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방

종말 현상

아빠와 함께 2024. 1. 19. 13:05

도닦는거에요. 인간은 노동하면서.

내가 이렇게 고생에대한 대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 대가가 뭐냐? 내가 정말 보석같이 빛나는 인간으로 단련될 수 있는 기회라고 해석을 내리는데 그 해석은 노동해서 얻어지는게 아니고 처음부터 그게 잠복되어있었고 잠재되어있었던 거에요. 인간속에. 어떤 결과가 났든 그것은 나를 좋게 보는 선상으로 해석하는 것. 그러한 성질. 그 성질이 에베소서 2장 2절과 3절에보면 특히 3절에보면 그걸 특히 하나님보시는 그걸 뭐라고 해석하느냐? 욕심으로 보는거에요.

자기정화와 자기 인격 도야를 쉬지 않는 그 모습이 진노의 자녀의 모습입니다. 보니까 여러분은 진노의 자녀 근처도 안갔어요. 인간의 욕망은 신이되는거에요. 우리가 아는 상식선의 신은 뭐냐? 순결하고 깨끗하고 사랑이많고 자비심이 넘치는거에요. 그걸 누가 이야기 해주는가?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쪽에 그게 최고 단계의 등급에 정화가 바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서기관들, 장로들이에요. 예수님도 마태복음 5장에서 “너희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간다.” 천국에 가고자하는 그욕심과 열의가 마지막 도달하는 어떤 경계선 점인데 경계선점을 먼저 선점해서 이런식으로 가야 천국으로 훌쩍 뛰어넘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 그것을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9장인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셈이다. 그게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셈이에요. 계시를 대체한 역사 때문에 그것이 자기 정당성, 자기동일성을 역사로 보완을 해주는겁니다. 역사가 이러니까 우리는 한결같다는 이야기를 계속 하고있는 근거가 역사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아니했다. 어쨌든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하늘에 앉히신 분은 에수님입니다. 그리고 부활도 마찬가지에요. 죽었다 살아난 사람은 있지만 부활의 첫열매는 예수님이지 그들이 부활의 첫열매가 아닙니다.

부활은 죽은자가 살아나는 것, 이것 부활 아닙니다. 이게 부활이 아니에요. 부활은 뭐냐? 여기 한자를 더 넣으면 돼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는거에요. 죽은자들 가운데서. 그러면 부활이 될려면 배경으로 어떤 환경이 우선되어야 됩니까? 모조리 다 에스겔 37장의 말씀처럼. 모조리 다 해골, 해골들의 집합체로 규정이 나야 비로소 아무도 살아 날수 없다는 것. 이게 완전히 불연속성이죠. 어떤 자도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명확하게 말씀으로 확정지을때만 비로소 부활의 첫열매가 거기서 나오는겁니다. 그래서 부활은 누구의 몫이냐 하면 사람 몫이 아닙니다. 부활은 오직 언약 완성자 예수님 몫이에요. 그게.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하늘나라 왔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습니까? 구약의 대기자, 엘리야, 모세 구원 받습니까? 아브라함, 이삭 못받습니다. 그들은 누구를 믿었어요? 여호와를 믿었잖아요. 여호와와 그들 사이에 언약관계가 형성되어있습니다. 그언약관계 그 자리, 그 관계망을 누가 인수 인계를 받느냐 하면 주님이 인수인계를 받아버려요. 주님이.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 내부에 설치되어있던 모든 시스템을 일거에 인수인계를 받아버리면 여호와와 관계되었던 모든 자가 주님의 선물의 혜택자가 되는겁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에베소서 할꺼니까 미리봅시다. 에베소서 4장 8절에, “그가 위에 올라갔을 때 이때 사로잡힌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뭐를줬다? “선물을 주었다.” 모든 자가 예수님의 적 인데 적들 가운데 포로잡은 자가 있을 거에요. 그 포로잡은 자에게 하나님께서 자기의 적이지만 뭘줍니까? 하나님의 선물을 주죠? 아까 선물에 무슨 세트? 3종세트 5종세트 막가는거에요. 주께서 그냥 주시는거에요. 이유가 뭐냐? 주님이 주님되심을 확인차 그걸 증명하는차 주님이 주님되기 위해서 여호와가 여호와 되기 위해선 백성이 필요한 것처럼 주님이 주님되기 위해서 주님이 하는 업적을 찬양하는 찬양대. 다윗의 구조. 다윗의 구조가 찬양대에 있잖아요. 성전의 문지기들. 이러한 자들이 오직 주의 이름을 위해서 필요했던 겁니다.

에베소서 2장 한번 봅시다. 2장 20절에, 뭐 성경해석 그냥 다풀려요 다풀려. 2장 20절에.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렇게 되어있죠.

모퉁이돌이 고정화 되지 않으면 이건 모든 구원은 취소됩니다. 이 어려운 이야기 한번 해봅시다. 시편 118편에요. 뭐가 어려우냐 하면 22절부터 24절까지. 시편에 나오는 이야긴데 이 해석을 위해서 우리는 에베소서를 경유해서 이 해석, 십자가를 경유해서 해석을 어떻게 되는지를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그러면 성전의 종류는 몇종류? 두종류. 이스라엘은 성전이 필요해요. 그러면 이스라엘 종류는 몇종류? 두종류. 가짜이스라엘과 병행한 진짜 이스라엘. 가짜성전과 병행해서 진짜 성전이 가짜이스라엘 그리고 가짜성전에의해서 버려지는거에요. 핍박받는 방식의 활동이 주님의 언약안에 포함이되어있다는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진짜 이스라엘, 가짜가 가짜로 들통나야되고 성전이 무너져야 비로소 드러나는 감추어진 비밀인거에요. 했는데 아직까지 여기서 건축은 건축물입니다. 건축구조물이에요. 22.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23.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24.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게 어려워요. 건축이 있다는 것은 공간의 문제인데 갑자기 공간의 문제가 뭐가 결합이 됩니까? 시간문제. 이날. 특별한날. 인자의 날, 단 하루, 모든 시공간이 완전히 소멸되버리고 불타버리는 그날. 그날과 결합되는겁니다. 종말은 위층의 시간이 등장되게되면 위층의 시간. 또는 위층의 이스라엘의 등장 또는 위층의 성전이 등장하게 되면 비록 지상에 성전이 있고 이스라엘 있고 시간이 있더라도 그것은 뭐냐하면 그 존재자체가 종말을 드러내기 위한 벌써 종말이 벌써 시작되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증거물로 유지가 되는겁니다. 우리는 없애는것만 좋아하는데 없어지지 않으면서도 종말을 경험할 수 있는 체험 학습. 놀이동산을 우리에게 허락을 하시는 거에요.

그러면 동일성을 보장하는 우리의 육신도, 육신이 두종류에요. 고린도후서 5장에서는 이 육신을 뭐라고 했느냐하면 하나의 드레스로, 옷으로 이야기했어요. 새옷이 장롱에 있는 한 새옷에 대해서 마음이 끌리죠. 그러면 새옷이 장롱이 진짜 값진 옷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갈 때 허름한 옷을 입고 간다는 것은 이거는 뭐냐하면 내가 허름함이 무엇을 증거하느냐? “나 집에 새옷있다.” 이걸 증거하는 방법으로 구애받지 않고 허름한 옷을 입고 돌아댕길수가 있는거에요. 이 육신이 부담이 안돼요. 내가 늙어 요양병원에가서 치매걸려서 아들보고 “아저씨 누구세요.” 이게 전혀 부끄럽지 않아요. 이게 우리모습이거든요. 이게 전혀 복음안에서는 부끄러움이 없나니. 이거는 복음의 하나의 과정이에요. 더 이상 내육신에 연연할 필요가 없는 자유함을 우리 육신이 있음으로써 보장해주겠다는거에요. 자 그렇다면 여기에 그만큼 우리의 현재 입장이 종말 속에 있는거죠. 그래서 한번 정리해보면 “이스라엘에 존재 자체가 종말을 증언한다.” 이스라엘 존재 자체가 종말을 증언해요. 그다음 이스라엘 자리에다가 교회 또는 성도를 집어넣읍시다. 성도의 존재의 등장이 뭘 의미합니까?

이세상 끝났네. 이중적인 자기의 육신을 갖고있는 자의 등장은 하나밖에 없는 육신에 연연한 사람을 종말이라는 완전히 파괴될 환경속에 들어있다는 것을 존재자체만해도 전도가 돼요. 가짜와 진짜를 두 개 동반하고 입장에서 볼 때 ‘아, 저게 종말의 현상이구나. 저게 요한계시록 17장과 딱들어 맞네.’ 성경말씀을 마음껏 쏘아대면서 일치시킬수가 있습니다. ‘아, 사람들은 저게 바로 진노의 자녀만이 보여줄 수 있는 탐욕이고 욕심을 순회하고 있구나.’ 이 욕심 버리고 저 욕심 백날 돌아다녀봐야 그 욕심 그욕심이고 믿을 것은 이세상 밖에 없으니까 거기에 모든 것을 거기다가 몰입하는거에요.

이게 뭐냐하면, 게임입니다. 아이엠(I am). be동사 + -ing. 나는 게임중입니다. 어릴때부터 컴퓨터게임부터 해가지고 인간은 날때부터 게임합니다. 그래서 어느 설교에서 제가 이렇게 표현했죠. 이걸 다른말로 인생은 오디션중이다. 오디션.

남들이 나를 뽑아줄까를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 이걸 뭐라하느냐하면 이걸 자아라고 하지 않고 이걸 뭐라하느냐하면 이게 주체에요. 이게 뭐라고요? 종말의 현상이에요. 세상 멸망의 현상입니다. 이미 합격을 한 천국을 합격한 입장에서 하늘에 주님의 오른편에 앉은 입장에서는 모든 자가 뭐냐? 실패한자. 패배자, 탈락한 자로 보이는 거에요. 주께서 시키면 해야돼요. 그걸 뭐라고 느낍니까? “하, 이렇게 사는게 이게 나의 종말이다.” 이게 무슨 배부른 소린지 모르겠지만. 이게 바로 자유함이고 종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이 두종류. 하나는 악령, 하나는 성령. 그전에 성령은 인간에게 오지를 않습니다. 성신이 왔지 성령은 오지를 않았어요.

성신과 성령의 차이점은 미완료된 언약에 관여하는 것은 성신, 이미 완성된 언약에 관여하는 것은 성령. 원어는 똑같아요. 원어는 똑같은데 성경에선 그렇게 배치되는거에요. 왜냐하면 환경 때문에. 인간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환경으로하여금 새로운 해석을 통보해주는겁니다. 환경을 통째로 파악할 수 있는 해석으로 우리에게 통보를 해주죠. 그렇게 해서 여기 3절에 보면 “우리도 그 가운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여기 우리에서 나를 따로 뺄 생각을 하지 마세요. 다같이 다같이 우리도 다같이 그들과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이것을 통보해주는거에요. “아,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구나. 그리고 그 흔적이 내 육신으로 흔적이 현재 지속되고 있구나” 그 증거는 뭐냐? 나는 나의 동질성을 이미 불합격자인데 이 불합격자인 나를 돌아서서 다시 천국가서도 나를 구원시키려는 주께서 일을 다 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또 거기서 내가 내 구원을 걱정하면서 “내가 뭘하면 천국 합격하겠습니까?” 이렇게하는거에요.

합격증 두 개입니까? 어때요? 우리가 합격증 두 개가 필요해요? 주님이 아는 해석의 합격증 따로 또 내가 또 합격한 것 두 개가 있어야 돼요? 찢어야죠. 나의 합격시도를 찢어야 됩니다. 5절에보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인하여 허물로 그다음에 나오는 단어. 그것설명하고 다음 진도 넘어가겠습니다. 이것 참 중요한 단어죠. “허물로 죽었다”. 그냥 죽은 것은 주님의 죽음에 합류하지 못하죠.

큰 사랑으로 나의 죽음이 되지 않고 우리를 어디에 묻느냐? 막벨라 굴에다가 합장을 해버려요. 아버지 죽은 곳에 아들 묻고 아들 죽은 곳에 며느리 묻고 며느리 죽은곳에 또 아들 묻고 그게 막벨라 굴이잖아요. 언약의 집결지, 최종모습. 이땅의 사는 육신의 인간의 마지막 모습은 무덤인데 그 무덤에 있던 요셉의 해골은 요셉의 후손들이 요셉의 무덤을 가만두지 않았어요.

해골 짊어지고 요셉에게 약속한, 야곱에게 언약한 약속이 동반해서 드디어 약속의 땅에 여호수아가 정복할 때 그제야 세겜 땅에다가 묻어주죠. 여호수아 마지막에. 막벨라 굴입니다. 합장하는거에요. 예수님의 죽음에 합장시켜주는 것은 바로 주님이 하늘나라 우편에서 우리에게 성령을 나눠주게 되면 우리의 죽음을 이장을 시켜줍니다.

자 그럼 그 이스라엘을 어떻게 만드는가. 그게 바로 2장 11절부터 나옵니다. 이스라엘되기. 이스라엘은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율법이 있지요. 이방인들에게는 뭐가 없습니까? 율법이 없지요.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있지만 이스라엘은 율법을 통해서 율법을 못지키는 민족으로 들통을 냅니다. 그러면 율법이 있어도 못지켰다. 이방인들은 아예 율법이 없다. 그러면 그 틈에 남아 있는 것은 뭡니까? 율법만 남아있죠. 그 율법이 스스로 어떻게 완성을 하는가를 주님이 오셔서 그 율법을 이루죠. 그 율법을 이룬 최종의 모습은 우리말로 한 자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피’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에요. 그리스도가 예수님으로 오셨다.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그리스도가 예수님으로 오면 예수님은 하나의 우리와 같은 실존 인물이 되죠. 그리스도가 예수님으로 오신게 아니고 피를 남기면서 오시는분이 바로 그리스도가 되는거에요. 그래야 이 그리스도를, 메시아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비밀로 오신분임을 피가 증명해줘요.

인간은 말을 거는 본인에게 답을 본인이 조작해서 만들어내죠.

그런데 특별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을 건내요. “세상사람들은 이렇게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말을 건냈죠. 말을 건냈을 때 이거는 보이스 피싱이에요. 일부러 문제를 만들어버려요. 우리속에 틈을 만들어 내는거에요. 우리가 가짜인 것을 드러내기위해서 질문을 던지는겁니다. 베드로가 하는말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했어요. 이게 정답이에요 정답아니에요? 정답이죠. 그 정답과 그 정답을 말한 당사자 베드로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뭐냐하면 그 말을 하기 위해서 베드로가 베드로와 베드로 되기 사이에 불연속성이 성립되어야돼요.

 

“나는 그리스도가 되기 위해서 내가 죽어야 된다. 피, 내가 존재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피흘리는 메시아여야된다.”라고 했을 때 베드로가 하는 말이 뭡니까? 말리죠. “우리가 있는한 그런일은 일어나서는 안되죠.” “아, 그런일 안일어나도록 우리가 조치하겠습니다. 그러면 그건 안되죠.”라고 했을 때 주님이 갑자기 베드로가 하다가 명칭이 바뀝니다. 뭐라고 합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자로다.” 베드로를 문제삼는게 아니에요. 베드로가 나쁘다가 아니라 베드로가 고쳐봐야 고칠 수 없는 환경을 베드로를 통해서 환경 전체를 뜯어내는거에요. 완전 인테리어 업자입니다. “니가 속해 있는 환경 자체가 너로하여금 어쩔 수 없이 그런 말을 내뱉게 만든 환경 속에 니가 놓여있다”는거에요. 그 환경에서 니가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겁니다.

■베드로는 본인과 본인 사이에 동질성이 아니고 불연속성이 개입되어야 나 베드로가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그는 지금까지 모르고 있어요. 누가복음에 예수님의 기도 덕분에 베드로가 구원받잖아요. 뭔가 합격했다는 확인 증거가 있어야 되는데 그 증거가 “너는 합격이야” 이런식으로 오는게 아니에요. 그 증거가. 합격이 아니고 새로운 환경, 이중환경을 우리로 하여금 느끼게 하는겁니다. 내가 불합격이라는것도 생생하게 살아 있고 그 불합격이라는 것을 즐거워하고 감사하는 또다른 환경이 위에서 아래로 보는 새로운 환경이 이렇게 같이 겹쳐져 있는거에요. 그래서 제가 어떤 몇주전 설교에서 했죠. 봉한 샘이라고. 이중으로 겹쳐있어서 안에있어야 이게 진주같아요. 귀한 거에요. 우리가 귀하지 않아요. 겹쳐있는 이중구조의 그 환경이 귀해요. 환경 구조가. 그러면 나를 보기에는 나를 보면서 뭐냐? 덮혀있는 말씀의 뚜껑을 다시보는겁니다. 주께서 다 이뤘잖아요. 주께서 자기 기도대로 응답이 이루어졌고 나는 거기에 차이점을 발견한거에요. 차이성. 내가 백날해도 이거는 말짱 소용없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 그것을 새삼스럽게 알 때 희락과 기쁨과 감사가 터져나와요. 이거는 말릴 수가 없어요.

환경에 갇혀있는게 얼마나 감사한지, 그 환경을 뭐라하느냐? 사랑이라고 하는겁니다. 그 주님 곁을 떠날 수가 없어요. 사랑은 나 대상을 떠나지 않는게 사랑이거든요.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 장소에 그 공간에 일원이 되기 위해서 항상 얼쩡거릴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그 힘. 한 인간이 스토커 하듯이 미친 듯이 계속해서 한 여자를 사랑하는 드라마요.

그처럼 남자입장에서 내가있는 것은 이거는 싫어. 그대 있음에 내가 존재하는거에요. 그대 있음에. 비로소 나는 그대 있음을 중심으로 놀 때 내존재가 새삼스럽게 파악이 되는걸 그걸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게바로 에베소서에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에베소서가 이게 어려운데 에베소서 1장 6절 다시봅시다.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되어있죠? 그다음에 무슨말이 나옵니까? “안에서”.

 

뚜껑이 없으면 인간은 누구안에냐면, 상상한 내안에 살아요. 그런데 뚜껑이 하늘나라 이미 앉혀버리면 그 뚜껑이 있어버리면 우리는 예수 안에서 살게됩니다. 그 사랑안에서 살고 주안에서 사는거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의 구원은 항상 조건이 붙어요. “예수안에서 너가 의인되었고, 예수 안에서 너가 영생을 얻었다.” 항상 나말고 다른존재, 나를 대체한 존재, 나를 대신한 존재. 너에대해서 일체 행함을 묻지 않고 너의 모든 죄를 말소 시키는 십자가 안에서 구원 되었기 때문에 니가 자랑하고 니가 사랑하는 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거든 여러분이 사도행전 1장 8절,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땅끝까지” 누구의 증인 되리라? 성령의 증인 아닙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리라.”하는 그 말씀이 성취된 결과로서 여러분들이 이 종말에 존재하고 있는겁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죠. 다시한번 이스라엘은 새로운 이스라엘과 봉한샘이죠.

헬라어 코이노니아라고는 하는데 피 안에서 여기 있습니다. 전부다 피 안에 들어오면 죄인도 의인되는거죠. 왜냐하면 피안에는 모든 율법의 완성이 피로 이루어집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라는 히브리서의 말씀이 바로 그거거든요. 이게 뭐냐하면 이게바로 성전입니다. 성령 안에서 피 안에서 사는겁니다.

자, 3장 넘어가봅시다. 진도가 의외로 예상보다 빠릅니다. 3장에서 3장 9절에 보시면 이런말씀 나와요. 3장 9절.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려 하려하심이라.” 창세전부터 감추었던 비밀이에요. 감추었던 비밀은 누구한테 함축되어있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안에 예수님의 존재안에 함축되어있어요. 존재안에 함축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존재 생각하는데 주님의 존재안에서는 뭐냐하면 여기서 차이가 발생하게 되죠.

이 차이는 원래부터 율법을 줬을때는 원래 차이가 났었어요. 그 차이를 더욱더 분명하게 하는겁니다. 그래야 이중구조가 되기 때문에. 이중구조에요. 이세상 어떻게 잘되는가가 아니라 뭐냐하면 이게 왜 지옥이냐 하는 것을 새록새록 느끼는 환경속에 우리를 집어넣은거에요. 왜냐하면 이중구조를 위해서는 예수님이 다녀갔던게 필요해요.

이 경로를 경륜이라고 하는데, 프로세스, 과정, 어떤 과정을 끌고오는거에요. 구약때부터 과정이니까 점선나가겠습니다. 점선이 쭉 오는거에요. 드론이죠. 숨어있는 드론. 근데 여기서 인간들은 역사를 뭘로보느냐. 실선입니다. 실선과 무엇의 만남? 점선의 만남. 계속 비밀 비밀 비밀, 근데 이 비밀이 이스라엘 속에선 어떻게 일어나느냐 하면 비밀이 드론이 중간중간 떨어뜨리면 여기서 무슨사건이 일어나냐 하면 언약 사건이 발생돼요. 언약 사건이.

언약 사건이 발생되면서 이스라엘은 점점더 어느쪽이냐, 이스라엘이 처음에는 어디서부터 시작했습니까? 여호와로부터 시작해서 뭐로 끝나요? 우상으로 해서 우상했다는 조건하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잖아요. 우상. 우상은 다른말로하면 역사를 믿는거에요. 자기의 전통성 역사를 믿는겁니다. 시간을 믿는거에요.

여호와께서 이렇게 왔다면 예수님께서는 언약이 오는 것은 언약은 뭐를 끊는다? 언약은 역사를 끊어버린다. 그 예가 바로 다윗의 등불, “너희들은 한발자국도 너희 자신으로부터 떠난 적이 없다.” 이게 교재 7페이지에 있어요. 아, 이게 어려운 이야기 나왔다. 7페이지 한번 봅시다. 위에서 세 번째. 자, 제가 설명을 해야될것같은 느낌이 들어요. 7페이지 위에서 세 번째. 나의 상처가 나보다 먼저 존재했다는 것. 이거는 인간의 상식을 깨죠.

내가 먼저있고 내가 누구한테 다쳤을 때 상처가 있잖아요. 이게 상식인데, 이 언약은 시간을 초월해서 있기 때문에 역사와 묵시가 언약이 만났을때는 역사가 되지만 역사 이전에는 창세전에부터 숨어있는 비밀이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받았던 이스라엘에게 더욱더 가까이 어프로치(approach) 접근하면서 다가왔던거에요. 다가 오면서 이스라엘은 망해가고있는겁니다. 그러면 언약을 하면서 그들로 어떻게 한다? 아까 봤지만 죄와 허물을 그들에게 계속해서 생산해내는 겁니다. 죄와 허물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추어진 창세전의 비밀을 알려고 그렇게 애를 썼지만 소용이 없는거에요. 건성으로 여호와 여호와 하지만 내심 이스라엘은 뭐를 기대하고 뭐를 부러워했던거에요? 세상 권력이었습니다. 권력하면서 드디어 역사에 실체가 역사라는 환경이 얼마나 하나님의 언약의 비밀에 대적적인 위치에 있음을 이스라엘을 대표로 까발리는 기능을 이스라엘이 그동안 해 왔던 겁니다. 망하고 망하면서 이스라엘 망했다면 어느누구도 안망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거죠.

그다음에 11절에보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것이라”하죠. 예정하신 뜻대로 할 때, 이 예정하신 뜻에서 뭐가 빠지느냐? 우리 자신이 여기서 빠져요. 예정하신 뜻은 누굴 택했는가? 예정하신 뜻은 예수님께 국한됩니다. 예수님뿐이에요. 하나님은 하나님을 선택했고 하나님은 하나님을 예정했습니다.

불연속점, 십자가가 주어지는 것은 불연속적이에요. 칼빈이나 칼 바르트는 오해하고 있죠. 예수안에서라는 말을 이걸 칼바르트가 무슨뜻인지를 몰라요. 마지막 최종 종점이 역시 나 구원으로 도착된다는점은 칼빈이나 칼바르트나 똑같아요.

그런데 한번 생각해봅시다.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 선택할 때 최종 종점이 어디로 갑니까? 하나님으로 돌아가기위한 고무줄처럼 잡아 당기기 위한 예정이되는거에요. 주님께서는 선택을 우리 인간을 다룰때는 예수님이 동일하게 인간이 되셨다는 그 공로를 인정해서 ■우리의 선택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만 선택했다는 쪽으로 그걸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를 예정해서 구원한거에요. 이게 무슨뜻인지 모르면 나도몰라. 더는 설명을 할 수가 없어요. 내 안에, 더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내 안에서 구원한게 아니고 내 안을 포기하면서 까지 예수안에서 우리를 예수안에 집어넣기 위해서 우리를 선택하신거에요. 끝. 더 이상 어떻게 뭐... 그래야 예수님 증거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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