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사항

70이레논문11-공간의 깊이

아빠와 함께 2023. 7. 7. 16:30

가락교회-70이레 논문(공간의 깊이)130704-23강a -이 근호 목사

230페이지 밑에서 다섯 번째 줄에『결코 바벨론 제국은 다니엘과 세 친구의 원수의 나라가 아니다. 도리어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역사적 제국이다. 그런데 왜 70년 포로기간이 지나면 자신들은 앞으로 이 역사적 제국이 아닌 비역사적 제국에 복속되어 지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줄 나라와 관련된 채 이 지상에서 지혜자로 살아가게 된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다니엘과 세 친구가 지혜자 잖아요. 그럼 지혜자가 살 나라가 지혜자만 모이는 집합한 나라가 돼야 되는데 그 나라는 이 지구상, 역사상에 없어요. 없기 때문에 지혜자는 역사상에 있는 나라한테  도움을 받으면서 거기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이 말입니다. 지금 이 문장이. 보호는 받아요, 이 나라, 국가가 인간을 보호하잖아요. 하지만 지혜자, 요즘으로 말하면 성도, 성도는 이 대한민국한테 보호는 받지만 거기서 분류가 돼서 지혜자나 성도끼리만 모인 나라에 따로 거기에 나중에 흡수당해야 되는 겁니다. 이렇게 뽑아내는 작업, 진공청소기처럼 뽑아내는 작업이 바로 다니엘한테 70이레라는 계시로 주어진 겁니다.

방금 한 것은 별로 어렵지 않죠. 그러면 이제 안 오신 분 있어서 어려운 것부터 한번 후딱 해봅시다. 질문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창조할 수 있습니까? 없죠. 인간이 인간을 낳죠. 낳는다는 말은 그 자식에 대한 모델을 내가 설계하거나 결정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 애는 코가 두 개 있는 애를 만들어봐야지, 낳아봐야지.’ 이게 안 되거든요. 낳는다는 것은 그냥 통과하는 거예요. 내가 하나의 매개가 될 뿐, 내가 어떻게 자식에 대해서 수습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그냥 쑥 빠지는 거니까.

그러면 인간은 누가 만들었어요? 지금 이 문제가 이 세상 어느 인간도 답변할 인간이 없다니까. 인간이 왜 뒤통수에 코가 없고 왜 앞에 코가 있는데요? 누가 왜 코가 앞에 있도록 만들었습니까? 신이 만들었다 하는 것은 하나님이 만들었다 하는 것은 이건 답변이 없다는 이야기예요. 답변 없는 쪽을 전부 다 뭉둥거려 신이 만들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이 만들었다는 것은 모르겠다는 뜻 이예요. 다른 말로 하면 왜 내가 이렇게 귀가 요렇게 안 달리고 이렇게 달려있는지, 나는 요렇게 달린 사람이고 싶은데 난 이렇게 달려있는지, 왜 인간을 설계할 때 인간을 어떻게 요렇게 설계하도록 해서 요렇게 만들어 났느냐 이 말입니다. 제가 하는 말은.

원숭이 엉덩이는 벌건데 왜 우리는 왜 안 벌거냐. 이 말입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다른 동물과 비교한 대목이 나와요. 거기서 배필 자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적정한 배필 자가 없죠. 그래서 나중에 아담 몸에서 또 하나의 인간을 창조해내시잖아요. 그 아담 몸에서 하와가 나왔다는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처음에 인간을 어떻게 만들었느냐에 대한 힌트를 여기다가 담아놓은 겁니다. 아담이 기존에 이미 나와 있는 제품들, 원숭이, 코끼리에서 자기가 살고 싶은 여인, 당기는 여인은 없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없다.’가 돼요. ‘없다.‘를 먼저 하나님께서 분명히 해요. 있나? 없나? 없습니다. 없지? 그러면 나중에 아내가 생기잖아요. 있잖아요. 있으면 없다 ➩ 있다가 있을 때 아담이 이 없다, 에서 있다, 로 넘어가는 여기에 아담이 여기서 자기가 어떤 권한이나 자기 의견을 손들고 ’제 아내는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의견을 제시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관여가 안 되죠.

결국은 관여가 안 된다는 말은 인간은 뭐냐, 인간은 질의, 질문할 자격이 없는 거예요. 이 세상의 모든 있음에 대해서! 심지어 그 있음에 누구도 포함되느냐 하면 내가있음에, ‘나는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왜 나는 남자입니까? 나는 왜 여자입니까?’ 라는 질문 자체가 하나님께 우리는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신은 뭐냐 하면 신은 결국 이거예요. 천지를 어떻게 만들었느냐가 신이 아니라 용납 안 됨, 그런데 누구는? 인간으로서는 용납 안 되는 그분이 바로 하나님 이예요. ‘하나님 어떻게 생겼을까?’라는 질문을 해서는 안 되는 그분, ‘왜 하나님은 내 인생을 이렇게 꼬이게 만들었을까?’라는 질문을 해서는 안 되는 그분, 그분 앞에 서면 나는 욥처럼 입이 100개라도 할 말이 없어졌어요. 그리고 이사야처럼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죄 짓게 만들고 망하게 했더라도 그것조차도 ‘왜 이렇게 죄 짓게 했습니까? 망하게 했습니까?‘란 질문을 해서는 안 되는 그 어떤 분이 바로 하나님이세요. 이게 뭐냐 지혜입니다. 이게 다니엘이 받았던 지혜에요.

그럼 문제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또는 왜 하나님께서 인간을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 거기에 대한 것을 인간이 개입 못 하죠. 인간이 개입을 못하면 이 없다, 에서 있다. 에 여기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바로 지혜가 들어가죠. 요 지혜를 시간적인 표현으로 하는 것이 뭐냐 하면 70이레입니다.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주제가 뭐냐, 70이레에 담긴 의미 아닙니까? 70이레가 뭐냐, 이건데 없다, 에서 있다, 로 넘어가는데 있어서는 인간의 지혜는 차단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지혜가 들어가는데 하나님의 지혜 중에 지혜를 표현하는 게 뭐냐 하면 70이레, 라고 표현한 거예요.

70이레의 그 핵심은 이미 우리는 압니다. 성령 받은 사람한테는, 누구냐 하면 예수님 이예요. 70이레는 며칠이냐가 아니라 몇 년이냐가 아니라 70이레 정답은 누구다? 예수님이 70이레에요. 예수님이 70이레라 하면 논리가 너무 뛰어버렸어요. 연결이 안 되잖아요. 논리가 너무 뛰니까, 우리가 없어야 되는데 현재 없어야 되는데 우리가 있잖아요. 그러면 없는 사람이 ‘날 왜 이렇게 만들어놨습니까? 라고 할 자격은 못 되죠. 왜 애초부터 없으니까. 없는 인간이 입 다물고 있어. 하면 할 말 없어요. 없었으니까.

있어 놓고 ‘왜 이렇게 했습니까?’ 말은 안 돼요. 그러면 없다, 에서 있다, 사이에는 ‘왜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라고 인간이 개입이 차단됐는데 어쨌든 없는데서 있었으니까 인간이 차단된 상태에서는 누가 개입한 건 분명하잖아요. 그럼 누가 개입했는가? 이것이 보통 하나님이 개입했다. 이러면 그건 하나 마라 소리고, 그게 뭐냐 다니엘에 보면 지혜가 개입된 거예요.

지혜가 개입되게 되면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현재 다니엘 세 친구는 현재 바벨론 사람은 아니잖아요. 바벨론 나라는 역사적 나라잖아요. 그런데 다니엘 세 친구는 어느 나라라 했습니까? 처음에 역사적 나라가 아니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 들어가야 될 사람이죠. 그러면 그 나라는 이 지상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 나라가 없다는 말은 그 나라에 소속된 다니엘도 이 세상에서는 없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없는 존재가 그 천국에 들어가는 이런 나라가 되려면 여기서 다니엘 개인이 내세우는 어떤 의견이나 사상이나 협력 같은 것은 빠져야 되겠죠. 그럼 순전히 하나님의 지혜만이 현재 다니엘을 천국에 집어넣는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에게 뭐가 주어졌습니까? 70이레 계시가 주어졌잖아요. 그럼 70이레 주어진 이 계시는 우리는 정답을 알죠. 예수님이라는 걸 아는데, 지금 예수님이 어떻게 나오느냐,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지워버리자 이 말이죠. 그러면 지금 남는 게 뭐냐, 70이레 밖에 없죠. 70이레 밖에 없다면 방금 이야기한 바벨론, 묵시의 나라 천국이죠. 바벨론, 천국, 다니엘과 세 친구, 이 전체를 표현할 때 뭐로 바꾸느냐 하면 70이레니까 이건 시간적 표현이잖아요.

이 세상의 모든 움직임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시간적 표현으로 바꿔줄 필요가 있다 이 말이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귀가 이렇게 달려있는데 내 생각에는 귀가 요렇게 달려있으면 좋겠다는 고런 아이디어로서 인간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잖아요. 왜 귀가 요렇게 안 달리고 왜 귀가 이렇게 달렸는가, 이유가 뭡니까? 우리 인간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하죠. 요럴 수도 있고 사각형일 수도 있고 이럴 수도 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인데 왜 그 많은 가능성 가운데서 아까 처음 질문이 뭡니까? 인간이 인간을 창조할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이었죠. 낳을 수는 있지만 창조는 된다? 안 된다? 안 되죠. 왜 창조는 본이 있어야 되고 설계도면이 있어야 되죠. 설계 도면을 우리 같으면 귀가 요렇게 달리도록 하면 애가 요렇게 나옵니까? 안 되죠.

결국 인간은 인간을 창조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낳은 도구는 될 수 있지만 창조는 안 되죠. 그럼 인간들을 누가 이렇게 만들었느냐 말이죠. 그건 인간은 그런 질문할 자격도 없고 거기에 대한 해답도 알 도리가 없죠.

어쨌든 있다는 게 중요한데 이 있음에 우선해서 먼저 있다는 게 뭐냐, 지혜가 먼저 있고 지혜에 합당한 지혜인, 요새 말하면 성도가 있게 되는 겁니다. 요거는 이해가 되시겠죠? 다니엘이 천국 가고 싶다, 이 말은 말도 안 되는 소리, 왜냐 하면 다니엘은 바벨론 사람이거든요. 이스라엘 사람이고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갔기 때문에 천국이라 하는 것은, 천국 설계도를 누가 했습니까? 다니엘이 만들었습니까? 제 논리를 잘 따라오세요. 나라는 인간이 내가 설계 안 했잖아요. 그런데 있잖아요. 내가 설계 안 해도 있잖아요. 그럼 천국 없을 때 누가 설계 했습니까? 우리가 안 했잖아요. 그런데 천국은 있잖아요. 그렇다면 천국 있는 본설계도는 우리 선에서 이미 떠나버렸다 이 말이죠. 떠나버린 것을 다니엘에서는 그걸 지혜라고 하는 겁니다.

그 지혜가 표현을 어떻게 봤다? 70이레로 봤다 이 말이죠. 이제 70이레 파악을 해야 되는데 파헤쳐 보면 천국은 70이레 주인공이 천국을 만들었고 그 방법과 원리와 그 모든 규칙과 질서도 70이레 속에 숨어 있는 거예요. 그 숨어있는 것을 이제 밝혀보자 이 말 이예요.

그런데 70이레라 하는 것은 시간적 표현이다 말이죠. 어떻게 시간적 표현에서 존재가 나오느냐 이 말 아닙니까? 그래서 이게 어려운 거예요. 시간적 표현, 오늘 며칠이지? 오늘 7월 4일, 아! 7월 4일 너무너무 맛있다. 말이 안 된다니까. 7월 4일이 왜 맛있어요? 7월 4일은 7월 4일이지, 그게 음식도 아니고 왜 맛있어야 될 이유가 없잖아요? 70이레라 하는 것은 70 ☓ 이레= 70이레다. 그게 왜 예수님인지, 말이 안 되잖아요. 예수님이란 어떤 존재를 말하고, 70이레는 시간적 표현인데, 어떻게 시간적 표현이 존재와 어떻게 등식(=)이 되느냐 이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온 모든 70이레 해석은 예수님이라고 안 나오고 70을 인간들이 이미 아는 방법으로 하는 거예요. 70☓7=490일이라 해서 이걸 역사 속에서 490년 자료를 만들어요. 자료를 만들어서 요리 재보고, 요리 재보고, 요리 재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 다윗처럼 사람보고 침대 만드는 게 아니고  침대 만들어 놓고 사람이 만약에 키가 크면  발목을 잘라버리고, 키가 안 되면 잡아당겨서 키를 맞추고, 이렇게 죽인 거예요. 그건 사람 죽이는 일종의 방법입니다. 다윗이 그런 잔인한 짓을 했어요. 다윗이 그렇게 잔인한 짓을 했다는 말은 하나님이 그렇게 잔인해요.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아주 잔인하게 저주해버립니다.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것! 왜 언약 밖이 잔인하냐 하면 언약 밖에 있으면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어차피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건 잔인하다는 말도 성립이 안 돼요. 돌멩이 보고 찼다고 해서 돌멩이보고 잔인하게 군다, 소리 안 하잖아요. 언약 밖에는 인간이 아닙니다.

두 번째 아담과 연관되지 않으면 그건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 취급을 안 해요. 항상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이야기하거든요. 언약에서 살아야 사는 거고, 언약 밖에서 사는 이건 죽은 걸로 간주합니다. 언약 안에 있을 때만 있음으로 간주하고 언약 밖에 있는 것은 있으나 마라 그건 없는 걸로 취급하거든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인간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있음을 증언하지 못하면 그건 영원한 지옥에서 주님한테 벌 받았다는 식으로만 존재해야 될 운명입니다. 성경은 전부 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70이레에서 시간을 예수님으로 할 때는 어떻게 논리가 이어지는가, 잇는 방법이 뭐냐, 잇는 방법을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문제만 던져놓고 해답을 안 주면 안 되잖아요. 늦게 오셨으니까 다시 한 번 해봅시다. 다니엘 세 친구는 바벨론 제국에 보호는 받지만 바벨론 제국에 소속된 사람은 아니죠. 그럼 다니엘 세 친구는 어디에 소속돼 있습니까? 지금 없는 나라에요. 지금은 없는데 장차 올 나라에 소속돼 있잖아요. 그렇죠?

그럼 하나님께서 바벨론 제국을 통해서 보호한다는 것이 밥이나 먹여주는 게 보호하는 게 아니고, 바벨론 제국에서 싹이 나와야 돼요. 씨앗이 뿌려지고 싹이 올라오는 게 지혜라는 거, 자꾸 제가 지혜라는 말을 하니까 ‘목사님, 다니엘에서 왜 지혜라는 말을 강조하느냐.’ 하는데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잖아요. 꿈꿀 때 누굴 찾습니까? 야, 여기 지혜로운 자 없나? 똑똑한 자를 찾는 게 아니고 하늘과 땅이 연결된 사람을 찾는 거예요. 그 찾을 때 등장한 사람이 누굽니까? 다니엘이잖아요. 이건 마치 바로 때 요셉과 똑같은 거예요. 다니엘이 똑똑해서 아이큐 높아서 안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알려주니까 아는 거예요. 그러니 이 말은 다니엘은 누가 봐도 바벨론 제국의 관료이고 고급 관원 이예요. 하지만 하나님 안목에서 보면 니는 바벨론 제국과 함께 멸망할 짐승의 나라와 멸망할 그런 구성원은 아닌 거예요. 내가 뽑아내겠다는 겁니다. 뽑아낼 때 그 뽑아내는 방식이 바로 그게 지혜라면 결국 다니엘과 세 친구가 갈 나라는 어느 나라다? 지혜의 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 지혜의 나라를 70이레로 표현한 거예요. 지혜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구성원은 어떻게 되고 조직은 어떻게 되고 주인공은 누구며 언제 오며 그게 올 때 주위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며 이 모든 것이 70이레라는 시간적 표현 안에 이미 포함돼 있는 겁니다. 우리는 그 겹쳐져 있는 그러한 것을 바게트라 합니까? 빵이 여러 겹으로 돼 있는데 페스츄리를 그걸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보려고 하는 겁니다. 벗기면 또 튀어나오고 또 나오니까 그런 식으로 중첩된 것을 벗겨보면 그 안에 담겨 있는 언약적인 내용이 풀풀 나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풀어나가느냐? 70이레와 그리고 예수님 사이에 (70이레=예수님)이 되기 위해서 70이레가 언약으로 넘어가서 예수님한테 구름다리처럼 언약으로 전달돼야 됩니다. 70이레와 언약의 관계는 어떤 관계냐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주신 맹세가 어느 나라를 나타나게 했습니까? 이스라엘을 유발시켰죠. 애굽에 있던 나라, 나라가 없었는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투입되면서 이스라엘 나라가 생겼습니다. 그 나라의 모든 움직임은 언약대로 움직이는 거예요.

만약에 히브리인들이 단지 애굽 나라의 압제가 고통스럽다면 이스라엘 나라가 그 나라에서 구태여 나올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올 필요가 없죠. 차라리 차기 대통령으로 모세를 그 다음 바로 왕으로 등극시키면 이건 히브리 인들은 휘 바람 불죠. 압제와 서러움에서 이제는 해방되어서 이 나라를 누가 접수한다? 우리 히브리인들이 접수했으니까 이제 만만세 부르면 되잖아요. 그렇잖아요. 압제와 한 맺힘을 생각한다면.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한 맺힘에 대해서 절대로 응답하지 않습니다. 한 맺힘을 이용을 해서 세상에 대해서 미련을 뚝 끊게는 만들지만 그렇게 하시는 동기는 자기 백성에게도 숨겨져 있는 하나님만이 아는 비밀 이예요. 주의 이름이 그들을 친히 강제로 끌고 가야 비로소 그들은 점점 눈이 열려서 ‘아유, 우리가 생각지도 않는 엉뚱한 나라로 끌려가는구나.’ 라고 알지, 미리 짐작해서 알아채는 방법은 없습니다.

사사기 알죠? 사사기에서 사사들이 등장하잖아요. 이거는 우후죽순으로 등장해요. 사사가 하나 끝나면 등장하는 게 아니고 사사기는 일종의 의병 같아요. 저쪽에서 한번 터지면 이쪽에서 터지고 각 지파마다 의로운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 사사기의 특징이 뭐냐 하면 사사기에서 이렇게 압제하는 이방나라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키고 용병을 일으키는데 사사기 특징이 목적이 없어요. 이렇게 우리가 해방했으니까 두 번 다시 타락하지 않도록 확실한 방침을 정하자, 하는 이런 게 없어요.

그들이 고통을 당하매 하나님께 부르짖으매 하나님이 구원자를 보내줬다. 그래서 사사가 있을 동안에는 태평했더라. 그런데 사사가 죽고 난 뒤에 그들은 다시 바알을 섬겼다. 이렇게 돼 있다 이 말이죠. 어떤 대비책, 방비책이 없어요. 왜 그럴까요? 우리 같으면 안 그렇잖아요. 어떻게 대책이 안 세워진다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땅히 범죄를 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오늘 강의 제목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공간의 깊이’라고 하는 거예요. 원근법이라는 거 아시죠? 2차적 평면인데 화면은 3차원적으로 깊이가 있는 것, 지오토라는 사람이 있어서 이태리의 르네상스 이전에 지오토란 이런 사람은 최초의 원근법을 창안한 사람이거든요. 그 사람들이 그린 이태리의 르네상스 그림을 보면 공간의 깊이를 주었습니다. 점점 더 사실적으로 그렸거든요.

공간의 깊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막상 여기서 보면 별로 안 보이는데 현장에 가보면 세상에 주변에 이런 환경, 이런 환경이 있구나, 하는 걸 아는 거예요. 그냥 문에서 보면 그냥 밝음인데 들어와서 보면 전등이 이렇게 많았구나, 하는 걸 알잖아요. 막상 들어와 보면 나름대로의 다양성과 깊이가 새롭게 부각되잖아요.

사사기에서 계속해서 공간의 깊이를 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죄를 지어줘야 돼요. 죄를 지어서 결국에는 그들 입에서 ‘우리도 왕이 필요합니다. 왕 없으니까 맨날 똑같이 반복하니까 우리는 왕만 있으면 우리도 안정되겠습니다.’라는 말, 그런 자기도 모르는 본심이 그게 나와 줘야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왕을 주는 언약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게 접촉이 되는 겁니다. 인간들이 원하는 사울 같은 왕과 ‘사울은 아니야,’ 하고 쳐부수는 준비된 하나님의 숨겨진 하나님의 왕, 누굽니까? 소년 다윗.

질문: 하나님께서 왕을 세우시는 것을 원치 않으셨잖아요?
왕을 세우시는 것을 원치 않지만 왕이라는 표현은 이미 준비된 거예요. 왜냐 하면 인간들이 왕을 원하고 있으니까. 인간들이 아직까지 자기들이 뭘 원하는지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준비된 환경과 사사기처럼 반복할 때마다 점점 더 죄가 깊어지는데(제 사사기 강의에 나와요.) 그 깊이가 삽을 가지고 점점 더 죄의 깊이가, 공간의 깊이가 더욱 더 많이 파들어 갑니다. 나중에는 베냐민 자파까지 작살납니다. 지파 하나까지 없어도 괜찮다 하는 식으로 점점 더 죄가 깊이를 더하면서 결국은 그 깊이에서 만난 게 뭐냐, 하나님의 왕 됨을 싫어하는 어두운 힘이 벌써 이스라엘 속에 자신도 모르게 잠복돼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것과 진짜 왕이 이 지상에서 마주칠 때 진짜 준비 된 왕이 얼마나 수난을 당하는지, 얼마나 핍박받고 무시당하는지를 이쪽에 있는 왕 같은 어두움과 대비하면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제가 공간의 깊이라고 한 겁니다. 그걸 표현할 때 언약을 가지고 투입하면서 역사적으로 정립해 나가는 겁니다.

지금 제가 언약 이야기했는데 70이레에서 언약을 하면서 언약대로 하게 되면 이스라엘 나라는 있어야 됩니다. 있는데 이스라엘 나라가 70이레 나올 때는 있는 나라가 뭐가 되느냐, 멸망했으니까 없죠. 없고 바벨론 나라에, 짐승의 나라에 흡수 통합되죠.

어제 수요일 날 제가 말했잖아요. 음녀, 다른 민족은 다 같이 우상을 섬겨도 음녀라는 소리를 안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바알을 섬기니까 대번에 하나님께서 ‘에이, 음탕한 여인, 음행한 여인.’ 이라고 표현한 것은 음녀라고 표현하면서 음녀라고 표현하면서 음녀에 대한 합당한 모든 징벌과 저주를 먼저 누구한테 쏟아 붓는다? 이스라엘에게 쏟아 부음으로 말미암아 결국 음녀가 나중에 어디로 발산되느냐, 온 지구상 모든 나라가 음녀가 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그때 온 세상을 저주하고 심판하는 그것을 미리 이스라엘 안에서 미리 맛보여주는 이것이 뭐냐, 언약 적 취지다 이 말입니다.

언약을 받았기 때문에 미리 맛보는 거예요. 하나님의 속 심정을. 음행한 여인에게 나는 이렇게 무섭게 군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음녀라는 개념 규정과 더불어서 나라가 산산조각, 수류탄이 구슬 안에 터지면 알이 날라 가서 사람들이 맞아 죽잖아요. 완전히 나라가 폭발해 버립니다. 용광로 터지듯이. 폭발해 버리는 그러한 무서운 징벌, 그것도 남의 나라가 아니고 자기 백성을 그렇게 만들 때, 이 모습은 장차 온 세계가,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온 나라가 음행이고 음녀죠. 음행한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는데, 이 포도주를 거절할 사람이 아무도 이 세상에 없습니다. 왜, 그건 음녀가 주기 때문에. 음녀가 주는 포도주를 안마시게 되면 그건 그 나라의 소속이 안 돼요.

직장인들하고 노래방에 가서 지가 노래 안 부른다고 빼면 어떻게 되겠어요? 오기는 왜 왔습니까? 집에 일찍 가지. ‘난 노래 못 해요.’ 이러면 안 된다니까요. 이마에 넥타이 묶고 소주병에 숟가락 넣어서 마이크 삼고 템버린으로 훌라~훌라 춤 한번 추고 할 때 ‘나 노래 못해요.’ 하면서 찬송가 부르면 분위기 다 깨지잖아요. 음녀가 주는 잔을 안 마실 위인이 없어요. 다 마시는데 중요한 것은 다 마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왜 자본주의 이 세상이 왜 음녀냐 하는 거예요. 그게 더 중요한 문제에요. ‘난 안 해야지.’ 하는데 지가 뭘 알아야 안 하지요. 지가 뭔지도 모르는데 아는 척 하면서 ‘나는 이건 안 해야지.’ ‘뭘 안 하는데?’  ‘몰라.’ 이러면 안 되잖아요.

이 세상 자체를 음녀를 만들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음녀라고 한 겁니다. 그때 그게 언약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언약이야 말로 그야말로 엑스레이 촬영기, 단층 촬영기, 모든 내막이 다 드러나요. 예수의 십자가가 뭡니까? 모든 인간은 이미 다 죽은 것이라고 돼 있잖아요. 고린도후서 5장 14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죽은 것이라. 십자가가 엑스레이 사진과 같아서 우리 모든 본색을 다 드러내잖아요.

이 언약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폭발해 버립니다. 폭발하고 난 뒤에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주어진 계시가 뭐냐, 70이레잖아요. 70이레니까 이건 뭐냐 하면 70☓이레거든요. 더하기는 양으로 표현되지만 곱하기는 질로 표현돼요. 원래 더하기 곱하기가 어디서 나왔느냐? 기하학에서 나왔습니다. ☐ 하나 + ☐, 그럼 이걸 기하학으로 표현하면 요 덩어리가 합해서 이렇게 될 거예요. 그런데 곱하기라 하는 것은 ☐+☐ 가 아니고 곱하기는 이렇게 되거든요. 사각형에서 면적을 낼 때 (가로) 3☓ 2 (세로)=6이잖아요. 그런데 더하기는 선적으로 이렇게 평행으로 나가지만 곱하기는 그 전체를 두고 이걸 면적으로 나타내고, 선은 1차원적이지만 면적은 평면이니까 2차원이죠. 차원을 달리애요. 전선 안에 개미가 있다면 개미가 요기 1마리, 요기 2마리 요기 3마리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개미가 흩어져 있을 때는 더하기가 아니고 곱하기를 해야 돼요. 곱하기 6마리, 이거는 2마리,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70이레는 이레가 70번이나 더했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레 자체에 담겨있는 내용을 70이라는 걸로 표현을 해준다. 쏘아댄다고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말 어렵게 하면 어렵게 한 걸로 무시를 받을 수 있는데 쉽게 하면, 제가 지난번에 했잖아요. 권사님께서 내가 환갑이 됐다고 남방 하나 사줬다고 했죠? 사실 남방만 사준 게 아니고 요 티도 사주셨어요. 두 개 사주셨는데 그 다음에 요거 받으려면 60년 기다려야 돼요. 그럴 때는 뭐냐 하면 60년마다 오는 텀 이예요.

그런데 70이레는 62+7+1이잖아요. 요 1이레를 중축으로 1이레의 반복이 되는 겁니다. 만약에 내년 6월 달에 요 티를 입어버리면 전에 준 게 60년 만에 준 게 아니고 내년에 내가 또 이 티를 입으면 이게 1년마다 준 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뭐냐 1년도 아니고 60년도 아니고 이레마다 주거든요. 이레마다 준다는 말은 이레 안에 70을 규정하는 질(성질)이 다 들어있어요. 그러면 70이레를 재삼 규정한다는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시고 모든 제사가 끝나고 죄 용서가 일어나는 요 내용을 지난 모든 인류 역사 속에 틈틈이 거기 다 이미 통치했다는 뜻입니다. 반복을 했다. 반복을!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때렸다. 이게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라는 거예요. 다윗도 말합니다. ‘이건 내 전쟁이 아니고 이건 주의 이름의 전쟁이다.’ 신약에서 누가 주의 이름이죠? 예수님 아닙니까? 이건 예수님이 개입한 전쟁이지 내가 한 게 아니고 나는 목격자죠. 연극에서 지나가는 행인 1, 행인 2, 다 말이죠.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가 있었잖아요. 그때 우연히 지나가다 베드로, 요한이 그걸 봤잖아요. ‘니가 나에게 돈을 원하는 모양인데 나는 너한테 돈은 안 준다. 너한테 줄 것은 돈이 아니고 오직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걸어라.’ 했잖아요. 그러고 난 뒤에 사람들이 ‘야, 이건 베드로, 요한의 경건이 능력이 되어서 그 능력이 그 사람한테 임해서 그 사람이 놀랍게도 걸었다.’라고 이야기하니까 그 베드로, 요한의 말이 ‘이것은 우리의 경건의 능력이 아니고 지금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예수님께로 난 믿음이, 능력이 저 사람을 낫게 했습니다.’ 3장 16절, 그러면 당신은 뭐요? 하니까 ‘우리는 목격자입니다.’ 하는 거예요. 목격자니까 연극으로 하면 지나가는 행인 1, 행인 2가 되는 거예요.

목격자 되는 것도 대단해요. 왜냐 하면 사람 알아보는 안목이 있다는 뜻이잖아요. ‘에이, 주님이 하셨어.’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한다는 것은 이게 얼마나 복 받은 거예요? ‘그 사람 부도났어. 그 사람 예수님이 부도나게 한 거야.’ 이걸 아주 쉽게 한다는 거. 이게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진짜 사단이 하나 떨어지는 능력이 대단한 능력이잖아요. ‘주님이 그렇게 했어요. 그 사람 주님이 그렇게 해서 예수 믿게 하시려고 그 일을 벌였습니다.’라는 말을 아주 자신만만한 게 아니고 본인이 그걸 아니까.

모든 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적인 완성 상태가 개입했을 때 그걸 62년으로 보지 말고 1년으로 보지 말고 그걸 뭐로 보자? 이레로 보자. 이레로 볼 때 이레의 반복, 1이레의 반복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단군이 2천 몇 년 같으면 이레가 3560이레냐? 그래야 되지 않느냐? 이레라는 표현자체가 시원적(始原的) 의미를 갖고 있다, 이렇게 표현을 해요. 시원적 의미, 시원이라 하는 것은 태초란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묵시, 역사를 가지고 노는, 묵시의 특징은 역사를 찌른다는 겁니다. 수술할 수 있다. 역사라는 양을 질로 세 토막으로 낼 수 있는 권한이 묵시한테 있는 겁니다. 묵시의 칼로 세 토막을 나누되 그 내는 토막은 그냥 토막 잘라서 양적으로 자르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공생애 때, 예수님이 이 지상에 하실 일을 인간의 전체 역사를 마치 도마처럼, 마치 샐러드 할 때 채소 마늘 다지면 긴 도마처럼 여겨서 그 도마 위에 예수님의 생애의 중요한 사건을 세 토막으로 나누어서 70이레라는 표현 속에 담아내는 것이라는 것이 제 말입니다. 그게 내 논문의 핵심 이예요. 점점 더 이제 구체화로 들어가야 되겠죠.

70☓7=490, 가브리엘이 다니엘 보고 ‘다니엘아, 490년 되면 다시 메시아 온다.’ 이렇게 한 게 아니고 7을 뭐로 바꿨습니까? 70을 70이레로 바꾼 거예요. 이레니까 이레가 무엇이냐? 1이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냐가 중요하겠죠. 1이레! 1이레가 예수님의 공생애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실 일이 1이레거든요. 그러니까 이것을 1이레라 해버리면 여기 단위 자체가 예수님이 하신 일이라면 7+62+1 할 때 7, 62, 이 모든 여기에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전부 다 개입이 된다 이 말입니다.

문제는 7과 62로 토막을 낼 때 그 토막 내는 그 토막도 예수님의 1이레로 완성한 그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중요한 사건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렇게 토막을 내는 겁니다. 70이레가 인류사 전체냐 하는 것은 당장은 모르지만 토막을 내는 토막을 보면 이 70이레가 인류사 전체를 소급해서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인류사 전체가 어떻게 70년이냐?‘ 라고 한다면 그건 나올 논리가 없어요. 그런데 70이레를 해놓고 7과 62와 1을 토막을 내잖아요. 토막 내는데 개입한 취지의 내용들을 보게 되면 70이레가 전체적으로 전제 인류 역사를 다 언급하고 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토막 낼 때 토막 내는 취지가 뭐냐, 이게 제 논문에는 이렇게 돼 있거든요. 70이레 해놓고 이것을 7+62+1 해서 마치 도마에다 상어, 그걸 경상도 말로 상애, 상어를 돔배기, 톰배기, 돔배기 하나 주세요. 못 들었어요? 상어 돔배기는 주로 경상도에서 제사 음식에 들어가요. 어쨌든 이걸 상어라 하지 말고 단무지라 합시다. 단무지를 이렇게 세 토막 내잖아요. 표현을 이렇게 하지만 이게 실제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2층으로 돼 있어요. 7이레 층, 62이레 층, 1이레 층, 이렇게 돼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 이거는 삼단 색깔로 된 시루떡, 이처럼 표현을 한 거예요.

그러면 7이레가 내용이 성경에 보면 성전을 다시 짓는 게 7이레죠. 이건 이스라엘 역사가 밑바닥에 깔리게 돼요. 그 다음에 62이레는 뭐였습니까? 그 지어진 성전이 완전히 작살이 나는 거예요. 누구한테? 이방민족한테 박살이 나니까 누가 승리한 거예요? 이방민족이 승리한 거예요. 이건 이방민족이 승리하면서 놀라운 사실은 이방민족들이 이유도 모르는 채 원인도 모르는 채 무조건 뭘 공격한다? 성전 자체를 공격하게 돼 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돼 있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공격은 요한계시록에 한두 번 나온 게 아니잖아요. 구약에 있는 소선지서 보면 전부 다 모든 게 이스라엘 공격하도록 돼 있죠. 실제로 역사책에 보면 이스라엘 공격, 이스라엘 나라가 있는지 없는지 몰라요. 지금 고고학자들은 이스라엘 다윗의 나라, 솔로몬 나라가 실제로 있지 않은 나라라고 주장합니다. 왜 고고학에 흔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고고학에 흔적이 없다는 말은 그만큼 처참하게 망가졌다는, 망가져도 너무너무 망가진 거예요. 고고학적으로 발굴이 안 될 정도로. 하지만 다윗이란 그런 것은 나온 파편 조각이 나온 것에 보면 다윗이란 이름이 다른 나라 고고학 발굴에 보면 이름이 나와 있어요. 이스라엘, 유명한 하비루란 이름도 나와 있고, 있어요. 있지만 성경처럼 이렇게 이스라엘 중심의 역사는 없어요. 왜, 약소국가는 역사도 시답지 않게 생각하기 때문에.

역사라 하는 것은 강자가 쓰는 강자 드라마거든요. 왜 니는 승리할 수밖에 없는 드라마기 때문에 거기에서 약자라 하는 것은 그냥 있으나 마나한 겁니다. 앗수르 그 위에 수메르 왕국 위에 제일 먼저 제국이 수르 제국, 메소포타미아 지금의 바그다드, 이라크 나라가 메소포타미아, 강사이란 뜻이거든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거기 인류 최초의 문명국가입니다. 거기서 수메르 나왔죠. 그 다음에 고 바벨론 나왔죠. 그 다음에 앗수르가 나왔는데 앗수르 제국이 1000년이 넘어요. 그러다가 60년  경에 신 바벨론 나와서 망하잖아요. 그 앗수르 제국 전문에 보면 거기에 북쪽 나라 북 이스라엘 왕이 자기한테 조공 바치고 한 것을 아예 부조 조각으로 새겨놓았어요. 그게 영국 대형 박물관에 있다고 하는 사진을 봤어요. 고고학적으로 보면 이스라엘 나라는 별 볼일 없는 나라에요. 실제로도 이스라엘 나라는 이게 무역 로 가운데 있는 게 아니고 비껴나 있기 때문에 별로 유명하지도 않아요.

그런데 성경만  떠들고 있어요. 성경만 마치 온 세상이 이스라엘 중심인 줄 알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계시라는 것은 숨어있는 거예요. 마치 어른들이 보는 동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토끼 잡으려고 구멍에 빠졌는데 별 희한한 세계가 다 있는 거예요. 거기 가 보니까 고양이는 사라져버렸는데 고양이 웃음은 나오고, 별 희한한 아이디어가 다 나와요.

그처럼 우연히 이렇게 언약이란 구멍에 빠져보니까 언약의 세계가 이 성경 안의 세계라. 그 구멍에 안 빠졌으면 이스라엘은 그냥 별 볼일 없는 나라인데, 역사책에 별로 안 나오는데 언약 속에 들어가니까 그 다음부터 다윗 솔로몬이 그렇게 중요하고 세상 중심은 모든 중심축은 그 안에서 다 이루어지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세상이라 하는 것은 이런 말 하는 게 제가 참 힘들어요. 왜냐 하면 기존에 우리가 배웠던 그 개념과 너무 다르기 때문인데, 듣기만 해보세요. 세상은 본인이 누군지를 몰라요. ‘그들이 성전과, 성전 앞에 설 때 비로소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실제로 살아있는 모세한테 직접 십계명을 넘긴 그 하나님 앞에서 저들은 언약조차 없는 저주받은 족속이었다는 것을 성전 앞에서 그들은 밝혀지고, 그것은 성전만 없애버리면 자기 나라가 진짜 대단한 나라가 되기 때문에 배후 악마에 의해서 어찌 심성이 이스라엘이 자기만 특혜를 받았다는 자기만 잘난 체 하는 그 나라를 이상하게 없애고 싶은 그러한 충동으로 주변의 나라들이 들끓었다,‘ 라는 것이 성경의 이야기에요.

막상 본 자에게 물어보면 이스라엘? ‘뭐 있었나?’ 이렇게 되는데 성경은 그런 식으로 해석하지 않고 너희들이 성전 없애려고 환장을 했어. 환장을 했어.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이방나라는 성전과 맞대봄으로써 이방나라의 악마적 속성을 보여주고, 1이레는 뭐냐, 이 악마의 나라를 처음부터 끝까지 없애는 이 전체가 하나고, 이것도 똑같은 길이(7이레, 62이레)로 1이레가 돼 버리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바로 성전을 미끼로 던져 놓고 성전 쳤다고 그걸 핑계로 해서 온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작살내는 분이 예수님이 예수님 되신 공생애, 그럴 때 묵시의 나라가 묵시답게 드러난다는 겁니다.

이렇게(층으로) 돼 있는 것을 가지고 이렇게 차곡차곡 내려 보면 7+62+1도 되고 이것을 합쳐서 70이레라고 한다는 겁니다. 꼭 장난 같죠? 꼭 꾸며낸 것 같죠? 조작된 것 같고, 이러한 시작은 뭐부터 시작됐죠? 다니엘이 비록 바벨론의 고급 관료지만 결코 하나님께서 그 바벨론 짐승의 나라에 일원이 될 수 없도록 강제로 하나님께서 계시를 줬다는 데서 이미 시발점이 되는 겁니다.

그 계시에 대해서 다니엘 본인이 원했다든지, 요구한 게 아니고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인자’라고 부르면서 다니엘로 하여금 70이레 계시를 줌으로 말미암아 다니엘과 세 친구가 결국 이 세상에 있는 어느 나라에도 소속되지 않는 그러면서도 어떤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는 오지도 않은 나라, 그것은 바로 인자가 구름타고 와서 만든 영원한 제국, 영원히 망하지 않는 이 바벨론 제국을 엎어놓고 돌멩이로 쳐서 태산을 만드는 그 묵시의 세계, 그 묵시의 세계가 다니엘에 담긴 내용이고 그것을 과연 다니엘의 계시가 그렇다는 걸 확정지려 오시는 분이 바로 인자로 오신 예수님이고, 십자가에서 말하기를 ‘다 이루었다.’ 할 때 도대체 그게 다 이루었다는 내용이 뭐냐 말이죠. 그건 두 번째 시간에 해봅시다.

10분 쉽시다.

 

 

가락교회-70이레 논문(공간의 깊이)130704-23강b -이 근호 목사

지금 첫 번째 시간에서 제가 개괄적인 것, 공간의 깊이에 대해서 제목을 걸어놨습니다. 아직 깊이 있게 들어가지는 않았어요. 공간의 깊이라는 것부터 먼저 설명해 드리고 다시 진도 나가봅시다. 공간의 깊이라는 말을 제가 쓴 이유가 그림 상 보면 손으로 만져 보면 평평해요. 그런데 눈으로 보면 입체감이 나오더란 말이죠. 입체감!

성경은 문자로 돼 있어요. 문자로 돼 있으니까 원어 분석해 봐야 맨 평면 이예요. 원어 분석해서 안 나와요. 왜냐 하면 분석하는 내가 너무나 평면적이기 때문에. 분석하는 내가 평면적이기 때문에 입체감이 나오지를 않는 거예요. 입체감이 나오도록 하려면 그 말씀을 입체적으로 이루신 분이 따로 있어요. 이루신 분 따로 있고 이루신 내용이 뭐냐를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분이 따로 있어요.

이루신 분은 예수님이고 알려주는 분은 성령님이고. 그 성령님을 인간에서는 평면적인 언어로서 표현한 사람이 사도 바울, 사도 베드로, 사도 요한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기록한 요한일서, 요한복음을 보면, 이건 말이 무슨 말인지 얼토당토한 말이 나와요. 예를 들면 “빛이 오매 어둠이 깨닫지 못했다.”고 했는데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AD 500년경에 어거스틴이란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의 고민이 뭐냐 하면 왜 하나님이 선하신데 악마가 이 세상에 왜 있느냐? 그것 때문에 고민을 한 거예요. 만약에 악마가 악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아이고, 내가 잘못 만들었다. 나도 오류가 있다.’ 라고 이렇게 자백하든지, 하나님이 온전치 못하면 악마가 생겨야 되고, 하나님이 온전하면 악도 없어야 된다는 것이 우리 인간의 논리인데 이게 앞뒤가 연결이 되고 맞는 논리거든요.

하나님이 선하시다 해놓고 마귀가 생겨버리면 그 악마 누가 만들었는데? 그래서 어거스틴이란 사람은 어떻게 했느냐? 이렇게 했어요. 하나님은 빛이시다. 빛이신데 세상에 살다 보면 빛이 잘 내리쪼이는 데도 있고 빛이 잘 안 드는 음지가 있을 게 아닙니까? 그 음지가 악마라는 거예요. 그걸 빛의 결핍이라. 빛이 좀 덜 드는, 어두운 곳에 이끼 끼고 곰팡이 끼고 그게 악마라는 거예요.

그런데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달라요. 요한복음 1장은 뭡니까? 빛이 오매 어둠이 깨닫지 못했다 했죠? 만약에 어거스틴처럼 해보면 빛을 못 받았는데 어둠이 됐다가 이제는 빛, 다른 말로 칸트 식으로 하면 계몽, 깨우치는 것, 뭔가 어두운 무지한 미개인들을 깨우쳐서 인간이 개화되는 것, 빛을 비춰주게 되면 ‘아! 내가 어두움에서 벗어났구나.’ 이렇게 하게 되니 환하게 된다 말이죠. 어거스틴 주장에 의하면. 그러면 한시적으로 어두움이죠. 악마도 사랑해주면 뭐로 바뀐다? 천사가 된다는 주장이죠.

질문: 결국 어거스틴도 존재론 적 관점에서…
답변: 그렇죠. 언약을 모르고 존재 선 위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니까, 하나님 저기 존재하고 우리는 여기 존재하니까 인간된 목적은 뭐냐 저기 있는 존재를 기쁘게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교리문답 보면 나오죠. 그런 사고방식이 어거스틴 사고방식 이예요. 언약 적으로 다룰 줄 모르고 내가 있는 것처럼 여기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내가 여기 있다. 있음하고 주님이 하늘에 있음하고 있음이 달라요. 언약 적으로 달라요. 하늘에 있다는 것은 언약 적으로 있는 것인데 우리는 언약 밖에 있는 거예요. 다른데 이걸 사람들에게 설득 시켜서 교육으로 억지로 끼워 맞춰 버리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윌리엄 오컴이란 유명한 사람이 있어요. 면도날 이론을 낸 사람인데 항상 전략적인 것이 제일 진리에 가깝다고 주장한 사람인데, 면도날이 매끄럽잖아요. 이것도 아니고 딱 고 선에 서기가 힘들잖아요. 간편한 것이 진리에 가깝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이런 주장 했습니다.

오컴도 그런 이야기 했고 에크하르트란 신비주의자도 이런 이야기 했어요. 선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선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선하다는 것을 하나님이 동조할 하등의 임무가 하나님한테는 없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모든 개념은 어디서 나와야 된다? 하나님에게서 나와야 되지, 우리가 어떤 개념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내용을 비워놓고 하나님한테 우리가 만든 거기를 채워주기를 요구해서는 아니 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대표적인 것이 기도잖아요. ‘하나님 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 기도에 응답하세요.’ 했을 때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느냐? ‘그것도 기도냐? 그게 니 보기에 기도지 내가 니보고 기도하라고 한 적이 있느냐?’

제가 전번 대구 강의 할 때 ‘기도’란 제목으로 강의 했잖아요. 그 강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기도란 부르짖는다고 기도가 아니라 전쟁의 전리품 이예요. 구약에 보면 거룩한 하나님이 전쟁을 하잖아요. 하나님이 나서서 전쟁을 할 때 그 전쟁의 결과물, 전쟁의 전리품이 곧 우리에게 기도로 이어지는 겁니다. ‘주여, 기도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전쟁에 승리했기에 저희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제하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라는 식으로 기도가 진행되는 거예요. 언약 적 기도가.

우리가 하니까 와서 알아서 응답해달라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벌이시는 그 전쟁에 참여를 하게 될 때 비로소 그 사람은 주님의 기도에 휩쓸려 들어간 사람으로서의 비로소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기도라 하는 것은 주께서 시키는 기도가 되겠죠. 주님의 전쟁을 인함으로서 하게 되는 거죠. 그 전쟁의 최종 도달 지점은 뭐냐 하면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게 하는 그 힘이 기도를 통해서 미리 장만해집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하는 기도는 우리 것이 담겨있지만 주님이 하라는 기도는 그 기도대로 우리가 이미 싫다, 좋다, 할 자격도 없이 이미 그쪽으로 지금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겁니다.

이것도 마찬가지에요. 빛이 왔으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게 될 때 이 어두움 자체는 뭐냐 하면 본인이 어두움인지 모르는 거예요. 자기는 그냥 중립적인 인간이거든요. 요번에 천지 일보에서 보낸 16가지 질문에 대한 내 답변이 십자가 마을에 올려 있잖아요. 그거 보시느라 애먹었습니다. 그 질문 가운데 어떤 질문이 있었느냐 하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 사람들은 이단입니까? 이교자입니까? 하는데 제 답변 내용이 뭐로 돼 있어요? 그들은 인간입니다. 이단도 아니고 이교자도 아니고 그냥 인간입니다. 답변할 때 기자가 나한테 요구한 게 있어요. 답변할 때 A4용지 폰트 10으로 잡아서 15자에서 30줄 이내로 해달라고 해서 그 분량대로 한 거예요. 그것도 다 약속해서 된 겁니다. 언약은 아니지만 약속대로.

저 사람은 이단입니까? 물을 때 우리 답변은 뭐냐 ‘저 사람은 그냥 인간입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자기가 어두움인 줄을 모르는 거죠. 자기가 만약에 어두움인 줄 알면 나는 인간이란 소리를 못하죠. 뭐로 바뀝니까? ‘나는 인간이 아니고 죄인입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70이레라는 이 모든 걸 할 때 그 짐승의 나라에 집어넣을 때 그들은 항상 자기 자신이 자기가 만든 이 역사적 시간적 공간에서 자기는 지금 정상적인 일상을 살고 있는 거예요. 정상적인 생활에 대해서 우리가 충분히 동의하고 납득을 합니다. 왜, 우리도 그들과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차라리 사자 굴에 들어간 다니엘이라든지, 불 속에 들어간 그 세 친구가 왠지 낯설어. 왠지 이상해. 뭔가 수상해. 이건 조작한 거 같아. 그래서 실제로 다니엘에 대해서 후대 학자들은 이걸 조작했다 하거든요. 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으니까.

그들은 다니엘 70이레를 보면서 나중에 70년 포로 기간이 지나면 도로 돌아간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이러거든요. 그건 극히 역사 속에 살아가고 있는 매일같이 역사를 다듬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한테는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해석이고 하등 이상할 게 없는 해석 이예요.

그런데 막상 오신 예수님은 인간들의 정상적인 해석에서는 전혀 맞지를 않는 분으로 오셨거든요. 전혀 맞지를 안 해요. 그런데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얼마나 정상적인 사람입니까? 사람이 정상적이란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이 세상을 도덕적으로 생각한다는 뜻 이예요. ‘세상이라 하는 것은 신이 만들었다. 신은 도덕적으로 선하신 분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 신이 가득하다. 따라서 이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산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따라서 우리가 선하게 살게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부합이 되고 만약에 우리가 악하게 살면 선한 자연의 속성과 충돌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다음부터는 사는 것이 힘들어진다.’라는 것을 도덕적 개념을 갖고, 그걸 도덕적 우주관이라 해요.

도덕적인 우주관으로서 중세가 이루어집니다. 중세의 유럽이 이게 국가가 돼요. 중세 유럽이 처음에 할 때는 로마가 시작되잖아요. 로마가 시작되면서 425년에 동로마, 서로마로 나눠지잖아요. 동쪽의 로마를 비잔틴 제국, 비잔틴 로마라 한 겁니다. 비잔틴 로마는 특징이 뭐냐 하면 황제하고 교황하고 동일 인물 이예요. 그런데 이쪽에 있는 서로마의 교황은 조그만 학고 방에 쭈그려 있어서 맥도 못 춰요. 나머지는 게르만족의 황제가 차지하고 있었어요. 거기에 대표적인 것이 프랑크 왕국이거든요. 이 사람들이 통치하는데 옛날 로마에서 통치하니까 이 넓은 데를 통치를 못하니까 조건부로 기독교 사상을 가지고 통치해야만 로마의 통치 성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이 앞쪽의 비잔틴은 아직까지 ‘아이구, 너희들이 미워서 그렇지, 우리같이 믿음이 있어서 황제가 곧 교황이고 교황이 곧 황제니까 꼼짝 못해.’라고 그들을 비웃듯이 이렇게 된 겁니다. 어쨌든 서로가 갈라지고 난 뒤에는 이쪽에서는 기존의 세속적인 황제가 기독교라는 이데올로기 사상만 차지할 뿐이지 사실은 왕이 종교를 쥐고 있었던 거예요. 여기에 많은 예배당이 세워졌는데 그때 세워진 예배당 이걸 순례교회라 하는데 순례교회, 또는 성자 유골 숭배사상.

제가 전에 언젠가 그랬죠. 게스트 하우스, 지금도 그렇지만 유럽의 축성일, 요새 말로 하면 공휴일, 국가 공휴일은 주로 성자께서 돌아가신 날, 그런 날이 많아요. 독일에도 스페인도 마찬가지로 성자 돌아가신 날이 많아요. 골목, 골목 보면 있어요. 그걸 순례, 순례해서 범위를 넓힌 것이 십자가 운동이라니까. 유럽 돌아다니다가 예루살렘까지 가려 하는데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이 방해하니까 쳐부수자. 순례길, 올레 길 이어주려고 한 전쟁이 십자가 전쟁 이예요.

이 사람들이 그렇게 순례함으로서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면 순례하게 되면 일반 사람들이 기독교 사상에 푹 젖어들게 되면 통치하기가 수월해 지는 겁니다. 그럼 여기에서의 신앙이라 하는 것은 교황 위주의 신앙이 아니고 일반 사람들의 신앙을 동조해야 되기 때문에 여기서 나온 사상이 마리아 숭배사상 이예요. 마리아가 뭐냐 하면 보이지 않는 예수님과 보이는 인간 사이에 엄마 같은 도닥거려주고 관용을 베풀고 감싸주는 그것도 여성이잖아요. 약하고 고귀하고 순결한 여성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천국에 한번 연결을 해보자는 그 사상.

그게 제가 이야기한 모든 성경을 해석하는데 무슨 마리아 사상이 왜 있습니까? 그래도 그렇게 전체 나라가 국가 종교로서 달라진 것은 결국 일반 민중들이 갖고 있던 심성을 기독교 용어로 전부 다 바꿔준 덕택 이예요. 복음을 위해서 그런 게 아니고 교우 심성에 ‘신이시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말로만 아니고 구체적으로 마리아를 봐라, 라고 하든지 이렇게 해서 그걸 체계화시켜주면 사람은 거기 빠지게 돼 있어요.

바로 그런 식의 종교가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된 종교거든요. 멸망하면서 바벨론에 흡수됐잖아요. 그럼 바벨론에 이루어지는 모든 사상 같은 것은 방금 이야기한 천주교나 기독교 이런 거하고 똑같다고 보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다니엘이란 사람에게 계시가 왔다. 70이레가 왔다. 이건 뭔 뜻입니까? 충분히 우리가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지만 거기서 너를 빼내겠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들어서. 그런데 빼낼 때 달랑 우리만 빼내면 이건 개인적 구원되잖아요. 지난주일 낮에 그런 설교 했는데 개인 구원은 있다? 없다 했습니까? 개인적 구원이란 게 없어요. 구약도 신약도 개인으로 구원되는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뭔데 우리 보고 구원해요? 말도 안 되죠. 우리를 으깨버려요. 우리를 으깨서 ‘주여’ 하면 ‘에이 씨’ 하고 으깨버리면 우리는 하나의 으깨진 국물이 돼서 어느 댐 속에 같이 한 방울로 뛰어들면 그 댐 속에 있는 바가지에 있는 국물이 구원받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를 으깨버린다고요. 개인적으로 구원되는 법이 없어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는 거니까. 우리가 뭐 잘났다고 우리를 구원해요? 우리가 특별해서 구원하는 법 없어요.

그걸 보편화라 합니다. 개별화를 뭐로 바꾼다? 보편화로 바꾸는 겁니다. 바꿀 때 다니엘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다니엘 같은 사람을 구원하죠. 다니엘 같은 사람은 다니엘 세 친구잖아요. 다니엘 세 친구나 다니엘 같은 사람들, 이런 사람을 할 때 그들에게는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지혜(知慧)가 있고 이 지혜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1이레, 예수님이 공생애로 이 땅에 할 일과 연계돼 있는 거예요. 그래서 지혜라는 것은 낯설고 지혜라는 것은 이상스럽고 지혜라는 것은 용서를 안 해도 알아서 오고, 더 중요한 것은 지혜가 오게 되면 우리가 지혜를 안다고 하는 게 아니고, 지혜에 부합되도록 우리를 뜯어고치는 일을 하는 거예요. 이게 우리는 힘들어 죽을 일 이예요. 내가 원하는 인생을 내가 내 맘대로 살 자격과 모든 자유를 지혜가 와서 박탈해 가버려요.

‘나는 요거, 요거 알고 있어야지.’ 그거 알아서 무슨 소용 있어요? ‘그래, 알기만 하지 말고 행함이 있어야 돼. 나 요거 알고 행해야지.’ 그건 지가 지 스스로를 조작해 내는 것이고요. 그런 식으로 구원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규정해 놓은 게 있어요. 규정해 놓은 것을 부수어 버리는 겁니다. 규정해 놓은 것이 내용이 어디 있느냐, 70이레 안에 들어있다 이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성전 지어라’ 몇 이레입니까? 7이레, 부셔져라, 62이레, 그 다음에 용서 받아라, 다시는 죄가 없다. 1이레.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 이건 ‘아하, 나한테 개인적으로 70이레가 적용되는구나.’ 이 말은 맞기는 맞는데 그게 개인자격으로 주어지는 건 아니고 너, 나 할 것 없이 똑같이 요러한 원칙(7이레, 62이레, 1이레)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국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간 것은 뭐냐 하면 성전이 이미 있었는데 이게 부셔졌죠. 성전 부셔지면서 뭐도 같이 무너졌습니까? 이스라엘 나라 자체가 폭발해 버렸죠. 그러면 이스라엘이 갑입니까? 성전이 갑 이예요? 성전이 갑이고 이스라엘은 을이 되겠죠. 요 관계를 다시 한 번 주지시키는 겁니다. 지혜를 통해서. 성전! 성전! 성전!

왜 성전이 중요하냐 하면 성전은 누가 계십니까? 성전은 주의 이름이 계시는 곳 이예요. 주님이 계신 곳이 아니에요. 주의 이름이 계시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성전은 주님이 계신 게 아니고 주의 이름이 계신 것이라는 이런 말 하나, 하나 다 설명하려면 끝도 없는 이야긴데 설명을 해야 되겠죠. 이건 중요한 거니까.

성전은 주의 이름을 모시는 곳이지 주님을 모시는 곳이 아니에요. 그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주님은 숨어 계시는 분입니다. 만약에 주님이 직접 나타나면 우리는 죽어요. 기드온이 처음에 사명 받을 때 누가 나타났습니까? 천사가 나타나서 제물 바치니까 작대기 가지고 이러니까 제물이 훅 하고 불타 버렸죠. 그러니까 ‘아휴, 난 죽었구나.’ 왜, 하나님의 사자를 뵈었으니까 난 이제 죽었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마노아 부부가 하나님 사자를 만나고 하는 얘기가 뭡니까? ‘우리는 죽었어. 죽었어.’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 사자 만나고 난 뒤에 뭐라 합니까? ‘나는 죽어야 되는데 하나님 축복 덕분에 나는 이렇게 생명을 보존했다.’ 하죠. 그 동네 이름이 브니엘.

하나님께서 그냥 등장하면 이 세상은 불바다 됩니다. 더럽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 살릴 자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기가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을 중간 매개체로 등장시킵니다. 그런데 주의 이름을 등장시키면 주의 이름은 실체가 보이지 않고 그냥 이름만 있을 뿐이죠. 이 말은 이름이 없는 실체는 인간의 언어에서는 없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분이고. 보이지 않는 분인데 이름을 불러라, 이렇게 되니까 인간으로 봐서는 뭐가 됩니까? 믿음이라는 것을 요구하게 마련인데 인간에게는 원래 믿음이란 게 없어요. 오직 지식 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지식을 번역해서 뭐라 하느냐? ‘믿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믿을 만해서 믿었습니다. 판단해 보니까 믿어지네요. 이것, 저것 따져보니까 확률 상 높아지네요. 라는 이걸 믿음이라 하거든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믿음이라 할 때는 도무지 믿기지 못하는 일을 벌여놓고 결과적으로 믿어지게 만드는 일을 해야 돼요. 이게 뭐냐 골리앗 등장시켜 놓고, 골리앗이 키가 3미터 30이니까 믿음이 아닌 방법은 뭡니까? 이쪽은 3미터 40은 돼야 돼요. 그럴 때는 믿음이 아니죠. 뭡니까? 이건 따지고 판단해 보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 3미터 30센티가 등장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뭐냐 하면 소년 다윗이잖아요. 이게 게임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죠. 안 된다는 말은 못 믿겠죠. 못 믿는다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게 믿음적인 상황 이예요.

갈렙과 여호수아하고 그 다음에 10의 정탐꾼이 가나안 땅을 정탐했잖아요. 정탐 코스를 보게 되면 앞에만 정탐한 게 아니고 저 끝까지 함경북도 백두산 끝까지 다 둘러보고 온 거예요. 오면서 선물로 낑낑거리면서 포도송이 메고 왔고 그럴 때 10명이 뭐라 합니까? 우리는 해봐야 게임 된다? 안 된다? 이건 게임이 안 되죠. 이미 믿음이 없잖아요. 믿음이 없음을 유발시키는 자체가 믿음을 만들어 내는 그게 공간의 깊이예요. 이제 공간의 깊이를 알겠죠?

공간의 깊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뭐냐 묵시적 차원에서, 언약 적 차원에서만 밝혀지고 그렇지 않은 우리는 2차원 평면밖에 안 보이는 곳에 3차원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그런데 10명이 안 된다 했어요. 안 되는 정도가 아니고 너무 슬퍼, 너무 억울하고 우리가 살아온 것이 그걸 생각하면 너무 인생이 청춘이 아까워서 억울해서 울었습니다. 우는 게 문제라.

그런데 갈렙과 여호수아는 뭐라 합니까? 안 됩니다. 분명히 키가 컸습니다. 그들은 장대 같고 우리는 메뚜기 같아요. 자기가 일을 다 해요.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들어가게 됩니다. 논리가 성립 안 되죠? 이게 크고 장대 같아도 그래도 들어갑니다. 왜, 주의 이름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갈렙과 여호수아는 자기 자신의 할 수 있는 능력을 믿습니까? 안 믿습니까? 결국 믿음이란 자기를 안 믿는다는 뜻 이예요. 자기 판단 능력을 일체 믿지 않는 겁니다. 뭐만 믿는다? 주님의 약속은 우리의 협조 없이 주의 이름이 알아서 해준다는 것을 믿을 때 그게 바로 구원입니다. 영생입니다. 주의 피가 피를 흘릴 때 알아서 다 기다리고 알아서 흘린 피니까 우리는 피만 믿으면 되지, 피 좀 협조한다고 착한 일 보태고 그러지 마세요. 제발 착한 여러분들 그러지 마세요. 믿음 없다는 티밖에 안 돼요.

주의 이름이 임할 때는 그 성전을 중심해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 성전 개념이 아니고 날마다 이게 변신이 됩니다. 어떤 변신이 되느냐 하면 일부러 강대국을 주변에 깔아요. 아주 힘센 나라를 깔아놓고 성전이 어떤 솜씨가 있는가를 보라는 겁니다. 강대국이라서 이 사람들이 처음에는 성전이나 언약의 위력을 안 믿고 갖다 바치는 짓만 해요.

이거면 되겠습니까? 아이고, 깡패도 이런 깡패가 없다. 이거면 되겠습니까? 더러워라, 자 이거 받으시고, 원나라한테 고려말기에 돈 바치고 군대 바치고 처녀 바치고 다 바치는 것처럼, 그러니까 원나라 물러갔습니까? 원나라는 그 다음 나라한테 망했죠. 저들이 알아서 처리했는데 강대국을 만들어 놓고 거기서 사람들은 조공을 바치므로 해결하려 하다가 그것도 안 되면 결혼을 정략으로 해서 더 강대국과 연합군 만들어서 하려다가 계속 ‘그게 아닙니다.‘ 라고 한 사람들이 누구들이냐 하면 바로 선지자들을 하나님께서 등장시키죠.

선지자는 힘이 세지도 않아요. 그리고 말솜씨도 좋지도 않습니다. 그냥 선지자 본인도 골치 아파요. 지도 안 하고 싶어요. 그냥 떠밀려서 등장한 것이 코앞에 등장한 거예요. 그래서 하는 말이 ’임금이여,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랬습니다. 이번 전쟁은 사람에 속한 전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찬양하니까 아사 왕 때 찬양하니까 하나님께서 알아서 번개와 기적을 베풀어서 다 죽었어요. 아! 진작 주시지, 꼭 우리로 하여금 절망케 해놓고 수습은 우리가 예상 못한 다른 것으로 수습하는 이유가 주의 이름이 니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중요해서 내가 있는 게 아니고, 너희들과 함께 있는 주의 이름!

주의 이름이라 하는 것은 뭐냐 약속,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계신 분이거든요. 언약을 이루는 분이 너와 함께 있음을 너희들이 주목하고 다시 관심을 가지라고 일부러 관심을 이쪽으로 돌리기 위해서 너희들을 절망케 하신 거예요. 오늘 우리 인생도 똑같은 겁니다. 뭐 일 좀 안 된다고 좌절하고 울고불고 하지만 십자가 생각하게 되면 마치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가 왜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아가느냐고 꾸짖게 되는 근거가 바로 십자가에 있지 않습니까? 십자가에!

그래서 성전에 있는 언약궤를 메고 나갔더니만 적들이 대패를 했죠. 그리고 엘리사 같은 경우에는 성전에서 엘리사가 기도하니까 아람군대가 갑자기 다들 소경이 돼서 눈이 깜깜해지니까 알아서 기어들어갔던 거예요. 그런 거 나오잖아요. 화살 3번 쏘고 마니까 왜 3번 쏩니까? 더 쏘아야지, 땅을 세 번 치고 하는 거 있죠? 5번 쏘면 될 텐데, 그 사람 5번 할 사람 아닙니다. 5번 하면 7번 안 했느냐고 나올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하는 이런 모든 배치들이 성전에서 이미 나와 있는 거예요. 여기서 그림을 그리면 성전과 이 하나님 사이에 보이지 않는 구름다리가 있는데 인간들은 이 구름다리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니까 지는 지가 알아서 어떻게 해볼까 하는 거예요.

나아만 장군이 어느 나라입니까? 아람나라 장군이죠.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 걸렸잖아요. 문둥병 걸려서 이스라엘 나라 내에 용한 의사 있다 해서 찾아오니까 놀라기는 누가 놀랐습니까? 이스라엘 왕이 놀랐어요. 그 사람들이 우리가 못 고치는 것을 뻔히 알고 고쳐 달라 하는 걸 보니까 못 고치는 걸 핑계로 우리를 작살내러 왔구나. 해서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이게 무슨 의미에요? 결국 이스라엘 나라 자체가 이 구름다리를 못 본다 이 말이죠. 그래서 엘리사한테 와서 어떻게 했습니까? 만나줬습니까? 안 만나줬습니까? 만나주지도 않았어요. ‘에이, 씨, 가’ 이런 식이다 말이죠. 그러니까 안 만나준다고 삐져서 나아만 장군이 그냥 돌아가려고 했잖아요. 만나주지도 않고 기껏 해준 처방이 뭐냐 하면 식후 30분 후에 약 먹어라, 도 아니에요. 뭐냐 하면 흙탕물, 물도 좋지도 않아요. 흙탕물에 7번 들어가라. ‘에이, 괜히 왔어. 그냥 돌아갈 때 신하가 말려서 들어갔는데 깨끗해졌습니다. 그 사이에 뭐가 빠졌습니까? 하나님 믿는다는 이스라엘은 완전히 배제됐죠.

그럼 이스라엘을 누가 지키는 거예요? 주의 이름이 지키죠. 인간들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을 지키는 게 아니죠. 내 인생이라는 게 없어요. 없는데 마치 내 인생 내가 지키고 관리하는 것처럼 생각할 때 이러한 우리 믿음을 돌리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내 힘으로 안 되는 난처한 일을 발생시키므로 말미암아 예를 들면 지갑을 잃어버렸다든지 우산을 어디다 놔두고 왔다든지, 매일같이 도저히 안 되는 일을 이거 터지면 이게 안 되는 일로 말미암아 내 인생 내 역사라 하는 것은 내가 새끼줄 꼬여서 이룬 역사가 아니고 주님의 역사 속에 내가 말려든 거예요. 그걸 진작 알려주지? 알려주잖아요.ㅎ 주님이 새끼 꼬는데 우리는 안에 새끼줄로 거기 목 비틀어서 거기 낀 거예요. 저와 여러분이 같이 낀 거예요.

전부 다 주님의 역사, 주님 안에서 일어나는 역사라 말이죠. 그게 뭐냐, 우리를 죽여야 되는데 살리기 위해서 주신 주의 이름 이예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뭐를 얻는다? 구원을 얻는다. 하나님은 숨어계셔요. 숨어계신 분이 주의 이름을 앞장세워서 구원하는데 주의 이름은 뭐냐 하면 바로 언약이란 말이죠.

언약의 증거가 뭐냐, 성전 이예요. 성전! 성전을 너희들이 7이레 동안에 성전을 세워라, 이 말은 너희들 역사는 너희들을 위한 역사가 아니고 1이레 오실 메시아 1이레를 보여주기 위해서 성전이란 구체적인 증거물을 지상에 남길 특수한 사명, 특공대 입장에서 너희 이스라엘은 있었더랬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그걸 지어야 되는 거예요.

지을 때 이방나라의 고레스 왕이 70년 만에 도와줘서 모든 자재와 일꾼과 기회와 그리고 거기에 대한 행정적인 어떤 것도 방해 받지 말라고 행정적인 절차, 규칙까지 전부 다 고레스 왕이 후원해 줘서 성전을 짓습니다. 그리고 그 후원자 되는 바사나라, 헬라한테 망할 때 뭐도 같이 망했어요? 후원해서 받은 성전도 헬라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후닥닥 다 깨져 버려요. 그러면 아까 바벨론 나라처럼 주변 나라는 결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호해 주는데 전체 이스라엘 보호에서 뭐로 바뀝니까? 전체 이스라엘 보호에서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의 지혜 받은 자를 보호하는 식으로, 또 다른 말로 하면 지혜 받은 자가 받은 지혜, 70이레를 이루기 위해서 주변나라들이 알아서 공구들로, 또는 재료들로, 주께서 알아서 적재적소에  거기다 이미 준비물로 한 거예요. 건물 짓기 위해서 시멘트 준비하죠. 모래, 자갈 준비해 놓죠. 다 준비된 거예요. 준비해 놓고 그 하나님의 언약은 바로 하나님의 특수 임무를 맡은 그 이스라엘, 성도죠. 지혜 자를 통해서 그 일을 해나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소리를 백날 해봐야 누가 먹어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왜? 그거는 니가 주관적인 관점이고, 이거 한마디로 끝나버리죠. 그건 니가 구원받는 입장에서 주관적 입장으로 보니까 그렇지, 세상은 이스라엘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필리핀 역사도 있고 벨기에도 있고 아프리카, 우간다도 있고 있는데 왜 이스라엘 역사만 그렇게 마치 세상의 중심인 것처럼 그렇게 하느냐, 라고 여러분이 공격 받을 때 여러분 어떻게 해요? 그게 바로 그 전체를 통합해서 무슨 나라? 바 벨 론. 그게 바로 바벨론입니다.

그리고 너희들이 그런 소리 하는 것은 너희들도 미처 모르지만 하나님의 주의 말씀 70이레, 십자가 복음을 가리기 위한 배후에 숨어있는 악마가 그렇게 일을 저지르는 거예요.

여러분, 피곤하시죠?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주의 이름 하면 어려우니까 주의 이름 해봅시다. 주의 이름이라 하는 것은, 이름이 주의 이름으로 왔다는 것은 주의 이름이 누구냐 하는 것은 밝히지 않아요. 그냥 주의 이름 이예요. 여호와라고 부르든, 야훼라고 부르든 이 부름에 대해서는 의미 없습니다. 왜냐 하면 주의 이름은 우리가 부를 때만 이름이 아니고 스스로 기능으로 유발시키는 이름이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만약에 이름이 김 두석이란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이름을 친구들이 ‘어이, 두석아’ 하고 이름을 부르잖아요. 우리는 이름을 불렀다고 생각하잖아요. 이건 이름을 부른 게 아니에요.

진짜 김 두석을 부르려면 머리가 돌이 되도록 빌어야 돼요. ‘주여, 머리가 돌 되게 하옵소서.’ 그럴 때면 점점 더 머리가 돌이 돼서, 그럴 때 그 이름에 합당한 기능이 되는 겁니다. 예수! 예수 부르면 구원받습니까? 지저스 불러야 구원받습니까? 예수, 지저스, 이런 건 전부 다 인간이 부르는 호칭에 불과하니까 의미 없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의 기능을 하는 것을 믿어야 그것이 예수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이름이라 하는 것은 그 기능과 관련된 이유가 실제 기능과 관련된 이유가 뭐냐 하면 악마라는 것은 이름이 없습니다. 루시퍼가 악마가 아니라 했죠. 악마는 이름이 없지만 악마는 뭐를 가지고 이름을 드러냅니까? 자신의 기능인데 이 기능은 사람을 괴롭히는 게 아니고 이 기능은 주의 이름과 맞서 싸워서 그걸 삭제시키는 기능으로만 나타나거든요.

그 증거가 시편 110편에 나옵니다. “주께서 내 주에게 주의 원수를 밟을 때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주의 이름이 하는 기능은 인간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인간을 현재 실제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주님의 원수가 있어요. 주님의 원수지, 나의 원수가 아니에요. 우리는 친구에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 나올 때 애굽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아요? 애굽에 못 들어가서 아예 한이 맺혔어요. 민수기 11장 5절에 보면 애굽에 있을 때 훨씬 즐거운 거예요. 애굽에 있을 때가 즐거우면 그 사람들을 교회가 천국 보내려고 하면 교회가 애굽의 즐거움보다 더 즐거움을 더 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교회가 어떤 즐거움을 줘야 되죠? ‘아이 씨, 교회보다 노래방이 더 재밌다.’ 라면 예배당에다 뭘 설치해야 됩니까? 노래방 설치해야 되죠. 더 재밌으려면? 하나님 방법이 그 방법입니까? 원래 재미없게 돼 있어. 이런 방법 이예요. 원래 재미없어요. 재미있다는 것을 삭제시키는 그것이 주의 능력입니다. ‘재밌어?’ ‘가, 가, 가’ 이게 주의 능력이라니까요.

예수 믿는 거 재미 하나도 없어요. 우리가 재미로 예수 믿는 거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게 재미있는 분은 한분 밖에 없습니다. 누굽니까? 예수님 밖에 없어요. 우리는 재미 하나도 없어요. “나의 기쁨에 좀 참여하라” 하는데 그 기쁨에 참여하려면 우리의 세상 기쁨이 깨질 때 그때나 끼지 세상 기쁨이 있는데 더 들어가기 위해서 이런 거 없어요. 세상에서 실망할 때 주의 일이 잠시나마 주님이 좋을 때가 있어요.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이 있어요. 그게 뭐냐 성전이다. 그러면 성전 주변은 뭐가 배치돼 있습니까? 주의 이름이 성전에 임할 때 성전 바깥에는 뭐가 있습니까? 누가 포진돼 있다? 악마! 이걸 다니엘에서는 짐승이 포진돼 있는 거예요. 짐승이 포진돼 있고 이쪽은 주의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지혜 받은 사람만 알고 다른 사람들은 무슨 그런 희한한 소리가 다 있느냐, 이렇게 비난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다니엘 입장을 보게 되면서 오늘날 우리가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다. 무슨 이런 희한한 짓을 다 하느냐, 팔자가 무슨 이런 팔자가 다 있나? 왜 정상적으로 살지 못하고 왜 남들이 미쳤다고 하는 소리를 하는 그길로 가야 되느냐, 그걸 느껴야 돼요.

정상적으로 한 게 있어요. 기독교 예수 믿는 것을 정상적으로 생활화 시킨 것이 뭐냐 하면 신학이라 해요. 신학은 교인들로 하여금 극히 정상적이라는 것을 티 나게 만드는 방법들을 가르쳐 주는 것이 신학 이예요. 신학은 종류가 목회신학이 있고 조직신학이 있고 성경 신학이 있고 그리고 교회사가 있어요. 보통 신학에서 4가지를 다 알려주거든요. 거기다가 세분화 되어서 목회신학에는 찬양 학, 전도 학, 교회 행정학 이런 게 있어요. 재직할 때 몇 분의 몇이 한다든지, 투표할 때 몇 %. 장로는 몇 살 이상 돼야 된다든지, 민주화 제도는 어떻게 등 이런 것이 목회할 때 있어요.

조직신학이란 것은 뭐냐, 기독론, 창조론, 종말론, 그런 걸 이야기하고 성경 신학은 뭐냐 하면 창세기의 서론, 전도서는 저자가 누구이며 에스라 느헤미야의 저자의 연도는 언제냐, 이런 거, 이런 것을 알게 되면 우리 생활에는 굉장히 뭘 아니까 교양인 되죠. 정상적인 사람처럼 되죠. 뭔가 품위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똑똑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강도가 그거 배웠습니까? 십자가 강도가 오늘밤에 구원받아야 되니까 오늘 밤 같으면 벌써 해질 시간이 3시간 남았는데 3시간 동안 이거 다 가르쳐야 돼요? 주님께서 삼위일체,…등 ‘가만히 있어, 가르치고 가야지.’ 속성으로 다 합니까? 해질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해지면 밤이잖아요. 강도한테 그걸 가르쳐서 오늘밤에 낙원에 갔습니까? 강도가 도대체 안 게 뭐예요? 한번 물어봅시다. 강도가 안 게 뭡니까? 강도가 주님에 대해서 뭘 어떻게 알았죠? ‘저 분은 나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거예요.

이게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보면 십자가는, 강도가 지금 십자가에 있잖아요. 십자가는 뭐라고요? 구원받는 자에게는 구원의 능력! 안 믿는 사람한테는 어리석은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자가 우리에요. 모든 세상 사람들이 ‘아이고, 저거 바보도 아니고 배웠다는 사람이 저걸 믿지?’ 이런 어리석은 것을 우리는 쥐고 있어야 돼요. 신학박사가 박사학위 쥐면 안 됩니다. 신학박사가 박사학위를 찢을 수 있어야 돼요. 목사가 목사 자격증을 찢을 수 있어야 돼요. ‘난 강도야’ 하고 찢을 수 있어야 돼요. 그래야 우리는 ‘그걸 왜 찢어?’ 하면 ‘나 어리석거든.’ 십자가 피가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바로 다니엘이 70이레 계시 받을 때 바로 그 심정이었어요. ‘그래, 70년만 지나면 온다. 490년만 기다리면 돼.’ 이게 아니었습니다. 그건 똑똑한 사람 되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아! 이것은 구원은 내가 알아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제국은 70이레 스케줄 맞춰서 오는데 그 스케줄에 보면 첫 번째 성전 짓고, 성전에는 뭐가 있다? 주의 이름이죠. 두 번째 62이레 동안 성전 졌다가 부셔지죠. 주의 자리가 지상에서 부셔져서 주의 자리가 사라지죠. 인간이 누굴 죽여 버린다? 주의 이름을 이 땅에 흔적도 없이 죽여 버리니까 그렇게 하는 것은 오직 뒤에 숨어있는 짐승, 악마만 그 짓을 할 수 있죠.

앞에 있는 행정관들, 이방인들은 그냥 들러리에 불과한 거예요. 시키는 대로 할 뿐이고 배후의 악마는 어쨌든 간에 이 어리석은 십자가, 십자가 어리석음, 이것만 제거하면 그들은 만세를 부를 참 이예요. 죽고 난 뒤에 1이레 동안은 완전히 없어졌죠. 없어졌는데 거기 어떤 인물이 등장해서 죄 사해주는 제사를, 궁극적인 제사, 더 이상 죄 씻는 제사가 일체 없는 것, 뭔 뜻인지 알아요? 십일조 한다고 용서받는다는 것도 아니고 전도 한다고 용서받는 것도 아니고 목사 말 듣고 교회 봉사한다고 용서받지 않고 오직 구원받고 천당 갈 수 있는 용서는 오직 인간이 어떻게 하고 안 하고가 아니라 십자가밖에 없다는 걸 보여주고 일을 하도록 그게 1이레의 사람입니다. 1이레의 반은 고난 받고 반은 고난에서 벗어나서 승리하는 걸 하거든요. 결국 1이레를 보여주기 위해서 앞에 있는 70이레가 계속해서 되풀이 된 겁니다.

이제 다음에 또 해야 될 일이 있어요. 뭐냐 어떤 일을 해야 되느냐 하면 그러면 62는 뭔 뜻이냐 하는 것이고, 7은 뭔 뜻이냐 하는 것이고, 1은 또 뭔 뜻이냐, 고게 또 지금 남아 있습니다. 지금 진도를 어디까지 했느냐 하면 232페이지 주의 이름까지 한 것으로 하고요. 그 뒤에 70이레 의미 나오는데 오늘은 232페이지까지 한 걸로 합시다. 이게 많이 어렵기 때문에 제가 하나, 하나 다 자르고 싶다가도 여러분들 피곤하시고 표정 보게 되면 이건 전체적으로 묶어서 이야기될 문제가 아니고 이걸 하나, 하나 해버리면 진짜 어려워도 너무 어려워지니까 논리적으로 정리가 안 될 수가 있다 싶어서 제가 중요한 포인트만 잡아서 이렇게 대충 긁어놓았습니다. 앞으로 계속 하면서 긁어놓은 것이 어떻게 세분화 되는지는 계속 해나갈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다니엘이 살았던 그 심정, 그야말로 진짜 허공을 잡는 것 같고 꿈을 잡는 것 같은 허황된 것처럼 보이는 그런 삶이었지만 실제로는 사자 굴에서 벗어났고 불속에서 튀어나왔습니다. 강도가 주님 믿을 때 남들 보기는 헛소리 한 것 같지만 실제로 그날 밤에 주님과 함께 영원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것이 얼마나 놀라운 위력인지 그 사랑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우리 인생에 불편하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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