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사항

70이레논문12-시간과 이레

아빠와 함께 2023. 7. 7. 16:33

가락교회-70이레 논문(시간과 이레)130718-24강a -이 근호 목사

뒤 후주에서 책은 259페이지 제 6)번 그 내용을 보겠습니다. 책이 없으면 그 내용을 보시면 『엘름슬레브에 의하면, 기호는 그 자체로서는 의미가 없고 기능으로 작용하면서 의미가 발생된다고 보았다.』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기능으로 작용한다는 요 내용, 기능으로 한다는 요것은 특정한 예를 들어서이게 휴지라면 이게 분명히 휴지 맞아요. 유치원도 대학생도 휴지고 하지만 이게 환경에 따라서 ‘오! 휴지“ 라고 필요할 때가 있고 ’에이, 휴지‘ 하고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든요.

그러니까 이 휴지가 어느 자리에서도 동일한 휴지지만 사람들이 휴지를 원할 때는 그렇게 귀한 보물 같지만 휴지가 남아돌 때는 그까짓 거 휴지 갖다가 하나 없어도 마음아파하지 않죠. 도대체 이 의미가 뭐냐, 휴지란 의미가 뭐냐, 이 휴지가 정해진 게 아니라는 뜻이죠.

정해진 게 아니고 그것이 어느 자리에 있느냐에 대해서 의미가 달라진다는 겁니다. 고건 이해되겠죠?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동화 이야기, 부잣집 마나님이 남편이 밀을 선물하니까 ‘에이, 씨, 밀 이까짓 거.’ 하고 갖다 버리라고 했는데 나중에 남편 망하고 난 뒤에는 ‘오! 웬 밀이야?’ 하니까 ‘마나님이 갖다 버린 밀이잖아요.’

동일한 밀이지만 자신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서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죠. 그런데 제가 이 의미를 이야기한 것은 밀이라든지, 종이라든지 이건 인간 바깥에 인간 말고 따로 사물, 인간 바깥에 있잖아요.

그러나 인간 본인의 의미는 누가 정할 것이냐 하는 겁니다. 분명히 종이는 기능에 따라서 의미가 다 다르잖아요. 그러면 우리도 제대로 알려면 우리도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나도 주께서 어떻게 쓰시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라고 이렇게 해야 되는 게 마땅한데, 우리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주시는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이다.” 할 때 주신다 하면 ‘감사합니다.’ 하다가 주께서 가져가면 ‘왜 이렇게 저를 못살게 구십니까?’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죠.

그러면 너는 휴지가 아니고, 밀이 아닌 거예요. 결국은. 자기는 종이가 어떠니, 밀이 어떠니, 기능적으로 해놓고 막상 그런 소리 하면서 본인에 대해서는 마치 자기가 하나님처럼, 절대로 나는 손대면 안 되는 것처럼 그렇게 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가만히 방치하지는 않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가인이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 제가 제사를 드립니다. 제 제사의 의미를 알아주세요.’ 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동생의 제사를 받아버리고 자기 제사는 안 받아버리니까 그러면 형이 동생을 죽이잖아요.

그렇다면 가인이 드린 제사의 의미는 뭡니까?  결국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면서 ‘하나님, 제 제사 받아주옵소서.’ 라는 것이 동생을 살인하게 만들었잖아요. 그럼 가인 본인은 뭐가 잠재돼 있습니까? 살인할 수 있는 기능이 있죠.

그럼 여기에 대해서 결과 내리겠습니다. 내가 있고 내 속성이 있고, 그래서 이 속성을 따라서 내가 의미 있는 게 아니고 내가 있기 전부터 내 속성이 우선이고 그 다음에 내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속성은 가인은 살인이죠. 결국 나는 살인이라는 그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나는 살인해야만 하는 거예요.

인간은 본인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는 일, 일이 우선이고 나는 그 일을 위해서 실천하도록 갖다 붙여지도록 주께서 그렇게 조치를 하신 겁니다. 그 의미가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이제는 구체화되는 겁니다.

언약을 주었을 때 바리새인과 사두새인은 오해했어요. ‘자, 언약이다.’ 언약이란 쉽게 말하면 율법 이예요. 모세율법. ‘저 모세 언약을 지키면 우리는 이 나라에서 복을 받는다.’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걸 바꿉니다. 율법에 의해서 정죄당하기 위해서 우리 인간은 있는 겁니다. 그러니 율법이 우선이고 율법에 의해서 죄인으로 노출되는 것이 우리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신 거예요.

그래서 지난주일 낮에도 그런 설교 했습니다마는 율법을 지킬 마음도 없고 지킬 수도 없느니라. 이게 사도바울이, 물론 사도바울이 계사 받았지만,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할 때는 자기가 옛날에 과거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 율법이 있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이 있다는 잘못된 연결, 무엇이 우선이고 무엇이 뒷전이고, 이게 거꾸로 돼 버린 거예요.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보통 말이 마차를 끄는데 성경에는 마차가 우선이고 말은 뒤에 있다 했잖아요. 그런 식으로 우리는 성경을 봐야 돼요. 이 모든 말씀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숨어있는 분을 위해서 존재한다. 의미라 하는 것은 우리는 그분한테 할당받는 거예요. 예수님이 무슨 의미입니까? 하고 할당받아야지, 우리가 그 의미를 가지고 주님을 거기다 강제로 편입시키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한다.’ 그렇게 출발하면 안 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분은 누구지? 예수님, 예수님의 사랑이 어떤 의미일까? 그거부터 먼저 돼 있고 그 사랑을 위해서 우리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랑을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 사랑을 포기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묻잖아요.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포기하라 이 말입니다. 베드로가 포기하잖아요.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지 않고 ‘내가 주를 사랑하는지를 주께서 아십니다.’ 이미 모든 주도권을 예수님한테 넘겨버립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니가 띠 띠고 원치 않는 길로 간다.‘ 허리 때 있잖아요. 허리 띠를 우리가 매기만 했는데 니 허리 때를 꽉 잡고 질질 끌고 가시는 분이 지금도 주님이 하시는 겁니다.

이걸 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의 활발한 활동! 지금도 주님은 굉장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중부 지방은 비가 많이 오고 남부 지방은 비가 안 오고 제주도는 가뭄 들었다 하고 얼마나 활동을 많이 하잖아요. 우리는 그 활동 하나, 하나를 전부 다 주님과 연결시키기도 바쁜데 우리는 맨날 ‘주님은 뭐하시노, 나는 이렇게 힘들고 열심히 일하는데 주님은 뭐하시노.’ 지금 주님께서 지금 활동하고 있는데 맨날 주님은 그냥 놀고 있고 도와주지도 않고 나만 직사하게 고생하고 주님은 뭐하시노. 아무것도 안 도와주고.‘ 주님이 지금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데 우리가 우리 주도권을 생각하다 보니까 주께서 이렇게 은혜로 주신 것을 우리가 지금 놓치고 있고 눈을 완전히 감고 살고 있어요.

6번 계속 봅시다. 그런 의미에요. 하나, 하나 하려면 끝도 없지만 제가 대충 이야기합니다. 『기호는 거 자체로서는 의미가 없고 기능으로 작용하면서 의미가 발생된다.』의미가 거기에 딱 붙어있다는 말이 아니고 그냥 발생하는 거예요. 종이에 종이 의미를 붙이는 게 아니고 종이가 어느 자리에 어디 굴러가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그때, 그때마다 발생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의미라 하는 것은 여기에 붙어있는 것이 아니고 그 공간의 장(場)에 속해 있는, 영어로 field, 그 영역이 중요한 거예요. 우리가 어느 안에 있느냐가 중요하지, 내가 누구냐가 안 중요해요.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너 누구 안에 있지? 이걸 묻죠. ’니 누구지?‘ 이걸 묻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어디 안에 있습니까? 예수 안에 있잖아요. 예수 안에 있으니까 구원받는 거예요. 예수라는 그 field 안에 있으면 구원받는 겁니다. 개인적인 자격으로 구원 못 받아요. 이 필드 안에는 남아있는 게 다른 사람도 있으니까 집단구원 되는 겁니다. 이걸 이스라엘이라고 하죠. 숫자로 표시하면 144.000 이고 항상 우리 개인을 숫자 1로 쳐주지 않고 이렇게 모여야 1이 돼요. 모여야 1이 되지 우리가 혼자서는 숫자 1을 붙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인식이 전부 다 어디서 나왔는가? 그게 언약에서 나왔습니다. 지난번에 했던 거 2주 지났지만 여러분이 기억하고 머리가 좋으시니까 다시 한 번 해버리면 70이레에서 이레의 의미는 7 초반에는 모르고 62도 모르고 그 다음 마지막에 나오는 1이레에서 벌어진 사건이 앞(62)에, 앞(7)에  1이레의 의미를 주는 거예요. 이렇게 1이레가 붙어있어야 7☓이레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앞에 있는 7이레는 뭘 짓는다 했습니까? 성전 짓죠. 성전 짓는 것도 성전을 위해서 짓는 것도 아니고 한 이레의 의미와 그 뜻을 담아내기 위해서 미리 주어진 것이 7이레.

62이레라 하는 것은 지어진 성전을 부숴버리는 거예요. 있음에서 뭐로 바뀐다 했습니까? 없음으로 바뀌고 없음에서 도로 있음으로 바뀔 때 요 도로 나올 때를 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제 2의 창세기! 제 2의 창세기를 시작하는 겁니다.

원래 창세기는 인간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창세기 1장에 인간이 없었죠. 처음부터 인간은 안 만들었죠. 마찬가지로 제 2의 창세기도 인간은 없어요. 인간이 있다면 보통 인간이 아니고 유일하게 예수님과 의논해서 천지창조를 하는 겁니다. 모든 창조는 인간을 위해서 만들어 놨는데 그 인간은 우리 보고 인간이라 하지 않고 예수님이라는 인간을 위하여 그분을 위하여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만들어 놨습니다.

그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 해요.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죠. 우리는 무슨 형상이라 하느냐? 흙의 형상이다. 우리는 하나의 티끌의 형상이다 이렇게 되고요.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님을 이야기합니다. 골로새서 1장 15절에 나와요.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분을 위해서 만들어졌고” 분명히 나오잖아요. 그 만물 속에 너도 포함됐으면 그건 성도고 포함이 안 됐으면 성도 아닙니다.

포함이 되게 되면 이 우주는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위해서 있기 때문에 결국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이 천지를, 제 2 창세기를 감행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어떤 일이든지 주님이 개입하지 않는 일은 아무것도 없고, 어떤 일이든지 우리가 하고 싶다고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주께서 이끌어 주실 때 우리는 지금 이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 질문 **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만든 게 아니에요?
창세기에 나오는 ‘우리’라는 것이 삼위일체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답변

삼위일체라는 인간들이 정리한 신학적 견해를 가지고 마치 성경 본문 속에서 애초부터 그 의미가 들어있다고 봐서는 아닙니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것이지 삼위일체라는 신학 정립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 나오는 ‘우리’라는 의미는 단순히 자체적으로 하나님이 ‘여러 분들의 하나님’으로 계신다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인 인간이 감히 자진해서 상대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한 영역에 계시다는 취지로 봐야 합니다. 좀 더 상세하게 말씀드리자면, 아담이 일단 창조가 되면 아담 및 아담에게 속한 하와는 그 후손들은 모두 ‘여럿’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아담(인간)’으로 다루어집니다.

이점에 있어 ‘우리’라고 불리는 하나님의 세계와는 확연하게 구분됩니다. 어떤 이들은 ‘엘로힘’이라는 단어 자체가 복수형(複數形)이라는 지시 대명사로 ‘우리’라는 표현을 썼다는 주장도 있고, 또 어떤 이들은 하늘나라에서는 하나님뿐만 아니라 신적 존재인 천사들도 같이 있기에 그것을 단번에 표현해서 ‘우리’라고 묘사했다고 주장하며 또 다른 견해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징후가 이미 구약 초반부터 나온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들은 성경 말씀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계시라는 점을 충분히 반영해주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인 인간들을 통해 예수님을 증거코자 하십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범죄한 이후에 예수님의 위상이라는 것은, 전체 인간을 ‘단 하나의 존재자’, 곧 ‘한 아담’으로 규합하는 식으로 다루고 계시는 관점에서 그 인간을 상대하고 접촉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편에서 나오신 ‘주의 이름’되시는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은 곧 인간 쪽에서 ‘우리’라는 지칭되는 하나님 영역에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그 어떤 방안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이 ‘하나’라는 단수에 대한 생각으로 하나님 세계를 ‘우리’로 이해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인간들이 자기 존재성을 확장해서 하나님의 존재와 하시는 일을 수용하는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께서 간주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예수님(주의 이름)을 통해서 앞으로 보여주시겠다는 겁니다.

이에 대한 증거가 바로 창세기 3:22에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이 대목에서 ‘우리’란 인간과의 관계를 끊고자 하는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후대 이스라엘에게 있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접촉에 있어 하나님께서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주의 이름’을 통해 언약 성취를 통해서 접촉하시는 겁니다. 이 ‘주의 이름’되시는 분은 결코 성부도 아니시고, 성령도 아니시고,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조치는 곧, 사람을 유지하겠다는 취지가 아니라 오로지 ‘주의 이름의 세계’만 영속시키겠다는 취지에서 비롯된 작업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인간들이 생각하기를 “내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우리라는 지칭되는 하나님이 저기 하늘나라에 계시기 때문이다”는 생각을 하나님의 구원정신으로 섞지 않겠다는 겁니다. 참된 구원정신이란 “우리 인간은 구원이 뭔지도 모르고 어떻게 구원되지도 못하고, 구원될 수도 없는 단일하고 동일한 한 아담에 불과한데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신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하나님 나라에 합류되었습니다.”는 고백만이 믿음의 내용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처럼 삼위일체 사상은 성경 곳곳을 해석하는데 있는 위험한 장애요소가 됩니다. 삼위일체 중심으로 해석하지 마시고 예수님 중심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4장과 17장에 보면, '우리와 처소를 같이 한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 안'이라는 조건 하에서는 유효합니다. 즉 나라는 인간이 하나님과 더불어 '우리'가 되는 사이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예수님의 것으로 있기에 '우리'에 적용되는 사례입니다. 예수님과 아버지가 하나인 것처럼 성도도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우리'라는 이름으로 '하나'되는 상황이 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 '우리'는 성도 개인의 요구사항으로 성사되는 상황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하나 되어 '우리'가 되었기에 가능한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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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258페이지 5)번에 보세요. 5번, 제일 마지막 밑에서 두 번째 줄 읽어보세요. 『여기서 독아 적이란 자기 혼자 밖에 없다는 의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타당한 것은 만인에게 타당하다는 생각을 말한다.』요걸 독아 적이다. 자기만 생각한다는 뜻이 ‘나 여기 있다.’가 아니라 그냥 나 여기 있는 것으로 머물지 않고 나한테 이 물이 시원하니까 아마 이 물은 다른 사람한테도 시원할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강요된다는 거예요.

저는 번데기가 맛있거든요. 번데기는 굉장히 맛있기 때문에 아마 윤 집사님도 번데기 좋아할 거야, 이렇게 강요 아닌 강요를 하는 것. 개고기 먹으라고 그렇게 해도 저는 개고기 맛이 없거든요. 개고기를 못 먹어요. 곱창 먹으라 하는데 질기기도 하고 냄새도 나고 해서 안 먹어요. 그거는 니 생각이고 자기 생각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이게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나, 이 병헌이 미남이더라.’ 나는 영화배우 이 병헌이 보면 뭐가 생각나느냐 하면 처음에 나왔던 드라마에 중국집 자장면 배달했던 그게 딱 이변헌이하고 딱 맞아요. 처음에 이 병헌이 나올 때 중국집 배달했거든요.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그때 인상이 계속 가는 거예요.

그러니 인간은 나르시즘이란 게 뭐냐 하면 결국 자기한테 귀환한다는 겁니다. 연못에 비친 자기 얼굴 보고 빠져죽게 한다는 이게 그리스 신화에서는 그 나르시한테 벌주기 위해서 제우스가 그렇게 했거든요. 요거 스스로 죽이는 방법이 없을까? 지가 지한테 반해서 빠져죽게. 이게 방법이었어요. 그러한 신화가 있다는 말은 신화가 인간 속에 다 그런 요소가 있다는 말이거든요. 인간은 결국은 자기도취에 빠져서 자기가 살아가는 거예요. 이게 현대인들은 전부 다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현대인들을 이렇게 잘 표현했어요. 한 마디로 기계입니다. 돈 버는 기계라니까요. 노후 되면 은퇴해야 되고 젊은 것들을 한참 부려먹고 야근 시키고 d인간은 기계에요. 누구 이야기냐 하면 들뢰즈 이야기거든요. 인간은 기계에요. 기계기 때문에 감정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아침에 나와서 일 좀 하다가 저녁에 피곤하면 그냥 쓰러져 잠이 들고 그 뿐이라니까요. 왜 사는지, 존재 이유 나오잖아요. 그냥 자요.

그래서 A는 B를 모방하고 B는 A를 보고 C는 A를 보고 서로서로를 모방하면서 남 뒤 꽁무니 따라가고, 쟤만큼만 되면 더 이상 행복할 건데, 따라붙으면 그 다음에 D가 나오고, 나도 연희동에 한번 살아봤으면, 또 살아보면 또 따라가고, 또 따라가고. 도대체 같이 공부 못하는 인간들이 같이 커닝하는 거예요. 둘 다 해답도 없어. 똑같은 인간이 똑같은 거 베껴서 뭐하겠다는 말입니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기계가 기계를 베끼는 거죠.

찰리채플린의 모던이란 영화 있잖아요. 인간이 하나의 부속품처럼. 찰래채플린 영화 보면 나오잖아요. 현대인들의 예상, 현대인들의 허구성, 그게 뭐냐 하면 이게 사람을 볼 때 사람으로 보지 않고 ‘야, 니 뭐할 줄 알아?’ 기계로 본다 이 말이죠. 그러니 이게 내가 타당한 것은 지 혼자밖에 몰라요. 내가 옳으면 이건 무조건 진리가 되는 겁니다.

언약이란 것은 제 2 창세기기 때문에 허구를 언약 적으로 보면 인간을 허구로 취급합니다. 허구로 취급하기 때문에 시편 90편 3절에 보면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어디로 돌아갈까요? 노래방으로? 수영장으로? 어디로 돌아가요? “티끌로 돌아가” 그러면 이 땅의 사람들은 지가 살 수 있는 터전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게 오해였던 거예요. 이 땅은 인간을 티끌로 만드는 터전 이예요.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까? 태어나서 기분 좋습니까? 행복하셨습니까? 살림살이 나졌습니까? 그렇다면 이 세상 자체가 기어이 우리들을 티끌로 돌아가게 만드는 고런 것만 아지랑이처럼 솔솔 피어오르는 세상에 우리는 그 역기능에 대항해서 기어이 살아남으려고 하니까 남도 죽이고 남도 욕하고 이러잖아요. 그것도 더불어 사는 게 아닙니다. 누구만 살려고? 나만 기어이 살기 위해서, 그런데 그걸 누가 용납하지 않느냐? 이 대지가, 땅이 용납하지 않죠.

펄벅의 대지라든지 아니면 박경리의 토지라든지 보세요. 인간이 얼마나 땅에 미쳐 사는지, 조상이고 자식이고 중요한 것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조상이 대대로 내려오는 이 땅, 이 땅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중요하면 뭐합니까? 그 작가들은 몰라요. 그 땅이 나를 죽이는 땅이라는 걸 몰라요. 지는 살고 싶죠. 그래서 인간은 고생인 거예요.

하나님은 죽이려고 하고 인간은 살려고 하고, 이게 하나님하고 사고가 안 맞네. 그래서 인간이 지어낸 게 뭐냐 자기와 닮은 가짜 메시아, 가짜 삼위일체, 가짜 신을 만들어 놓고 섬기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우상숭배 하지 마라”가 가장 기본적인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앞에 단서기 붙어요. 뭐냐 하면 “너 자신을 위해서“를 반드시 붙여요. 모든 신에다가 ”너 자신을 위해서“ 신을 믿으면 그 신이 어떤 신이든 명칭은 어떻든 관계없어요. 예수가 됐든 성령이 됐든 관계없어요. 그것은 무조건 우상숭배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나의 구원을 위해서, 나의 천국을 위해서 믿으면 그건 우상숭배에요.

왜냐 하면 진짜 언약을 아는 사람은 ‘주여 티끌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이런 고백이 나와야 돼요. “니가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강도는 알았어요. 뭐냐 하면 ‘내가 지나온 강도생활 한평생이 사실은 옆에 계신 주님이 일부러 그랬죠? 그렇죠?‘ 이걸 다 아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 예수‘라고 말한 거예요. ’당신의 나라‘라고 한 거예요. 내가 강도한 것은 성질이 남보다 더러워서 강도짓 한 게 아니고 일부러 ’에이 씨, 일부러 그랬죠?‘ 이 뜻 이예요.

주께서 일부러 나를 강도 만들어서 마지막 때 옆에서 동창생으로 딱 붙어서 십자가 같이 죽게 만들어서 이것도 주께서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조치인 것을 강도는 알았습니다. 간통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도 마찬가지에요.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실로암에 가서 진흙 바른 것을 씻어서 나았을 때 병은 나은 것 알겠는데 도무지 이게 무슨 의미인지를 몰랐는데 나중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이야기해 줄 때 ‘야! 내가 소경 돼야만 했던 이유가 내 좋으라고 소경된 것이 아니고 주님 좋으라고 소경되게 했다.’는 거예요. 그게 요한복음 9장에서는 그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 사람은 소경 돼야만 했다는 거예요. 이게 언약 이예요.

그래서 ‘피’라는 책에 보면 우리를 귀한 존재라 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독자적으로 동화적으로 귀한 존재가 아니고 언약 때문에, 언약과 연관 있기 때문에 귀한 존재지, 예수 안에서 귀한 존재지, 언약 끊어져 버리면 우리는 이건 가롯유다처럼 전혀 귀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나온 6번에 들어가 봅시다. 제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자세히는 하지 않겠습니다마는 공부했다는 티는 내야 하니까 그래서 이야기하는데 여기에 『내용과 표현』 표현으로 관련돼 있다. 표현을 할 때 이걸 구분해야 돼요. 재현과 표현이 있는데, 재현은 다른 말로 하면 모방 이예요. 인간의 모든 세상사는 것은 어떤 식으로 살아갑니까? 모방으로 살아요. 어떤 사람이 사법고시 합격했다, 나도 사법고시 한번 돼야지, 어떤 사람이 세무사 공부한다. 어떤 사람은 회계사 공부한다. 어떤 사람은 경찰대학 들어가려고 경찰 시험 치려고 공부한다. ‘야, 그거 좋겠다. 나도 해야지.’ 이게 전부 다 옆 사람을 보든 모방 이예요.

모방은 그림을 그릴 때 있는 원근법 그대로 그릴 때 이건 재현 이예요. 그냥 그대로 사진까지 아는 것. 그런데 표현하는 것은 모방이 아니고 자기 주체성을 드러내요. 그러니까 요게(재현)는 옛날 고전 식의 그런 그림이라면 이건 현대미술 이예요. 이건 봐도 무슨 소린지 모르는 거예요. 오! 원근법이 있거든요. ‘산이 앞에 있고 사람이 뒤에 있어?‘ 하면 ’이게 작가인 내 마음이야.’ 자기 정신세계를 표현할 때 이것을 나타낼 때 이게 창조입니다.

재현은 모방이고 표현은 창조라 하죠. 인간은 둘 다를 하는데 문제는 이 창조가 주를 위한 창조가 아니고 이건 뭐냐 하면 아까 동화적, 그냥 자기 자신만 위해서 창조하고, 그리고 모방하는 것은 모방을 해서 얼추 따라 붙이다가 어떤 중요한 시점에서는 딱 자기가 차고 나서죠. 이걸 배신 때린다는 말을 하죠. 이게 배반의 장미, 배신 때리는 거예요. 회사도 그런 데가 많고 심지어 가정에서도 많아요.

둘째 아들이 아버지가 아프다고 10년을 모셨는데 지금 아버지는 유산을 갖고 있는 형편에서 아들이 10년 동안 갖고 있었는데 드디어 10년 쯤 되니까 아버지가 정신이 없어서 헛소리를 하기 시작하는데 그 틈새를 노려서 맏아들과 며느리가 와서 ‘아버지, 제가 맏이인데 돌아가실 때는 제가 모셔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아버지가 ‘그래, 그래, 가자.’ 했다 말이죠. 하고 난 뒤에 일주일 딱 모실 때 딱 서류해 가지고 ‘모든 재산을 맏이가 1/2 갖는다.’ 이런 식으로 작성해서 공증 받아서 이렇게 할 때 이 가족사에서 이건 결국 뭡니까? 모방을 하는 거예요. 모방한다는 말은 ‘역시 부모한테 효도해야 돼. 난 효도하니까. 이렇게 부모를 기쁘게 하니까.’

모방을 하는데 마지막 결정적 순간에 모방을 하는 게 아니고 자기 주체, 자기 속마음을 표현을 하는 거예요. ‘목사님 인간은 어떻게 삽니까?’ 요렇게 살아요. 요렇게. 모방하고 노리다가 틈새를 봐서 자기가 신인 양, ‘내가 그렇다는데 왜 말이 많아?’ 하고 힘이 있을 때 힘을 과시하는 요 식입니다. 이게 판사, 검사, 목사, 농사, 뭐 어떤 직업에 관계없이 민주주의 공산주의 관계없이 모든 인간들은 바로 요런 식대로살아가는 거예요. 이 전체를 가지고 심지어 가인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모방하는 것은 제사도 모방했죠. 모방하다가 결정적일 때 동생을 죽이잖아요. 인간 세상 자체가 이걸 성경에서 뭐라 그러느냐 하면 우상, 또는 우상숭배하고 하는 거예요.

그럼 우상숭배를 안 하려고 하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하나님이 그 사람을 죽이면 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할례에요. 유월절 어린양 잡을 때 반드시 조건이 있어요. 뭐냐 할례 받은 자에게만 유월절 양의 피를 발라주게 돼 있어요. 할례 안 받으면 그게 무효가 돼요. 만약에 할례를 안 받고 유월절 해버리면 그 유월절에 살은 생명이 맏이의 소유권이 여전히 자기한테 돌아와 버려요.

그런데 출애굽기 13장에 보면 유월절 어린양으로 인해서 구사일생 살아남은 아들 있잖아요. 그 아들 소유권이 전에처럼 가정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고 여호와의 소유가 돼 버립니다.

출애굽기 13장 한번 봅시다. 누가 13장 1절~2절 읽어 보세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초태생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처음 난 것은 내게 돌리라 했죠? 그러면 이미 맏이는 내 자식이라는 그건 이미 물 건너갔습니까? 안 건너갔습니까? 이미 건너가죠.

그렇다면 그 자식은 살아있더라도 부모입장에서는 살은 자식 이예요? 죽은 자식 이예요? 죽은 자식이죠. 죽은 자식인데 하나님 안에서, 언약 안에서, 율법 안에서는 할례 안에서 산 자식이죠. 그게 바로 구원 아닙니까? 그게 십자가 의미거든요.

십자가 믿으면 ‘나 살았다.’가 아니라 십자가 믿으면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내 주인으로서 박혀서 사는 거예요. 그래서 내 인생은 물 건너갔어요. 내 인생은 없다니까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로마서 14장 8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나를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게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5장 15절~17절, 그게 새로운 피조물이거든요. 이런 이야기하면 교인들이 오지도 않겠지만 교회 오나 안 오나 문제가 아니고, 문제는 어떤 언약적인 사건이 실제로 사람을 달라지게 한다는 겁니다. 지식이 아니고 성경 공부가 아니고 실제로 이게 믿어진다는 거예요.

믿어진다는 것은 완전하게 산다는 것이 아니고 믿어진다는 것은 이런 말이 참 어려운데 믿어진다는 것은 평소에 행동은 여전히 나를 위해서 사는데 믿어진다는 거예요. 여전히 나밖에 모르고 나도 개혁 하면서 남 질질 따라가다가 결정적일 때 뒤에서 친구고 사장이고 아버지고 누구든지 뒤에서 목잡고, 돈 앞에, 유산 앞에 무슨 형제가 있습니까? 세상에 인간을 몰라도 너무 몰라. 자식을 하나만 나든지, 애를 둘이나 나서 싸우고, 며느리 싸우고 다 싸우고.

믿으라는 말은 행함의 차원이 아니라는 뜻 이예요. 분명히 행함의 차원은 나밖에 몰라요. 예수 믿으나 성령이 와도 마찬가지에요. 인간은! 그런데 이상하게 이게 믿어지는 거예요. 내가 죄인 된 것은, 죄인 돼야 돼요. 왜, 그리스도가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의 언약에 의해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가 돼야 되는데 자꾸 안 되려고 하니까, 안 돼서 뭐할 건데? 지가 그리스도 하든지.

그냥 사세요. 그냥 사시면 주께서 이끄십니다. 이끄시면서 언약대로 날이 가면 갈수록 우리의 죄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알면서 오직 주님의 사랑과 높이와 넓이가 깊어질 겁니다. 많이 용서받은 자가 어떻다? 많이 사랑하거든요. 주님은 사랑만 건지면 끝나는 거예요. 사랑만 건지죠. 막달라 마리아가 뭐 잘나서 구원받았습니까? 향료를 깰 때 향료 뿌려서 울어서 구원받을 거 같으면 저도 향수 샤넬 이만큼 사가지고 와서 주님 동상 만들어놓고 울면서 하겠다. 그거는 모방이나 재현될 문제가 아니고, 표현될 문제거든요.

진짜 성령의 표현으로서 나올 것이 어떤 사람은 울면 따라 우는 사람이 있어요. 그거는 모방이고, 그 우는 걸 재현하는 거예요. 철야기도 때. 옆의 사람이 우니까 지도 울고 옆의 사람이 기도하니까 지는 기도 끝났는데 보니까 또 하고,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건 교회 일이고 이건 모방이잖아요.

성경 한 구절 출애굽기 13장 1절 이런 구절들이 아주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라 하죠. 완전히 노선이 전라도와 경상도로 나뉘는 곳 있잖아요. 분명히 같은 노선인데, 이걸 변곡선이라 하는데 이렇게 가다가 꼭대기에서 완전히 낮아져요. y=x 그래프가 이건 y=-x 거든요. 요번에 수련회 할 때는 수학 공식 많이 나올 거예요. 미분도 할 거예요. 알아듣기 쉽게 할 거니까 겁먹지 마시고 쉽게 하니까. 이렇게 죽 나가다가 이럴 때는 예측이 돼요. 이만큼 나왔으니까 같은 노선을 가니까 이쯤 되면 이렇게 될 것이다. 했는데 딱 여기 와서는 이렇게 내려갈 줄을 몰랐죠. 그러니까 이 그래프 함수는 y=x인데 이 내려오는 함수는 y=-x거든요. 함수가 달라요.

이쪽에서는 저쪽을 이해를 합니까? 못합니까? 못해요. 그러니까 성도는 본인이 본인의 행동을 이해 못해야 돼요. 이건 주께서 개입해서 한 문제지, 사람이 기도한다고 키가 한자라고 큽니까? 안 큽니까? 안 크죠. 어떤 남자가 키가 167센티라고 맨날 키 작다고 네 가지에 나와서 하는데 167센티나 됐잖아요. 이걸 왜 주님께서 주신 키라는 것을 왜 감사히 여기지 않습니까? 맨날 불신자들, 이방인들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하는데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그런 멘트, 그런 목소리를 내는 것도 주님의 은혜에요. 아직 힘이 남아있으니까 ‘무엇을 먹지?’ 아직 힘이 남아 있는 거예요.

너희들은 그런 것 좀 구하지 말고 그 나라 의를 구하라. 그런 것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그런 것은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고, 너희는 그 나라 의를 구하라. 어느 인간이 해냅니까? 못하죠. 못하니까 성령께서 오셔서 ‘저는 못했는데 성령께서 개입하니까 성령께서 알아서 저를 사용해서 그 나라 의를 바라보게 전부 다 저쪽 공로로 하셨습니다.’라고 해야 주님의 증인이 되지 자기 증인이 아닌 거예요.

261페이지 17) 봅시다. 『신체가 발휘하는 의식의 의미 작용에서 형상학자 후설은 감각을 넘어서는 어떤 ‘잉여’가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후설은 어떤 아저씨고 형상학이라는 게 무슨 말이고, 잉여는 여분이란 뜻인데 여기 왜 잉여가 나오느냐, 살펴주는 것도 아니고 덤으로 주는 것도 아니고 여기 왜 나오느냐 이렇게 되는데. 이건 이런 뜻입니다.

그 뒤에『밀랍 인형을 보고 한번은 인형으로 한번은 사람으로 지각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때 신체 감각이 자율적인 조직화를 보여준다는 것이다.』이게 뭐냐 하면 사람의 감각이 있잖아요. 사람이 표현할 때는 고 때 고 시점에 자기가 고렇게 ‘나는 이렇게 느낀다.’고 이미 결정해 버려요. 그리고 돌아서서는 ‘아, 아, 아니구나.’ 이런다고요. 똑같은 일인데 밤중에 얼른 보고 ‘얘, 저쪽 아파트에 사람 있더라.’ 그런데 낮에 보니까 ‘어, 밀랍 인형이네. 하긴 바보같이 왜 내 감각은 인형을 보고 사람으로 오해했지?’ 지금 누가 누구보고 탓하는 겁니까? 사람이 자기보고 탓하지만 사실은 자기의 감각보고 탓하죠. 이 말이 뭐냐 하면 인간이 자기 감각을 탓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감각이 소도 아니고 개도 아니고 알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 자신을 다룰 수 있는 여분의 것이 따로 자기에게 있다, 이 말 이예요. 그 이야기에요. 어려워라. 진짜 어렵죠. 이 말을 간추리면 이런 거예요. 인간은 나는 이렇다고 생각했죠. 천만에, +알파는 따라 오게 돼 있다 이 말이죠. ‘내가 미쳤지. 내가 그 소리를 왜 했지?’ 그게 바로 원래 너야, 원래 너라니까. ‘아휴, 나는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닌데.’ ‘뭐 할 사람이 아니야, 그런 잉여가 너한테 달라붙어 있는데.’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나는 율법을 지켰다.’는 말이 이것은 자기를 몰라서 그래요.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잉여는 모르고 그냥 지켰다는 그것만 기억해서 그래요. ‘나는 지켰다.’ 일방적인 주장 이예요. 이게 자기 자신이 우상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바로 율법도 나를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우상 숭배의 일환입니다. 이게 바로 우상숭배에요. 하나님은 잉여를 이야기하는데 본인은 ‘지켰습니다.’라고 단정을 칼 가지고 잘라버렸어요.

그래서 이제 70이레 본격적으로 들어가 봅시다. 관주는 됐고요. 다음에 하게 되면 하고 더 하려고 하니까 겁이 나서 못하겠어요. 너무 어려워서. 한문자 설명하는데 이렇게 힘들어요.

그러면 70이레 계속 들어가 봅니다. 여기 떡판에 시루떡이 있습니다. 여기 두 사람이 있다 합시다. ‘야, 이 떡을 식구들에게 나눠줘야 돼.’ 해서 잘라 봐랴, 해서 자르는데 이 사람은 대각선으로, 요렇게, 요렇게 잘랐습니다. 대각선으로. 그런데 이쪽 사람은 ‘나한테 칼 줘 봐라.’ 해서 직사각형으로 요렇게 잘라야지, 했다 이 말이죠.

사람의 시선, 관점은 사람마다 칼을 쥐고 똑같은 일이라도 자르는 게 다 달라요. 다 다릅니다. 같은 집안 식구, 부부사이라도 그걸 자를 때 칸이 생기잖아요. 칸이 생길 때 칸에다 요렇게 자른 사람은 칸에다 이걸 상자 곽이라 볼 수 있죠. 여기다 다 집어넣는 거예요. 그런데 남편이 칼 들고 ‘비켜봐, 내가 자를게.’ 해서 자르니까 첫 칸에는 큰 애 문제,  둘째 칸에는 둘째 애 문제가 있는데 큰 애 문제는 요쪽에 집어넣고 둘째 애는 둘째 칸에 집어넣는데 남편은 그게 아니고 ‘큰 애는 여기다 넣고 둘째 애는 여기다 넣어야 돼.‘ 하니까 이게 부부사이에 의견 통합이 안 되는 거예요. ’여보, 그 문제가 중요한 게 아니고 얘 문제가 중요해‘ ’아니야, 걔 문제는 안 중요하고 얘 문제가 중요해.‘

이건 단순히 고 문제가 아니고. 사태를 자를 때 칸의 각도가 칸의 시선이 다 달라서 그래요. 그러면 100명이면 100, 1000명이면 1000, 다 달라요. 같은 사람 하나도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해결책은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 해결책은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거 하기 전에 요거부터 봅시다. 큰 딸이 있고 둘째 딸이 있는데 아빠는 말하기를 ‘큰 딸부터 먼저 보내고 둘째를 보내자.’ 하는데 엄마는 ‘둘째 애가 지금 남자 애를 사귀고 있는데 연애 한지 10년이 지났는데 지금 나이가 35살이나 돼서 남자가 없는데 먼저 보내야지 같이 늙어 죽을래?’ 이런다 말이죠. 아빠가 ‘그래도 우리 집안의 전통이 그게 아니다. 내가 장손인데 집안 어른들이 뭐라 하겠느냐,’ 이렇게 하더란 말이죠.

자,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안목은 뭐냐 하면 큰 딸, 작은 딸 어디 집어넣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요 깊이를 봐라. 요 상자의 깊이가 있을 거 아니에요? 깊이를 쏘옥 끄집어 내봐요. 어떻게 보면 표면은 큰 딸, 둘째 딸 해서 되게 얇아 보이지만 주님께서는 뭐로 보느냐 하면 요 밑을 쏘옥 잡아당기면 수박 자를 때 보면 길게 나오듯이 어떤 결정을 해도 죄가 되는 거예요. 큰 딸을 몇 살 때 보내느냐 하는 것은 1년, 2년, 3년 이라는 인간의 시간적인 지구가 해 한번 도는 관점이라면, 요 관점은 뭐냐, 이레! 요 이레에 뭐가 들어 있느냐? 십자가 언약의 완성인 십자가 피가 들어갑니다. 새 언약!

그러니 내가 A라는 교회 다닐까, B라는 교회에 다닐까‘가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밑에 속을 쏘옥 잡아당겨요. 수박 파란 거 말고 빨간 것을 쏘옥 들어가 보면 여기 피가 있으면 어느 교회 가도, 심지어 어느 교회 안 가도 주께서는 요 피를 보고 저주와 심판이 넘어가게 돼요. 피보고 넘어가리라. 요 피에서는 전부 다 하나가 되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결정은 죄가 되면서 죄를 씻어주는 피가 여기 같이 합세하게 돼 있어요. 요걸 시간적 개념이 필요한데 요걸 이레라고 하는데 요걸 grid, 이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관주에 나와요. 모눈이란 거 알죠. 이게 grid 인데 그건 10분 쉬고 해봅시다.

 

 

가락교회-70이레 논문(시간과 이레)130718-24강b -이 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에서 gird, 모눈으로 이렇게 자르죠. 지금 이야기하는 게 뭐냐 하면 요게 이레라는 시간이 위에 있는 일상적인 한 해, 두 해 하는 그 해와 다른 깊이를 갖고 있다 했습니다. 예를 들면 쉽게 해서 ‘성전을 지어라’ 하면 ‘언제요?’ ‘7년 동안 지어라.’ ‘예, 짓겠습니다.’ 이건 우리가 알아듣는 시간 개념이라는 거죠.

그런데 ‘성전을 지어라. 언약을 통해서 지어라.’ 그러면 아예 그냥 성전 지어라 하세요. 언약이란 어려운 말 하지 말고 그냥 지어라, 하세요. 우리가 알아듣습니다. ‘아니야, 언약을 통해서 지어라. 언약에 준한 성전을 지어라.’ 이거는 우리가 못 짓습니다. 이거는 예수님만 할 수 있는 거예요.

‘언약을 통해서 지어라.’ 하면 우리는 이렇게 오해하거든요. ‘아! 성전 지어라.’는 약속을 우리보고 했으니까 에이구, 성전 짓지 뭐. 돌 다듬어서 지으면 되지.‘ 이러거든요. 그게 언약이고 그게 약속이라 생각하거든요.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지어라. 언약에 준해서 지어라.’ 이 말은 실컷 지어놓고 부숴버리겠다는 뜻 이예요. ‘네가 예수를 믿어라. 네가 구원을 받으리라.’ ‘뭐, 예수… 믿습니다.’ 그 예수 믿는 너를 죽이겠다는 거예요. 왜, 언약이 아니기 때문에. 언약에 준해서 ‘예수 믿어라.’ 가 구원 받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언약을 빼놓고 예수 믿는 것만 받아들이거든요.

그렇다면 언약을 포함해서 할 게 아니냐? 우리는 언약을 포함하나, 안 하나 우리는 관계없이 ‘예수 믿어라’ 하면 예수만 믿어요. 이러나, 저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제거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언약에 준해서 예수 믿게 하는 그 믿음은 예수님이 선물로 줘야 되지, 우리가 만들어 낸 생산된 믿음은 믿음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이게 성령을 통해서 믿게 되면 ‘아! 이게 언약을 통해서 주고자 하는 믿음이구나.’ 로마서 8장에 보면 소망이라 해놓고 그 뒤에 붙은 게 뭡니까?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보이는 것과. 또 나왔다. 자꾸 되풀이해야 돼요.

현재 y=x 그래프가 이렇게 올라가요. 가다가 여기서부터 보인다, 보인다, 5년 뒤에 예수 잘 믿어서 성화 되어서 7년 뒤에는 천국 가야지. 보인다. 하다가 여기서 갑자기 내려와 버리면 이쪽 세계가 이쪽 세계에서 포함이 안 됩니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라, 해서 이쪽 y=-x 인 계통의 것이 하나님께서 언약 적으로 주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입장에서는 소망이라 하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로 갈 수밖에 없는 이런 연속성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그 끝에 소망이 있다는 게 우리 한계거든요. 그게 233페이지 첫 줄에 보면 『인간의 미래란 어디까지 현재의 상황에서 자신의 욕구를 덧붙여 상상한 것이고 그 현재라는 것도 실은 과거의 기억 가운데서 자신의 몸 유지를 정당화시켜줄 기억을 재료로 하여금 일방적으로 편집하고 조작해낸 지금을 위한 과거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게 뭔 뜻이냐 하면 사람은 항상 어떤 말을 할 때 그냥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변명조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제 수요일 날 했잖아요. 해명이라 하는 것은 얽힌 것을 푸는 게 해명이고, 숨어있는 것을 찾아내는 것을 해석이라 하는데 인간은 해명도 안 하고 해석도 안 하고 맨날 하는 게 변명밖에 안 해요. 변명은 뭐냐, 자기 정당성입니다. ‘나 우상 아닙니다. 나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이런 조로 나온다 말이죠. 그래도 그게 우상 이예요.

그래서 사람의 소망, 미래라는 것은 뭐냐 하면 늘 변명하기 때문에 자기 몸 유지를 정당화, 변명이죠. 쉽게 말해서 자기 의죠. 자기 의를 확보하기 위한 재료로서 과거와 현재에서 뽑아서 ‘그러니까 나는 지금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이 당연히 내린 조치 맞습니다.’라고 스스로 자기 긍정에 나서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자기 의예요. 자기 의!

한번 정리해 보면 인간의 시간이라 하는 것은 우리에게 뭘 유발한다? 자기 의를 유발하는데 시간이라 하는 것은 자기 의를 유발하기 위해서 그 유발은 어디서 나온다? 내 몸에서 나오죠. 인간의 몸에 시간을 느끼게 되면 나오는 것은 자기 의가 나온다. ‘나 이만큼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앞에 뭐 빠졌죠? ‘이만큼 나는 잘 살아왔습니다.’

아까 막달라 마리아 했죠? 막달라 마리아 이야기할 때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누구 덕이다? 주님의 공로 덕이죠. ‘주님께서 개입했습니다. 나는 죄인이었습니다. 주께서 용서했습니다. 많이 용서한 자가 많이 사랑한다고. 항상 나로 하여금 죄인 되기 위해서 개입했고 나를 그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지금도 꾸준히 개입하십니다.’라는 것이 막달라 마리아라면 우리는 외부의 개입이 없이 내가 스스로 믿음 소망 사랑을 사람이 시키는 대로 다 만들어 내는 거예요. 여기서. 완전히 맥가이버라. 못하는 게 없어요. 까라면 다 까는 거예요. 하라 하면 하고 믿으라 하면 믿고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말을 잘 듣는지 백날 잘 들어도 누구 정당성? 이렇게 말 잘 들으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구원해야지. 또 독자적인 거. 결국은 뒤통수치는 거예요.

제자들이 서로 싸워요. 누가 높으냐. 싸우는데 제자들이 누가 높으냐고 싸웠을 때 우리 같으면 ‘싸우지 마. 네가 낮고 네가 높다.’ 이야기해야 될 텐데 주님께서는 열 두 제자 가운데 누가 높고 낮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엉뚱한 이 선, y=x라는 이 노선, 인간들이 납득이 되는 ‘우리 중에 누가 높습니까? 우리가 벌여놓은 범위 안에서가 아니라 엉뚱한 어린애 데리고 와서 다른 병목 점 넘어서 있는 다른 노선을 가지고 와서 “누구든지 어린아이 같이 천국을 받들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못 들어간다.” 이러하니까 그 열 두 제자 어른들 어떻게 됐습니까? 할 말이 없죠. ’그러면 저는요?‘ “쓴 잔이나 마셔라.” 쓴 잔 마실 생각은 안 하고 누가 높으냐, 낮으냐? 하늘나라 보좌는 내가 앉게 해주겠지만 그 전에 반드시 쓴 잔을 마셔야 된다. 그 쓴 잔은 내가 마실 쓴 잔을 너희도 같이 마셔야 된다.

그게 바로 뭐냐, 어린아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걸 해석하면서 어린아이가 돼야 한단다. 해서 어린아이 된다 하니까 다 큰 늙은 세포를 어린아이처럼 만듭니까? 안 되죠. 어린아이는 겸손하니까 겸손하자. 어린아이는 어른 말을 잘 듣는다. 이렇게 해석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어린아이라 할 때는 반드시 그냥 어린아이한테 가지 말고 반드시 언약을 거쳐야 되기 때문에 예수님 쪽에 거쳐서 가게 되면 예수님이 어린아이라.

예수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발언은 반드시 예수님을 경유해서 나오도록 돼 있어요. 왜, 예수님이 언약의 완성이기 때문에. 그래서 모든 말씀 밑에는 피가 묻혀있다는 말을 그렇게 한 거예요.

사도바울이 율법이라 하는 것은 지킬 마음도 없고 지킬 수도 없느니라, 할 때는 율법을 바로 다가가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경유해 보니까 십자가로 구원받는데 율법은 왜 있지? 아! 죄를 더욱 더 죄인 되게 하기 위해서. 못 지키고 지킬 마음도 없다 하는 것을 까발리기 위해서 율법을 줬다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발언을 한 거예요. 예수님의 계시에 의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모든 해석은 예수님을 경유해서 해석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유명한 어거스틴, 부산강의 때 했잖아요. 어거스틴은 해석을 그렇게 하지 않고 어떻게 하느냐 하면 삼위일체로 해석을 하면 해석 끝난다는 거예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로 하면. 그래서 부산강의 할 때 잠시 예를 들었죠. 그 소리 듣고 루터도 어기스틴한테 그대로 배웠죠. 칼빈도 배웠죠. 이게 삼위일체로 한다 하니까 ‘야! 삼위일체니까 이건 한분도 아니고 세 분까지 동원시키니까 완벽한 설교가 되겠다.’ 하죠.

그럼 삼위일체 해석을 어떻게 했습니까? 이 홍도라는 유명한 부흥사들은 삼위일체 해석을 했어요. 그 사람은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백합화를 보라 했지 않습니까? 백합화를 봅시다. 백합화의 뿌리는 성부요, 줄기는 성자요, 백합화의 꽃은 성령입니다. 해석 끝. 그런 건 진짜 참 이슬 한 잔 먹고 이불 뒤집어쓰면 설교가 1대, 2대, 3대, 그냥 열 개가 나와요. 그건 말장난도 아니고 신천지가 그런 설교하잖아요. 신천지뿐 아니고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지만.

다시 한 번 정리하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이 시간 개념 가지고서는 전혀 언약 적이 아니에요. 왜냐 하면 이게 자기를 위해서, 과거도 나를 위한 과거, 현재도 나를 위한 현재, 미래도 그런 과거가 뭉쳐져서 미래를 이어가니까 미래도 항상 생각하는 것은 자기 멋있게 되는 그것만 자꾸 궁리하다 보니까 그야말로 아까 질문하신 그대로 주의 이름이 아니고 여전히 우리도 아니고 천국 가도 단독적인 나를 포기를 안 하고 있어요. 우리 속에 섞이는 것이 아니고 ‘섞이기는 난 나를 챙길 거야.’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천국 가서 골프 채 들고 가서 골프 친다는 거예요. 왜 여호와 증인의 ‘깨어라’ 보니까 잔디밭이 있거든요. ‘야! 18번 홀 돌아볼까?’ 천국 가서 골프 쳐서 무료한 시간을 달래려고 하는 거예요.

‘나’ 가 우리를 관여 못하거든요. 그런데 나기 때문에 자꾸 나가 거기 우리 속에 살아있다고 자꾸 착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우리를 죽여 버려요. 우리를 죽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되게, 하나 되게 하는 그 작업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를 죽일 때 시간 있잖아요. 과거, 현재 미래, 이것도 좀 죽여줘야 됩니다. 어떻게? 언약을 통해서. 그럼 언약을 통한 새로운 시간 개념이 도입돼야 되겠죠? 그게 뭐냐, 그게 이레에요. 이레!

여기 표면에 수박 껍데기를 파보면 여기에 이레라는 시간이, 이레는 언약의 받침 위에 우리는 살고 있는 거예요. 지금 일본에 후지 산이 있는데요. 이게 300년 만에 터질 조짐이 있다는 겁니다. 조사를 해보니까 여기에 마그마가 지금 터질 구멍을 찾지 못해서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거예요. 만약에 태평양에 지진이 일어나서 약간이라도 이렇게 틈이 생기면 이곳으로 분출해서 여기 100킬로미터 떨어진 곳이 유명한 도시 도쿄가 있습니다. 도쿄가 지금 불바다가 될 판 이예요. 독도보다 일본부터 걱정해야 돼요. 독도는 일본 땅 하지 말고.

자, 틈을 뚫고 올라와야 되겠죠? 이 지각을 뭐로 보느냐? 이걸 이스라엘로 보자 말이죠. 그럼 이스라엘은 여기다 성전 짓고 율법 지키고 제사장 제사 드리고 옆에서는 칼싸움하고……하겠죠. 오늘날 우리가 서울 땅에 사는 것처럼 똑같이 일상을 살아가겠죠.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됩니까? 밑에 마그마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데 언제 폭발하느냐 하면 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누굴 죽일 때? 메시아를 죽일 때 이게 사람 잘못 건드렸어요.

십자가 죽던 그 시간에 뭐가 열렸죠? 뭐가 열렸습니까? 무덤이 열리고 거기서 누가 살아났어요? 죽었던 매장했던 시신이 나와서 이게 걸어서 어디까지 왔느냐 하면 예루살렘 시내를 돌아다녀요. 그 살아온 사람도 영문도 몰라요. ‘이씨, 내가 왜 살아왔지? 내가 분명히 땅에 묻혔는데 내가 왜 살아났지?’ 영문도 몰라요.

마치 ‘내가 죄 많은 내가 왜 구원받았지?’ 영문도 몰라요. 오늘날 우리와 똑같아요. 이게 무엇의 효과입니까? 엘리사가 죽을 때 시신을 매장했는데 인부들이 일을 잘못했어요. 다른 죽은 시신에 닿으니까 어떻게 됐어요? 엘리사 시체는 안 살아났는데 엘리사 시신에 닿았던 사람은 이게 살아났죠? 그러면 엘리사 시신에게 무슨 능력이 있다는 말입니까? 죽은 자도 살리는 부활의 조짐이 있다 이 말이거든요.

베드로전서 1장 11절에 나오죠. 선지자 속에 누가 있다? 그리스도 영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고난과 부활 영광을 미리 이야기했잖아요. 그런데 엘리사가 평소에 기적을 일으킨 것도 다 사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시고 나중에 부활하신 그 능력을 구약 때 관점에서 이야기한 겁니다.
 
그렇다면 이 후지 산이 밑에 마그마가 있으니까 후지 산이 이스라엘 역사라면 지열이 있으니까 뜨끈뜨끈하겠죠. 이게 뭐가 있어요. 그게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와의 차이점 이예요. 그걸 언약이라고 해요. 오늘날 언약의 공동체가 뭡니까? 언약의 사람들이 누구에요? 성도죠. 성도가 살아가는 게 뭔가 후끈후끈해. 뜨끈뜨끈해하고 조짐이 있어요. 죽어도 살겠고, 이런 게 있어요.

에스더에 보면 예쁜 별이라는 이름의 에스더 왕비가 있었잖아요. 왕비가 가장 왕비 값을 한 게 뭐냐 하면 미스 바사 나라 가서 진선미 되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미스 코리아’ 이런 미스 코리아 말고 진짜 에스더가 사촌 모르드개가 하는 이야기가 진짜 네가 왕비 된 이유가 이게 할당 받은 배역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무슨 소리 하라고? “죽으면 죽으리라“

여러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게 아하수에로 왕이 그 이야기하기 전부터 평소부터 잠자리 같이 하고 늘 친하게 지내고 ‘자기 너무 예뻐’ 했으면 구태여 “죽으면 죽으리라” 할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벌써 남편이 자기를 안 본 지가 벌써 몇 달 됐잖아요. 그래서 남편이 하도 궁녀가 많으니까 남편도 참 여자 관리하기가 힘들다고 봐요. 하도 여자가 많으니까 질투를 조정하기 위해서 오늘은 장희빈, 내일은 누구, 하는데 자기 순서가 오지를 않는 거예요. 순서가 아닌데 나오면 다른 왕후가 질투하기 때문에 분쟁이 일어나면 배후에 조정의 세척들이 있기 때문에 나라꼴이 안 돼요. 그래서 순서 정해서 왕이 필요할 때 ‘오늘은 정숙이가 보고 싶다.’ 해서 가는데 이거는 정숙이 차례인데 에스더가 튀어나왔으니까 정숙이 들었으면 기분이 굉장히 나빴을 거예요. ‘언니 내 차례인데 왜 언니가 나와?’ 법에 어긋난 일을 했는데 예뻐도 너무 예뻐, 세상에 이거는 미쳤어. ‘나라의 반을 너한테 등기 이전해줄게.‘ 그런데 그렇게 반 준다 하지 말고 그 전에 “죽으면 죽으리라”

결국은 하나님께서는 에스더를 그 나라에 박아 놓은 이유는 그 한 소리 하기 위해서. “죽으면 죽으리라” 이 말은 처음부터 모르드개가 ‘너는 죽기 위해서 그 자리를 할당받았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죽음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성도를 죽이시는데 그냥 죽이는 게 아니고 언약 적으로 죽게 만들어요. 어떻게? 자기 공로와 자기 의, 자기변명으로 일관하지 않도록 나는 있어도 없는 자로 만들고 주님이 계신 자로서 우리를 사용하면서 지금도 베드로처럼 또 스데반집사처럼 우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시간 개념은 아까 우리가 과거 현재 미래를 생각한다면 자기변명밖에 안 나오죠. 그런데 우리의 모든 시간 과거 현재 미래는 내 죄를 까발리기 위해서 시간 개념이 있을 뿐이고, 그 다음에 그 밑에 뭐가 흐른다? 이레가 흘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1 이레, 주님의 십자가가 이 같은 평생 죄만 짓는 나를 이렇게 마그마가 터져서 완전히 나를 불바다 만들어서 구원을 했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만들죠. 그걸 다니엘에게 미리 알려준 겁니다.

이걸 다니엘한테 알려줬다고 하는데요. 사실은 이스라엘 나라한테 이야기한 거예요. 다니엘은 선지자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은 현재 이스라엘 말고 장차 신약 시대에 올 진짜 교회, 이스라엘을 위해서 다니엘이 미리 이렇게 그 당시에 계시를 준 겁니다. 이해가 되시겠죠.

그 다음에 진도 나갑시다. 이렇게 이레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이 돼야 돼요. 자 그렇다면 아까 Grid 이야기했는데 이걸 모눈형식이라 하는데 이렇게 칸막이가 촘촘한 거잖아요. 이 그리드(Grid)란 말을 제가 왜 사용했느냐 하면 시간을 쪼갤 수 있는 관점이 인간은 안 돼요. 인간은 쪼개버리면 소용이 없어요. 인간은 모눈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냥 선이잖아요. 인간 생각에 시간은 선이거든요. 앞의 선에서는 뒤에 것이 날라 가 버리고 또 앞의 선에서는 뒤의 것이 날라 가 버렸어요. 마치 뱀이 지 꼬리 먹는 것처럼 자꾸 먹으면 없어져요.

시간? 60살았으니까 시간 다 날라 가서 없어요. 인간이 죽는다는 것이 굉장히 아쉬운 이유가 죽으면 모든 게 사라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공들였고 그렇게 애쓰고 남보다 잘되려고 비비크림 바르고 그렇게 살았는데 죽게 되면 그 발랐던 비비크림 피부도 날라 가 버리고 내가 아는 사람들, 나한테 욕했던 사람들이나 좋아했던 모든 사람들은 다 날라 가 버리고 심지어 그렇게 생각하는 나도 날라 가 버리면 도대체 나는 이 땅에 왜 왔느냐 이 말이죠. 다 날라 가 버렸는데. 꼭 방귀냄새 같아. 뀔 때는 좋지, 뽕! 하고, 태어날 때는 온 동네잔치하면서 아들 태어났는데 죽을 때는 방귀냄새 돼서 한번 뀌고 난 뒤에는 소리만 요란스럽지, 나중에 보면 잠시 냄새나다가 바람 불면 날라 가 버리고.

요새 김대중이 어디 있어요? 없잖아요. 없다니까. 요새 노무현이 어디 있습니까? 없잖아요. 이걸 억지로 기념물 세워서 기억해봐야 나중에 기억하는 본인이 죽어버리면 기억도 날라 가 버리는데. 만약에 제가 죽고 난 뒤에 기억하는 사람 있으면 죽은 시체가 ‘제발 너만 살려다오. 나를 기억해다오.’ 이럽니까?

그래서 부모한테는 자식 없이 죽는 게 그렇게 서러운 거예요. 자식한테는 자기 기억이 있잖아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그렇게 사랑했던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게 하니까 도대체 하나님은 인간을 살리는 하나님이 아니고 아예 못 죽여서 환장하신 하나님 이예요. 니가 제발 죽어야 니 자리에서 예수님이 피어나거든요. 하나의 밀알이 죽어야 그래서 새싹이 나오잖아요. 하나님 관심사는 그리스도 몸이지, 이 더럽고 추잡한 내 몸, 이 근호 몸은 아닙니다. 니는 죽고 그리스도 몸에 섞여서 그리스도 몸으로 다시 태어나라. 완전히 수목장이라. 나무에다 해골 가루를 뿌려서 나무가 어디 조상이 되고 할아버지가 되고 할머니가 되고.

그런데 인간은 이렇게 선이기 때문에 남긴 게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은 재단하는 거예요. 양복 할 때. 하나님은 시간을 재단을 해버려요. 시간을 재단을 하는데 이걸 모눈(▦)이라 해놓고 요걸 하나를 전부 다 때! 카이로스!
크로노스가 있고 아이온이 있고 카이로스, 시간에는 3가지 표현을 하거든요.

보통 인간들의 육체로는 과거 현재 미래, 그걸 크로노스라고 해요. 그냥 그렇고 그런 시간들, 과거 현재. 이 크로노스는 ~~했다. ~~하다. ~~할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가 살아 있는 것은 크로노스라는 시간 이예요. 그게 아니고 예를 들어서 ‘나는 밥을 먹었어. 과거. 먹고 있어. 현재, 먹을 거야. 미래 요건 크로노스고요.

밥 먹기, 이것은 to 부정사에요. to 부정사라 하는 것은 동사 앞에 to를 붙여서 명사나 대명사 역할을 하는 걸 to 부정사가 하잖아요. 이것은 ~~하기, 밥 먹기, 이것은 아이온이라 해서 순수, 모든 시간이 없죠. 시간이 없는데 밥 먹기가 과거가 되면 밥 먹었다가 되고 현재는 밥 먹는 중이다가 되고 미래는 밥 먹을 것이다가 돼요. 그러나 밥 먹기, 요거는 이미 하늘에 앉히시니, 처럼 이미 시간 관계없이 모든 데에 다 적용되는 거예요.

지구 밑바닥이 이렇게 있으면 여기(크로노스)에는 밥 먹었고 밥 먹고 있다가 되는데 밑에서 밥 먹기가 여기서 쏘아대는 거예요. 그럼 밥 먹기는 나에게만 해당됩니까? 옆 사람도 해당됩니까? 다른 사람도 밥 먹으면 밥 먹기에요. 밥 먹기는 사람이 ‘나는 어제 밥 먹었거든.’ 그러면 ‘나는 아직 밥 먹기 안 했거든.’ 이런다 말이죠. 밥 먹기는 공평하게 누구나 개인의 개별자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게 누구한테 해당되는 겁니까? 이건 예수 믿기거든요. 이거는 주님이 선물로 주면 다 믿게 돼 있지, ‘나는 잘 믿었어, 나는 덜 믿었어.’ 이게 안 돼요. 성경에 나와 있는 이미 예수 믿는 사람은 “하늘에 앉히시니.” 라고 돼 있는데 에베소서 2장 5절 봅시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앉히셨고, 로 돼 있죠. 그럼 크로노스에 해당 되는 사람은 이렇게 봅니다. ‘언제 앉았습니까? 언제?’ 5년 전의 과거입니까? 아니면 오늘 아침입니까? 내일 모레 아침이란 뜻입니까? 이미 아이온을 자꾸 뭐로 해석하느냐 하면 크로노스 식으로 자꾸 해석을 요구하는 거예요. 꼭 구원 파 같아요.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그건 크로노스죠. 성경에는 아이온이라니까요. 

앉히셨다면 이건 누구한테도 언제고 함께 일으키사, 언제 일으켰습니까? 물어보지도 안 하고 언제? 내가 잠잘 때? 그 다음에 뭡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엉덩이가 구름 위에 앉았나? 이건 뭐냐 하면 니들이 그걸 느끼든 안 느끼든 주께서 예수 안에서 반드시 언약 안에서 이걸 너한테 실시시키고 말리라는 주님의 자기 결심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이미 될 것인데 그때 될 것이라 하지 말고 이미 되었다고 치고 될 것이라는 경험만 미리 하면 되는 거예요. 앞으로. “하늘에 앉히시니” 하는 것은 이미 서류 정리 끝났어요. 서울 대학에 합격돼 있고 그 다음에 3월 2일 날 되면 입학식만 하면 되는 거예요.

“이미 아는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한 걸 영화롭게 해놓고 그걸 우리보고 믿음, 성령 주셔서 믿음으로 깨닫게 하는 겁니다. ‘아! 이미 구원받아 버렸네. 아! 그것도 모르고 구원 받으려고 마귀한테 속아서 사기꾼한테 속아서 맨날 열심히 하고 돈 바쳤는데.’ 이미 예수 피로 끝나서 돈 안 갖다 바쳐도 구원 받아요. 참 기쁜 소식 아닙니까? 돈 안 내도 구원받는다니까. 이 기쁜 소식을!

크로노스, 아이온 차이를 아셨죠? 카이로스, 카이로스는 이건 주님이 일으킨 사건입니다. 아이온에서 이미 마련된 그 모든 일이 요 인간의 시간 표면에 접촉이 될 때고 때가 카이로스예요. 요걸 ‘때가 되매’ 전도서에 보면 울 때가 있고 사랑할 때가 있고 헤어질 때가 있고, 이 세상은 맨날 사랑과 전쟁 2라. 맨날 바람피우고 맨날 싸우고 맨날 헤어지고, 맨날 4주간 냉각기 갖고.

맨날 우리는 크로노스에 놀아나면서 맨날 울고불고 나 혼자 울고불고 나 혼자 책을 보고 나 혼자 잠을 자고 맨날 울고불고, 그것도 안 되면 자살하려하고 맨날 …하려하고. 카이로스를 만난 사람이 그게 바로 다메섹에서 사도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겁니다. 카이로스는 누가 유발시킨다? 예수님 쪽에서 유발시킵니다. 그래서 그걸 사건입니다.

카이로스가 사건화 되면, 거기 접촉된 사람은 존재가 아니고 뭐로 바뀌느냐, 이게 사건으로 바뀌어요. 그 상세한 것은 이번 수련회 때 합니다. coming soon. 이건 수련회 때 해야지, 지금 하면 안 돼요.ㅎ

인간 자체가 시간을 완전히 쥐포처럼 기계에다 눌러 버려요. 그러면 몇 년 살았던 간에 카이로스가 돼 버려요. 태어난 것부터 죽음이 바로 옆에 있어요. ‘태어났다. 죽었다.’ 가 되는 거예요. 이게 아까 시편 90편에 보면 천년이 하루도 아니고 한 경점, 경점이 뭐냐 하면 11시 59분에서 땡! 하고 12시 넘어갈 때, 새벽 1시에서 2시로 넘어가는 그때. 고 짧은 한 순간이 바로 우리 긴 긴 지겨운 긴 긴 한평생 이예요.

지난 대구 강의에서 했는데 인생에는 재수 좋은 게 하나도 없어요. 어떤 행운이나 로또에 당첨돼도 그거 재수가 없는 겁니다. 인생에서 재수가 좋다는 게 없어요. 왜, 전부 다 실패작 이예요. 다만 그 실패작을 가지고 예수님이 주님임을 보여줄 경우에만 그 실패자가 주님의 성공에 재료가 될 경우에만 그 인생은 행운을 잡은 축복받은 사람 이예요.

이런 사람을 시편 1편에서는 의인이라 하고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 이거 설명하겠습니다. 참 너무 어려운 거라서, 사람들이 이걸 굉장히 쉽게 생각해요. 맨날 대심방할 때 이거 해서 쉽게 생각하는데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거든요. 이 말이 얼마나 어려운지 어느 누구도 스스로 자기를 악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해석이 어려운 거예요.

‘하나님, 저 악인인데요. 어떻게 의인됩니까?’ 세상에 이런 사람이 없어요. 자기는 뭐다? 의인이라고 여기고 그때부터 자기와 함께 있지 않은 놈들은 전부 다 악인이 되는 겁니다. 이게 시편 1편에 나오는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율법을 집어넣어도 마찬가지에요. 바리새인 사두개인 똑같은 인간 이예요. 그래서 이 말씀은 굉장히 어려운 말씀 이예요.

그러면 이 말씀을 해석할 때 어떻게 하라 했습니까? 반드시 뭐를 경유해라 했습니까? 언약! 십자가 언약을 경유하죠. 그러면 의인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의인은 예수님밖에 없고 실제로 그래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자라” 고 하나님이 인정받은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 예수님이 그런 이야기할 때 그 이야기를 어디서 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주님 자리에서 그 이야기했거든요. 예수님이 그 자리 올라가게 되면 방금한 그 말씀을 예수님 선에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자기가 원하는 자는 주님이, 주님 됐으니까, 요한복음 5장에 보면 하나님의 모든 권한과 심판을 주님께 맡기잖아요. 맡기게 되면 주님이 주님의 자리에 앉습니다. 주의 오른편 자리에 앉으면 주의 자리에서 하는 일이 뭐냐 하면 자기가 원하는 자는 살리고, 자기가 구원시키고 싶지 않은 사람은 그냥 버려두는 그런 역할을 한다고요.

그렇다면 그때 시편 1편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그 주의 자리에서 주님만 그 법령대로 실시될 뿐이죠. 그러면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 할 때에 예수를 주님에 의해서 믿어진 사람만이 의인이 되고 주님이 믿음을 안 준 사람은 뭐가 됩니까? 아무리 의인되려고 애를 써도 말씀을 천 독, 만 독을 해도 그 사람은 악인이 되는 게 아니고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기 때문에 악인으로서 분류처리 되는 거예요. 예수님 밉죠?

이게 인간의 행위로부터 출발할 종교라면 아무리 이야기를 열심히 침 튀겨서 해도 못 알아듣습니다. 그리고 많이 당황하십니다. 많이 당황하십니다. 여호와 증인도 이런 이야기를 많이 당황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그동안 코로노스에 있기 때문에 내가 여호와 증인 교회에 다니면서 그렇게 열심히 했고 오늘도 이렇게 노력하고 이렇게 전도해서 여호와 증인도 144,000 있거든요. 거기 들어가려고 애를 썼는데 만약 이렇게 돼 버리면 이 크로노스가 아니고 이게 카이로스로 와 버리면 크로노스로 했던 것이 몽땅 이게 헛발질, 아무짝도 소용없는 짓을 자기 청춘을 다 바쳐서 해온 거예요. 참, 가슴을 치면서 ‘청춘을 돌려 달라’ 고 나 훈아처럼 노래 부를 수 없는 문제고. 청춘이 돌아옵니까? 이미 사라졌는데.

질문: 크로노스하고 예수님의 때, 예수님의 흔적하고 같은 볼 수 있나요?
답변: 그렇죠. 그 주의할 게 있어요. 그 흔적들을 모아버리면 안 돼요. 왜냐 하면 사건은 사건으로 끝나야지. 사건 끌어 모아서 역사로 만들어 버리면 이건 다시 카이로스에서 크로노스로 돌아가서 고걸 납득을 해버리면 구원받는 식이 돼요. 고런 오류가 개혁주의 교회, 그리고 신천지, 그리고 모든 예수님 재림 날짜 계산하는 사람, 그리고 휴거 계산하는 사람들, 요한계시록 보고 종말 시나리오 짜서 미리 알아 챙기면 도둑 와도 깨어있다고 주장하는 그런 사람들, 크로노스에요. ‘깨어 있어라.’ 뭘 깨어있어라? 시간관념 계산 잘해라.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 제일 어려운 비유가 뭐냐, 어리석은 처녀 기름 준비 하는 거. 예수님 오실 때 다 자고 있을 때 왔어요. 지혜로운 처녀, 어리석은 처녀, 다 잤습니다. 다 잠을 잤어요. 다 주무실 때 옵니다. 다 잠을 잘 때 신랑이 왔거든요. 그거는 데살로니가 후서의 말씀 “그때 너희가 깨어 있어라” 그 말씀과 안 맞아요. 그들은 다 자고 있었는데. 자고 있는데 기름만 준비하고 있으면 ‘깨어준다.‘ 이런 쪽이고, 저쪽에서는 만화 보면 나오잖아요. 눈에 성냥개비를 눈 위에서 아래로 하면 잠이 와도 열리게 만들어라. 이런 식으로 깨어있어야 돼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카이로스라 하는 것은 말씀을 품고 있거든요. “도둑 같이 올 테니까 깨어 있어라.‘라는 말씀을 품고 그 말씀 자체를 우리에게 줘 버리면 잠자는 우리가 그 말씀 받고 깨어나 버려요. 말씀을 우리가 지켜서 깨는 게 아니고 주께서 깨울 때 그 말씀과 같이 포함해서 깨운다니까요. 말씀 가지고 우리를 쳐버린다니까요. 깨보면 ’아 참 깨어 있어라. 이 말씀이 이 말씀이 되는 거예요.

비슷한 말씀으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하잖아요? 우리가 못 지켜요. 그런데 성령이 와서 한바탕 때려버리면 ‘아!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것이 진짜 말씀 그대로구나. 현실이구나.’ 하는 것을 말씀을 깨닫는 순간 그게 깨어있는 것이고 그게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을 느끼는 순간 이예요.

그러니까 항상 말씀이라 하는 것이 우리가 지킨다고 생각하면 이런 문제가 모순에 빠지는데 말씀 자체도 주께서 지키도록 말씀 자체를 활성화 시키고, 우리는 그냥 도화지고 그림을 누가 그린다? 말씀으로 주님을 피 묻은 채로 말씀을 그려 놓으면 우리는 온 천지에 문신 덩어리, 주님의 피, 피, 피, 피, 주님의 십자가 문신으로 마음 전체가 우리 심령 전체가 피가 뱅뱅 돌고 있는 그야말로 허준이 와도 못 고치는 이상한 병이 걸려서 주님의 피가 돌고 있는 그러한 말씀이 돌고 있는 상태로 사는 거예요.

그럼 목사님 우리가 왜 모릅니까? 우리가 육신대로 살다 보니까 밥만 먹고 잠만 자고 맨날 돈만 번다고 생각하니까 모르다가 카이로스가 때려버리면 성령이 와서 때려버리면 그때 정신이 들어서 ‘주여, 제가 막달아 마리아입니다. 제가 참 돈만 밝혔군요.’ 하다가 2,3초 지나면 돈, 돈, 돈, 돈하면서 돌아다니고. 지 명예와 지 변명 자기 의, 그저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다는 자기주장, 바로 그럴 때 우리의 육신을 까발림으로서 그리스도의 육에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살리라는 그 말씀을 그걸 통해서 다시 또 우리를 보여주죠.

아직까지 70이레는 들어갈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밑에 깔아야 될 이야기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너무 70이레가 어렵기 때문에 오늘은 요정도로 하고 다음에 언젠가는 70이레 본격적으로 들어갈 거예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옛날 선지자 속에 이미 십자가의 영이 작용해서 그들 시대에서 주님의 일하심을 드러냈다는 것을 우리가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도 우리를  재료로 사용해서 십자가 은혜를 증거 하오니 그저 모든 것이 주님의 발걸음이 인도하는 것이고 모든 일이 주의 언약대로 움직인다는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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