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사항

70이레논문7-성전의 인격화

아빠와 함께 2023. 7. 7. 16:23

가락교회-70이레 논문(성전의 인격화)130502-19강a -이 근호 목사

제 19강a

223페이지 위에 성전 나오는데 지난 시간에 그 성전은 주의 이름과 관련돼 있다 했고, 주의 이름은 전쟁하는 하나님, 전쟁하는 하나님이니까 전쟁이란 적이 있어야 되니까 적은 있는데 그 적은 어떻게 나오느냐, 성전을 통해서 적이 나오게 돼 있습니다.

그러면 성전은 어떤 구조로 돼 있기에 그게 하나님의 적을 적으로서 보일 수 있는 그러한 기능을 할 수 있느냐?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나는 할 수 있다.’라는 것에서 ‘나는 할 수 있다.’에서 ‘나는 할 수 없다.’가 어떻게 만들어지죠?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에서 ‘나는 할 수 없다.’가 나온다면 그 할 수 있다는 생각 속에서 할 수 없다가 나올 수 없죠? 나는 할 수 있지만 지금은 안 되지만 나중에 언젠가는 할 게, 지금은 안 돼, 이 정도는 되지만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 하다가 ‘아! 나는 뭐든지 안 돼.’ 이런 고백이 인간의 능력으로 나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걸 어려운 말로 능력은 한계를 대면할 수 없다. 라는 말을 해요. 이 말은 우리가 자기 한계를 안다. 그런 뜻은 아니에요. 내가 한계를 안다는 뜻이 아니고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이 스스로 ‘나 능력 아니야.’라고 포기할 수는 없다 이 말이죠. 왜냐 하면 능력은 무대포로 그냥 하는 게 능력이기 때문에 그래야 능력이거든요. ‘할 수 있다.‘ 이게 능력인데 할 수 없다면 할 수 없죠.

마찬가지로 죽음이라는 것이 ‘너 죽일 거야.’ 하다가 ‘나 너 안 죽일래.’ 이런 게 죽음에서 안 나와요. 왜냐 하면 그건 죽음 값도 못하는 거거든요. 어떤 거북이든지 뭐가 죽을 때 죽은 자체가 ‘너는 이제 내 안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거야.’ 하다가 ‘안 죽일게, 안 죽일게.’ 이러면 그건 온전한 죽음이라고 할 수 없죠. 여자가 행동을 곱게 한다. 여자니까. 그런데 여자가 왈가닥하게 나온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남자입니까? 잠시 여자로서 왈가닥했을 뿐이지 여자는 계속 여자잖아요.

동일한 성질에서 반대되는 게 안 나온다는 이야기를 지금 제가 하고 있는 겁니다. 죽음이 스스로 죽음을 철회할 수가 없어요. ‘너 죄졌구나. 난 죽음이다. 죄 진 사람에게는 죽음 밖에 없어. 죽을게.’ 하다가 ‘아이쿠, 너무 불쌍해서 내가 안 죽을게.’ 이런 것은 죽음이란 데서 나올 수 없어요.

악마가 ‘야, 너 나와 지옥 가. 어! 그런데 내가 보니까 너 지옥 가면 내가 가슴이 아파 안 되겠어. 그래, 그래 너는 놓아줄게. 너는 내 품에서 떠나서 천국 가.’라고 악마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그게 천사지 악마가 아니잖아요. 그렇잖아요. 악마는 줄곧 악마이어야 돼요. 악마한테 동정심을 바란다는 이건 전혀 악마답지가 않은 겁니다. 정해진 성질은 그대로 가는 거예요. 정해진 성질 안에서 반대되는 성질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전은 바로 반대되는 성격이 같이 나오는 이것이 성전입니다. 성전은 상반되는 두 개의 성질이 유일하게 나오는 곳이 성전입니다. 상반되는 성질! 어렵게 할 거 없이 쉽게 합시다. 성전은 그리스도 몸이잖아요. 그리스도 몸에서 사랑과 심판, 축복과 저주가 상반되잖아요. 상반되는 것이 유일하게 나오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기능 이예요.

오른쪽 양은 천국 가잖아요. 천국 보내시는 그 주님께서 왼쪽에 있는 염소를 어디 보냅니까? 지옥 보내잖아요. 이 무슨 심보입니까? 이런 심보가 다 있어요? 지금 우리가 인간으로서는 이해가 안 돼요. 자식이 둘 있는데 하나는 밉고 하나는 좋아한다. 그래도 내 자식이라. 미워한다는 것은 얘 이뻐한다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미워하는 것이지, 다른 자식보다 더 미워한다는 뜻은 아니거든요. 왜, 그 애 하나를 사랑했던 그 사랑의 마음이 부모한테 있기 때문에 얘한테 사랑의 마음이 약간 적게 간다는 것뿐이지, 전혀 사랑이 안 간다는 말은 아닙니다. ‘니가 형 닮아서 공부 좀 해라.’ 이 말은 뭔 뜻입니까? ‘니도 형처럼 공부하면 언제든지 사랑할 용의가 돼 있다.’ 왜, 나는 부모니까. 이게 인간이다 이 말이죠.

인간은 절대로 상반 된 게 나올 수가 없어요. 인간이니까 그냥 가는 겁니다. 악마도 마찬가지, 악마도 ‘아휴, 내가 너하고 지옥 같이 가려하니까 내가 니 형편보니 안 됐다. 일찍이 조실부모하고 어렵게 사는 거 보니까, 그래 이 땅에서 고생했는데 또 지옥가면 안 되니까 니는 천국으로 가게 봐줄게.’ 뭐 이런 악마 없습니다.

전에 이야기했던가요? 악마가 노리는 건 하나밖에 없다고. 바로 상번돼서 나오는 그리스도 성전, 구약에서는 성전이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못 쳐다보게 만드는 것, 이건 악마의 일관된 겁니다. 

이 세상에는 청색이면 청색이고 빨강색이면 빨강색이지, 뭐가 같은 크레용에서 두 가지 색깔이 나오는 것은 없어요. 같은 색깔에서 두 가지 색깔, 그것도 비스무리한 색깔이 아니고 서로 상반되는 색깔이 나온다는 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지난 주 가락강의와 지지난 강의가 공통점이 있었어요. 강의 중에 어머니 잃어버렸다는 전화가 왔어요. 오늘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자, 그걸 느끼면서 뭐냐 하면 지금 내가 어머니 잃어버려서 걱정이 되는 거예요. 걱정이 되면서 ‘여러분,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아무 걱정 없습니다. 이것이 동일한 개체에서는 나올 수가 없어요. 그런 이야기하면서도 빨리 끝나고 전화해 봐야지. 지금 당장 갈 수도 없고 가봐야 차도 없고 걱정하면서 하니까 이것이 첫째 시간은 풀이 팍 죽어 있다가 둘째 시간에 찾았다 하니까 기가 살아서 이건 인간은 자기를 숨길 수가 없습니다. 숨기면 자기가 자기를 기만한다는 걸 못 숨기죠.

내가 나를 속인다는 것을 누구는 안속아 넘어갑니까? 본인은 안속아 넘어가는 거예요. 내가 나를 속이고 있다. 왜 남들 보이기 위해서. 그런데 이게 억지다. 하는 본인은 도저히 속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상반된 것이 성전에서, 또는 그리스도에서 나왔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한쪽 면만 골라잡아서 선별해서 믿게 돼 있습니다. 몰랐죠? 자기 마음에 드는 것, 예수님의 어떤 면의 마음에 드는 그것만 반쪽만 취하는데 이게 피자 판 같으면 이게 이해가 돼요. 피자 판 같은 경우 6조각으로 나누는데 한 조각 먹었는데 1, 2, 3, 4, 5, 6인데 한 조각 먹었는데 배부르다. 그러면 2조각 안 먹어도 같은 피자 판이니까 이(2번) 맛이나, 이(3번) 맛이나 안 먹어도 맛은 같으니까 안 먹어봐도 다 아는 거예요. 전에 이야기했듯이 여자들이 이 남자, 저 남자 안 사귀는 이유가 한 남자 알면 남자 다 알아버렸어요. 이처럼 하나 먹어보면 다 아니까 필요 없는데.

그리스도는 상반되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이거 알았으면 그것이 2번, 3번 영역에도 내가 아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피자 판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가? 피자 판이 아니고 모형은 피자인데 안에 피자가 없는 거예요. 피자는 없고 피자 틀만 있고 여섯 개의 피자 틀만 있는 거예요. 이게 약간 억지가 섞인 것 같지만 이해를 위해서 억지로 써야 되겠어요. 우리가 예수님 할 때 예수님이 이름으로 들어오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을 오해했잖아요. 오해했으니까 이건 죄죠? 주님을 제대로 모르고 나는 이런 면이 좋아. 해서 예수 믿는다 했잖아요. 그 믿는 것이 일부 들어오게 됩니다. 들어오면 이걸 구워버려요. 예수님으로! 구워버리면 비로소 예수님을 드러내는 계기가 돼요.

예수님은 우리가 ‘죄인이지? 저리 가.’ 가 아니라 ‘니가 나를 이런 식으로 믿다니, 그런 식으로 나를 믿어? 저리 가.’ 이런 게 아니고 엉터리로 믿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수용합니다. 수용해서 그 수용한 것 가지고 그것 때문에 주님께서 조치를 하셔요. 희생하든지 피를 흘리든지 사랑으로 용서를 하든지 조치를 해버리면 거기서 뽑혀서 나온 것이 주님과 그리스도 몸이라는 피자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원료라. 우리가 밀가루고, 피자고 건포도고 팬이고. 우리는 오해할 수밖에 없고 오해 거리를 재료로 삼아서 진짜 예수님을 드러내니까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은 ‘주여, 나는 주님을 핍박하는 죄인입니다.’라는 그런 고백으로 따끈따끈하게 피자가 맛있게 구워지죠. 천국 가는 피자가. ‘나는 이런 식으로 구원받을 거야.’ 라는 그것도 오해거든요. 그것도 잘못된 거예요.

그런데 막상 주님한테 손에 잡혀서 그런 오해가 왜 오해할 수밖에 없는가를 들통 나는 가운데서 우리는 따끈따끈한 찐빵이 되고 성도가 되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이게 얼마나 따끈따끈합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기 때문에 내가 나한테 실망한다는 것도 분수에 넘어서는 주제넘은 객기에 불과한 거예요. 우리는 원래 실망했어야 돼요. 처음부터 우리 자신에게 실망했어야 되는데 뭐 새삼스럽게 지한테 어깨 잔뜩 힘주고 지가 뭐인 양 까불다가 한다 말이죠. 그냥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따끈따끈한 찐빵입니다.’ 이런 식으로. 그게 바로 천국 가는 자태고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은 거지가 돼서 온 사람, 어떤 사람은 강도 돼서 온 사람, 어떤 사람은 돈 밝히는 세리로 들어온 사람, 어떤 사람은 창녀 돼서 온 사람. 지난주일 낮 설교에 기생 라합 이야기하면서 내가 설교하면서 은혜를 많이 받았어요. 기생 라합이 정탐꾼을 받아들인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느냐는 그 방식을 앞당겨서 기생 라합과 정탐꾼의 만남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준 거예요. 그러니까 기생 라합이 정탐꾼을 받아들이면서 자기는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그게 자기는 주의 일 이예요. 조국을 배신하고 적군을 숨겨주는 것이 얼마나 큰 범죄입니까? 적대적 관계에 있는 적군을 받아들여서 이건 나라 같이 망하라고 동조한 셈이 되니까 이건 보통 범죄가 아니죠.

그런데 그 일을 뭐로 본다? 거기다 거짓말까지 하고. 이게 장차 오실 예수님의 일 이예요. 예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나는 거짓말 안 하고 살고 싶어. 나는 어떤 일에도 거짓말 안 할 거야. 나는 굳건하고 바르게 살 거야.’ 라는 것을 와장창 다 뭉개버리는 그 놀라운 기적. ‘니가 뭔데 거짓말을 안 해. 이게 지 주제도 모르면서 거짓말 안 한다고? 니가 어떤 존재인데도 모르면서 나 거짓말 안 할 거야.’ 평생토록 거짓말 해놓고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거짓말 안 한다고. ‘나 이제부터 다시는 술을 안 마실 거야.’ 맛있는 술 주면 또 어떻게 될지 몰라요.

노래에 다시는 사랑 안 해. 애인 따위는 필요 없어. 이런 인간들의 객기, 오기, 장담. 성경에 보면 아예 맹세하지 마라. 너희들 맹세 안 지켰다고 뭐라 안 하고, 맹세했다고 뭐라 안 하고, 그냥 맹세를 하든지 그냥 들어오면서 주님 안에서는 이것이 다 녹아져 버립니다. 피자 판에 보면 다  치즈고 뭐고 다 녹아서 주님의 심판의 불길에 머리카락이고 뭐고 다 녹아버려요. 뭐 잘난 체 하는 것, 재산, 학력, 인맥 이런 거, 경상도 출신, 전라도 출신, 이런 거  주님 앞에 서면 이게 다 녹아져 버려요. 심지어 남자 다섯 명 사귀어도 그건 아무것도 아니고 다 녹아져 버려요. 이왕 녹을 거 한 열 명 쯤 사귀지.ㅎ

그래서 성전이란 개념이 바로 성전에 대해서 적은 뭡니까? 니 인간들아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해라. 니 독립성을 뭉개지 마라. 니는 니가 원하는 대로 니가 원하기만 하면 니가 원하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어.‘ 이게 바로 하나님의 타고난 원수입니다. 하면 된다. 이게 교회에서 이걸 가르치잖아요. ’여러분들이 원하는 비전은 여러분들이 꿈꾸는 대로 하나님은 여러분의 꿈대로 되게 해주시는 것을 믿습니까?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럴 때 노멘 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물론 십자가마을 사람 같으면 혼자 ‘아니요.’ 손들겠지만 아마 윤 집사님은 그럴 거예요. 이제 노령 연금도 받는데 기댈 것도 없고 바리스타 돼서 스스로 돈도 버는데.

주님의 원수가 있어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제 진짜 어려운데요. 어려운 거 하면 미안한데 성전은 깨져야 진짜 성전이 나와요. 앞에 있는 성전을 그걸 형상이라고 해요. 성전이 형상이거든요. 형상인데 어려운 게 뭐냐 하면 형상은 그냥 형상이 아니고 비 형상에 둘러싸일 때만 형상화가 돼요.

여러분, 벽지 무늬 같은 걸 가만히 지켜보면 거기 보면 온갖 얼굴이 다 나오잖아요. 가만히 지켜보면 예수님도 보이고 부처도 보이고 박 근혜 대통령도 보이고 김정은까지도 다 나와요. 이게 심리적으로 게슈탈트(Gestalat) 심리학이라 하는데 하나를 초점 맞춰버리면 다른 것은 배경이 되어서 그것을 뒤받쳐 줘요. 그러니까 똑같은 그림인데 어떻게 보면 노파로 보이고 어떤 사람은 젊은 사람으로 보이고, 심리적으로 측정하는 게 있죠. 그리고 병에 포도주가 얼마 남았느냐, ‘반병이나 남았네.’ 하거나 ‘반병밖에 안 남았네.’ 하는데 따라서 그 사람이 장차 출세하고 성공하느냐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이게 성경 자체가 그래요. 성경 자체가 뭔가 단어를 던질 때는 개념이 있잖아요. 그 개념은 애매모호해요. 흐릿한데 주변이 또렷하게 우리는 모르는데 쉽게 말해서 이스라엘에 대해서 이스라엘 본인이 이스라엘이 뭔지 몰라요. 그런데 난데없는 주변에 있는 블레셋이란 개들이 멍멍 짖어대는 거예요. 그러니 이스라엘 본인들이 저들이 개같이 왜 짖는지 모르는 거예요. 사무엘상에 나오는 이야긴데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궤를 지고 전쟁에 나갔는데 언약궤를 놓쳐 버렸어요. 언약궤가 있는데 누가 언약궤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느냐 하면 블레셋이 더 언약궤에 반응하는 거예요. ‘저 언약궤를 앞장세우면 우리는 다 죽었다. 우리는 다 죽은 거야. 끝났어. 전쟁 끝났어. 그러니까 이왕 죽는 거 열심히 한번 싸워보자.‘ 이랬더니 이겼어요.

이것은 블레셋이 잘해서 이긴 것이 아니고 원래 언약궤가 언약궤 취지대로 잡아야 될 이스라엘이 잡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이게 뭐하는지도 몰라요. 그리스도의 피를 갖고 있어도 왜 죽었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왜 죽었는지를 모르는데 주변에서 왕왕 짖어대는 거예요. ‘니 복음 안다면서? 그럼 복음 아니까 막 살겠네.’ 주변에서 십자가마을 보고 막 짖어댄다니까요. ‘그래 막 살겠네. 그래 막 살아라. 우리는 막 살지 않겠다.’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우리는 뭐했는데? 막 산다 해서 우리는 전부 다 개판 같이 살았습니까? 아니잖아요. 저쪽에서 개같이, 이리 떼같이 짖어대는 거예요. 그것도 짧은 글 이런 거 보고. 책 같은 건 안 보고.

윤곽, 주변에 있는 어두움의 세력이 먼저 알아보고 짖어대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겁나서 누구한테 의지합니까? 여호와 하나님이나 선지자한테 의지하죠. 이건 뭐냐 하면 귀한 집 애가 큰 저택에 사는데 그 저택에 cctv 열 몇 대 있고 맹견 댓 마리 풀어놓고 거기다 철조망 쳐놓고 전부 다 했는데 도둑놈이 들어올 수도 없어요. 그런데 애가 뒤 쪽에서 우는 거예요. 그래서 엄마가 ‘얘야, 우리 집은 괜찮아.’ 하면서 다독거리잖아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깜짝깜짝 경끼 날 정도로 잘 놀라는 애들 같아요.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 여호와의 지켜주심을 애들 수준 밖에 몰라요. 지가 아는 수준만큼만 자꾸 여호와를 이용해 먹겠다는 식으로만 ‘하나님, 요정도 해주시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해서 여호와 알았다고 은혜 받았다고 바깥에 나가서 놀다가 깨져서 들어와서 ‘엄마, 쟤가 때려요.’ 해서 엄마한테 고자질하고 ‘맞아도 괜찮아. 내 자식이야.’ 그래서 다독거려주고 ‘때치 해줄게.’ 해서 때치 하니까 저쪽은 다 무너지고. 그러니까 ‘야, 역시 내가 똑똑한 모양이다.’ 니가 똑똑한 게 아닌데 또 까불다가 또 터져 와서 ‘아버지’ 하고 울거든요. 이게 사사기거든요.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시느냐 하면 니가 구원받은 것은 니가 의로워서가 아니고 착해서 선해서가 아니라 여호와의 맹세, 언약이죠. 그 언약이 너와 대비하면서, 너와 비교해서 언약으로 구원될 자격도 없는 너를 언약 안에 있는 어떤 분에 의해서 너는 포용이 된 겁니다.

언약 안에 있는 어떤 분은 특징이 뭐냐, 단지 아들이란 이름 때문에, 단지 자기가 택했단 이름 때문에,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건사해주는, 그걸 받아주는 그런 작용이 그 언약 안에 계시는 분이예요. 언약 안에 계시는 분이니까 이건 하나의 점선이죠. 어떤 인물인데 점선, 이 점선을 초창기에는 성전이라는 형상화로 하는 거예요. 형상이니까 껍데기는 성전 건물이죠. 건물이 한 껍데기, 두 껍데기 벗겨가면서 점차로 뭐가 나타나겠습니까? 점선으로 된 인물이 서서히 인격화, 구체화, 인물화 되어가요. 성전이 인격화 되는 거예요.

성전을 헐라. 몇 일만에 짓겠다? 사흘 만에 짓겠다. 이거는 예수님 자신의 몸을 두고 이야기한 것이죠. 그러니 요 건물에서 이렇게 이동하려는데, 이것도 약간 난해하지만, 앞에 인격이 들어있고 바깥에는 건물구조죠. 자, 사람들이 있으면 안에 인물이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왜냐, 사람들이 보는 건물이라 하는 것은 아! 납득이 돼요. 저건 이해돼요. 왜, 자기가 손수 지었으니까.

아까 동영상 두 번째 그런 이야기 했죠. 레위기에 보면 장치가 있어요. 제사 지내는 장치, 방법이 다 있거든요. 그걸 누가 손수 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레위지파 제사장이 그걸 했잖아요. 그들은 그걸 하면서 구원이 주어진다고 생각한 겁니다. 납득이 되는 거예요. 이해가 된다 말이죠. ‘그래, 이거 양 잡고 소 잡으면 참여한 우리 당사자가 구원받는다.’ 이해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건 출애굽기에 보면 이렇게 만들라 하거든요. 만들고 요렇게 하면서 뭐가 다시 뜯겨지느냐 하면 고렇게 제사를 지내고 참여하고 만들던 자도 성전구조 뜯기고 날라 갈 때 같이 날라 가는 겁니다. 성경적인 하나님 방법입니다. 요게 스리랑카입니다. 8층 건물 무너져서 200여명 죽은 것. 그 건물 자체가 곧 인간 덩어리라 하면 돼요. 건물 무너지고 그 안에 갇혀 있는 인간 같이 무너지고.

성전을 지으면서 사람들은 안의 인격을 안 봐요. 왜, 성전은 누가 짓는데요? 본인들이 지었습니다. 예배당에 피아노 바쳤다. 애가 피아노 올라가면 다른 사람은 ‘아이구, 저 애가 왜 장난치나.’ 하지만 피아노 기증한 사람은 환장합니다. 몽둥이 잡고 ‘이 피아노가 어떤 피아노인데 올라가?’ 꽃꽂이 해놓으면 철없는 애들은 꽃 따고 하잖아요. 철없는 애보다 더 철없는 엄마가 ‘얘야, 꽃 따줄까?’ 하면서 꽃을 따준다 이 말이죠. 그런데 꽃꽂이를 하나의 작품으로 보는 플로리스트라 합니까? 작품으로 보는 봉사하는 집사님 눈에는 뭡니까? 지옥 갈 원수로 보죠. 마귀 엄마로 그렇게 본다 이 말이죠.

목사님이 꽃꽂이 할 사람 손드세요. 왜, 이게 납득이 되니까. ‘까짓거 하지 뭐.’ ‘십일조 하세요.’ 수입의 1/10을 하면 되니까, 그런데 그게 십일조가 아니거든요. 십일조는 아무나 못합니다. 십일조 하는 사람이 없어요. 아무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십일조 한 것은 십일조 한 게 아니고 십일조 되게 하셨죠. 왜, 멜기세덱 속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일조를 되게 하신 거지, 십일조 한 게 그 십일조가 그 십일조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십일조 내서 구원받았습니까? 아브라함은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누구 땜에 구원받느냐 하면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는 줄 알아요. 아브라함이 아들 바쳐서 구원받은 게 아닙니다. 아들 바쳐서 구원받을 거 같으면 아들 바칠 사람들 분명히 여러 명 나올 거예요. 딸 밖에 없으면 아들 양자 들여서 아들 죽여 버리죠. 지 구원받는 게 중요한 문제지, 아들 죽는 게 뭐가 중요합니까? 그 정도로 자기가 믿음 있는 걸 보이고 싶어 하거든요.

어제 수요일 날 그런 설교 했잖아요. 언약 안에 다 떨어져 버리면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는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 안을 뜯어보면 거기 지 몸 건강한 거, 지 교회 부흥 되는 거, 잘 먹고 잘 사는 길, 그게 안에 들어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뭐냐 하면 우상이라 했잖아요. 인간은 처음부터 우상이었어요. 왜냐 하면 죄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초월, 두 가지 개념이 있습니다. ① 지배 개념이 있고 ②넘어선다. 신은 인간을 추월한다 할 때 두 가지 개념이 있어요. 하나는 아래 것들을 지배하는 것의 의미의 초월이 있어요. 두 번째는 자기 한계를 뛰어넘는 것, 예를 들면 100미터가 보통 10초라면 100미터를 8초에 뛰는 사람이 나오면 완전히 초월자죠. 10초나 9초76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 이신바예바가 높이뛰기를 할 때 뛰어넘는 것, 뛰어넘는다 할 때 이 ②번은 틀린 거예요. 왜 틀리냐 하면 뭔가 어디서부터 뛰어넘는다는 것은 반드시 그 전의 것을 염두에 두고 뛰어넘는 거잖아요. 무슨 말이냐 하면 당뇨가 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약을 먹고 해서 당뇨에서 나았다. 그러니까 이건 하나님의 은혜다. 이러잖아요. 당뇨 걸렸는데 기도했더니만 좋은 약 써서 당뇨에서 벗어났다. 그러니까 은혜라 하잖아요. 이게 제가 보기는 하나님 일이 아니거든요. 왜냐 하면 당뇨를 뛰어넘으려면 반드시 전제가 뭐냐 하면 ‘당뇨 걸렸다.’를 같이 늘 데리고 다녀야 돼요.

여러분, 길에서 장갑 한 쪽이 있을 때 이 장갑이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하는 건 어떻게 압니까? 상대방 장갑이 나타나야 알 수 있는 문제 아닙니까? 그렇죠? 그러니까 이것은 같이 가는 거예요. 같이 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적이라 할 수 없는 겁니다. 왜, 당뇨 걸린 것이 출발점이 돼 버려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죄 아래 지배를 당하고 있다니까요. ‘당뇨 걸렸다. 주여, 당뇨 걸렸는데 기도해서 당뇨 낫게 하옵소서.’ 당뇨 걸렸는데도 죄인이고, 당뇨에서 나아도 죄인이고 기적은 어디 있습니까? 없어요. 여전히 죄 아래 있다는 것이지, 당뇨 나았다고 천국 갑니까? 하나님의 일이 아닌 거예요.

그러니 언약에서 초월은 밑에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게 아니고 뭡니까? 왕 노릇하는 거예요. 의의 왕 노릇하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만 아는 기적이라는 거예요. 지금까지는 뭐냐 하면 이 세상에 살다가 고생 너무 많이 했잖아요. 하나님의 은혜로 고생 그만, 죄 많은 곳에 살다가 죄 없는 곳, 아프다가 아픈 것도 없는 곳, 넘어서는 그걸 기적으로 봤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건 하나님의 일이 아니란 말이죠. 그건 마귀가 그렇게 그런 식으로 종교적으로 좋은 걸 우리에게 기분 좋게 하는 걸로, 실제로는 뭐냐 하면 죄 아래 있는 인간은 뭘 해도 죄예요. 그러니까 죄 아래 있으면서 ‘야, 죄 밖에 없는 나 천국 가고 싶다.’ 하는 그 천국이 어떤 천국이냐 하면 죄 있으면 안 되는데 지가 조작해낸 자기기만이잖아요. 그게 종교라는 거예요. 종교!

종교는 다 천국 가고 이슬람 보세요. 알라 신을 믿으면 천국 가고 분수가 있어요. 그건 왜냐 하면 사막에는 분수가 없어서 환장했어요. 오아시스밖에 없거든요. 오아시스보다 확장된 오아시스가 천국 이예요. 이게 뭡니까? 그러니까 이걸 달고 가는 거예요. 오아시스보다 더 좋은 오아시스니까 거기는 이 밑의 한계를 초월이니까 한계를 넘어서는 그 정도의 개념의 한계를 초월하는 개념이다 말이죠.

만약에 어떤 여자가 있는데 콧날이 오뚝 섰어요. 그런데 눈은 뭉개졌어요. 눈만 이렇게 하고 보톡스를 볼에 두 방 맞고 해서 콧날은 자기가 이쁘니까 그냥 유지하고, 그 사람이 천국 가서의 자기 이미지는 눈 고치고 보톡스로 요거 고치고 하는데 뭐는 안 고칩니까? 코는 안 고칠 거라 말이죠. 왜, 그건 너무 이쁘게 나왔으니까. 그게 무슨 천국 이예요? 뭐 그런 천국이 다 있어요? 그러니 이게 도대체 교회라는 게, 기독교라는 게 이 세상에서 이런 구라가 어디 있어요? 왜 이런 구라가 있느냐 하면 어떻게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초월적인 신분 있잖아요?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못 듣게 하기 위해서 그럴싸하게 인간들이 가슴 속에 품고 한 맺혀 있는 것, ‘여러분들이 이런 것들 좋아하죠?’ 그런 것들 좋아하는 것들을 다 내놓는 겁니다.

오늘 아침에 잠깐 보니까 김 진아가 나왔어요. 김 진규 딸인데 사연이 복잡한데 그 분이 하와이에서 외국 남자하고 살더라 말이죠. 자, 하와이 가면 죄 안 짓습니까? 이 땅을 훌쩍 떠나면 죄 안 져요? 북한에 있는 사람이 남한으로 탈북 했죠. 남쪽에 오면 죄 안 져요? 그러면 우리가 평소에 기도하는 내용을 살펴봅시다. ①번의 주님이 나를 지배해달라는 지배 쪽입니까? 아니면 ②번 쪽입니까? ①번의 지배해주시라고 노리는 결과물이 뭐다? ②번 쪽으로 주께서 잘 왕 노릇 하셔서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거지 나사로가 은혜 받아서 죽을 때 뭐로 죽었습니까? 거지로 죽었죠. 그것도 헌데를 긁고 개들이 핥고. 끝까지 주님께서 부자 안 되게 만들어요. 주님의 고집! 끝까지 형편이 안 풀리게 만들어요. 꼬여도 인생 그렇게 꼬일 수가 없어요. 꼬아도 인위적이 아니라 정말 주의 역사로 꼬여진 인생! 그리고 거지로 가보니까 그렇게 지가 부러워했던 건강하기 짝이 없는 저 밑의 부자는, 부자가 지옥 간 게 아니고 부자가 살던 그 상황이 지옥이었어요. 그러니까 ‘물 가져와라.’ 세상의 그 행색을 그대로 하죠. 지가 있던 거 그대로. 부자는 죽어서 보고 싶다. 맘껏 보라고 해, 여기서 연장된 거예요.

첫째 시간 수학부터 여섯째 시간 체육, 일곱째 시간 영어, 그 다음에 여덟째 시간이 보충수업이잖아요. 보충수업 한 거예요. 딴 날이 아니고 살던 행색 그대로 가져간 거예요. 부자는 지옥으로. 그래서 이 땅에서 우리가 사는 게 지옥입니다. 만날 이 부분만 생각하고 예수를 믿을 때 지한테 유리한, 지한테 도움 되는 쪽만 잘라서, 딴 쪽은 생각도 안 해요. 이것만 필요합니다. 하고 겸손한 척하면서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 이용하는 그 마음자세, 우리 자신이 참 죄인의 모습입니다. 이것을 주님 말씀 앞에 끌어당겨야죠.

초월을 이야기하죠. 니가 생각하는 그런 한계를 넘어서는 슈퍼맨 되는 그게 아니고, 전혀 다른 분이 지금 요따위밖에 생각 못하는 우리를 하나님의 의로서, 용서로서, 사랑으로서 지배를 해주시는 거예요. 그냥 있는 니 몸 그대로 온나, 내가 따끈따끈하게 피자 만들어 줄게. 반성도 하지 마. 그냥 가져와, 완전히 내가 전혀 상상도 못한 전혀 다른 세계에 대해서 알려줄게. 그것이 이유가 뭐냐, 그것은 바로 우리는 단일 속성밖에 없지만 주님께서는 서로 상반되는 두 개의 속성이 주님의 기능으로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11장 22절 봅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자, 요 대목을 우리가 요 심성을 이해하려면 우리 선에서 떠나야 됩니다. 우리 선에서 내가 생각한 것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이 상반된 속성을 이해할 수 없어요. ‘나 어느 편에 설래.’ 이런 생각조차를 떠나야 된다 말이죠. 우리 선에서 떠나려면 우리가 있어도 없다고 여깁시다.

여기 그림을 그려보면, 예수님한테는 뭐가 있겠습니까? 엄위와 인자가 있죠. 인자, 자비하심. 자, 우리가 여기 있다 합시다. 우리가 여기 있으면서 엄위와 인자를 이해하려 하니까 우리는 단일 속성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해가 안 되잖아요. 그러면 우리를 없애버리면 누구만 남습니까? 예수님의 엄위와 인자만 남죠. 그래서 예수님의 무서움으로 남겨져서 새로 등장하고, 주님의 인자하심이 담겨서 나타나면 그게 인간인 거예요. 항상 우리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주님이 미워하는 사람 따로 있고 사랑하는 사람 따로 있습니다. 할 때 ‘그것 참 잘했습니다.’ 하는 쪽이 어느 쪽이냐 하면 바로 주님의 용서를 받은 쪽, 주님의 인자를 받은 쪽은 그걸 동의하고, 주님의 용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바로 ‘나는 그런 점에서 동의 못 하겠습니다. 사람이 뭐 한번 해보고 니 안 되겠어.’ 이래서 지옥 가도 괜찮은데 해볼 기회도 안 주면 기회 불평등의 원리 아닙니까? 해볼 기회도 안 주고 믿을 수 있는 기회도 안 주면서 복음도 듣지도 못했는데 복음대로 심판해 버리면 시험 문제 받지도 못했는데 0점 맞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불합리해도 너~무 불합리한 거예요.

토기장이가 먼저 있지 토기는 나중에 있는 거예요. 나중에 있는 토기가 토기장이보고 ‘날 왜 이렇게 만들었어요?’ 할 수 있는 그런 권리는 토기한테는 준 적이 없는데, 마귀가 와서 ‘토기야, 니도 토기야. 더 이상 토기장이한테 매이지 마라. 이미 만들어졌으면 이제는 관계 끊어라. 너는 스스로 설 수 있어. 언제까지 토기장이한테 붙들래? 너는 이제는 아름다운 토기로 너를 아름답게 빛낼 수 있어.’ 아까 이야기한 ‘하면 된다. 토기야, 궐기하라.’ 이런 식으로. 그게 지금 우리 속에 외침으로 울리고 있어요. ‘인생 그렇게 살다가 남한테 웃사 당한다. 조심해라. 니가 알아서 해야지, 내 인생 아무도 책임 못 진다. 니가 알아서 해.’ 이게 격려도 아니고 독려도 아니고 우리 속에서 매일같이 일어나잖아요.

그래서 어제 수요일 설교 시간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우리는 아침에 눈만 뜨면 악마의 일과를 시작한다. 끊임없이 세상에서 나를 사랑해 줄 자는 나밖에 없어. 하면서 이왕이면 반들반들한 토기, 그런 토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뚝배기냐, 놋그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 담겨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구원할 때 담긴 거 보고 구원하지, 그릇 좋습니다. 이렇지 않습니다. 뭐를 담고 있느냐? 그래서 베드로전서에 보면 금보다 귀한 보배라고 한 거예요.

죽음이란 것은 죽음은 우리를 놓지 않습니다. 따라서 죽음을 이기는 방법은 그냥 죽음 속에 같이 들어가면 되는 것이지, 죽음을 피해서 도망가면 죽음은 우리를 노리개 감으로 삼아서 빙긋이 웃습니다. 사람을 사냥할 때 먼저 가, 하고 뒤에서 총 쏘는 즐거움을 느끼듯이 마귀가 베드로를 사냥감으로 봐서 베드로가 자기 손에서 못 빠져나오도록 하는 그 재미를 즐기고 싶어 하듯이 그 관계를 끊는 것은 예수님의 기도 뿐 이예요. 예수님께서 기도하니까 베드로와 악마의 케이블 끈을 끊어졌어요.

이쪽의 한계를 자꾸 넘으려 하지 마시고 지금보다 더 나은 것, more and more, 이런 게 아니고 그냥 낯선 분, 어느 정도로 낯서냐? 도저히 납득이 안 될 정도로. 어떻게 같은 분이 사랑을 해주고 어떻게 똑같은 분이 미움이 되느냐 말이죠. 도저히, 미움도 그냥 좀 봐주고 나중에 ‘그동안 고생했다.’고 봐주는 게 아니고 영원히 미워하는, 미워해도 영원히 미워하는, 한 번도 사랑의 눈길을 주지 않고 영원히 미워하는 것, 참 불쌍하다 피조물, 어쩌다 피조물 됐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돼야 마땅한데, 이 피조물 되니까 우리는 당하는 대로 당할 수밖에 없는 입장, 여기서 마귀는 이야기한다. ‘궐기하라. 피조물들이여, 단결하라. 신에게, 조물주께 대들자, 우리 권리를 다오. 내가 앞장설게.’ 앞장 선 존재가 누구냐? 바로 악마입니다.

악마가 이 세상을 전부 다 공중 권세 잡은 자의 권세로서 이 세상을 완전히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항하는 세력으로서 만들어놨어요. 완전히 죄 월드. 전부 다 완전히 다 덮쳐서 이 땅에서 주님의 복음을 그걸 알아먹는다는 자체가 기적 중에 기적 이예요. 세상이 틈도 없어요. 죄의 왕 노릇에서 벗어날 어떤 빈틈 하나도 없어요. 바늘구멍 하나도 없습니다. 이 바늘구멍 없는 곳에 주께서 들어오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부활했다는 것만 신기해하지 말고 주님께서 죄 안에 들어 왔다는 그것도 신기해야 됩니다.

들어온 것이 없으면 나가는 것도 없어요. 들어온 구멍으로 나가거든요. 들어온 구멍이 무슨 구멍이냐? 이게 바로 성령께서 요단강에서 뚫어놨거든요. 성령으로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아들이라” 주님의 계시가 성령을 통해서 하늘이 열리고 거기서 비둘기같이 뭐가 옵니까? 성령이 오죠. 주님도 사실은 유영하는 우주인처럼 뒤에 밧줄이 있어요. 지금은 아니지만 초기에 우주인들은 밧줄 가지고 우주선하고 떨어지지 않도록 했거든요. 요즘은 기계 조작으로 줄 없이 유영하지만.

주님 뒤에 뭐가 있느냐, 성령이라는 밧줄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면 그리스도 사람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누구나 성도는 뒤에 밧줄 하나씩 있다. 이 말입니다. 그 밧줄이 탯줄 이예요. 밧줄은 탯줄이라서 거기서 말씀이 공급되고 영생이 공급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진짜로 더러운 그릇, 생전 모르는 곰팡이 핀 그릇, 마귀가 마련해 준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 이 속에서 뭐가 들어오느냐 하면 예수님이 들어오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핍박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죠. 남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게 아니고 내가 내 뜻대로 안 된다고 우리는 매일같이 주님한테 원망만 해대고 짜증을 내고 짜증 범벅으로 따지고 하잖아요.

그러면서도 우리를 구원해내시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은 늘 우리에게 회개입니다. 주님 앞에 회개할 뿐이지, 이 바탕, 주께서 작용하는 이 기계가 내 기능이 아니고 주님이 자기 생명을 삽입해 주입시키는 그런 빨대에다 집어넣는 자기가 만든 자기기계가 돼야 돼요. 우리는 자꾸 마귀한테 배워서 이걸 내 인생이라고 오해를 합니다. 그러면 안 되겠죠.

조금만 하고 쉽시다. 중요한 게 있어요. 형상에 대해서 옆에 비형상이 나오죠. 성전 건물이 있는데 여기 .. 경우에는 여기 마르둑 신, 또는 앗수르 믿던 신에 성전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 말고 구약 당시에서는 무엇과 무엇의 대결이냐 하면 성경 말씀이라는 형상과 비 언약에서 나오는 이방 나라의 형상과 대결을 시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안식일에는 너희들이 회개하고 금식하라 했잖아요. 그런데 너희들이 이사야에 보면 너희들은 안식일에 금식 안 하고 먹고 마시고 했다 했잖아요. 그러니까 나중에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뭐 한줄 알아요? 금식했어요. 그러면 그들은 옳았습니까? 아니죠. 안식일에 회개하라는 이것은 기존의 언약이 없는 다른 민족의 비형상과 그때 그 당시에 대비시키는 그 방법 이예요. 예레미야가 이곳은 성전이 아니라고 했지만 예레미야 이전에는 여전히 성전은 성전으로 유지돼야 된다 말이죠. 나중에 학개 같은 경우에 성전 지으라 했잖아요. 그런데 성전 지으니까 성전의 그 영광은 솔로몬 때 영광보다 못했죠. 그러면 솔로몬보다 더 잘 지면 될 게 아니냐? 라고 생각이 드는 것은 그 자체가 그 당시 무엇을 의식합니까? 그 당시에 성전이 필요 없다고 한 것을 의식해서, 그래도 성전 건물은 있어야 돼, 라고 주장을 해야만 하는 시대였다 말이죠. 그 시대가.

지금은? 지금은 새 언약 시대는 예수님의 찢어진 살과 피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그 당시에 비 형상과 대비된다면 오늘날은 뭐와 대비입니까? 이 십자가 복음과 복음이 아닌 십자가 바깥에 있는 것을 복음으로 대체하는 것과의 전쟁, 이게 하나님의 원수죠.

10분 쉽시다.

 

 

가락교회-70이레 논문(성전의 인격화)130502-19강b -이 근호 목사

제 19강b

두 번째 시간 해봅시다. 23페이지 중간에 『이 부정과 긍정이 성전 파괴가 일어나는 시점에 ‘선지자의 몸=선지자의 신체’를 통해서 역사 한 가운데 등장하게 되는데』이렇게 돼 있죠. 아까 부정과 긍정이란 말 이제 이해되죠? 성전 한 군데에서 서로 상반되는 속성이 나오니까 이것이 나왔는데 인간들은 성전을 지으면서 또는 성전에 참여하는 민족이라는 그 자긍심이 있기 때문에 ‘성전은 깨지면 안 돼, 성전은 깨지면 안 돼.’라고 하는 그것이 깨져야 되겠죠.

그려서 이렇게 보면 돼요. 예수님이 등장하는 것은 우리한테 조용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등장하게 되면 우리 자신이 알고 있던 우리 자신은 사정없이 깨어져야 되는 기능과 같이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조용한 게 아니고 그때 우리 자신도 난리가 나는 거예요. ‘안 돼, 나는 옛날처럼 살고 싶어. 옛날 애굽에 살던 그때가 좋았어.’ 이런 출애굽기에 나온 그 난리가 우리 속에서 같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럴 때 말씀이란 것은 그냥 문자로 있는 게 말씀이 아니고 실제로 이 말씀이 우리 안에서 폭발하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드러난다. 드러난다는 이 말이 제가 무슨 뜻으로 이 말을 쓰느냐 하면 ‘제가 이 말씀 지킬게요. 안 지킬게요.‘ 할 필요 없이 우리가 평소에 살다보면 덩어리째로 말씀이 다 드러나는 겁니다. 지식적으로 말하면 융기라 할 수 있어요.

어떤 밭이 있는데 밭에서 내가 콩을 심을까, 팥을 심을까, 하고 있는데 밑에서 융기가 돼 버리면 콩을 심은들, 팥을 심은들 사과나무를 심은들 뭐를 심은들 땅 자체가 들려져 올라온다든지 반대로 내려간다면 이건 아무 의미 없죠. 우리는 ‘주님이여, 제가 말씀 지킬까요? 지켰습니다. 못 지켰습니다. 아, 요건 지켰는데 요건 못 지켰습니다.’ 하는 가운데 사는 것 그 자체가 이미 말씀 덩어리로 우리한테 느껴지는 겁니다. 일상에서 나는 말씀대로 산다고 느껴지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말씀 안에서 지금 살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는 현상이 일어나는 거죠.

그렇다면 이웃집에 못된 인간이 이사한 것도 이층에서 탕탕 거리는 것도, 오늘 우연히 만났는데 간질 걸렸다든지 할렐루야 회개하라 하면서 아줌마가 오든지 간에 전부 다 그런 모든 개입이 연극에 어떤 연출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주님에 의해서 딱 등장하라 할 때 엑스트라로 등장했던 겁니다. 내 인생에. 그리고 우리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해요. 우리 자신도 하나의 엑스트라입니다.

직장의 신이라는 드라마에 그런 이야기하잖아요. 전에는 내가 하나의 크리스마스트리인 줄 알았더니만 나중에 보니까 크리스마스트리 중에 하나의 등불에 불과하다. 우리는 나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다가 뭔가 같이 말씀이 들려오게 되면 모든 것이 말씀에 합당한 자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그 하나님의 일에 우리가 동원된 거예요. 동원 예비군처럼. 이런 현실이 우리가 느껴질 때는 한없는 은혜가 되고 감사하죠. 나중에는 누가 와서 바늘로 탁 쑤셔버리면 풍선처럼 푹 꺼지고 쭈르륵 땅으로 곤두박질쳐서 여기도 깨지고 하죠.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했다. 그걸 선지자가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니는 뭐냐?’ ‘나는 천상회의에 가서 내가 본 것을 전할 뿐이다.’ ‘니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니 고소하지?’ 고소한 것도 아니고 그리고 아쉬운 것도 없고 이것이 주님 말씀을 이루기 위한, 메시아가 오기 위한 과정이라면, 우리는 이걸 감당해야 됩니다. 우리 속에 이 드라마 속에 들어가야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하나의 드라마고 소설이고 연극입니다. 인생 자체가 너, 너가 아니고 예수님이 주인공이고 그냥 쭉 이끌어가는 거예요.

그것이 선지자, 성전 파괴가 일어나는 시점. 자, 성전이 파괴 된다.  이것을 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전이 파괴되었다. 이게 하려하니 어려워서 힘들지만 이걸 알면 도움이 되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오류에서  2가지가 있어요. 권리 적 오류와 사실적 오류, 이건 가락 모임에서 하지 이야기 잘 안할 거예요.

성전이 깨졌습니다. 뭔가 오류가 있어요. 뭔가 성전에 문제가 있었던 거거든요. 성전을 사수해야 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서 뭔가 오해됐었습니다. 성전에 대해서 잘못 생각한 거죠. ‘성전이 있으면 우리는 이스라엘 되고 성전이 없으면 우리는 이스라엘이 안 된다.‘ 라는 건 오류가 됩니다. 그런데 ‘그래 잘못 생각했어. 그동안 성전을 잘못 해석했어.’ 이렇게 끝나면 안 되고 오류도 두 종류가 있어요.

권리 적 오류와 사실적 오류가 있는데 권리 적 오류란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생각하기에는 성전이 있어야, 성전이 있다는 말은 여러분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 성전 없이, 성전을 하나님께서 만들라 했잖아요. 만들라 했으면 성전 없는 하나님이 생각이 들까요? 안 들까요? 안 들죠.

직장에 있는 남편이 전화를 겁니다. ‘여보, 오늘 직장 동료들하고 갈 테니까 해물 탕 해 놔라.’ 라고 했어요. ‘해물 탕 해 놔라. 당신 해물 탕 잘하잖아. 해물 탕으로 당신 솜씨 자랑하고 칭찬 좀 하게 해 놔라.’ 했어요. 그리고 남편이 직장 동료들하고 집에 왔습니다. ‘여보, 해물 탕 해 놨다.’ 하니까 ‘우리 저녁 먹고 왔는데.’ 이게 말이 됩니까? 안 됩니까? 해물 탕 하나 지적해서 요리를 지적했다는 말은 저녁을 안 먹고 갈 테니까 당신이 해물 탕 솜씨 맘껏 발휘하라. 그런 뜻으로 전화 했는데 막상 가니까 ‘우리 저녁 먹고 왔는데 그거 뭐 나중에 먹고 우리 화투나 치고 술이나 먹고 갑시다.’ 이렇게 나오면 아내가 다음부터 남편이 전화 걸어서 ‘여보 잡채 해 놔라.’해도 믿지를 못하잖아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뭐라 하셨습니까? 성전을 만들라 했잖아요. 만들라 했던 그 당사자가 성전이 없다는 말은 성전 없이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그런 말은 앞뒤가 안 맞잖아요. 그걸 모순이라 하는데 앞뒤가 안 맞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여 성전은 어떤 식으로도 취소되지 않는다. 왜 만들라고 하신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스스로 만들라 해놓고 나 성전 없이 너희와 상대한다. 그럴 리는 없다고 여기는 이러한 어떤 권리, 이스라엘이 생각한 권리, 그런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생긴 오류가 권리 적 오류라 해요.

‘나는 구원 받아야 돼, 구원 받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 하셨고 우리는 그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반드시 구원받을 자격과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오류, 그게 바로 권리 적 오류입니다. 이 권리 적 오류는 모든 곳에 다 있어요.

난이 있는데 ‘난이 시시하다. 김 대리 이 난 버려라.’ 하고 대표이사님께서 버리라 하는데 마침 난을 갖다 준 친구가 와서 ‘이 난 왜 버리는데?’ 이렇게 나온다는 것은 뭡니까? 내가  기억하라고 준 난을 니가 뭔데 니 맘대로 버리느냐, 라고 나올 때 그건 말이 안 되죠. 이미 소유권이 넘어갔잖아요. 소유권이 넘어갔는데 마음대로 처분하는데 대해서는 말하면 안 된다 이 말이죠. 말을 하면 안 되는데 실제로 눈으로 보면 말하게 돼 있어요.

아버지가 칠순을 맞이해서 자식들이 선물을 줬는데 첫째도 선물을 기쁘게 받고 둘째도 선물을 기쁘게 받았는데 셋째 아들이 선물을 주니까 ‘이건 내가 얼마 전에 샀던 거다.’ 하고 버린다면 셋째 아들은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그런데 원래 칠순은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왔다면 그 아버지가 자기 선물을 안 받는 것조차도 선물을 버린 당사자와 같이 기뻐해야 되겠죠. 그렇죠? 그래야 진정으로 아버지의 기쁨이 내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게 기분이 삐졌다는 이 말은 권리 적 오류를 범하는 겁니다. 자기 권리를 계속 쥐고 있는 거예요.

그 다음에 사실적 오류라 하는 것은 사실, fact, 있는 그대로의 오류라. 있는 그대로의 오류란 권리 적 오류를 지적하는 이 사실이 세상이 지옥이다 이 말입니다. 권리라 하는 것은 주님이 누구만 주님입니까? 예수님만 주님이잖아요. 예수님만 주(主)인데 이건 주가 너무 많아. 많아도 너~무 많아. 전부 다 자기가 주인 노릇하고 있어요. 우리도 마찬가지로 아침에 눈 뜨면 ‘주여, 오늘도 행복하게, 오늘도 무사히’ 누구 맘대로 무사히 입니까? 우리가 아직도 권리 적으로 주인 노릇하는 오류, 이 오류가 사실적으로 이런 권리 적 오류가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사실, 그게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이 세상이 문제가 있어도 보통 문제가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런 권리 적 오류를 주장하는 사람이 이 세상을 손대서 개선해 봐라. 개혁해 봐라. 안 되죠. 왜, 자기 권리만큼은 때려죽여도 구원받을 권리만큼은 주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한국 교회는 다 썩었다. 어떤 사람이 이야기했다 합시다. 그러면 ‘니도 썩었나?’ ‘그래 나도 썩었다.’ 하면 될 텐데 그렇게 이야기 안 하고 ‘우리는 안 썩었다.’ 이렇게 나오면 권리  적 오류를 범하는 거예요. 다 썩었다. 나도 썩었다. 왜,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바로 사도바울이 그런 점에서 제일 어려운 게 뭐냐 하면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데 심지어 누구라 할지라도? 나라 할지라도”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 이예요? 그런 이야기를 하는 본인도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나라도 저주를 받는다는 거예요.

결국 이 복음은 전하는 내 소속이 아니고 나로 하여금 전하게 하신 우리 주님의 소속이기 때문에 나의 권리적인 오류를, 내 권리적인 것을 내가 주장할 수는 없다 이 말입니다. 성경에 분명히 그렇게 나왔는데 사람들은 성경을 어떻게 보는지 모르겠어요.

자, 그런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서 왜 이런 이야기(오류)를 했느냐 하면 성전 파괴가 일어났을 때 오류를 이미 갖고 있는데 이 두 가지 오류가 있었다는 것을 방금 설명해 드렸습니다. 그럼 이 두 가지 오류에서 벗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선지자의 몸, 선지자의 신체라 돼 있죠.

이 논문이 좀 어렵지만 본격적으로 어렵게 된 것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어려워요.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선지자의 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몸은 실존적으로 자기의 몸 한계 안에서 밖을 못 벗어나요. ‘아! 배가 고프다. 그런데 니는 왜 배 안 고파?’ 이는 말이 안 되잖아요. ‘니가 배고프다고 왜 내가 배고파야 됩니까? 말이 안 되죠.

왜 우리는 한 사람이 주장했다고 다른 사람이 동조하면 안 되는 이유가 뭡니까? 뭐가 따로 있기 때문에? 몸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몸이라 하는 이것은 ‘의미봉쇄’예요. 봉쇄라는 말은 알죠? 전쟁할 때 완전히 포위 되는 것. 의미봉쇄예요. 의미봉쇄니까 한 사람이 ‘나는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소쩍새가 밤부터 울었나보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나는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독수리가 울었다.’ 이렇게 할 수도 있거든요. 이것은 모든 인간이 내뱉는 의미라는 것은 봉쇄된 채 나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따님하고 관계도 마찬가지에요. ‘니가 직장에서 고생했다고 왜 고생은 니가 하고 나한테 짜증을 내느냐, 그럼 어쩌라고? 지금 직장 상사한테 따지고 싶은 것을 우회해서 집의 가족들한테 따지잖아요. 그럼 무슨 역할을 해달라는 말입니까? 지가 기대한 직장의 자기 짜증나도 굴복하는 직장의 역할을 집에 있는 집안 식구들이 그걸 대신 해 달라 이 말 아닙니까? 그럼 해줘야지 어떻게 합니까? 그래, 니가 최고다. 너는 일도 잘하는데 월급도 너무 적어. 다음에 보너스 더 줄게.’ 이렇게 나와야 되는데, 그런 말 할 수가 없죠. 직장 상사가 뭘 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말로만 하면 약을 더 올리지 실제로 할 수가 있어야죠.

그럴 때는 이렇게 하는 방법이 있어요. 직장 상사를 그렇게 해주는 게 아니고 엄마가 로또가 당첨이 되든지 어디서 유산을 500억 받든지 해서 ‘야, 직장 때려치워. 때려치워. 내가 살려 줄게.’ 이러면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돼 버려요. 그렇게 하게 되면 그 딸은 지배관계에 들어갑니다. 아까 누가 지배한다? 예수님만 지배해야 되는데 그 딸은 엄마만 믿지, 주님을 안 믿게 돼요.

그러니까 누구한테 의존한다는 것은 결국은 지배관계가 주님의 지배를 이탈하는 거예요. 왕(王)이란 것은 왕의 문제점은 진짜 하나님의 왕 되심을, 주되심을 마귀가 시선을 틀어놓기 위해서 만든 겁니다. 그래서 왕 됨에 뭐가 있느냐 하면 왕 노릇이 있어요. 죄의 왕 노릇, 사망의 왕 노릇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왕입니다. 우리 대왕님 만세, 이 말은 뭡니까? ‘나 예수 안 믿어.’ 그런 뜻 이예요.

그럼 예수님한테 만세, 하면 예수님한테는 만세라고 할 수가 없어요. 인간은. 왜냐 하면 만세할 거리가 없어요. 예수님이 나귀타고 왔을 때 호산나 찬양했죠? 그런데 그 많던 관중들이 그건 예수님 나귀타는 게 보기 좋아서가 아니라 장차 저 분이 우리나라를 로마에서 해방하실 구체적인 실제적인 인물이라고 봤는데 그분이 어떻게 됐습니까? 계속 호산나 했습니까? 어떻게 됐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었잖아요. 누가 따랐습니까? 심지어 열두 제자도 발 끊었어요.

그러니까 열두 제자라는 그들만의 의미봉쇄에 주님이 그 의미봉쇄를 뚫고 들어온 이게 기적이라니까요. 뚫고 들어올 때 방법은 뭐냐 예수님이 이 땅에 들어올 때 방법을 사용했는데 그게 뭐냐 성령세례거든요. 성령세례 받아서만 주님은 이 의의 세계에서 죄의 세계에 들어오듯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줌으로 말미암아 성령만 준 게 아니고 성령 따라서 그 죄를 뚫고 들어오는 손길, 자비의 오른 손, 능력의 오른손, 그것도 죄를 뚫고 들어와서 ‘에이, 니는 창세전부터 택한 백성아’ 해서 잡아서 잡아당길 때 그들은 젊은 사람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고 하는 거예요. 그 환상을 보고 꿈을 꾼 내용이 뭐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 내용입니다.

환상 본다 해서 날라 다니고 그런 게 아니고, 이건 왜 환상이고 왜 꿈이냐 하면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게 아니고 그야말로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거예요. 주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예요. 착할 필요도 없고 헌금할 필요도 없고 전도할 필요 없고 그냥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이것이 인간의 직장이라든지 재정능력이라든지 신용도, 당뇨병, 간질환 전혀 관계없어요.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아요. 세상에 이런 복이 어디 있습니까? 교회 목사 안 돼도 되고 교회 안 다녀도 되고, 세례 그 딴 거 안 받아도 되고, 오직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아요. 세상에 이런 좋은 행복한 나라가 어디 있어요? 세상에 이런 좋은 세상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기존 교회는 대체할 때 의미가 봉쇄됐는데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여기는 마귀가 들어가서 우리는 everybody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어깨동무해가면서 그리고 여기 들어가는 게 뭐냐 하면 찬송, 그리고 젊은 애들은 집단적으로 ccm, 눈물을 흘리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주기도문 노래하면서 같이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 마치 하나된 것처럼 하는 거예요.

제가 젊을 때 대구 서문교회 다녔는데 이처럼 청년회 봉사하고 얼굴도 이쁘고 서울 말 쓰는 20대 그 아가씨가 의미가 하나 되고 한 형제라고 하던 아가씨가 돈 빌려서 도망가고. 난 돈 안 빌려줬는데, 다른 사람들은 많이 빌려줬어요. 도망가 버렸어요. 사기꾼 이예요. 의미봉쇄가 풀려버렸어요.

노인네들 모아놓고 선물 공짜로 주고 설탕 밀가루 주면서 전부 다 의미봉쇄를 다 해체시키고 의미를 하나로 되게 ‘여러분, 돈 많아도 자식이 다 가져가면 소용없습니다. 여러분 몸은 여러분이 챙겨야 합니다. 나도 이거 먹고 난 뒤에 빌빌 댔는데 나았습니다.’ 어떤 할머니 불러다가 ‘할머니 이거 잡숴보니까 내 말 맞아요?’ ‘맞습니다. 하나도 안 아파요.’ 안 아플 수밖에 없지, 진통제를 갖다 부어놓으니까. 한 이틀 먹으니까 좋거든요. 그걸 간증 시켜서 진짜 옆의 친구 할머니가 좋다는데 안 살 수가 없죠. 다 사버리는데. 할 때 휴대폰 코드 다 빼버리고. 단결합시다. 하나 됩시다. 우리는 한 형제입니다. 이게 인간사에서는 안 됩니다. 의미봉쇄 됐어요.

각자, 각자 죄라는 캡슐 안에, 그 캡슐은 공중권세 잡은 마귀가 캡슐을 만들었기 때문에 마귀가 허락하면 둘 다 같은 죄 짓는다는 의미에서 집어 넣어줍니다. 둘 다 같은 점은 뭐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독립해서 악마처럼 우리도 반들반들한 그릇으로 자립할 수 있는 그런 의지를 키우자, 그럴 때만 문 열어줘서 하나 되는 거예요. 우리끼리. 우리 단체, 그게 공동체 운동 이예요. 우리 집, 우리 구역 모임, 이런 게 교단이죠. 합동 측, 신천지, 다 마찬가지, 전부 다 우리끼리예요. 십자가마을도 우리끼리 하면 안 돼요. 세상에 십자가마을 구원한다는 대목이 안 나오잖아요.

주께서는 의미봉쇄가 안 되는 곳에 들어올 때는 오직 우리 자신의 죄를 지적할 때입니다. 마치 우리는 잉크 덩어리예요. 죄를 지적할 때 어떻게 하느냐, 우리 속에 죄를 주의 손이 닿으면 그게 피로 변하거든요. 주의 피 묻은 것을 보면서 ‘오, 피 있네.’ 보는 게 아니고 ‘피 있네.’와 죄 있네.‘와 만나야 돼요. 저 피 흘린 것은 내 죄 때문이다. 어디에? 성경에 나오더라. 내 죄로 인하여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 주께서는 피 없이는 일을 하지 아니하시나니, 가 나오거든요. 피 없는 일은 없는데 악마는 반드시 피 없이 일을 하게 만들어요.

악마의 특징은 뭐냐, 죄를 출발점으로 삼지 말라는 거예요. 이제 죄 이야기는 고만 하라는 겁니다. 얼마나 많이 듣던 이야기 아닙니까? 블레셋에서. 지금도 양무리 마을에 글 보면 있어요. 모든 게 죄라고 시작하더라. 문제 있다고 나오는 거예요.

피가 있으니까 죄가 있죠. 죄 있는 걸 어떻게 아느냐, 분석하니까 아느냐? 피 보니까 죄가 있는 거예요. 교회란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게 교회 아닙니까?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가 생각나지 않으면 교회라고 할 수 없죠. 주님의 피는 우리 죄 때문이니까 우리한테는 죄를 항상 보여주기 위한 피의 작용일 때 의미는 피란 의미로 하나로 뭉쳐지는 겁니다. 이게 성령의 세례인데 서로가 피라는 의미로 전부 다 죄인이라는 의미로 하나로 뭉쳐질 때 그게 그 자체적으로 의미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 바깥에는 의미가 봉쇄되겠죠.

어렵지만 차근차근 해봅시다. 선지자의 몸은 의미봉쇄 됐다. 선지자 몸의 특징은 선지자가  천상회의에서 본 것은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했습니다. 이야기했는데 여러분, 증거 하는 것하고 증명하는 것하고 다릅니다. 증명하는 것은 남을 설득시키는 것이고, 증거는 뭡니까? 믿든지 말든지, 이게 증거라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것은 증명하는 자가 아니고 두 증인이죠. 두 증인인데 그 사람들이 죽는 곳이 바로 십자가 죽는 곳이죠. 그들이 죽는 곳이 십자가란 말이 뭐냐 하면 그들을 증인 노릇하게 한 그 힘이 어디서 나왔다는 말입니까? 바로 십자가에서 나온 힘이 그들로 하여금 증인케 하다가 어디로 되돌아간다? 그들이 죽는 자리를 십자가로 가게 한 거예요.

십자가를 증거 한다는 것은 이미 그 능력이 본인의 능력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나온 능력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한테는 의미봉쇄가 안 되고 의미 합체가 돼 있어요. 그걸 세례라고 하는데 이번 주일 낮에 설교 하게 될 거예요. 세례라고 하는데 그 자체에서는 합체가 돼요. 합체! 독수리 오형제, 하면 하나가 되잖아요. 독수리 오형제가 따로 있다가 합체가 할 때는 몸집이 하나이기 때문 이예요. 몸집이 다섯 개가 되면 합체가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죠. 하나의 목적이기 때문에 두 개, 세 개의 단독 신체가 있으면 안 돼요. 단독 의미가 생기면 안 됩니다. 하나의 의미. 그래서 그리스도에게, 선지자에게 몸을 의미봉쇄를 한 것은 모든 의미는 누가 장악했다? 그 시대의 선지자가 이미 장악해 버렸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걸 단일성! 단일성이란 말을 쓴 것은 뭣과 대비해서 하느냐, 다양성과 대비해서 단일성 이예요. 다양성이라 하는 것은 몸이 열 개가 있으면 몸이 열 개 아닙니까? 동상이몽이라고 열 사람이 잠을 자면 전부 다 꿈이 다 달라요.

오늘 아침에 제 아내하고 이야기했는데 내가 어제 서울 청량리에서 차를 잃어버려서 애를 먹어서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런데 깨어보니까 아휴, 꿈이었다. 차? 요 집 앞에 있지, 얼마나 대행인지 몰라. 이런 이야기하니까 제 아내가 어제 밤에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겁니다. 꿈은 개꿈이니까 왜 동상이몽이 되느냐 이 말이죠. 꿈이 다 다르거든요. 이걸 다양성이라 해요. 인간은 다양성이거든요.

다양성에서 끄집어낼 때 여기 다양성은 악마가 작용합니다. 악마가 작용하게 되면 A라는 사람, B라는 사람이 있지만 너희들이 아니라고 하지만 너희들이 원하는 게 있잖아. 에이고, 있어. 돈입니다. 두 번째 인기고 세 번째 권력입니다. 요 세 가지를 어디서 제공한 겁니까? 마귀가 어디서? 광야에서 예수님한테 제공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이 아무리 ‘내 인생은 내가 갖추었다.’ 우겨도 마귀는 지금 웃습니다. 니가 갖고 싶은 게 따로 있어. 이걸 누가 아시느냐, 예수님도 아시거든요. 예수님이 자기 찾아온 관중들 보고 뭐라 하셨습니까?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왔더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 그 사람 지금 LA에 가 있어요. 젠틀맨, 알랑가몰라. 지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 많은 게 제왕 이예요. 대통령은 5년만 하면 그만이지만. 싸이, 인기, 권력, 돈, 같이 가요. 다 마귀에서 나오기 때문에. 역시 돈 있는 사람이 인기 있고, 인기 있으면 돈 생기고, 그게 권력되고 다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인기 떨어지면 어떻게 될지 그러니 그게 얼마나 허무한지.

그러니까 악마는 올려주고 작살내는 겁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 또 하고. 어쨌든 인간은 다양성이 있더라도 악마는 알죠. 너희들이 원하는 것은 뭘 원하는가? 나처럼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 죄를 원하는 거예요. 인간은 죄를 원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 하나님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죠. 하나님 섬기기를 싫어하죠. 자기 경배하는 것 좋아하죠. 자기 잘난 맛으로 살죠. 주님 잘난 맛으로 안 살거든요. 이 모든 것, 이걸 알기 때문에, 이미 여기는 공중 권세 자, 사망의 왕 노릇, 죄의 왕 노릇, 이것은 하나의 다양화 된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선지자라 할 때 단일성으로 오거든요.

자, 이번 논문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에 서서히 들어갑니다만 어려우니까 침착해야 돼요. 144.000, 이건 1이 아니죠? 2도 아니고 숫자가 144.000이죠. 이걸 사수 성인데 이게 뭐냐 단일성입니다. 숫자는 분명히 144.000인데 이걸 단일성으로 할 때 이걸 하나님 보시기에 무한, 셀 수도 없는 많은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어린양을 따르더라. 셀 수도 없는 많은 사람들을 숫자로 표현할 때 144.000으로 표현하는 거예요.

숫자는 분명히 다수성이지만 이것을 하나로 보는 겁니다. 또 예를 들면 12, 이건 숫자가 12니까 12죠. 분명히 각자, 각자 의미봉쇄가 돼서 각자 몸이 다르니까 각자 주장할 것 같은데 베드로전서에 보면 거기 쓴 편지에 보면 오직 하나 “그 보배로운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입었노니”

사도바울의 복음이 뭐예요? 오직 십자가 피! 히브리서에 나오죠. 피! 똑같은 십자가 이야기를 하죠. 너희들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 내가 자랑할 것은 뭐 밖에 없다? 십자가 밖에 자랑할 게 없다. 십자가는 어리석게 보이지만 구원받는 우리, 다수성이죠. 구원받는 우리들에게는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죠. 십자가라는 한분의 죽으심이 모든 다른 사람들을 살려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 얽히면 의미봉쇄가 해체되면서 그리스도 몸의 지체를 이루면서 하나가 되는 겁니다. 몸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사랑도 하나요, 교회도 하나요, 전부 다 하나다.

그러니까 이러한 하나, 하나의 단일성은 이미 모든 인간은 지가 아무리 다양성을 주장해도 마귀한테 잡혀있는 단일성을 염두에 두고 전진을 하여 간 겁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선지자가 왜 그렇게 그 시대에 적습니까? 예레미야도 그 당시 하나밖에 없습니까? 할 때 그 하나는 선지자 빼고 나머지가 열 명이 아니라는 뜻 이예요. 선지자가 한 명이라면 선지자 빼고 나머지도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같이 움직여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하나같이 움직이는 거예요.

그래서 선지자는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증거 하는 겁니다. “날 위해서 누가 가지?” 할 때 ‘제가 가겠습니다.’ 이거는 증명하러 가는 게 아니고 증거 하는 겁니다. 왜냐 하면 “누가 가지?” 했던 그분이 예수님이거든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모든 사람에게 버림 받았잖아요. 그처럼 “버림받을 자리에 누가 가지?” 할 때 ‘제가 그 자리 가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사야와 예수님은 한 통속이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지금 증거가, 뭣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왜 끄집어냈습니까? 물어보면, 성전은 건물이죠. 성전이 깨지죠. 성전이 깨지면서 안에 인격화가 이루어진다 했잖아요? 이건 제가 이야기한 것이고, 그 당시 사람들은 성전이 깨어지면 뭐가 깨지는 겁니까? 하나님이 없죠. 그런 하나님을 믿습니까? 안 믿죠. 해물 탕 끓어놓으라 해놓고  해물 탕 안 먹는다 하니까 말이 돼요?

성전 만들라 한 분이 누굽니까? 주님이 만들라 해놓고 자기가 만든 성전을, 아까 남편은 해물 탕을 안 먹었지만 더 과격한 남편은 ‘누구야? 이 해물 탕 누가 끓였어?’ 하고 발길로 차버리는 거예요. 자기가 해물 탕 끓여놓으라 해놓고 발길로 차면 어떻게 그 남편의 말을 신뢰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스스로 모순되지 않기 위해서는 성전만은 절대로 어떤 경우라도 안 깨질 것이고, 성전이 안 깨진다면 아무리 바벨론이고 앗수르고 아무리 막강한 군대가 오더라도 주님이 성전에 함께 있기 때문에 성전은 절대로 불타거나 깨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그 당시 선지자들의 결론이었습니다. 그 당시 가짜 선지자들의 주장이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진짜 참 선지자의 반론은 뭐였습니까? 간단했습니다. ‘나 천상회의에서 봤다.’ 그렇게 하면 그들이 맞는데 천상회의에 갔거든요. 윗분 초월! 한계를 넘어선 게 아니고 천상회의에 참석하고 오다 보니까 깨진대요.

그럼 그 이야기 듣고 또 따집니다. 유대인하고 가짜 선지자들 하고. 성전이 깨져 버리면 하나님의 성전과 함께 있다는 성전 지으라 하는 다윗 언약의 그 성전은 어디 있느냐? 어떻게 생겨나느냐? 어떻게 성전이 회복되느냐? 그 문제는 어떻게 될 것이냐, 그 문제에 그들은 돌입하게 되겠죠. 해답은? 연결이 안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일단 나는 구원 받았다고 보고 이렇게 논리가 되면 성경 논리가 전혀 안 되게 돼 있어요.

누구한테 맡겨야 됩니까? 모든 구원의 권리는 주님 손에 있고, 이렇게 보면 모든 게 술술 풀리는데, 나는 일단 구원받고, 나는 일단 무조건 천국 가야 돼. 이런 이야깁니다. 여러분, 내 편에 예수님 계십니까? 예수님 편에 천국 있습니까? 나의 편에 천국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 편에 천국 있는 거예요? 원래 성경대로 하면 예수님 편에 천국 있는데 그런 얘기하니까 내 편에 천국이 있어야 한다고 우리가 갖게 되는 거예요. 나의 편에는 천국이 있고 싶어 하죠. 그렇게 되고 싶어요.

그런데 천국은 예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천국에 오게 되면 여기선 나의 것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우발적으로 와요. 이게 두 자로 사건입니다. 바람! 바람 이야기 여러 번 했는데, 바람 같이 오는 거예요. 성령이 바람 같이 임하는 겁니다. 이것은 ‘천국은 내 소유야.’ 라는 말을 두 번 다시 그런 소리 하지 말라는 말이죠. 천국은 내가 역시 ‘천국 오너라.’ 그런 소리는 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우연히 왔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가 놀란다고 했죠. 나 같은 인간을 왜 넣어줍니까? 이렇게 오히려 반문해야 돼요. ‘이상하다. 십자가 피를 내가 왜 믿지? 그 피를 어떤 죄도 용서 받는다는 사실이 내가 미쳤지, 내가 공부도 못하는데 그걸 내가 왜 믿지? 머리가 잘못됐나?’ 하고 너무나 놀라야 됩니다.

그래서 이 논리가, 우리가 방금 놀란다 하는 이 논리가 선지자한테는 어떻게 놀라느냐 하면 물론 선지자도 이 사실을 믿습니다마는 선지자가 놀라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어떻게 하나님이여, 하나님이 만든 이 나라를, 이 성전을 이렇게 처참하게 망가뜨립니까?’ 어렵죠? 우리 생각에는 ‘그래, 너희들 니 맘대로 해, 나만 천당 가면 그만이야.’ 이렇게 생각할 텐데 선지자는 그렇지 않고 ‘주여, 이러시면 내 백성 어떻게 됩니까?’ 라고 누구를 걱정해요? 선지자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보세요. 울잖아요. 울긴 왜 웁니까? 우리 같으면 ‘잘됐다. 아이씨, 나 혼자 천상회의 참석했다. 나는 구원받는다. 잘 먹고 잘 살아라.’ 이렇게 할 텐데, 막 울면서 ‘주여 이러시면 주의 백성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한다고요.

이게 뭐냐 하면 선지자가 포함돼 있는 것이 두 가지 상반된 속성이 같이 들어있는 거예요. 본인은 구원받으면서도 저주 받는 것이 애타 하는 그 상반된 속성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성전이 서서히 인격화 되는 과정에 있는 겁니다.

성전은 깨졌지만 누구만 있으면 된다? 성전은 깨졌기 때문에 연속성을 깨졌겠지만 누구는 계속 보내집니까? 선지자가 있는 이상은 성전은 선지자 속에 살아있는 겁니다. 그 선지자 이름이 뭐냐, 바로 유명한 인자, 인자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예레미야라. 또?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라.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메시아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당신이 바로 메시아입니다. 오실 분이 왔기 때문에 나중에 곁가지는 쳐도 그만 이예요. 선지자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 필요 없어요. 정작 그림자로 오셨던 것이 실제가 나타났으니까.

무서운 영화 같은 경우에 처음부터 안 나타나요. 처음부터 긴 그림자가 나타납니다. 도끼 들고. 저벅, 저벅, 저벅, 하고 2층을 올라가요. 2층에 있는 아이는 ‘아유, 무서워라.’ 전화해도 경찰한테 전화가 연결이 안 돼요. 저벅, 저벅, 저벅 오는데 문에 보니까 도끼 든 긴 그림자가 비치니까 침대에서 오돌오돌 떨죠. 그걸 선지자가 섬뜩하게 느끼는 거예요. 선지자는 구원의 사랑의 하나님을 뭐로 느끼느냐, 섬뜩한 주님, 주님이 사전에 이만큼 무서운 분인 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게 선지자예요.

세례요한이 뭐라 합니까? “나는 쇠하고 주님은 흥해야 된다.” 얼마나 무서운 도끼가 나무  뿌리에. 그러니 이 세례요한은 털옷 입어서 빈대나 벼룩이 있어도 이거 신경 안 씁니다. 맛있는 거 뭐 먹지? 석총 해서 광야에서 등산해서 바위에 있는 것 꿀을 따서 얼굴에 묻혀서 범벅이 되고, 이런 것 때문에 무서운 게 아니고 메시아가 저벅, 저벅, 저벅, 회개하라, 뭐가 왔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 심판 날이 가까이 왔느니라. 그게 무서워서 지금 한 명이라도 강물에 집어넣어서 세례가 급하지, ‘오늘 몇 번이나 물렸지? 벌꿀 따먹다가.’ 이런 거 신경 안 써요. 옷 다른 거 없나? 그런 거 신경 못 써요. 남들은 결혼하는데 나는 결혼도 못하고. 그런 거 지금 신경 쓸 수도 없어요. 나는 오시는 분의 외치는 전령이다.

그것을 전령이라는 말도 있지만 사실 이게 지령입니다. 다다다다 북한에서 보내는, 청와대 폭파하라. 다다다다, 비밀스러운 것, 아무도 모르죠. 세례요한에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너 누구야? Who are you?’ 물었어요. 답변 안 하니까 그들은 객관식으로 ① 니가 선지자야? ②제사장 ③ 메시아, 몇 번입니까? 세례요한은 소리, 나는 그냥 스피커, 스피커니까 지가 주체가 아니에요. 자기는 그냥 긴 그림자예요. 도끼를 들고 나무뿌리니까 사람들 발목이죠. 나무뿌리에 도끼를 찍기 위해, 찍을 때 사실 도끼로 찍는 게 아니고 물로 퍼붓는 거예요. 도끼로 발목만 찍으면 발목만 날라 가지만 물에 집어넣으면 다 죽어요. ‘다 와서 죽자, 죽자, 이런 상태로 천국 못 간다. 죽어야 산다.‘ 해서 물에 집어넣고 메가지 집어서 끌어당기고, 그럼 어떻게 됩니까? 머리 긴 여자는 어떻게 되겠어요? 폼 나겠죠. 푸아~ 머리 탁 물을 털면서 머리 뒤로 풀어헤치고. 물에 집어넣고 푸아~, 살았다. 하듯이 왜 물에 잠수시켜 놓고 끌어당기느냐 하면 세례라는 것이 뭐냐 하면 육은 죽이고 영의 세계로 푸아~ 하고 끌어오는 것을 미리 은유로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선지자! 이 사람들 월급을 따진다든지 나 결혼해야해, 이런 걸 따진다든지, 안 돼요. 왜냐 결혼해서 있는 마누라까지 하나님께서 작살냅니다. 아내한테 미안하지만 아내도 선지자, 인자가 받아야 될 계시를 위해서 죽어줘야 되고 그 다음에 자기는 그걸 보고도 울지 말아야 돼요. 회개할 뿐이지 울지 말아야 돼요. 이처럼 너희가 사랑하는 아내도 너희들 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다. 그 죄가 어제 수요일 날 무슨 죄라 했습니까? 이 땅에서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기준이 뭐라 했습니까? 우상숭배!

너희들은 우상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됐다. 그러면 이 우상이라 하는 것은 어제 수요일 날에 했지만 우상이 처음으로 집단적으로 등장한 때가 출애굽기 32장이죠. 32장에 보면 모세가 떠났다는 말은 언약이 떠난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중간에 전달하는 전령이, 지령을 받은 사람이 떠나고 일부러 떠나게 해줘요. 그러면 남은 상태에서는 뭘 하겠습니까? 여호와를 만들어 내겠죠. 그 만들어 낸 여호와가 우상이라면, 그 만들 때 그 만든 취지가 뭐냐, 나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위한 여호와를 만들어 내면 그것이 이스라엘 멸망하도록 계속 가요.

결국 성전이 있고 성전이 있더라도 전부 다 나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그것이 우상이 되는 겁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우상이라고 보면 돼요. 전부 다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선지자 몸이 선지자 신체를 통해서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의 선지자가 단일성 속에 있다 했죠? 어려운 것 많이 했기 때문에 복습하면, 이 단일성은 선지자 빼고 나머지 모든 사람이 자기 딴아 다양성이지만 다양성은 아니고 전부 다 죄의 것에 있는 다른 또 다른 다양성 1:1 이예요. 1: 여럿이 아니고 1:1

그런데 아브라함의 언약에 의하면 네 자손의 씨가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아진다 했죠? 그런데 아브라함 자손이 몇 명입니까? 하나죠. 하난데 구원받은 사람은 여러 명이 되도록 하는 거죠. 이삭은 하나지만 이삭의 자손은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아지듯이 하나에서 다수가 나온다고 해서 다수가 다수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에 예속된 다수이기 때문에 의미봉쇄가 아니고 그 안에서는 합체가 되죠.

마찬가지로 이쪽도 마찬가지예요. 안 믿는 사람도 예수님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여자의 후손이 등장했다는 말은 상대방에 뭐 등장한다? 뱀의 후손. 장갑이 오른쪽 장갑이 왔다는 말은 반드시 이 장갑은 뭐가 있다? 이 지구상 어디엔가 왼쪽 장갑 짝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천국이 지옥과 더불어서 함께 나타나고 지옥이 있는 곳에 천국이 쌍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그 상반된 속성은 주님이 갖고 있는 정말 이해하기 힘든 상반된 속성 이예요. 자비를 베푸는 당사자가, 축복을 한 당사자가 저주를 해버려요. 그러면 저주받는 쪽에서는 저주하는 분으로 이해될 것이고, 축복 받는 쪽에서는 축복도 주고 저주도 주는 양쪽 다 주는 걸로 다 이해 되고, 그걸 설명하라 하면 설명이 안 되죠.

우리는 단일성을 유지하기 때문에 설명이 될 수가 없고 설명할 필요 없어요. 증명할 필요 없다니까요. 증거 하면 되지 증명할 필요 없어요. 우리가 성경을 어느 정도 공부해야 증명이 됩니까? 그냥 하루를 믿고 이틀 믿어도 증거 하는 용이지, 이걸 성경을 언제 알아서 다 증명해요? 안 되죠.

그리고 증거의 작용에 우리 개인의 욕심도 포함시켜서 피자를 만들기 때문에 깨끗한 것만 정답만 알아서 전하지 않게 돼요. 반드시 또 과장되게 우리 자랑거리, 자랑 질이 섞이게 되죠. 그래서 증거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증거가 완벽한 증거라는 게 없고 증거 케 하시는 분이 그 증거를 완벽한 증거로 사용하면 그게 완벽하게 되는 거예요.

사도바울의 말 듣고 아무도 구원 못 받아요. 하지만 사도바울의 말을 듣는 걸 도구로 해서 많은 사람이 구원받죠. 주께서 그렇게 하신다면. 사도바울이 완벽한 뜻은 아니고 주께서 구원하는 데는 완벽하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선지자의 몸이 그렇게 깨지면서 선지자의 몸이 하나의 인격화 돼 가면서 이제는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선지자의 연속성 속에서 이루어진다. 문제는 선지자가 안 오면 어떻게 되는가? 오늘 마지막 문제입니다. 선지자가 안 오면? 실제로 선지자가 말라기 이후에 왔어요? 안 왔어요? 안 왔죠. 안 오면 안 오는 거예요. 안 와도 할 말 없는 거예요. 선지자가 안 오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그 질문은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간다니까 걱정스러운데, 주님께서는 미래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앞당겨서 그림자와 모형을 만들어 놓은 거예요. 그게 모형이라면 그걸 모형이라고 하시는 분이 실체가 되는 겁니다.

선지자는 이쪽에서 보면 안 온 걸로 돼 있지만 이쪽 오신 분의 입장에서는 그 마지막 선지자로 인하여 이미 더 이상 계시할 건 이제 끝나고, 마지막 판에 본인만 나타나면 되는 순간이기 때문에 이건 파국 직전의 고요라 할까, 폭풍 이전에 잠시 조용한 것, 그게 더 겁나는 순간 이예요. 이게 말라기 하면서 거기서 생긴 것이 짐승의 나라가 유대 나라 이름으로 짐승의 나라가 드디어 아주 온실에서 차분히 만들어집니다. 왜, 짐승의 나라가 만들어져야 예수님이 그들의 속에서 헤롯의 속에서 죽임을 당해서 십자가를 완료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시대가 그냥 고요한 시대에요. 개성공단하고 이래서 안 좋지만 어쨌든 계시에서는 지금 고요합니다. 누구 복음 이야기하는 사람 별로 없어요. 전부 다 고요하게 교회 놀러 다니고 이럽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나대지 말고 회개하라 나대지 마시고요. 머리 길어서 하지 마시고 증명하지 마시고 그냥 증거 되도록 우리의 죄 된 모습을 사용한다는 사실, 지금도 쉬지 않고 증거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의미상 만들어진 게 아님을 알았습니다. 선지자처럼 그냥 구원은 받았는데 세상 돌아볼 때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이 안타까운 심정도 주께서 허락해주셨사오니 우리를 통해서 주님이 증거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참고사항' 카테고리의 다른 글

70이레논문9-선지자 신체  (0) 2023.07.07
70이레논문8-이름과 존재와 기능  (0) 2023.07.07
70이레논문6-짐승과 주의 이름  (0) 2023.07.07
70이레논문5-틈  (0) 2023.07.07
70이레논문4-옛사람과 말씀  (0) 2023.0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