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사항

70이레논문9-선지자 신체

아빠와 함께 2023. 7. 7. 16:26

가락교회-70이레 논문(선지자 신체)130613-21강a -이 근호 목사

제 21강a

226 페이지, 『선지자의 속성과 다니엘의 위치』70이레 계시를 다니엘이 받았습니다. 다니엘이 받았기 때문에 다니엘은 70이레 계시를 이해했는가? 왜 하필이면 다니엘에게 주었는가, 그런 것을 해야 되겠죠. 『선지자의 속성과 다니엘의 위치』인데 다니엘이 그냥 다니엘이 아니고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이름이 하나님께서 호칭하기를 “다니엘아” 하지 않고 뭐라 하느냐 하면 “인자야”

인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부를 때 호칭입니다. 에스겔도 인자라 했거든요. 그런데 앞에 있던 엘리야는 엘리야라 해놓고 이쪽에서는 왜 인자야, 부르느냐? 이스라엘이 망했기 때문에 그래요. 이스라엘이 망한 특징이 있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 인자라고 부르는 겁니다.

자, 그런데 여기 『선지자의 속성과 다니엘의 위치』요 이야기할 때 먼저 우리가 염두해 둘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선지자라 하는 이것이 본인이 다니엘이 선지자가 되고 싶다고 ‘저 할게요.’ 손들고 나오지는 안했잖아요. 요점이 굉장히 중요한데요. 다니엘이 선지자 하고 싶어서 선지자 했습니까? 그렇지 않죠.

그렇다면 우리가 신자 돼야 될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신자가 되겠다는 자체가 수상하기 짝이 없어요. 이건 뭔가 믿음이 아니에요. 우리 생각에 ‘신자 되면 천국 가니까 아! 신자부터 먼저 되면 되겠다.’ 이건 우리 욕심이고 우리 개념이고 우리 기대고. 다니엘이 ‘나는 선지자 되면 나중에 메시아를 만나니까 선지자 돼야 되겠다.’ 이렇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니엘 선지자를 선지자 되게 하는 그 위치가 왜 중요하느냐 하면, 오늘날 너도 나도 다 천국 가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교회도 안 나와도 천국은 가고 싶어 해요. 지옥은 안 가고 싶어 하고. 그런 사람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의 본성을 그냥 긍정을 하면 안 돼요. 긍정을 하게 되면 성경 해석이 벌써 처음부터 실패하는 겁니다. 이렇게 봐야 돼요. 우리가 신자 되게 하는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귀담아 두지 않는다는 사실, 아예 그걸 못 들은 걸로 한다는 겁니다. ‘나 이렇게 구원받아서 천국 가겠습니다. 하나님.‘ ’나 안 들을 걸로 할게. 그건 어디까지나 너 생각이야.‘

그런데 이게 다니엘에 보면 우리 생각이 아니고 우리 생각이 마귀생각 이예요. 짐승 생각 이예요. 구원받아야 되겠다는 것, 몇 시간을 믿어서 구원받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마귀생각인데 그게 구체화 된 것이 뭐냐, 예수님을 살해했던 유대인들의 분위기가 구원받아야 되겠다는 겁니다. 이거는 어떤 수단을 해도 반드시 구원받아야 되겠다. 그러한 분위기가 돼 있습니다.

제가 수요일 날 설교할 때 한 예를 들었죠. 어떤 예를 들었느냐 하면 현금인출기 예를 들었잖아요. 현금인출기 예가 뭐냐 하면 현금인출기는 이게 누구 앞에서도 강도가 되던, 도둑이 되던 어린애가 되던, 누구 앞에서도 사용법대로 하게 되면 돈은 나오게 돼 있다는 겁니다. 제가 왜 현금인출기를 거론했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대할 때 현금인출기처럼 대하고 싶어 해요. 하나님이 사용법만 주기만 하면 그대로 할 테니까 그저 영생만 툭! 튀어나오게만, 영생만 제공하시면 고맙겠습니다. 하는 그런 생각으로 우리가 신에게도 그런 마음으로 다가섭니다. 사용법을, 어떻게 사용합니까? 규칙이 뭡니까? 원칙이 뭡니까? 고거 습득하면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거 맞죠? 요걸 원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아까 강의한 것처럼 그것이 바로 고 방법까지라도 마귀가 그런 식으로 이미 간추려놓은 거예요. 이렇습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그럼 우리 생각은 뭐냐, 선악과를 따먹었으면 나무를 새로 심던지, 아니면 따먹은 것을 토하든지 해서 갖다 붙여놓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가 그걸 따먹었으니까 따먹은 만큼 그걸 순서를 역으로 바꾸어서 갖다 원상복귀 시키면 안 따먹은 것으로 돼서 저주가 안 올 수가 있고 축복이 될 수가 있다는 아이디어를 우리가 갖게 돼요. 우리가 따먹었으니까 어떻게 우리 쪽에서 따먹기 전의 상태로 회복시켜 놓으면 그러면 ‘아무 일 없는 거죠?’라고 우리가 하고 싶어요.

그런데 이게 비가역적 현상이라, 물리학에서 한번 이렇게 된 것은 그걸로 없는 겁니다. 계란이 깨진 걸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계란을 안 깨진 상태로 만들 수 없고 유리컵도 마찬가지고, 한번 이렇게 지나간 것에 대해서는 원상회복이 되지 않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이미 우리 쪽에서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예요. 엎질러진 물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제가 천국 갑니까?’라는 말은 하면 안 돼요.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그 다음에 처분은 누구한테 맡겨야 돼요. 엎질러진 물을 가지고 어떻게 영생을 만들어 내느냐 솜씨는 우리 하나님께 달린 문제지, 우리가 스스로 자기가 저지른 일을 자기가 조치할 수 있는 그런 입장이 못 됩니다. 그게 뭔데요? 방금 이야기한 것을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알려줍니다. 이제 다니엘의 위치를 알겠죠?

한번 정리해 봅시다. 우리는 누구를 믿든지 괜찮은 것을 믿어서 영생 얻고자 합니다. 그런데 다니엘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인간으로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리나 어떤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해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다니엘에게 주어진 모든 계시는 이쪽에서 이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너를 데리고 너를 재료로 삼아서 인간이 못하는 영생을 내가 만들어 낼게.‘ 하는데 동원된 사람이 다니엘 이예요.

내가 교회 간다? 교회 간 게 아니에요. 교회 가게 하시는 거예요. 내가 오늘 아침에 밥을 먹었다. 내가 밥을 먹은 게 아니고 오늘 아침에 밥을 먹이신 거예요. 오늘 이렇게 옷을 얇게 입었다? 주께서 옷을 얇게 입게 하신 거예요. 전부 다 날씨를 덥게 만들어서. 주께서 하신 거예요.

주님이 하시는 영생에 우리를 참여시키는 겁니다. 참여시킴으로 말미암아 뭐를 뜯어내야 되느냐 하면 ‘나는 요런 식으로 현금인출기 앞에서 카드 넣고 비밀번호 누르고 금액  30만 누르면 30만 원 나오고.’ 하는 이런 인간적인 방식들이 영생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마귀 짓인 것을 폭로시키면서, 그걸 떨쳐내면서 주께서는 우리를 영생을 바꿔치기 하듯이 주시는 겁니다.

제가 부산강의 하면서 언급했던 용어가 평균 人生, 평균 인생이란 말은 니체가 했거든요. 평균 人生이란 말은 오늘날 현대인들이 전부 다 자연스럽게 똑같은 인생이 됐어요. 인간이 얼굴은 달라도 어릴 때부터 천재, 천재하잖아요. 하다가도 나중이 되면 고만고만한 인간들이예요. 전부 다. 사랑하는 사고방식이나 생각들이나 방식이나 전부 다 일률적으로 전부 다 평균화 되고 말았어요. 이 평균 시킬 때 원칙이 뭐냐 하면 바로 힘의 소유에요. 힘을 얼마나 가졌느냐에 따라서 점수가 매겨지고 등수가 매겨져요. 그 사회에서. 이런 현상이 뭐냐, 모든 것이 수학적 이예요.

제가 대전 강의할 때 느헤미야, 에스라 할 때 했거든요. 귤이 3개, 하나, 두 개, 세 개가 있다 하면 원래는 귤이 세 개 있어야 되는데 3이라는 숫자가 튀어나오죠. 할 때 귤 3개를 놓고 O, O, O =3 어린 에디슨이 이걸 시비 걸었죠. ‘선생님, 요 3과 귤 3개가 어떻게 일치되는지 한번 정리해 보세요.’ 아마 에디슨이 많이 맞았을 거예요. 3이라는 숫자가 어떻게 귤 3개라는 숫자와 어떻게 일치되는지, 선생님 정리해 보세요. 선생님이 할 말이 없어요. 귤 3개가 돼 버리면 이건 평균화 돼 버려요. 평균화 되면 하나, 하나의 개성이 사라져 버립니다. 이건 동일한 귤의 곱하기 3에 불과한 거예요. 동일한 것의 곱하기 3이죠. 3이 오기 전까지는 각자 개성이 있는데 귤 3개가 돼 버리니까 듣는 사람은 똑같은 귤 3개가 돼 버린 거예요.

저기 네 사람 간다 하잖아요. 네 사람 가니까 저기 어떤 사람이 가는지 모르고 그냥 네 사람 가버리면 듣는 사람은 네 사람을 상상해요. 실제로 네 사람은 가는데, 네 사람 가는 걸 보고 다른 사람들은 ‘당신은 네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까?’ 라고 물으면 네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아니고 나는 나예요. 내가 가는데 세 사람이 따라 왔지, 나는 나라니까요. 다른 사람 다 물어봐도 나는 나지. ‘나는 네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이런 이야기 안 해요. ‘니 세 사람이 죽든 말든 나는 몰라. 난 나만 있으면 남이야 죽든 말든 상관없어.’ 그런 나예요. 그런 나밖에 모르는 1이 4에 묶여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선악과나무는 나무가 하나의 나무가 될 수 없고 아담은 한 명이 아니에요. 아담은 모든 인류의 숫자를 총괄하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에서 한 아담 안에서, 하나라 하는 것은 총괄 개념인데 왜 총괄개념이냐 하면 아담 한 사람으로 범죄 하여 모든 사람이 죄진 것처럼 예수님의 하나의 의로 말미암아 예수 안에서는 모두가 의인 되는 거예요. 이게 총괄개념이라는 거예요. 이 총괄개념은 요한계시록에서 144.000으로 표현한 겁니다. 숫자가 아니에요. 143999 +1이 아니라니까요. 사람을 숫자로 번역하지 마세요. 그러면 전혀 성경적 해석이 거기서 담기지 않습니다. 144.000은 결국은 하나에요. 하나! 같이 움직인다니까요. 143999명인데 한 명 더 들어왔다. 이런 거 없어요. 이게 한 명 있어도 144.000이고 두 명 있어도 144.000 이예요.

요한계시록 11장에 두 증인이 있죠. 두 증인이 총괄개념이라니까요. 이 두 증인이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스가랴에 나오는 총괄개념이거든요. 그래서 두 증인이라 하면 모든 성도를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1000년 왕국 할 때 1000도 마찬가지 개념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인간의 숫자 때문에 하나님의 질이 죽어버려요. 그러면 인간은 자꾸 숫자로 노는 이유가 인간 자체가 평균화 되었고 평균화 된 것을 숫자로 표현했다 이 말이죠.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면 ‘어릴 때부터 귀염 받고’ 하면 듣기 싫어합니다. ‘월급 얼마 받느냐 이 말이야 내 말은.’ 자기 딸보고 ‘남자 친구 사귄다면서?’ ‘네’ ‘어떤 남자인데?’ ‘내 남자 친구는 어릴 때부터 귀염 받고.’ 그거 말고 한 달 수입이 얼마나 돼?‘ 그걸 묻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몸은 튼튼해?‘ 이렇게 말고 ’키가 몇 센티인데?‘ 키 몇 센티로 모두 서로서로를 측정하는 평균화 된 세상에서 인간의 질은 숫자로 모든 걸 표시를 하는 시대 속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그럴 때 그 가운데서 그들은 규칙만 어기니까 이 세상을 비트겐슈타인도 그런 이야기 했지만 아주 토속적인 용어를 쓴다면 이 세상은 무슨 판이냐, 노름판입니다. 왜 노름판이냐 하면 노름판에서의 정의로움이라는 건 규칙과 방법만 절차만 옳으면 결과가 어쨌든 그 노름판은 정의가 넘치는, 공평이 넘치는 노름판이 되는 겁니다.  패 내고 화투칠 때 화투 하나 하고 맞춰서 한 장 내고 똑같은 절차와 방법을 같이 했기 때문에 장땡이 나오든 광 땡이 나오든 그건 몽땅 가져가도 누가 입 떼면 안 돼요. 그게 천국입니까? 그런데 그게 정의로운 사회거든요. 가장 정의로운 사회가 노름판이 최고로 정의로운 사회에요. 물론 뒤에 비추고 그러면 안 되고, 그야말로 그 사람이 누구든지 봐서 뭘 쥐고 있다는 걸 알아맞추는 그런 기술로 봤다 한다면 가장 정의로운 거예요. 가장 공평하죠. 그러니까 노름판에서 누가 돈이 있다고 교만하면 안 돼요. 그날 운이 안 땅겨서 그래요. 로또죠.

주일 오후에  그런 설교 했잖아요. 로또 추첨할 때 네 가지 관을 통해서 숫자가 달린 공이 들어오잖아요. 그렇게 되면 투명한 유리관 속에서 숫자, 28번, 26번이 충돌한다고요. 충돌하면서 15번 튕겨 나오면 15번, 또 튕겨서 6번이 나오면 6번이 되잖아요. 우리 인생이라는 게 뭐냐 하면 그냥 홀로 사는 게 아니고 이놈한테 튕기다가 저놈한테 부딪히고 튕기고 부딪히고 결혼하고 이혼하고 또 이혼하고 이러다 나온 게 16번, 27번, 5번이고 그런 거예요.

결국 로또 판에 보면 우리는 개성이라는 게 없고 다만 쥐고 있는 것은 나한테 담당한 숫자만 있는 것, 그냥 숫자 하나 쥐고 있는데 그 숫자를 하나님께서 죽인다는 겁니다. 왜, 아담이란 총괄개념에 포함되기 때문에 니가 26번이 됐든 75번이 됐든 다 죽여 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죽을 인간 같으면 ‘주께서 죽이시는군요.‘ 라고 알고 수용하면 그게 신자인데, 영생 얻는데, ’내가 예수 믿고 난 뒤에 어떻게 천국 갈까요?‘ 이렇게 나온다는 것은 아직도 아담 안에 갇혀 있다는 그 사실을 거부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계시를 거부하니까 거부는 마귀가 시켜야 거부하지, 지가 하는 게 아니에요. 마귀가 하나님보고 ’하나님, 그 따위 소리 하지 마.‘ 하는 거예요. 우리 속에서 마귀 목소리 나와서 ’하나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완전히 개콘의 김 기리가 하는 대사처럼.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 일을 그렇게 처리하면 안 됩니다. 한 사람 범죄 했다고 다 죽이는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죠.

특히 누가 그 소리 하느냐 하면 목사들이 그런 소리 하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여러분 이 한 노력만큼 복주십니다.’ 거기다가 주님께서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은 죽은 것 같이” 이렇게 나오면 목사가 나서서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런 소리 하면 안 됩니다. 교회 장사 안 됩니다.’ 이렇게 나오겠죠.

다니엘 다시 이야기합시다. 다니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는 인자라는 말로 다니엘과 교체하는 겁니다. 삽질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조폭이라서 다니엘을 삽질해서 파묻어요. 다니엘 하나 파묻어야 인자라는 싹이 피어납니다. 다니엘을 흙으로 파묻어요. 식목일 이예요. 심어 놓으면 다니엘은 죽고 거기서 뭐가 피어나오느냐 하면 인자라는 싹이 나오고 열매를 맺으면 예수 그리스도가 되죠. 이게 ‘아이쿠, 다니엘 안 됐다.’라고 하지 마세요. 지금 우리가 다니엘 이예요. 성령 받은 우리를 다니엘로 그렇게 만들어요. 우리의 뜻대로 되는 게 있던가요? 이 세상은 우리의 뜻대로 전혀 되지를 않습니다. 고마운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만큼 구원받았기 때문에 뜻대로 안 돼요. 우리의 뜻은 마귀 뜻이거든요. 마귀의 뜻을 이루어보면 이건 지옥 가는 것 밖에 안 돼요. 그래서 마귀 뜻이기 때문에 절대로 마귀와 반대편으로 데려가 주기 때문에 이쪽 편의 마귀 뜻대로 안 해주시는 그런 것을 고마워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뜻대로 안 되는 걸 굉장히 감사히 여겨야 돼요.

주님이 이렇게 관여하지 않으면 항상 우리는 우리 뜻대로 되기를 고수하고 고집할 수밖에 없어요. 남이야 죽든지 말든지 내 뜻만 되면 우리는 만반의 웃을 준비가 돼 있어요. 월드컵도 대한민국이 나가야 되지, 7승도 류 현진이가 돼야 되지, 전부 다 자기 뜻대로 다 돼야 돼요. 세상의 모든 게. 자기가 응원하는 롯데 자이언츠가 꼭 이겨야 되고, 남의 자식은 전부 다 대학 떨어져도 자기 자식은 좋은데 가야 되고, 졸음운전해서 고속도로에서 차 박을 때 그것도 나와 상관없는 사돈의 팔촌하고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 죽어야 되고 나와 관계있는 사람은 졸음운전하다 죽으면 안 되고, 모든 것이 다 내 뜻대로 돼야만 하는 그 고집, 그게 우리뿐만 아이고 다니엘도 마찬가지에요.

그 다니엘에 대해서 주께서 삽질하는 거예요. 조폭이 파는 게 아니고 다니엘 본인이 들어 갈 구덩이를 본인이 파는데 사자 굴에 들어가요. 다니엘이 사자 굴에 못 들어가서 환장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다니엘 세 친구는 어디 들어갑니까? 사자보다 무서운 불 속에 들어가요. 인간의 세포가 단백질로 돼 있기 때문에 200도 이상 올라가 버리면 세포가 제 기능을 못해서 혼미해집니다. 녹아버려요. 그래서 화상 입잖아요. 그런데 풀무 불이거든요. 200도가 아니고 풀무 불같으면 얼마나 올라가느냐 하면 1000도 내지 1500도, 도자기 구울 때 바람을 불어넣어서 공기를 집어넣는데 옛날 사람 가야 사람들 보면 산소를 주입하니까 이건 철도 물처럼 녹아내리는데 우리의 세포 분자 구조가 그렇게 강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 안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만큼 뭐냐 하면 다니엘에게 준 계시가 죽음보다 세다는 뜻 이예요. 그런데 남이 하면 우리는 박수만 치면 되지, 막상 주님의 약속이 우리 죽음보다 세다는 것을 우리를 가지고 측정한다, 실험하겠다고 나서면 아! 이거는 기겁할 문제입니다. 지금도 실험 가능합니다. 주님의 영생이 우리 죽음보다 더 세다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 이렇게 하면 돼요. 일단 단동에 가서 요한복음 쪽 복음을 성경을 몸에 감고 단동 건너서 신의주로 해서 북한에 들어가는 거예요. 들어가면 미친놈이라 해서 붙잡아서 공개하거든요. 북한 경찰서가 뭡니까? 안전 보위 국에 가서 빠따로 ‘이래도 예수 믿을 건가?’ 해서 맞아서 완전히 바보가 되는 거예요. 바보로 만들면 입에서 시키는 대로 하거든요. ‘예수는 없다. 북한 인민 공화국이 천국이다.’ 이런 소리 방송국에 가서 하면 돼요. 어디 그렇게 해보시렵니까? 하도 많이 맞아서 정신 착란 돼서. 선교할 때는 성령께서 선교한다 해서 얻어맞아서 이제는 김일성 만세, 하면서 방송에 나오고. 그것도 마귀시험입니다. 그러지 마세요.

왜냐 하면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실험은 우리가 나서서 실험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여러분 사시는 장소에서 매일같이 딸하고 아들하고 남편하고 매일같이 죽는 실험을 해주십니다. 내가 잔뜩 기대했던 딸에게 실망하고 내가 잔뜩 기대했던 남편이 실망케 할 때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지, 이렇게 살면 뭐 하노.’라는 생각이 들 때 그래도 그때 뭡니까? 주께서 살려주니까 사는 것이지, 내가 산다고 해서 누구 믿을 놈 누가 있습니까? 언제 가족을 우리가 믿었어요? 믿는다고 해서 믿게 하지는 않는 거잖아요. 가족이, 남남인데.

그럴 때 역시 믿을 구석은 내가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주께서 우리를 주님이 다니엘 하는 그 과정에 우리를 참여시킨다는 이 변함없는 사실, 그게 중요한 겁니다. 그러면 진도 나가봅시다. 그러면 내가 살짝 문제 하나 던져볼게요. 변함없음, 글자 읽으라고 쓴 게 아닙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나의 구원은, 영생은 변함이 없음을 확정 시켜주는 계시가 다니엘에게 주어졌겠습니까? 안 주어졌겠습니까? 오늘날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도 주께서 한번 주신 구원은 취소되거나 폐기처분 안 된다는 그 내용이 다니엘에게 주어졌겠어요? 안 주어졌겠어요? 당연히 주어졌죠.

그래서 다니엘을 人子라고 하잖아요. 그리고 예수님도 인자 같은 이로 나오시고. 예수님은 자기를 뭐라 합니까? 人子라 했잖아요.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실 때 나는 人子라고 하시면서 나를 믿으라 하셨죠. 人子를 믿으라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다니엘에게 주어진 계시대로, 그 내용대로 그걸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내가 왔다 이 말이거든요. 다니엘에게는 구름 타고 오잖아요. 내가 바로 구름 타고 올 인자 같은 이가 바로 나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그 음성을 들을 때 그걸 듣고 우리가 믿게 되면 다니엘에게 주신 안에 있는 계시가 어떤 계시기에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고, 우리는 우리밖에 모르고 돈밖에 모르고 자기 자식만 중요하고 세상만 좋아하고, 다 내 뜻대로 이렇게 나만 생각하는 내가 어떻게 그래도 변함없이 영생을 받는데 지장이 없는 그 내용이냐 하는 것은 먼저 우리 이전에 다니엘이 받은 계시 안에 그게 담겨 있다 이 말입니다.

다니엘에 보면 죽은 자가 부활하는 이야기가 다니엘 12장에 나옵니다. 한번 볼까요? 12장 1절에 보면 “그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구원이 뭐냐 하면 2절에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이렇게 돼 있죠?

이게 다니엘에게 준 계시 안에 포함돼 있잖아요. 그렇다면 구원받은 사람은 아까 조폭처럼 삽질해서 땅에 묻히잖아요. 그럼 땅에 묻힌 인간이 땅에 묻혀서 스스로 움직여서 땅을 팝니까? 묻혔는데, 그래서 땅을 파헤치고 무사히 일어나니까 이렇게 다시 살아난 거예요? 킬링이란 영화에 보면 묻었는데 손으로 파고 나와서 살아나는 게 있어요. 그건 영화고.


우리는 죽은 자가 꼼지락 거리면서 할 수 있습니까? 못하죠. 그 말은 여기서 ‘죽었다.’ 이 말은 죽어서 무덤 속에 있는 것도 죽음이지만 현재 우리가 살았다 해서 하루하루 밥 먹고 산다는 이것도 사실은 무덤 속에 이미 파묻혀 있는 상태에요. 우리는 손가락을 움직이지만 주께서는 그걸 움직이는 걸로 보는 게 아니고 죽은 걸로 보는 거예요.

다니엘에 있어서 구원은 이미 다니엘이 죽었다고 칠 때 죽은 자를 어떻게 영생으로 이끌어 내느냐 하는 솜씨는 다니엘을 찾아오신, 다니엘 선지자를 만들어 내신 하나님의, 메시아의, 인자 같으신 분의 솜씨입니다. 능력 이예요.

그러면 다니엘이 꼼지락 거리고 자기 힘으로 도 닦고 해서도 구원 안 되는 이유가 뭐냐, 다니엘 주변에 뭘 배치를 해요, 짐승의 나라를 배치해 버립니다. 다니엘을 흙에다 묻는 게 아니고 콘크리트에다 묻어요. 흙도 파기 힘든데 철근 콘크리트에 묻어버리면 다니엘이 백날 놓으려 해도 짐승의 나라를 극복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안 되죠. 거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짐승의 나라가 한번 타설한 것이 아니고 엎친 데다가 또 덮쳐서 또 짐승이 덮치고 또 엎치고, 바벨론 메대 바사, 헬라 마케도니아, 로마, 로마가 마지막 콘크리트 작업 이예요. 어느 인간이 여기서 지가 마징거제트도 아니고 지가 아이언 맨도 아니고 거기를 뚫고 나오겠습니까?

짐승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는 말은 결국 바벨론이거든요. 짐승이라 했다는 말은 ‘짐승아, 니가 할 수 있는 능력 다 발휘해서 인자, 나 위에 덮쳐라.’ 그게 십자가의 죽으심이죠. 콘크리트 네 겹이 덮쳐버리면 아무도 누구도 일어날 수 없어요. 심지어 예수님도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거기서 무덤에서 사흘 만에 건져 낼 때 그게 능력이거든요. 뭐냐 하면 인자라고 했을 때 처음에 창세전에 이미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이야기가 끝났어요. 너는 버림받아야 되고, 그 버림받은 너를 내가 건져줌으로서 사랑이라는 것을 성립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로마서 8장 이야깁니다. 사랑!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준 이가 어찌 우리를 콘크리트에서 건져내지 못하겠느냐?

그러니까 니거 뭐를 했느냐 하지 말고 주님이 어디에 덮쳐 있는가를 보라. 주님이 덮쳐 있는 것을 깨고 나온다면 니가 어떠한 콘크리트 타설에 갇혀있더라도 죽은 예수를 살리신 영이 너희에게 임하면 죽을 너희도 살리시리라. 로마서 8장 11절의 말씀. 그게 성립이 되는 거예요. 이게 신약에는 결론이 나와 있지만 구약의 다니엘 같은 경우에 그 환경이 이미 마련돼 있어요. 장차 오실 인자 되신 예수님이 십자가 죽는 그 모양새를 다니엘이 미리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그 흉내를, 히브리서에서는 모형이라 하죠. 그 모형과 그림자를 그냥 해야 되는 겁니다.

여기 제가 방금 모형, 그림자라 했습니다. 그림자! 그림자의 특징이 있어요. 그림자라 하는 것은 이 실체가 있으면 그림자가 있잖아요. 실체가 움직이면 그림자가 움직입니까? 안 움직입니까? 움직이죠. 그럼 물어봅니다. 그림자가 움직이면 실체가 따라갑니까? 아니죠.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무슨 소리해도 예수님은 아브라함 말 안 들어요.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그림자지,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그림자가 아니에요.

그렇다면 오늘날 신약의 아브라함처럼 우리가 주님을 보여주는 그림자라면 주님이 우리 말 듣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경우를 당하든지 간에 주께서 잠시 장소를 이동한 거예요. 주님은 한 발짝 이동했는데 우리는 죽는다고 난리 났어요. 주님은 잠시 몸을 움직였는데 우리는 부부싸움하고 난리 났어요. 못살겠다고 갑자기 안 다니던 새벽기도까지 나와서 데모하고 항의하고 합니다.

기도 대신 이렇게 하면 모르겠어요. 아예 글씨를 쓰는 거예요. 그래서 대법원이나 검찰청 앞에 서서 있잖아요. 피켓 들고 하는 그게 더 노골적인데. ‘주여!’ 이러지 말고 차라리 ‘나의 피부암을 낫게 해주세요.’ 이런 거 써서. 이거 동영상 올려야 되는데. 그게 노골적 이예요. ‘주여 선교회비 다 대겠습니다. 선교사님 기도하겠습니다. 교회에서 목사님을 위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런 바른 소리 하지 말고 간단하게 이거 해달라고. 간단하게 몇 자만 쓰면 되는데. 뭐 그렇게 주께서 다 아시는데 빙빙 돌려 이야기한다고 지가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를 리가 있습니까? 주께서 아시는데, 중심을 보시는데. 새벽기도 한다고 감사헌금 강단에 올리고, 그거 한다고 돈 받고 기도 응답해주시겠어요? 목사만 좋아하지 주님은 전혀 안 좋아하시는데.

다니엘 같은 경우에 그냥 삽질해서 사자 굴에 들어가야 된다니까요. 언제 다니엘이 ‘주여 사자 굴에 들어가게 해주세요.’ 이런 기도 한 적이 없어요. 그리스도가, 예수님이 죽음 속에 가야 하기 때문에 다니엘도 그 시대에 부합되는, 그 시대의 짐승에 부합되는, 그 시대 계명은 그 시대 짐승이 창안한 거잖아요.

“누구든지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면 풀무 불에 들어간다.” 라는 것을 다니엘 세 친구한테 이미 법령으로 왔죠? 법령이 뭡니까? 그 시대에 마귀가 만든 것이고 그 시대의 마귀에 대해서 주님은 좋다고 ‘내가 잡혀 먹혀줄게. 잡아먹어라.’라고 머리를 내민 거예요. 그걸 다니엘은 그 시대에 머리를 내민 거예요.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그래.’ 기도하면 벌한다. 창문 활짝 열고 보란 듯이 하니까 중앙일보 사진 찍고 난리 났어요. 고위 관리자가 지금 법을 어긴다 해서 찰칵, 찰칵, 찍고 전부 다 난리 났어요. 보란 듯이 창문을 열고 기도했잖아요.

예수님께서 복음 전할 때 가만히 숨어서 하지 않았어요. 공개적으로 했어요. ‘아예 날 잡아 먹어라.’ 이 말이거든요. 날 잡아먹어서 짐승이 짐승 값을 해라 이 말이거든요. 그래서 우리 성도가 복음을 전하게 되면 좋은 친한 친구 사이도, 뭐 초등학교 30년 친구고 30년 지기고 돈 빌려준 관계고 백날 해도 졸지에 원수 돼 버려요. 그렇게 원수 될 때는 고마운 줄 알고 원수 안 되거든 ‘이거 뭔가 내가 복음을 잘못 전했나. 내가 어설프게 내 쪽에서 뭔가 연기를 했는가.’ 이건 때가 안 돼서 그렇고 때가 되면 주께서 주변에서 삽질하게 만듭니다. 아예 파묻게 만들어 버려요.

다니엘에 있어서 이겁니다. 이런 명제가 돼요. 선지자는 유일자인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느냐 하면 선지자 본인도 자기가 유일자 되기를 원치 않아요. 하나밖에 없는 걸 원치 않습니다. 왜 이 질문을 하느냐 하면 구약의 언약에 있어서 반드시 한 사람 때문에 다른 사람이 혜택을 입는 원리예요. 창세기 12장에 보면 나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게 되면 저주 받는다.”

그러면 노골적으로 ‘아브라함 당신 꺼져.’ 이렇게 저주한다고 저주 받는 게 아니고, 아브라함 아내 사래를 그것도 누이동생이라 하니까 어떻게 저 여인을 자기사람으로 하고 싶어서 동침하지도 않고 동침할 뻔 했는데 그쪽 동네 여자가 전부 다 태가 닫혀 버리는, 아비멜렉 추장 이야깁니다.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죠. 그래서 우리 인간이 이해가 안 되는 게 이렇게 뭔가 범죄를 저지르고 난 뒤에,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에 그 이후부터는 범죄에 대한 형벌이 주어지는 게 맞는데, 할 뻔했는데, 할 뻔했는데, 뭐가 등장합니까? 형벌이 먼저 주어졌죠.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하고 상대하는 게 아니고 인간을 그냥 이용할 뿐 이예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 사람을 건드리면 너희들이 어떤 벌을 받는지를 그 아비멜렉 추장 집에서는 미리 맛보게 하신 거예요. 그러니 아비멜렉 입장에서는 억울하죠.

학교 선생님이 컨닝 하면 때린다, 이래야 되는데 미리 때려놓고 컨닝 하면 때린다. 이러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이게 불합리해요. 미리 때려 놓고, ‘선생님 컨닝 안 했잖아요.’ 하니까 ‘그래도 컨닝 할 기회가 되면 컨닝 할 마음이 있잖아?’ 하니까 ‘저는 없어요.’ ‘그럼 한번 피해 볼까? 하는지 안 하는지.’ ‘그러면 하죠.’ ‘그러니까 봐라. 그러니까 내가 미리 때렸지.’

제가 말하는 것은 선지자 아브라함, 이삭, 이런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본인 인생이라는 게 없다는 거예요. 누가 압수해 갔어요. 압수해 갔다는 것도 말이 되지만 더 정확하게 말해서 애초부터 압수당한 인생으로 살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자기 인생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느끼면서 살도록 그렇게 한 거예요. 그게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은? 믿는 사람도 같은 계열의 사람이니 다 마찬가지죠. 우리 인생이란 없고 주께서 주님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는 그 인생으로 몰려가는 겁니다. 선지자의 속성과 다니엘의 위치에 대해서 이렇게 하니까 여러분도 이해되시겠죠.

그리고 나서 226페이지 봅시다. 글 내용은 어렵지만 제가 이렇게 될 수 있는 대로 쉽게 하려고 했으니까 여기 인자라는 말 나오고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잖아요. 인자라고 호칭하게 된다 했고, 227페이지 위에 보면 『‘인자’와의 대비가 다니엘의 신체 안에서 성립되는데 이 대비는 곧 ‘하나님의 이름’과 ‘인간의 이름’의 작용의 차이를 드러낸다.』

여기 다니엘의 신체라고 했는데 방금 제가 강의한 대로 하면 다니엘은 뭡니까? 언약적인 의미에서 유일자, 다른 사람은 보여주는 게 아니고 그 사람을 통해서 보여준다는 이 말은 다니엘과 하나님이 함께 있다. 하나님이 함께 있다가 어패가 있다고 된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함께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름이 함께 있다.

야곱이 얍복 강에서 누굴 만났습니까? 하나님의 이름과 같이 했죠. 그 이름이 나중에 야곱에서 뭐로 바뀝니까? 이스라엘! 야곱은 죽고 속에 들어있던 하나님의 이름 이스라엘에 튀어나오죠. 그게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야곱 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한 것처럼 인자 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한다 했죠. 그러면 이스라엘(야곱) 위에 오르락내리락 했던 이스라엘이 예수님 본인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럼 다니엘이 경험해야 될 인생은 누구 인생입니까? 예수님 인생이죠. 차이가 있다면 야곱은 야곱 시대에 맞게 이스라엘 쪽이고 예수님은 예수님 시대에 맞게 예수님인데 그 차이가 그렇게 나야 될 이유가 야곱이었을 때는 철근 콘크리트이고 예수님 당시 콘크리트가 질이 달라요. 왜냐 하면 예수님 때는 마지막이기 때문에 악마란 악마는 다 튀어나와요. 악마가 발휘할 수 있는 힘은 전부 다 예수님 위에 다 덮쳐버려요.

어릴 때 이런 장난하잖아요. 동생한테 이불 덮어씌우고 또 덮어씌우고 하면 ‘아휴, 답답하다.’ 하면 그때 겨우 어린 동생을 끄집어내는 것처럼, 아까 이야기한 예수님을 덮쳤던 모든 짐승의 위력은 이건 사람 힘으로 도저히 못 빠져나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모든 힘의 전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어야 될 이유는 거기서 짐승의 모든 힘은 거기 다 나타나 있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럼 죽여 버립니다. 그 말은 뭐냐, 이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세상이 아니라는 거죠. 하나님의 아들, 성도를 방치하는 세상이 아니에요. 그것이 십자가를 보게 되면 그게 다 들어와요.

사도바울은 그 속에 사는 존재를 한 자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육이라 했죠.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나 야구 선수나 축구 선수나 관계없어요. 무조건 모든 인간은 육 이예요. 육이니까 영이 없어요. 육 이예요. 영, 육 , 혼 백날 해도 전부 다 육 이예요. 육은 죽고 영으로 살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볼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 3절.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성령의 바람이 와야 되고 바람이 불어서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늘나라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하늘나라 못 본다는 이야깁니다. 니고데모야, 하늘나라 니 몰라. 베드로도 ‘제가 육을 바치겠습니다.’ 육을 바쳐도 하늘나라 못 가요. 합쳐서 이야기하면 못 가요. 아니 안 가야 돼요. 가서는 안 되는 곳 이예요.

 결국 우리가 갈 곳은 내가 가서는 안 되는 곳에 가요. 지금 예수 믿는 우리가 가는 곳은. 창기가 들어가면 안 되고 강도가 거기 가면 안 돼요. 강도가 거기 강도 짓 할 일 있습니까? 창녀가 가면 안 돼요. 거지? 거지가 거기 왜 갑니까? 가면 안 돼요. 못 가는 인간들 이예요. 못 가는 인간들인데 갔다는 것은 이게 평균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언약대로 성취시켰다는 걸 담보로 할 수 있는, ‘언약은 성취되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그러한 증거물로서 가야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광고판에 있는 재료, 이렇게 보면 됩니다. 광고판에 그리스도는 부활했다. 요 판대기, 요 베니아 판, 요게 우리에요. 재료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한 요 광고판을 뭐라 하느냐 하면 교회라고 합니다. 피로 값 주고 산 교회, 요게 하나의 실제적인 덩치로 있는 게 아니고 사건이라는 회오리바람 이예요. 미국의 남부 지방에 토네이도 알죠? 자, 토네이도가 어디 있습니까? 토네이도가 어디서 일어납니까? 말 됩니다. 미국 남부지방에서 일어납니다. 현재 토네이도가 어디 있어요? 없죠. 일어날 경우에만 반짝 있다가 소멸되는 겁니다. 그게 교회입니다.

내가 교회 되는 게 아니고 성령의 사건이 교회 되게 해요. 매일같이 교회 되게 해요. 매일같이 살려내잖아요. 어떤 때는 사흘 간 밥 안 줘서 죽게 만들다가 사흘 뒤에 밥 줘서 살게 하죠. 그러니까 어쨌든 저쨌든 살려내게 해요. 어떤 때는 암에 걸려서 죽는다 해서 이미 식물인간이 됐는데 또 이상한 특효약 줘서 살게 하잖아요.

광고판,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 살려내는 겁니다. 그 광고판의 선배가 누구냐,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이 신장개업하는 가게에서 얼마나 흔들었겠어요? 제 다리만 보지 마시고요, 얼마나 흔들어 댔겠어요? 힘 다 빠졌어요. 그렇게 흔들게 만드는 계시가 70이레입니다. 그것은 70이레는 포장지, 껍데기만 줬고, 박하사탕 있잖아요. 박하사탕 포장지만 줬고 알맹이는 신약 때 십자가로 우리에게 주신 거예요. 다니엘은 포장지만 들고 춤을 춘 거예요. 알맹이는 그 안에 무르익었어요. 다니엘은 있어야 다니엘 중심에 짐승이라는 토치카가 같이 형성되게 돼 있어요.

이것을 지난번에 했지만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게 보면 됩니다. 이스라엘은 어떤 특정 공간을 점령하고 있었죠? 가나안 땅, 이건 실체가 있죠. 이게 멸망했습니다. 이게 뭐로 바뀌느냐 하면 토네이도로 바뀝니다. 사건으로 바뀌어 버려요. 실체가 흩어져 버린다. 이사야, 예레미야 보면. 흩어지면 어디로 가느냐 하면 바벨론이라는 짐승의 나라에 점박이처럼 흩어져 버리고, 다른 사람 많은 숫자는 이집트, 애굽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위로 가고 다 가버려요.

흩어져 있는 것을 인자야, 하고 에스겔에게 계시를 주니까 흩어져 있는 것이 요렇게 같이 뭉쳐지죠. 뭉쳐져도 나중에 늙어 죽어버립니다. 그런데 70년 만에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기 이전에 이게 실체가 사건으로 만들면서 이 짐승이 이제는 실체로서 부각이 되는 거예요. 실체는 사건 돼 버리고 그 회오리바람이 이쪽에 부니까 그 사건이 이스라엘 포로 잡힌 걸 붙잡으니까 이쪽이 짐승이라는 실체로 부각이 돼 버리는 겁니다.

오늘날 성도를 성도가 살고 있는 그 지경이 바로 짐승의 세계에요. 이걸 요한계시록 18장에서 이걸 바벨론! 그것도 그냥 바벨론이 아니고 더러운 여자 바벨론, 또는 큰 성 바벨론. 구약에서 음녀라 하는 것은 언약적인 남편을 공격하는 게 음녀에요. 언약적인 남편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그냥 봐서는 고요한 세상이지만 언약을 언약 적으로 따져보면 이 세상은 언약을 모독하는, 십자가 피를 모독하는 그런 정신으로 우리는 물들어 있어요. 이 세상 모든 것이 물들어 있어요. 십자가 보다 더 좋은 게 많고 더 원하는 게 많고 백화점에 명품 가방과 옷이 좋지, 십자가 복음은 좋아하지를 안 해, 복음을 그렇게 외쳐도 그때뿐이고 돌아서면 야! 옷 좋다. 주식 값 올라갔다. 땅 값 올라갔다. 이렇게 하죠. 이런 걸 더 좋아하죠.

그러니까 우리의 육은 거기 이미 짐승과 아무 충돌이 없어요. 아주 자연스럽게 내통하고 있습니다. 그런 인간을 매일같이 삽질로 묻고 다시 거기서 살려낼 때 그 위력은 다니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70이레 계시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 담겨있는 70이레를 파헤쳐 보면 거기서 무슨 복음이 나오는가, 그건 10분 쉬고 계속해 봅시다.

 

 

가락교회-70이레 논문(선지자 신체)130613-21강b -이 근호 목사

제 21강b

자,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결국 첫째 시간 생각해 보니까 언약 안에서 누가 나오신다는 거죠. 그런데 언약에서 다 해버리면 우리는 할 게 없지 않느냐, 예수님께서 내 피와 내 살을 먹고 마시라 할 때 그 피와 살을 유발시키는 요인은 인간들이 해줘야 돼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스스로 칼 들고 스스로 자살하지는 않잖아요. 누가 찔러 줘야 돼요. 그 찔러주는 것을 주님은 마귀가 찌른다 하고 사람이 찌른다 하지 않고, 그리고 너희 애비는 마귀다. 마귀가 보이지 않는 마귀를 염두에 두고 너희는 그들의 하수인에 불과하다고. 마귀가 주는 마음가짐 때문에 결국은 나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속성들이 우리의 육을 통해서 다 나오죠.

주께서는 그 미워하심을 그대로 받습니다. 받아서 그 미워했다는 그것을 언약 완성의 재료에 밑천으로 삼으시는 겁니다. 미워했음에도 너희들이 구원받았잖아. 그러니까 천국에는 나만! 어린양의 영광만 높여지게 된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바로 장로들이 자기 면류관을 반납하는 대목이 그 대목이죠. 우리가 쓰는 것은 절대로 합당치 않습니다. 하고 반납하는 거예요.

이건 마치 초등학교 졸업식 때 상장 같은 걸 받으면 애들이 그걸 6학년 담임선생님을 보고 졸업하면서 마지막 헤어지면서 ‘이거 우리가 받지만 선생님께서 다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하면서 그 모든 받은 상장과 상품과 상금을 선생님께 던지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런 애 없습니다. 다 챙겨서 엄마가 다 가져가지, ‘선생님 수고했습니다.’ 라고 이렇게 하지를 않죠.

요번에 요한계시록 해석하면서 쉬는 시간에 우리교회서 제가 생일 된 달이라 해서 떡을 사와서 이렇게 했어요. 그래서 제가 인사말을 해야죠. ‘제가 이렇게 된 것이 다 여러분 덕분인 줄 알죠? 제가 이런 것은 생각하지 말고 그냥 추억이라고 생각하고, 생각하지 맙시다. 이렇게 했거든요.

그런데 주님은 의도적으로 자기를 미워하게 만들어요. 이건 추억이 아니고 그 자체가 앞으로 반복하고 되풀이 돼야 될 언약의 완성체로서 만드는데 주께서 주변의 인간들을 활용하시는 겁니다. 마귀에 속한 자들을 활용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227 페이지 봅시다. 그건 여러분이 다 아시는 것이고, 위에서 세 번째 『예언의 일관성은 인간의 신체성이 뿜어내고 있는 원초적 생존의 욕망과 그 육적으로 주변을 해석하는 해석 성향으로, 바깥으로 드러내게 만드는 것과 관련 있다.』이렇게 돼 있죠.

이 말은 이렇게 보시면 간단합니다. 인간이 육이 있는데 인간의 육은 뭘 막 뿜어내죠. 뿜어내는데 이게 뭐냐 하면 살아야 한다. 무조건 살아야 된다. 이걸 주일 낮에 언급했잖아요. 살아야 된다는 것은 우리의 육신이 이만큼 약하다는 뜻 이예요. 이 말은 누가 우리를 죽이려고 덤벼드니까 살아야 한다는 거예요. 죽기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죽기가 무서우면 무서울수록 우리 입에서 나오는 것은 ‘살아야 돼, 그래도 살아야 돼.’라는 이야기를 한다는 거예요. 그만큼 죽으면 안 된다는, 무섭다는 거예요. 살아야 한다는 이러한 모양새, 이러한 표현이 나왔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 우리가 죽기를 무서워 협박을 가하는 그러한 환경 속에 우리가 놓여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노동에 의해서 만들어 내는 모든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이 모든 것은 다 무슨 본능과 관련돼 있느냐 하면 어쨌든 저쨌든 사는 게  땡이다. 사는 자가 승리자다. 살아남은 자가 승자다. 수단과 방법과 관계없이 무조건 살아남아 있으면 그게 우리는 인생으로서 목표를 달성한 거다. 라는 것이 되는 겁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에 멸망했거든요. 왜냐 하면 이스라엘은 이렇게 있는데 주변 나라들이 이스라엘 나라보다 다 큰 나라들 이예요. 그것도 번갈아 가면서 앗수르 올 때도 이스라엘 괴롭혀서 죽인다 하니까 성전에 있는 거 다 가져가세요. 해서 다 가져가 버리고, 또 바벨론이 와서 죽인다 하니까 다 가져가 버리고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잘 사는 이걸 산다고 봤고, 이스라엘은 상대적으로 자기는 못 살고 가난하게 산다고 본 거예요.

이렇게 되니까 이게 무슨 구조냐 하면 힘의 구조거든요. 이것은 광야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정탐만 실컷 구경만 하고 못 들어간 사람이 있죠. 40년 동안 DMZ에도 못 들어가고 맨날 남쪽에 돌아다니며 수명이 다해서 죽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구경 해놓고 다 죽었어요. 바로 우리는 못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말이 맞아요.

하나님은 우리 식대로 하면 못 들어가는 나라를 들어가게 했어요. 그래서 천국 들어가는 이게 어려워요. 부자가 천국 들어가는 게 정말 어려워요. 우리는 부자 없으니까 천만 다행이지만, 부자가 천국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하니까 제자들이 ‘그럼 누가 들어갑니까?’ 그러니까 아무도 못 들어간다는 이야기예요. 주님께서 그걸 동의했죠. “그래, 아무도 못 들어가.” 아무도 못 들어가는데 누가 들어갑니까? 그 질문은 쓸데없는 질문을 한 거예요. “아무도 못 들어가는데 하나님은 할 수 있느니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어떻게 일을 하시는가 보라.” 그 말은 뭐냐 하면 너희들이 못하는 것을 딱 전제로 할 경우에만 뭐가 보이는가? 주님이 하시는 이유가, 그 뜻이 보여요. 내 힘으로 못 들어갈 경우에만 주님의 하시는 일이 그렇게 고맙게 느껴진다니까요. 주께서는 안 되는 걸 되게 하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게 아니고 살려주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우리는 악착같이 살아야 돼요. 병원에 가든지 약을 먹든지 통풍을 어떻게 하든지 무조건 살아야 돼요. 왜, 그것마저도 주님의 은혜니까. 하루하루 사는 게 주님 은혜니까 우리는 쓸데없이 자살하거나 자기를 방치하지 마세요. 악착같이 우리는 살아남아야 돼요. 왜, 주님이 살아계시니까. 그래야 주님이 여전히 살아계심을 우리를 통해서 증거 되거든요.

그래서 지금 그 뒤에 나오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이겁니다. 다니엘의 육체라 하는 것은 다니엘이 훌륭하다. 착하다. 이걸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다니엘이 지금 무엇에 시달리는가, 그걸 보라는 뜻 이예요. 제 요 표현이. 다니엘을 시달리게 했다면 오늘날 다니엘을 시달리게 했던 그 세력이 오늘날 똑같이 우리를 시달리게 합니다.

그런데 다니엘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니까 다니엘은 예상 밖의 행동들을 하죠. 아까 이야기했지만 기도할 때 창문을 연다든지, 죽으려고 환장한 짓을 하는 거예요. 본인 다니엘이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타이밍을 그렇게 맞췄습니다. 평소부터 다니엘이 창문 열고 기도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하나님께서는 다리오 왕을 통해서 기도하면 죽인다고 법령을 해놓고 다니엘로 하여금 거기에 카메라를 맞춰서 다니엘이 기도하는지 안 하는지 시나리오대로 초점을 맞춘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고 어떤 폼을 내지만 그런 연기나 연출을 하지 마세요. 그런 연기 연출은 드라마 작가들이 하는 짓이지 우리가 그런 짓하면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연출하지 마시고 그냥 살아가게 되면 살아가는 그 모습이 불 속에 들어가는 모습 이예요. 사자 굴에 들어가는 모습입니다. 물론 사자 굴인지 모르죠. 들어가 보니까 사자 굴이고 들어가 보니까 불 속이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주여 지금 사는 것이 내 힘이 아니고 주의 힘입니다.’ 자발적으로 고백이 나온다면 그 환경이 사자 굴이고 그 환경이 풀무 불 속 이예요. 꼭 옆에서 뜨거운 불을 붙여야 그런 것이 아니고 촬영하는 것도 아니고 그럴 필요 없어요. 그냥 자식하고 남편하고 아옹다옹 사는 이게 사자 굴속에서 사는 겁니다. 주변에는 불신자의 세력들이죠.

제가 하는 이 말은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다니엘도 마찬가지고 우리도 마찬가지고 이 시대의 풍토에 우리는 휩쓸릴 수밖에 없는 연약한 육체를 가졌다는 말을 강조하고 싶어요. 너무나 연약하기 때문에 주께서 지켜주지 아니하면 우리는 같이 휩쓸리게 돼 있습니다.

여수 바닷가에서 35세 먹은 한 여인이 철망으로 꽁꽁 묶인 채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실종된 지 40일 만에 발견됐거든요. 그래서 이 여인이 자살했나? 왜 죽었지? 그런데 지가 지 몸을 철망으로 묶지는 않았고 누가 타살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원래 시체가 안 나타나야 되는데 마침 썰물이 되다 보니까 범인들도 동해바다에 빠뜨려야 되는데 실수해서 썰물이 되다 보니까 드러나 버렸어요. 그래서 왜 죽었나 보니까 죽은 여자까지 포함해서 네 명이 죽지 말고 죽는 척만 하면 보험금 타낼 수 있다 했는데 죽는 척 하다가 세 명이 죽이자, 해서 쥭여 버린 거예요. 그 사건 이예요. 죽은 여자도 가담한 거예요.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이겁니다. 그들이 피부 숍에서 만났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기 전에 대낮에 식당에서 막걸리를 먹었답니다. 자, 30대 여자 세 명이고 남자 하나, 다 보험금을 노리고 했는데 그것도 마트에서 어렵게 아르바이트 하는 여인이 이혼한지 8년 됐다 하는데 그 피부 숍에 가서 피부 관리할 그런 돈이 어디 있습니까? 식당에 가면 낮에 보통 여자들이 막걸리를 먹어요. 술 먹고 피부 숍에서 거기서 세계평화를 논했겠습니까? 북한 핵 문제를 논했겠습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의 육은 주변에 있는 그 분위기에 휩쓸리기 마련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이런 쓸데없는 여수 살인사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고 하나님이 지켜주지 아니하면 우리는 같이 동조하는 버릇이 있어요. 이 분위기에 같이 동조하는 버릇이 있다고요. 그래서 같이 하기 때문에 죄의식이라는 게 없죠. 왜 니만 하나? 나도 하는데, 전부 다 낮술 먹는데. 낮에는 남자는 낮술 안 먹어요. 직장 들어가야 하니까. 아줌마들이 애 데리고 와서 낮술 먹는다니까요. 실제로 내가 눈으로 목격하니까 이런 소리 합니다.

내가 술을 먹어야 되느냐, 내가 어려운데 피부 숍에 가서 피부 맛사지를 해서 돈을 써도 되느냐, 그런 관념이 없어요. 평균인간이라. 평균인간! 그저 남들 하는 것처럼 따라 하게 되면 그게 인생사는 것인 줄 알아요. 인생 그렇게 사는 걸로 알아요. 누가 정답을 이야기해 주는 사람이 없어요. 왜 평균인간이니까. 평균은 정답이 아닙니다.

선생님이 문제 낼 때 100점 맞으라고 냈지만 평균 60점 나오면 60점 맞았다고 좋아들 합니다. 왜, 평균이니까. 선생님은 100점 맞으라고 문제 냈는데 60점 맞으면 좋다 하는 거예요. 제가 운전면허 시험 62점 맞았습니다. 아슬아슬했어요. 그래도 운전하잖아요. 제 아내는 90점 맞았어요. 그런데 운전해요. 합격만 하면 그만이거든요.

아무도 복음에 대해서 인생이 누군지 우리가 왜 있는지, 우리가 누구 때문에 있는지, 아무도 이야기해주는 사람 없습니다. 그저 뒤따라가면 돼요. 남 엉덩이 보고 따라가면 그게 사는 건 줄 알아요. 모든 게.

이게 바로 뭐냐 하면 다니엘이고 오늘날도 마찬가지고 짐승? 우린 짐승 없어요. 그저 잘 사는 나라. 힘 있는 곳, 멋있게 사는, 삼성그룹 이런 것, 우리나라 같으면 삼성그룹이 중앙 아닙니까? 삼성그룹 앞에 줄 서는 거예요. 변호사도 삼성그룹에 소속돼야지, 회계법인, 그리고 모든 방면에서 삼성이 연관된 곳이 일등이라. 야구도 삼성 라이온즈가 일등, 전부 다 삼성그룹이라.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는 것, 임원도 연봉이 5억, 전부 다 그렇게 살아가게 되면 잘 사는 건 줄 알아요. 그거 잘 사는 거 아니거든요. 그건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사는 거거든요.

바로 그것이 저는 사자 굴, 이것이 바로 풀무 불속에 우리는 푹~ 놓여 있습니다. 그게 사자 굴이고 그게 풀무 불이라는 것을 눈치 챈다면 우리는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왜, 그런 세계가 너무 좋거든요. 너무 좋아서 따라가고 싶은데 귀 잡고 ‘어디를 가?’ 하고 ‘니는 나를 증거 해야 돼.‘ 하고 계시로 귀를 잡아당겨 주니까 세상에 이런 다니엘 세 친구가 어디 있습니까? 이런 다니엘이 어디 있어요? 이 시대 다니엘 이예요. 그걸 가지고 저는 그 다음에 나오는 교차대비구조라 하는 거예요,

우리의 신체를 중심으로 해서 뭔가 쳐들어오고 통과하고 뭔가 쳐들어오고 통과하고 세상의 주변에 있는 짐승들의 능력으로 우리를 완전히 푸욱 스폰지 젖어들 듯이 우리는 푹~ 젖었어요. 세상의 드라마 같은 거 한번 보세요. 임 성한 작가가 쓴 드라마 보세요. 세상에 잘 나가는 거 다 있잖아요.  오로라 공주, 전부 푹~ 젖었어요. 세상에 부잣집 재벌 노는 거 다 나온다고요. 우리는 그걸 보면서 욕하면서도 그렇게 못 된 게 한이 맺혔어요. 전부 다.

푹 젖었는데 여기에 계시가 와서 통과해 버리니까 뭐가 교차된다? 주님의 언약과 그리고 언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준비 된 짐승의 아름다운 것들, 짐승의 것들이 무엇을 중심으로? 이게 중요해요. 무엇을 중심으로? 나를 중심으로! 내 육체가 계시 중심 이예요. 계시 한번 받아 보세요. 지금 내 육체, 내 육체가 내 것이 아니고 주님 것이잖아요. 주님의 것을 주께서는 푸욱 세상에, 짐승에 푸욱 좋아하도록 미쳐서 ‘아유, 부러워라.’ 하고 아예 꿈속에서도 잘나서 재벌 돼서 있도록 푹~ 스폰지처럼 젖어놓고 나오게 해놓고 거기다가 그리스도 십자가 피가 거기서 교차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항상 이 두 가지가 교차하는 지점, 여기서 그 뒤에 나오는 언어가 발생합니다.

언어! 한국어, 불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언어죠. 언어에서의 언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어, 복음이 나오게 하는 겁니다. 복음이 나오는데 복음 언어가 따로 있느냐?  따로 없어요. 한국 말 이예요. 예수가 한국말이잖아요. 한국말인데 한국말을 통해서도 복음이 나오게 하시는 겁니다. 영어 쓴다고 히브리 어 쓴다고 원어 쓴다고 언어라 할 수 없죠. 원어 쓴다고 거기서 복음이 나오는 게 아니에요. 한국말을 통해서 하는 거예요. 왜 언어와 뭐가 결합되기 때문에? 계시가 교차하는 내 신체가 언어를 바라기 때문에 그게 바로 하나님의 복음이 나오도록 하는 겁니다.

그 원어를 파고든다고 나오는 게 아니고 우리의 삶에서 계시가 젖어야 돼요. 계시가 투과하죠. 또 뭐가 투과한다? 짐승의 달콤한 돈과 우리가 육적으로 땅기는 것들이 통과하죠. 통과, 통과, 통과하면서 언어가 되면 그게 뭐다? 우리를 통해서 보여주는 복음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주님께서 항상 도금하듯이 우리는 푹 젖어요. ‘주여,’ 하고 기도하다 보면 세상이 좋다고 거기 푹 빠지고 또 죄 있다고 잘못했다고 죽 잡아당기고, 왜냐 하면 사람은 맛있는 거, 그리고 멋있는 거, 잘되는 거 한번 맛보게 되면 그게 나중에 떨어질 때 그렇게 아쉬워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지, 이게 무슨 사는 기고? 이렇게 사니 뭐 하노? 그때 잘나갈 때 그게 진솔한 내 모습이지, 그게 밀물처럼 빠지고 나면 이건 뭐 차라리 잘나가는 게 없는 게 좋아요. 왜 한번 잘나가는 걸 맛보고 난 뒤에 회사 부도나고 난 뒤에 이 모양 이 꼴이란, 이건 거지도 아니고, 왜, 방금 맛을 봤으니까. 뭐가 잘나가는지를 아니까.

이게 바로 한국말을 쓰든지 영어를 쓰든지 관계없이 그게 바로 복음이 되는 겁니다. 복음은 그걸 쉽게 말해서 복음은 체험 화 될 때만 복음이 복음으로 나와요. 체험 화 될 때! 그래서 제일 지금 복음이 체험 화 안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성경에 보면 니가 범죄 했다고 나오잖아요. 이게 운명적으로 범죄 한 게 있어요. 우리가 지은 죄 말고 사소한 과속 이런 거 말고 이건 빼도 박도 못하게 운명적으로 지은 범죄에 대해서는 성령이 임하지 아니하면 체험 화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아담이 타락했다. ‘내가 아담 아닌데 몰라.’ 이러면 안 돼요. 우리가 그 아담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아담이 타락했으면 우리도 타락했다는 것이 성경에 나오잖아요. 타락했다는 말이 성경에 안 나오지만 우리가 범죄 했다고 나오잖아요. 범죄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뭐냐 시편 51편 4절에 수용을 했잖아요. “내가 주께만 범죄 했다.” 주께만 범죄 했기 때문에 사람한테 죄 졌다 하면 돼요? 안 돼요?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자신이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에 마귀가 통과하기 때문에 자꾸 사람한테 미안해하는 거예요. ‘친구야 니 돈 떼먹어서 미안해.’ 사람한테는 범죄라는 게 안 됩니다. 왜 니나 내나 똑같은 인간인데 범죄 안 되죠. 생각해 보세요. 나는 그 사람을 뺨을 두 대 때려놓고 ‘미안하다.’하는데 그 사람은 뺨을 맞는 순간 하나님이여, 왜 내가  뺨 맞을 짓을 안했는데 왜 뺨 맞습니까? 라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자, 하나님께 원망한 죄가 큽니까? 내가 뺨  두 번 때린 게 셉니까? 둘 다 검은 새에요. 그 검은 새가 차이가 없어요. 먹지는 뭣이 깔려도 먹지는 무조건 검어요. 뺨 맞으면서 주께 원망한 죄도 만만치 않아요. 

사람은 사람에게 범죄 할 수가 없어요. 범죄 한 때가 없는데 뭐가 범죄인데. 주님 앞에만 범죄 했는데 뭐가 범죄인데.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지. 내가 했는데 누가 때리겠어. 이러고 있는데. 내가 했는데 누가 바람피우겠어. 이러고 있는데. 니도 바람피우면 되지.

지난주일 낮에 신명기 설교 했잖아요. 하면서 진땀이 났죠. 제가 진땀이 안 날 수 있습니까? 왜, 신명기 그대로 하는 거예요. 여성의 가치는 완전히 박살나 버렸잖아요. 그래도 여성 편을 들을 수가 없죠. 성경에 나오니까. 계명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가치를 위해서 주는 게 아니고 우리는 왜 태어나자마자 왜 죽어야 하는가,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율법이 있다 했잖아요. 분명히 그런 이야기했죠.

인간은 상대방에게 범죄 했다 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당신한테 범죄 했습니다.‘라고 한 걸로 자기 범죄를 그걸로 스톱시키는 이것이 마귀의 장난 이예요. 내가 당신한테는 범죄 했지만 당신은 범죄 했다는 걸 고백함으로서 주께는 범죄 안 한 게 되고 싶어 하는 요 심보가 악마가 심어준 심보예요. 어쨌든 저쨌든 간에 주님 앞에는 약간의 정당성을 남기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반성했잖아요. 내가 회개했잖아요.‘ 이러고 싶은 거예요. 차라리 그럴 것 같으면 니가 사람한테 잘못했다 하지 마. 차라리 그럴 것 같으면.

다윗이 밧세바와 애를 낳죠. 애 이름이 뭡니까? 아닙니다. 처음에 간통해서 나은 애는 이름도 없어요. 이름도 없이 죽어요. 애가 죽었을 때 다윗은 입 싹 닦고 맨 정신 됩니다. 왜, 주께만 범죄 했기 때문에. 그 애한테는 밧세바는 범죄 하지 않았어요. 다윗이 비로소 복음을 안 것이 그 순간입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 했다는 거. 내가 어떤 인간한테는 범죄 할 수가 없다는 것, 하고 싶어도 범죄를 못 한다는 것, 저 사람에게 사기 친 것은 주께서 시켜서 한 건데, 그것은 주께서 시켜서 한 것이라 정당하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처음부터 주께만 범죄 해 왔던 존재인 것을 내 사기를 통해서 다시 죄의 원천이 주께만 성립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언약 적으로만 범죄가 성립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이게 바로 몸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복음의 투사입니다. 복음이 성령을 통해서 투사하게 되면 나는 누구한테도 범죄 하지 않고 주께만 범죄 한 거예요. 그래서 다윗은 밧세바를 자기 아내로 삼을 수 있던 겁니다. ‘그래 욕해라. 나는 이 여자를 사랑한다. 왜, 나의 범죄 함을 보일 수 있는 증거기 때문에. 다른 사람 같으면 몰래 감춰 두고 일주일에 한번 만나고 이러는 게 아니고, 공개적으로!

그리고 다윗이 우리야를 위해서 기념비 안 세웠습니다. 우리야는 지 죄 때문에 죽은 거예요. 지금 우리야는 날 때부터 죄인이 죽어야 되기 때문에 죽은 거예요. 미필적 고의에 의해서 죽인 게 아닙니다. 내가 죽인 게 아니고 그냥 지가 알아서 죽은 거예요. 다만 다윗은 죽인 게 잘했다는 게 아니라 내가 주께만 범죄 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야가 동원된 겁니다. 참, 뻔뻔스럽죠.

모든 우리의 행동이 정당화 된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도 다 그 죄는 주님한테 꽂힌다는 사실, 십자가로 직결된다는 사실을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우린 그만큼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초등학교 운동회 할 때 이런 게 있잖아요. 운동회도 그렇고 또는 놀이동산에 옛날 구닥다리 놀이동산에 이런 게 있잖아요. 이렇게 돼서 빙빙 돌면 무섭다고 악,! 악, 고함지르면서도 또 타고 싶은 거 있잖아요. 모든 것들이 전부 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스도의 영광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모아져요. 십자가가 복음 이예요. 부활이 복음이 아니고.

다른 사이트 보세요. 이 근호 신앙의 문제점 보세요. 이 근호는 십자가에 멈춰 있고 부활은 안 나간다고 그런 소리 하는 거거든요. 부활이 부활의 능력이 아니고 십자가예요. 부활이라 하는 것은 십자가를 앞장세우는 능력을 부활이라 해요. 부활이 나오는 게 아니고 십자가 나오면 그게 부활 쪽에서 밀어줘서 십자가가 나온 거예요.

십자가에 꽂히기 때문에 모든 우리의 행동들은 누구를 만나고 누구를 사기치고 어떻게 하든지 간에 전부 다 주님이 왜 죽어야 되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다니엘이 착합니까? 다니엘이 착할 것 같으면 다니엘은 영생 얻어야 돼요. 다니엘은 늙어서 그 시대에 죽었어요. 그건 교체 되는 육체로서의 역할이 다 끝난 거예요. 네 육체는 너로 끝나고 다음 육체는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리스도는 범죄 하지 않은 죄인이거든요. 그렇죠? 예수님은 범죄 하지 않은 죄인입니다. 범죄 하지 않은 죄인이 그걸 버티는 거예요. 범죄는 안 했는데 죄 값은 다 받아요.

참 이런 말이 설명하기 어려운 게 ‘목사님, 영생은 어떻게 얻습니까?’ ‘예수 믿으면 얻습니다.’ 성경대로 이렇게 하잖아요. 그럼 고통이라는 게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고통! 내가 만일 예수님이라면 ‘자, 나 여기 있다. 나를 믿어라.’ ‘믿습니다.’ 간단하잖아요. 무슨 고통이 들어갑니까? 예수님께서 왜 찡그리고 왜 십자가에 피 흪리고 왜 피가 들어갑니까? 내가 하나님인데, 신약에 보세요. 하나님 아들이잖아요.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했잖아요. 그러면 ‘나 아들이다.’ ‘예’ ‘영생을 믿어라.’ ‘예’ 영생, 뭐가 어려워요? 아들 간단하잖아요. 그런데 왜 우시고 왜 고통당하십니까?

그런 식으로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닌데 어느 터널로 들어가야 돼요? 주님의 고통에 참여해야 돼요. 성령께서 주님의 쓴 잔에 우리를 이끄시는 겁니다. 이끌어 버리면 고통의 유발자가 누구냐 하면 내가 주님 때문에 고통당한다고 화를 내는 내가 주님의 고통의 유발자예요.

그래서 주님에게 고통을 유발하려면 우리가 주님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경험 속에 들어가 줘야 돼요. 세상 적으로 계속해서 세상 것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주님 안 믿습니다. 주님은 그냥 걸쳐놓죠.

제가 부산강의 할 때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사람들이 종교생활 하는 이유는 이게 진짜 깨지지 말아야 할 것을 안 깨지기 위해서 깨져도 상관없는 것을 앞장세우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이 우리를 앞장세운 것은 진짜 나는 안 다치고 내 대신 당신이 다 다치라고, 당신이 깨지든 말든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진짜 지키고 싶은 내 자존심과 내 위신과 명예는 곱게 보호하기 위해서 당신은 앞에 문지기로 혼나보라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 위치가 바뀌어야 돼요. 우리가 깨지고 우리가 다 얻어맞아야 되고 주님의 복음은 고이 간직해야 돼요. 우리가 레위지파잖아요. 레위지파 하는 일이 뭡니까? 저희끼리 땅 따먹고 족구 하는 게 레위지파가 하는 일이 아니잖아요. 레위지파는 빙 둘러서 뭐를 지킵니까? 법궤를 지키잖아요. 24장로가 어린양의 보좌를 둘러서 있죠. 천사들이 사자, 사람, 독수리들이 안에 있는 인자 같은 일을 보호하잖아요. 우리는 깨져도 주님은 영원해야 되잖아요. 그게 천국구조라면 천국 갈 생각하지 말고 지금부터 천국구조가 이미 짜여 진 사람만 천국 가게 됩니다.

이 땅에 살면서 나는 내 자존심 지키려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위해서 우리는 믿어져야 돼요. 주님이여 문지기로 있는 게 좋사오니, 고런 서열과 고런 배치가 이 땅에서부터 이미 천국은 시작되는 겁니다.

오늘 유튜브 동영상 첫 번째 강의가 그거예요. 천국은 오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된 거예요. 죄가 있는 곳에만 천국이 이루어지지 죄가 없는 곳에는 천국도 없어요. 짐승이 있는 곳에 다니엘 세 친구가 등장하는 것이지, 짐승도 없는데 다니엘 세 친구가 놀러 가려고 짐승의 굴에 들어갑니까? 취미입니까? 어디 뜨거운 거 없는가? 자기가 진흙도 아니고 도자기 될 것도 아닌데 풀무 불에 왜 들어갑니까? 자기가 도기 굽는 것도 아닌데.

짐승이 있는 곳을 만들어 놓고 짐승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거기서 다니엘 세 친구를, 천국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주님은 짐승이 있는 곳에 계시지, 짐승이 없는 곳에 주님은 없어요. 주님이 나타났다는 말은 니 주변에 짐승 있다 그런 뜻 이예요.

그려서 그걸 제가 여기서 어렵게 이야기해서 교차 대비 구조라. 교차 되는 구조, 서로 이질적인 것이 교차 되는 구조가 뭐다? 우리가 매일같이 늙어가고 있는 이 신체라고 했어요. 왜, 우리의 신체는 어디 영향을 받는다 했습니까? 주변의 세속과 세상에 대해서 그렇게 우리는 왠지 정이 가요. 왠지 그렇게 세상이 좋아. 예수 잘 믿는 부인보다도 이쁜 여자가 좋아. 왠지 그래. 이유는 없어. 복음 잘 믿는 남편보다도 장 동건이가 더 좋아. 돈 되고 키 되고 인물 되고 성격대로 살고. 한번 살아봤으면. 200평 넘는 집에서.

특히 남자들은 차를 탐을 내요. 저 차 한번 타 봤으면. 저는 BMW 타봤습니다. 내 차하고 차이를 모르겠어요. 12년 된 차하고 차이를 못 느끼는데.ㅎ 왠지 좋아요. 그게 좋은데도 우리는 어디 간다? 우리의 배치 구조는 어디다? 주님을 모시고 있는 이 구조가 웬 구조입니까? 천국을 그런 식으로 주께서는 이렇게 만들어 내시는 겁니다.

그것이 227페이지 밑에까지 했어요. 밑에서 두 번째 줄 봅시다. 『보편화된 의사소통 세계 형성을 위해서』이제 알겠죠? 아까 세상 짐승의 나라를 다들 좋아하잖아요. 그걸 가지고 여기서 뭐라 한다? 보편화된 의사소통 세계형성이라 한 거예요. 보편화된 의사소통, 여기 의사소통이 들어가야 돼요. 통하니까.『처분 가능한 의미작용의 법칙이 확립되는데』이건 또 뭔 뜻입니까? 처분 가능하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우리가 서로 잘 아는 세상, 백화점에 신상품 나왔다. 어느 배우가 화장품을 발랐는데 예뻐진다. 이런 게 쏙쏙 들어온다 말이죠. 이걸 우리가 납득을 하는 걸 처분가능하다. 왜, 나도 돈만 있으면 그걸 구입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천국의 영생은 돈 가지고 흥정이 됩니까? 안 됩니까? 그건 처분 불가능성 이예요. 예수님이 주신 것은 전부 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내 것으로 삼을 수 없어요. 오히려 주님이 내 것을 가져가서 처분 가능한 것을 가져가서 주님이 가져갔다 하면 처분 불가능한 것이 돼서 우리한테 줘 버려요. 복음은 내가 쥘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복음은 주님께서 가져가서 우리에게 제공해 버리면 우리는 복음을 내 능력으로 유지할 수가 없어요. 그냥 복음에 꽂혀야 되지 내가 복음을 관리할 입장이 못 됩니다.

‘오늘 아침에 은혜 받은 거 저녁까지 관리해야지.‘ 이거 안 돼요. 복음은 내 관리소관이 아닙니다. 왜, 그걸 처분 불가능이라 하죠. 평소에 우리가 애굽 같은 세상에 사는 것은 전부 다 내가 알아서 다 할 수 있는 거예요.

한번 봅시다. 여기 물이 있잖아요. 내가 손을 들어서 물을 마셨습니다. 처분 가능하죠. 그런데 생각을 조금만 해버리면 ‘내가 그때 왜 목말랐을까? 내가 왜 마셨을까? 주께서 힘주셨구나.’ 이러면 뭡니까? 처분 가능한 것이 물 마신 것이 아니고, 처분 불가능한 분이 나를 가지고 물을 마시게 한 거예요.

이걸 가지고 그 뒤에 227페이지 제일 밑에 ‘수동적 자율성’이라 합니다. 말도 참 어렵게 써요. 그냥 피동성이라 하면 되는데 왜 수동적 자율성이냐 하면, 피동이나 수동이나 마찬가지죠. 자동은 아니니까. 뭔가 자율적인 것처럼 오해를 유발할 수밖에 없는 주께서 인도하심, 주께서 인도함을 느끼는 게 아니고 뭐든지 내가 알아서 했습니다. 하고 하는데 여기서 뭐가 투시되면? 하나님의 복음이 투시되면 ‘주께서 하게 하셨군요.’라고 재해석되는 그런 신체의 습성을 수동적 자율성이라 해요.

굉장히 그러니까 우리는 자율성이 있고 자유의지가 있죠. 그런데 그게 수동적이고 피동적이라. 능동적으로 하는 게 아니고. 이거 하나, 하나 다 설명하려고 보면 얼마나 어려운데 그래서 간단하게 함축돼 있어서 이렇게 설명할 때는 길게 하는 거예요.

228페이지 봅시다. 이런 표현을 즐깁시다. 『신체는, 새로운 언어의 힘을 구사하는 중력장으로 행세한다.』 중력장이라 하는 것은 전자기학에서 나온 건데 이게 뭐냐 하면 가정에서 S극, N극 나두면 여기 쇳가루가 지가 알아서 어떻게 됩니까? 무늬를 만들어 내죠. 그럴 때 우리는 이 쇳가루가 없었으면 이게 그냥 텅 빈 공간인데, 힘이 있는 줄 몰랐는데 쇳가루를 풀어놓으니까 이게 요런 식으로 되는 거예요. 아! 그러니까 요게 힘이 요런 식으로, 눈에는 안 보이지만 표상이란 걸 던져주니까 이게 보이는 거죠.

그래서 구약의 율법은 뭡니까? 표상이라는 거예요. 어떤 힘이 있긴 있는데 힘이 어떤 식인지는 모르는데 율법을 던져 주니까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죽여라.’ 이 말은 하나님의 안식일 법은 니가 듣든지 안 듣든지 지금 실시하고 있다. 니가 지키든 안 지키든지 니 자유인데 어쨌든 간에 죽이는 것은 죽인다는 거. 그런 율법의 자율성, 법의 힘의 중력장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중력장 안에서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죽이기 위해서 율법을 줬기 때문에, 죄를 더하기 위해서. 따라서 율법의 관계는 우리가 날 때부터 율법의 관계에 속한 것은 우리는 죽어야 마땅한 관계라는 것을 율법적 차원에서 깨닫게 하는 거예요. 죄라는 것을 타인과 우리끼리가 아니라 율법적 관계에서 죄를 해버리면 우리 죄는 지옥 가야 될 죄를 짓고 있다는 거, 주께만 범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해놓고 그 율법이 죽든지 우리가 죽든지 둘 중에 죽어야 하는데 누가 죽어요? 율법은 사는데 누가 죽어요? 우리는 율법대로 죽고 죽어버리면 이 결혼관계는 깨어지고 우리는 누구의 신부로서? 죽은 자안에서 살려냈던 그분의 신부로서 가담이 되면 그 안에 율법과 똑같은 관계로서 우리는 영생의 장에 우리가 놓이게 됩니다. 그러니 이게 천국 이예요. 영생이 흐르는 장, 영역, 필드에 우리가 놓여 있으니까 우리가 하는 행동이 복음을 증거 하는 행동으로 그렇게 하나님께서 그런 상태로!

상태란 말을 했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게 뭡니까?’ 할 때 ‘이게 무엇입니까?’ 묻는 질문이 되죠. ‘이게 무엇입니까?’ 하면 ‘이건 물이다.’ 가 되죠. ‘이건 무슨 상태입니까?' 물으면 ’이게 반쯤 있는 상태다.‘ 이렇게 하잖아요. 우리가 실제로 물체 같으면 ’이것이 무엇인가?‘ 가 되는데 하나님에 대해서 물을 때는 ’이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수 없어요.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답변한 모든 것은 인간의 언어를 가지고 하기 때문에 그 언어 해석의 한계가 있어요.

우리는 우리가 의사소통하는 세계, 아까 나왔죠? 보편화된 의사소통 세계에서의 언어라 하는 것은 이미 우리가 언어를 알고 있다고 인식하고 들어가기 때문에 주님이 그걸 표상으로 사용할 때는 표상 뒤에 있는 주님의 계시의 의미를 우리가 파악할 길이 없어요.

그런데 이것이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에 4생물이 무엇입니까? 하지 말고 4생물이 어떤 상태로 있습니까? 이렇게 해야죠. 4생물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모르는데, 왜 4생물은 이 세상에 없잖아요. 4생물이 동물원에 있습니까? 없잖아요. 없는데 4생물이란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언어가 있는 이 세상은 그게 표상이니까 배후에 4생물적인 요소가 있잖아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면 안 되고 그것이 어떤 상태로 우리를 지금 지배합니까? 그건 바로 이 세상 적으로 우리가 좋아하고 우리가 흠모하고 우리가 성경보다도 으윽, 하고 치우고 달려갈 만한 그런 요소들로 우리 육체가 땅길 수밖에 없는 것으로 우리에게 그런 장이 형성되죠.

그러니 주께서 함께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벌써 딸려갑니다. 그런데 아까 관통하기를 구조, 그런 것도 오고 또 뭐가 오고? 주의 십자가도 오니까 ‘아! 내가 죄인이구나.’ 다시 한 번 십자가에서 영생 얻는다는 것을 이미 영생 받았다는 사실을,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을 다시 한 번 감사히 여기는 겁니다.

설명 들으니까 신앙생활 간단하죠? 굉장히 간단하죠. 복잡한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무엇을 해야 되는가, 자꾸 나서니까 이게 벌써 실타래가 꼬여서 지가 풀지도 못해. 지가 수갑 세 개, 네 개를 막 채우는 거예요. 오늘은 이거 채우고 내일은 저거 채우고 지가 수갑을 찰칵 다 채우니까 하지도 못하면서 하려고 하니까 되지도 않는 거예요.

그 다음에 228페이지, 『파롤에서 랑그로의 전환이다.』이건 또 무슨 프랑스 말도 못하는데, 파롤이라 하는 것은 음성으로 나오는 언어를 파롤이라 하고 랑그로라 하는 것은 언어의 규칙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못 배운 할머니들은 말을 함부로, 경상도 말로 속된 말로 지낀다. 쌔래 지낀다,는 말이 있어요. 입에 나오는 대로 하는 사람을, 욕은 아닌데 뭐라고 씨브리쌌노. 욕이 아니거든요. 뭐라고 지껄이느냐, 고게 파롤이고, 그 다음에 주어 + 술어 + 목적어, 딱딱 규칙을 맞추는 것, 요걸 랑그르, 언어의 규칙이라 하는 겁니다. 이건 뭐냐 하면 성질대로 튀어나와도 그건 무질서 하다면 그건 질서 맞춰서 규칙으로 전환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것은 『스스로 역사 생성의 주체 자 노릇을 자처하게 된다.』이 말은 뭐냐 하면 이 말은 주님이 그렇게 한다는 말이 아니고 이 말은 인간 세계에서 서로서로 말들을 인간 세상 짐승은 그걸 규칙을 만들어서 하는데 규칙을 만들면 법의 제정자가 있어야 되겠죠. 이게 표준말입니다. 바른말 고운 말, 그건 누가 합니까? 그건 어떤 교사가 하는 게 아니고 국가에서 하는 거죠.

그러니까 자연적으로 인간은 내가 만약 어떤 체계를 잡으려고 한 순간 우리는 나를 지배할 국가를 내가 요청하는 셈이 되는데 마귀가, 짐승이 기다렸다는 듯이 ‘내가 해줄게.’ 하고 나설 때 우리는 그 국가에 대해서 경외하면서 눈물을 흘리죠. 나라와 겨레에 충성을 다하며 특히 올림픽 나가서 애국가 부를 때 눈물이 나죠. 금메달 따면 뭐합니까? 천국을 못 가는데. 손 연재 금메달 3개 따도 천국 못가잖아요. 그래도 우리 육체는 천국은 못 가도 좋다, 나는 금메달 따고 싶다. 이게 바로 우리는 너무나도 이 세상과 너무도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어요. 아주 친밀한 관계에요. 호출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불러주기만 원하는 거예요. 그놈의 인기가 뭔지.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력으로 예수를 사랑한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228페이지 계속해서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스가랴 봅시다. 스가랴 1장 18절 “내가 눈을 들어 본즉 네 뿔이 보이기로” 했죠. 뿔이 무엇입니까? 할 때 이들은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헤친 뿔이죠. 자, 보세요. 유다와 예루살렘이 뭐길래 고 조그마한 동네거든요. 그게 뭔데 하나님의 계시가 딴 데 알래스카나 시베리아에 금강석이나 캐고 사우디아라비아 석유 이야기나 하고 예루살렘 석유 안 나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계시를 거기다 쏟아 붓습니까?

거기서 장차 뭐가 나와요? 메시아가 일을 벌려요. 메시아가 일을 벌리는데 주변에서는 그 메시아가 나오는 것을 질식시키고 못 나오도록 막는 거예요. 메시아가 와서 십자가 피만 흘리면 이 세상에 영생을 받는 사람이 등장해요. 피가 피답게 하기 위해서 나눠주거든요.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나눠주면 영생 못 얻을 자가 뭐를 얻습니까?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용서를 받아서 영생을 얻어버려요.

그러면 이 세상이 마귀 콘크리트인데 이 모든 전략이 차질이 일어납니다. 이거 원자 발전소 중지해야 돼요. 이거 불량 부속품 들어갔어요. 성도는 불량품이거든요. 이 세상의 구성에서.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지금 이스라엘과 유다나라는 국가입니다. 국가는 원해요. 국가가 있을 때 우리는 안전하게 보호를 받는다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 국가를 깨버릴 때 우리는 안전빵이니까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이 보우하사, 이게 없잖아요. 없는데 이스라엘을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하나님께서 일부러 뿔을 통해서 들이박게 하는 거예요. 들이박게 되면 뚜껑 날라 가 버리죠. 그러면 우리는 허약함이 노출되죠. 그 노출되는 허약함, 그리고 우리가 죄로 노출된 그 노출된 그 중앙지점이 뭐냐, 기다렸다는 듯이 영생이 석유 올라오듯이 분출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세상이여 나를 좀 덮어주시고 세상이여 나의 수치를 가려 주소서.’라고 할 필요가 없다 이 말이죠. 하나님이 힘만 주시면 나도 예수 믿으면서도 남한테 기 안 죽고 사는데 이렇게 세상적인 뚜껑을 달라고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럴 때마다 뿔이 와서 또 받아버려요. 우리가 멋있게 보이려는데 뿔이 받아버릴 때 뚜껑이 날라 버리면 노출되죠.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복음 앞에선, 십자가 앞에선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미 우리는 수치를, 복음의 피는 그렇게 수치스럽게 살 수밖에 없는 식으로 남에게 노출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 부끄러움은 ‘그래, 그래, 너희들이 나를 부끄럽다고 봐? 그래, 봐, 봐.’ 하지만 우리는 복음 때문에 우리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한다는 그 복음이 살아남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 내가 끝으로 말씀드리는 것은 다니엘은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참 부끄럽죠. 맨날 승진해도 사자 굴에 들어가고 위태롭고 불안정해 보이긴 하지만 복음을 안 다니엘 세 친구는 어떤 사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절대로 놀라거나 슬퍼하거나 노하지 않는, 부끄러워하지 않는 주께서 알아서 복음이 터져 나오도록 알아서 오늘도 인도하신다고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다음에는 포로기간의 의미 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니엘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똑같은 처지, 짐승이란 콘크리트, 우리는 그걸 오히려 더 좋아하고 주님보다 더 그리워하는 우리의 모습들, 주여, 십자가 피가 관통하면서, 지나가면서 우리가 이미 영생 얻은 사람으로 다루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