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양과 동행
인간이 구제 대상 될 때 인간은 드디어 자존감 다 날아갔습니다. 내가 가난하다는 그 자체가 구제 대상이 되고 구제 대상을 통해서 나는 영원히 잃어버립니다. 더 이상 나라는 게 없어요. 그리고 이 구제는 갚을 길이 없습니다. 바로 우리가 예수 안에 들어갈 때 우리가 갚을 길이 없는 부채를 짊어지고 예수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거 뭐 예수 안에 들어갔을 때는 나에 대해서 주장할 수가 없어요. 내가 갚을 부채에 내가 완전히 덮혀버린 거에요. “앞으로 너는 입이 있고 코가 있고 눈이 있더라도 “저는요, 저는요, 나는요, 나는요.” 그 입 다물어라.” 네가 너를 키우거나 너의 가치를 지탱할 수 있는 자격이 애초부터 구제로 인하여 거저줌으로 인하여 박탈당한 상태에요. “우리가 예수님과 죽고” 할 때에,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죽고 할 때에 그 의미입니다. 일방적으로 찾아와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로 규정해버린 겁니다. 그게 왜냐? 출애굽. 그게 구원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구원의 방식이기 때문에. 다른 방식은 없어요. “너가 내 살과 내 피를 무슨 수로 그걸 비등하게 갚을 길이 있어?”에요. 없어요.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안 갚아도 됩니까?” 안 갚아도 되죠. “그러면 안 갚으면 저는 뭘 하면 됩니까?” “기다려봐 내 죽여 줄게.” 처음에는, 지금은 머리 부분이 날아갔어요. 우리가. 왜? 우리 머리를 대신 예수님의 머리가 대신했기 때문에. 그다음은 우리 가슴, 몸통, 꼬리까지 홀라당 사라질 겁니다. 이 땅에서. 미꾸라지 사라지듯 사라지죠. 자, 이렇게 볼 때에 하나님께서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어린양을 생명의 노선으로 주께서 집어넣는다는 말은 이 생명의 노선의 취지하고 맞지 않는, 다른 말로 하면 출애굽 했던 그때 그 사건 시절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자들은 전부 다 제거를 하게 되는데 그 제거하는 방식이 뭐냐?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은 아까 본 것 처럼 사람을 죽이고 죽이고 악을 제하죠. 악을 제하는 이유가 너는 왜 출애굽의 거저 주시는 은혜의 취지를 잃어버리느냐? 그걸 근거로 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린양과 함께 갈 수 없는 자로 분류시켜서 제거해 버리는 것이 바로 이 신명기에 나오는 이런 말씀이에요.
Shema!’ “내 말을 들으라. 너는 나의 포로야. 같이 가야 돼. 유월절 어린양과 같이 가야 돼. 어린양과 더불어서 같이 가야 돼.” “저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면 주님께서, “그러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짐승은 무슨 죄가 있어서 너 대신 피를 흘렸느냐?” 이걸 이제 묻는 겁니다. 그 짐승을 인간이 잡는다에서 신약에 오게 되면 인간이 낯선 인물을 잡아요. 근데 낯선 인물이 스스로 뭐냐 하면 내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고 짐승과 예수님을 자기를 일치시켰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레위 지파는 어떤 지파냐 하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마다 이미 자기는 죽은 자에요. 죽은 자. 땅이 있든 없든 자식, 가족이 있든 자기 아내가 있든 자식이 둘이 있든 관계없어요. 이미 자기는 죽은 자로 들어가는거에요. 죽은 자로 들어가다가 다시 일 마치면 산자로 나오는데 거기에 누가 했느냐? 바로 어린양,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내 대신 죽음으로써 진작에 죽어야 될 내가 하나님의 율법이 작동되는 조건 하에 내가 계속 살고있는 거에요. 그래서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의 뭐냐? 모터, 엔진입니다. 모터와 엔진이에요
■이 레위 지파가 이 제사가 나중에 형식으로 실패하죠.
■그럼 레위 지파의 유지를 받드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으로 등극시키는데 다윗이었고 다윗도 그 후손들이 실패할 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다윗의 자손이 되어서 이 모든 인간의 실패를 홀로 다 담당해서 십자가에서 뭐라고 외쳤냐? “다 이루었다.”하는 거에요. 다 이루었다. 이 다 이루었다의 의미를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나는 너하고 상대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다 이루었다가 그것만 이미 계속 십자가 성령을 통해서 살아 있다면 너는 그 안에서 너는 살아있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