것 안했더니만 내가 몸이 아프잖아. 아~ 이거 했더니만 봐라. 성적 올랐잖아. 계속해서 그 말씀을 그 잔소리는 나보고 순종할 수 있다고 여기고 준 그거라고 생각했지 말씀이 관통한다는 생각은 못하는 거예요. 그러면 관통하는 것과 말씀 지키는 것과 차이점이 뭐냐, 하나님을 멀찍이 떼고 있을 때는 지킨 게 돼요. 하나님을 멀찍이 떼고 있을 때는.

제가 어릴 때 잔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설교 때도 많이 했지만, 우리 할아버지가 취미가 잔소리하는 게 취미기 때문에. 나뿐만 아니고 온 자식들마다 앉아가지고 지긋지긋했어요. 잔소리를 많이 했다 말이죠. 심지어 할아버지는 어느 정도로 잔소리가 심하냐 하면 지금 잠자고 있는데도 와서 불구하고 잔소리를 해요. 자고 있는데. 물론 자는척했지요. 물론 내가 알아챘지요. 자는척해도 잠자는 꼬라지 봐라! 이런 식으로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잔소리고 말씀이라 하는 것은 개체와 개체사이에 떨어져 있을 때나 성립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잔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고 “아이고, 춥겠다. 추운데 홑이불 차면 안 되지.” 덮어주잖아요. 창세기9장의 셈과 야벳이 뒷걸음쳐서 덮어주듯이. 노아의 하체를.

이렇게 덮어줄 때는 이건 지키라는 말이 아니에요. “니가 이래서는 안 돼!” 라고 그걸 사랑으로 덮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의 완성은 뭐라고 합니까? 로마서13장9장에서.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뭐 하지 마라, 뭐 하지 마라, 마라, 마라, 하지만 모든 완성은 뭐냐 하면 사랑이라. 구약의 노아의 언약으로 본다면 덮어주는 거예요. 율법으로 덮어준다는 말은 뭐냐, 지키라는 말이 아니고 율법으로 우리의 몸을 관통해버리는 겁니다. 이게 로마서3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율법으로 우리에게 뭘 덮어주느냐 하면 애초부터 니는 아담의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내가 준 율법은 너는 지킬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로 우리를 덮어줘요. 쉽게 말해서 지키지 말라는 뜻이에요. 지키지 말라는 겁니다. 마귀는 지키라고 하겠지요. 주님은 지키지 말라. 다만, 조건은 뭐냐 그냥 안 지켜버리면 만약에 어머니가 밤중에 이불로 덮어줬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났다. 어머니는 저기 계시고 나는 여기 있어서 또 역시 개체가 떨어져 있잖아요.

그러나 주님께서 관통하시는 이 율법은 율법 자체의 이 작대기 안에 스스로 이게 발열해요. 완성을 향하여 율법 자체가 자진해서 완성의 레벨을 여기서 만들어냅니다. 오뎅꼬지처럼 관통해놓고 관통한 상태에서 율법이 품고 있는 그 최종의 완성을 사랑이라 하는 건데 완성을 여기서 하나님께서 실시를 해버립니다.

실시를 해버리면 뚫고 왔다. 옛 언약, 완성했다, 새 언약. 옛 언약 + 새 언약이 우리 몸이라는 것을 하나의 시료. 실험의 시료로 두고서 율법의 저주가 무엇인지, 그리고 저주를 율법을 스스로 극복해서 어떻게 사랑으로 그걸 완성해내는지 둘 다를 한꺼번에 보여주는 하나의 과정을 통해서 보여주는 자기 증인으로 삼는 거예요. 나중에 한 분 오시면 다시 이야기하겠는데 이 이야기가 들어보면 어려운 거 없는데 왜 자꾸 어렵다 하느냐 어느 대목이 어렵냐 하면 이 대목이 어려워요.

방금 한 것은 문장으로 적으면 어려운 것을 알 수 있어요. ‘말이 시작되므로 죄가 시작된다.’ 말이 또는 말씀이 또는 법이 말이 시작됨으로서 뭐가 시작되는가, 죄가 시작되는 거예요. 이걸 감수해야 돼요. 이걸 받아들여야 돼요. 말이 말씀이 율법이 시작되는 곳에 없는 죄가 더욱더 개시가 되는 겁니다. 시작되는 겁니다.

이걸 누가 싫어하느냐 하면 바로 악마에게 매여 있는 사로잡혀 있는 인간들이 바로 이 죄에 대해서 아주 예민한 반응을 아주 극렬한 반응을 저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악마는 뭘 집어넣느냐 하면 선과 악의 기준을 집어넣었거든요. 선과 악의 기준을 집어넣어놓고 외부에서 말씀의 활동 말고 니 내부에 선과 악을 니가 스스로 결정하라고 하는 겁니다.

스스로 결정해서, 스스로 결정하게 되면 인간은 악을 싫어하고 선을 좋아합니다. 악을 싫어하고 선을 좋아하기 때문에 인간의 삶이라 하는 것은 피폐해지기 시작하고 그 다음부터는 스트레스 또는 정신병자로 되어가는 거예요. 악에 대한 책임을 져야 된다는 거예요. 누구한테 책임지는 것도 없어요. 하여튼 절에 가든 교회 안 나가던 관계없이 인간은 악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합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 안 나간다고 신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자기 내부에 이미 하나님만 알고 있는 선악과를 악마가 하나님만 아는 데서 덜렁 들어가지고 그 요소를 들어가지고 선악과나무를 악마가 인간 내부에다가 집어넣은 거예요. 피조물인 인간이면서도 뭘 감당해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만이 아시는 선악을 감당하려니 이 평생에 이런 수모가 어디 있어요.

나는 하나님 안 믿는다. 예수 안 믿는다. 아무리 큰 소리쳐도 술 먹고 비틀거리면서 들어와서 마누라~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그게. 내가 지금 내 행동 봐도 약간 좀 이건 선한 모습이 아니다 하는 것을 본인이 안다는 것이 본인의 트라우마가 되는 거예요. 인간은. 모든 행동이 다 그래요. 아무리 악해도 극단의 악을 즐겁게 할 수 없다는 그것이 인간의 괴로움이에요. 그러면서도 악을 알면서 누가 하느냐, 악이 새로운 자극제가 되고 악이 새로운 쾌감을 준비해 놓은 것처럼 여깁니다. 극단적인 쾌락을 향하여 악 쪽으로 갑니다. 가놓고는 또 후회하지요. 울면서 후회하네. 나오는 유명한 노래. 울면서 후회하는 거예요. 울면서. 후회 안하는 인간 나와 보라고 그래요.

처음에는 큰 소리 치다가도 술 한 잔 들어가면 전부다 여보, 마누라! 미안해. 해놓고 뭐 잘못 했는 줄도 모르고 미안해가지고 아침 눈 깨면 또 해장국 끓여줘 하고. 남자들 술 먹고 와가지고 자는 아들 입에 뺨에 뽀뽀하고 자는 아들 다 깨워놓고, 지는 기분 좋아 싱글벙글 웃으면서 오늘 한 잔 했다. 누가 하라 했어. 지가 비틀거리면서 하는 그 몰골 보면 지가 스스로 양심에 가책이 된다 이 말입니다. 이런 모습 보여줘서 미안하다 그런 뜻이거든요. 미안하면 그런 짓 안하면 될 거 아닙니까. 아니에요.

마귀가 그걸 가만 둡니까. 더 인생을 즐겁게 살기위해서 해놓고 돌아서서 또 울고 후회하고. 후회와 슬픔과 걱정 근심으로 계속 점철되는 인생, 이게 뭐냐 하면 인간 속에 악마가 선과 악을 서로 합치될 수 없는 걸 집어넣어가지고 완전히 내부가 엉망진창으로 비비꼬이는 거예요.

말이 시작됐다는 말은 이제 이해하기 쉬울 거예요. 죄가 시작됐다는 말은 앞에 뭘 집어넣어요. 가만히 있어라. 니가 죄인된 것에 대해서 지금 정상적으로 청구하고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가만히 있어. 하나님 말씀 자체가 죄인 되게 하는 거니까 나를 훌륭하게 만드는 게 아니에요. 그건 기존 교회에서 다 그렇게 마귀 자식들이 그렇게 가르치고.

말이 시작됐다는 말은 죄가 되게 하는 이 작업에 나섰다는 자체가 니 행운이야! 이런 뜻이에요. 니가. 왜냐하면 뭘 해도 죄기 때문에 내가 내 인생에 대해서 손을 놓을 수 있는 찬스가 온 거예요. 어차피 죄니까. 나에 대해서 그냥 손을 놓으란 말이죠. 그냥 막 사는 거예요. 짬뽕 먹던지 뭘 먹던지. 삼계탕 먹던지. 그냥 아무 의미가 없다니까요. 그게.

뭐를 선택하든 간에 축복과 저주는 우리는 상관없어요. 왜? 우리를 뚫어 논 그 율법이 축복과 저주를 발휘하는데 결국은 그 저주와 축복이라는 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무엇이 저주며, 무엇이 축복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 몸을 관통해서 스스로 활동을 하시거든요. 스스로 활동한다고요.

그러면 죄가 시작됐으니까 죄가 많아질 게 아니겠습니까? 성경 안 보면 괜찮은 사람인데 성경 보는 순간 어느 구절하나 지킬 수 없다는 걸 알지요. 원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제비를 뽑는 것은 매 순간 선택하는 것은 우리가 할 짓이지만, 일의 작정은 누구다? 여호와가 작정하지요.

이걸 보면서 대번에 무슨 생각 듭니까? 그러면 작정한 게 있다면 우리보고 이 아슬한 선택을 강요했느냐 말이지요. 주님께서 주신 취지를 나의 취지로 번뜩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요. 우리가. 굉장히 힘들다고요. 모든 매사가 그래요. 하나님 자기 좋아라고 만든 책이에요.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는 항상 가시덤불 같은 느낌이 들어요. 오늘도 이거 어긴 게 아닌가. 이렇게 할 때 기도한 번 하고 일을 또 벌여야 되는가. 모든 성경을 지키려하니까 이거 채이고 저거 채이고 이거 자빠지고 저거 넘어지고 이건 또 안했다고 요번 주 고생시키는 건 아닌가. 자꾸 걱정, 염려 온다 말이죠.

우리 인간 자체가 잘못됐기 때문에 거기서 굉장히 우리가 아슬아슬해요. 그래서 그게 믿음이 없는 거고,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일의 시작을 하나님이 말을 출제를 주님이 출제를 한 거예요. 우리가 문제 내고 우리가 지킨 적 없어요. 시작하신 분이 죄 되게 하신 거예요. 우리보고 죄인 되게 하셨다 말이죠. 죄인 되게 하셨다면 율법 못 지키면 뭐가 나옵니까? 저주 나오지요. 그 저주를 그냥 받아들이자 이 말이죠. 살아가는 것도 저주라. 아무리 착하게 해도 그게 저주다.

한 번 적어볼게요. 이 말이 얼마나 기분 좋은 말인지. 평소에 안 해보겠지만. ‘뭘 해도 나는 저주다.’ 라는 요 문장. 요 문장이 율법에 합치되는 문장입니다. 내 능력으로서는 이 고백이 안 나오게 되어있어요. “나는 저주 받는 게 싫어!” 이게 우리의 본성이에요. 모든 게 만사형통해야지. 교회 가려하는 이유가 만사형통하러 가지 나는 뭘 해도 저주받게 되어있어. 이거 고백하려고 교회 안 갔습니다. 하는 게 우리의 강렬한 반발이거든요.

그런데 이 율법가지고 확 쑤셔버리면 뭘 해도 저주다. 할 때 이게 뭐냐 하면 내가 하고 싶은 말과 원래 율법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런 차이가 있음을 그 차이를 우리가 감지하게 됩니다. 뭘 해도 저주다. 하는 게 로마서3장이야기입니다. 두 번 이야기합니다. 찾아봅시다. 로마서3장19절,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율법으로 하여금 의롭다 할 사람 없고 율법으로 이미 온 사람은 율법을 어기면 저주아래 있어요. 저주아래 있다는 걸 알게 하려 함이라. 라는 것이 로마서3장19절에 나오잖아요. 전에는 뭐냐 하면 로마서3장 성경책에만 이렇게 얌잖게 앉아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활동하면서 내 입을 통해서 나온다는 것은 이 문자가 이 말씀이 나를 구멍을 내고 구멍 낸 상태에서 우리 입을 통해서 아주 다행스럽다는 식으로 세상에 내가 이런 고백을 다 할 수 있다니 감격스러운 마음으로서 “나, 뭘 해도 저주야.” 그리 하는 겁니다.

이걸 그대로 결혼식에 하게 되면, 결혼식 하객들 다 저주받은 사람들이에요. 신랑, 신부 저주 받고 주례한 사람 저주받았습니다. 주례자가 아주 웃으면서 이야기해요. “오늘 이렇게 저주 받은 식을 하게 되어서 상당히 취지가 좋습니다. 애기 낳으면 애기도 저주받을 거예요.” 주례 끝. 이게 상상이 안 되지요. 그것도 웃으면서 아주 다행스럽다는 식으로 어찌! 어찌! 이걸 알았을까 하는 그런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이게 바로 프리덤 자유입니다.

이걸 남한테 떠들 필요 없어요. 미친 사람 취급받으니까. 아~ 언제 내가 성경 말씀을 내 입에서 그것도 기쁨으로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이렇게 문자로 박혀있는 말씀인데 입에서 삶을 통해서 나올 수 있을까요. 상상도 못하지요. 요번에 수련회 교재에 보면 거기에 대중가요 가사 2개 올려놨지요. 언제 한 번 가슴을 열고 소리쳐 남자라는 이유 때문에 언제 그 긴 세월을 언제 한 번 이렇게 터트려보고 싶은 거예요. 나 저주 받았어. 태어날 때부터. 우리 엄마 저주받고 저주받은 그 부모 밑에서 저주 받았어. 아~ 임금님 귀는 무슨 귀? 당나귀라는 이 이야기를 도대체..., 전부 다 쉬쉬했는데 한 번 터트려 보고 싶은 거예요. 로마서3장19절을. 이게 내가 어떻게 구원 받느냐가 아니라 주의 증인이에요. 말씀의 증인되는 거예요. 언약의 증인되는 겁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면 죽어요. 그러니까 죽으라고 가까이 오라는 거예요. 니가 니 고유의 가치와 의미와 니 잘남을 유지하게 되면 이건 멀찍한 관계에요. 멀어지게 되면 펜팔 하는 것 밖에 안 됩니다. 하나님, 오늘도 이런 예배를 드렸고, 오늘은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이건 펜팔이에요. 그냥.

하나님이 누군지도 몰라요. 그리고 그렇게 기도 열심히 해놓고 기도한 자기 자신을 다시 되돌아 와가지고 자기를 대견스럽게 여기고 이렇게 기도를 해가지고 사전에 재수 없는 짓거리를 전부다 사전에 다 카바를 했으니 다음 주에 수능이 있는데 점수 잘 나오겠지. 사전에 자기가 자기를 카바하기 위해서 온갖 몸부림을 치는데 그래봤자 그것은 악이 주는 그 딜레마를 못 벗어나요. 그 스트레스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이게 더 해야지. 그래서 되겠어? 더 열심히 해야지. 라는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거예요. 강의 다시!

다시해도 몰라요. 뭘 했는지 몰라요. 야고보서4장 8절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구약에서는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가까이하면 죽어요. 가까이하면 죽거든요.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죽습니다. 아마 이건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는데. 왜 죽습니까? 라는 이유를 제시되어야 되지요. 그냥 “여러분! 가까이 하면 죽습니다.” 하지 말고 “왜 죽습니까?” 라고 해야 돼요. 왜 죽습니까?

왜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죽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칸막이가 있는데 그 칸막이가 율법이고 율법을 하나로 옮기면 어떻게 돼요? 여기서 뭡니까? 저주가 주어지는 거예요. 구약에서 가까이하면 죽는다는 말은 특히 신명기5장에서는 불이라 했거든요. 죽는다는 말은 니는 너를 모르지만, 나 하나님은 너를 알기 때문에 가까이 오면 죽는 거예요.

그럼 멀찍이 하면 살 수 있지 않겠는가. 멀찍이 하게 되면 무엇이 눈에 들어오느냐 하면, 율법이 스스로 어떤 결과물을 낸다는 사실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율법이. 가까이 온 인간 대신에 인간이 그냥 가면 안 되겠지요. 여기서 어린 양이라든지 염소나 소를 가지고 오겠지요. 소를 갖고 오는데 소가 하나님 계시는 성막입니다. 하나님 계시는 가까이 가면 그냥 산채로 그냥 갈 수 있습니까? 죽은 채로 가까이 가요. 피를 내야 하니까 죽은 채로 가지요.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께 가까이 왔을 때에 완전히 나오는 그 결과를 소와 양이 제물이 먼저 희생타로 되어가지고 주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아주 명확하게 보여주는 거예요. ‘아~ 저렇게 무섭구나!’ 하나님이. ‘저렇게 겁나는 분이구나!’ 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아휴, 우리는 저주받아 마땅하네.” 라는 고백이 나올 때 그 저주가 뭐로 바뀌느냐 하면 바로 이 희생물의 덕분으로 이게 축복으로 바뀌는 거예요. 축복으로.

가까이 하는데 가까이 와보니까 하나님과 악수 먹을 상대는 아니고, 하나님이 이렇게 생겼다 하는 것도 아니에요. 이게 출애굽기32장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모세가 가까이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얼굴을 돌려버렸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얼굴은 다시 돌리지 마시고 바로 보여주면 되지 않느냐.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주는 장치가 있어요. 그 장치가 뭐냐 하면 바로 법궤라는 겁니다. 법궤 위가 하나님의 얼굴이 나타나는 장소에요. 법궤 위가.

그 법궤 위는 그냥은 안 되고 하나님께서 피 흘린 희생제물의 그 얼굴이 뭐냐 하면 하나님 얼굴이에요. 장차 오실 하나님의 얼굴이거든요. 진짜 하나님이 왔을 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범벅이 됐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얼굴이에요.

우리가 상상하는 신은 뭐냐 하면 이걸 무슨 신이라 하느냐 하면 지고의 신이라 합니다. 아주 높고, 높고 너무나 높고 거룩해서 우리가 상상할 이상의 거룩인데 그분이 하나님 쪽에 가까이 오게 되면 그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은 조금도 죽이지 않고 조금도 유지되면서 가까이, 가까이 인간 속에 왔는데 그 인간에 의해서 핍박받는 오히려 인간 쪽에서 외면할 흉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 분. 그게 바로 지고의 신입니다.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인간이 이런 하나님인줄 모르고 지고의 신 가지고 상상의 나래를 펴지요. 마귀한테 속은 거예요. 그것은. 마귀한테 속은 겁니다. “천국 있는 거 봤냐? 지옥 있는 거 봤어?” 안 믿는 가족이나 친구들이 시비 걸지요. 하나님이 얼굴을 보여줬다니까요. 가봐서가 아니라 지옥이 왔고 천국이 온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에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했지요. 그 처절한 모습으로, 그게 바로 지옥이에요. 그리고 사흘 만에 깔끔하게 무덤이 깨끗하게 청소됐지요. 요양사가 왔다갔나 깨끗하게 옷까지 개어놓고 주님이 다리 꼬고 앉아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앉아계시고 무덤이 없지요. 시체가 없지요. 그게 부활이거든요. 나타나서 문 열지도 않았는데 오셔가지고 나 만져봐라. 이게 부활이잖아요.

그러니까 천국, 지옥을 상상하지 마세요. 아버지께 버림받는 그 십자가의 모습이 지옥이고 사흘 만에 부활한 모습이 천국이에요. 안 믿는 사람은 “내가 천국, 지옥 보여주면 갈게. 꿈에 보여주면 갈게.” 자꾸 이렇게 자기 식대로 하는데, 사실은 그들이 그런 식으로 할 때, 우리는 입도 뻥긋 못하고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는 말도 우리가 평소에 교회 다니면서도 우리도 그런 질문이 왔을 때 당장 뭐라고 답변해야 될지를 답변할 준비가 안 된 상태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도 가봐야 알지. 뭐 이런 조로 전혀 신앙의 기초도 없고 상상의 나래를 펴서 뭐 가보면 좋은 일이 있겠지. 하는 식으로 그렇게 신앙생활하지 않았는지 반성해야 돼요. 그런 사람을 통해서.

사도바울이 십자가 눈앞에 보인다는 말을 왜 했을까요? 인간이 너무나 상상에 상상을 심하게 해요. 너무 심하게 해서 그렇게 상상할 필요 없어. 하나님 내가 찾아갈게. 찾아갔는데 아무도 못 알아봤어요. 심지어 12제자도 못 알아봤어요. 잠시 보였지요. 변화산에서. 변화산에서 보면 뭐합니까? 그 때는 가까이 간 게 아니고.

다시 합니다. 강의를. 하나님이 계시고 인간 알 때, 인간이 하나님을 아무리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도 이건 이미 멀찍이 입니다. 이렇게 관계가 뚝 떨어져있어요. 떨어져있으면 인간은 하나의 개체가 되고 하나님도 하나의 개체가 되어버려요. 합치가 안 된다고요.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은 어떻습니까? 율법은 우리보고 하나의 관통하는 꼬챙이라 했지요.

이스라엘 백성을 아까 이렇게 해놓고 여기다가 어묵꼬지처럼 뚫어보니까 어떻습니까? 율법이 우리가 지키는 게 아니고 그냥 창으로 뚫어버린 거예요. 이걸. 뚫은 우리는 중앙에 뻥하니 구멍이 뚫리면서 이게 율법에서 관통됐지요. 관통된 이 사람들이 바로 이스라엘이에요. 그들은 구원받으려고 율법을 준 게 아니고 율법의 저주가 무엇이며 율법의 축복이 무언가를 이 사람들을 이렇게 오뎅꼬지처럼 뚫어가지고 다른 이방민족에게 하나님께서 자랑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 언약이거든요. 언약. 노아가 술 먹고 하체를 드러냈을 때에 그 축복받은 아들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뒷걸음쳐서 하체를 덮어줬지요. 그 때는 율법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율법 없었어요. 율법 없었는데 어떻게 축복이 되고, 어떻게 저주가 되지요?

축복과 저주는 우리가 알기에는 십계명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그 여부인데 모세가 율법을 받기 전에 이미 셈과 야벳은 복을 받고, 함과 자기 아들 가나안은 저주받았잖아요. 그 기준이 뭐냐 말이지요. 그 기준이. 노아의 부끄러움을 덮어주는 거잖아요.

그것이 뭐냐, 언약의 완성입니다. 율법을 이렇게 뚫어놓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줘놓고 칸막이 줘놓고 그 인간이 갖다 바친 것은 완전히 여기서 처참하게 재물이 파괴돼요. 파괴되고 피 흘리고 난리도 아니라. 사실은 예를 들어서 탈곡기나, 고기 파는데 가보면 으깨는 거 있지요. 보기만 해도 겁나요. 고기 완전히 으깨가지고 할 때 만약에 거기에 내 손가락 집어넣었다고 해보세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요.

바로 그 기계가지고 하나님과 우리를 만나는 거예요. 신약에서는 그게 십자가고. 십자가라는 기계에다가 니 한 번 들어가 볼래? 하는 거예요. 어디에? 아니라예. 경상도 말로 그렇다 말이죠.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어디에 아니에요. where 이런 뜻은 아닙니다. 그 장치가 이스라엘 내내있는 거예요. 이스라엘 내내. 대신 죽었다는 게 복이라는 뜻이에요. 대신 죽어서 흘린 그 피가 하나님의 얼굴을 덮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저주가 뭐로 바뀌었어요? 복으로 바뀌는 겁니다. 저주를 저주되게 충분히 인지시키고 그 다음에 저주에서 복으로 바뀌는 것은 니가 손 떼라는 겁니다. 율법을 지키라고 준 게 아니에요. 저주를 더욱 더 저주되게. 율법을 준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그것만 어긴 것이 아니고 아주 관통을 했다니까요. 관통을 한 순간 우리는 뭘 해도 한 평생 뭐가 됩니까? 죄인이 되는 그러한 자유함. 뭘 해도 죄라는 것. 더 이상 악이나 죄에 쫓길 이유가 있다? 없다? 그러지 마세요. 쫓겨도 죄고 안 쫓겨도 죄인데, 아이고~ 죄가 막 따라오는구나! 사탄아 물러가라. 사탄이고 사탕이고 간에. 지가 가만히 앉아있어도 죄인데 뭘 사탕이고 사탄이고 있어요?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율법을 거론해놓고 로마서13장에 보면,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죽 10계명 언급했잖아요. 이걸 왜 언급하느냐 하면 이미 사람들이 여기에 주눅 들어있는 거예요. 주님이 하신 십자가는 완전히 개 무시 해버리고 구약하고 사고방식이 똑같아요. “주여, 말씀만 하옵소서.” 자기가 멀찍이 신을 상상의 지고의 신으로 상상하니까 저는 여기에 있으니까 말씀만 이렇게 솔솔 뿌려주면 지켜나가면 복 받고 못 지키면 알아서 벌서고 이러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것을 주님께서는 아예 여기다가 집어넣는 겁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율법이 사랑으로 바뀌었다는 겁니다. 이게 나오잖아요.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 사랑으로 덮였는데, 그러면 이렇게 하면 또 여러분이 생각하기를 아~ 내가 여기 있고 주님이 여기에 있으니까 우리를 사랑으로 사랑하거나, 사랑 받으면 되겠구나! 만약에 삐져서 안 받으면 나는 지옥가고, 사랑받으면 천당 가고 이리 생각하지요. 지금 멀찍이 떨어진 게 아니고 사랑은 뭐라고 했습니까? 덮어주는 거죠.

내가 잠자고 있을 때 우리 할아버지는 “이 잠자는 꼬라지하고는” 지적질하지만 사실은 우리 어머니가 덮어 준 게 아니고 우리 할머니가 덮어줬어요. 우리 할아버지와 상극관계에요. 에이구 내 손자 춥겠다. 하고 할머니가 덮어줬다 말이죠. 여성성이 우리를 구원한다. 사랑의 담요가 덮어줄 때 이게 피가 묻어있어요. 피는 뭐냐 하면 내가 100점 맞았다는 거예요. 교무과장이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농땡이라도 전교1등이에요. 전교1등했어요. 전교1등.

숙명여고 쌍둥이 애들이 성적이 사건이 일어나가지고 온 천하에 전 세계에 전 우주에 다 알려졌어요. 한 애는 121등이고, 하나는 60 몇 등이에요. 그 애들이 1등이 된 겁니다. 바로 얼마나 복음적이에요. 보세요. 교회 50년 다닌 사람은 32등, 교회 초자는 176등, 교회 다녀도 소용없어요. 주님이 1등 만들었다니까요. 왜냐하면 십자가의 기능이 피를 냄으로서 하나님의 진노의 그 모든 것을 주께서 사랑으로 덮어준 겁니다.

방금 사랑의 담요로 덮어줬다고 말했는데, 사랑의 담요도 좋지만 구약적 장치로 말하면 덮어준 것보다도 차라리 관통이 더 좋아요. 아예 우리가 이리 있는데 덮어주면 우리의 죄가 안 보이잖아요. 관통해버리면 관통해가지고 실내축구 보셨지요. 꿰어가지고 움직이는 거. 쇠꼬챙이 꿰어가지고 선수들 인형 만들어서 하는 거 있잖아요. 우리는 인형이라면 사랑으로 꿰어져있어요. 그래서 주님의 희생은 개인용이 아니고 집단용입니다. 개인구원은 없어요. 본인의 실력으로 1등 된 거 아니거든요. 그 쌍둥이 딸들이. 개인의 솜씨나 기능 이것을 주님께서는 점수를 안 줍니다.

고린도전서3장에 나오는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물  주는 사람도 있고, 씨 뿌리는 자도 있지만, 백날 씨 뿌리고 물주고 해도 자라게 하시는 것은 주님 맘 대로에요. 관통해서 사랑의 증인으로 하는 거예요. 관통이 좋아요. 왜 관통이 좋으냐 하면 관통하게 되면 살아있는 우리는 뭐가 됩니까? 육이요, 죄인이요, 막사는 존재로 그토록 부각되는 겁니다. 주님이 살아있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껏 망가져도 괜찮은 거예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증인되는 거예요.

완벽함이 아니고, 철저함이 아니고 이 사랑 때문에 우리는 왜 주님께서 피 흘려야 되는가를 우리의 행동거지를 통해서 마음대로 보여주는 거예요. 나 이것밖에 안된다고. 그걸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어야 돼요. 제가 이렇게 하면 여러분들이 “그럼 우리가 뭘 해야 됩니까?” 라고 이야기 할 거예요. 그럼 우리는 앞으로 뭘 해야 됩니까? 이게 첫 번 째 난해하고 두 번째 난해한 게 바로 그걸 답변하는 거예요.

뭘 해야 되는가가 뭐냐 하면 우리가 사실은 할 게 없어요. 왜 그러느냐하면 에스더6장1절 누가 찾아보세요. “그 날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령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 지금 모르드개가 체포되어있어요. 곧 죽을 참입니다. 그런데 사로잡힌 유대인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아까 질문이 뭐냐 하면 “그럼 목사님, 우리는 앞으로 뭘 하면 됩니까?” 우리 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 할 게 아무것도 없다고요. 우리가 뭘 한다고 해서 사태가 달라지는 게 없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에스더6장1절에 보니까 밤에 왕이 잠이 안와가지고, 잠이 안 올 줄 우리가 어떻게 알았어요. 모르드개가. 일기장을 보다가 자기에게 이렇게 위기에서 벗어나게 한 그 충신한 자가 누구냐? 이리 된 겁니다. 그게 바로 지금 하만에 의해서 잡혀있는 모르드개가 바로 왕의 목숨을 구한 위인이 된 거예요. 그렇게 되니까 바깥에 누가 있느냐 하면 하만이 있는 거예요. 하만은 모르드개가 미워서 죽이려고 하는데. 여기서 이런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어요.

자, 그렇다면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왜 잠이 오지 않았지요? 누가 그렇게 했지요? 하나님이 그렇게 한 거예요. 이 세상은 우리가 손댈게 없어요. 뭐 발걸음을 세는 거, 어떤 거 하나 하나님이 개입 안 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다 개입했어요. 짬뽕 먹으려다 여기에 국물 튀는 것까지. 전부 다 주님이 다 개입한 거예요.

성경의 에스더6장1절을 믿으신다면, “앞으로 뭘 할게요.” 가 아니라 지난날 내가 이 순간 살아오면서 주님이 1분1초라도 주님이 활동 안 한 적이 없음을 우리가 알아야 돼요. 어떤 경우라도. 주님께서 그렇게 하고 온 겁니다. 자기 백성 철저하게 자기백성 자기가 챙기거든요.

얼마 전에 신성일 죽었잖아요. 대구사람이거든요. 경북고등학교 나왔어요. 얼마나 경북고등학교가 머리가 좋아요. 우리나라에서 일류인데. 그러니까 자기 몸 관리 철저하게 한 겁니다. 해롭다하는 것은 다 끊었어요. 그런데 한 가지 안 끊은 것 때문에 죽었습니다. 이건 신성일 죽음의 비사인데, 특별히 여러분에게 알려드립니다. 뭐를 끊어야 되느냐, 이걸 끊어야 했어요. ‘효심’ 이걸 끊어야 했어요. 술, 담배 끊는 건 좋은데 이걸 끊었어야 했어요.

영천에다가 한옥지어가지고 거기서 뭐했느냐 하면 교회도 안 나가고 절에도 안가고 이리 하니까 그냥 지 종교거든요. 자기가 지 잘났다 그 종교다 말이죠. 부모 효심 한다고 거기에다가 자기 나름대로 돌아가신 양쪽 부모 처음에는 아버지 하다가 어머니까지 사당을 만들어 놓고 매일아침으로 뭘 했느냐 하면 향불을 피웠어요. 향불이 폐암된 겁니다. 거기다가 자기 아버지가 폐암으로 죽었거든요. 아버지 DNA로 나를 이 땅에 낳으신 거예요. 정철의 시조를 바꿔야 돼요. 아버지가 날 낳으시고, DNA가 날 낳으시고. DNA가 날 기르시니 이렇게 되어야 돼요.

폐암 DNA가 있는데 그 DNA에다가 향불을 매일같이 그걸 처음에는 한 짝하다가 나중에는 두 짝하니까 폐암 걸린 거예요. 문제는 효심이 없어야 돼요. 이 효심이 문제라.

자, 아버지, 어머니를 왜 이렇게 했을까요? 아까 강의했습니다. 인간은 악마가 뭐였다? 선악을 집어넣었지요. 선악을 집어넣었으니까 자기 하는 인생 알잖아요. 여자 아나운서도 좋아해가지고 바람피운 거부터 해가지고 그 뿐이겠습니까. 수십 명 될 걸. 엄앵란이가 얼마나 속 타겠어요. 그런데 그걸 양심이 계속 악에 쫓기는 거예요. 쫓기었으면 그냥 죄로 관통하면 되는데 선이 있으니까 문제는 내가 나쁜 짓한 게 문제가 아니고 나는 선할 수 있다. 나는 의로울 수 있다가 인간의 사라지지 않는 것이 이게 스트레스입니다.

율법을 준 것은 죄인 되게 하라했는데 그게 로마서3장인데 그 로마서 복음이 입에서 안 나오고 그게 반대되는 악마의 말이 나와요. 나는 착할 수 있는데 뒤늦게지만 부모한테 효도해야지. 이래다 죽었어요. 10분 쉽시다.

 

 

 

안양20181012b야4장8절(관통)-이 근호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두 번째 시간은 첫 째 시간보다 더 난해합니다. 왜냐 하면 사람은 없고 관계망만 있어요. 사람은 왜 없느냐 결국은 몇십년 있으면 없어져요. 새로운 애는 있어도 없어진다고요. 홍해에서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 다 없어졌습니다. 나중에 약속의 땅에 갈 때는 두 사람밖에 없었지요. 여호수아와 갈렙 그 외에는 다 없어요. 그러니 인간은 없음입니다.

안양 땅에 사람들 많이 있잖아요. 나중에 다시 보아라. 다 없어질 것이다. 성경 말씀에 그런 게 나와요. 없어질 사람입니다. 없어질 사람이니까 없다고 해도 관계없습니다. 그러면 뭐가 남아 있느냐 예를 들어서 서울에 아파트가 있잖아요. 만약에 폭탄을 맞았다고 생각해봅시다. 폭탄을 맞으면 건물을 없어져도 뭐가 남아 있느냐 비로소 건물에 가려져 있었던 도로망만 달랑 남지요. 이게 관계망, 다른 말로 하면 연결망만 남아요.

제가 첫 째 강의할 때 이스라엘을 관계할 때 율법으로 뚫는다고 했잖아요. 뚫는다고 할 때 다 이걸 생각해서 이야기를 한 겁니다. 사람은 없으되, 뚫어놓은 율법은 영원하리라. 말씀은 영원하거든요. 이사야40장 말씀처럼. 우리는 관심사가 뭐냐 하면 이 주님의 율법에 영원하다는 말씀에 영원하다는 여기에 관심은 두지 않고 잠시 보이는 사람들이 저 사람은 모르는 사람, 이 사람은 아는 사람. 자꾸 사람들에게 관심 있고 그리고 거울 앞에 비치는 나에게 관심을 두고 살아요. 평생 동안.

이것은 뭐냐 하면 우리의 생각에 지평선을 넓혀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 공간적 지평선을 넓힐 필요가 있고 그건 해외에 놀러 가면 되고요, 시간적 지평선이 더 중요해요. 시간적 지평선을 넓히되 어디까지 넓히느냐 하면 죽음의 넘어 까지 시간의 지평선을 넓히는 겁니다. 죽음의 넘어 까지.

그게 바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하시고 그 다음에 가까이 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뭐냐 하면 마음을 낮추라. 되어있지요. 하나님을 가까이하되, 어떻게 만난다? 마음을 낮추면 된다. 하나님 가까이. 마음 낮추기. 두 가지를 다 이루신 분이 계셔요.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포기하시고 낮아졌는데 어디까지 낮아졌느냐 하면 빈민굴 정도 낮아졌습니까? 아니면 고시원에 갈 정도로 낮아졌습니까? 어디까지 낮아졌습니까? 죽기까지 가셨지요. 죽기까지. 죽음이라 하는 것은 없어짐이거든요. 있었는데 내가 없어질 때까지 낮아지는 겁니다. 조금이라도 내가 있으면 있는 만큼 더 낮아질 것이 생겨버려요. 내가 항상 있으면 인간은 모든 세상 돌아가는 것을 내 이익중심으로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조만한 양이 있어도 항상 그것 자체가 응축이 되는 겁니다. 사람은 크면 클수록 실속 없다고 하고 작으면 뭐라고 합니까? 작은 고추가 맵다고 하지요. 당차다. 하는 거예요. 몸뚱이는 작아도 할 것은 다한다. 그런 취지잖아요. 그만큼 밀도가 높은 거예요. 몸뚱이는 작아도 할 건 다한다 하는 것처럼 사람이 크나 작으나 조금이라도 자기 게 있으면 여기서부터 욕심이라 하는 것은 덩치와 관계없이 욕심은 덩치와 비례하지 않습니다. 덩치는 작아도 욕심은 세상 모든 걸 가지려하거든요.

여러분, 마음을 낮춘다고 해서 가난하게 되는 게 마음을 낮추는 게 아닙니다. 가난하다고 욕심이 사라지는 게 아니거든요. 욕심이 응축되겠지요. 오히려 복수심이 더욱 강렬해지는 겁니다. 지난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지만, 지난 수요일도 그렇게 이야기했지요. 사람들은 자기를 피해자로 보는 경향이 있다고 했습니다. 뭐 별 한 것도 없는데 자꾸 내가 뭔가 손해 봤다. 자기가 피해자라고 의식하니까 뭐를 기대하게 되느냐 하면 “신이시여, 보상 안 해줍니까?” 신보고 보상해 놔라 하는 거예요.

내 인생을 동탄에 갔다가 이리 둘러봤다. 뭐 자꾸 뭔가 피해를 본 느낌이 들고 손해를 되게 많이 본 느낌이 들고, 하나님께서 도와준다면 보상이라도 좀 이렇게 응답해줬으면 하는 그런 생각이 들지요. 그게 왜냐 하면 성경을 볼 때 복음은 끝장인데, 끝장 보는 식으로 신앙을 하지 않아서 그래요.

끝장을 보는 것을 제가 간단하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죽은 나와 죽어가는 나, 이 둘 사이에서 십자가 복음이 나를 관통해버리면 죽어가는 나는 아니에요. 이미 죽은 나가 됩니다. 여기에 대한 성경구절은 로마서6장 2절, 갈라디아서2장20절 잘 나와 있어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나니, 이 말씀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제가 관통이란 말을 한 겁니다.

왜냐하면 이 말이 틀린 말이 아니고 구약 때 율법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개인구원이 아니고 하나님의 율법으로 그들을 뚫어놨거든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출애굽기20장과 24장에 보면 언약을 세울 때에 양푼에다가 피를 담아가지고 먹어라 해서 온 피를 골고루 뿌렸다고요. 희생제물의 수혜자가 공동체가 되는 겁니다. 개인이 아니고 “아! 나 피 두 방울 튀었다.” 이런 게 아니에요.

피가 양이 얼마나 나한테 많이 튀었냐가 아니라 이 피의 주인공이 누구냐, 희생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는 거예요.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닌 거예요. 사도바울도 아니고 베드로도 아닌 거예요.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대장질하면 안돼요. 관통했으니까.

요번 교재에 보면 강강수월래 하지요. 강강수월래가 우리나라의 전래놀이인데 특징이 뭐냐, 주인공이 없어요. 그냥 손에 손잡고 에요. 빙빙 돌고 노래만 불러요. 아가 뜻이 뭐냐, 노래 중에 노래에요. 그래서 아가 가사만 내용만 해버리면 좀 맛이 없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적당한 노래를 틀어줘 볼까,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노래 틀어주면 주부가요교실이 되어버려요. 남자라는 이유 때문에... 주부가요 된다고요. 그건 그 때 주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고. 내가 지금 걱정할 일이 아니고요.

죽은 나라면 이야기한다면 아무도 안 믿지요. 그 말을 안 믿는 이유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이 함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이 함께 있을 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안 보이고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있거든요.

그래서 나는 죽었다는 말은 뭐냐, 본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라는 뜻에서 나는 죽었다 이야기하는데, 옆에 남편분이나 “나는 죽었어!” “보니 죽기는 성질도 안 죽었는데. 왜 이래? 니 지금 나이 몇 살이고? 너는 똑같아.” “아니야, 나는 주님과 함께 있어.” “주님 있으면 보여줘.” 하거든요. 비가시적인 것과 가시적인 것의 연결고리가 뭐냐 희생입니다.

희생제물을 통해서 비가시적인 분이 가시적으로 위계 가식을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는 인간을 위계적으로 말이 어렵지요. 위계적으로 계급을 지을 때 위에 있는 우열권을 가지고 우리를 통제한다는 뜻입니다.

모르드개는 옥에 갇혔고 에스더는 훌쩍 울고 기도를 할지언정 그 아하수에로왕은 밤에 잠이 안와가지고 옛날 지나간 실록 왕정의 일기장을 보고 있도록 누가 했어요? 주님이 그렇게 했어요. 왜? 모든 영광은 모든 결과는 원인과 결과를 주님이 혼자 다 독차지하기 위해서 일을 그렇게 벌이시고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그 사실을 증거 하는 사람이에요. 인생을 통해서. “나 안했다. 나 안했어. 내 기도발 때문에 한 게 아니야. 주님이 그렇게 했어.” 이리 하는 거예요.

기도하는 것도 기도해서 된 게 아니고 주님의 기도로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내가 기도하라 하는 이유는 내 기도하고 주님의 기도하고 한 번 견주어봐라. 우리 기도가 얼마나 세상 적이고 욕심내고 있는지를. 비교하면서 죄인을 더욱 죄인 되게 하기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신 거예요. 모든 말씀은. 모든 말씀은 율법적 기능을 가지고 바늘로 기능을 뚫는 겁니다.

이와 나왔으니 잠깐 정리하고 가실게요. 모든 말씀은 처음부터 새 언약이 아니고 옛 언약이 있었지요. 옛 언약 있고 그 다음 새 언약이잖아요. 옛 언약이 율법이지요. 율법은 우리를 저주케 하잖아요. 오늘날 신약의 사도바울의 명령이나, 사도바울의 명령이 아니고 주님의 명령입니다. 모든 명령은 요 노선을 그대로 가지고와요. 말씀이 딱 오잖아요. 먹는 거 입는 거로 족한 줄 알라. 딱 율법적 기능을 가지고 쑤셔댑니다. 바늘 딱 들어가요. 바늘 들어가면 여기서 졸지에 우리가 뭐가 됩니까? 죄인 되지요.

죄인은 뭐냐 하면 이미 죽은 거예요. 옛날 고대에 죽은 자를, 여러분 장례를 치루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죽은 자의 장례를 왜 치룹니까? 그동안 정 때문에 좋은데 가시라고 노자돈 하라고 좀 주고 이렇게 장례를 치루는 거예요? 후손들이 조상을 장례를 치루는 이유가 장례를 거창하게 치루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죽은 자를 그냥 놔둬버리면 고대인들에게 죽은 자의 영이 있는데, 육이 있는데, 육 + 영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육은 죽었잖아요. 그러면 문제는 영은? 이게 통제가 안 된다 이 말이에요.

죽어놓고 자식들 아파트 자고 있는데 들어와 가지고 “야들 잘 있느냐?” 영이 덤벼들면, 영이 귀신이거든요. 덤벼들면 이건 육으로 있을 때는 아버지 효심 뭐 향 피우고 하겠는데 귀신 되면 이건 기겁을 하는 거예요. 아버지 돌아가셨잖아요. 왜 이러세요? 그것도 술한잔 먹고 술한잔 먹은 귀신 돼가지고 왜 이러십니까? 하면 기겁을 할 거다 말이죠.

만약에 지금 지난 8월말에 우리 어머니 돌아가셨는데 만약에 제가 자고 있는데 야들아, 띵동 해가지고 그동안 보고 싶었지. 보고 싶었겠어요? 보고 싶겠어요? 대전 현충원에 다 안장했는데 두 번 다시 깨어나지 말라고 가루로 만들어가지고 조립하기 힘들게 그렇게 했는데 에스겔도 아니고 그렇게 했는데, “얘들아! 잘 있었나?” 오게 되면 와~ 반가운 게 아닙니다. 기절하지요.

왜 장례를 하느냐 하면 제발 갔으면 오지 말라는 뜻으로 장례를 거창하게 원 없이 진짜 두 번 다시 못 오게 보내드리는 거예요. 그것도 보냈나 안 보냈나 걱정이 되어가지고 또 삼오에다가 한 번 또 확정지어요. 그게 모자라가지고 49제해가지고 두 번 다시 오기만 해라. 전기 철조망을 두 번 쳐가지고 오기만 해봐라. 이리 하는 거예요.

죽었으면 이제 볼일 보지 맙시다. 하고 보내버리는 거예요. 남편 일찍 죽었다고 그리워하지만 죽은 남편 오면 제일 먼저 기절할거죠. 그래서 죽은 자를 장례를 할 때 떠나보내면 섭섭합니다. 뭐냐 하면 장례를 크게 치러주게 되면 이 영적세계에서는 육적세계하고, 옛날 사람 이야기에요. 지금. 성경이야기 아니고.

받아먹은 게 있으면 그만큼 토해내는 게 있다고 보는 거예요. 장례를 잘해주게 되면 이 죽은 분들이 후손들에게 하는 사업이나 가정행복에서 이게 공동체로 후원한다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후원해요. 그리고 이 가정뿐만 아니고 돌아가신 분을 옛날에는 밀집으로 계곡사이에 산  이에 자기들 공동체를 이루었거든요. 이 집안에 죽은 자의 큰 느티나무를 심어가지고 죽은 자들은 이 느티나무에서 1년에 한 번씩 영혼을 달래줘야 돼요. 노인들 누가 가셨던지 선거철 앞두고 국회의원 후보감들 막걸리 주문해가지고 돼지고기 편육해가지고 이렇게 해서 인사하러오지요. 한 번씩 죽은 사람한테 인사하러 오는 거예요. 그저 잘 해주셔가지고 우리 공동체 번영회 잘되게 해주옵소서. 야쿠르트에 독타지 않는 그런 사건 일어나지 않게 친하게 잘 지내게 해달라고. 이렇게 해드리는 거예요.

죽은 사람에게 장례를 치루는 이유를 알겠지요. 이게 뭐냐 자기의 살아있는 인간은 좀 삽시다. 마음 편하게. 그러니까 모든 인간의 문화라 하는 것은 인간은 자기중심이에요. 그래서 자연과 극히 문화를 대립시킵니다. 대립시켜서 자연의 것은 자연에 돌려보내고 우리는 우리끼리 하는 요구할 때 여기에 희생제물을 바치는 거예요. 희생제물이라든지 추수감사절을 드리는 거예요. 요 문화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창세기4장에 가인의 후예들입니다.

가인의 후예들이 그 사람들이 종교를 만들어가지고 계속 죽은 조상들이 집합한 곳을 신의 세계라 보고 거기다가 정기적으로 제사와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문화의 일종이니까. 이유가 뭐냐 하면 제발 우리가 성과 했던 이 문화와 문명을 좀 손대지 말고 좀 훼손하지 말고 잘 되게 해달라는 거예요. 전부 다.

왜 그러느냐 하면 조상보고 너희들 하면 안 되지만, 당신들은 이미 죽었고 우리는 아직도 살고 있잖아. 산 사람은 좀 살자. 숨이나 좀 트자. 이런 마음으로 이 자연세계의 일부를 죽은 자의 세계로 따로 할당을 해가지고 자연의 일부로 죽은 자의 일부로 같이 할당해서 거기서 잘 되게 해주면 죽은 자가 자연을 잘되게 해가지고 농사도 잘 되게 하고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돌아다니면서 수렵할 때는 희생제물이 없어요. 그냥 바친 사냥꾼 중에서 주지만 정착해서 농사 짓기 부터는 희생을 드리는 걸 했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신은 야생 신에서 그걸 야생이라 하는데, 야생과 문화의 대립인데요. 야생 때는 모든 자연에 떠도는 들소 같은 것도 그냥 들소가 아닙니다. 들소가 아니고 신이 우리에게 사냥감 잘 맞도록 사냥감이 일종에 우리를 딸이라고 본다면 하나의 사위처럼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서 내 눈 앞에 사슴이 뛰어 노는 거예요.

그래서 고기 주셔서 감사하다고 잡을 건 잡되 사냥고기를 나머지 가지고 또 드리는 거예요. 잡혀주셔서 고맙습니다. 신이시여. 모든 움직이는 것은 생동이 있고 생동은 영이 있고 그 영은 보이지 않는 신령한 곳에서 우리 같이 살려고 하는 거예요. 같이.

그런데 그건 뭐냐 하면 수렵 그러니까 쫓아다니면서 살 때였고, 정착해서 살 때는 제발 우리 거 손대지 말라고 우리 울타리 들어오지 말라고 할 때는 “에라, 우리가 받은 것 중에서 우리가 성의를 다해서 죽음까지 우리가 가축을 야생을 잡는 게 아니고 가축 중에 잡아요. 소나 양을. 가축 중에서 잡아서 우리의 정성을 받으시고 쓸데없이 더 달라고 하지 마시고 제때 복이나 주시라고 그렇게 문화 지키기 위주로 나간 겁니다. 얼마나 이기주의입니까. 종교라는 게 이정도로 이기주의에요. 기독교, 불교 다 만찬지지로 이렇게 이기주의에요.

우리 가정 무슨 종교 믿느냐, 말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구원은 새 이스라엘 보편 적에 해당되지 우리 가정 잘되라고 기독교준 게 아니거든요. 어느 정도 우리 의식 가운데 계속 나는 살아있기에 더 살아야겠다는 그런 비 복음적인 것이 아직도 육으로 계속 나오는 겁니다. 그래가지고는 백날 낮춰봐야 안 낮춰져요. 낮추는 것이 오히려 교만이에요. 낮추는 시늉을 한다는 것이 뭐냐 열배 스무배 더 반대급부 아까 보상, 피해 입은 거 회복, 이런 걸 노리면서 일부러 희생하고 싶지도 않지만 스스로 희생하는 연기, 연출을 꾸미고 있는 거예요. 평소에 주님 죄송합니다. 믿씁니다. 거기에 쌍시옷이 왜 들어가는지. 쭈여! 이러고. 그래도 잘되면 그레이쎄이 욕하고. 항상 자기 위주입니다. 자기 위주. 공동체 위주가 아니고.

자, 공동체는 뭐냐 하면 이스라엘은 이미 죽은 자에요. 이미 죽은 자를 왜 죽은 자냐 중간에 중심됨은 살고자하는 걸 뭐로 뚫어놨습니까? 율법으로 꼬챙이처럼 다 뚫어놔 버렸어요. 이미 저주받은 자가 무슨 짓을 해도 저주에요. 살려고 노력해도 결과는 뻔해요. 저주로 끝납니다. 이걸 딱 뚫어놨어요. 그러니까 이 짐승의 피는 용서고 축복이 주는 피거든요.

이스라엘은 바로 제사를 통해서 복 받은 민족입니다. 문제는 사무엘 다음에 그 다음 왕인 사울 왕에 가면 이 제사가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형식화되고 말아요. 형식화. 형식화라는 것은 일종의 이미 뭐가 되느냐 하면 문화가 된 겁니다. 맨날 요새 이야기하지만 교회가 문화센터 된 것처럼. 교회는 구경거리에요. 쇼하고 있어요. 우리는 관람이에요. 나중에 끝나고 난 뒤에 관람용 내면 그만이에요.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 예배가.

예배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요한복음4장에서 예배는 그것이 아니라고. 아하수에로왕이 밤중에 자기는 갇혀있는데 밤중에 잠이 안와서 옛날 왕궁의 일기장을 보게 하신 그 하나님의 활동 덕분에 지금 모드드개가 풀려나온 것처럼 주님의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주님의 활동의 결과로서 혜택을 나는 입고 있다. 이 관계가 믿음이잖아요. 이게 예배다 말이죠. 예배.

일은 주님이 벌려놓고 그 결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동의한 게 그게 예배에요. 오늘도 아침에는 맛있는 만두를 먹었습니다. 아침부터 만두 먹는 사람 없지만 하여튼 주께서 만두 주셔서 그냥 공짜로 먹었습니다. 그게 오늘 드린 예배에요. 그게. 천주교 신자처럼 마리아상 해놓고 묵주 하나 딱 걸어놓고 비는 라틴어 할 줄 모르면서 라틴어 하는 이런 게 예배가 아니고 오늘 예배 끝. 5분 만에 끝. 이게 아니고 또 큐티한다고 큐티 나무라지는 않겠습니다. 성경공부라 생각하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평소에 눈만 뜨고 모든 것이 나 몰래 하는 주님의 행위가 내가 하나의 결과로서 이렇게 주어졌습니다. 라는 그 연결망. 오늘 또 제목 바뀌었다. 연결망이다. 어느 거 할지 모르겠다.

하나의 연결망. 관통된 연결망만 남으면 돼요. 결국 우리는 여기에 아이스케키 하드 있잖아요. 하드의 꼬챙이. 여름이 되면 어떻게 됩니까? 아이스케키는 다 녹아도 뭐는 안 녹아요? 작대기는 안 녹잖아요. 그 작대기가 연결망이에요. 그게 언약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내가 율법을 믿고 십자가를 믿는다 생각하지 말고 십자가가 들이닥쳐 가지고 십자가가 찾아와서 나는 십자가의 묻은 콩고물이라고 생각하시라는 말이지요.

발상의 전환,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주인공은 안보이지만, 살아계시는데 그 분은 영원히 살아계셔야 되고 나는 잠시 등장인물로 등장했다가 빠지면 되는 겁니다. 어릴 때 봤던 영화,  TV 없으니까 영화 봤잖아요. 영화 보면 영화 필름도 안 좋아요. 영사기에 비가 막 와요. 비가. 거기에 보면 꼭 누가 나오느냐 하면 허장강 나오거든요. 허준호 아버지지요. 허장강 나오면 벌써 관객들 알아요. 이 사람 역할이 뭔가 허장강하고 독고성이라. 독해요. 독고성. 악인 또 있어요. 좋은 사람은 기억 안 나고 나쁜 사람만 기억나고.

허장강 딱 나오면 뭐냐 하면 그 사람은 악한 역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있어줘야 영화가 부정적인 면이 살아나요. 그러면 허장강은 뭐예요? 그러면 허장강은 나쁜 사람입니까? 지는 하고 출연료 챙기면 되잖아요. <여로>할 때 전 국민이 빨리 죽으라고 소원한 사람이 있어요. 거기 못된 사람 나오지요. 일본 사람...., 그거 죽으라고 했거든요. 진짜 죽었어요. 그 사람. 그 역할을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거예요. 얼마나 우리가 못돼 먹었으면 아직 안 죽었는데 주님은 우리를 뭐로 본다? 죽은 자로 보는 거예요. 아이스께끼에요. 우리는 죽은 강도고, 세리에요. 창녀에요. 죽은 자로 보는 거예요. 죽은 자로.

그러면 오늘 본문 봅시다. 야고보서4장8절,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주 앞에서 뭘 낮춰라? 니 마음을 낮춰라. 어디까지? 죽는 척 아니에요. 죽는 척 하면 안 돼요. 어디까지? 진짜 나 자신을 알아야 돼요. 진짜 죽었구나! 죽는 척이 아니고 진짜 죽은 거예요.

제 딸이 질문 했는가 누가 질문했는지 모르겠어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죽은 자와 죽어가는 자가 있어요. 사람들은 죽었다 하면 안 믿어요. 왜냐하면 비가시적인 존재를 결부해서 이해하지 않고 자꾸 눈에 보이는 것만 해가지고 “어? 니가 좀 늙어가네. 곧 죽겠네.” 죽은 자를 줄곧 죽어가는 자로 오해하고 있어요. 그 오해하는 본인이 뭐냐 하면 자기를 자꾸 죽어가는 자로 인식하고 있는 거예요. 죽어가는 자.

죽어가는 자가 있으니까 그 다음에 무서운 결과가 나와요. 죽어가니까 뭘 대비해야 됩니까? 천국 갈 대비해야 되잖아요. 어디가야 돼요? 교회가야 돼요. 이 구조가 잘못된 거예요. 이게 성경구조가 아니에요. 죽어가니까 나중에 이 땅에서는 고생하지만 죽어서는 좋은데 가야지. 그러면 교회 와서 목사 말 들어야지. 내라 하는 거 다 내고 십일조 내고 뭐 다 내야지.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러면 두 번째 뭐가 문제냐 하면 죽은 자가 아니고 죽어가는 자로 간주하잖아요. 성경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고 이미 죽은 자로 보신다니까요. 아~ 이 연사는 외칩니다. 물 마셔야 돼요. 왜 교회를 보이스피싱이라 하고 사기집단이라고 제가 왜 하느냐 하면 여기에 십자가에 근거 때문에 제가 이렇게 외치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죽어가는 자가 아닙니다. 죽은 자고. 이건 그냥 현상이에요. 현상. 죽었기 때문에 서서히 늙어가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낮춰봤자 인간은 죽어가는 게 천당 가려고 마음을 낮춰봤자 야고보서4장 마음을 낮춰라, 주여 마음을 낮췄습니다. 낮춰봤자 응집이 된다니까. 키 작아도 응집이 이 안에 다 들어있어요. 살아야지! 살아야지! 뭐로 사는데? 말씀 지켜서 살아야지! 이러면 신을 멀찍이 보는 거예요. 신이 그 사람한테 온 적이 없어요. 온 적이 없으니까 자꾸 상상하는 겁니다. 이케요? 저케요? 이거 바치면 돼요? 저거 바치면 돼요? 자꾸 이렇게 하는 거예요.

목적은 신의 영광. 무슨 소리? 신의 무슨 영광이에요? 자기 살라하는 거죠. 그런데 아까 로마서3장 보셨지요. 율법이 관통한 것은 우리로 꿱 하는 소리도 못하게 만들었어요. 완전히 큰 나무로 우리의 중앙지점을 살려하는 중앙지점을 그냥 꽂아버린 거예요. 지렁이를 그냥 건드리면 꼼지락 꼼지락 꿈틀거리잖아요. 꿈틀대지도 못할 정도로 꿱! 완전히 찍어버리는 거예요.

전봇대 같은 것으로. 찍어버리면 차라리 편해요. 왜? 주께서 아하수에로왕을 밤에 잠을 못 자게 만들어가지고 그렇게 하듯이 지금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다른 변수들이 연결 연결되어서 지금 이 집까지 꾸몄잖아요. 이건 예상도 못한 거예요. 다른 변수들. 이런 예는 한두 가지 아닙니다. 아들 낳을까 했다가 딸을 낳고. 딸을 낳을까 생각했다가 아들 나오고. 이것은 세상 모든 일이 내 마음대로 안돼요.

6시 되면 남편 퇴근할까 여겼는데 6시 반에 사고 나서 죽었다. 이렇게 되면 뭐예요? 그럼. 이건 기절할 겁니다. “내 남편은 왜? 저 나쁜 짓 한 남자는 살고. 왜 내 남편은?” 이렇게 될 거예요. 그래서 대구강의 본문이 이거였습니다. 새가 죽는 줄 모르고 평소에 하는 대로 늘 가다보니까 그물에 걸린 거예요. 그리고 너희 인생도 새하고 똑같다는 겁니다. 성경에 있어도 우리는 귀담아 듣지도 않아요. 그런데 귀담아 듣던 말든 하나님께서는 아하수에로왕의 옛날 궁정일기를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대로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파동을 보냅니다. 변수를 보내지요.

그러면 살아있는 내가 예상한 일과 보이지 않는 주께서 활동한 일과 이게 어긋나게 되어있습니다. 어긋나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건 내가 아무리 꼬마라도 생각한 온 세계를 다 풀만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게 인간입니다.

얼마 전에 스티븐 호킹이라는 물리학자 있지요. 착해도 지옥 간 불신자에요. 계속 살아있으면서 신은 없다 그 소리 한 사람인데. 그 사람이 제시하는 복음은 뭐냐 하면 꼭 불교 같아요. 이렇게 이야기해요. 신이 있어서 우주를 만들었다면 인간은 신보다 더 위대하다. 왜? 그 우주를 이미지화시켜서 내 머릿속에 담으니까. 우리가 갖고 있는 이 두뇌가 신보다 더 크다. 이런 소리 한 사람이에요.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아무리 뭐가 일어나도 인간은 그걸 생각하고 그것까지 예상하고 그것까지 뛰어서 뭔가 기대한다는 자체가 일어난 사태보다 더 위대하지 아니한가, 그걸 믿는 종교에요. 그 사람은.

아주 건방 떨었어. 몸만 아픈 게 아니고 마음 정신 다 아파요. 곧 죽어도 죽는 이유를 몰라요. 과학자가 뭐 그런 거에 관심 있겠어요. 왜 관심이 없느냐 하면 남들이 으샤 으샤 해 주니까. 노벨상 받았는데 아깝다느니, 뭐 위대한 천재니 하니까 막 거기에 뽕 간 거예요. 자기가. 오늘 본문대로 하면 뭡니까? 마음을 안 높이고 싶어도 주위에서 들쑤셔요. 점점 더 높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보겠습니다. 정리해 보겠습니다. 높은 자 반대말은 낮은 자지요. 자, 주님은 어디서 기다립니까? 주님은 높은 2층에서 기다립니까? 낮은 자리 1층에서 기다립니까? 오늘 본문대로 하면 낮은 쪽에서 하나님이 기다리지요. 아까 첫 째 시간에 했지요. 하나님을 상상하지 마라고요. 우리 사람들 코  앞에 등장한 하나님을 보라고요. 다른 하나님은 없어요. 다 가짜에요. 다 우상이고. 인간이 만든 거고.

낮은 데서 기다리는데. 그러면 낮아지면 되지 않겠느냐. 문제는 주님이 낮아짐이 어느 정도냐 말이지요. 주님은 죽었어요. 주님의 이 땅의 마지막 모습은 죽음입니다. 왜냐 부활할 때 아무도 본 적이 없거든요. 부활되고 난 뒤에는 고 몇 몇 사람이 봤지만, 부활할 과정에 대해서는 아무도 본 사람이 없어요. 이건 처음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기 예수님이 임신해서 태어날 때는 누가 봤습니까? 옆에 요셉이 봤고 마리아가 봤잖아요. 예수님이 태어날 때는 다 봤지만, 돌아가실 때는 아무도 못 봤어요.

죽고 무덤 닫아버렸으니까. 어떤 공작에 의해서 주섬, 주섬 옷 갈아입고 다시없어졌는지 그 두꺼운 문을 어떻게 밀어 제쳤는지 거기 CCTV달 줄은 몰랐지요. 그 때는. 닫아도 소용없어요. 죽은 자가 일어나겠다는데. 이게 귀신 곡할 노릇이에요. 죽은 자가 일어나는 것을 흑백 CCTV로 보세요. 본다고 봅시다. 이게 믿어집니까?

예수님이 죽은 데서 살아난 것이 안 믿어지잖아요. 그런데 성령이 와서 우리보고 뭐냐 하면 그 분이 지금 살아있고 지금 부지런히 활동을 쉬지 않고 활동하고 있음을 믿으라고 성령을 주신 거예요. 그러니 나의 활동이나 나의 예상, 기대는 개코도 아무 소용없어요. 아무 소용없습니다. 문을 열 때 주께서 힘을 주셔서 열게 하신 거예요. 나는 지금 문을 연다. 비비빅! 로봇처럼 하지 않고, 평소대로 하잖아요.

평소대로 하는데, 어! 근육 나갔다. 못 열지요. 이 말은 평소에 문 열 때 내 착해서 문 열었다고 하지 말고 주께서 주신 힘 가지고 문 열었다고 모든 게 주님이 개입했다고 믿어라 이 말입니다. 모든 게. 그리고 늙어가고 주름살 있다고 너무 서러워하지 마세요. 원래 죽은 자기 때문에 마음껏 늙음을 증명합시다.

나는 죽어간다고 증명하지 말고 죽었다고 증명하는 거예요. 그러면 죽은 자의 낮아짐은 더 낮아질 필요 있어요? 없어요? 이  십자가 죽음이 제일 마지막 밑바닥인데 뭐를 더 낮출 필요가 있어요. 그냥 막 살지요. 이게 마음 낮추는 거예요. 조심스럽게 살고 자기 절제하고 관리해서 사는 게 낮아짐이 아니고 뭐든지 감사한 마음으로 사는 게 낮아짐이에요.

만약에 죽어가는 자가 조심스럽게 살게 되면 이 사람은 절대로 감사할 수 없습니다. 조심하기 때문에 선을 택하고 뭐를 버리겠어요? 나름대로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한다고 조심하겠지요. 이렇게 선과 악을 해놓고 나머지 뭘 기대하느냐 보상을 기대하고 자기가 얻고자 하는 바를 예상하고 고대하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이들이 보이스피싱에 걸리는 겁니다.

어떤 분이 보이스피싱에 걸려가지고 돈 날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자꾸 남의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 사람이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어요. 그런데 제가 수요일에 이야기한 것은 어떤 딸은 14억 날렸지요. 14억 날린 이유가 무엇 때문에 날렸다고 했습니까? 효심 때문에. 효심 때문에 날린 거예요.

그냥 가만히 놔뒀으면 아버지 어떻게 살든지 가만히 놔둬버렸으면 14억 자기하고 남동생하고 7억씩 돌아옵니다. 괜히 아버지 이리 살면 안돼요. 착하게 살아야지요. 하다가 아버지 패서 삐져서 14억 다른 사람 다 줘버렸어요. 제보자에 진짜 있었던 일이에요.

그러니까 딸 같으면 시집갔으면 지나 잘하세요. 효심부리지 말고. 그런데 딸들이 특히 둘째딸은 안 그래요. 꼭 맏딸이 그래요. 맏딸이 온 집안에 친정집안 책임은 온 수고와 짐은 지가 다 짊어져가지고. 시가집 돌봐야 되지 친정집 돌봐야 되지. 맏딸 티 다 내고 있어요.

그래가지고 또 하게 되면 노인네는 어린애거든요. 그냥 놔두면 아침 먹는 둥 마는 둥 점심은 노인정에서 먹고 저녁에는 먹는 둥하면 될 건데 살면 편한데 “아버님, 어머님, 이리하면 안 됩니다. 제가 밑반찬 해왔습니다.” 먹어보니 맛있거든요. 그 다음에 뭐하냐 하면 은근히 또 기대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우리 귀여운 딸 하다가 이년이 왜 안 오느냐 이리 돼요. 갑자기 한두 번 빠지면 이년이 아버지를 무시하고. 괜히 붕 띄워났어. 괜히 사람을 높여놔 가지고. 아버지, 엄마고 없어요. 이 땅에 아무도 없는데. 그냥 가만히 놔두는 게 제일 편해요. 각자 인생사는 게 최고다 말이죠.

자꾸 딸이고 뭐고 효심을 이용하게 돼요. 효심을 이용하게 되고 기대고 지는 편하고 그 모든 무거운 짐을 딸에게 아들에게 다 짊어져요. 노인정에서 10원뺑이 고스톱 치다 돈 잃은 것까지 복수해달라고 그 친구 고자질하고 다한다고요. 질을 잘못 들여놓은 거예요. 질을.

여러분, 자식들 키울 때 어떻습니까? 다들 키워봤지요. 어떻든가요. 여기 오늘 야고보서4장 말씀하고 한 번 비춰보세요. 여기 애통하고 울라고 했잖아요. 애 줘패가지고 애통하고 울도록 해야 되지 않습니까. 요새 젊은 애들 그렇게 키웁니까? 애통하고 울어야 돼요. 그런데 뭡니까? 항상 울까 싶어서 엄마가 먼저 “그래, 뭐 해줄꼬?” 붕붕붕붕~ 올려놔가지고.

학교에서 조금만 뭐하고 학교 안다닌다고 하고. 선생님이 조금 화내면 뛰어가서 112에 신고하고. 그게 학교입니까. 왜 부모가 자식들을 붕붕 띄우고 데도 않는 효심을 부려가지고 일찍 폐암 죽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살아 있잖아요. 내가 살아있으면 나만 살면 안 되잖아요. 내가 공들인 것도 같이 살아있어야 돼요. 남편과 자식들도. 함께 살아야 돼요. 그래서 천국가도 내 요것이 나의 세계가 돼요. 나의 세계가 단체로 가야 돼요. 천국을.

지가 먼저 교회 나가서 하고 그 다음에 등산하는 남편 꼬셔가지고 교회 나와서 천당 가자고 하는 거예요. 이게 주님 영광이 아닙니다. 당신들이 없으면 내가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당신들이 없으면. 내 두뇌의 기억 속에 나 혼자 있으면 천국가도 못 살겠다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심심한 천국이라 합니다. 정막한 천국.

사는 것이 주고받고, 주고받고 하는 이게 뭐냐 하면 내가 중심이 된 연결망, 내가 중심이 된 관통, 내 생각을 상대방에게 주고 그 상대방을 끌고 올 때는 집어넣은 거기다가 장착시킨 내 생각가지고 그걸 근거로 낚시 닐 돌리듯이 남편이고 자식이고 내 맘대로 내 쪽으로 끌어당기려한다 말이지요. 내가 니를 위해서 공들인 게 얼마인데. 이걸 그냥 달릴 수는 없고 본전이나 찾아야겠다. 해가지고 잡아당겨서 맨날 하는 소리가 내가 얼마나 니를 키웠는데! 뭐 어떻게 했는데! 니가 그리 나오나. 그러면 자식이 나중에 결혼해도 독립을 못해요.

조금만 하면 기대어 들어오고 딱 와가지고 뭐 고기 집 한다 해가지고 고기 집 챙기지도 않고 계속 있고, 이게 노는 건지 연예인인지 분간도 안 되어가지고 계속해서 노끈장사 하는 아버지 밑에 하고 백씨부인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운전면허 떨어지면서 있는 체 해가지고 왕자표 크레파스 머리 해가지고 살림남에 나오는 광산김씨 보면 일상에 있던 그대로를 연출 없이 그대로 보여줘요. 우리가 그렇게 살아간다고요. 전부 다 뭐냐 하면 죽어가면서도 나는 살아있어. 를  자기 증명하는 거예요. 자기 생존을 증명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눈에 보이는 대로 그냥 보이는 대로 사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대로니까 가시적이지요.

가시적으로부터 어디를 간다? 천국 간다. 보이지 않는 곳에 가니까 이건 뭐냐 하면 미약한, 그야말로 아무 근거 없는 보장될 수 없는 점선으로 그냥 막연한 기대와 희망으로만 여기 어설프게 엮여져 있는 거예요. 이게 믿음입니까? 전혀 믿음이 아니지요. 뭐 십자가 믿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누구를 위한 십자가인지 몰라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님 쪽에서 이미 여기서 기다려요. 주님이 십자가 지고. 성령이 십자가니까요. 십자가가 눈에 보인다 했거든요. 예수님의 죽으심. 죽으심이니까. 아까 다시 해봅시다. 죽은 자를 그 다음에 장례 치러서 그 다음에 살아있는 사람에게 죽은 자가 해코지 하면 안 되기 때문에 장례를 거창하게 치루면 주는 자에게 복을 준다. 이게 장례잖아요.

주님께서는 다시 살아계신 분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한테 옵니다. 주님이. 오게 되면 이미 죽은 분이 죽은 분으로 인하여 한 번 A(죽은 자.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B(눈에 보이지 않는 부활의 세계)갔다가 성령이 왔잖아요. 그러면 성령은 어디까지 책임진다는 말입니까?

부활의 세계까지 책임지시는 분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뭐냐 하면 죽어가는 자가 아니라 이미 죽었다고 확정 난 입장에서 여기 군포에서 사는 거예요. 이미 죽은 자에서 사는 거예요. 언제 죽어도 괜찮은 거예요. 차라리 소원이 뭐냐, 오늘밤에 데려가면 좋겠어. 살아봤자 별 볼일도 없고. 재미있는 것도 없고, 나 있으면 오히려 걱정하는 사람 더 많고 남한테 피해 입히고.

 그러니까 내 몸이 떠날 때까지 내 몸이 분리될 때까지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살아야지. 어쩔 수 없이. 물론 너무 막 가면 안 되고요. 막 살면 안 되고 요번에 짬뽕, 다음에는 칼국수, 다음에는 삼계탕, 그걸 이미 죽었기 때문에 일체 우리한테는 책임을 묻지 않거든요. 니 왜 이렇게 했어? 니 왜 저렇게 했어? 묻지 않아요.

“니 이렇게 하면 매매한다.” “니 그러면 벌준다.” 이게 겁이 안 나는 거예요. 그래봤자 죽기보다 더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미 주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죽으면 천국이고, 살아있어도 천국의 혜택을 입는 거고, 뭐 이래도 좋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뭘 보상을 해주요. 보상을 다해줬는데. 죽어서 살리는 것보다 더 큰 보상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죄를 용서했다는데 그보다 더 큰 보상이 어디 있어요. 저주는 없고 정죄함은 없나니. 영생으로 이끄는 힘이 있다는데 뭘 더해줘요.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신약 성도 야고보서1장 1절, 흩어져있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있는 뭐라고 합니까?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지요. 이 구약 때 원리를 신약 때 그대로 완성된 채 집어넣겠다는 취지거든요. 그래서 야고보서에요. 야고보서는 구약의 율법이야기 다 이야기해요. 해놓고 그걸 우리에다가 관통으로 집어넣어버립니다.

집어넣어놓고 우리 입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나는 살아가고 있다.” 가 아니라 “나에게 이 말씀이 역시 죽기까지 낮추는구나!” 라는 야고보서4장의 말씀이 문자로만 있는 게 아니고 입으로 토해 나오게 하는 거예요. 관통됐으니까 뚫렸으니까 이 입으로 관통해서 내가 어떻게 잘났다가 아니라 “뭐 죽어도 그것도 복인데.” 라는 말이 서슴없이 나오는 거예요.

그럼 다른 사람이 미쳐나? 하겠지요. “보이지 않는 주께서 살아계셔서 나로 하여금 그런 일이 발생시키시네. 나도 이게 말릴 수 없어. 어쩔 수 없어.” 모르드개가 감옥에 있는데 풀려나왔어. 왜 풀려나왔는가? 나도 몰라. 왜 풀려나왔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주께서 그 왕을 일기장 보게 해서 공로를 인정해가지고 풀려나와서 말 태워가지고 온 사람들에게 이 사람 훌륭한 사람이라고 이렇게 해준 것은 이건 행운이지요. 예상 못한 겁니다. 왠 떡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도 나 같은 인간이 천국에 가서 영원복락을 누린다는 것은 이건 생각도 못한 겁니다. 그리고 지금은 형제, 남편, 아내, 자식 헤어진다 할지라도 그 모르는 새로운 공동체, 내가 미처 몰랐던 이 공동체를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동거하며 살게 해줬다는 거. 사람도 바꿔봐야 돼요. 이거 뭐 늘 보던 사람 말고. 한 번 바꿔보는 거예요.

그 때는 여자도 없고 남자도 없어요. 그냥 천사와 같이 모르는 사람들과 같이 영원히 사는 겁니다. 알던 사람들은 교회에서 많이 봤잖아요. 그 사람들은 지옥가라 하고.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이렇게 훌륭하다는 게 아니고 또 내가 천당 간다는 게 아니라 주께서 나를 지금도 이렇게 계속해서 이끄시고 있음을 주님 살아있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주시고 성령을 주신 거예요.   
 
이제 마지막으로 그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번 아가서를 이렇게 하게 되지만, 오늘 강의를 정리했다고 보면 되는데. 아가서에 보면 여자하고 남자 나오잖아요. 사실은 이 사람은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아가서에서 아름답다할 때는 그 자체가 종결형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늙음이 없어요.

처음에 이 세상에서 여자와 결혼할 때는 참 아름다웠지요. 그런데 애기 낳고 아랫배 주름살하고 아이 먹을 때 같이 먹고, 잠자다 보니까 점점 몸매가 붓고 스트레스 받는다고, 애들 때문에 우울증 많이 걸려요. 우리교회에도 그런 분들 있는 거 같은데. 애 때문에 짜증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게 이물질이잖아요. 구더기 같으면 떼어 내면 되는데 이건 내 몸이라. 내 몸인데 평소에 내가 아가씨 때 했던 그 행동을 용납을 안 해요. 에~~ 하고 울고, 잘 때는 좀 자거라 말이죠. 남 잘 때 나 좀 편하게. 안자요. 잘 때 안자고 안잘 때 자버리고. 밥 먹을 때 밥 달라하고 동창생들하고 백화점에 가지도 못해. 애 안고 어딜 갑니까. 수유도 해야 되니까.

그러니까 사람은 그러다보면 망가지잖아요. 아가서는 안 망가져요. 그래서 아가서의 어려운 점은 아름답다는 것이 이게 늙지 않기 때문에 아름다운 건지, 그게 모호한 거예요. 그 자체가 아름다운 건지. 그건 그 때 돼봐야 내가 살아서 그 때 또 강의할 수 있어야지 나오지 지금은 미리 아무리 특별해도 이건 이야기 안 해줍니다. 안 보이는 주님이 살아있어서 그의 결과물이 오늘날 나의 이렇게 자유로운 삶이라는 걸 증거 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음을 낮춰라, 낮춰라, 해봤자 그 자체가 교만인 것을 예전에는 왜 몰랐습니까? 낮춘다는 것은 자기를 죽은 자로 간주하고 덤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주께서 진정 살려내고 있다는 것을 마음껏 자랑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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