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사항

70이레논문6-짐승과 주의 이름

아빠와 함께 2023. 7. 7. 16:22

가락교회-70이레 논문(짐승과 주의 이름)130418-18강a -이 근호 목사

제 18강a
오늘은 218 페이지 밑에서 세 번째 줄에 『바다에 자리 잡은 무질서의 세력』요걸 성경에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짐승이라고 해요. 그런데 짐승이라는 게 이 세상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이 세상에 짐승이라는 게 없잖아요. 흔히 말하는 소나 돼지 가축들은 있지만,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짐승이라는 것이 눈에 안 보입니다. 왜냐, 네 생물이 어느 동네 삽니까? 안 살죠.

그러면 한번 따져 봅시다. 성경에 짐승이 있고 네 생물이 있다 하는데 네 생물, 짐승, 지금 이게 이 세상에 없는 존재 아닙니까? 없죠. 큰 성, 음녀, 이런 건 없는 거죠. 없는 존재를 가지고 ‘이것이 무엇이냐’고 따지는 것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왜냐 하면 이 세상에 여기 지우개가 있다면, 여기 지우개가 있잖아요. ‘지우개가 무엇이냐’ 지우개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이건 의미가 있는 겁니다. 왜냐 하면 지우개는 이 세상에 있으니까. 그런데 네 생물이나 짐승은 이 세상에 없다 이 말이죠. 음녀 이런 건 없다 이 말이죠. 성경에는 나오는 용어지만 이 세상에는 없다 말이죠.

‘지우개는 이렇습니다.‘라고 보여줄 수 있는데 ’네 생물은 이겁니다.‘ 라고 보여줄 수가 있느냐? 없다 이 말이죠. 왜 그러냐 하면 역사적인 내용을 역사에 없는 것을 이렇게 일치 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렇죠? 예를 들어서 알랑가몰라, 하는 어떤 꽃이 있다 합시다. 어떤 사람이 ’알랑가몰라 꽃이 있습니다. 그 꽃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하면 사람들이 알랑가몰라 하는 꽃은 이 세상에 없어요. 없는데 그게 나왔을 때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 그냥 무시해야 돼요. 그런 식으로 지어내면 누구나 다 지어내거든요.

백합은 이렇게 생겼다. 하면 아! 백합은 알아요. 왜, 백합은 이 세상에 있으니까. 현재 우리가 어디 살고 있습니까? 역사적 이 세상에 살고 있잖아요. 그럼 우리에게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우리가 있는 것처럼 같이 있는 그런 것들을 끄집어내서 ‘이거 아십니까? 봤습니다. 경험했습니다.’ 가 되는데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런 것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이런 게 없어요. 인간은 짐승하고 사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인간하고 사는 거예요.

머리가 7개, 뿔이 10개, 이런 짐승 어느 나라에서 키웁니까? 이거 아프리카에 있어요? 없죠. 없을 때는 ‘이것이 무엇이냐’ 물으면 안 돼요. 없는데. 왜냐 하면 그걸 답변을 하려면 이미 그런 게 현재 역사 속에, 세상 속에 있는 걸 가지고 이걸 설명해야 되는데, 이 세상에 없는데 저걸 어떻게 설명해요? 논리 간단한 논리예요.

예를 들면 목사님 셋째 딸이 이쁩니까? 나한테 물으면 셋째 딸이 없는데 뭘 이뻐요? 없는데. 항상 성경에서 짐승이 나올 때는 뭐냐 하면 현재 니가 살고 세상에서는 짐승을 설명할 게 있다? 없다? 없다는 이야깁니다. 이 세상에서 설명할 수 없는 우리와 함께 없는 짐승을 끄집어냈다는 말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문제가 있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짐승을 앞장세워서 이 세상을 설명한다는 것은 ‘너희들은 너희들을 설명할 수 없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주일 낮에 제가 설교했잖아요. 죄인은 악한 세상을 개선할 수가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죄인은 자기 죄를 개선할 수가 없다. 씻을 수가 없습니다. 특히 죄인이 죄를 씻겠다고 나선 방법도 죄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면 너무나 뻔한 이야기예요.

연탄장수가 손이 시커먼 손 가지고 자기 얼굴을 아무리 문질러서 검둥이를 벗겨내고 벗겨내도 벗기면 벗길수록 점점 더 얼굴에 검둥이가 묻잖아요. 이건 당연한 거잖아요. 죄인이 지가 죄를 알아서 죄를 씻어낸다? 그럼 애초부터 죄인이 아니어야죠. 아, 이러면 되겠네. 연탄장수가 흰 장갑 끼우면 되겠네. 흰 장갑을 어디서 나왔겠어요? 흰 장갑 끼면 겉에는 가렸지만 속에 뒤집어보면 이미 까만 게 묻어서 시커멓잖아요. 낀다는 자체도 속에는 이미 시커멓기 때문에 방법이 없다니까요.

어떤 방법도 물에 빠져가는 사람이 스스로 자기 운동화 끈을 스스로 잡아당겨서 자신을 물 밖으로 끄집어낼 수 없습니다. 이건 모순 이예요. 이걸 끄집어내서 이렇게 하게 되면 둘이 동그라미가 돼서 한쪽은 들어내고 한쪽은 끄집어당기는 게 되는 거예요. 뱀이 뱀을 물어버리면, 뱀이 자기 꼬리를 물어버리면 나중에 입만 남고 없어져 버리니까 그런 식으로 돼 버린다 말이죠.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모든 용어들은 이것은 인간은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인데, 그럼 어디 있느냐? 없다. 없는데 짐승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너희들의 몸통은 인간이 아니고 짐승이다. 그러면 인간의 모든 몸통이 짐승이라면 인간들이 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사실 짐승입니다.

인간이 만든 신이나 종교, 전부 다 인간 바깥에서 인간을 이렇게 지배하고 있는 그 몸통에서 삐져나온 것이 하나님이라는 개념, 메시아 개념이고 그런 개념 이예요. 인간이 메시아를 알아서 구원받겠다고 시도하는 것이 유대인이거든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유대인은 이단이었어요. 유대인이 이단일 것 같으면 유대인이 모든 민족의 최고점에 있는 그거마저 이단이라면 이 세상에 짐승 밖으로 나간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사도요한은 자기한테 계시를 준 그 천사에게 절을 하죠. ‘아휴, 천사님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하고 절을 하니까 천사가 하는 말이 ‘나보고 하지 마라, 나도 하나님 섬기는 사람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요한계시록 전체 내용은 중심 되는 내용이 따로 있다는 거죠. 천사가 이야기한 그것을 사도요한이 안다고 해서 계시를 준 진짜 몸통은 근원적인 의미는 아니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천사를 보냈다는 말은 천사가 여러 가지 남겨진 모든 것을 다 끌어서 결국 누구하고 연결시키느냐 하면 예수님이 주신 그 계시와 연결시켜야 되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이 주신 계시는 이미 예수님의 몸을 통해서 이미 다 보여줬어요.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그게 뭐로 돼 있느냐 하면 이렇게 돼 있어요. 6월 6일 날 특강에 할 이야긴데 7절에 보면 “아멘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그 다음에 뭡니까? “애곡하리니” 라고 돼 있죠. 그러니 이 모든 계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이 창에 찔려 죽었을 때 이미 예수님 입장에서는 계시는 완성 이예요. 계시의 완성! 이미 끝나버렸어요. 이게 중심 되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천사를 통해서 요한계시록에서 사도요한에게 준 건 뭡니까? 요 예수님 몸에서 이뤄진 계시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변에 있는 모든 일어난 일들을 묵시적 용어를 하나, 하나 명찰을 붙이는 거예요. 요거는 백합, 요거는 튤립, 요건 장미, 명찰을 명패로 붙이면 그 모든 명패가 다~ 모이면 뭐가 되느냐, 전부 다 그건 꽃이었다. 꽃! 꽃인데 꽃은 없어요. 없는데 튤립이 있고 장미가 있고 히야신스가 있고 해바라기가 있을 뿐이죠.

꽃은 어디 있습니까? 꽃은 없고, 난이 있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일반적인 백합, 장미는 무엇을 봉사하는 것이다? 꽃이라는 숨어있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해석이 안 되는 숨어있는 영적 세계를 위해서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이런, 이런 모든 역사적 상황에다 묵시적인 명찰을 갖다 붙이는 거예요. 요거는 네 짐승, 요거는 짐승, 요거는 음녀, 요거는 진노의 포도주, 요거는 해를 입은 여인, 전부 다 명찰을 붙이는 거예요.

그럼 명찰을 다 떼버리면 결국 그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이유들이 세상의 사건과 사건이 유발하고 있습니다. 개성공단 그것도 그 사건 이예요. 요한복음 17장 2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들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여기서 보면 영생 받을 자 따로 있습니까? 전부가 다 영생 얻습니까? 따로 있죠. 따로 있는데 권세를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는 아들에게만 줬죠. 그러면 영생 얻을 자는 따로 있고, 예수님이 다스리는 권세는 따로 있지 않고 모든 이(all)에게 다 적용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침례교회가 틀렸죠. 침례교회는 뭐라 합니까? 영생은 모든 사람이 다 받을 수 있는데 본인들이 안 믿기 때문에 영생을 못 받고 믿는 사람만 영생을 받는다는 거예요.

그런 작은 차이가 작은 차이가 아니고 요한복음 예수님이 하신 17장 2절 같은 말씀에 딱 준해 버리면 그런 것들이 기독교의 근간을 흔들어 버려요. 영생 줄 자는 따로 있고 하지만 안 믿는 사람까지 누가 다스리고? 예수님이 다스리고, 왜, 안 믿는 사람, 짐승까지, 악마까지 다스리는 이유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영생 주시기로 하신, 아버지께서 따로 영생 받아야 될 사람을 따로 있기 때문에 그 사람한테 영생을 몰아주기 위해서 안 믿는 사람, 지옥 가는 사람까지 예수님이 다스리는 권세를 준 거예요.

요 17장 2절의 말씀 이걸 확대하면 요한계시록 돼 버리는 겁니다. 이제 아시겠죠?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에 있는 모든 일에다가 역사이니까 묵시적 명패를 붙이니까 명패를 딱, 딱 뗄 때마다 뭐로 바뀌느냐 하면 묵시 명패를 뗄 때마다 역사 문패로 바뀌는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내가 생각해도 참 쉽네요. 예수님께서 책을 일곱 인으로 봉인을 한 거예요. 봉인이라 하는 것은 옛날에 로마 시대 때 편지 할 때 함부로 열지 말라고 납이나 양초 같은 걸 녹여서 도장을 콱 찍어놔요. 그러면 주인만 열게 단추 떼듯이 녹여서 탁 떼면 내용이 보이거든요. 이걸 7번 봉인돼 있다는 거예요.

봉인된 것은 묵시거든요. 묵시를 떼면 이게 뭐로 바뀌느냐 하면 역사로 바뀌는 거예요. 그런데 이 묵시라 하는 것은 이미 요한복음 17장 2절에 이미 결론 났죠? 아버지께서 영생 주기로 작정한 사람에게 영생 주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영생이 가면 안 돼요. 영생 주기로 작정한 사람 따로 있어요. 그 사람한테 몰리기 위해서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임의로 주관해 주십니다. 모든 사태를 일으켜서 ‘너희들에게만 영생이 돌아간다.’ 하고 영생 주기 위해서 모든 일들이 작용을 하는 겁니다. 참, 예수님께 감사 안 할 수가 없어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 위에도 그것이 역사적 모든 상황이 묵시적으로 보면 우리 성도한테 영생 주기 위해서 그러한 묵시적 사태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묵시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전부 역사적으로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성령으로 보게 되면 역사적 상황도 묵시 안에서 다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짐승은 뭐냐, 문제는 여기서 들어가야 되죠.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여기에 짐승의 오야봉이 나옵니다. 짐승의 오야봉이 뭐냐 옛 뱀이 아니고 용이라고 돼 있어요. 그러면 짐승이 뭐냐 할 때는 이렇게 하시면 쉬워요. 그 용이 노리는 게 뭐냐를 보면 됩니다. 용이 노리는 게 뭐냐? 지금 역사적 사건 끄집어내지 맙시다. 왜냐 하면 묵시는 단회 적이지만 역사는 묵시에 따라서 반복되기 때문에 어느 역사적 사건을 콕 집어서 ‘요게 짐승이다.’ 이렇게 하지를 못해요. 시대마다, 시간 마다 환경에 따라 계속해서 되풀이해서 짐승은 짐승답게 그리스도 종은 그리스도를 담게 돼 있기 때문에 딱 하나 집어서 ‘요게 짐승이야, 요게 음녀야.’ 이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안 되고, 무슨 역할을 하느냐를 물어야 돼요. 짐승은 오늘날 어떤 역할로 나타납니까? 이렇게 질문을 해야 돼요. 질문을 그렇게 해야 맞다고요. 그래서 좀 어렵지만 여러분들, 참고 들어보세요. 짐승의 역할이란 뭐냐, 용의 역할이란 뭐냐, 옛 뱀의 역할이란 뭐냐, 할 때 그들은 노리는 게 있습니다. 그들이 노리는 게 없으면 인간은 도저히 짐승을 간파해 낼 수 없어요. 그냥 미지의 X가 돼 버려요.

이 세상 움직이는 몸통이 뭐냐, 눈에 나타나는 것을 조정하는 보이지 않는 것은 뭐냐, 모르죠. 성경에서는 짐승이라고 하는데, 짐승이 어떤 식으로 하는지를 우리는 감을 못 잡는 거예요. 그런데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니까 짐승은 해를 뒤집어 쓴 여인을 공격하게 돼 있어요. 그러면 그 여인이 무슨 여인이냐, 보통 여인이 아니고 뭘 낳아요. 태양을 뒤집어썼는데 그 여인이 이 지상에 뭔가 남기는 게 있어요. 그렇다면 해를 뒤집어쓴다는 것은 묵시적 용어잖아요. 해를 뒤집어쓴다. 뜨거워서 보통 시장 아줌마는 난로도 뜨거워서 안 되잖아요.

해를 쓴 여인이 역사와 유일하게 매치가 되는 역사적 사건을 남깁니다. 역사적 사건! 숨어있는 묵시가 역사적 사건을 남기게 되면 그 사건이 곧 이 땅에 있는 묵시적인 흔적이 되겠죠. 그게 뭐냐 하면 남자, 아들을 낳아요.

역사적 사건에 의하면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은 사람은 여자입니다. 마리아라는 여자죠.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시작됩니다. 여자와 여성이 달라요. 남자가 아내를 만났을 때 한 여자와 결혼했잖아요. 우리나라 결혼제도에 보면 일부일처제라 한 여자와 결혼했잖아요. 그런데 정신분석학자에 의하면 남자는 여자를 원하는 게 아니고 여성을 원했던 겁니다. 여성을 원했기 때문에 한 여자와 혼인을 하고 싶어 해요. 남자가. 왜냐 하면 처음의 남자는 자기의 결핍된 것을 찾는 본능이 있습니다. 남자가 남자로서 만족하면 되는데 자기 앞에 여자가 지나가니까 첫 번째 저 사람은 왜 나 같은 남자가 아닌가. 두 번째 나는 왜 내 안에 저 여자 요소가 없느냐. 내 몸에서 여자의 요소가 빠져있는 것은 곧 나의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어느 가정에서 딸, 딸, 딸, 딸이 셋 있는데, 자식, 자식, 자식, 하면 이걸로 충분한데 딸, 딸, 딸, 하니까 딸이 세 명이니까 이건 뭐가 없다는 뜻 이예요? 아들이 없다는 뜻 이예요. 세상에서 왜 한 몸 안에 남자, 여자 다 갖추면 될 문제를 왜 남자 아니면 여자고, 왜 여자 아니면 남자냐 이 말입니다. 그것을 정신과에서는 이렇게 해석하거든요. 사람이 남자와 여자로 나뉘어졌다는 것은 원래 나눠진 게 아니고 남자는 남자, 여자는 여잔데, 인간 속에 여자, 남자도 마찬가지지만, 남자 여자 다 같이 알 때만 그게 사람이다, 라는 일반적인 생각을 사람은 갖게 된다는 겁니다.

남자고 그냥 살고 여자도 그냥 살면 되는데 나한테 여자라는 요소까지 알면 아마 지금보다 내가 더욱 더 포괄적인 더 많은 걸 아는 우수한 사람일 수가 있다는 생각을 갖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자기가 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누락됐죠. 누락됐기 때문에 결혼을 해서라도 여자의 것을 나와 합체해서 남자로 있던 내가 여자로 더불어서 이상적인 하나의 제대로 된 모델 같은 사람으로서 완성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는 겁니다. 뭔가 미흡하게 되면.

그러면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결국은 남자는 여자를 원하는 게 아니고 원래 남자에서 나왔던 남자와 결합될 그 여성을 원하는 거예요. 원래 남자를 남자답게 만들었던 그 남성과 관련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본인은 남자가 아니고 남성을 대표한다고 생각하니까 나하고 한 집에 사는 여자가 여자이어서는 안 되고 여성을 대표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는 남자니까 쭈그려 있을게.’ 이러는 게 아니고 ‘나는 남자다. 나는 남자의 원형을 찾아가야 돼, 나의 원형을 찾기 위해서는 내게 걸 맞는 여성이 돼야 돼.’ 그러니까 아내하고 결혼하고 난 뒤에 만날 아내한테 실망할 수밖에 없어요. ‘니는 왜 내가 그리워하는 여자가 못 되는 거야.’ 그러면 아내가 하는 말이 ‘당신이 그리워하는 여성은 어떤 여성인데?’ 남편이 ‘그건 모르지.’ ‘왜?‘ ’니 밖에 모르니까.‘ 그럼 몇 명을 더 사귀어야 돼요? 몇 명을 사귀어도 안 되죠. 100명을 사귀고 101명 째 누가 또 등장하니까 쉽게 말해서 여자는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여자는 사귀어도 여성의 전부가 담겨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게 아니고 분명히 아내라고 사귀면 여성을 안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리 봐도 지가 원하는 자기가 기대하는 자기가 충족될 그 여성의 전부는 아니야. 그래서 또 찾고 또 찾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자는 여러 여자를 거느리고 싶어 하고 여자는 한 남자만! 된장을 한번 찍어 맛 봐도 된장 맛을 아는 것처럼 한 남자와 살아봐도 남자라 하는 것은 이렇다는 것을 한 눈에 꿰뚫어보는 거예요. 그래서 여자는 ‘니는 남자가 돼서 왜 이런 식이냐’고 다구치고 남자는 ‘다른 여자 또 찾아봐?’ 이런 식이 된다니까.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여성과 한 여인이 다른 거예요. 그러니까 이 여성은 분명히 단어는 하나지만 그 단어는 추상적인 하나를 말합니다. 통합적인 것. 전체를 다 부여하는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 이 여인은 뭡니까? 이 여인은 하나의 개인이 되겠죠. 그리고 개인이 갖고 있는 주체는 큰 주체, 여성이라는 주체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남자들은 이렇게 보고, 여성들은 남자 하나만 봐도 전체 남성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여성은 남자하고 한번 살아보면 이제는 남자에 대해서 더 이상 같이 살 마음이 ‘아휴, 살아봐도 그놈이 그놈이고…“ 그래서 여자는 남편을 통해서 남성이 갖고 있는 그 모든 것을 뽑아내려고 하는 거예요. ’이렇게 해야 되고, 신발 똑바로 신어야 되고, 잔소리해서 남자는 이러면 안 되고, 돈도 벌어야 되고, 온갖 잔소리를 해서 한 남자를 철판구이처럼 달달 볶아서 비빔밥 하면서 참기름 부어서 이리저리 달달 볶는 거예요. 그러니 남자들은 기겁을 해서 다른 여자 찾아다니고, 또 술집에 가서 화장 짙게 한 마담을 낭만을 위해서 쌍화차 사주고 거기 가 있고.

참, 학자들은 아직까지 몰라요. 왜 남자, 여자 구분돼 있는지 아직도 몰라요. 모든 갈등은 여기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아닌 거죠. 왜, 여자는 남자가 아닌 이상 온전한 여자가 아니고, 여자도 본인이 남자가 아닌 이상은 온전한 남자가 아니고, 둘이 합쳐야 되는데, 합쳐 봐야 둘 다 실망하고. 그러면서도 계속 머릿속에는 ‘온전한 사람은 따로 있을 것이다. 온전한 사람은 따로 있을 것이다.‘ 라고 찾아다니고.

 그래서 남자와 여자의 이 문제를 창세기 3장 15절에서는 뱀의 후손과 그 다음에 뭡니까? 여자의 후손! 참~ 신기하죠. 아까 요한계시록 12장 이야기했죠. 우리 역사적으로 봐서는 여자의 적은 남자요, 남자의 적은 여자인 줄 알고 있잖아요. 왜냐, 남자, 여자, 성은 두 개 밖에 없기 때문에. 사람은 남자 아니면 여자, 여자 아니면 남자로 보잖아요. 인간이 사랑하는 것은 남자는 여자하고 사랑하고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는 줄 아는데, 여기에 뭐가 비집고 들어왔습니까? 뱀이라는 제 3의 존재가 끼어들었다 말이죠. 이게 뭐냐, 제 3의 존재가 여기는 뱀이라고 돼 있잖아요. 창세기는 뱀, 요한계시록 12장에서는 짐승, 옛 뱀, 용으로 돼 있잖아요. 그런데 이것을 성경에서는 뭐냐 하면 제 3의 요소를 아기 예수로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걸 설명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까? 우리의 상식으로는 뭐냐, ‘아! 우리 인간 사이에 뱀이 들어왔구나, 그럼 뱀만 처치하면 되겠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뱀의 후손만 색출하면 되겠네.‘ 하잖아요. 막상 뱀을 찾는 방법은 뭐냐 하면 뱀은 노리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여자가 낳은 아들을 노립니다. 그래서 아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뱀도 숨어있다고요. 중요한 대목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 하는 것은 그 당시 바리새인들도 몰랐어요. 유대인도 모르고 심지어 제자들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이 오니까 예수님이 메시아인지 알았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제쳐 버리면 남는 것은 인간과 인간들의 토론과 의견과 생각과 사상, 그것만 있으면 돼요. 우리 바르게 살아서 착하게 삽시다. 나쁘게 살면 뱀 됩니다. 나쁜 놈, 뱀. 이러지, 진짜 뱀이라 하는 것은 누가 나타나야 돼요? 예수님이 나타나야 뱀이 나타나요. 그러니까 아기 예수님을 사람들이 메시아인지 못 알아본다는 것은 곧 뱀을 뱀으로 못 알아본다 이 말입니다. 뱀을 뱀으로! 뱀이 어디 성폭행범만 뱀이고 연쇄살인범이나 뱀인지 알지, 본인이 뱀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의 몸통이 뱀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짐승이란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다녀갔잖아요. 다녀가고 난 뒤에 이 역사라 하는 것은 묵시에 의해서 비로소 파악이 되는데 그 인봉, 그걸 편지 봉투 떼듯이 그걸 뗄 사람이 없는 기라. 그걸 떼 줘야, 그 명찰을 떼 줘야 묵시로만 돼 있던 그것이 묵시가 역사적인 사역으로 폭발하듯이 벌어지니까 그것을 어린양께서 딱 떼는 순간, 그게 언제냐고 묻지 마세요. 묵시한테는 언제냐고 묻는 게 아닙니다. 다만 계시가 주어지는 순간이라 이렇게 보면 돼요. 존재론적으로 이미 이 세상은 묵시의 세계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성령을 받아야 이 세상이 묵시의 세계고, 짐승이 지배하는 세계고, 그 짐승이 노리는 것은 우리가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공격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7교회에 성령이 보낸 편지라고 항상 성령이 나와요. 성령이 와야,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사도요한은 밧모 섬에서 계시를 받았다. 모든 게 성령으로 시작돼요. 성령으로! 그걸 뗄 때 묵시적 상황은 역사적 상황으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그걸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림으로 설명을 해드리면 이렇습니다. 전체가 몸통이고 머리가 있는데 요 머리를 제가 점선으로 하겠습니다. 요게 뭐냐, 짐승 이예요. 악마예요. 악마가 세상을 이렇게 역사를 이끌어 온 겁니다. 저보고 언제 이렇게 되느냐고 묻지 마세요. 묵시 세계는 언제라고 없어요. 존재는 언제란 말이 없습니다. 이 근호가 몇 년도 몇 월 달 이 근호냐, 이걸 묻는 게 이상하잖아요. 이름이라 하는 것은 어제도 이 근호일 것이고, 내일도 이 근호 일 것이고, 이렇게 이름이라 하는 것은 시간에 구애를 안 받아요.

주의 이름을 누가 공격한다? 짐승이 공격함으로서 비로소 짐승은 짐승의 합당한 이름을 얻는 겁니다. 짐승이 이름을 얻는다는 말은 짐승은 언제부터 짐승이냐고 그 물음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니까요. 항상 주의 이름이었어요. 그 주의 이름을 짐승은 항상 노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 그때부터이잖아요? 라고 물으면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건 잘못된 질문 이예요. 아기 예수가 태어났다는 말은 그 아기 예수 전과 후라는 게 역사적으로는 안 되고, 아기 예수가 옴으로서 계시! 그동안 덮여 있었던 커튼이 벗겨지는 겁니다.

생일이 되었다. 며칠 전에 제 딸 생일이었는데 케이크를 보자기로 덮어 놓고 화상통화를 하는 거예요. ‘생일 축하 합니다.’ 하고 내가 노래 부르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보자기 속에는 아직까지 뭐가 있어요? 케이크가 있는 거예요. 이것을 팍 펼칠 때 처음부터 보자기 안에 케이크가 있었던 거죠.

아기 예수님이 태어날 때부터 주가 되는 게 아니고 묵시적 세계에서는, 다만 아기 예수가 태어남으로서 이제는 보자기가 벗겨지는 거예요. 이 세상에 그동안 몰랐던 사실이 등장하는 게 뭐냐 짐승의 세계! 몸통은 짐승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거는 주님은 알고 있지만 우리는 모르잖아요. 성령이 오게 되면 인식론적으로 비로소 세상을 다시 보게 합니다. 야! 세상은 전부가 우리 예수님 잊어버리고 우리끼리 살자하는, 다시 말해서 영생 작정된 자만 영생을 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짐승이고 뱀이고 악마고 간에 다 주님께서 이렇게 부린 거예요.

애들 인형극 있죠. 랄라라~♪♬ 랄라라~♪♬ 랄라라~♪♬ 무대에서 쥬리엔드루스가 인형극을 하게 되면 애들이 그걸 보고 얼마나 이뻐합니까? 양치기 소녀 노래 나오면서. 주님께서 이렇게 딴따라라 딴따~♪♬ 딴따라라 딴따~♪♬, 하면 마귀가 설치고 여기는 핍박해라, 하면 핍박하고, 스데반 집사한테는 돌 던지라, 하면 돌에 맞아 죽고. 이게 처음부터 그랬었어요. 처음부터.

왜냐 하면 역사에 있는 인간들은 시간을 느끼지만 짐승은 시간을 몰라요. 처음부터 이건 몸통이었으니까. 처음부터 악마는 누구와 싸웠습니까? 주님하고 싸웠기 때문에. 짐승은 제일 싫어하는 게 뭐냐 하면 진짜 예수님이 이 땅을 방문하는 걸 제일 싫어했어요. 자기 집인데, 지 동네인데, 지 동네에 진짜 묵시가 들어와 버리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동방박사가 별 따라 와 버렸죠. 왔으니까 이거는 입을 막아야 되니까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을 범하잖아요. ‘실례하지만 메시아가 나타난 데가 어디죠?’ 물어서 가는 길에 입을 막기 위해서 동방박사를 살해하려 했는데 여기에 묵시적 존재, 천사가 나타나서 동방박사보고 딴 길로 새라 해서 샜잖아요. 그러니 성도라고 다 살려주는 게 아니고 동방박사는 살려주고 어떤 사람은 알면서도 그냥 죽는 사람도 있고 스데반 집사처럼, 사도처럼, 그냥 순교 당하는 사람도 있고,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그리고 베들레헴에 아기 태어나니까 와서 두 살 밑에 애들을 죽이고 예수님 가족을 또 잡기 위해서 군대를 파견했지만 천사가 와서 다시 어디로 빼돌립니까? 애굽으로 빼돌리죠. 그러면 이러한 모든 역사적 상황을 고고학으로 발굴하면 그게 나올 수 있어요? 예수님은 언제 애굽으로 갈 수 있는데 그걸 발굴해도 뭐는 안 나온다? 이 세상은 짐승이 그렇게 했다. 짐승이 그렇게 했다가 아니고 헤롯이란 역사적 인물이 괜히 성질나서 지 부하 부려서 예수님을 죽이려 했다, 이런 식으로 결론이 나오지, 숨어있는 묵시적 존재, 짐승이 있었다. 헤드라인에 뉴스 시간에 드디어 짐승은 드러났다. 이런 식으로는 아니다 말이죠.

인간은 아무리 해석해도 역사에서 시작해서 역사로 돌아가 버립니다. 왜 원인 결과를 거기서 찾아내려고 하니까. 오늘 지금까지 강의한 것의 중요한 것은 요한계시록에 있어서 모든 역사적 사실을 해석할 때는 뭐로 한다? 묵시로 해석해야 되고 그 묵시의 해답은 간단합니다. 뭐냐 하면 십자가 복음을 무조건 방해하려고 사람들은 어떤 갖은 수단을 동원하면서 역사적 해석을 그냥 역사적 해석으로, ‘묵시는 몰라도 돼, 너희들은 짐승 이름은 몰라도 돼.’ 이렇게 가려서 요 안에만 갇히게 하는 겁니다.

또 성경에 짐승이란 말이 나오면 역사적으로 되돌아오는 용어로서 ‘짐승은 이게 짐승입니다.’ 해서 짐승은 네로 황제, 짐승은 네로를 숫자로 풀이하면 666이고, 이런 식으로 요새 짐승은 적그리스도 교황을 말하는 것이고 이렇게 역사적 상황에서 역사적 상황으로 해서 자기가 짐승에 속했다는 것을 들키지 않게 만드는, 이런 해석들을 그동안 역사적 해석이라 해서 교회마다 다 내세웠습니다.

어느 인간이 ‘내가 짐승이다.’라고 이야기하는 자는 그동안 아무도 없었어요. 그런데 일곱 교회가 다 망했던 사실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교회가 망함으로서 교회가 돼요. 왜냐 하면 교회가 망해야 사람들은 교회를 안 믿게 되잖아요. 만약에 교회가 안 망하게 되면 그 교회는 뭐냐 몸통, 짐승의 하수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지상에 작은 짐승, 땅의 짐승이 나와요. 요게 요새 말하면 교회라는 겁니다. 땅의 짐승은 역할이 있어요. 뭐냐 하면 자꾸 성경에 나오는 짐승을 예수의 십자가 복음과 관련시키지 않고 자기들 교회 단체를 괴롭히면 이게 짐승으로 그렇게 해석하는 거예요. 신천지, 통일교, 전부 다 모든 기존의 장로교, 합동 측, 통합 측, 침례교 감리교, 다 마찬가지예요. 십자가마을도 마찬가지일 수 있고  다 마찬가지거든요.

날 건드리면 무조건 짐승인 거예요. 그런 해석!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해석하지 마시고요. 내가 짐승인 걸 드러내는 것이 영생받기로 작정한 주님의 작정입니다. 이렇게 돼야 돼요. 그동안 우리는 내가 짐승에게 고개 숙이고 짐승에게 아부했고 내가 만든 건 귀하고 남들이 만든 건 안 귀하고 이런 사고방식 자체가 나 위주로 살아갔다는 자체가 이게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주의 말씀을 애써 외면하려는 짐승의 성격이라고 보면 돼요.

그러니 아까 처음에 이야기한 죄인이 죄를 해석 못하듯이 짐승이 무슨 짐승을 해석합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짐승이 해석한 짐승이 짐승이겠습니까? 짐승이 해석한 짐승이 곧 그게 짐승입니다. 짐승이 세 번 들어갔어요.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간에 그건 다 영생 주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침착한 배려입니다. 염려할 필요 없어요. 그러니 역사적으로 만약에 그걸 십자가 복음을 모르고 그냥 역사적으로 구원을 원하는 건 항상 순간적인 결정, 순간적인 어떤 생각을 하는데 균형이라는 것은 순간적인 균형 이예요. 곧장 내려갑니다. 돌멩이를 올려서 산등성이에 올려놓으면 산등성이가 뾰족해서 다 올라와서 까딱까딱하다가 내려가듯이 인간은 영원히 자기가 하는 일을 굴려서 정상까지 올려놓으면 다시 쭉~~ 내려가서 힘들게 올려놓으면 또 내려가고 또 올려놓으면 또 내려가고. 톰 존슨이 그런 노래 불렀죠.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이라고. 조영남이 불렀나. 돌고 도는 물레방아 같은 인생.

딸 서울대학 나왔다고 그렇게 했더니만 우리 아는 친척이 있는데 시집을 안 가요. 또 고민이라. 세상에 그러면 모든 것이 영생 주기로 돼 있는 세상을 가지고 우리는 내가 잘 돼야 될 세상으로 하니까 이게 바로 짐승이 원하고 원했던 바입니다. 이래나 저래나 영생 얻으면 땡인데, 최고인데, 왜냐 하면 이건 우리 소관이 아니고 ‘주님 영생만 되게 당겨주세요.’ 우리가 지금 주님하고 협의할 입장이 안 돼요. 주님께서 이 모든 세상의 권세는 영생 줄 자에게 영생 주기 위해서 그러한 작업에 왜 되도 않은 우리가 거기다 티끌을 뿌리고 침을 뱉고 해요? 우리가 뭔데.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데!

그러니 나에 무리하지 맙시다. 자기 성공, 출세에 무리하는데 억지를 부리는 인생은 해서는 안 되죠. 억지 부리지 맙시다. 이래도 영생, 저래도 영생, 세상은 짐승에 따라서 이 십자가 복음을 될 수 있는 대로 안 들리는 곳, 안 듣게, 모르는 척 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자기 세력, 자기 교단 만들고, 전부 다 교회를 믿게 만들고 교단을 믿게 만들고, 자기 신앙의 연조를 믿게 만들지,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이 영생과 십자가 온다, 그걸 믿게 하는 세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짐승의 세계입니다. 요한계시록 해석 그렇게 해야 돼요. 깨끗하게 정리가 돼요.

그 다음 진도 나갑시다. 219페이지, 드디어 70이레 나옵니다. “발생적 성전 관과 주체“ 『70이레는 성전의 위상에서 배출되어 나온 시간 구조다.』문장 하나, 하나가 만만치 않아요. 성전의 위상에서 배출되어 나온 시간 구조다. 원래 시간이라 하는 것은 몸통에서 나오게 돼 있는데 성전이 몸통입니까? 몸통입니다. 왜 몸통이냐, 성전에는 누가 계시기 때문에? 주의 이름이 계시는 거예요.

그런데 출애굽기 15장 11절 한번 봅시다. 전에부터 이걸 설명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벼렀는데 기회가 없었어요. 11절 끝에 보면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12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6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의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이렇게 돼 있죠? 이 오른손이 왜 나오느냐 말이죠. 그냥 주께서 하셨습니다. 하면 우리는 아멘, 받을 건데 주께서 하셨습니다. 하면 예, 주께서 하실 능력 있습니다.‘ 이렇게 할 텐데 이 오른손이 왜 나오느냐. 주께서 왼손으로 하셨다. 하면 ’에이, 주님 아니야.‘ 우리들이 그럴 사람들이예요? ’에이, 주님 오른쪽으로 하지 왼쪽으로 합니까?‘ 그걸 따질 사람들이예요? 주께서 하셨다 하면 엎어져서 오른손으로 하든지 왼손으로 하든지 오른손으로 비비든 왼손으로 비비면 됩니다. 만반의 마음 준비 했는데.

여기서 오른손으로 돼 있다 말이죠. 오른손이 왜 나오느냐? 성경에서 오른손이 왜 나왔어요? 저는 이 이야기를 하는 신학자를 지금까지 본적이 없어요. 전부 다 모르니까 그냥 모른척하고 있는 거예요. 모르니까!

이 오른손의 비밀을 한번 풀어봅시다. 왜 주님이 왼손이라 하면 왜 안 되느냐? 주님이 오른손 있고 왼손 있다는 이게 희한한 거죠. 주석에 보면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오른손을 능력의 손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왼손이 능력이 전혀 없고 2급 장애자로 깁스 돼 있어요? 지금 이걸 어떻게 설명돼야 하느냐, 이렇게 설명됩니다.

여기 오른손이 등장한 시기가 애굽의 군사들을 홍해에다 빠뜨리는 대목이죠. 그렇다면 여기서는 뭐가 빠지느냐 하면 이게 빠져요.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라는 이 구원 문제가 이게 보류가 돼요. 다시 말해서 콩고물 달라, 이런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 이 말이죠. 여호와는 사실 용사시니, 하고 지금 싸우는데 싸울 때 여기에 6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그 다음에 뭡니까? 원수를 부수죠? 이제 풀렸어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는 우리 구원문제는 지금 하나님 앞에 뒤로 밀리는 거예요. 딱 접고 이건 생각도 하지 말고, 주님은 어떤 분이냐 하면 원수를 통해서 주님의 주님 됨이 드러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그걸 생각 못한 것은 성급함에 ‘저 어떻게 구원해요?’ 우리는 구원을 놓고 우리의 구원방법만 자꾸 챙기려고 하다 보니까 주님의 오른손은 뒷전이었어요. 오른손이 하든지 왼손이 하든지 우리는 건져주기만 하면 아무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은 안중에도 없어요. 왜냐 하면 하나님하고 주님이 달라요.

하나님하고 주의 이름이 다릅니다. 주의 이름은 전쟁하시는 분이고, 하나님은 숨어계시는 분이예요. 주의 이름이 없는데 하나님? 이건 마귀가 만든 하나님 이예요. 없어요. 반드시 주의 이름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나타나는 겁니다. “나는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이렇게 되지, “아버지를 본 사람은 나를 알아 볼 건데” 이게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도 아버지를 몰라요. 왜, 그건 예수님만이 아버지기 때문에, 우리들의 아버지가 아니에요. 아버지란 관계는 이게 언약 관계 속에 들어와야 아버지지, 그냥 무턱대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다고 아버지 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은 구원은 뒷전 이예요. 주의 이름은 언제 등장하느냐? 원수를 발각시키면서 같이 쌍으로 등장하는 것이 주의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원은 뭐냐, 하나님이 벌리는 주의 심판에 부산물 이예요.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게. 우리는 원래 구원 안 받아야 돼요. 구원은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주님 되기 위해서 나온 부산물에 뭐냐 심판과 더불어 구원입니다. ‘날 어떻게 구원시켜 주시렵니까? 하나님, 이건 애초부터 우리가 물을 수 없는 질문이고, 질문해서도 안 돼요. ’그저 주님이 주님 되시면 됩니다.‘ 그러면 주께서는 원수를 드러내면서 구원을 해주는 거예요.

뭐냐 하면 우리가 원수의 포켓 안에 있는 동전이거든요. 동전인데 주님께서 경찰이 돼서 ‘요놈 도둑놈’ 하고 멱살 쥐고 바짝 들어서 거꾸로 흔드니까 주머니에서 동전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 동전이 우리에요.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도둑놈이 와서 주인을 꽁꽁 묶어놓고 그 다음에 세간을 늑탈할 때 이미 하늘나라가 그렇게 진행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 구원이 중요한 게 아니고 주의 주되심이 하나님의 관심사입니다. 그 주되심은 원수가 나타나야 주가 되지, 원수 없으면 주가 안 돼요. 우리 구원하려고 주가 아니고 원수가 나타날 때 하는데 그 원수는 바로 원수를 잡았다는 걸 표현하는 자리가 하나님의 오른편의 자리예요. 왜 오른편의 주의 자리가 그 자리가 오른편 자리거든요. 이 주의 자리 앉으려면 원수를 쳤다는 흔적이 있어야 돼요.

그래서 원래부터 오른편이 주의 자리 되기를 증명하기 위해서 묵시적으로 시간 관계없이 처음부터 그건 오른편이 주의 자리 되기 위해서 원수가 등장했고 여기서 주의 왼손이 아니고 오른손이 원수를 쳐부수므로 말미암아 이 원수를 친 것은 주의 이름, 하나님이 생각하는 그 주님 되시는 분이 원수를 치므로 그 부산물로 뭐가 나오느냐 하면 17절에 보면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

그래서 홍해바다는 건너편이 없고 홍해바다는 막혀 있는 것이다. 주일 날 그런 이야기했죠. 홍해바다는 막혀 있는 것이지, 어디 건너편을 내다봐요? 그냥 벽인데요. 그 벽은 악마고 그 악마를 주의 왼손이 아니고 오른손이 죽이실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이 주님 되시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 덕분에 구원되면 안 되고요, 주님의 오른손의 능력과 함께 있을 때만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10분 쉽시다.

 

 

가락교회-70이레 논문(짐승과 주의 이름)130418-18강b -이 근호 목사

제 18강b

70이레는 성전의 위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성전에서 시간이 나온다는 게 이상하다 했죠? 우리 상식으로는 시간이 어디서 나오죠? 사람한테서 나오죠. 인물. 그런데 성전이라 하는 것은 건물이잖아요. 예배당, 건물에서 무슨 시간이 나와요? 건물 안에 누가 사신다? 하나님의 이름이 사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살던, 우리가 살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 동일하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하실 거예요. 동일하지 않습니다.

시간이라 하는 것이 우리가 시간을 생각할 때는 내 몸이 느끼는 것으로 다시 되받아서 느끼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의 시간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 위주로 시간을 펼치고 그걸 다시 회수를 하게 돼 있어요. 그러니 모든 시간은 누굴 위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펼쳐지는 시간들이죠.

그러면 이 시간은 무엇과 충돌하느냐 하면 시간을 느끼는 우리 몸하고 예수님이 생각하는 무한 몸에서 나온 시간하고 이게 충돌을 일으킵니다. 충돌을 일으키면 우리는 항상 과거 현재 미래로 흘러간다고 보는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응하게 함이라” 과거에 있던 이것도 이미 내가 있었느니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 그 예수님 말을 우리가 못 알아듣는 거예요.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우리는 내 몸의 시간을 다 진리라고 굳히고 있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미래라는 것은 과거에 경험한 것을 근거로 해서 우리는 미래를 생각하거든요. 우리의 미래라는 것은 과거 경험한 게 없으면 미래라는 게 생각이 안 납니다. 예를 들어서 삶이 너무 고통스럽다. 그렇다면 천국이라는 개념의 미래는 뭡니까? 고통스러우니까 굉장히 행복할 거라 하잖아요. 이 천국은 이것과 연결돼 있는 천국이기 때문에 이건 가짜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천국은 뭐냐 하면 미래에 이미 천국이 있고, 우리 몸에 주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몸을 거쳐서 우리에게 프리즘(빛을 반사하는)처럼, 그리스도 몸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다 보니까 이 천국은 뭐냐 하면 예수님을 섬기는 나라예요. 그런데 현재 내 삶이 고통스럽다. 왜 고통스럽습니까? 내가 내 몸 섬겨야 되는데 현실은 안 따라주니까 짜증나고 화가 나는 거예요.

지난 시간에 한 거 여러분 아시는가 한번 물어봅시다. 이 세상은 어떤 식으로 움직인다 했죠? 요한복음 17장 2절에 영생 줄자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다스린다 했죠. 그런데 우리는 내 현재 있는 나를 곱게 잘 유지하는데 모든 세상이 그렇게 흘러갔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바램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의 영생은 우리의 십자가가 우리를 죽이는 겁니다. 우리를 죽여서 다시 살리는 거예요. 나사로 있잖아요. 마리아 마르다 오빠, 죽었다가 나흘 만에 다시 살아났죠. 그리고 그 앞에 하신 말씀이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나사로가 아팠는데 죽어요. 죽고 난 뒤에 다시 주님께서 살려내시잖아요. 아파서 죽으려 했는데 죽기 직전에 건강케 하는 게 아니고 죽여 놓고 살린 이유가 나사로로 하여금 영생이 무엇인가를, 그리고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알려주기 위해서 나사로의 목숨 가지고 쥐었다 폈다 이렇게 이용하신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니까 세상은 내 중심이 아니고 누구 중심이다?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내 중심으로 돌아가는 내 인생을 어떻게 돼요? 주님께서는 짓밟아버려야 돼요. 그게 우리는 울고불고 난리가 나는 겁니다. 주께서 내 인생을 짓밟는데 대해서 우리는 ‘아야’ 하면서 ‘이럴 수 있습니까? 왜 하필이면 접니까? 왜 나를 이렇게 못살게 구십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사람의 고통이라 하는 것이 아픈 것이 고통이 아니고 이게 영원하다는 점에서 고통스러워요. 아무리 아파도 치과에 가서 고치면 낫는다는 희망만 있으면 아파도 견딜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옥의 고통이라 하는 것은 이건 길어도 너~~무 길어. 어떻게 빠져나올 길이 전혀 없고, 아프다. 계속 아프다. 어제도 아프고 오늘도 아프고 내일도 아프겠지. 안 아플 경우는 이미 종쳤다. 없는 거예요. 이거 생각하면 진짜로 목숨 바치고 예수 믿어야 돼요. 이 세상의 아픔이라는 것은 언젠가는 끝이 나잖아요. ‘아프면 죽으면 끝나지’ 이건 죽어도 안 돼요. 아예 죽을 수도 없어. 아픔 때문에 죽을 수도 없어요. 아프면 벗어나는 게 아니고 지옥의 고통을 맛보기 위해서는 지옥의 고통만큼 너도 계속 살아있어야 돼요. 계속 살아서 지옥이 얼마나 혹독한 저주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지옥 간 사람을 죽이지 않아요.

우리가 천국 가는 것은 우리가 잘나서 천국 가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려주기 위해서는 우리도 못 죽어요. 계속해서 영생토록 영생을 누려서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와 그냥 봐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계속 찬양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어요. 이런 식으로 모든 게 최종적으로 정리가 됩니다. 알곡과 가라지, 염소와 양으로 정리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몸통 되는 짐승이 얼마나 듣기 싫어할까요? 왜냐하면 자기 짐승은 이미 지옥이 자기들 집어넣기 위해 만들었거든요. 그러니까 짐승은 이미 끝난 거예요. 짐승은 이미 멸망받기로 작정이 돼 있기 때문에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자기가 못 먹으니까 계속해서 십자가 피 복음을, 용서하시는 그 능력을 어떤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서 계속해서 가리는데 그게 교회, 목회 성공, 이런 것 가지고 계속 가리는 거예요. ‘교회 나와서 복 받았습니까?’ 이런 식으로 계속 십자가를 가려 버리는 겁니다. 참 나빠도 보통 나쁜 사람들이 아니에요. 이 사람들.

성경은 말합니다. 주의 이름이 계시는 곳이 성전인데 성전은 거기서 새로운 시간이 나와서 기존의 성전 밑에 있는 사람들의 시간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그냥 일으킨다면 그걸로 끝나겠는데 그 이스라엘 망하게 하십니다. 니 시간은 아니고 이 시간으로 바꿔야 된다. 그래서 70년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70이레로 바꾼 거예요. 70년이라 하는 것은 누구나 아는 거잖아요. 1,2,3,4…70년, 누구나 아는 건데 이걸 뭐로 바꿉니까? 70이레로 바꿔버려요.

이레는 묵시적 용어입니다. 이건 인간의 시간에 붙이는 그런 시간적 단위가 아니에요. 묵시적 단어,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따라서 70이레를 주관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몸, 예수님께서 다 언약을 이루신 그 몸이  70이레의 내용으로 꽉 찹니다. 예수님의 몸에서 일어난 이것을 양탄자처럼 쫙 펼쳐버리면 이게 요한계시록 이예요. “나를 찌를 자도 볼 터이요 너희들이 나를 찔러? 너희들 이제 죽었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친히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말미암아 자기 몸을 찔렀던 자들에 대해서 사정없는 저주를 퍼붓습니다. 그리고 그 죽었던 그 몸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활용하는데 영생주기로 작정한 자에게만 그 피를 발라서 진노의 유리바다를 무사히 건너오게 합니다. 건너오면서 부른 노래가 그게 유명한 모세의 노래입니다. 이 모세의 노래는 젠틀맨이나 강남 스타일, 이것과 족히 비교가 안 됩니다. 그런 노래 백날 불러봐야 허무해지지만 이 모세의 노래는 오직 부를 자만 부를 수 있는, 옷에 뭘? 옷에 피를 발라서 흰 옷 입게 된 사람만 부를 수 있는 모세의 노래!!

그 모세의 노래가 유리바다거든요. 밑에 투명유리가 깔려서 보이잖아요. 보면서 진노의 불이 붙는 걸 보면서 유리바다를 건너가면서 부르는 거예요. 마음 같아서는 못된 인간들 진노 받는 걸 보면서 가고 싶지만 빨리 건너야 돼요. 고급 빌딩에 가면 발판이 유리가 돼서 다 보이는 것처럼. 유리바다를 건너면서 진노에서 고생하는 걸 보면서 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 모세의 노래라는 것은 원래 BC 1400년경인데 이것이 요한계시록에서는 바로 시간이 주님의 시간이기 때문에 우리 몸의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이 같이 나란히 섞여 있어도 아무 탈이 없어요. 그때 홍해가 지금도 되풀이 된다 우리는 이렇게 설명하면 돼요. 역사란 묵시를 되풀이하는 장이다. 이렇게 보시면 간단하게 깔끔하게 정리됩니다. 끊임없이 되풀이 되죠.

자, 그럼 설명 안한 게 뭐냐 하면 도대체 성전에서 시간이 왜 나오느냐, 그 문제인데 그것은 성전이라 하는 것은 주의 이름이 있다. 주의 이름이 있으면 있는 것이지, 시간이 왜 나오느냐, 시간이라 하는 것은 몸에서 나오거든요. 그래서 언젠가는 주의 이름이 우리 인격적 몸을 입을 때가 오는 겁니다. 언젠가! 그때가 되게 되면 그때라 하는 것은 묵시가 역사와 만나는 고 시점이기 때문에 그때가 되게 되면 역사 속에 묵시가 한꺼번에 다 쏟아져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젤은 의미 없이 돼 버리죠.

주사 바늘 생각하면 됩니다. 주사를 맞기 전에는 이 피는 내 피로 흐르고 있는데 여기 팔뚝에다 주사바늘을 꽂는 순간, 아주 작은 바늘을 꽂는 순간 주사바늘 액이 온 혈액에 퍼지겠죠. 얼마 안 있으면 온 혈액에 주사바늘의 약효가 다 퍼지잖아요. 그 주사바늘이 십자가고, 그 안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나를 역사적 존재로 봤는데 그 십자가 약효가 들어오면 그때 우리는 묵시적 존재가 되면서 어린양에 속한 사람, 144,000이 되는 거예요. 동시에 나만 그런 게 아니고 세상은 짐승의 나라로 비로소 보이는 겁니다. 성령의 주사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프로포폴 같은 것을 돈 주고 맞지 마시고 성령의 주사를 맞게 되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짐승의 나라에 있는 교회마저 반드시 다 무너져야 돼요. 교회 무너진다는 이건 욕하는 게 아닙니다. 교회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교회를 붙들고 교회가 신앙의 대상으로 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이지, 교회가 아니거든요. 말은 쉽다마는 이게 참~ 어려워요. 누가 교회 돈 내라 했어요? 지 돈 내니까 지 돈 낸 게 날라 가는 게 아깝죠. 돈 한 푼도 안내면 괜찮은데.

『보수주의 경향의 구약 신학자 카아저(Walter C. Kaiser)나 비-보수주의 경향의 구약학자인 침 멀리(Walther Zimmerli)나 모두 성전의 의미를…』이제 학자들이 나와요. 문제는 사람 손으로 만든 곳에는 주님이 계십니까? 안 계십니까? 안 계신다는 거예요. 아니 그러면 사람 손으로 안 만든 게 뭐가 있는데? 참 이런 게 어려운 거예요. 하나님은 사람 손으로 만든 곳에 계시지 않는다면 그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사람 손으로 만든 거예요. 모든 것이 사람 손으로 만든 것인데 그럼 주님이 안 계신단 말은 아예 없다는 말이 돼 버리죠.

이 말은 뭐냐, 너희들이 만들었다는 취지를 살려서 들어오지는 않고 내가 나갔으면 만들어지게 하죠. 주의 몸에 의해서 만들어지게 하는 성전은 어떻게 하느냐? 인간 손에 만들어진 것에 있지 않다는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 그걸 부숴버리죠. 그래서 부서진 것이 헤롯의 46년 된 성전인데 무너져 버립니다. 디도의 AD 7세기경에 디도에 의해서 완전히 박살나버려요. 그래서 성전이 없는 거예요. 성전이 없음으로서 사람 손으로 만든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닙니다.

그럼 성전이 어디 있느냐? 성전이 우리 몸이라고 하지 마세요. 이렇게 해야 돼요. 주께서 친히 만들어 내시는 것이 성전입니다. 이렇게 돼야 돼요. 그래서 성도한테는 이렇게 늘 수시로 주님의 복음이 성령을 통해서 전달됩니다. 어떤 경우냐 하면 우리의 눈이 묵시가 아니고 역사적인 의미로서 행복해지려고 할 때 그때 우리의 성전은 그렇게 책망을 받게 돼 있습니다.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니 몸이 니 몸이 아닌데 니가 왜 걱정하는데?’ 이런 식으로 오는 거예요. 내가 거하는 성전이라 했는데 왜 자꾸 내가 그랬으면 주인이 바뀌었잖아요. 주인이 주님으로 바뀌었는데 왜 걱정을 사서 하느냐 이 말이죠. 그런 식으로 책망을 해요. 니 몸이 니가 보기에는 역사적 존재가 돼서 니 나름대로 니가 어느 학교 나오고 어느 고향이고, 이렇게 나오죠. 주님한테는 그게 의미가 없다니까요. 하늘나라에서 어느 학교고 전라도 경상도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니가 전라도가 되든지 경상도가 되든지 어쨌든 니 몸은 이미 내 가 접수해 버리고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주님의 몸은 너를 새롭게 바꾸는 거예요. 예수님의 몸으로 바꾸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그 작업에 대해서 제발 좀 눈 돌리지 말라고 우리한테 책망을 하죠. 그러면 우리는 잠시 은혜 받았다고 하죠. 그런데 항상 뭡니까? 이게 정상에서 균형이 조금만 비뚤어지면 죽~ 내려갑니다. 잠시 은혜 받았다가 또 다시 쭈르륵 미끄러지죠. 다시 또 올라오죠. 그렇게 해서 주께서 우리를 살려주시는 겁니다.

여기서 카이저와 비-보수주의 침멀리 이야기를 하는데 카이저란 사람은 보수주의 유명한 신학자거든요. 이 사람 이야기를 잠시 220 페이지 거기 보면 카이저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집 개념과 성전 개념이 다른데 처음에는 집 개념으로 시작해서 나중에 성전 개념으로 되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언약도가 바뀌었다. 『노아의 집은 방주에 들어갔으나 노아의 거주한 건물은 방주에 들어가지 못했다. 방주가 노아의 집이다. 『그렇다면 노아도 버려야 했던 ‘실제 살림집’이 단지 하나님의 손으로 만든 집에 일부러 거주하실 이유가 분명치 않게 된다. 즉 같은 시간대에 ‘집’과 ‘성전’이 공존해야 할 당위성을 성전개념에서 뽑아낼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상당히 이야기를 복잡하게 했지만 이런 이야깁니다. 성전을 우리가 살 집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주의 이름이 살 집인데 카이저 이 사람은 지가 살 집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이게 뭐냐 구원이 너무 성급해서 그래요. 아까 뭐라 했습니까? 인간의 구원은 뒷전이라 했죠? 뭐가 우선이라 했죠? 주님의 주님 되심만 되면 돼요. 주님은 용사시고 주님은 누구하고 싸웁니까? 우리 붙들고 우리하고 안 싸웁니다. 우리는 싸움의 대상도 안 됩니다. 누구와 싸웁니까?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몸통, 보이지 않는 이 원수와 싸우는데 그 원수를 우리가 모른다는 거예요. 왜, 우리가 원수 안에 있어서 원수를 무슨 원수로 봅니까? 우리의 임금님으로 보지, 우리의 지도자요, 우리의 보살피는 분으로 보지, 원수로 안 봐요. 왜, 말이 통하니까.

우리 어머니가 이사를 하는데 제 아내가 가서 이삿짐을 싸면서 버릴 것을 재활용 차 불러서
실으니까 어머니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 것을 며느리 둘이 와서 다 들고 간다.’고 그걸 동네 호소를 하는 거예요. 정들었던 26년 동안 내 남편하고 같이 살았던 것들을 얘들이 와서 나를 무시하고 이걸 전부 다 버린다고 이럴 수 있느냐고, 이삿짐을 붙들고 이러는 거예요. 꼭 우리 모습 이예요. 우리는 그동안 마귀하고 너무 이야기가 잘 통한 겁니다. 척하면 척, 척, 척. 됐나? 기다려라. 감사합니다. 축복, 너무나 통해요. 그저 기도하면 응답 받고 너무나 마귀하고 잘 소통했기 때문에, 니가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고 이런 거 기도하지 말라 하면 오히려 누가 삐지냐 하면 인간이 삐져요. ‘칫, 기도해도 응답 받는 사람 한두 명이 아닌데 그런 거 기도하지 말라 하면 그러면 기도 안 해. 기도 안 해.’ 이런다 말이죠. 실제로 많은 사람이 기도 못 하겠다 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동안 마귀하고 너무나 짝짜꿍이 잘 맞은 거예요. 죽이 잘 맞은 거예요. 마귀하고 죽이 잘 맞아 버리면 그래가지고는 천국에 못 갑니다. 천국에는 마귀하고 헤어져서 애굽하고 헤어져서 주님하고 살아야 될 텐데 주님은 안중에 없고 그동안 마귀하고 짝짜꿍하다 보니까 천국 가면, 천국 가서 괴로워서 못 살아요. 차라리 지옥이 더 낫다니까요. 보고 배우고 들은 것이 그런 것만 봤기 때문에.

그래서 제 어느 글에 있죠. 천국에 미장원 없으면 여자는 무슨 재미로 사나 몰라. 천국에 미장원 없다면. 그저 애굽에서 먹었던 거, 애굽에서 즐겼던 거. 그거 그대로 천국까지 가서  하면 그건 천국이 주님 나라가 아니고 지 살림 차리는 지 나라입니다. 교회들을 보세요. 교회들이 그게 아니라고 이야기해야 될 텐데, 그것 가지고 사람들 꼬셔요. 응답 받는 사람 한둘이 아니라고, 믿고 기도하면 다 이루어진다고. 이루어지죠. 몸통이 마귀인데 그래요. 마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뭐만 가리면 된다? 십자가 복음만 가리면 돼요. 무조건. 예수라는 이름을 막 거론시켜서,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입니다. 예수님한테 빌면 응답 받습니다. 자꾸 그런 식으로 해서 결국은 죽어야 된다. 죽는 하나님! 참 중요한 문젠데.

하나님은 죽는 하나님 이예요. 나 살아있고 하나님 살아있다. 이런 하나님이 아니고 죽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죽는 하나님을 섬겨야 살 수가 있어요. 이거 어느 인간이 이걸 믿습니까? 그러니까 성령이 와야 이 어리석은 것이 믿어지죠. 진리로 믿어지죠.

살려고, ‘저 살려고 합니다. 어떻게 살려주세요.‘ 하면 ’나 죽었잖아. 너도 죽어야 돼, 그래야 나 죽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는 우리가 살려고 사는 게 아니고 죽으려고 사니까 그냥 곱게 죽읍시다. 그냥 곱게 죽으면 돼요. 죽기를 무서워 종노릇하는 사람을 주께서 풀어주려 하심이라. 해방시키려 해야 되죠.

그래서 카이저는 문제가 뭐냐 하면 구원론에 너무 집착을 했어요. 그리고 침멀리 봅시다. 『침멀리는 성전개념을 하나님의 자유로운 임재의 장소로 본다 성전이란 그 어떤 공간에도 얽매이지 않고』이렇게 돼 있어요. 침멀리가 뭘 빠뜨렸느냐 하면 하나님이 어떤 공간에도 매이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는 뭣 때문에 십자가 죽었습니까? 하늘에서 그냥 ‘너 올라와.’ 하면 끝나는 문제지, 그렇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침멀리 하면 카이저 다 잊어버리겠네요.

카이저는 우리가 거할 수 있는 곳이 성전이라는 거예요. 자기 구원론에 너무 집착한 거죠. 침멀리 문제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매이지 않는 분이 왜 사람이 만든 집에 안 온다 해놓고 왜 들어갔어요? 솔로몬 성전에 왜 계셨습니까? 이게 설명이 안 되잖아요. 사람이 지은 곳에 있지 않는다 해놓고 들어왔잖아요. 사람이 있으면 안 들어온다 했으면 안 들어와야 하는데 왜 들어왔느냐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죄인과 함께 있지 않는다 해놓고 왜 하나님께서는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왜 오셨어요? 그건 바로 십자가! 원수를 밝혀내줘야 그게 주님이 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의 죄를 밝혀주시고 그 죄를 싫다 하시면서 그 죄 속에 풍덩 뛰어 들어오신 하나님, 그래서 우리가 뭣 때문에 고민하고 우리가 뭣 때문에 걱정하는지 주께서 우리의 심보와 심지를 마음을 다 알고 계셔요. 지금도 우리 어머니 잃어버려서 걱정을 한다는 걸 다 알고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보면 법궤라는 상자에 집착해야 될 이유를 침멀리는 여기서 아무 답변을 못합니다. 왜 조그만 상자냐? 아카시아 상자, 금박 입힌 상자, 왜 상자에 하나님이 계시느냐 이 말이죠. 어디든지 계시면 어디든 계시든지, 나무 위에 계시든지 책상 위에 계시든지 밑에 계시든지, 왜 언약궤란 거기에만 계십니까? 성소에 주의 이름이 어디 계십니까? 바깥에 계신 게 아니고 어디 계십니까?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 위에 주의 이름이 계시거든요. 왜 거기 계십니까? 어디 요정입니까? 귀신입니까? 어깨에 있는 피로입니까? 보통 TV보면 어깨에 피로가 있데요. 악마처럼. 주께서 거기 달라붙어서 원숭이처럼, 거기서 뭐하시는데? 왜 거기 달라붙어요? 바깥에 막 왕래하시지, 왜 달라붙어요? 그게 뭐다? 언약이기 때문에.

왜 주님은 언약에 매이느냐에 따라서 침멀리는 자유주의 신학자는 아무런 답변이 없어요. 언약에도 안 매여야지 하나님이죠. 그러니까 침멀리의 사고방식은 신이라 하는 것은 마귀가 만들어 낸 마귀의 지배하에 만들어 낸 신은 아마 위대하시니까 얽매이지 않을 거야. 이렇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뭘 비껴가는 거예요? 십자가 피를 흘리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침멀리를 통해서 또 이렇게 우리한테 또 속여요.

지금까지 한 걸 정리해 보면 묵시에 계신 분이 역사에 흔적을 남겼다. 그게 바늘구멍 같은데 그게 뭐냐 오직 십자가다.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 몸이 생각했던 세상 관, 시간관, 이 모든 것은 숨어있는 악마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다. 어떻게 아느냐? 주님이기 때문에! 주님인데 어떻게 아느냐? 주의 이름은 우리한테 찾아오는 게 아니고 뭐부터 싸운다고 했어요? 주의 원수부터 싸우는 거예요. 그 원수부터 싸워서 원수를 드러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어디 속했다? 원수에 속한 거예요.

도둑놈 잡아서 거꾸로 흔드니까 호주머니에서 뭐가 떨어진다 했습니까? 동전이 떨어진다 했죠. 동전이 뭐냐, 동전이 우리들이라 말이죠. 원수 품속에 있던 것을 거꾸로 하니까 떨어지잖아요. 주께서 원수보고 달려들었는데 우리는 자꾸 주님 붙들고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받습니까?’ 지 주제파악도 안 되면서 그런 식으로 하더란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지은 건물에 안 계시지만 들어오시는 이유는, 들어와야 그 사람 손으로 왜 성전을 그렇게 만들었느냐, 그 죄가 하나님의 원수에서 나왔다는 것을 밝혀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지금도 주님께서 이 허접스런 우리 몸에 들어오는 이유가 이 몸의 모든 속성과 배어있는 습관이 어디서 나온 겁니까? 너무나 육신적이고 세상 적이잖아요. 그러니까 더욱 더 들어오셔야 되는 거예요. 걱정할 필요도 없는데 걱정하고 고민할 필요도 없는데 고민하고.

 마리아, 마르다가 ‘우리 오빠, 오빠가 죽어가요. 빨리 예수님 오셔서 낫게 해주세요.’ 오빠 죽는다고 걱정하잖아요. 주님께서는 ‘그래, 알았어.’ 안 갑니다. 어떻게 됩니까? 걱정이 절망으로 바뀌길 기다리십니다. ‘끝났어, 끝났어. 오지마라 해라. 예수? 오지마라 해, 죽어버렸어. 그렇게 우리가 오라고 했는데 우리가 주님한테 잡채도 해줬지, 탕수육도 해줬지.’ 그동안 얼마나 섬겼습니까? 예수님한테 여관비까지 다 줘서 잠재워줬는데. 남은 그렇게 잘 살려주고 그렇게 친하다는 우리 오빠, 오빠, 오빠는? 죽여 버리고. 마리아 마르다가 진짜 멱살 쥐고 싶은 심정으로 주님한테 달려들었잖아요. 그게 바로 우리 몸에 찾아와야 될 이유입니다. 아직도 녹녹치 않아요. 아직도 우리는 ‘주님, 주님’ 하지만 사실은 주님보다 나를 더 사랑합니다. 하여튼 나 죽으면 주님도 필요 없다고 그렇게 고함칠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제발 조용하게 죽어줘. 제발 나대지 말고 설치지 말고 조용하게 죽어줘. 가만있어도 죽고 설쳐도 죽는 거예요. 우리 컨테이너가 발판이 그렇게 가게 돼 있습니다. 기침해도 누가 죽을지 기침 안하는 내가 죽을지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머리 빠져서 심어도 소용없어요. 당뇨 걸려도 살게 하시면 살고 암 걸려도 죽고 그건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자, 이렇게 해서 카이저의 문제점은 지 살 궁리부터 먼저 챙긴다는 게 문제고 침멀리의 문제점은 주님께서 그렇게 위대한 분 같으면 십자가의 더러운 곳에 올 이유가 뭐냐를 밝히지 못한 게 문제되는 것이다.

그럼 둘 다 문제시 되면 그럼 성전은 뭡니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 성전은 뭡니까? 만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고 할 것이 아니라 성전이 이것이라고 이야기할 것 아닙니까? 성전이 무엇이냐? 성전은 하나님의 언약을 다루는 곳입니다. 언약을 다룬다는 말이 추상적인데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세요. 하면 장차 언약의 완성이 뭡니까? 십자가죠. 십자가를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구약은 모형입니다. 됐죠? 히브리서에 나오는 이야기.

구약에 나오는 모든 제사법은 신약에 오는 그것의 그림자요, 그 다음에 모형! 모형이라 하면 항상 설계 사무실에 있는 아파트 모형, 건물 모형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예쁘지만 들어가 살 수는 없어요. 머리가 커서 못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모형보고 ‘이 모형 한 평에 250만 원 주고 사겠습니다.’ 하는 바보는 없고, 이거 있다는 말은 이거와 똑같이 생긴 게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똑같이 생긴 게 있어야 되는데 똑같이 생기지 않았어요.

여기서는 성전이고 양이고 제물이고 제사장이지만 여기서는 실제로 뭡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죠. 모양새가 똑같지 않아요.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이렇게 됐기 때문에 그 모양 가지고 찾아가서 실체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냥 실체 먼저 보여주고 그게 모형이니까 잘 지켜봐라. 그 모형은 딴 게 아니고 우리가 살려고 해도 죽으니까 너무 살려고 하지 말라. 뿐입니다. 죽어야 산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면 니가 살게 될 것이다. 그런 넉넉한 말씀입니다. 아주 안심되는 말씀 이예요. 이제 안심 됐죠? 여러분!

그 다음에 221 페이지 중간에 봅시다. 성전은 어디서 만들어진다? 『성전은 ‘전쟁하시는 신’에 의해서 만들어진 기념 공간이다.』기념물이니까 모형적인 성질이 강하죠. 어떤 신입니까? 전쟁하는 신이죠. 그럼 전쟁한다는 말은 전쟁하려면 적이 있어야 될 게 아닙니까? 적은 누구죠? 주의 이름이 벌리는 적은? 이게 주의 이름이 묵시적 존재기 때문에 그 원수도 묵시적 존재입니다. 그걸 역사적 인물을 들이대면 안 됩니다.

목사님, 제가 알죠. 주의 이름의 원수는 구약 때 바벨론입니다. 바벨론, 바벨론 아니거든요. 왜, 바벨론도 주님이 쓰시는 몽둥이에 불과한 겁니다. 그럼 앗수르, 앗수르 아니거든요. 앗수르도 이사야에 보면 몽둥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몽둥이 밖에 없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원수는 누구지? 아, 사울인가? 역사적 존재를 집어서 이야기하면 안 돼요. 이게 역사 자체를 총괄하는 몸통은 따로 있기 때문에 그 몸통이 원수예요.

나 아니고 너가 원수다. 라는 말을 하지 마세요. 우리가 우리를 포함해서 원수가 되는 겁니다. 로마서 5장 10절,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된 자였는데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의롭다 함을 입었다” 이렇게 돼 있죠. 이미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돼 있는 것에 포함이 된 거예요. 역사적 특정 인물을 지목하거니 지정하고 그러지 마세요. 그러면 뭘 놓칩니까? 묵시 적을 놓쳐버려요. 묵시 적을 놓쳐버리면 예수님이 원수라고 지목한 것과 우리 역사적 인물이 같은 역사적 인물을 원수라고 지목하는 이것은 100% 엉터립니다.

죄인이 죄인을, 이 죄악 된 세상을 개선할 수 없습니다. 내가 판단하는 것, 백날 판단해봐야 옳은 판단 아니에요. 왜, 우리는 역사적 존재기 때문에. 같은 마귀에 속하면서 같은 마귀에 속한 것을 마귀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건 마귀적입니다.

그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장에서 했어요. 마귀에 속한 것이 마귀 나라를 무너뜨리면, 마귀 대장보고 뭐라고 하면 둘 다 망하지, 그게 말이 되느냐,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같은 편이거든요. 인간은 다 같은 편이예요. 왜, 역사적 밖에 파악을 못해요. 지한테 잘해주면 좋은 사람이고 못 해주면 원수라고 생각이 드니까 다들 그렇게 생각하니까 거기서는 해답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주님께서 승천해야 될 이유가 여기 있고 승천하신 분의 영이 성령이니까 성령 받게 되면 ‘주님은 승천하셨습니다.‘ 가 항상 우리한테 새겨지고 감동이 되면서 ’아! 역사 적에서는 따로 원수를 뽑아낼 수 없고 세상 자체가 원수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구원이 어떻게 되는가? 이렇게 되니까 구원은 불가능하죠. 구원이 불가능하죠. 제 말이 맞잖아요. 구원 받겠다 하는 것도 하나님의 원수에서 나왔다면 구원받겠다는 그 의지와 노력 자체가 이게 마귀로부터 나왔다면 도대체 ‘구원 한번 해볼까?’ 요것도 마귀하면 그러면 구원 자체를 생각을 안 할 수는 없는 거고, 왜, 너무 힘드니까, 어째 편하게 살고 싶으니까, 구원은 돼야 되는데 ‘구원 한번 해볼까, 말까.’ 요것도 원수거든요. 구원을 끄집어낼 수가 없는 입장 이예요.

그러면 구원을 끄집어낼 수가 없는 인간이 어느 인간이 구원을 받습니까? 자기가 구원을 받고자 해야 구원을 받는데, 그 끄집어내는 것도 반칙이라면, 누가 구원받아요? 막달라 마리아가 울면서 예수님께 향수를 뿌렸습니다. 그때 그 비싼 향수는 사실은 그 향수 모아놨으면 그 향수 누구 쓰려고 모아놓은 거죠? 본인이 쓰려고 모아놓은 거죠. 그런데 본인에게는 몸이 있잖아요. 구원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구원은 내 몸이 잘되는 게 구원이잖아요. 좋은데 사는 것.

그러면 막달라 마리아가 향수를 누구한테 뿌려야 됩니까? ‘예수님 고맙습니다.’ 하고 이제 향수는 자기한테 뿌려야 될 것을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몸에다 향수를 부어버립니다. 그러면 그동안 향수를 모아놓은 것이 남들 보기는 허비한 게 되지만 그동안 주께서 자기 몸을 장례식을 준비하기 위해서 미리 막달라 마리아 몸을 만들어 놓고 막달라 마리아로 하여금 창녀 짓을 하게 만들었는지 그건 모르지만 성품이 나쁘다고 하니까 창녀라 치고 창녀 짓을 하게 해서 남자를 밝혀서 모은 돈 가지고 향수를 산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예수님을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하나의 과정이었죠. 본인은 창녀지만, 과정이었죠. 그러니까 아낌없이 향수를 뿌립니다. 이 몸 받아주시옵소서. 제 눈물 받아주시고 원래부터 당신의 것이었습니다. 제 것은 없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 세상의 모든 것들은 주를 위하여, 누굴 만들었다? 주로 만들어 놓고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셨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예외 되면 곤란하겠죠.

자, 예수님의 몸을 끊어 버립시다. 끊어버린 사람이 옆에 구경했던 사람 누가 끊었습니까? 바리새인이 끊었어요. 바리새인이 이걸 끊어놓고 뭘 보느냐 하면 예수님 몸을 역사적 몸으로 보고 중요한 부분은 묻지 않고 묵시적 몸인 예수님 몸도 여기 예수님 몸에다 향수를 붓는 막달라 마리아도 우리와 똑같은 몸이고 그걸 구경하는 자기의 몸도 같은 세상의 몸이 동일한 역사 속에 있다고 본 거예요.

그래서 바리새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 저분은 도사하고 하면서 행실 나쁜 여인이 어떤 질 나쁜 여인인지도 모르고 질 나쁜 여인의 재물을 받느냐’ 라고 했어요. 성경에 보면 나쁜 짓을 한 그런 것들은 이웃사랑에 도움을 주면 안 된다고 했어요. 창녀가 버린 돈 가지고 성전에 내면 안 되듯이 나쁜 짓해서 번 돈으로는 안 돼요. 나쁜 짓해서 벌은 돈 가지고 저렇게 해도 저리 좋다고 히히덕거리니 뭐가 좋겠나, 이렇게 된 거예요. 이건 뭐냐 이 중에는 모두가 역사적 몸이죠. 특수한 묵시적 몸이 없죠.

그런데 보세요. 이 막달라 마리아는 자기 몸을 버리고 주님의 몸을 위해서 있다고 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사람의 정해진 모델입니다. 신약에 있는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전부 다 요 말씀 그대로 100% 우리한테 적용이 돼요. 그래서 세상에서 살면서 우리가 성령의 은혜 받는 순간이 요런 순간에 은혜를 받습니다. ‘야, 내 몸도 아닌데 내가 너무 걱정을 하는구나. 발걸음도 세신다는데, 지금 어머니 발걸음을 주께서 세고 계실 텐데.’ 걱정을 내가 한다는 자체가 다시 내 위주의 주체를 생각한 게 아닌가, 다시 한 번 반성하게 되죠.

이것을 어떻게 합치느냐, 주께서 일부러 사건을 일으켜요. 자꾸 난처한 사건을 부딪히게 만듭니다. 이게 한번 행했다 싶으면 시지프스의 바위처럼 이 조시로 죽 하면 좋을 텐데 하면 사건이 나서 우르르 다시 무너지고, 한 개 해결되면 다른 게 터지고, 이거 해결되면 이게 터져 버리고 그럴 때마다 우리의 순간, 순간 그 틈 사이에 묵시가 스며들어오는 그런 느낌을 받게 됩니다. 성령을 통해서. 못 받으면 할 수 없고.

다음 222 페이지, 여기 『‘주의 이름’ 이외의 딴 이름이 걸리고, 경배 받는 것을 용납 못한다.』주의 이름 말고 다른 이름이 뭐죠? 인간의 이름이죠. 그래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을 안 받는다는 거예요. 인간의 이름, 마귀 이름이라 했는데 왜 인간의 이름이죠? 이 목사님 당신 주장에 의하면 주의 원수는 누굽니까? 악마 아닙니까? 악마 같으면 주의 이름하고 싸워야 하는데 왜 여기는 인간의 이름이냐? 이건 안 맞는 이야긴데, 이렇게 궁금해 하실 거예요.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해도 참고 …, 여러분, 주의 이름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역사 속에 들어온 하나님이 주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이름을 가진다는 것은 이미 역사 속에 들어왔다는 거예요. 주의 이름은 같은 역사 적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만나는 것은 인간의 이름과 만납니다. 그러나 그 인간의 이름 배후에는 뭐가 있어요? 진짜 주의 이름을 공격하는 원수가 있겠죠. 하지만 이 땅에서는 인간의 이름과 싸우는 겁니다. 이게 마태복음 16장에 나오죠. 베드로가 이야기할 때 “사단아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그 다음에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사람의 일은 하나님의 일과 원수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사단아 물러가라“ 했으니까 사람의 일을 하게 하는 배후 주동자가 누구다? 바로 사단 이예요.

또 베드로가 “예수님 제가 버리지 않겠습니다.” 하니까 “마귀가 청구하려고 나한테 부탁했는데 내가 거절했다. 베드로야, 니가 니 인생 관리하는 게 아니고 내가 마귀하고 싸워서 그래서 싸운 능력으로 너를 관리하는데 자꾸 니 힘으로 뭔가 소원을 이루려고 하니까 자꾸 주님의 이름이 개입될 여지가 없어요.

그리고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기 전에 만날 때는 가야바 제사장 청원경찰에게 잡히게 만들죠. 가야바 청원경찰 그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할 뿐인데 그것도 배후에 악마가 있잖아요. 그런데 베드로가 누구 편을 듭니까? 그런데 예수님 편을 안 들잖아요. ‘나는 저분을 모릅니다.’ 쫄았어. 왜 쫄았어? 자기는 주님, 주님 하지만 사실은 이미 자기는 벌써부터 어디에 쫄았어요?  세상 권력에 푹~ 젖어서 큰 소리 치지도 못하는 거예요.

예수님하고 있을 때는 객기를 부려서 칼 가지고 말고의 귀를 베고 까불고 했죠. 막상 잡히고 나니까 끽 소리 못하고 고개 푹 숙이고 신창원의 원숭이처럼 이렇게 까불고. 부산에 있는 원숭이도 지가 잡히고 보니까 지가 인간인 줄 알고 고개 푹 숙이고 수갑 찬 것처럼. 같잖아서 지가 인간인 줄 알고 흉내를 내요. TV를 많이 봤는지. 체포되면 고개 숙이는 것 있잖아요.

주님께서 기도했기 때문에 우리가 한 발짝, 두 발짝 천국으로 가는 겁니다. 지금 세상에 있는 사건들 우리 힘으로 다 갊으려 하면 우리 몸이 100개라도 안 돼요. 이리 터지고 저리 터지는 것을 어떻게 지금 막고 합니까? 안 된다니까요. 개성공단도 해결해야 되지, 한화 연성해야 되죠, 축구 팀 올림픽 나가야 되죠, 지금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죠. 싸이도 젠들 맨 떠야 되죠.

구약부터 계속해서 묵시가 계속 역사를 건드려 온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가 다른 나라 역사와 달라요. 다른 역사는 묵시를 동원해도 잘 됐다 이런 쪽으로 가잖아요. 이거는 계속 ‘이스라엘은 영원하다.’ 하나님이 ‘영원한 것 좋아하네.’ 다 부숴버려요. 자꾸 파쇄해 버리고 부숴버리고 멸망시켜서 ‘죽어라. 죽어라.’ 하면서 결국은 죽어버린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오늘날 우리 인생하고 똑같아요. 살아보려고 성도로서 잘 살아야 주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까? 살아보려고 하는데 일 못하게 하죠. 꽃이나 찍고 다니죠. 뭐 할 수도 없어요. 그냥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우리를 죽으라고 있는 거예요. 제발 좀 조용하게 사라져줘. 일은 내가 할 테니까 니가 설치지 말고, 니가 복음 전하지 말고 그냥 조용하게 죽어줘. 내가 알아서 택한 백성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다 살려낸다 말이죠. 그래서 모든 권세는 누가 쥐고 있느냐 하면 우리 주님이 쥐고 있는 거예요.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222페이지 밑에 보면 『영구히 파멸된 곳을 향하여 주의 발을 옮겨 놓으소서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원수가 왜 성소를 공격합니까? 거기에 누가 있기 때문에? 주의 이름을 공격하죠. 그러면 원수가 성전을 불로 태웠잖아요. 불로 태웠을 때 누가 절망하느냐 하면 성전에 하나님 계신다고 믿던 이스라엘 사람, 유다 사람들이 절망을 하죠. 그거 하나님께서 원했던 거예요.

교회가 망하잖아요? 교회 망하니까 교인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버린 줄 알죠. 주께서 원하시는 겁니다. 그거 구원의 과정 이예요. 사람이 믿는 순간 그것은 하나님의 원수 공격 표적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나를 믿는다? 내 통장을 믿는다? 내 건강을 믿는다? 항상 그게 표적이 돼요. 주께선 건강을 믿으면 건강을 다치게 하고 통장을 믿으면 통장을 비게 만들어서 계속해서 합력하여 우리로 하여금 영생의 길을 가도록 이끄십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면 머리 통 밥 굴려서 두 번 다시 통장 신경 쓰면 내가 성을 간다. 이러거든요. 그런데 안 쓸 수 없도록 그렇게 유도해요. 주께서 일을 이렇게 만들어요. 안 쓸 수 없도록. 그러니 어쩔 수가 없어요. 그냥 질질 끌려가시면 되는 겁니다.

『주의 성소를 불사르고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라고 하죠. 그럼 요게 구약 시편에 나온 말씀인데 시편 이것이 신약에 그대로 이루어집니까? 안 이루어집니까? 그대로 이루어지죠. 그대로 이루어져서 이스라엘 헤롯 성전은 불타 버리죠. 불타 버리면서 누가 불타게 했을까요? 라고 묻는 거예요. 그때 열 두 사도가 막 탄식하면서 ‘이럴 수 있습니까?’ 울고불고 난리 했습니까? 아니죠. 손 탁탁, ‘내 그럴 줄 알았어.’ 왜, 이미 마태복음, 마가복음 마지막에 주님께서 성전 불탄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안 했어요? 무화과나무 비유할 때 했잖아요.

이걸 제자들이 성령 받고 난 뒤에 제자들이 다시 회개해 보니까 아! 망해야 할 자들이 망했다. 그 말은 안 망할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이구나. 하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야! 주께서 새로운 성전을 만들어 놓고 저쪽을 불태우는 아! 이런 방법을 사용하셨구나. 아는 거예요.

223 페이지 중간에『이 부정과 긍정이 성전 파괴가 일어나는 시점에 ‘선지자의 몸=선지자의 신체‘를 통해서 역사 한 가운데 등장하게 되는데』이거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자, 무슨 설명하려고 하느냐 하면 성전에 누가 들어있다? 주의 이름! 주의 이름이 추상적이죠. 추상 적에 요게 뭐가 있느냐 하면 인물, 인격체가 돼야 되겠죠. 요 중간 과정에 선지자 있고 주의 영이 임한다. 아시겠죠. 그냥 성전에서 뿅, 해서 사람이 퉁, 신선 나타나는 게 아니고, 성전이 깨지면서 그 성전에 있는 고난이 선지자의 고난으로 바뀌면서 성전 고난 받는 거와 마찬가지로 선지자가 고난 받는다. 왜 선지자는 누가 있기 때문에? 주의 영, 주의 이름이 있는 선지자가 고난 받을 때 나처럼 장차 오실 예수님도 주의 이름으로 오시지만 내가 고난 받는 것처럼 이렇게 고난 받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선지자 이름이 뭐냐, 인자라고 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이름은 하나님의 원수가 관계되는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주의 이름을 우리 구원과 연결시키려 했습니다. 주께서 주의 원수를 이김으로 그 부산물로 우리가 덜렁 구원이 되었사오니 이미 구원됐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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