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세의 발포산
하나님의 모든 맹세는 사람에게 맡기지 않습니다. he sware by himself
육신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지 ‘나’가 아닙니다. 인간의 육신은 직접 하나님께서 다루십니다. 인간의 자아에 맡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악마로 인해 생겨난 자아가 이 육신을 자기 육신처럼 다루려고 했습니다. 인간의 근본 문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생존에 있음을 발각시키십니다.
그냥 살아야겠다는 겁니다. 그냥 사는 것이 우선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은 ‘죽이시려는 목적으로 살려두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왜 하나님의 맹세에 대해서 인간이 관여될 수 없는가를 밝혀내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자꾸만 자아를 전면에 내세우기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자기 생존에 유리하고 자신의 미래를 본인이 확정지을려고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이 이미 날 때부터 이단입니다. 죄 가운데서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인생을 살면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전부 다가 죄입니다. 이는 인간이 자기 인생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이사야 55:8-11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이렇듯 전혀 다른 하나님의 생각이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습니다. 이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맹세의 연장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화목제는 제사 제일 마지막에 드린 제사로서 피와 기름은 하나님께서 잡수시고 가슴살과 다리살은 제사장이 먹고 나머지 고기들은 예배자와 그 일행이 먹는 제사입니다. 즉 화목제란 하나님 앞에서 먹고 사는 삶을 말씀하시는 제사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율법의 취지가 인간이 제일 우선적으로 여기는 ‘나 살기’도 아니요 ‘더불어 살기’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기’입니다.
이 방식을 위해 처음 유월절 그날 밤에 사람만 죽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기르던 가축들의 맏배도 같이 죽었습니다.
“무릇 이스라엘 집의 누구든지 소나 어린 양이나 염소를 진 안에서 잡든지 진 밖에서 잡든지 먼저 희막문으로 끌어다가 여호와의 장막 앞에서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지 아니하는 자는 피흘린 자로 여길 것이라 그가 피를 흘렸은즉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제사장이 일하시는 그 회막 장소를 경유하지 않고 고기로 자기를 살찌우려는 자는 결코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살 수 없다는 겁니다. 이는 제사장이 사는 삶이 곧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겁니다. 제사장이 ‘하나님의 맞잽이’인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결코 자신의 죽음을 전제로 하지않고 오히려 잘 살기 위해 하나님의 맹세를 이용하고 있었던 겁니다. 성도란 이런 인간들의 모든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모든 삶이 죄 짓는 것뿐임을 흔쾌히 인정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맹세가 실효성 있게 성취되기 위해서는 실질적으로 맹세를 맹세 내용대로 완성할 수 있는 능력자가 등장해야 되죠. 그 능력자 앞에서 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지킬 수 없는 무능력자인지를 파악하고 그걸 느끼는 것, 이게 벌써 복 안에 들어온 사람이에요. 축복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축복에 축복을 더한다는 것은 나로 하여금 무능력자에다가 무능력자, 무능력자의 바닥에 또 있는 무능력자, 끝까지 무능력자로 들춰내지는 그것이 새롭게 발견되는 즐거움으로 성도는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못난 자, 인간은 처음부터 못난 자고 뭔가 잘못된 건데 그동안 마귀가 우리를 속여온 거예요. 마귀가 인간을 속여오면서 악마에 대해 인간이 마중 나올 때 자아를 가지고 마중을 나오게 돼 있습니다.
육신이 만들어져 있고 자아는 그다음에, 나중에 나타난 거예요. 나중에 있는 자아가 시건방지게 육신이 내 것이라고 맨날 하는 소리가 “저는 어떻게 되는데요?”
사람들이 근원적으로 뭔가 잘못 알고 있는데 죄지었으니까 죄짓고 난 뒤에 벌 받는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습니다. 벌부터 먼저 받고 죄는 나중에 아는 거예요.
인간은 날 때부터 이단이에요. 하나님께 대드는 것을 이단이라고 해요,
육신은 주께서 직접 만들었고 직접 관리합니다. 어떻게 관리하냐면 내가 살지 못하게 하는 식으로 나를 살리게 되는 거예요. 왜 살지 못할 인간을 계속 살려내느냐? 살 이유도 없는 인간을 계속 살려내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맹세에 인간이 끼어들면 안 되고, 인간의 자아가 끼어들면 안 되고 하나님의 맹세는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 작업을 하는데 이단인 인간이 굳이 끼어들도록 허락하는 이유, 그냥 하나님 본인 맹세를 “내가 맹세한다. 그리고 내가 그 맹세를 이룬다.” 하면 될 텐데 그 못난 인간을 중간에 왜 끼어들게 하면서 족집게로 빼내는 방법을 사용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이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을 인간이 배후의 악마의 작용으로 악마와 한통속이 돼서 엉망으로 만들었거든요. 그걸 이제 차근차근 주님께서 풀어내 가시는 거예요. 그걸 밝혀내시는 거예요.
십자가를 믿겠다고 나서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아직도 미련 있고, 자기 자신이 아직 건질만 하다, 가치가 있고 강하게 될 수 있고 잘날 수 있다 하는, 평소에 마귀가 집어넣은 속성이 그대로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이 십자가의 의미는 뭐냐? 십자가의 의미는 인간이 뭘 원하고 뭘 노리고 있는지를 염두에 두고 십자가 지신 거예요. 십자가는 약해서 진 겁니다. 하나님이 누구보다도 약한 하나님이에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누구를 구제할 때 구제하면서 ‘내가 너보다 잘났기 때문에 구제한다’는 식으로 구제해버리면 상대로 하여금 잘난 나를 모델 삼아 인생의 목표로 삼는 그런 경우가 발생 돼요.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을 가로막죠 그러면 십자가는 뭐냐? 십자가는 어느 인간보다 못난 존재예요. 사람들이 원하고 목표로 하고 있는 그 대단한 존재하고는 정반대 쪽에 계신 분이 우리를 용서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리와 창기와 강도, 성경에 나온 이들이, 못난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는 거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과 그 당시 지배자들은 예수님이 못났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해서 없애버리자고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제대로 알고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이거 정말, 하나님의 대단한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에게 일체 어떤 것도 내가 필요한 것이 전혀 없는 분, 바로 그분이 피 흘렸다는 사실, 그 피가 내가 잘 돼야 한다는 근원적인 죄를 지목하고, 그걸 들춰내고, 그 죄마저 씻어줬다는 사실,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오해, 죄짓고 벌 받는다는 이런 오해, 이러한 오해가 섞여야 그 섞여 있는 그 오인들을 족집게로 집어내면서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숨겨놓은,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이 달성하는 하나님의 맹세, 언약 그것이 무엇인가가 눈앞에 등장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13장 처럼 하나님이 숨겨놓은 것을 하나님이 찾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천국이에요. 하나님이 숨겨놓은 것. 인간이 전혀 기대할 수 없는데 그걸 보물로 알아보는 눈은 하나님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어요.
나중에 성령이 왔을 때 주님의 십자가 영이 왔을 때 내가 쓸모없다 갖다 버린 그 십자가가 비로소 천국의 문이라는 것, 천국의 보물이라는 것을 깨닫죠. “너 좀 빠져줄래?” 해도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나 빠지면 내 인생은 어떻게 삽니까?”라고 거기서 걱정이 되는 거예요. 그럼 주님의 답변은 간단해요. “나는 널 죽이려고 작정을 한 거야.” 주님이 너를 죽여야 맹세가 나오는데 네가 자꾸 살려고 하니까 맹세를 덮는 거거든요.
‘하나님이건 예수건 날 힘들게 하고 나를 죽이고자 한다면 없앨 용의가 있다’가 내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이게 내 속에 있는 비언약이에요. 그 인간의 반대하는 요소를 뜯어내고 제끼는 작업으로 율법이라는 것을 이스라엘에게 먼저 주신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등장은 인간의 삶의 문제가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기 위한 것이죠 수련회때 뭘 느끼셨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지키면 되잖아요.’ 이렇게 안일하게 생각하다가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온몸으로 느낀 것이 이게 생존 문제라는 거예요. 인간의 우선순위가 생존 문제지 말씀 지키는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이 광야를 통해 들통 날 대로 다 들통 난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엉뚱한, 자기 살던 땅( 맹세가 맹세대로 노출되지 않는 환경) 이 아닌 엉뚱한 남의 땅에 살게 하는 거예요. 그럼 텃세가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번성케 하리라. 복 주게 하고 네 후손이 잘 살게 되리라”(히 6:14) 뭐, 뭐 있어요? 아무것도 없다고요. 아브라함은 그 이야기 들을 때 ‘말씀 잘 지키자’ 그 이야기로 들리는 것이 아니고 어쨌든 간에 나와 우리 후손을 살려낼 것이다, 생존 문제와 관련해서 그 맹세, 언약의 말씀을 쏙쏙 받아들인 겁니다. 받아들일 때마다 이것이 점점 더 불가능성으로, 이건 내가 해낼 수 없는 참담한 미래로 나를 몰고 간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거예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과 더불어 함께 있으면서 자신의 본색은 본색대로 다 드러났습니다. ‘나는 죽어서는 안 되고 내 후손이 없어져서는 안 된다’는 인간으로서의 또는 동물로서의 당연한 본성 같은 것이 꿈틀거리면서 살아왔던 거예요. 주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식대로 다 했냐? 그게 네 한계지? 네 방식을 있는 대로 다 노출시키고 네가 알고 있는 방식과는 전혀 예상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나는 내 맹세를 내 식으로 이룰 것이다.”
이 원칙, 그런 불가능속에서 나오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대기하고 있다가 이스라엘 속에 율법을 주어졌습니다. 이스라엘 속의 율법에 상상치도 못한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그 상상치도 못한 내용이 레위기 17장 3절에서 4절에 나옵니다. 제가 읽어드리면 “무릇 이스라엘 집의 누구든지 소나 어린 양이나 염소를 진 안에서 잡든지 진 밖에서 잡든지 먼저 회막문으로 끌어다가 여호와의 장막 앞에서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지 아니하는 자는 피 흘린 자로 여길 것이라. 그가 피를 흘렸은즉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율법의 내용이 이게 무슨 내용인지 오늘날 우리가 공히 꼭 들어야 될 내용이에요. 이 내용의 특징은 뭐냐? 너희들은 소고기 먹고 양고기 먹고 염소 고기 먹고 살 찔 그런 대상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율법에 나온 다섯 가지의 제사를 통해 밝혀집니다. 마지막 화목제가 하나님과 인간이 더불어 함께 먹기 위한 제사인데 가슴과 뒷다리는 제사장이 먹어요. 그다음에 피와 기름은 제단에 태워서 하나님이 먹고, 가슴과 뒷다리는 제사장이 먹고, 그다음에 나머지 고기에 대해서는 예배 참석자와 그 모든 일행이 화목 제물의 고기를 먹는 겁니다. 제사 순서는 번제부터 먼저 드리고 속건제, 속죄제, 소제 먼저 드리고 마지막에 다 같이 파티 벌이듯이 하나님도 먹고 하나님 앞에서 백성들도 ‘하나님 것으로 먹습니다’ 하는 그러한 태도로서 같이 하나님의 고기를 먹는 거예요.
이건 뭐냐면, 인간들이 기본적으로 ‘나는 살아야겠다’ 그거? 하나님이 허용하지 않습니다. 또 인간들이 ‘우리는 함께 살아야겠다’ 그거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인간과 어떻게 살 것인가와 관련된 것, 그게 하나님 맹세의 원형이었어요. 하나님이 인간과 어떻게 살 것인가?
하나님이 너와 같이 사는 방법은 ㉮하나님 쪽에서 맹세가 개입돼야 가능해요. 십자가를 모르면 하나님이 천국 문을 안 열어줘요, 너 노림수 있잖아, 노림수. 네 자아를 살리겠다는 이 노림수.자아가 왜 끼어드는데 거기서? 그거 뺄 수 있어, 못 빼?” “못 뺍니다.” “가, 가.”
그러니까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산다는 것은, 내가 살고 싶어서 제사 드려서 복 받아서 사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살아있음을 경유 할 때만 사는 게 돼요. 왜 이스라엘에게 그런 특수한 법칙이 주어지는가?
그것은 출애굽기 12장 29절에 출애굽 당시에 있었던 일인데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이건 사람의 맏이를 죽이는 거죠. 그런데 그중에 뭐가 있느냐 하면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유월절 날 다 쳐 죽인 거예요. 왜? 가축의 처음 난 것을 왜 죽입니까?
그것은 가축의 자식은 가축 기르는 주인의 생존에 보탬이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가축을 기른다.’ 거기서 나오는 우유와 그 고기 그것으로 하여금 우리 가족이 살찔 수 있고 원기 회복을 할 수 있어서 그래요. 가축을 왜 키우겠습니까? 가축들 좋으라고 키우지 않잖아요. 가축 키우는 사람이 자기의 생존을 위해서 키우잖아요. 주님께서 그것을 금지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살 가치가 없는데 넌 자꾸 가축 키우며 살고자 하는구나.’ 그렇다면 오케이, 그 가축을 하나님에 의해서 제거, 하나님의 경유된 가축으로 바꿔서 그 고기 먹어서 네가 있을 때만 넌 비로소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조건을 갖췄다는 겁니다. 이게 제사고 이게 율법이에요. 그게 맹세고요.
그래서 제사장을 경유하지 않는 인간은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게 원칙입니다. 이게 맹세 이게 바로 율법에 나오는 제사법이에요. ‘제사장을 경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제사장은 너희들이 먹여 살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먹여 살리는 샘플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맏잽이가 제사장이에요. 제사장이 어떻게 생존하는가, 가 바로 우리가 왜 생존해야만 되는가의 이유를 제공하는 겁니다. 왜? 제사장은 하나님의 맏잽이기 때문에. 그래서 레위기에 보면 ‘제사장은 너희의 어른이다.’ 너희의 어른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지정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제사장의 특징은, 제사장의 일과는 하나님과 함께 사는 거예요. 어디 중심에서? 회막 중심에서 사는 거예요.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도 성경이 와 닿지 않는 이유는 성경이 내 중심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은 회막 중심적이고 제사장 중심적으로 돌아가지 내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아닙니다.
반복적 충격에 의한 반복적 동요로 진행되는 것이 바로 맹세다. 반복적 충격에 의한 반복적 동요, 마음의 흔들림이 계속 진행되면서 나는 점점 더 소멸되고, 말씀은 그 소멸된 나를 통해서 계속 뽀글뽀글 올라가야 돼요. 그거에 대한 적합한 단어가 발포산입니다. 발포산이라는 것은 물 안에 어떤 알약을 딱 집어넣으면 뽀글뽀글 방울들이 막 올라오잖아요. 주님께서 이 죽어가는 우리를 살려주는 이유가, 우리로 하여금 말씀의 발포산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디 다가 집어넣습니까? 지옥 같은 세상에 집어넣어서 사람은 언약을, 맹세를 살리기 위해 일하지 나를 살리기 위해 일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포산으로 보여줘야 돼요. 나를 통해서 맹세를 살리고 말씀을 살리고 언약을 살리는 것이지 나를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보낸 자를 통해 맹세를 이루지 네 뜻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 말씀의 취지가 아니다, 이런 뜻이에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지 우리 인간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게 아닙니다.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내게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 우리로 하여금 이 십자가 복음을 알게 하시는가? 뭐 말해 봐야 안 통해요. 주의 뜻은 이겁니다. “너는 배달의 민족이다.” ‘배민’이라고 하죠. 배달의 민족은요, ㉮배달될 사람에게만 전하라고 하죠. 배달될 사람. 복음은 아무에게나 전하지 말고 주께서 보낸 자에게만 네가 가라, 이 말이에요. 주께서 보낸 자에게만.
그러면 주께 보냄을 받은 그 사람은 “아이고, 저보다 이렇게 복음을 많이 알기 때문에 저를 가르치는 군요.”라고 그렇게 오해하더라도 복음을 전하는 우리는 이렇게 답변해야죠. “제가 당신보다 잘나서 전한 게 아니고 저는 이런 약점으로 태어났습니다.”사람을 구제할 때 자기 약점을 상대가 쥘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지금 주께서 일하지 내가 일하지 않는 것을 그들에게 아울러서 증거 해야 돼요.
‘해물탕에 이거 뭐 먹을 것도 없는 꽃게가 왜 들어있느냐?’ ‘이야, 어쩌면 인생을 저렇게 간결하고 단출하게, 명쾌하게 표현했는’지요. 도대체 인간이라는 존재가 뭐냐? 다시용이에요. 다시용. 국물의 맛 내기 위한 것, 왜 이 세상은 죽어야 마땅함의 그 맛을 내는 용도로 인간을 만들어 냈습니다.
인간은 단점과 이단성, 하나님께 대드는 것 그것만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그 껍데기 꽃게의 등 껍데기 뜯어내고 그 안에 하나님께 대들고 반항하고 달려들고…, 그것만 쥐고 사시면 됩니다.
맨날 반항하고, 맨날 하나님께 화내고 분노하고 달려들고, 그것, 그것만 매일 같이 뿜어내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만드신 거예요. 왜? 그게 모여야 죄짓고 벌 받는 게 아니고, 날 때부터 죄를 뿜어내는 거예요, 날 때부터. 그러니까 성도의 삶은 그렇게 편해요. 왜? 죄만 지으면 되니까. 평소에 성깔대로 그대로 살면 되니까.
뭐가 성도의 삶이 어려워요? 네 성질 돋으라고 환경을 줬잖아요. 세상에 내 마음대로 되는 거 하나라도 있어요? 없잖아요. 없으니까 왜 없느냐? 성질나라고, 하나님께서 성질내라고 우리 인생을 그렇게 인도하시는 겁니다. 세리와 창기와 강도가 다른 게 아니고 우리 자신이 세리와 창기예요.
‘뭐 하나님 믿으면 도와줄 줄 알았는데 개코도 도와주기는, 인생이 더 꼬였다.’ That’s right, 바로 그거야. 그게 바로 다시용이에요. 왜 이 세상은 불 심판 받고, 왜 이 세상은 저주받고, 왜 제단에서 인간과 관계없는 가축의 모가지가 날아가느냐? 제단에서 왜 고기가 뜯기고 불에 태워지는가?
철저하게 이 세상은 저주받아 합당함을 증거 하는 다시물의 용도로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 지옥 물에 풍덩 잠그는 거예요. 그런 것도 모르고 우리는 내 몸 하나 살려고 내빼게 되면 모래사장이 점점 짧아지는데 어디서 해수욕할 거예요, 도대체? ‘내 쉴 곳 없노라.’ 쉬기를 이 땅에서 왜 쉬어요. 하늘나라 가서 쉬지.
약속의 땅, 하나님의 맹세, 인간이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보여주는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하나님이 하나님에게만 맹세했다는 사실을, 그 의미를 모르고 ‘하나님께서 환경 좋게 하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잘 섬기겠습니다’ 하는 되지도 않는 주장들을 했다는 것이 얼마나 자기 자신을 모르는 오해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약속의 땅에서 비로소 밝혀집니다.
아이 성을 점령하고 난 뒤에 여호수아가 말하는 취지가 뭐냐? “그거 봐, 하나님의 맹세대로 된다고 했잖아.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중 하나가 이렇게 헛짓했지만 그걸 넘어서서 결국 하나님께서 승리하신다고 했잖아.” 그런 취지로 여호수아가 나올 때 백성들은 안심을 했어요. 어떻게 이해했냐면 ‘그래 우리는 못났는데 하나님께서 못난 것을 딛고 기어이 우리로 하여금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해주시니 우리는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 든든한 하나님을 모시느냐.’ 하고 신바람이 났어요.
설교 여기서 끝나버리면요, 오늘날 우리가 딱 이 식이에요. ‘비록 우리는 못났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스스로 맹세를 이뤘기 때문에 우리는 신나서 이젠 천국 갈 날만 남아 있다’고 딱 이렇게 오해를 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에 갔을 때 아직도 여전히 내부 속에 감추고 있던 본성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이냐 하는 관심, 자기의 본심 속에 그것은 들어있지 않았어요. 하나님과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이냐는 애당초 자기들 마음속에 없었고 나만 살겠다는 거예요. 하나님 도움으로 나만 살겠다는 것이 생생했던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살고 싶은데 인간들은 ‘하나님 떼 놓고 나만 잘 살게 해준다면 그다음에 하나님을 섬길 용의가 있습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이게 무슨 신앙입니까? 장난치는 거죠.
이게 인간의 마음대로 노출이 안 돼요. 하나님께서 맹세를 이루는 과정에서 위장 귀순한, 위장 항복한 그들로 하여금 묻지도 않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과 화친을 맺고 맹세를 해버렸습니다. 나중에 그게 들통나 가지고 빼도 박도 못해요. 그제야 그들이 먼 데서 온 자들이 아니라 우리가 진멸해야 될, 없애야 될 민족인 것을 모르고 덜렁 살려준 거예요.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느냐? 이스라엘 내부에 있는 언약도 아닌 비맹세, 비언약, 악한 악마의 요소를 들춰냄으로써 우리는 평소에 내 말을 내 의식대로 한다고 하지만 내 깊은 곳의 무의식에, 하나님을 싫어하는 무의식에 의해서 행동해 왔음을 하나님에 의해 노출당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천국 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이렇게 역경으로 힘들게 살도록 해주셨죠. 그렇죠, 하나님?”라는 말을 우리는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경솔하게 내뱉을 수가 있다, 이 말입니다. 결국은 나 구원받기 위해 교회 나오고, 나 구원받기 위해 예수 믿고, 나 천당 가기 위해 하나님 믿는 거, 이 본색을 우리 언제쯤 들킬 수 있겠습니까?
내가 뭐라고, 내가 뭔데 왜 구원받아야 되죠? 다시물인데. 진즉에 우리는 죽어 마땅한데 왜 우리는 ‘최종 나는 구원 받았다’ 그쪽으로 해석해서 내 정서적 안정을 취하려는 식으로 성경 해석을 해달라고 요청하십니까? 있을 수 없죠.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서 맹세를 준 거예요. 중간에 자아가, 내가 왜 낍니까? 끼면 안 되는데. 거기서 빠져야 되거든요.
결론 부분을 제가 아까 말씀드렸어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맹세, 말씀을 말씀으로 살리기 위해서 죽어가는 우리를 살려낸다고요. 그러니까 못나기 짝이 없고, 나는 나만 챙기고, 나 천국 가기 위해서 교회 나오고, 기껏 하는 신앙 고백이 “제가 구원받기 위해 그동안 많은 이별을 했죠.” ‘그대를 만나기 위해서’ 여기서 ‘그대’를 주님으로 바꾸면 “주님 만나기 위해서 많은 이별을 했는지 몰라. 그대는, 우리 주님은 나의 온 몸으로 부딪혀 느끼는 사랑일 뿐이야.” 뭐 상당히 예쁨받고 귀여움받을 것 같습니까?
그런 결론을 내리면 그다음부터 십자가가 없어요. 어떤 분이 저한테 그런 질문을 했다는데 저는 기억이 없는데 질문하고 답변을 한 게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면 “목사님 사도들은 성령 받고 난 뒤에 어떻게 살았습니까?”라는 질문을 저한테 했대요. 오 목사님이 기억해서 저한테 이야기해줬어요. 그런데 제가 그때 이렇게 답변했답니다. ‘사도들이 성령 받고 난 뒤의 삶은 사도들이 성령 받기 전의 삶을 반복했다.’ 비로소 반복한 거예요.
그러니까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동안 얼마나 헛짓을 했는지 몰라.”라는 이야기를 구원받기 전에는 악착같이 그 고백을 내놔야 한다는 그런 압박감에서 했지만 이제 성령 받고 구원받은 사람은 즐겁게 “날 구원하기 위해서 주께서 이렇게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할 수 있는 거예요.
어떻게 즐겁게 하냐면 “내가 구원받도록 주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라는 이 엉터리를 그동안 얼마나 내가 반복했는지를 모릅니다.” 싱글싱글, 이렇게. 이미 자아가 갇혀있던 벽을 뚫고, 그걸 뚫고 나서 저쪽에서 그동안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교회에서 얼마나 애를 썼고, 성경 말씀을 어떻게 지키기 위해 애를 썼는가, 이것이 헛짓이고 바보 같은 짓인 것을 즐겁게 반복하면 되는 거예요.
■말씀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렇게 시답잖게 여깁니다. 왜냐면 자기중심의 사고방식, 그런데 예수 믿고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자기중심이 사라졌는가? 아니죠. 더 본격화 되어 있음을 비로소, 비로소! 우리 자신은 바로 내 중심이었다는 것을 옛날이야기처럼 소실되는 과거 이야기, 날마다 소실되게 해 주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이 맹세 차원에서 퍼부어 주는 이것이 바로 복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 이제는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우리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통해서 모든 맹세는 주께서 다 이루었기에 그때부터 새삼스럽게 우리가 내 중심으로 나 밖에 모르는 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이제는 즐겁게 여기면서, 어쩔 수 없이 반복하면서 주의 맹세만 쳐다보는 즐거움을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