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방

사랑을 입은 자

아빠와 함께 2024. 1. 19. 14:29

환경을 바꾸는 전쟁. 그 환경을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에베소서에서는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성경은 인간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인간의 사랑은 환경으로 적합지 않다는 거예요. 예수님이라는 개체에서 뽑아내는 사랑이 마그마가 화산에서 퍼져 나오듯 죄와 허물로 죽었던 이 세상을 사랑이 침투합니다. 새로운 천국이 기존 천국에 침투해들어가는 방식을 사용하죠. 그것을 우리는 ‘환경’ 또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환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 자체가 환경이 되어버리면 이런 일을 해도 사랑이 되고 저런 일을 해도 사랑이 되고 어디를 가도 거기서 사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환경을 표현할 때는 ‘사랑하라’가 아니라 ‘너희가 사랑 가운데 있다’고 이렇게 표현하고 에베소서 3장에서는 이걸 달리 표현합니다.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3:17)” 3:18-19절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로 표현해요. 뭐를? 사랑을. 새로운 환경을.

사랑이라는 환경 안에서 거기서 내 사랑을 지워버리는 겁니다. ‘나는 누구를 사랑했다, 미워했다’ 자체를 무의미하게 지워버리는 방법은, 너 사랑 말고 너라는 개체 말고 다른 개체에서 쏟아져서 우리에게 환경으로 바뀌어지는 그 사랑이라는 환경, 그 사랑의 맛에 우리가 폭우에 소낙비에 흠뻑 젖듯이 확 젖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은 하나의 욕조 또는 장충 체육관 같은 새로운 환경이 되면서 그 안에서 우리는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가는 것이고 그것을 에베소서 4장에서는 ‘사랑 안에서 자라난다’고 이야기합니다. 에베소서 4:13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15절에 보면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했어요. 사랑 안에서.

여기에 적절한 비유가 있어요. 중력이 없는 우주선 내부의 무중력 상태에서 그 안에 우주인들이 늘 느끼는 것은 무중력의 높이와 넓이와 깊이와 그 폭이에요. 무중력 안에 뿌리가 박히고 무중력의 그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가 어떠함을 무중력 자체를 알면서 그 안에서 헤엄치면서 무중력의 극한까지 자라난다는 거예요.

에베소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환경 자체가 바뀌었다는 거예요. 이미 완료된 환경, 시공간을 초월한 환경, 모든 게 완료된 환경. 그러면 성도가 할 것은 이미 주어진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알아가면 되죠. 사랑을.

그러면 아까 했던 문장을 다시 해보겠습니다. “들어가도 좋습니까?” 우리가 주님께 묻죠. 그럼 사랑 안에서는 뭐냐? “들어와!” 드디어 허락이 되는 거예요. 이게 요한계시록 3:20절에 나옵니다. 누가 문을 열고 두드리면 네가 나와 함께 먹고 마시는 거예요. 그럴 때 ‘내가 주와 함께 있다’고 하지 않고, ‘주님 혼자 만드신 사랑 안에 내가 합류했다’고 표현하는 겁니다.

자, 이 사랑을 에베소서에서는 어떻게 나열하는지 이것은 빨리 한번 보면 돼요. 에베소서 4:15절에 “오직 사랑 안에서”, 16절에 “사랑 안에서”, 그다음 5:1절에 “사랑을 입은 자녀” 사랑이 덮쳤다는 거예요. 2절에 “너희도 사랑 가운데”, 그다음 5:28절에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사랑 나오죠,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이렇게 사랑이 나와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그러니까 이것은 사랑 안에서 계속 우리가 즐겁게 새로운 사랑을 만끽하면서 운행하는 겁니다. 이 모든 사랑은 어디서 나왔는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형성된 그 관계가 율법을 완성함으로써 결과로 생긴 거예요. 율법은 여러분들 아시다시피 율법을 완성하게 되면, 구약 신명기 28장에 율법대로 지키면 뭐가 온다 했습니까? 복이 오죠. 율법을 만약 어겨버리면 뭐가 옵니까? 저주가 오죠. 율법대로 지키면이 온다고 했는데 신약에서는 새 언약에 의해서 율법을 완성했을 때 사랑이 옵니다.

율법 완성을 누가 했습니까? 우리가 했습니까? 아니죠. 우리가 안 했죠. 정말 중요한 거예요. 내가 율법을 완성하지 않았습니다. 나 말고 다른 분이 한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헤엄치고 있는 거예요. 마치 무중력 상태처럼. 사랑을 만끽하면서.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늘 기도하면서 물으세요. “주님, 이것까지도 사랑입니까?” “그것까지도 사랑이다.” “왜요?” “들어와! ‘들어와’가 됐으니까.” 들어와! 가 돼요. ‘ 안에 들어오너라’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한테 시비 걸던 마귀가 우리하고 싸우려고 하는데 닭 좇던 개 꼴이 된 거예요, 악마가. 용서받아서 사랑 안에 있어버리니까 더 이상 율법가지고 우리한테 장난칠 수가 없어요. “너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문제 많은 거 알지?” 그때 우리의 답변은 뭡니까? “그래.” “그럼 너 지금껏 살아온 거 다 허사고 나중에 탈락되는 거 알지?” “그래.” “그럼 넌 지옥 가는 거야.” “오케이.” 아, 이 ‘오케이’가 돼야 되는데. ‘아니야, 그건 아니지’ 이렇게 되면 벌써 이건 곤란해요.

여러분 한번 보세요. 참 이게 재밌어요. 나 혼자 재밌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사람이 뭐든지 행위를 해요. 배고파서 밥을 먹는다고요. 밥을 먹는 행위가 끝나고 난 뒤 그다음 행위가 ‘누가 행했지?’가 돼요. 방금 누가 행했지? 거기에 이미 사라진 ‘나’가 등장해요. 내가 행했다. 내가 행했으면 여기서 ‘제대로 했을까? 내가 바르게 행동했을까? 말을 그따위로 하는 게 아니었는데.’ 뭐 이런 식으로… 실컷 사랑 안에서 주님의 사랑이 어떻고 저떻고 했는데, 어떤 행위를 하고 난 뒤에 그 행위에 내 의식이 가미가 되니까 졸지에 ‘사랑 안에서’가 아니라 또 도로 ‘내 안’으로 사랑 안에서 이탈된 느낌을 우리가 받게 됩니다. ‘제대로 해야 되는데. 주께 영광을 돌려야 되는데. 구원받아놓고 감사하지도 못하고 이게 무슨 수야.’ 하고 다시 자기에 대해서 갑자기 비판하는 셈이 되어버려요.

그런데 이걸 알아야 돼요. 여러분들이 컴퓨터에게 ‘너’라고 이야기합니까? 한번 답변해보세요. 컴퓨터보고 너라고 이야기해요, 안 해요? 안하죠. 왜 안합니까? 컴퓨터가 기계기 때문이에요. 기계한테는 너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죽여서 하나의 기계로 만들어버렸어요. 기계로 만든다 하니까 기존에 개혁주의 신학이 어떻고 거기에 물든 사람들은 상투적으로 내뱉는 말이 있어요. “우리가 기계야? 우리가 로봇이야?” 이렇게 나와요.

한번 볼게요. 인간이 기계가 돼요. 인간이 기계가 되면 인간은 죽습니다. 인간은 없어요. 나라는 인간이 기계가 되면, 기계한테는 너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럼 기계를 너라고 부르지 않는데 이 기계를 어디에 집어넣는가? 아버지와 아들 관계인 사랑으로 율법을 다 이루었던 오직 복음만 주어진 여기에 넣어버리면 인간이 기계가 되는 동시에 기계가 아들이 됩니다.

아들 되는 조건이 뭐냐?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다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아들이 돼요. 아들이 되면 이것은 주님 전쟁의 무기가 됩니다. 무기가 될 때 그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기계라고 하지는 않죠. 주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난 내 여자니까 너는 내 여자니까 너라고 부를께 뭐라고 하든지’ 이승기가 불렀던 <내 여자라니까> 노래 가사에 나와요. 이제는 너를 누나라 하지 않고 너라고 부를께. 너라고 불러주는 거예요.

왜? 주님의 동생이니까. 주님은 맏이고.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롬8:29)”. 맏아들 되기 위해서 ‘형상’이라는 공유적 관계에 있어요. 나도 하나님의 형상, 너도 하나님의 형상. 이러면 로봇이 아니고 이제부터는 주님과의 패밀리, 가족이 되는 겁니다. 가족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영적 전쟁을 위한 하나님의 무기가 됩니다. 그것을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내 여자라니까~ 신랑 되시는 주님이. 그러니까 이승기 노래가 얼마나 복음적인지요. 나는 신랑, 너는 나의 그냥 신부가 아니고 수많은 신부 가운데 하나. 신부들 중에서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는 남편을 사랑하게 되고 그 남편 주위를 떠나지 않죠. 그렇게 되면 남편 일과 연속성을 가지면서 남편 하는 일이 마귀와의 전쟁이라면, 주님께서 전에는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돌아가셨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이 주어지게 되면 이제는 주님을 대용한 새로운 작은 주님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성도가 출현하는 겁니다.

성도는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은 연속성을 주장하지만 성도 안에는 불연속성이 내재되어 있어요. 불연속성이. 이 불연속성 빼내버리면 전부다 헛바람 듭니다. 이 불연속성이라 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합니다. 그럼 이 불연속성을 살리고, 연속성으로 바꾸지 않으면서 우리가 나의 존재 가치가 아니라 성도의 존재 가치를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스라엘로 무기로 싸우는가? 인간에서 기계 되면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선 안돼요. 그럼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내가 성도되었다는 것과 내가 인간되었다는 사이에 무엇이 놓여있습니까, 중간에? 기계. 컴퓨터보고 너라고 부를 수 없는 과정을 거쳐서 성도되었잖아요. 그런데 성도되었다고 다시 인간 대우 받으려고 뒤로 막 갈 수 있습니까? 갈 수 있어요? 문워크 한번 할까요, 마이클 잭슨처럼? 갈 수가 없는 거예요. 이거 가려면 사랑을 취소해야 돼요. 사랑은 취소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가만 두질 않습니다.

그럼 아들을 어떻게 무기 삼는가? 아들에게 그냥 네가 알아서 전쟁하라고 하지 않고, 아들이 있으면 그 안에 아들에게 자리를 부여합니다. 위치를 부여해요. 여러분들 아시겠지만 이 자리는 ■초월적 자리에요. 뭐를 건너온 겁니까? 기계였는데 아들 되었다. 기계는 사람도 아니죠. 사람도 아닌데 아들 되었다면 이 자리는사랑이 되는 거예요.

사랑에서 뽑아내는 거예요.사랑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뽑아내면 성도가 되는 겁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다 어느 것 하나 사랑 아닌 게 없어요. ‘이리 오너라. 앞태를 보자. 저리 가거라. 뒤로 돌아 뒤태를 보자. 어화둥둥 내 사랑이야’ 판소리 춘향가에 나오는 사랑가처럼 일부는 사랑스럽고 일부는 미운 게 아니고, 사랑 안에서 통째로 다 사랑이에요. 채소에 설탕 입힌 걸 뭐라고 합니까? 과일에 설탕 입힌 거, 탕후루.

그래서 성도를 누가 건드리면, 성도가 무기거든요, 눈에 보이는 무기입니다, 주님은 눈에 안보여요, 건드리면 성도가 있는 자리에 침범한 게 되어가지고 누가 가만있지 않느냐 하면 주님이 가만있지 않습니다. 이게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이야기죠.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갈5:10)” 성도를 건드리면 주님이 가만두지 않습니다. 가만두지 않으면 어쩔 건데? 사랑의 반대말이 저주고 미움이거든요. 주님께서는 성도를 건드려서 그쪽으로 하여금 너는 지옥의 자리에 있음을 노출시키는 계기로서 성도를 무기로 사용하는 거예요.

지금 여러분 이정도만 해도 사실 에베소서 끝났어요. 사실은. 에베소서 끝났는데 남아있는 게 응용문제거든요. 자, 제가 기존의 에베소서 해석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에베소서 1장, 2장, 3장까지는 사도 바울이 복음의 이론, 핵심을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4장 1절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그러므로’부터는 은혜 받은 성도가 어떻게 행위로 실천적으로 옮기느냐를 보여주는 겁니다. 5장 1절에, 그러므로! 구원의 은혜를 받았으면 값을 해야 되는데 여러분들은 이제 여러분이 나서서 하나님의 사랑을 행사하시면 여러분들은 성도입니다.” 이런 해석이 그냥 모든 주석책마다 다 나와요.

이거 지금 성도보고 할 소리가 아니고 마귀가 인간보고 할 소리에요. “너 성경 읽었잖아.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인지 너 알았어, 몰랐어?” “알았어.” “말씀대로 실천해야지. 구약 이스라엘 봐. 그땐 그들이 자기 행함으로 실천하려 했는데 이제 너는 성령까지 받았잖아. 그거 써먹어야 될 거 아니야. 받은 성령가지고 이제는 새 사람 되어서 그대로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 이게 하나님의 진리, 그 이하 이상도 아니야. 그게 전부야. 오케이? 유 노?”

지옥이나 가라. 뭐로 돌아왔어요, 갑자기? 중간에 갑자기 문워크 했어요? 어떻습니까? 성도 근처도 안 갔습니다. 성도 근처도 간 적이 없어요, 이런 사람들은. 막 성령 도입하고요. ‘그러므로’ 도입하고 온갖 것 도입했는데, 인간입니다. 사람이 사람 대우받으려는 그 생각을 포기 못했습니다.

실정은 환경 바꾸기에요. 환경을 바꿔버려요. 어떤 환경이냐 하면 가정환경이라는 사랑. 사랑은 내가 행한 것이 아니고 사랑 자체가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서 예수님의 단독행위로 형성된 환경이에요. 환경인데 이것이 사랑이라는 이름의 가정환경으로 바뀌어요.

그것이 에베소서 5:22절에 나옵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이렇게 돼요. 환경이라는 거예요. 그다음 6장에 보면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역시 부모 자식 간에 사랑이라는 환경입니다. 그다음 6:5절에 보면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직장, 노동현장 속이라는 자체가 거기서 사랑을 접촉하고 느끼는 환경임을 주께서 확인시켜 줍니다.

가정도 전쟁터요, 부부 사이도 전쟁터요, 직장도 새로운 봉한 샘으로서 위에 뚜껑 이중 구조로 되어있는 현실세계 안에서 생겨난 바로 사랑이라는 환경이 그동안 주님께서 이 세상을 다녀가면서 얼마나 많은 치열한 적과 함께 영적 전쟁했는가를 이제는 우리 성도로 하여금 같이 체험에 동참케 하는 거예요. 이미 주님은 머리가 되었고 그 머리되시는 분이 아시는 사랑을 가정이라든지 직장이라든지 혹은 부부관계 속에서 그걸 살아있으면서 많이 접촉케 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주님이 다녀가서 만든 사랑의 장소거든요. 사랑의 장소가 악이 없는 게 아니에요.악이 득실대면서도 사랑은 그대로 살아있을 때 사랑이 되는 거예요.그래서 지옥 속에서도 버텨야 그게 천국이에요. ‘지옥은 가라. 우리끼리만.’ 아니에요. 그거 천국 아니에요. 천국이 배태되고 탄생된 그 환경이 보존되어야 돼요.

거기서 사랑은 모든 것을 이겼어요. 심판을 이겼다는 거예요. 심판을 이겼다는 것을 사랑이 증명하기 위해서는 나에게 쏘아대는 심판의 화살을 우리가 만끽하면서 내가 놓쳐버리고 잊어버린 사랑을 더욱더 깨닫는 계기가 되어야 돼. 그러니 주변에 고소하고 고발하는 자들이 좀 있어줘야 돼요. 심심하게 살면 곤란하죠. 네가 나를 고발해? 이건 주님의 사랑에 대한 모독이야. 고발해. 고발하면 할수록 주님이 주신 사랑이 적이 있음으로써 더욱 빛나게 되죠. 아, 내가 몰랐던 사랑이 새롭게 느껴지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뭐로? 결혼을 통해서. 결혼 안했으면 그 가정을 통해서. 그러면 결혼해서 깨지면 그 자식을 통해서. 그냥 위치가 중요한데 그 위치는 이미 다 이루어진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환경적으로 이 환경 안에 필요한 위치를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그 위치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때그때마다 위치가 상황이 바뀌게 되면 전에 싸우던 비(非)-복음과는 다른 방식의 비-복음이 또 나오는 겁니다. 계속 우리 자아를 자극해요.

‘그래, 나는 성도답게 살아야지.’ 또 이상한 생각이 막 들기 시작합니다.

내 위치를 내가 정하고 싶은 거예요. 내 위치를 내가 정하면 어떤 과정이 생략되는 거예요? 나는 주께서 너라고 불러줄 가치도 없는 하나의 죽은 흙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누락하는 거예요. 꼼지락거리든 어쨌든 간에 뭔가 내가 인간으로서 나가 있다면, 그 나를 소급해서 내가 ‘없었다’와 ‘있다’의 경계선을 누가 정하고 싶어 해요? 내가 정하고 싶은 거예요. 아, 여기서부터는 내가 무기물이고 하나의 광물이고 여기서부터는 꼼지락거리고 생명이 움직이는 것 같은데 있으니까 그걸 생명이라 하자. 이것이 오늘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외부환경이 내부환경으로 번져요. 이렇게 되면 사랑 안에서사랑이 내부환경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굳어지게 됩니다.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면 이것은 말씀이라는 외부가 이 내부에서 요한복음 1: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죠. 그 과정에 답습하는 자기 위치를 주께서 우리에게 허락해요. 어디 안에서? 부부 관계에서, 가정 속에서, 직장을 통해서, 삶의 환경을 통해서요.

그러니까 지금 이런 이야기가 뭐냐 하면 나는 태어나기도 전을 예상도 못했는데 이미 영적 전쟁터에 우리가 놓여지게 된 거예요. 영적 전쟁터에. 그래서 제목을 제가 <영적 싸움>이라 했고 그 근거는 에베소서 6장에 있습니다. 6:12절에 보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의 씨름은” 씨름이란 단어가 아주 적절한데 씨름이라 하니까 갑자기 뭐가 생각납니까? 얍복강에서 야곱과 하나님의 사자가 씨름하죠. 이걸 신약적 관점에서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야곱은 이스라엘과 싸운 거예요. 내가 진짜 나하고 싸워서 내가 나라고 알고 있는 것은 그동안 악마의 환경에 속한 하나님이 거부하는 나였음을 얍복 강가의 씨름에서 발견하는 겁니다. 그러면 가짜 나가 진짜 될 때는 복을 받아야 돼요. 복을 받는 과정이 뭐냐? 너를 죽여주는 게 복이고요. 죽은 그것을 재료로 해서 거기서 이스라엘,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의 형상이 거기서 나올 때, 브니엘(Пенуэл), 생명이라는 게 나올 때 그때부터 이스라엘은 ‘생명의 담지자(擔持者)’라 합니다. 생명의 담지자란 표현은 잘 쓰지 않는 단어인데 담지자는 한자말입니다. 운반체, USB, 외장하드 이렇게 보면 돼요. 그 사람이 어딜 가도 그 안에 그리스도가 같이 가는 것. 씨름이 있는데 그 씨름이 사랑이라는 새로운 환경이 확대되는 하나의 계기가 된 겁니다. 그 야곱의 씨름으로 말미암아 낳은 열두 아들이 이런 한 가족의 식구가 아니고 하나의 국가가 태동하는 원천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야곱이 하는 씨름은 야곱이 했을까요?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 했잖아요, 구약 때는. 신약에 오면 이게 바뀝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야곱을 상대로 해서 씨름을 한 거예요. 그래서 야곱에서는 누가 이겼습니까? 야곱이 이겼어요, 천사가 이겼어요? 천사가 급습을 해서 한방 맞고 쓰러졌죠.이게 신약에 오면 인간이 이기고 예수님이 패배한 거예요. 해석이 그렇게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누가 죽어요? 예수님이 죽는 거예요. 하나님이 죽는 거예요. 인간에게 맞아죽는 거예요. 맞아죽으면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더 이상 기대 걸 위치가 없음이 확정됩니다■. ‘버리자. 이 세상 불태우자. 버리자.’ 가 돼요.

그런데 죽을 때 예수님이 패배했는데 패배함으로써 승리한 게 있습니다. 물론 십자가에서 마귀가 승리하고 인간이 승리했지만 신약에서는 그걸 ‘언약이 승리했다’■고 해요. 언약이 승리한 결과가 우리에게 난데없는, 얼토당토 않는, 뭘 해도 사랑이 되는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의 새로운 환경으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이것을 가지고 ‘스카이돔 시스템’이라고 하죠. 패트리어트 방어 시스템. 성주에 있어요. 이미지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지상에 빌딩이 있고 사람 있고 나무가 있다면 공중에 보이지 않는 방어체제가 형성되어서 바깥에서 드론이든 뭐가 오게 되면 자동적으로 다 파괴되게 되어 있어요.

이걸 사랑 안, 예수 안, 그리스도 안, 십자가 안, 성령 안, 전부 다 안, 안, 안, 안, 전부 다 안에 있어요. 여기에 개인은 없어요. 돔 안에는 하나의 가족이 있어요. 나를 위한 구원은 애초부터 이 안에서는 성립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사랑이 무기가 되는가? 우리는 환경가지고 싸우기 때문에 무기가 되는 거예요. 내가 싸우는 게 아니고 나를 둘러싼 패트리어트 돔, 돔 시스템, 방어체제 이것 때문에 우리는 무기가 되는 겁니다. 로마서 8장 이 말씀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가 않아요. 노래방에서 질리지 않는 노래만 부르지 말고 이런 것도 한번 보세요. 8:33절,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이렇게 나오잖아요.

자, 우리가 공부한 것이 허사인지 한번 봅시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할 때, 하나님이 뭘 선택했는가? 제가 정답 드리겠습니다. ‘예수 안’을 선택한 거예요. 예수 안. 예수 안에는 예수님이 들어있어요. 예수님이 선택함으로써 예수 안이 형성되었고 예수 안에서 우리가 구원받은 거예요. 이것이 에베소서 1:4절에 ‘창세 전에 예정하사’ 우리를 예수 안에서 선택한 거예요.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러니까 여러분들 생각해보세요. 그렇게 어려운 이 에베소서가 너무나 쉽지 않습니까? 굉장히 쉽거든요. 에베소서 4장으로 한번 넘어가봅시다. 이제 이것을 현장에 적용시켜봅니다. 4:16절에, “그에게서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그다음에 뭐 나옵니까? 목적이 뭐에요?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죠. 사랑 안에서. 16.  from whom the whole body, being fitted and held together by that which every joint supplies, according to the proper working of each individual part, causes the growth of the body for the building up of itself in love.

그러면 그 구체적인 예가 25절, 26절 계속 나와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이게 뭡니까? 주님께서 이 경우를 다 해결했던 것 속에 네가 놓여있기 때문에 성도는 ‘도대체 주님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습니까?’라고 할 때, 바로 이런 것들을 해결해주시는 거예요.

하나 예를 들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여기에 대해서 옛날 내가 나의 전쟁에서 내가 주인공으로서 마귀와 싸운다면 우리는 분을 품되 서쪽을 향해 시계를 보면서 일기예보에서 미리 확인한 일몰시각을 계속 체크해야 돼요. 참아야 돼. 해가 서산에 넘어갈 때 참다가, 해가 넘어가면 분을 품어도 괜찮아요. 왜? 우리는 율법적으로 살기 때문에.

사랑은 환경은 일을 벌이고 난 뒤에 통보하는 거예요. 통보하는 것. ‘해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할 때 해 지고 말고… 성나는데 해 질 때까지 어떻게 기다립니까? 시간이 몇 시인지 관계없이 그냥 분을 내죠. 그게 인간이었어요. 인간이었습니다.

인간인데 그다음 인간이 기계로 바뀌어요. 이건 인간도 아니에요. 기계로 바뀌어요. 기계로 바뀌었다가 기계에 불연속성을 가미해서 뭐로 바뀝니까? 하나님의 아들로 바뀌니까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이 몽땅 사랑이었다는 거예요.

주님 주신 은혜요 선물이었다는 것을 보면서 감사하며 다시 이걸 보는 거예요. 보게 되면 이 사랑 안에 있다는 것, 환경 안에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분낼 거 또 없어요? 해지든 말든 또 성질 낼 것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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