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새 계명

아빠와 함께 2024. 3. 12. 12:05

서울강의20230713a 요한일서 2장 7절(새 계명)-이 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일서 2장 7절부터 하겠습니다. “(7)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8)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렇게 되어 있죠.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바 말씀이거니와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개정한글)

7.  내가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로운 계명이 아니고 여러분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옛 계명입니다. 그 옛 계명은 여러분이 줄곧 들어온 그 말씀입니다.
8.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사실은  계명입니다.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이미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계명이 참되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났고 또 그대들의 경험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공동번역)

7.  Dear friends, I am not writing you a new command but an old one, which you have had since the beginning. This old command is the message you have heard.
8.  Yet I am writing you a new command; its truth is seen in him and you, because the darkness is passing and the true light is already shining.(NIV)

7.  Brethren, I write no new commandment unto you, but an old commandment which ye had from the beginning. The old commandment is the word which ye have heard from the beginning.
8.  Again, a new commandment I write unto you, which thing is true in him and in you: because the darkness is past, and the true light now shineth.(KJV)

7.  Beloved, I am not writing a new commandment to you, but an old commandment which you have had from the beginning; the old commandment is the word which you have heard.
8.  On the other hand, I am writing a new commandment to you, which is true in Him and in you, because the darkness is passing away, and the true light is already shining.(NASB)


[계명이란 모든 변화를 (툴툴) 떨어버리는 것]  이게 계명의 세계에요.

 


 [모든 변화에 대해서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 해석을 갖다 붙인다.] [모든 선입견을 반납하라] 너에게 일어나는 사태에 대해서 네가 해석하거나 해명할 권한과 자격은 없다.  계명 자체가 우리 인간이 모르는 사실을 그 안에 이미 품고 있어요. 너희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옛 계명에 준해서 일어나는 변화일 뿐이라는 겁니다. 계명의 세계인데 너는 나 하나만 챙기는 세계로 오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럼 세상을 어떻게 봐야 되는가? 세상, 여기다 계명을 집어넣어요. 이 전체가 계명이 되는 겁니다. 계명이 되면 계명은 여기서 대칭성을 유발해요. 대칭성을 낳는다. 대칭성은 마주치는 거예요.
빛 ↔ 어두움. 진리 ↔ 죄. 형제(우리) ↔ 나. 대칭성을 이루면   투쟁, 전투, 전쟁, 싸움이 일어납니다.

 


신앙생활은 수비하는 게 아니고 공격하는 거예요. 만약 수비하면 그건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못하고 있고 안하고 있고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 이유는 계명가지고 상대방을 공격 안하니까 그런 거예요. ‘나 하나만 편하면 되지. 돈 벌어먹고 살고 아파트 하나 사서 살면 되지 뭐.’ 이게 공격입니까? 이건 수비잖아요, 수비. 계명에는 대칭성이 있는 거예요, 대칭성.

죄↔진리라 할 때 성경에서 진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 제물이라 해요. 이것이 1장 10절에 나옵니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했죠. 하나님 앞에 짝이 필요한데 하나님이 하나님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인간이 범죄자가 돼야 되는 거예요.

우리가 범죄하게 되게 되면 좋은 점이 나는 계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계명에서.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 게 그거죠. 우리는 대칭을 없애버려요. 대칭을 없애고 나 하나 편하면 돼요. 나 하나 편하면. 나 하나 편하면 되기 때문에 나한테 내가 책임자가 돼요. 대칭성이 없고 나 단독성이라는 겁니다. 대칭성이 아니고 단독성.

인간의 본심은. 그들은 나이가 90돼도, 아직 80은 모르겠지만 90이 돼도 엄마 품을 못 잊습니다, 인간은.
‘엄마 보고 싶어. 나 집에 갈래.’를 확장시키면 세계에서 유명한 영국의 도서관, 뉴욕의 도서관에 있는 책 전부입니다, 이게. 그 수십만 권의 책을, 서울대학교에 있는 도서관의 책을 압축해보면 딱 이거 나와요. 엄마 보고 싶어. 나 집에 갈래. 그들은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것부터 시작해요, 출발점이. 계명이 어디서 태어나서 어디서 시작했는가 그들은 놓쳐버렸어요. 잊어버렸어요. 그들이 태어나기 이전에 계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자기보다 먼저 있던 것을 아주 그냥 무심코 본의 아니게 또는 본인의 뜻에 의해서 그걸 잘라 내버려요. 엄마와 더불어 시작했던 자기 인생을 그것이 자기의 시작이라 여기고, 엄마같이 자비롭고 엄마같이 다정하고 엄마같이 날 위해주고 엄마같이 무조건 칭찬하고 엄마같이 모든 아쉽고 필요한 것을 다 채워주는 그런 엄마의 세계를 현실화하는 데에 혼신의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엄마 보고 싶어! 집에 갈래.’ 하는 이것 때문에 여기서 인간은 나오는 게 있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나오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눈물이에요.
계명에는 눈물이 없습니다. 냉혹하죠. 우는 이유가 뭐라고요?  나를 나답게 편안하게 모실 안식처를 장만하고 위험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데에 인생을 다 보냅니다. 안식처를 마련하느라고. 이걸 여섯 자로 이야기하면, 둥지를 틀어봐. 엄마한테 칭찬 들어야지. 엄마가 잘했다고 사랑해주겠지.결국 인간은 어릴 때 유아적 인식에서 한 치도 빠져나와본 적이 없습니다. 요한일서 1장 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대해서는 인간은 전혀 관심도 없고 아는 바도 없습니다. 태초에 있는 생명의 말씀은 모든 것을 대칭성으로 만들었어요.

진리 아니면 무조건 죄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주변에 거짓말을 유발시켜서 진리를 돌출시키죠. 진리와 나머지를 차이 나게 만들어버립니다. 은 어떻게 나오는가?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어두움으로 만들어버려요. 아까 한 개 더 있었죠. 우리라는 것은 어떻게 생기는가? 나 위주로부터 핍박받고 박해당하는 모습으로 우리가 발생되는 거죠.
계명이, 옛 계명이 새 계명으로 바뀌어버렸어요. 그러면 인간들은 새 계명으로 확정된 거기에 대해서 내가 기여한 바가 아예 없습니다. 기여한 바가 없으면 그냥 적용만 받아야 돼요. 계명은 어떤 변화에 대해서 사적인 우리의 해석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세계에 대해서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내 중심이 아니잖아요. 옛 계명에서 새 계명으로 전환되는 데에 그 계명을 만드신 하나님 내부에 사정이 있어서 옛 계명에서 새 계명으로 바뀌어진 거예요.

자, 그거 말씀드리기 전에 지금까지 한 것 정리해봅시다. 엄마, 없습니다. 엄마 죽었습니다. 살아있어도 죽은 거예요. 엄마 보고 싶어, 이런 거 안돼요.‘엄마 보고 싶어’‘집에 가고 싶어’이게 뭐로 바뀌느냐 하면,‘계명 보고 싶어’  ‘계명 속에 들어가고 싶어’  요한일서에서는 계명 안에 들어가면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사귐.

요한일서가 읽어봐도 감이 오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의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뭐 요한복음도 쳐줍시다, 이 복음서에는 인간의 따뜻한 면이 있어요.  
그런데 요한일서는 뭐라고 보느냐 하면 지금 여기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 공관복음의 모든 이야기는 새 언약, 새 계명이 확정되기 전에 전환기 시절에 일어났던 일이라 보는 거예요. 최종 마감이 아니고 최종 결론 부분이 아니고 뒤섞여서 어느 것이 주님 쪽인지 어느 것이 마귀 쪽인지 헷갈리게 되는 그러한 과도기적 시기를 보낸 거예요. 그리고 난 뒤에 최종적으로 새 계명, 새 언약이 이루어졌단 말이죠.그럴 때 인간들이 ‘나 사도 요한이 말하는 새 계명 믿고 싶어.’하면 Too late. 너무 늦은 거예요. 너무 늦었다는 말은 너 실패했다는 말이 아니고 네가 더는 네 것을 네 행함을 거기다가 보탤 게 없다는 거예요. 내 행함을 보탤 게 없다는 거예요. 보탤 게 없으면 계명을 아는 사람은 뭐하면 되는가? 이게 오늘 강의의 핵심입니다. 아, 이거 너무 중요한 건데…… 빼지 말고 또 알려 드릴게요. [우리(성도)는 매일 삶을 통해서 새로운 계명을 만들면 된다.] 새로운 계명을 만들어 가면 돼요. 어떻게? 어두움을 공격하면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나오는 제자들 있잖아요. 그 제자들이 여러분, 공격적으로 보입니까, 수비적으로 보입니까? 수비적이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 그들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기 싫어서 그래요. 예수 그리스도가, 어릴 때 무조건 자기를 위해줬던 엄마 같은 분인 거예요. 아빠 같은 분이고. 그리고 그거 잘하게 되면 어디 간다? 영원한 안식처, 천국 가는 거예요. 영원한 집에 갈 수 있는 거예요. 그걸 노렸던 겁니다, 제자들이. 노렸던 게 아니고 아예 그게 인간의 본심이죠.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내가 남에게 용서를 해주면 남에게 용서했다는 나의 기여도에 의해서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는 자가 되죠. 그럼 용서받는다는 말은 어릴 때 엄마한테 ‘잘했어. 잘했어. 잘했어. 내가 너한테 맛있는 사탕 줄게. 떡 줄게.’ 라고 했던 인간의 자아가 잉태된, 자아를 품어낸 그 환경의 기억을 인간은 떨쳐버리지 못하고 그때 성립된 해석, 세상 보는 관점을 그대로 예수님에게도 같이 연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욱하고 감정이 올라오는 것.

그러니까 이 완성된 계명에, 표피에, 예수님의 살과 피, 이걸 요한일서에서는 화목제물이라 하는데 그 완성된 새 계명, 새 언약에 뒤늦게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랍시고 들어가게 되면 이건 too late. 너무 늦었어요. 이미 다 끝났어요. 모든 게 끝났어요.그럼 끝났으면 우리는 기여도 하지 못했고 뭔가 보태지도 못했으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내치면 그럼 군말 않고 지옥 가야 되느냐? 그게 아니에요. 새 계명 안에 주께서 사귐이라는 관계를 거기서 만들어냅니다. 새 계명 안에. 사귐이 있어가지고 새 계명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 사귀게 되면 그 사람은 행동 하나 하나가 이 어두움의 세계에서 빛의 자녀가 되가지고 계명을 만들어내요. 새 계명을 만들어내요.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새 계명, 그게 사랑이라 했어요. 자, 여기서 사랑이 뭔지 사랑을 언급해야 될 타이밍이 왔죠.  [사랑은 계명이 필요치 않은 것] 새 계명의 특징은 계명이 아니라는 겁니다. 계명은 옛 계명에 속한다는 겁니다. 사랑은 지시하거나 명령하는 게 아니에요. 계명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사랑은. 전 세계를 주께서 다 이루었다는 새 계명에 왜 계명이 들어가지 않는가? 그것은 옛 계명의 취지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들이 점점 더 깊이, 이제 깊이까지 따라오셔야 됩니다. 옛 계명의 취지가 뭐냐 하면, [옛 계명의 취지는 계명적이다.]
옛 계명은 계명적이에요. 옛 계명이라 하면 여러분들 잘 아시는 게 뭡니까? 십계명이에요. 계명적이라는 것은 십계명 자체는 사랑이 아니고 사랑의 반대인 저주용이에요. ‘엄마 보고 싶어. 집에 갈래.’ 하면, 이리와. 너는 지옥이나 가.

새 계명이 융통성이 없다고 우리가 비난할 게 아니고 옛 계명 자체가 융통성이 하나도 없어요. 인간은 그냥 해석하지 않습니다. 나한테 유리한가, 불리한가 해석하는데 유리한 것은 엄마 같은 상황. 불리한 것은 내가 버림받은 상황, 이게 불리한 거예요. 어떤 해석을 하더라도. 강의하는데 교인 수 얼마 안 나왔다. 이 분이 날 버렸구나. 삐침. 많이 왔다. 아이고, 날 사랑하는구나. 이러한 감정변화가 어디서 오는 거예요? 이미 경험했다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은 물 없다고 난리치니까 물을 주는데 못 마셔요. 물 없는 것도 약 오르는데 물이 있게 해서 약 더 올려버려요. 물 줬으면 마실 수 있는 물을 줘야지. 이게 뭐야, 도대체! 물 있으면서도 못 먹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24절에 보면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께 뭐해요? 하나님께 원망하죠.  드디어 계명에 의하면 옛 계명에 의하면 그들은 죄인으로 노출되었습니다. 옛 계명은 드디어 성공한 거예요. 걸려들었어, 너희들! 너희들은 엄마 사랑만 알지. 네가 죄인인 것을 모르잖아. 네가 죽어 마땅한 것을 모르지. 죽어 마땅하기 때문에 죽여버리는 거예요. 마땅히 죽여줘야 돼요. 마땅히.
그래서 물은 없지, 물 있는데 먹지도 못하지. 그 순간 모든 이스라엘은 죽었습니다. 일단 죽었어요. 일단이든 이단이든 무조건 그들은 죽었어요. 그리고 그 죽음이 물이 없어 죽은 게 아니고 그들 내부에, 하나님이 나를 지켜줘야 될 하나님인데 지켜주지 못하는 하나님에 대한 전투, 투쟁의식. 이게 인간이 죽어 마땅한 요소인 것을 하나님께서는 광야를 가면서 들추어내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2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물이 쓴데, 쓴 물이에요. 못 먹는 게 이미 확정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무를 그 쓴 물에 던지니까 물이 어떻게 됐습니까? 마실 수 있는 물이 되었어요.

인간들은 엄마 같은 하나님과 자식 같은 나, 두 같은 부류가 있으면 그걸로 됐다는 거예요. 그걸로 이 세상 해석에 대해서 무난하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거기다가 뭘 집어넣습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집어넣어버려요. 이게 십계명 받기 전의 원천이에요. 계명의 원천은, 그들로 하여금 살 가치도 없다는 것을 들추어내는 가운데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살 가치 없는 이유가 그들 속에 언제든지 하나님을 원망할 만한 마음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마음, [인간의 마음은 부러지지 않고 멈추지도 않는다.] 인간의 마음은 부러지지도 않고 멈춰지지도 않습니다.
인간이 뭐 하나님 알아서 잘 믿는다고요? 자기 마음이 얼마나 폭거적인지 몰라서 그래요. 내 마음이 얼마나 성질 더러운지를 본인이 인정 못해요. 그냥 내질러버리는 거예요, 인간의 마음은. 인간의 마음은 뚝 부러지면 좋겠는데 인간의 마음은 부러지지도 않아요. 감당 못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걸 하나님의 계명이 이스라엘에게 왔을 때, 이스라엘 속에 그런 마음이 있다는 것을 동행하시는 주님의 계명이 아니면 어떻게 이걸 발췌해낼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는 어떻게 옛 계명에서 새 계명으로 스스로 하나님 안에서 전환되느냐 그걸 보자는 겁니다.

인간이 타인에 대해서도 폭력적이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도 폭력적이라 하는 것은 가인과 아벨의 사건에서 충분히 드러났습니다. 하나님 사랑받는다 해서 때려죽여버리잖아요. 하나님 사랑받는다고. 왜 내 제물은 안 받고 동생 제물은 받느냐고 동생을 때려죽인 거예요. 동생을 때려죽이는 것은 이 땅에 하나님이 나타나면 하나님도 때려죽인다는 뜻이에요. 그런 마음이 인간 속에 있고 그 마음은 부러지거나 멈춰지질 않습니다. 그래서 브레이크 강하게 걸어서 내 마음 멈춰서 하나님 섬기겠다, 그건 거짓말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자기 결심 따라서 새 마음 바뀌어지는 게 아니에요. 인간의 마음은 최백호입니다.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내 마음을 주워 담을 수가 없어요. 내 마음이 통제가 안 됩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서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되어 있어요. 이 말은,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린 질병에서 너희를 유보시킨다는 거예요. 너희들에게 재앙을, 질병을 안 내리겠다는 게 아니라 유보시킨 겁니다. 유보(留保). 이 말은 너희들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명이 스스로 완성된 계명, 여기 있는 계명 말고 새 계명이 기다리고 있어요.

 

새 계명으로 전환되면서 뭐가 필요하냐 하면 새 계명 내용을 채울 죄인들이 필요한 겁니다. 죄인들.

지옥 가는 자는 죄인들이 아닙니다. 천국 가는 자가 죄인들이에요. 천국 가는 자가 죄인이에요. 천국 가는 자의 특징은 본인이 죄인이라는 의식이, 계명과의 만남을 통해서 의식이 들어오는 자들이 천국 가고.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세리 같은 경우죠.지옥 가는 자들은 계명의 취지가 들어오지 않아가지고 본인의 운명은 본인이 해석하기에 따라서 대처하기에 따라서 본인 인생을 꾸려나가는 거예요. ‘바르게 살아야 돼. 바르게. 그래야 천국 가.’ 이런 거요. 계명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아요, 그들은. 자기를 위해서 계명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여기 출애굽기 15장 26절은 철저하게 주님께서 계명 위주입니다. 너희들이 착해서 내가 질병 안 내리는 게 아니고 계명이 등장하는 타이밍, 그 시점을 봐가지고 계명이 너희에게 어떤 효과를 내리고 있는가에 대해서 의식을 갖게 만들어요.

그러면 애굽 사람만 원망한 게 아니잖아요. 바로만 원망한 게 아니잖아요. 따라 나온 히브리인들, 이스라엘 사람들도 원망했죠. 원망했는데 주께서 준비한 계명이 있어요. 그 계명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들로 하여금 쓴 물에다 나무를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 계명의 위상은 뭡니까? ‘쓰디 쓴 너희들의 죄악된 마음을 치료하는, 치료하는 하나님이니까, 치료하는 나무 같은 존재가 하나님의 계명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계명이 이스라엘 내에서 현실화되려면 이스라엘은 더욱 더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이끌어주십니다. 이래도 원망 안할 거야? 이래도 짜증 안낼 거야? 이래도 네가 의인인척 할 거야, 안할 거야? 이런 식으로.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계명의 역사를 쓰는 민족이 되는 겁니다. 벌써부터 그들은 그들의 역사 자체가 하나님의 계명의 내용으로 진입하게 돼요. 들어가게 돼요. 계명의 내용을 채웁니다. [옛 계명의 내용은 이스라엘의 죄, 원망]이죠. 이스라엘의 죄가 옛 계명의 내용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들의 처단은 정당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새 계명의 내용은 모든 인간은 죄인이었다.] 이거죠.

 

그래서 요한일서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1장 10절,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든다는 겁니다. 이 말은 같은 말로 하나님은 거짓말하는 분이 아니라는 하나님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것이 계명의 내용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필히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죄 지은 자로 규정해버리는 일을 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죄를 지으면서 새 계명의 내용을 유포하는 자가 되고 퍼뜨리는 자가 되고 성도가 사는 그 시대에 새 계명의 증인으로서 죄 지으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불신자들은 세상 나타나는 모든 현상에 대해서 본인이 반듯하고 올바르게 도덕적으로 착하게 살아야 이게 나한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불신자들의 특징은 어떤 경우라도 내가 죄인이 되어서는 안 되고 내가 거짓말하는 자가 돼서는 안 된다는 걸 목표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반면에 성도는 주께서 무슨 죄를 준비했느냐 그걸 찾는 즐거움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불신자는 바르게 살아야 되기 때문에 늘 불안하고 초조해요. 실수하면 안 되니까. 아차, 내가 그 말을 해서는 안 되는데. 그런 행동을… 아, 후회된다. 그 말을 왜 했을까. 거기에 비해서 신자는 절대로 계명에서 가출하면 안돼요. 가출이란 말 알죠? 집 나가는 거. 이미 계명 자체가 자기 집이에요. 계명의 남자고 계명의 여자에요. 계명에 이미 복속되어 있기 때문에 그 어떤 경우라도 주의 화목 제물로 다 이루심을 드러내는 쪽으로 확정된 해석을 우리는 그것을 증거하면 되는 거죠.

그게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 어떻게 구원받았어?” “사랑받았어.” “네가 그럼 그 사랑을 믿나?” “아니, 안 믿어.” “그럼 너 사랑대로 행하나?” “아니, 안 행해.” “그럼 뭐야?” “그냥 내가 하는 전체가 사랑이야.” 사랑이야  사랑이야~ 뭐든지 그게 사랑이야. 이게 바로 사도 요한 요한복음 21장이에요. 예수님께서 찾아왔던. 베드로에게 찾아왔고 사도 요한에게 찾아왔죠. 요한복음 저자였잖아요, 사도 요한이. 주께서 왜 우리를 버리지 않고 찾아왔는가 하는 그 문제. 그것이 계명 속에 있는 일관성 있는 내용이 새 계명으로 이전됐어요. 완전히 완성이 된 겁니다. 그 뜻이에요.

옛날에 이스라엘이 옛 계명의 파트너가 됐다면 새 계명의 파트너는 바로 여러분이라는 겁니다. 진짜 제대로 된 여러분이 요한일서 2장 12절부터 쭉 나와요. 아직까지 12절 가기 전에 할 이야기가 엄청나게 남아있습니다.

새 계명 속에 사귐이 있다는 거예요. 이게 요한일서 1장 6절에 나와요.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이렇게 돼있어요. 그러니까 성도의 일생이라 하는 것은 일방적이에요. 일방적으로 주께서 주도해버려요. 제 뜻은요?  필요 없어요. 내 뜻이라고 한다는 것은 나의 선입견이 그대로 살아있고 나의 의견, 나의 경험, 그리고 내가 어릴 때 ‘엄마 보고 싶어. 집에 갈래.’ 그것이 그대로 작동하는 바가 돼요. 내가 살아있으면. 그런데 그 작동들은 이미 그것이 죄인 것을 하나님께서는 이미 알려주신 바가 되는 겁니다. 이미 죄인이다.
사귐이 있기 때문에 사귀면 이것은 사랑 관계의 분출이 돼요. 터져 나오는 것. 성도의 존재를 통해서 사랑이 마구 마구 터져 나오는 겁니다. 자, 사랑은 뭐냐? 아까 사랑은 뭐가 없는 거라 했습니까? 계명이 없는 거죠.

그런데 옛 계명은 계명이 살아있죠. 살아있어서 자기 백성을 궁지로 몰아넣고 원망케 해놓고 하나님께서 치료해나가는 방식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이끌었죠. 새 계명은 그 순서가 이미 확정되었어요. 새삼스럽게 우리를 시험하고 자시고 하지 않습니다. 왜? 확정되었기 때문에.

요한일서 1장 8절에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 되어 있어요. 그 말씀을 다시 천천히 하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라 할 때, 우리가 우리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우리 속에 진리가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네 속에 주님의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가 중요하다는 거예요. 네 속에 들어있는 내 사랑 좀 보자! 이런 식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는 사랑의 운반체고. 사랑이 사랑답게 드러나기 위해서 철저하게 우리는, 시험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뭐가 되냐?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죄가 뭔지 알아야 할 것 아니냐? 주님의 사귐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죄 되게 자극하게 만들어요. 주님의 사랑이. 사랑이 이미 해석이 돼버리니까. 그럼 뭐가 죄냐? 사랑을 사랑으로, 온전함을 온전함으로 안 받아들이고 본인이 어떤 죄책감에 빠지는 것, 이런 거 있잖아요. 이게 바로 죄로 자백해야 될 거예요.

내가 주님의 사랑도 모르고 또 독자적으로 내가 반듯하게 살려고 애썼던… 세상에, 이게 또 나왔네. 그게 바로 1장 9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라는 그 ‘우리’는 단독적으로 우리가 아니라 사귀는 가운데서 벌어지는 상황이 되는 거예요. 주님과 사귈 때, 주님과 사랑 안에서 사귈 때.

나 너 사랑한다. 고맙습니다, 하지 말고 이 사랑을 사랑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너도 이제부터는 죄 같은 것을 네가 자백해야 될 남은 인생이 있다는 거예요. 죄를 자백하는. 사귀니까. 사귐이거든요.

새 계명이 뭐냐 하는 것은 요한일서 2장 2절에 나옵니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여기서 온 세상이라는 것은 성도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요한일서 뒤에 보면 이 세상에 속한 사람과 안 속한 사람이 구분되기 때문에 성도에 관한 죄를 이야기합니다.

화목 제물이 십계명을 완성시킨 새 계명이 돼요. 그게 사랑입니다. 그건 굳이 안 찾아보는데 사랑이 4장 10절에 보면 나와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를 사랑했고, 4장 9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사랑이 뭐냐?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이라고 이렇게 나와요. 요한일서에 쭉 설명이 나온다고요.

그러니까 요한일서의 내용 전체가 이렇게 세밀하지도 않고요. 항상 포괄적이에요. 통일적이고 포괄성 있고. 다 되어놓은 잡채를 그냥 나눠먹는 식이에요. 잡채를 만들 때는 레시피가 어떻게 됩니까? 온도는 어떻게 해야 되고 면은 이렇게 하면 되는 겁니까? 시금치는 언제 투입합니까? 참기름은 넣습니까? 그런 건 하지 말고 주는 거나 먹어라 이 말입니다, 주는 거나. 사랑이나 먹어라 이 말입니다.

사랑 먹으면 어떻게 되나? 사랑 먹으면 세상과의 차이 남을 알아요. 이 세상에는 사랑이 없어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은 있고 이생의 자랑은 있는데 사랑은 없어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은 바로 어디서 왔느냐 하면,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엄마 보고 싶어. 집에 갈래.’ 그 육신에서 나온 거예요.

그래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요한일서 자체가 구체성이 없고 그냥 포괄적으로 이야기하니까 구체성을 우리가 다시 여기서 집어넣어서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요한일서니까 그 구체성을 요한복음에서 찾아보겠어요. 요한복음 8장,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

오늘 아까 첫째 시간에 우리가 공부했으니까 한번 적용해봅시다.

제일 먼저 나온 게 뭐냐 하면, 새 계명 안 나오죠, 뭐부터 나옵니까? 옛 계명 나오죠. 옛 계명 보면 ‘간음하지 마라’ 나오죠. 옛 계명에 ‘간음하지 말라’가 나와요. ‘간음하지 말라’에 대해서 여인의 생각과 그리고 간음한 여인을 고발했던 바리새인 생각과 세 번째는 예수님 생각,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누어져요.

첫째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이 바리새인 생각입니다. ‘남편 있는 여인이 다른 남자와 현장에서 간음한 것이 간음이다.’ 당연히 땡이죠. 당연히 땡이에요. 이거 간음 아닙니다. 이거 간음 아니고

두 번째, 여인의 생각은 모르겠다는 거예요. 중립적이에요.
세 번째, 예수님의 생각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상태가 이게 바로 간음이에요. 이유가 뭐냐? 바리새인 생각에서는 새 계명으로 넘어가는 연결고리가 없어요. 옛 계명은 반드시 새 계명으로 연결이 되어야 돼요. 화목 제물을 통해서 연결이 되어야 돼요. 그런데 바리새인의 간음은 ‘나는 바람 안 피웠다’에서 스톱이 돼버려요.

그러면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이 어떤 사람에게 왔을 때 그 사람으로서 ‘나는 간음 안했다’로 멈추어지는 그런 십계명을 준 적이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십계명은 뭐로 이어진다? 오늘 요한일서 2장에 나오는 대로 십계명은 뭐로 이어져야 돼요? 이게 새 계명으로 이어져야 돼요. 그런데 중간에 나서서 이걸 인간이 틀어막은 거예요.
옛 계명은 고발용입니다. 사람 죽이는 거예요. 그건 로마서에 나오죠. 계명 자체가 완성을 봐야 되는데 사람들은 ‘나 계명 지켰다, 안 지켰다’로 스톱이 되는 거예요. 인간이 막아서는 겁니다.

아까 출애굽기 15장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율례와 계명을 하나님께서 드러내는, 환기시킨다 하는데 그걸 드러내는 환경은 누가 조성하느냐? 주님이 조성해요.

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바리새인들이 우리에게는 바르게 사는 계명이 필요하다는 그거나…  출애굽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하나님, 우리 이스라엘 목마른데 물 주세요.’ 당연히 하나님이 물 줘야 된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 우리 택한 민족을 바르게 살게 할 계명이 마땅히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그 사고방식. 그들은 그것이 죄인 줄 모르는 거예요.
그것은 본인이 태어나서 생각한 거고 창세 전에 있던 계명의 원래 원칙에 대해서 그들은 전혀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가운데서 누가 바람피웠나 그것만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도 이레에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우쌰, 자기한테 만족하는.... 그러면 요한일서 1장 8절과 10절에 의하면 그들은 ‘죄 없다’가 되겠죠. 옛 계명이 인간보고 ‘죄 없다’를 겨냥한 계명을 준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계명을 준 적이 없어요. 이미 선악과 따먹고 타락했는데 챙길 게 뭐가 있다고 자기 잘난 척합니까? 없죠. 가인과 아벨 또다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가인이 평소에 동생 못 잡아먹어서 환장한 사람이 아니에요. 형이 동생 죽이도록 유발한 것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한쪽은 제물 받고 한쪽은 안 받았어요. 이게 하나님의 계명의 취지입니다.
기어이 인간 눈에 띄지 않는, 인간을 지배하면서도 인간 눈에 띄지 않는 이 죄에 갇혀 있는, 죄에 갇혀 있다는 이 말을 아까 처음에는 계명에 갇혀있는 또는 죄를 고발하는 계명에 갇혀 있는, 죄에 갇혀 있는 다 같은 말이에요, 또는 죽음에 갇혀 있는 인간들이 처음에 창세 전에 있는 태초에 있는 계명부터 파악하는 안목이 있어야 되는데 그게 없고 ‘나 엄마한테 예쁨 받고 엄마한테 사랑받고 싶어.’ 그것부터 출발하니까 이게 해석이 안 되는 거예요.

자기 챙기는 해석만 나오지, 전체를 보는 해석이 안 나온단 말이죠. 그러니까 출애굽기 15장에서 의도적으로 물 없게 만들고, 어? 또 물이 있네? 있는데 못 먹게 만들고. 이중으로 인간의 약을 올려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 대한 인간들의 결론은 간단했습니다. ‘이것은 또 다른 하나님의 대책을 기다릴 하등의 이유가 없다. 하나님의 본색은 이제 우리 파악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투쟁, 싸움, 전쟁, 원망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 하고 노골적인 자기 본색을 드러낼 때 주께서 나무 던져서 마라를 단 물로 만들었어요.
출애굽기 15장 27절,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은 물 실컷 먹었어요. 그러니까 이거 보는 사람은 ‘아이고, 이스라엘 사람들 성질도 급하지. 좀만 참았으면… 원망 안 해도 되는데.’ 

 

원망 안 했으면 이 물도 못 먹어요!필히 원망을 해야 되고 죄를 지어야 되고 하나님 앞에 불평 불만해야 되고 자기 본색 드러내야 돼요. 그게 이스라엘의 임무에요. 역할이고 책임이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머쓱해야 되고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어야 되고 이사야처럼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하는 경험을 해야 된다고요. 그래야 자기가 자기 해석을 고집하지 않죠.

이 세상에 주어진 어떤 변화에 대해서 계명이 나오게 된 출처라 할까, 계명이 나오게 된 그 시작점에 합류하게 되면 이게 사귐이 되거든요. 태초부터 있었던 그 사랑에 들어가게 되면 이게 주님과의 사귐이 돼요. 사귀어봤습니까, 주님을. 아까 했죠. 사귐은 더 이상 우리 단독의 가출을, 집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게 사귐이에요.
“주님, 제가 이런 일을 했습니다.” “그거 네 단독행위 아니다. 너 호들갑 떨지 마라.” “제가 이런 실수를 했습니다.” “그거 네 상황 아니야. 왜 자꾸 너 스스로 혼자 그 일 했다고 생각해? 내가 일부러 유도했다는 생각 못해?” 그게 출애굽이잖아요. 광야 생활. 불신자들은 사귐이 없어요. 모든 책임을 누가 져야 됩니까? 본인이 져야 돼요, 본인이. 참 가련하고 불쌍해요. 정말 가련하고 불쌍합니다. 누구한테 도움 요청할 사람 없어요. 도움 요청하면 그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아요. 이용하지. ‘너 도와줬다. 그다음에 너 나한테 갚아라.’ 그렇게 된다고요. 구심점 자체가 태초에 생명의 말씀에서 나왔기 때문에… 거기서 쫙 퍼져 나오거든요. 태초의 사랑에서 퍼져 나오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모든 이들과 사귐이 되는 거예요.

계속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간음한 여인. 바리새인에 대해서는 제가 막혔다고 이야기했죠. 그 해석은 누구 해석입니까? 죄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인간 해석의 극한입니다. 인간 해석의 극한에서는 본인들 하기 나름으로 본인이 의인 될 수 있고 또 죄인 될 수 있다는 것이 극한이에요.
여인의 생각은 달라요. 만약 바리새인이 여자보고 ‘너 왜 간음했어?’ 그러면 여자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아까 마음은 부러지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고 자기가 쓸어 담을 수도 없어요. 그런데 여인이 모르는 게 있어요. 누가 그 상황을 일으킨 지를 여인은 모르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어느 인간도 자기 마음을 자기가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그 여인은 인정하고 있고 바리새인은 그걸 인정하기 싫은 거예요.

진짜 이거 어려운 이야기다. 어려운 이야기지만 여러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제가 과감하게 용기있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수련회에 이 이야기까지 나와야 되는지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인간의 마음이 있잖아요. 인간의 마음은 아까 세상의 변화를 해석한다 했죠. 인간의 마음은 멈춥니까? 안 멈추죠. 안 멈추고 그냥 가죠. 가는데 인간들이 어떤 수작을 벌이냐 하면 인간의 언어, 법으로 중간에 이 마음을 끊어버려요. 탁탁 끊어버린다고요. 마치 생선 토막 내듯이 끊어버리고, 끊어놓고 하는 말이 ‘나 잘했어, 못했어?’를 본인이 끊어놓고 본인이 판정해요. 여기서 여기까지 끊어놓고 쉬었다 갈게, 해놓고 또 끊어버려요.

쉴 때 이 마음이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방송에 보니까 고아원에 불쌍한 애들이 있어서… 요새는 고아원이 일반 가정보다 더 잘 살아요. 여러분 상상도 못합니다. 얼마나 나라에서 복지 돈을 쓸 데가 없는지 막 퍼부어요. 그래서 고아원 아들 불쌍하다고 라면 사주면 라면 먹지도 않아요. 그 안 먹는 라면 우리 집에 가져옵니다. 안성탕면. 착한 일을 했다 합시다. 착한 일을 했고 그다음 일주일 쉬고 그다음 주일에 또 착한 일을 했다고 합시다. 일주일 동안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마음은 멈추지 않죠.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뿌듯한 마음이겠죠. 뿌듯한 마음. 인간들은 선악체계여가지고 자기의 마음을 자기 유리한 쪽으로 잘라버려요. 핑계와 변명이 없는 말은 없어요. 전부다 모든 말은 다 그래요.  .

그런데 간음한 여인은 이걸 토막 안냈어요. 간음한 여인이 모르고 있는 것은 왜 나한테 그러한 마음을 줬는지를 그걸 몰라요. 모르는데 나중에 간음한 여인이 바리새인한테 질질 끌려왔죠. 왔는데 예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를 정죄한 사람이 있느냐. 정죄란 말을 할 때는 반드시 법이 동원되어야 돼요. 누가 너로 법을 가지고 딱딱 토막 내는 사람이 있더냐를 물어요, 네 주변에.

그래서 여인이 돌아보니까 다 도망쳤잖아요. 주님께서 바리새인의 속내를 글로 써버리니까 ‘야, 그다음 차례는 내가 돌 맞을 차례다.’ 전부다 겁나서 다 도망가버린 겁니다. 그게 대칭성이라는 거예요. 그게 대칭성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마귀가 덮어진 인간이 어떤 식으로 인간들을 장악하고 있는지 그 방식을 주님께서 그대로 흉내내서 그대로 적용시켜버려요. 극단적으로. 극단적으로 적용시켜버려요.

인간은 자기가 의롭다 의롭다 하면서 감당하다가 계속해서 추가적인 법이 주어지니까 그들은 감당 못하죠. 마태복음 5장에 “일점 일획이라도 나는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온 걸로 생각하지 마라. 나는 완성하러 왔다.” (마 5:17) 라고 해서 완성한 그 결과가 뭐였습니까?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이라 했죠.

그리고 그 산상설교의 모든 핵심은 뭡니까? 그 사람의 마음을 겨냥한 이야기에요. 남을 비판하면 너도 비판받는다. 이건 전부다 외부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합의를 본 법조항의 문제가 아니고 그 사람의 깊은 마음을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네 눈이 밝은 자가 마음이 밝다 하는 거고, 네 오른 눈이 범죄하거든 빼버려라.

이 말은 뭐냐 하면 오른 눈 뺀다고 범죄가 안 일어납니까? 범죄 일어나잖아요. 범죄가 마음의 문제기 때문에 오른 눈 뺀다고 해서 범죄 안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너희들 수준은 인간의 범죄를 인간이 자기 눈에 보이는 그러한 표면적인 것에서 멈추고 있다는 거예요.

이걸 왜 멈추냐는 거예요. 왜? 갈 때까지 가야지. 끝까지 가야죠. 끝까지 간 자가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문둥병자에요. 문둥병자가 구원받은 것은 바로 제물되시는 예수님과 교체되었기 때문이에요. 전체와 전체, 전부와 전부를 교체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일부는 깨끗하고 일부는 더럽다, 가 아니라 문둥병자의 특징은 뭐냐? 다 더러운 거예요, 다.

문둥병자를 욕할 게 아니고 우리 모두가 문둥병자인 거예요. 어느 구석도 손댈 수 없을 정도로. 이렇게 하면 ‘저는 아직 죄를 안 지었는데요.’ 기다려 봐요. 기다려보면 다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인간의 마음은 종잡을 수 없고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걸 역으로 주께서 바리새인에게 글로 썼죠. 글로 썼고 그 글을 딱 보니까 자기가 그 글에 의하면 자기가 노출되지 않는, 감추고 싶은, 내가 의인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감추어놓은 죄 있잖아요, 그게 노출되니까 그다음 차례는 그 글을 쓰신 주님한테 돌 맞을 차례가 돼서 다 도망갔어요. 그것도 도망간 순서가 있어요. 나이 많은 사람부터. 세상을 오래 살았다는 말은 그만큼 더 위선적이라는 거예요. 위선의 스킬, 기술이 늘었다는 뜻이에요. 자기를 위장하는 기술이 많이 늘은 거예요.

간음한 여인보고 너를 정죄한 자가 있더냐 하니까, 없나이다. 그때 주님께서 나는 너를 용서한다 했어요. 너를 용서한다는 것은 간음죄를 의미하는 게 아니에요. 그 여인 전체, 어떤 일 무슨 일도 주님께서는 용서하는 겁니다.

그게 요한복음에 나와요.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게 요한일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귐이 없는 것이 바로 전체가 죄이고 사귐이 있으면 전체가 이미 용서받은 상태, 사랑의 상태라는 거예요.

“왜 네가 마치 계명에서 가출한 것처럼 네 독자적으로 판단을 하냐, 인간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죄인 거예요. 네가 무슨 권한으로 무슨 권리로 네가 네 행동에 판단을 해? 주님을 완전히 바가지로 보는 거예요. 주님이 왜 오셨는데요? 혼자 놀지 말라고 오신 거예요. 혼자 놀지 말라고.

그럼 혼자 안 놀면 뭐가 돼요? 우리가 되겠죠. 그럼 나만 우리인가요? 아닙니다. 여기 2장 9절 봅시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자, 빛이냐 어두움이냐를 어떻게 판정하느냐 하면 혼자 ‘나는 엄마한테 사랑받았던 나만 엄마 보고 싶고 엄마 집에 가고 싶어.’ 나만 챙기면 된다는 생각, 그게 바로 어두움이에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형제로 오셨기 때문에.

요한복음에도 마찬가지에요. 요한복음에서는 형제보다 더한 친구로 왔어요. 친구인데 어떤 친구냐? 목숨을 바침으로써 이게 친구 사랑이라고 본을 보인 친구.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지 아니하면 그건 친구라고 말할 수 없다고 본을 보였던 그분. (요 15:12-17)

십계명에 의해서 옛 계명에 의해서 우리는 전부다 죽을 죄인이 된 겁니다. 상황을 그렇게 만들었으니까요. 계명으로 원망케 하고 사랑으로 치료케 하는 방식으로 광야에서 이끌어왔습니다.

사랑을 하는 것은 우리가 주께 얼마나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우리 식으로 통제 안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사랑하시는 거예요.

지금 제가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오는 모든 일들 있잖아요, 거기에 나오는 모든 일들, 가나  혼인잔치부터 해서 마태복음, 누가복음의 여러 가지 일들, 그 모든 일들의 해석이 딱 하나로 이미 결정났어요. 제자들이 그렇게 주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고 이해한 것은 홀로 살고 싶어한 거예요. 홀로 의인되고 싶은 거예요. 살아도 잘난 자로 살고 싶은 거예요.

결국 예수님을 통해서 십자가 짐으로써 그들이 잘난 나가 아니라 잘나게 혼자 사는 게 아니고 못난 나가 돼버린 거예요. 못난 주제에 혼자 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에 누가 찾아왔습니까?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찾아왔죠. 그리고 사랑이란 말을 끄집어냈어요. 네가 사랑을 아냐는 식으로 이야기할 때 베드로가 이야기합니다. “주님이 찾아온 자체가 사랑이잖아요.”라고 답변하죠. 주께서 아시나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께서 아시나이다.”

사랑이란 말을 가지고 접근한 자체가 이 자체가 주님이 사랑을 전하기 위한 사귐의 관계라고 보는 거예요. 요한복음은. 요한복음을 지었으니까 그렇게 해석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현장에 베드로 있었고 누구를 언급하느냐? 요한복음 마지막에 사도 요한이 언급돼요. 그럼 둘이 형제가 되죠.

그럼 그 형제, 성도와 성도 사이에 뭐가 끼어들어야 돼요? 주님의 용서하심이 끼어들어야 돼요. 용서하심이. 서로를 독자적으로 해석하면 안된단 말이죠. 뭐로 해석해야 돼요? 주님의 용서하심으로 해석이 될 때 비로소 그 두 형제는 사귐이 되는 형제에요. 안 그러면 마귀하고 사귀는 줄 아시기 바랍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뜻이에요. 오순절에 백이십 명이 앉아 기도하잖아요. 기도하는데 오순절 어떤 삽화에 보니까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람 머리 위에 불꽃이 전부다 피어있는 그림을 본 적이 있어요, 사람 머리 위에. 한 사람당 하나. 봇짐 지듯이 사람 머리 위에. 성령이 변호사로 온 거예요.

그러면 두 사람이 사귄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공통된 성령 안에서 같이 주께서 만나게 해준 거예요. 사귀게 해준 거예요. 사귐은 뭐가 반드시 나와야 된다? 사랑이 나와야 되죠. 완성된 옛 계명이니까. 사랑이 나오기 위해서는 둘다 자신들을 뭐로 봐야 됩니까? 죄인으로 봐야 되죠. 그래서 성도의 사귐은 서로가 주님으로부터 늘 죄인인 것을 규정받으면서 용서받은 자로 사귀는 거예요.

그러면 죄인으로 규정받는다는 근거가 뭐냐? 인간의 마음은 멈출 수가 없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명으로 내가 임의로 내가 해석해서 독자적으로 끊어나갈 권한은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가 나를 해석하지 말란 뜻이에요. 내가 나를 평가하거나 내가 나를 지적할 권한이 나한테는 없어요. 그럼 혼자 동굴 속에 사는 게 되니까. 오늘 잘 들어놨다가 수련회 때 참석하세요. 형제인지 아닌지. 자기 자랑질 하는 사람 있는지 없는지. 자기 복음 안다고 자랑질 하는 사람 있는지 없는지 한번 보세요.

2장 9절부터 보면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형제를 왜 미워하느냐 하면 너하고 사귀면 내 격이 떨어진다 해서 미워하는 거예요. 나는 고귀한 사람이고 나는 귀한 사람이고 나는 아름다운 사람이고 나는 의로운 사람이고 나는 내가 지킬 만한 가치있는 존재라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네가 다가오게 되면 격이 떨어지는 거예요. 야, 참 이 모임 물 다 흐려놨네. 저게 왜 기어들어왔지? 이런 거.

10절에 봅시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다고 했어요. 11절,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그리고 난 뒤에 12절, 자녀들아, 13절, 아비들아. 14절, 아이들아 쭉 나오죠. 이걸 합쳐서 뭐라 한다 했습니까? 개인이 아니고 우리에요, 우리.

그러니까 사도 요한이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나는 복음 알고 주님의 사랑 알아요.’ 말이나 끄집어내지 말고. 네가 너를 판단할 때 너는 사랑이고 싶고 성도이고 싶고 빛 가운데 있고 싶고 주와 사귀고 싶지. 그러면 네가 같은 성도하고 만나보자 이거에요. 성도하고 만나보자. 어떤 기준에 의해서 그 사람을 평가하는지 한번 만나보자.

그렇게 되면 여러분들 뭐라고 합니까? 싫어요. ‘싫어요. 내가 성도인 걸 내가 아는데 굳이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형제를 만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런 논리가 막 나오죠. 일단 귀찮고, 2번 돈 빼낼 것 같고, 3번 내 시간 뺏을 것 같고. 4번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하고, 여자는 남자를 귀찮게 하고. 짜증나. 혼자 사는 게 제일 편해. 나는 엄마 보고 싶어. 왜? 이 마음은 멈출 수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놓치는 게 하나 있어요. 주께서는 형제하고 잘 사귀면 너는 빛 가운데 있는 형제라 해줄게, 그게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반복해서 적용시킴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놓쳐버리고 잊어버린 사랑을 또다시 확인시켜 주시는 겁니다.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타입, 내 타입 아닌 것과의 만남을 통해서 내가 주님 사랑 안다고 입을 나불거리고 있지만 실은 내 판단을 내가 꾸준히 해왔다는 그 은밀한 죄를 들통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이게 뭡니까? 이게 아까 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출시키지 않는 것, 이게 사랑입니다.

나는 너 혼자 두는 법은 없어. 우리 집에는 가출이라는 말은 없어. 너는 이 사랑의 집에서 못 빠져나와. 마치 모든 인간이 저주의 계명에서 못 빠져나오듯이. 너희들은 특별히 이 사랑에서 못 빠져나와. 해석해. 좋아. 저 사람은 기분 나빠. 기분 나빠해. 미워해. 마음대로 미워해. 미워하고 요한일서 1장 10절로 돌아와. 실컷 미워하고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사랑 안에서 순환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계속해서 순환. 우리가 죽을 때까지 주님의 새 언약, 예수님의 사랑에서 못 빠져나오니까 그 안에서 구르면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내 인생 나름대로의 쓰는 기록하는 새로운 계명의 사례들을,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내 나름대로의 사도행전을 사랑이라는 확정된 걸로 계속해서 내 인생 속에서 사랑이 펼쳐지고 방출되도록 주께서 말씀의 순환구조에 집어넣으시는 거예요. 그게 요한일서 2장에 나오는 바로 성령의 기름부음 상태죠.

이제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결국 요한일서는 구체적으로 이렇게 하라, 가 아니라 결론에 이미 도달되었어요. 이미. 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 있으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랑을 이룰 때 까지 화목 제물 이룰 때까지 얼마나 많이 사람들과 부딪쳤는가 그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이미 결론은 사랑의 사귐이죠.

사랑의 사귐인데 그럼 성도는 사랑 안에 사귐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그 안에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있는 일을 다 겪게 만드는 거예요. 거기에 있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 그 주장이 누구 주장이다? 바로 우리 자신들의 주장이라는 사실을 들추어내는 거예요. 이미 사랑 안에 있으면서 용서받은 상태에서.

왜 그렇게 하는가? 베드로도 그렇게 했기 때문에. 사도 요한도 그렇게 했어요.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착각해서 계속 갔잖아요. 결국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어디 갔습니까? 도망쳤죠. 그다음에 어떻게 됐습니까? 주님이 찾아왔잖아요. 뭐로 찾아왔습니까? 사랑으로. 뭐하자고? 사귀자고.

베드로는 그렇게 해서 사귐이 되었지만 우리는 이미 성령으로 주의 사랑으로 해놓고 그 사랑이 어째서 사랑이냐? 어때서 우리가 죄인이고 어때서 하나님은 거짓을 모르는가? 우리에게 일상이라는 것을 이 세상이라는 것을 친히 친절하게 마련해주셨습니다. 실컷 세상에 나가서 무엇이 죄라는 사실을 더 깊이 있게 파악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단독으로 평가하고 단독으로 책임지려 하고 단독으로 나 자신을 해석하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 알기 전에 제자들의 삶이었고 실패의 삶이었던 것을 저희들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고치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은 사랑화 되어버린 그 안에서의 죄인 것을 도리어 기쁘고 반갑게 받아들이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아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밭가는 소처럼  (0) 2024.03.11
과거 바꾸기  (1) 2024.03.11
마음의 증강 현실  (0) 2024.03.09
나는 나의 죽음을 붙들고 산다  (0) 2024.03.05
시공간을 초월한 안목  (0) 2023.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