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2: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약속이라는 실체가 이 땅에서 사건화가 될 때, 이렇게 ‘팍’, ‘팍’ 터지게 될 때, 홍해사건이나 여리고 성 사건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사건이 터지게 될 때, 주어지는 원칙과 원리를 그 중간과정에서 어떻게 잡을 것인지, 그것이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게 된다.
이것을 수학에서는 ‘TENSOR(?)’ 라고 하는데, 즉 수학에서는 힘을 가질 때 양(量)과 함께 방향까지도 이야기를 하는데, 즉 그 힘이 어디로 튀는지를 말이다. 그것을 ‘벡타량’ 이라고 하는데, 보통 말하는 양은 ‘스칼라량’ 이고 말이다. 그것을 이렇게 위의 좌표에서의 벡타량을 아래쪽의 좌표에서의 벡타량으로 바꿀 때는 ‘텐서’ 라는 수학적 개념을 동원해서 좌표를 같은 벡타량로 이동을 시킨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나오는 것이 그 유명한 ‘메트릭스’ 라는 것인데, 그것을 번역하자면 ‘행렬(行列)’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제가 이렇게 수학적 용어를 사용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약속이, 즉 묵시적 세계가 역사적 세계에 가라앉아서 사건을 일으킬 때는, 그 벡타(방향)가 반대로 뒤집혀서 온다는 것을 이야기하려고, 이렇게 어려운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까 모래시계를 언급했고 말이다. (아하, 그렇구나!)
예를 들어서, 이렇게 ‘A’ 라는 것을 뒤집어버리면, 그 기호가 ‘∀’ 라고 되는데, 그런데 여기에서 제가 말하는 뒤집어버린다는 것은 ‘∀’가 아니라 ‘B'가 된다. 그러므로 완전히 다른 것이 된다.
아무튼 ‘A’에서 ‘B’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문제는 이 ‘B’ 라는 것은 인간들이 도저히 예상도 못하고 상상치도 못한다는 것이다. 즉 ‘A’ 라고 하는 자아상을 가지고 있는 이상은, 제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전혀 예상을 하지 못하는 어떤 공백이고, 어떤 공란인데, 그렇게 비어있는 존재가 바로 ‘B' 라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 땅은 악마의 제국이고, 여기 위는 예수님의 나라인데, 이 예수님의 나라에 있는 이 모든 지점의 사건들이, 악마의 나라에 들어올 때는 이것이 뒤집어지는데, 어떻게 뒤집어지느냐는 것은, 그것은 여기 악마의 나라에 있는 사람들은 예상도 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어제 낮 설교 시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자기의 생활비를 모두 다 바친 어느 정신이 나간 여자에 대해서 말이다. 헌금을 하면서 자기의 생활비를 다 바치고 말았는데, 그러니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겠는가? 물론 성경말씀에는 나오지 않지만, 만약에 더 기록했다고 하면, 아마 “그 다음 날에 그 여자는 그만 배가 고파서 죽었다” 라고 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아무도 도와주지를 않아서 그냥 굶어죽고 말았다고 말이다.
그렇게 자기의 생활비를 다 바치는 것은 미친 짓이지, 그것이 어떻게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여자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미친 짓을 성도는 매일같이 하고 있는데, 즉 성도는 누구만 바라보면서 기도를 하는가? “저는 주님만 아시면 됩니다” 라고 하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기도를 무화과나무 밑에서 하고 있다. 마치 나다나엘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자기의 기도에 기를 기울여주시는 분이 계신다고 하면, 지금 당장에 자기가 죽는다고 해도, 그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뒤집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이다. 그러니 성도는 악마의 세계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데, 바로 그런 사건이 터진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약속이 악마의 세계에서 터진 사건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것을 저는 ‘불가능성’ 이라고 하는데, 즉 성도 속에는 그런 불가능성이 있다.
인간은 자아가 없을 때 사명이 남는데, 자아가 가진 사명은 사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아를 깨부수는 사명이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나는 왜 사는가? 나 때문에 산다” 라고 하면 안 되는데, 그렇다면 뭐라고 해야하는가? “나는 사명 때문에 산다” 라고 해야한다. 그런 사명은 하나의 사건으로 나타나는데, 그런데 그 사건이 어떤 원리인고 하니, 예수님에게 오면서, 예수님은 그냥 자기를 부인하려고 십자가를 진 것이 결코 아닌데, 그것은 자유주의나 현대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이고 . 예수님의 십자가는 악마로 하여금 더욱 더 악마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졌다.
바로 그렇게 내려오신 예수님의 몸뚱아리(?) 안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는고 하니, 장차 구원받을 성도들의 몸뚱아리도 다같이 포함되어서 들어있다. 예수님의 몸 안에 말이다. 즉 성도의 사명과 운명과 팔자도 바로 예수님의 몸 안에 포함이 되어있다. 약속이 악마의 제국에 내려오게 되면, 결국 유일한 인간인 한 남자인 예수님이 내려오면서 그 예수님의 몸은 구조가 매트릭스가 된다. 마치 침대 매트리스의 스프링처럼 촘촘히 배열을 짓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의 몸이 이 땅에서 구조화가 되는데, 즉 예수님의 몸이라는 새로운 구조와 이 세상의 악마의 제국의 구조가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냥 만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지금까지 말한 것처럼, 예수님의 몸이라는 구조가 이 세상에 오게 되면, 악마의 제국이 더욱 더 뚜렷하게 구조화되는데 협조를 한다. 누가 그렇게 협조를 하는가? 성도가 한다. 그러니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이 가지고 있는 사명을 부여받고 배분을 받아서, 그 배분을 받은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이 더욱 더 확실하게 악마의 제국으로 구조화되는데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이전에는 흐릿하고 희미하게 보이던 구조가 이제 성도 한 사람이 들어가게 되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가? 희미하게 보이던 구조가 이제는 보다 더 짜임새가 있고 촘촘하고 치밀하게 드러나게 된다. 즉 예수님의 복음을 반대하는 구조로서, 그렇게 ‘딱’ 하고 콘크리트화가 되어버린다.
◎고린도전서 3장 21절에 있는 말씀, 즉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그러니 북한의 핵폭탄도 누구 것인가? 바로 우리 것이라는 말이다. 복음을 위해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핵폭탄이 서울에 터져서 불바다가 되어야 복음이 복음답게 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하셔야만 하는가? 창세 전에 약속 안에 있는 B와 D를, 즉 B는 유황불이 떨어지는 지옥에 갈 사람들이 있는 지점이고, 또한 D는 생명책 리스트가 있어서 천국에 갈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B는 B'가 되고, 또한 D는 D'가 되도록 역사를 움직이게 되는데, 누가 와서 그렇게 하는가? 예수님이 오셔서 꾸미고, 또한 예수님이 보낸 성도에 의해서 역사가 순간 순간 재조립이 된다.
일종의 ‘해쳐 모여’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러니 한번 형성된 구조에 겁먹지 말고, 거기에 성도가 들어가게 되면 바로 그 성도에 의해서 다시 해쳐 모여가 된다.
예를 들어서, 어떤 교회에 자칭 성도이고 자칭 복음을 안다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데 거기에 어느 누군가가 들어갔다면, 그러면 그 교회는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들어간 사람으로 인해서 복음을 안다고 하던 것이 모두가 다 거짓이었음이 드러나고, 바로 그 사람으로 인해서 다시금 해쳐 모여가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 성도의 인생은 전혀 자기가 예상한 인생이 아니라, 십자가를 거쳐서 나온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1년에 한번이 아니고, 5년에 1번도 아니고, 또한 10년에 1번도 아니고, 그때그때 ‘해쳐 모여’ 라는 것이란 말이다. 즉 그때그때마다 주께서 십자가의 영으로 우리를 여기 이 지점에서(?) 또다시 뒤집히게 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성도는 날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할 수밖에 없는 삶으로 살아가게 된다. 지금까지 알아왔던 것을 또 다시 부인하면서, 새롭게 주님으로부터 십자가의 의미를 공급받는다.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심으로서, 우리는 분명히 자기가 가짜임에 틀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서 수시로 “나는 인간이다” 라고 우기는 존재임을 알게 하신다. 자기는 흙으로 돌아가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분명히 예수님만이 진짜 인간인데, 그런데 자기도 인간이라고 우긴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예수님이 거꾸로 해서 오시게 되면, 그렇게 거꾸로 해서 오신 사명이 무엇인고 하니까, 놀랍게도 이 지상의 세계가 얼마나 악한 세계인지를 더욱 더 독려하고 격려해서, 그들로 하여금 더욱 더 악을 조장하도록 하는데, 바로 그렇게 하기 위해서 누구를 보내는고 하니, 성도를 보내게 된다.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11장의 두 증인이 나오는 그 뒷부분인데, 즉 일곱 인, 일곱 대접, 일곱 나팔을 어떻게 할 때마다 그들은 더욱 더 격앙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모독하고 대들게 되는데, 바로 그런 목적 때문에 성도를 그들에게 보낸다. 그러므로 성도가 오게 되면, 그 성도 안에는 주님이 주신 거꾸로 된 사명이 들어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광야에서 마귀를 만나서 상대하신 것이지, 시시하게 우리 인간들이 아니다. 그렇다면 마귀는 어디에 있는가? 하늘에 A와 B와 C의 지점이 있으면, 그것이 이 지상에서는 A‘와 B’와 C‘로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마귀의 지점인데, 그렇게 구조화가 되어있다.
그러니 마귀인지 아닌지는 누가 와서 밝혀주어야 하는고 하니까, 바로 예수님인데,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니 마귀가 자진해서 “당신은 벌써 오실 분이 아닌데, 왜 이렇게 와서 나를 괴롭힙니까? 우리를 멸하려고 오셨습니까?” 라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서 가만히 있는데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오심은 악마로 하여금 감추어진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듯, 바로 성도의 역할도 또한 그러해야 하는데, 그러니 진짜 성도는 어느 교회라도 가기만 하면, 그동안 조용했던 교회가 이구동성으로 와락 달려들어서, 자기들이 가짜임을 드러내게 된다. 바로 그러한 사명이 성도에게 주어졌다. 그러니 우리가 과거에 복음을 알았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계속해서 죽을 때까지 사명을 사명답게 감당하도록 해주신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명자임을 알았사오니, 이제는 모든 만물이 우리 것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자유롭고 마음껏 주신 사명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