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사항

70이레논문5-틈

아빠와 함께 2023. 7. 7. 16:20

가락교회-70이레 논문(틈)130404-17강a -이 근호 목사

제 17강a

오늘은 214페이지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70이레를 하기 위해서는 지금 무슨 대목을 언급해야 되느냐 하면 인간의 주체에 대해서 언급을 합니다. 70이레 하는 것이 70☓이레니까 일주일, 그 일주일을 7일이라 하지 말고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하면 7년, 그러면 70☓7년=490년, 그래서 딱 나와서 우리 70이레 끝나는 날이 훤히 나오네,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뭐가 빠지느냐 하면 ‘이레’라는 것을 계산할 때 인간의 자아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우리 나름대로의 자아를 형성하는 시간관이 있다 이 말이죠. 그 시간이 365일은 1년, 이레는 일주일이다.

하나님께서 그 인간들이 사용하고 있는,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이 따지고 있는, 계산하고 있는 이 시간을 가지고 사용하면서도 하나님의 그 시와 그 때는 모르게 감추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실까요? 몇 년도에 오신다. 19..년도에 오신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될 텐데 2014년도 5월 달에 주께서 오신다. 얼마나 쉽습니까? 그러니까 그때 준비해서 주요소에 가서 기름준비해서 신랑 오시면 영접해라. 구원 시키는데 이렇게 쉬울 수가 없잖아요. 도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지옥 가는 인간들 불쌍해서 하나님이 천국을 만들어 놨습니까? 2014년도 5월 달에 그때 갈 테니까 기름준비 하고 오너라. 얼마나 쉽게 구원할 수 있는데 왜 그런 방법을 사용을 안 하느냐?

그것은 인간에게 무슨 문제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창세기 3장 24절에 하나님께서 생명나무 가는 길을 막아놨어요. 그것은 인간이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인간이 인정을 안 하려고 해요. 침해 걸린 사람이 자기 침해 걸렸다는 것을 인정을 안 하려고 하는 거예요. 자기는 잘할 수 있다는 거예요. 집 찾아올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주변은 다 알죠. 집을 못 찾고 지금도 헤매고 있다는 걸 다 알잖아요.

인간도 침해 걸려서 천국을 찾아올 수 없어요. 그런데 본인은 찾아간다는 거예요. 날짜 이야기하고 어느 장소에 가라고 하면 간다는 겁니다. 어느 특정 장소에. 하늘나라가 이때니이까? 또는 다른 말로 이곳입니까? 인간이 생각하는 이때, 이곳, 전부 다 뭐냐 하면 천국과 해당이 안 되고 이 세상 속의 일부입니다. 팔짝팔짝 뛰는 것밖에 안 돼요. 아무리 팔짝 뛰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걸 성경에서는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갇혀있다. 갇힌 자가 빠져나온다? 말이 안 되죠. 빠져나올 것 같으면 그건 제대로 가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 갇혀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이게 뭔 뜻이냐 하면 못 빠져나온다. 빠져나올 수가 없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만약에 성경을 보고 공부하러 나왔다. ‘왜 나오십니까?’ ‘구원받기 위해서.’ 이 답변은 뭐가 문제가 있느냐 하면 주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어떻게 답변하겠어요? 만약에 ‘니가 뭔데 구원을 왜 받아야 되지?’ 거기에 대한 답변을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거저 구원받고 싶어요.’이란 말은 안 돼요. 왜냐 하면 먼저 우리로부터 왜 따져야 되느냐 하면 우리가 과연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우리가 점검을 안 한 겁니다. 구원받을 자격이 점검되고 난 뒤에 거기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그런 해답이 주어질 때 ‘너 구원 한번 실습 받아봐.’ 이렇게 돼야 논리가 맞거든요.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지금 교도소에 갇혀 있는데 ‘이번 가을에는 내 아들 운동회 때 몇 시에 참석하지?’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교도소장이 뭐라 하겠습니까? ‘니 지금 갇혀 있어. 왜 이래, 정신 차려. 침해 걸렸어? 왜 이래. 가기는 어딜 가. 못 나가. 너 15년 남았어.’ 그렇게 된다 이 말이죠.

세상 교도소는 15년이란 기한이 있잖아요. 그런데 인간에게는 갇혀있어 버리면 이게 15년 정도가 아닙니다. 죄를 적당히 지었으면 어떤 사람은 15년, 20년 되는데 인간이 따먹은 선악과는 스스로 선악과를 세척을 안 하는 이상은 이건 성립이 안 돼요. 선악과 안 따먹은 것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한 인간은 생명나무 끝났습니다. 없습니다. 선악과를 토해내든지 세척하든지 그렇게 해야 돼요.

성경은 간단히 이야기해서 새로운 피조물 돼야 된다고 해요. 또 다르게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니 니가 다시 한 번 태어나 봐라. 우리가 무슨 수로 다시 태어납니까? 우리가 무슨 수로 새로운 피조물 됩니까? 우리가 창조주 같으면 창조주 내가 나라는 피조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데, 우리는 창조주가 아니고 피조물이잖아요. 피조물 입장에서 피조물이 자기를 만들어 버리면 지가 창조자이지 그게 피조물이겠어요? 안 되는 겁니다. 천주교고 기독교고 전부 다 이건 사기에요. 되지도 않는 것을 예배당 빨강 건물 만들어서 사람들 모집하게 된 거예요. 이것을 부동산 사기라 하죠. 개발도 안 되는데 돈 받아먹은 거예요. 투자하라고. 십일조 하라고.

오늘 다니엘 9장에 보면 아까 쉬는 시간에 질문했습니다만 24절에 보면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이 정하라고 한 게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다니엘 자기 아이디어에요? 아니면 누구 아이디어죠? 누가 일러준 거예요? 가브리엘이죠. 그럼 가브리엘이 안 왔다고 치면 다니엘을 이걸 알까요? 모를까요? 모르죠. 다니엘 본인도 안 되는데 우리가 어떻게 돼요? 본인도 안 되는데.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바쳤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 바쳐서 구원받을 거 같으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 바쳐서 구원 받았습니까? 아니죠. 만약에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 바쳐서 구원 받을 거 같으면 지나 걔나 지 아들 낳아서 다 잡습니다. 구원이 더 중요하니까. 인생은 짧고 천국은 영원하잖아요. 짧은 인생 안 되잖아요. 길게 살아야 되니까. 어느 집에 딸 하나밖에 없다. 그럼 새장가 들어야지. 해서 아들 낳아서 아들 잡으러 가까운 산에 올라가서 잡아야 돼요. 그런데 문제는 그걸 잡을 때 아브라함이 뭐라 한지 알아요? ‘내가 아들 잡아서 구원받는 게 아닌데.’ 이러면 아들 잡은 게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구원받은 것은 예수님이 피 흘려서 구원받은 거예요. 그게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앞에는 어떤 인간이 자기 아들 잡아도 구원이 안 된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하는 거예요.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니가 예수를 믿은 것이 행함이냐, 아니면 성령의 선물이냐, 묻는 겁니다. 성령의 선물로 온 겁니다. 그렇게 구원받게 되면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았다는 소리를 못하고 주께서 구원시켜 주려고 믿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창세전부터 구원받을 자는 구원받으라고 우리에게 성령 주셔서 믿게 했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자기가 믿음으로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주님이 주신 것으로 예수를 믿게 되는 거죠. 그러면 뭐가 부정돼야 돼요?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도 부인돼야 돼요.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그냥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 그걸 믿는 걸 믿음이라 해요. 믿음이라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이야기해줘야 되겠죠.

다시 이야기해서 선악과 따먹고 인간은 죄에 갇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 24절에 “니는 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경의 나머지 모든 일들은 뭐냐 하면 인간이 아무리 시도해도 오지 못했다. 이 이야기가 되겠죠. 아무리 인간들이 노력해도 오지 못했다. 기어이 오지 못했다. 그걸 분명히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요한계시록 같은 경우에는 뭐냐 하면 그래도 온 사람이 있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요, 그리도 예레미야, 다윗 다 구원받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떤 부자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께 온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모든 걸 팔고 오라 하니까 그 소리 듣고 가버렸죠. 그 사람이 모든 걸 팔았으면 구원받았겠습니까? 안 됩니다. 팔고 예수님 따라오면 또 예수를 결국 버리게 될 사람 이예요.

그러면 부자 청년이든 백부장이든 소위 어떤 사람이든 예수님께서 건져주셔서만 구원된다는 명확한 결론이 되겠죠. 그러면 예수님이 건져줬다는 말을 믿는 사람은 어떤 마음가짐이 되느냐 하면 ‘내가 그동안 내 힘으로 구원받고자 한 것 때문에 주님께서 피를 흘려야 했다.’는 사실을 안 겁니다.

우리가 구원 안 된다 해서 가만있을 인간들이 아니거든요. 부지런히 찾잖아요. 그런 부지런히 찾고자 하는 것 때문에 정작 예수님의 죽음이 의미 없이 돼 버렸어요. 시시하게 돼 버렸어요. 내가 십일조도 바치고 내가 봉사도 하고 내가 어쩌다 보니까 점점 더 예수님이 거저주시는 피 흘리신 그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겁니다. ‘나도 할 수 있다. 나도 할 수 있는데 왜 나를 무능한 자로 만드느냐, 전적으로 너는 아무리 해도 안 돼, 이런 식으로 자꾸 우리를 구박하고 몰아세우느냐, 나는 십자가는 이제 듣기 싫어. 내가 할 수 있는 도리를 하고 싶어. 십자가 믿는 것도 내 믿음으로 믿고 싶고, 뭐 하는 것도 성령 받아서 내가 기도 빡세게 해서 얻고 싶고, 전부 다 내 쪽에서 시도해서 내 쪽에서 다시 수확을 거두고 열매를 거두는 그런 식으로 살고 싶어.‘라고 하니까 구원을 받은 사람이 아닌 거예요.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 그런 사람들을 논문대로 하면 주체라고 할 수 있어요. 인간의 주체란 말은 쉽게 하면 이런 컵이라든지 돌멩이, 라이터, 책, 카메라, 이런 것들은 무생물이라 하죠. 무생물의 특징은 자기주장을 안 한다는 거예요. 컵을 여기 있다가 여기다 놓으면 컵이 반발합니까? ‘이건 내 자리다.’ 라고 돌아가려고 합니까? 그런데 인간은 어떻습니까? 인간은 여기 있다가 여기 가면 ‘아, 이거 내가 맘에 안 드는데.’ 내가 전에 있던 자리를 생각하죠.

그래서 주체란 뭐냐 하면 ‘내가 보고 있는 나를 보는 것,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를 내가 생각하는 것’ 나는 생각한다. 누가 생각해? 내가 생각하지. 그걸 어려운 말로 자기 자신을 대상화한다. 그림이라 보면 돼요. 그림은 생물입니까? 무생물입니까? 무생물이죠. 저 화분 무생물이잖아요. 딱딱하잖아요. 때려도 ‘아야’ 하지 않잖아요. 그처럼 인간도 하나의 저런 것처럼 자기를 대상화하는 거예요. ‘지금 내가 뭘 하고 있지?’ 배고프면 되는데 앞에 뭘 붙인다 했습니까? 내가 배고프다.

지난번에 이런 이야기해서 굉장히 어려워졌는데 또 오늘 어려운 걸 해야 되겠습니다. 배고프면 되는데 ‘지금 난 무슨 상태야? 아! 내가 배고픈 상태구나.’ 내가 나를 배고픈 나를 생각할 수 있는 나, 이게 주체라는 겁니다. 주체는 사실은 없는 거예요. 주체는 실체가 없는데 그냥 배고픈 이 몸둥아리만 있는데 주체는 그걸 뭡니까? ‘저 배고픈 인간이 누구지? 나지, 나야.’ 몸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나’라는 것은 나중에 등장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이런 주체 있는 것이 나쁜 게 아니에요. 원래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 놨기 때문에 이걸 나쁘다고 보면 안 되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 놓은 거예요. 나쁜 것은 뭐냐 하면 내가 나를 바라보는데 그 바라보는 나를 내가 관리하겠다고 나설 때 그게 나쁜 거예요. 발걸음도 세시고 머리카락도 세시고, 지금도 어두운데 이 추운 밤에 길을 헤매고 다닌다고 생각하면 끔찍한 거예요.

내가 뭔가 되고자 하는 게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게 어디서 나온 더러운 버릇이냐 하면 선악과나무가 있고 따 먹지 마라 하면 ‘아! 따먹지 마라는 나무가 저기 있고 나는 여기 있다.’ 그러면 끝난 문제를 ‘저 따먹어 봐?’ 왜 이런 실수를 했죠? 인간이. 마귀가 그렇게 꼬였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니가 생각한 그 이상의 신이 될 수 있다고 부추긴 겁니다. 내 몸이 그냥 있으면 되는데 마귀는 현재 나와 다른 나를 하나 심은 거예요. ‘니 지금 신이 아니잖아. 그런데 신이 될 수 있다니까.’ 마귀가 신을 인간을 모델로 삼아서 인간 앞에 내세운 겁니다. ‘너는 신이 될 수 있어. 너는 신이 될 수 있어.’

벌써 신을,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나는 나라고 생각 안 하고, 내가 그 자리를 내가 접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악마가 그렇게 부추긴 것은 마귀가 초장부터 인간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에 대해서 하늘나라에서 대적했던 그런 경력이 있기 때문에 그 성질을 인간에게 집어넣은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인간이기를 만족하지 않고 신 같은 나를 그리워하게 돼 있고 그걸 목표로 움직이며 나서게 돼 있어요.

그러면 그 신 같은 나와 나 사이에 갭이 생기잖아요. 그 갭을 무엇을 메꿉니까? 메꾸는 방법 있어요? 없어요? 애초부터 하나님이 그 메꾸는 방법을 허락한 적이 없다고요. 허락한 적이 없다는 말은 인간은 비현실적인 존재예요. ‘아! 내가 날개가 있다면 날아볼 텐데. 나에게 날개가 있다면.’ 날개 없는 나를 하나님이 만든 건데 그 날개 없다는 것을 내가 만족을 안 한다고요. 왜, 나는 날개 없어? 그러면 있는 나를 인간은 상상하거든요. 지금 내가 생명나무가 없어? 내가 생명을 따먹는 걸 한번 생각해봐? 이런 게 바로 구원론이 되는 거예요.
 
주여 어떻게 하면 생명나무를 따먹습니까? 그럼 주께서 ‘니가 뭔데 구원받으려고 하느냐를 한번 점검해 본 적이 있느냐, 점검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걸 왜 하느냐? 내가 그러고 싶다는 거예요. ’니가 왜 그러고 싶은데?‘ 그 다음 말이 중요합니다. ’나도 몰라요.‘ ‘나는 죄를 져도 천국 가고 싶어요.’ ‘왜 그런데?’ ‘나도 왜 그런지 몰라요.‘ 요 미지의 X를 하나님께서는 악마라고 규정한 겁니다.

마태복음 15장에서 바리새인보고 19절에 보면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여기서 사람이 하는 일이 기껏 뭡니까? 손으로 씻는 일을 하죠. 그러면 사람이 못하는 게 뭡니까? 자기 마음속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과 살인과 음란과 간음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 이런 것을 인간이 지배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이라 했을 때에 마음속으로 간음을 안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없어요? 없다니까. 심지어 여자를 본적도 없는 소경도 간음을 한다니까요. 여자 구경도 못한 소경도 간음한다니까요. 사람의 상상력이라는 것은 신적 이예요. 왜, 마음속으로 뭐가 있느냐 하면 미지 X가 있다고 하죠. 이 X가 추구하는 것이 뭐냐 하면 원래 하나님이 딱 만들어 놓은 그 인간을 추구하는 게 아니에요. 그걸 벗어나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이것은 근본적으로 안 맞아요. 마귀 적 이예요. 악마적입니다. 그러니 결국 인간은 악마에게 매여 있고 그건 죄에 매여 있는 겁니다.

창세기 4장 7절에 보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이렇게 돼 있죠?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라고 했잖아요. “죄를 다스릴찌라” 했지만 결과적으로 죄를 다스렸어요? 못 다스렸어요? 못 다스렸죠. 못 다스릴 것을 왜 하나님께서 다스리라고 이야기했겠는가? 그것은 니 주제파악을 하라 말이죠. 니가 주의 명령을 지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겁니다. 이미 선악과 따먹을 때부터 주의 명령을 듣든지 아니 듣든지 소용없게 댐이 터져버린 거예요. 다만 주의 법을 이야기함으로서 뭐가 터져 나오는가를 알라 말이죠. 주워 담을 수가 없어요.

인간은 죽게 돼 있습니다. 인간은 죽게 돼 있는 것을 건방지게 어디 브레이크를 걸어서 지가 방향을 틀어서 천국 간다고요? 이미 죽게 돼 있는 걸, 죽게 돼 있는 방향이 지옥인데 무슨 천국으로 방향을 틀어요? 그건 성경 전체를 주님의 기본 취지를 완전히 모독하는 또 하나의 악마의 생각입니다. 구원받겠다는 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봐도 알지 못하게  만들어서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런데 평소에 왜 우리는 이러한 성경 내용을 왜 모르는가? 그것은 출발점을 자기 자신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그래요. 말씀에서 내가 누구냐를 보는 게 아니고 무조건 나는 나고, 나라 하는 것은 확실히 만져 봐도 나는 나고 내가 남인가? 내가 맞지. 이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보고 ‘진리가 무엇이냐’ 라고 물었죠. 그 전에 예수님께서 “나는 진리를 위해서 이 땅에 왔다.” 할 때 본디오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거든요. 예수님께서 답변 안 하셨습니다. “니가 바로 진리 때문에 나한테 지금 심문하고 있다.” 진리에 속해 있으면서도 ‘진리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미국에 와서는 ‘아저씨, 미국이 여기서 어디입니까?’ 묻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진리 때문에 세상의 모든 권세를 주님이 쥐고 있다 이 말이죠. 본디오 빌라도가 심문하는 것도 어디에 포함됐어요? 진리를 진리대로 드러내기 위해서 지금 하고 있는데, 지가 진리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이건 출발점이 예수 그리스도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로부터 출발하니까, ‘나는 진리다. 당신이 모른다면 진리하나 보태지.’ 추가 밥 하듯이 밥 하나 추가하듯이 보태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은 기본적으로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성경들을 보시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교회에서 구원받는다 하니까 시키는 대로 행하는 겁니다. 믿으라 하면 믿고, 소망하라면 소망하고 사랑하라면 사랑하고, 계속해서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몰라요. 성령이 안 오기 때문에.

그러면 사도바울을 아느냐? 알죠.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알았어요? 사도행전 9장에 주님이 먼저 찾아왔죠. 아까 다니엘에 누가 찾아왔다 했습니까? 가브리엘 천사가 왔죠. 아담에게 누가 먼저 찾아왔죠? 하나님, 사도바울도 누가 찾아왔죠? 예수님, 먼저 찾아와서 “사울아, 사울아, 왜 니가 나를 핍박하느냐”

핍박! 정말 진짜 하나님과 우리 사이 관계는 무슨 관계냐 하면 핍박 관계예요. 몰랐죠?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몰랐어요. 자기는 건전하고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뭐 완전하지는 않겠지만 건전한 쪽에 속하고 율법에는 흠이 없고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밑지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해도 꿀리지 않는 그런 인생관을 갖고 있었어요. ‘누구야? 나보고 죄 졌다 하는 놈 나와. 나 죄 안 지려고 오늘도 노력하는 사람이야, 누구야?’ 이런 당당한 자아상에, 그것도 자기를 찾아온 분이 그 당시 현지인이 아닙니다. 이미 죽은 지 몇 년 되신 분이예요. 아니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하고 상관하기도 골치 아픈데 죽은 이순신하고 언제 또 이순신 입장을 언제 고려합니까? 내가 이순신 욕하면 오늘밤에 이순신 나타나서 ‘니 내 욕했지? 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 이렇게 합니까? 아니잖아요.

결국은 사울이 구원받은 것은 예수님이 찾아와서 구원받은 거예요. 이 말을 어렵다 하면 곤란합니다. 못 믿겠다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이걸 어렵다고 이야기하면 곤란해요. 현대 신학 교수들은 이 말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해요. 이해가 안 간다는 거예요. 이해가 안 간다는 말은 무슨 뜻인지 알아요? 그래서 몇 사람이나 구원받겠느냐 그러고 있는 거예요. 그럼 한국 교회 1200만 신도들 다 가짜냐? 그거부터 걱정 하고 있어요. 인간은 원래부터 가짜예요. 1200만이 아니고 2천만, 5천만 다 원래부터 가짜예요.

가짜가 정상이고 가짜 아닌 자가 비정상이죠. 찾아와서 구원받는다니까요. 회사 하느냐, 경쟁하느냐, 말아먹느냐, 그건 의미 없어요. 교도소를 몇 번 왔다 갔다 그건 의미 없습니다. 그냥 누구에게나 핍박 받은 분이 예수님 이예요. 그걸 사도바울은 믿었던 거예요. 내가 사업을 하나 안 하나 내가 교인들을 잡아 가나 관계없이 그저 내가 태어난 자체가 핍박하라고 태어난 존재인 것을 아는, 내가 뭘 하든지 간에. 십자가!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에서 하죠. 그리스도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다 죽은 것이다.

그래서 이 주체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70이레를 70☓7=490년을 알았다고 해서 천당 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거 알아도 소용없어요. 그런데 그 490년은 알라고 준 게 아니고, 니는 모른다고 준 거예요. 우리의 눈은 우리가 보지 못하기 위해서 우리 눈을 박아준 겁니다. 왜, 그래야 우리가 본다고 우기기 때문에. 귀라는 것은 우리가 진짜 듣지 못한다 하기 위해서 귀를 주신 거예요. 왜, 귀 있음으로 우리는 모든 걸 듣고 있다고 우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편 19편 누가 읽어 보세요.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언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들리는 소리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환장할 지경입니다. 인간이 여기 끼어들 여지가 없죠. 언어 없죠. 소리 없죠. 무슨 수로 인간이 주님을 알아요?

우리가 교회가 많다 보니까 교인이 자칭 다 신자라고 하니까 거기 우리가 속아 넘어간 거예요. 열심히 믿고 하니까 그걸 흉내 내고 싶고, ‘저 사람도 교회 가서 구원받으면 나도 교회 가서 구원받겠다.’ 하고 모방을 하면 구원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성경을 보게 되면 이게 전부 다 서로, 서로 사기를 치고 있었던 거예요. 아무도 구원 안 받아 놓고 구원 받은 척들을 하면서 흉내를 내고 있었던 겁니다. 바바리 맨처럼. 볼 것도 없으면서 바바리로 감추고. 들리는 소리도 없고 언어도 없는데 무슨 수로 알아요? 그런데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죠. 요 이야기가 신약 로마서에 오게 되면 이게 뭐냐, 복음이라 해요. 복음의 특징이 이래요. 복음의 특징은 여기는 언어가 없고 소리가 없죠. 복음의 특징은 오히려 소리가 있어요. ‘예수 믿으라.‘고 외치잖아요. 소리가 있는데 소리가 있어서 우리가 알아채는 소리는 아니에요. 그래서 소리가 있어도 없는 거와 마찬가지로 됐어요.

예수 믿는 사람이 나타나도 그들은 그게 모방이 안 돼요. 그걸 사도행전 2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제가 지금 생전 처음 듣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이런 이야기가 내 영을 육체에 부어주니까, 안 부어주면 뭐가 안 돼요? 2장 21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게 안 돼요. 성령이 오지 않으면 이게 안 돼요. 사람들은 성령이 안 와도 이거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대학생들, 성가대들 성령 안 받아도 주의 이름 부르고 노래 부르고 난리 나요.

사람이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진짜 하나님을 가리기 위해서 노래를 불러요. 음악을 만들어서 부른다는 것은 그 음악으로 진짜 하나님 만난 것을 대신하려고 위장한 겁니다. 욥이 하나님 만났을 때 찬양했습니까? 안 그러면 입을 다물었습니까? 재를 뒤집어쓰고 입을 다물었어요. 천사들이 찬양할 때 그때 이사야는 뭐라 했습니까?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했습니다. ‘아! 저 노래 곡 괜찮다. 내가 따라 불러야지.’ 이러지 않았어요. 그냥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를 알게 되면 내가 바로 옆에 있는 강도가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 강도의 얼굴이 내 얼굴이다 말이죠. 그 강도의 얼굴에가 내 얼굴을 교체를 시켜도 괜찮아요. 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강도 있잖아요. 거기다 내 얼굴을 거기에 걸쳐 보세요. ‘쳇, 예수 그리스도 있어도 내 일 도와주지도 않고 전세 올라도 전세금도 안 주고…’ 예수님 옆에 있어도 자기 속의 욕망만 달성하려고 ‘빨리 나 구원해줘. 빨리 내 가슴앓이 하는 걸 해결하란 말이야.’ 이런 식으로 티를 내니까 구원받지 못한 강도 얼굴은 누구 얼굴입니까? 내 얼굴로 갈아치우기 해도 마찬가지에요.

옆에 있는 강도, 구원받은 강도가 ‘예수님, 오늘밤에 날 기억해 달라.’ 해서 구원받았습니까? 어떻게 구원받았죠? 예수님 피로 구원받았죠. 또 옆에 ‘오늘밤에 …’ 이런 소리해서 구원받는다고 전부 다 집에서 십자가 만들어서 한 소리 하지 말고. 인간이 살아가면서 강도한테 하는 역할을 한 거예요. 물론 지금 와서 강도 짓해서 역할 할 필요는 없어요. 일부러 잡아가라 해서 체포돼서 일부러 그 짓 할 필요 없습니다. 그 짓이나 이 짓이나 질은 똑같은 질 이예요. 십자가 앞에서는 그래요. 십자가 앞에서는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있다면 십자가 피만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오늘 일어났던 어떤 일도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주께서 조성해 낸 일입니다. ‘니가 진짜 나를 사랑하느냐, 니 엄마나 가족을 사랑하느냐, 아니면 니 몸을 사랑하는지, 니 체면과 자존심만 사랑하는지, 다시 한 번 이런 일을 통해서 도대체 살아온 것이 누구 덕으로 살아왔는지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하는 그러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합니다. ‘제 몸의 주체는 제가 되어서는 안 되고, 현재 제 몸의 주체는 주님이 되어야 마땅합니다.‘라는 고백을 우리가 해야 되죠. 머리가 세어지는 것도 할 수 없어요. 머리도 주께서 세게 하신 것이고, 또 염색 해야죠. 그래서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몸에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체라는 말이 그 정도로 중요한 거예요. 쉽게 정리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주체입니다. 주체라고 우겨요. 타고나기를 죄가 살아있어서. 거기에 주님께서는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해서 주체자로서 그냥 주체 자가 아니고 핍박 받는 주체, ‘니 때문에 내가 힘들다.’ 하는 ‘니가 너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정작 사랑해야 될 내가 니 사랑으로 밀려버려서 내가 힘들다.‘라는 식으로 찾아오실 때 우리는 그동안 내가 주체라는 이것은 허망한 것에 해당되는 것이라는 깨닫죠.

사나 죽으나 우리는 누구의 것이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언제? 우리의 주체가 허물어졌을 때, 주에 의해서 깨어졌을 때, 부정당할 때. 부정당하는 것은 바로 십자가의 피를 아는 말씀이 우리에게 쳐들어 올 때입니다.

그렇다면 70☓이레는 뭐냐, 우리가 십자가를 깨닫기 위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시간관, 역사관, 이걸 부수는 그러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쳐들어오는 겁니다. ‘니가 해석해 봐라. 맞는 게 있는가.’ 이렇게 맞추고 저렇게 맞춰도 어떤 해석을 해도 전혀 안 맞게 돼 있어요. 왜 해석을 할 때 나의 시간관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가 마땅히 구원받을 자라고 자처하고 들어가기 때문에 어떤 해석도 마귀적인 해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구원 될 자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라는 해석이 나와야 되는데, ’나도 예수님 덕분에 나도 좀 삽시다.‘ 이런 식으로 한 다리 끼려고 들어가면 이미 해석은 그건 오기입니다.

아버지께서 인정하신 아들은 오직 한분, 예수님밖에 없어요. 우리는 지옥 가도 마땅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모든 구원을 누구한테 일임했나? 예수님한테 일임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1절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들이 누구죠? 예수님이죠. 이걸 누구 앞에서 이야기했습니까? 바리새인 보고 이야기했죠. 바리새인들은 한분의 하나님만 섬겼어요. 한분, 여호와만. 하나님이 한분이기 때문에 한분인 그 하나님은 우상이 되는 거예요. 그들이 바알 섬겨서 우상이 아니고 자기 하나님을 섬기는데 그게 바로 우상인 거죠. 왜, 자기의 주체가 거기에 가미된 하나님이기 때문에 자기의 주체가 가미된 하나님, 우리 민족은 반드시 구원받는다는 그러한 전제 요건이  포함된 하나님은 그건 가짜 하나님입니다.

진짜 하나님은 예수님만 아들이라는 걸 드러내는 하나님, 다시 말해서 아들만 나타날 때 그게 하나님 이예요. 아버지는 ‘나만 보냈다.’는 것을 나타낼 때 그걸 믿는 자가 하나님 아들 되거든요. 예수님만 하나님의 아들 이예요. 그러니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아들이 원해서 그래요. 내가 원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내가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지금까지 어떤 죄도, 강도 같은 그런 망발해도 그것조차 구원받게 된 것은 아드님이 원해서 피를 흘린 그 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우리 죄를 묻지 않기 때문에 구원받는 거예요.

죄를 묻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죄를 생산해 줘야 되는 거예요. 도대체 우리가 어떤 짓을 하기에 이런 것도 묻지 않느냐, 하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것이 우리 자신이 아니고 예수님만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나 구원받았다.’ 이 구원받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게 아니고 예수님만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그런 일을 하시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아버지께서 19절에 보면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스스로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언급한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감춰져 있다. ‘하나님은 너희들은 몰라.’ 그런 뜻 이예요. 너희들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하나님을 모른다. 아들만 아는데, 아들만 안다는 하나님을 너희들은 안다고 했으니까 한번 비교해 보자. 너희들이 하나님 한번 내놔봐. 내가 아는 하나님 내볼게. 둘은 충돌했고 그리고 인간은 예수님을 죽임으로서 모든 인간이 알고 있던 하나님은 그 하나님이 아니었다는 것이 완전히 폭로됐습니다.

그렇다면 70이레가 뭐냐, 바로 인간이 70이레를 해석하는 와중에서 인간의 감춰진 죄를 들춰내기 위해서 70이레의 말씀을 주신 겁니다. 70이레 알면, 기한이 있다 하니까, 끝이 있다는 말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 끝만 알면 끝을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역사에다 지점만 이렇게 점만 콕콕 찍어서 그때만 기다리면 우리는 능히 구원되겠네. 라는 의식을 갖는 것 자체가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것을 완전히 깡그리 잊게 만드는 거예요.

그리고 22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심판을 다 누구한테 맡겼다 했습니까? 아들에게 맡겼죠. 그걸 그 당시 누구한테 이야기했다? 바리새인에게 한 거예요. 바리새인은 우리들의 대표자입니다. 같이 선악과 따먹은 입장이기 때문에. 바리새인이 내뱉은 이야기는 사실 우리 속에 내뱉고, 바리새인의 행동은 평소에 우리가 행동 이예요. 착하면 복 받고 나쁜 일하면 벌 받는다는, 이거 바리새인들이 갖고 있는 행동 아닙니까? 우리 중에 누가, 누가 착하나, 바리새인들이 했거든요. 이 바리새인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 믿고 하는 인간들의 행세 바리새인들이 다 해주니까, 그런데 바리새인들 앞에서 예수님이 “모든 심판을 내가 한다.” 하니까 바리새인들은 화가 나서 죽여 버린 거예요. 왜, 심판이 아들에게 있다면 그동안 내가 심판 안 받기 위해서 한 모든 짓거리는 이건 그동안 소용없는 짓을 한 거예요. 우리가 그동안 구원에 아무 보탬이 안 되는 짓들을 해온 거예요.

사람이 구원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는 짓을 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 뭔가 아직도 가치가 있다고 미련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아 씨, 내가 이정도 구원받았으니까 이정도 헌금하면 받아주겠지.’ 그게 엉터리예요. 그게 아니라니까요.

그러니 도대체 이 세대에 복음을 아는 선지자가 있다는 게 이건 차라리 해가 두 개라는 소리와 같은 소리입니다. 이건 기적입니다. 해가 서쪽에서 뜨는 거와 마찬가지 이야기예요. 이걸 누가 믿습니까? 내가 어떤 걸 해도 구원에 보탬이 안 된다는 사실을 이걸 어떻게 믿어요? 이게 우리가 기껏 해야 바리새인 하수인들에 불과한데. 사람들이 하는 것은 자기 것이 있게 마련이고, 자기 것을 어느 것보다 아끼기 마련인데. 주께서 다른 사람 것은 뺏어가도 내 것 뺏어 가면 화나고. 얼마나 화났으면 자살하겠어요? ‘나 이거 없이는 못 산다. 이거 없이 못 산다.’ 분명히 인간은 뭐 있어요. 결혼한 아줌마한테는 딱 깨놓고 자식. 그러면 결혼한 남자한테는 뭐죠? 체면이죠. 자존심.

어떤 남편이 25년 만에 처음으로 라면 끓여먹은 사람이 있답니다. 그동안 마누라가 다 해줬는데. 자존심이 대단해요. 결혼 한지 25년 만에 라면 처음 끓여먹은 사람. ‘어디 남편이 라면을 끓여? 아내가 끓여야지.’ 이런 식으로 버틴 게 25년이라. 그러니까 결국 남자는 뭡니까? 남자는 가족도 아니고 지 체면, 나 성공한 사람이다. 자기체면. 여자는? 여자는 난 시장에서 노점에 있어도 내 자식만 잘되면 나는 만족한다. 달리 이야기하면 내 자식 건드리면 죽여 버린다. 그런데 그 자식을 남편이 건드린다. 남편 죽여 버립니다. 내 자식이니까. 용서가 안 되죠.

요한복음 5장 38절에 보면 정말 무서운 이야기 나옵니다.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그 보내신 자를 안 믿죠. 안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믿음이 없이는 구원을 못 받죠. 그러니까 아까 사도행전 2장에서 뭐라 했습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그 다음에 뭐 온다? 성령이 오게 되면 마지막에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고 너희 자녀들은 예언하고. 이게 전부 다 예언, 환상, 꿈, 이게 전부 다 공통점이 뭡니까? 그러니까 오직 주의 이름만 불러야 구원받는다. 이 사실 아닙니까? 이게 성령 받는 기적이 있어야 돼요.

옛날 성신에 의한 기적이 뭐냐 하면 해가 멈추고 홍해바다가 갈라졌고 그런 기적이 있었잖아요. 그 기적은 백날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성이 무너져도 구원 받았습니까? 여리고성 무너져도 구원 안 받았잖아요. 정말 영원히 구원받는 것은 그런 바로 옆에 홍해가 갈라져도 구원 받았습니까? 그 사람들 홍해 바다 건너가도 멸망됐습니다. 진짜로 구원되게 하는 것은 뭐가 와야 돼요? 성령이 와야 돼요. 성령이!

성령이 오게 된 증거를 대라 하면, “주 예수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이게 뭔 뜻이냐, 나는 뭘 해도 구원받을 입장이 못 되었다. 내가 구원되고자 노력하니까 구원해주는 게 아니고, 내가 구원되고자 노력해서 ‘예수 믿어줄게.’ 해서 구원된 게 아니고 주께로 성령이 왔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주 예수 외에는 구원자가 없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이 온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에 대해서 끝까지 화를 내는 자가 누군지, 바로 미지 X, 미지 X는 그런 것이 용서가 안 돼요. 어디 갇힌 주제에 어디서 탈출을 기도하느냐 이 말이죠. 예수님이 광야에 있을 때 성령을 보내서 누굴 만나게 했습니까? 미지 X를 만나죠. 사람들은 몰라요. 그런데 주님한테는 정체를 드러냅니다. 마귀가. 무덤에 있던 청년이 귀신 들렸을 때 사람들은 몰라요. 그냥 병자인데 주님 앞에 나타나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나를 멸망하러 왔죠?’ 결국 우리 인간은, 인간을 멸망하러 온 자에 예속되어서 이 세상의 삶을 꾸려가며 살고 있는 중입니다. 탈출? 꿈도 꾸지 마세요. 안 됩니다. 노력? 노력은 해보세요. 소용없는 노력이었어요.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할 때 그분이 이 몸의  주체가 그분이고, 내 주체는 내 몸의 하등 소용없는 그냥 ‘내 꺼’라고 우기는 그런 나쁜 짓만 유도하는 그런 자아로 살아왔다 하는 것을 아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 하니까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는데 차라리 눈을 한번 감아 보세요. 뭐가 보입니까? 아무것도 안 보이죠. 그러니까 차라리 눈이 있는 게 원망스럽죠. 눈만 감으면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내가 안 보이는데, 눈을 뜨고 거울을 보니까 내가 보이고 남들이 나를 보고 뭐라 하는 게 보이고, 차라리 눈 박히고 귀 달린 게 어떻게 보면 원망스러워요.

요한복음 9장에서 “니가 본다고 하니까 소경이다” 차라리 나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하니까 차라리 니가 보는 거다. 니 자신부터 보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주님을 보겠습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 자신을 십자가 앞에서 우리 자신을 보게 합니다. ‘나는 평생 죄인입니다.’
10분 쉽시다.

 

 

가락교회-70이레 논문(틈)130404-17강b -이 근호 목사

제 17강b

첫째 시간에 70이레 더하기 주체부터 먼저 다뤘다 했습니다. 그러면 그 주체가, 아주 쉽게 합니다. “사울아, 사울아, 니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했죠. 그걸 요번 수련회에서 두 자로 ‘호명’이라 했죠. 지난 시간에 한 것 같은데요. “사울아, 사울아” 호명하는 거예요. 또는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여러분, 창세기 보면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늘 부른 게 아니고 아브라함이 그냥 양을 쳤죠.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아, 여기다 단을 세워라” 하죠. 그래서 아브라함이 단을 세웠다 이 말이죠. 또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께서 “야곱아, 야곱아” 하고 꿈에 또 나타나죠. 자, 그러면 그걸 보고 어때요? ‘아유, 왜 하나님은 나한테는 안 나타나지?’ 이런 생각 안 듭니까? ‘아이 씨, 아브라함은 되게 좋겠다.’ 길 가면 ‘아브라함’ 하면 ‘하나님 살아계시는구나.’ ‘이삭아’ 하고, 그러면 왜 우린 안 불러주는데? ‘섭섭하네요.’ 안 불러주니까 혹시 내가 구원 못 받은 게 아닌가? 또 이런 걱정도 되고, 불러주면 좋겠는데. 그런 의문점 들죠. 그렇죠?

그럼 질문하겠습니다. 불러주면 확신 생깁니까? 하루에 몇 번 불러줘야 돼요? 3번? 4번 불러줄까? 하루에 4번 불러주고 안 불러주는 그 시간은 믿음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 방법은 불러주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계속 상주하는 게 중요해요. 아예 같이 계신 게 중요해요. 거덜 내는 거예요. 우리 신체를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 되었어요. 아예 들어와 사시는 거예요. 성령께서.

그 다음 문제 봅시다. 들어와 사신다면 어이 합니까?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성경에 들어온다 하니까 나도 흉내 내려고 ‘주여, 목사님 들어왔습니다.’ 백날 해도 자기 속이는 셈 밖에 안 되잖아요.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이 찾아왔죠. 물 길러 왔는데 하나님께서 아예 그 여인을 우물로 만들었죠. 우물은 물을 떠가는 건데 주님께서는 니 속에 영원 하도록 하는 생명이 나오도록 한다 하니까 그 여자가 움직이는 우물 돼 버린 거예요.

그렇다면 오늘날 신약의 모든 성도가 움직이는 우물 이예요. 그런데 움직이는 우물이다, 아니다,를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판단 기준이 뭐냐 하면 그 여인에게 아무도 남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비밀이 있었어요. 과거 있는 여자였습니다. 남자가 다섯 명 있었어요. 영식이, 병국이, 호철이, 권영이, 정식이, 다섯 명이고 여섯 번째가  이 을수, 이거 자랑거리입니까? 아닙니까? 자랑거리 아니죠. 보통 잘난 여자 아닌 것 같아요. 엘리자베스 테일러처럼 7번 간 줄 모르겠는데, 어쨌든 이걸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는 없는 입장 아닙니까?

성령이 샘솟게 나온다는 말은 우리가 하루 일상을 살았으면 그 일상 가운데서 얼마나 우리 자존심, 우리 체면, 나 잘났다. 를 까발려 줄 때 우물입니다. 성령이 계신 성전입니다. 아시겠어요? 굉장히 간단하죠. 주님이 동거하기 때문에 얼마나 성경 말씀 내용을 니가 돈 좋아하는 인간의 뿌린데 세상에 천하 돈 좋아하는 것이 나라는 것이 하루 일상 살아가면서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한 줄 알라. 발걸음을 세신다.’는  백날 해도 파출소 가게 이끄시는 것도 누가 하셨다? 태양을 만드신 분이. 세상에 태양을 보고 하나님이 움직인다는 걸 24시간 늘 느끼지는 않잖아요. 누구 우리에게 물으면 ‘태양을 누가 움직여요?’ 성경에 보면 ‘아, 하나님’ 누가 물으면 그때서 정답 아는 지식 끄집어내면 되지만 평소에 온 몸으로 ‘지금 하나님께서 태양을 움직이는구나.’ 이렇게 느껴지지는 않잖아요.

그런 것들이 육적인 생각, 육을 위해서 심는 것은 썩어진 것을 거둔다잖아요. 만날 썩어질 것을 생각하는 나로 하여금 그걸 까발려서 봄 되면 농부가 쟁기로 흙을 뒤집죠. 어떤 전을 굽는 가게 이름이 뒤집기 전, 늘 이렇게 우리로 하여금 육을 심는 것을 뒤집어 주시는 그 능력, 우물입니다. 무슨 우물? 하나님이 동거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세상에, 이런 은혜! 이거 돈 얼마 주고 얻었습니까? 세상에 이런 은혜가 없습니다. 나는 인간도 아니야, 나는 주님 사랑한다 하면서 잘못 되면 주님 원망이 먼저 튀어나오는 이런 짓하고 천국 가서 사탄 짓 할 게 바로 나라는 것을 깨우쳐 주는 이걸 뒤집기 하는, 이게 성령이 동거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 다니고 주의 말씀 듣는다는 것은 ‘뒤집어 주옵소서. 그럴싸하게 믿는 척 하는 걸 완전히 까발려서 뒤집어 주옵소서.’ 그런 겁니다. 자, 예를 들면 ‘나는 평소에 주님만 생각합니다.’ 하잖아요. 특히 목사님들이 말씀만 생각하는데. 야구선수 류 현진이란 사람이 있거든요. LA다저스 요번에 제 2 선발로 간사람, 한국 남자 그거 모르면 간첩입니다. 그가 요번에 첫 번째로 패전했다고요. 이상하게 기분 나쁜 거예요. 목사가 되든지 장로가 되든지 집사가 되든 상관없이, 그러면 결국 뭡니까? 주님 사랑, 주의 뜻, 해놓고 결국 마음속에는 류 현진, 한국을 대표하는 투수가 보란 듯이 해고시켰다. 또 한일 축구, 이런 거 결국 이런 것들이 은근히 졌다 하면 기분 나쁜 거예요. 그리고 북한의 개성공단, 은근히 기분 나쁜 것, 이게 뭐예요? 우리가 누굴 사랑한다 했어요? 주님 사랑한다 했어요? 이걸 또 다시 한 번 뒤집어 주시네요. ‘니가 나를 사랑해?’ 개성공단 사랑했다고 뒤집어 주시는, 늘 누가 계시기 때문에 항상 썩어질 것을 거두는 우리를 ‘니는 그런 인간이 아니야, 영을 위해 심는 자야.’라고 뒤집어 주시는 은혜, 이것이 바로 호명만 할 뿐이 아니라 앞으로 하나님 모든 수케줄, 시나리오를 그 사람 속에 집어넣습니다. 들어올 때 하나 섞여져 들어온 것이 뭐냐 하면 우리가 공부하려는 70이레도 같이 섞여 들어온 거예요. 이제 이해 하시겠습니까?

70이레라 하는 것은 우리가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쳐들어 온 거예요. 쳐들어 와서 뭘 한다? 뒤집어 주는 거예요. 우리가 나 위해서 ‘나 구원받아야 돼.’ 까부는 것, 이걸 뒤집어 주는 거예요. ‘니는 니가 구원 못 받아. 다만 주님의 구원을 위해서 너는 쓰여 질 뿐이야. 그래서 너는 구원 받는 거야.’ 주의 몸에 붙어있다는 부분으로서 구원받기 위해서 70이레가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슬슬 풀리죠. 70이레를 두고 우리가 해석하는 해석이 필요할까요? 안 필요할까요? 꼭 필요하죠. 꼭 필요해야 뒤집죠. 70이레에 대해서 우리 해석이 꼭 있어야 되죠. 그 다음에 이쪽에서 주님이 주체가 되는 70이레 또 필요하죠. 이 두 개의 만남 속에서 70이레는 뭐냐 하면 우리의 잘못된 해석으로 우리 바리새인 같은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곡해하고 왜곡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받습니다. 이쪽에서 오는 것은 죄인 쪽에서 오는 것이고, 이쪽에서 오는 것은 유일한 의인 예수님 쪽에서 오기 때문에 그 틈 사이에 십자가라는 경계선이 깔려 있는 겁니다. 우리는 뭐냐, 이쪽에서 다가가는데 어떻게 다가가느냐, 바로 상징으로 다가갑니다. 이걸 라캉은 상징계라 합니다.

상징계라 하는 것은 어떤 규칙을 지키기 위해서 행동에 나서는 걸 상징이라 합니다. 이 말, 상징이란 말을 갑자기 괜히 끄집어냈다 싶은데 이왕 끄집어 낸 걸 수습하면 상징이란 말을 왜 집어넣느냐 하고 싶은 것은 이 컵을 우리가 컵이라 하잖아요. 이게 상징이 아니잖아요. 컵을 컵이라 했지, 이 컵은 조그만 것, 이러면 상징인데 컵을 컵이라 하는 것은 상징이 아니잖아요. 나는 이 근호다. 이는 상징이 아니고 이 근호를 이 근호라 하지 이게 뭐가 상징입니까? 나는 안경을 꼈다. 이건 상징이라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나는 나다. 하면 상징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상징이란 말을 왜 쓰느냐 지금 이게 무슨 상징이야, 실제 그대로지, 보통 그렇게 생각하는데.

 상징이란 말은 실재는 감춰져 있는 걸 염두에 둘 때 거기에 감춰져 있는 것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실재는 아니기 때문에 상징이란 말을 쓰는 거예요. 아직 이해가 안 되실 거예요. 상상계가 있고 상징계가 있고 실재계가 있는데 실재계라 하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접근되지 않는 겁니다. 그럼 상상계란 뭐냐 하면 항상 나는 무엇이다. 이것은 무엇이다. 일치시키는 걸 상상이라 합니다. 저거는 뭐냐? 카메라다. 이걸 상상계라 해요. 저건 카메라다 하는 걸 상상계라 하는데 그런데 저 사람은 저게 카메라가 아니고 저건 책상이다. 라고 왜 말을 못하느냐 하면 나 혼자 있으면 ‘저거 책상이네.’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책상이라 하는 것은 이런 걸 책상이라고 이미 기존의 세계에서 규칙이 있어요.

“이것은 이다. 밥.” 무슨 뜻인지 모르죠. 이것은 밥이다. 하면 말이 되는데 이것은 밥, 이다. 가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에 나 혼자 밖에 없으면 이게 말이 됩니까? 안 됩니까? 내가 “이다. 밥“ 하든지 뭐라 할 게 없잖아요. 하지만 이 세상에는 이미 사람들의 규칙이 있어요. 그 규칙이 있어서 나는 ”음~“ 이렇게 하지만 다른 사람한테는 뭔데? 하면 ”음~“ 하지 못한다 말이죠. 우리가 알아듣는 소통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봐. 하면 우리는 단어를 탁자? 탁자는 이거고, 아니, 그러면 거울? 거울은 보는 게 거울이고, 뭐지? 그렇지 카메라. 그렇지 카메라. 이렇게 되죠. 저 사람과 이제는 소통이 됐죠. 그렇게 정해놓은 그것을 상징이라 합니다.

애들이 엄마한테 ‘맘마’ 하죠. 그럴 때 맘마, 라 하지 말고 ‘엄마’라고 해야지, 요건 커서 하는 것이고, 애들이 갓난 아이 때는 ‘맘마’ 해도 그걸 용납하는 거예요. 왜, 그게 상상이기 때문에. 지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기 때문에. 하지만 크면 어떻게 되느냐, 지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면 사람 사이에 소통이 못 되잖아요. ‘카메라 주세요.’ 하는데 책상 주면 안 되잖아요. 카메라, 한다고 기억(ㄱ) 쓰고 이러면 안 되고, 카메라를 줘야지, 글자를 주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아하, 카메라, 하는 것은 이미 정해진 것을 내가 고개 숙이고 복종할 수밖에 없어요. 그걸 상징계라 합니다. 상징 계는 교육 받아야 돼요. 교육을 안 받으면 상징 계에서 낙후가 돼요.

이빨이 아플 때 병균이 들어왔을 때 치료는 뭐냐, 일반인들은 모릅니다. 전문적인 6년 동안 치과의사와 전문의를 거쳐야 알 수 있어요. 그러니 교육을 받아야 돼요. 왜, 치과라는 그 상징 계는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래요. ‘선생님 이빨 때워주세요.’ 하면 ‘예’ 하고 뻰치 들고 하면, 이건 아니거든요. 뻰치라 하는 것은 못을 뺄 때 쓰는 거지 아니잖아요. 다른 특수한 기계가 있을 게 아닙니까? 그 기계를 사용하려면 배워야 되잖아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은 인간은 무엇으로 산다? 상징 계에서 이렇게 되니까 그걸 상징에서 말하는 뭐가 돼요? 주체가 되죠. 이제 슬슬 현실이 눈에 들어옵니까? 아! 나라는 주체는 나는 여기 있다 해서 누가 알아주는 사람 없는 거예요. 그럼 내가 나답기 위해서는 누구에 호응해야 됩니까? 내 이전에 이미 형성된 그 세계, 그 현실에 내가 고개 숙이고 교육 받고 ‘저 좀 써주세요. 저 좀 취직시켜 주세요.’ 이렇게 할 때 나는 그들에 의해서 나는 나가 되는 거예요.

그럼 나를 나라 하는 것은 ‘내가 나다’ 하는 것은 상상계고 실제로 사회에 나와서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은 누굽니까? 주변 사람들! 타인, 그걸 남이라 하는 거예요. 남이 나를 안 알아주면 우리는 상징계인 주체가 없어지기 때문에 자살하는 거예요. 왜, 아무도 날 써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애들은 자살합니까? 자살 안 합니까? 애들은 굶어죽지, 자살은 안 하거든요. 내가 나기 때문에 지가 죽을 이유가 없는 거예요. 죽을 이유가 있다는 말은 상상 계 있는 게 아니고 어디 있기 때문에 죽는다? 상징 계 있기 때문에. 상징 계에서 내가 없으면 상상한 나는 있으나 마나 소용없는 거예요. 그래서 자살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면 실재계는 뭐냐, ‘누가 너로 하여금 그렇게 힘들게 했게.‘ 라고 나타나 줄 때만 나타나 주는 분, 실재계입니다. 나타나 준다는 말은 내 쪽에서 찾아가면 만나진다? 안 만나진다? 안 만나져요. 안 만나지니까 인간들이 약이 올라서 다른 상징 가지고 안 만났는데 만난 척을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한 자로 신, 바로 예수, 성령. 이게 뭐냐 언어를 가지고 표현을 하는 거예요. 예수(jesus christ), 성령(holy spirit), 삼위일체, 온갖 것 다 하는데 실제로 그 사람은 주님을 만나 본 적도 없고 이미 아는 종교계에서 통하는, 교회에서 통하는 걸 사용할 뿐 이예요.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용어를 사용했을 뿐 이예요.

그러나 사울은 어떻습니까? 직접 누굴 만났습니까? 사울은 직접 만났죠. 그게 실재계입니다. 실제로 만나 보니까 어떤 상징에서도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것을 여기 주님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은,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은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아는 척을 하는 게 뭐냐 하면 기존의 다른 신학들과 성령의 용어를 채용해서 지 나름대로 안 들키게 안 들키는 거예요.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은 직접 만났죠. 자기는 뭐라 합니까? 나는 메시아를 만났다 하죠. 물 길러 와서 물동이를 버려두죠. 이거 상징 계에서 얻어맞을 이야기예요. 시어머니한테 욕 얻어먹습니다. 아니 며느리가 물 길러 갔으면 물 길러 와야지, 그게 무슨 계? 상징 계에서 물 길러 와야 돼요. 며느리가 말 안 들어서 쫓겨나면 안 되잖아요.

상징 계인데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뭘 버려뒀다? 물 동이를 버려두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치과에서 하다가 주님 만났습니다. 에이, 다 버려. 하면 어떡하겠다는 말 이예요? 고발 들어와요. 이빨 반 쯤 뽑았는데 나둬 버리면 고발 들어온다니까요. 그러니까 주님 만난 건 미친 거예요. 주님 만난 건 미친 짓이라니까요. 그런데 미친 짓인데 특징이 뭐라 했습니까? 나는 오직 썩어질 육만 위해서 사는 인간인 것을 자각하죠. 그거 누가 들어왔기 때문에? 성령이! 진짜 이건 말이 아니고 말로 표현도 안 돼, 내 눈 달린 것은 보지 못하게 달렸다. 이건 말은 그렇게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이게 무슨 말인지 몰라요. 보라고 눈 달렸지, 보지 않기 위해서 눈 달렸다. 이걸 누가 믿겠습니까? 그럼 우리는 믿든지, 말든지. 사도바울은 말했잖아요. 영생 받는 자 외에는 내 말을 믿을 사람이 없다.

주님 오게 되면 말씀대로 우리가 얼마나 나만 섬기고 주님을 얼마나 천대하는지를 깨달아요. 그래서 하늘나라는 회개함으로 들어간다. 하늘나라는 회개함으로. 방금 제가 이야기했죠. 요거 상징입니까? 실재입니까? 또 상징 이예요. 우리가 어떤 말을 해도 상징 짓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말을 한 순간 또 이 말 단어가 또 말 분석에 들어가요. 분석해봐야 소용없어요. 그냥 상징이라.

상징에서 실재로 나아가는데 라캉은 뭐라 하느냐 하면 그걸 향락이라 해요. 즐기는 것. 박 근혜 대통령이 대통령 출마한 이유는 뭡니까? 딱 하나,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아니에요. 즐기기 위해서. 모든 인간의 행동은 즐기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러면 즐기는데 목적이 있느냐? 목적이 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의 육의 욕구 기대, 인간이 이걸 무시해요.

인간의 몸은 즐기고 싶어 해요. 이건 말릴 수도 없어요. 그래서 인간은 사업을 했잖아요. 사업에 만족하느냐? 만족 안 합니다. 사업을 통해서 더 어떤 즐거움, 크게 한다든지 해서 즐기기를 원해요. 이건희 보세요.  지금 아직도 고민 이예요. 다음엔 또 무슨 사업을, 뭘 팔아먹어야 할지, 현대도 마찬가지고 , 왜 하느냐, 있는데? 다 소용없어요. 그냥 즐기는 거예요. 계속 즐기는 것. 즐기기 위해서는 참신한 것, 새로운 것 이예요.

그러니까 그런 점에서 남자는 달라요. 여자는 계속 지루한 일상적인 데서 뭔가 즐길 걸 찾는 게 뭐냐, 계속 더 많은 사랑을 원하는 겁니다. 남자는 일을 벌리면서 즐겨요. 그래서 내가 그걸 알기 때문에 한 직장에서 오래 근무하든지 교사 오래 하게 되면 존경스럽습니다. ‘아유, 매일 똑같은 일을 어떻게 했습니까? 어떻게 똑같은 일을 어이 했어요? 존경스럽습니다.’ 하면 사장님은 ‘딱히 할 게 있어야죠.’ 이 말은 다른 즐길 거리가 없다는 거죠. 그래서 가끔은 등산이 재밌나 해봐야 그렇고, 암벽 타봐야 미끄러져봐야 그만이고, 하여튼 계속해서 나이가 70이든 80이든 계속해서 즐길 거리를 하는 거예요.

시골에 가면 다방이 많아요. 다방이 왜 많으냐, 다방이 없으면 남자들이 일을 안 해요. 밭에 일을 하는 것은 빨리 일하고 다방 가서 화장 짙게 한 마담 손잡고 쌍화차 한잔 먹는 그 바람으로 갔다가 다시 밭에 일하는 겁니다. 그러면 같은 밭에 일하는 아줌마, 할머니들은 무슨 보람으로 일합니까? 서울에 간 자식들에게 공납금, 저축하는 그 재미. 여자들은 자식이고, 남자한테는 향락, 둘 다 향락이지만. 자기 자유를 만끽하는 것.

그래서 상징 계에서 실재계로 나가는 걸 향락이라 했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왜 신을 믿습니까? 답 딱 나왔죠. 자기 즐기기 위해서. 이건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그 신남을 아직 우리는 멈출 줄을 모릅니다. 언제까지? 내가 신이 될 때까지. 그런데 어느 경지? 그건 필요 없어요. 그 즐기는 게 중요하지, 향락이 중요하지, 목표가 오면 안 돼요. 큰 일 나요. 목표가 오면 향락이 중지가 되니까 큰 일 나는 거예요. 그래서 목표가 생기면 다시 목표를 뒤로 밀어버려요. 회사에서 그래프 할 때 계속 그래프가 자꾸 증가합니다. 이 정도 했으면 안 되고 그 다음에 목표가 또 올라갑니다. 왜, 즐겨야 되니까. 이거는 누구도 말릴 수가 없어요. 끊임없이 목표 정하고 끊임없이 희망 제시해서 그걸 따라 붙이는 그 자체가 생의 즐거움 이예요.

만약에 그게 꺾일 때 인간은 살 의미가 날라 가 버립니다. 그래서 노인들이 힘든 거예요. 놀 때 일자리 구하는 게 새로운 희망을 찾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모습 이예요. 결국 이 실재가 정신분석학에서는 그냥 신이예요. 절대적인 절대자. 무한 절대자. 그럼 예수님? 예수님은 아니에요. 예수란 이름의 상징이겠지. 예수는 없어요.

이게 바로 인간의 주체라는 것은 결국은 향락이, 인간의 즐거움이 인간의 주체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인간은 그때, 그때 주체가 같다. 다르다? 달라진다. 오후 3시의 나와 오후 4시의 나와 오후 4시 때 조마조마한 나와 오후 9시 찾았을 때 나와 다 달라요. 그렇게 주체가 다른 것에서 성경을 본다는 것은 이건 정말 내가 나를 해석한다는 것은 이건 말도 안 되는 엉터리 해석이죠.

그래서 주께서 어떻게 하시느냐, 우리를 죄인 만드는 식으로 해석을 시작합니다. 틈!! 이거 중요하니까 오늘 강의 제목을 ‘틈’이라고 해야겠네요. 죄인과 의인 사이의 틈에서 누가 나온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오는 거예요. 주님이 나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삼위일체가 나오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가 나와요. 니 때문에 내가 죽었다. 십자가 사건이 나와요.

이제 뭔가 윤곽이 잡히죠? 70이레 하는 것이 뭐냐 하는 게 아니라 70이레는 나의 주체를 해석하고 분해하는 능력으로 우리에게 지시하고 찾아오죠. 그냥 덥석 물다가는 이건 지 잘난 게 되니까 그걸 무는 순간, 70이레 무는 순간 거기서 뭐가 터져 나와야 돼요? 십자가 피가 얼굴에 온 몸에 터져 나와야 되죠. ‘주여, 내가 해석한다고 깝죽 된 나 때문에 돌아가셨군요.’

그럼 모든 목사의 설교 해석은 오직 뭐로 해야 됩니까? 십자가 피! 교인들도 십자가 피 때문에 우리는 살았군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지금 살아가는 것도 십자가 피를 증거 하라고 우리를 계속 살게 하시는군요. 맘껏 향유하고, 조이너스, 즐기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모든 것을 하는 이유가 결국 십자가에 왜 죽었느냐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런 일을, 이런 사건들을 일으키게 되는 겁니다. 간단한 문제예요. 따지고 보면 너무나 간단한 문제예요. 맘껏 하고 싶은 대로 사시고 막 사시고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그런 썩어질 것들을 위해서 우리 육이, 내가 아니고 육의 욕구예요. 육은 편한 게 최고라. 즐기는 게 최고고. 술 끊었다. 5년 뒤에 술 마실 수도 있어요. 왜, 속상하니까. 술 마시면 왜 즐거운데요. 술 취하면 얼마나 기쁜데. 그건 본인이 억지를 부린다고 끊을 문제가 아닙니다. 억지로 통제될 문제가 아니에요. 통제되지 않음을 믿읍시다. 그리고 통제되지 않는 것이 우리 몸이라고 깨닫게 하시는 것은 우리가 아니고 성령이 와야 비로소 우리는 통제되지 않는 몸을 지금 평생 사랑하고 지키고 있다는 것을 깨닫죠. 이게 회개인데 이 회개는 성령이 아니고서는 회개가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죽어 천국 가게 되면 우리는 누구 자랑이 나옵니까? 우리 자랑이 나올 수가 없죠. 그렇게 당했는데. 그렇게 매일같이 당했는데. 수시로 당했는데 어디 가서 ‘나 참 잘났죠? 이뻐? 2+2=4, 귀요미’ 이게 될 수가 없죠. 그게 호명입니다.

그 다음에 217 페이지 중간에 보면 『이는 곧 세상 해석에 있어 이미 주도권이 상실되었으며』주도권이 상실되었습니다. 『실제적인 언약 실행자』이게 뭐냐 하면 이겁니다. 여러분이 이제는 아시는 것 같아서 기쁜데요. 기쁘기 때문에 다 내용을 아니까 아까 십자가라 했죠? 십자가는 구약에서 이게 공백입니다. 십자가는 신약에서 일어났잖아요. 구약은 공백 이예요. 공백이 블랙홀이라는 주변의 강렬한 힘 때문에 소용돌이가 치겠죠. 그러면 여기는 인간은 죄인으로서 들어갑니다. 죄인 아닌 자가 없어요. 아담의 자손 죄인 아닌 자가 없어요. 빨려 들어가죠. 주님께서 여기 같이 빨려 들어갑니다. 희생자로서! 결국 여기는 구약에서 뭐가 되느냐 언약이죠. 그러면 주도권 자가 누굽니까? 이 언약이 주도권 자가 되어서 하나님도 여기에 몰두하고 우리는 여기 그냥 빨려들어 가고, 구약에서 언약 하나 터질 때마다 휙휙 소용돌이치면서 빨려 들어가는 사람들이 나오죠.




목사님 예를 들면 좋겠네요. 예를 들죠. 요셉입니다. 요셉이 꿈을 꾸는데 지가 꿈을 꾸려고 애쓴 게 아니죠. 볏단이 일어나 자기한테 절을 하더라. 상당히 주제넘고 건방진 거죠. 형들도 약이 오를 만하단 말이죠. 12명 같으면 그 중에 서열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특히 아버지가 요셉만 사랑하니까 그것도 문제인데 거기다 요셉까지 꿈까지 꿔서 자랑 질을 하니까 진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죠.

그런데 요셉이 가는 곳마다 어떻게 됩니까? 주변에서 일이 잘되죠. 요셉의 주변의 일은 잘되는데 그 잘되는 효과를 요셉이 받지를 못합니다. 요셉은 점점 더 나락에 떨어져서 희망이 없어요. 애굽에서 보디발의 감옥에 동기생이 있었어요. 술 맡은 관원과 떡 맡은 관원이 함께 잡혀 있었는데 그때 거기에 같은 죄수지만 사무장으로 누가 있었느냐 하면 요셉이 있었어요. 영화 쇼생크 탈출‘이란 거와 비슷한 것 같아요. 하도 일을 잘하니까 요셉에게 모든 걸 맡긴 것 같아요. 그들이 꿈을 꾸고 난 뒤에 요셉이 해석을 해주고 난 뒤에 분명히 감옥에서 나갔거든요. 그래서 요셉이 ’아저씨, 내가 억울하게 들어와 있으니까 당신이 여기서 나가면 제발 내가 억울하다고 이야기 좀 해주세요.‘ 라고 당부를 했는데 성경에 뭐라 돼 있느냐 하면 그 사람이 잊어버렸어요. 그래서 또 요셉의 마지막 희망도 좌절됐죠. 그럼 그 다음부터 요셉은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죠.

그런데 어느 날 밤 애굽의 바로 왕이 꿈을 꾼다 이 말이죠. 바로 왕이 꿈을 꾸다 보니까 그 꿈을 해석하다 보니까 꿈 해석 잘하는 요셉을 그 신하가 ‘아차, 잊었습니다.’ 지금 보디발의 감옥에 꿈 해석 잘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잖아요. 그것도 위기가 있어요. 이야기가 그렇게 잘 풀리는 게 아니에요. 해석 했으면 해석자 불러서 요셉이 했다 말이죠. 요셉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임금님, 제가 꿈 해석 다 했죠. 그러니까 저를 풀어달라.’고 그렇게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안 했어요. ‘임금님, 그렇다면 7년 대 흉년 다음에 대 가뭄인데 행정적으로 잘 처리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요셉이 이야기를 했어요. 임금님이 ‘니 말이 맞다.’ 요셉이 ‘그럼 그런 사람들을 천거 하세요.’ 하고 자기는 빠졌어요. 다시 갔다니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니가 해볼래?’ 한 거예요. ‘니가 해볼래’가 요셉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예요. 그런데 요셉은 아직까지 내용을 몰라요. ‘내가 해볼래’ 함으로서 요셉은 감옥소에서 회복된 것만 알았잖아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요셉이 뭘 아느냐 하면 7년 흉년과 7년 가뭄이 애굽을 살리기 위함이 아니고 과거의 기원, 용어가 어려울 수밖에 없어요. 기원, 다른 말로 하면 근원. 처음에 야곱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줬죠. 맞죠. 야곱에게 은혜를 준 효과가 뭐냐 하면 요셉이 꿈을 꿨잖아요. 그럼 요셉의 꿈과 뭐가 관련돼 있다? 야곱에게 떨어진 언약과 관련 있죠.

아까 언약하니까 또 잊어버렸으니까 다시 합시다. 언약은 공백이고 위에는 의인 떨어지고 밑에는 죄가 올라오고, 하나님이 이거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했죠. 요 언약이 신약에 가면 새 언약, 십자가지만 구약에서는 빈 공백, 누구든 들어갔다 빠져 나가야 돼요. 아브라함이든 이삭이든 야곱이든 빠져나가야 돼요. 이 자리는 예수님 자리지 인간이 들어갈 자리가 아닙니다. 다만 빨려 들어간 사람은 그냥 장차 올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냥 들어갔다가 빠져나오면 돼요. 제가 요 이야기를 요셉의 예를 듭니다.

요셉이 꿈을 왜 꿨느냐 하는 문제가 비로소 근원으로 돌아가니까 소급해서 알게 된 거예요. 요셉이 꿈을 꾼 것은 야곱의 언약을 위해서 한 겁니다. 그런데 어린 요셉은 그걸 몰랐어요. 시편 105편에 나옵니다. 요셉이 갇히게 된 것은 말씀이 응하게 함이라고 나중에 후대에서는 그렇게 해석하지만 정작 요셉 본인을 그걸 모른다니까요. 요셉을 ‘나는 억울합니다.’ 이 소리밖에 안 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요셉이 창세기 42장에서 이야기합니다. ‘형이여, 나를 보낸 것은 형이 아니고 형이 배신하고 나를 고해서가 아니라 주께서 나를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나를 먼저 보내었습니다.’라는 고백을 요셉이 먼저 알게 돼요.

바로에게 꾸어진 7년 대 흉년, 7년 대 가뭄이 요셉을 그게 애굽의 재정상태 때문에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이 애굽의 나라는 아무것도 아니고 진짜 언약을 이룰 이스라엘 나라의 야곱 언약이 장차 이스라엘 나라에 어떻게 구성되는가 그 핵심 부품을 장착하기 위해서 배신 받은 자가 배신한 자를 도로 그 죄까지 감당하고 구원해 낸다는 이 언약의 원리! 십자가의 원리! 요셉은 예수님처럼 당했는데 그것이 요셉의 모습이 장차 오실 예수의 모습인 것을 그리스도 오기 전에 이미 1600년 전에 그것을 예견한 겁니다. 해석을 그렇게 해야 돼요. 요셉도 몰랐어요. 지금 우리에게 신상에 일이 왜 일어납니까?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주여, 괴롭습니다.’ 우리는 지 괴로운 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지 신상의 어려움이 풀리는 것만 생각하고 빨리 벗어나고 빨리 부자 되는 것만 생각한다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썩어질 것을 거두고 반대로 뒤집어서 예수님이 이미 다 구원 했다는 사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십자가 피 밖에 없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신상에, 이런 신상 털기가 일어나요. 이런 신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꼬라지는 이래도 구원받았다는 이야기를 하라고. 꼬라지는 이래도 이건희 못지않게 우리는 구원 받았다고. 요셉 꼬라지가 국무총리 되고 안 되고 관계없어요. 그 고생한 거 생각하면 국무총리도 서러워요. 병주고 약주고.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얼 증거 하느냐? 우리 안에 누가 살아 계신가, 그게 중요한 겁니다. 그걸 증거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이 언약을 한 거예요.

그래서 여기 70이레 하면서 217 페이지 보게 되면 그 주도권이 이미 언약에 왔잖아요. 그럼 주도권이 언약에 왔다. 요 시점에 이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이게 발전하면 뭡니까? 라고 저보고 물으신다면 지금까지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노아, 이렇게 개인 아닙니까? 그 다음에는 국가가 돼요. 여기서 논문이 국가로 뜁니다. 70이레 나오기 전에 이게 국가로 뛰어 버려요. 이 논문이 성경 전체를 이야기한 건 아니니까 분량이 차야 되니까 아브라함, 이삭, 노아, 이 이야기에서 갑자기 국가로 나가요. 전에는 아브라함, 전에는 노아, 개인 요셉, 개인이 뭔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앞으로 어떻게 된다? 국가가 되는 거예요.

그 국가가 되면서 국가를 하나로 모으는 그 지점이 뭐냐 하면 그게 지금부터 공부할 ‘성전’입니다. 슬슬 성경 전체가 풀리죠? 개인, 개인에서 성전이 언제 나타난다? 처음부터 성전 없어요. 그냥 날을 세웠지 성전 아닙니다. 개인이다가 성전이 언제 등장한다고요? 국가 개념이 등장하면서 드디어 제사법이 모세가 시내 산에서 이렇게 제사 드리고 이렇게 유월절 드리고, 맥추절 드리고 수장절 드리라는 거죠. 이거는 개인이다? 아니 집단이다.

왜 집단인가? 구원받을 사람, 너, 너, 너, 구원받으라 하면 되지, 왜 갑자기 개인에서 집단이 왜 나오는 겁니까? 그걸 70이레 논문 서론에 어려운 이야긴데 이렇게 써놨습니다. 장차 올 짐승의 모습이 분명히 숨어있는 것은 짐승은 개인이거든요. 용, 옛 뱀, 개인인데, 인간들의 상징, 인간의 현실, 다른 말로 상징 계. 눈에 보이는 거, 눈과 귀로 들은 것만의 집합, 들리는 소리 이런 건 다 떼어버리고 보이는 언어도 이런 건 다 버려버리고 다만 우리끼리 눈으로 보고 듣는, 육을 가진 인간끼리 다 납득이 되는 끼리 모이는 그걸 상징 계, 아시겠죠? 다른 말로 하면 현실! 현실에 올 때는 이것이 짐승이 국가의 모습으로 설치는 겁니다. 누구든지 도장 맞지 못한 자는 매매를 못하게 한다. 그 이름은 뭐라? 666이라.

‘요한계시록에서 숫자가 무엇을 의미합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요한계시록의 숫자는 평소에 인간이 숫자를 다루고 있다는 걸 감안한 조치입니다. 144.000은 144.001과는 다르죠? 666은 667과 다르죠? 이게 달라야 포카를 치든지 화투를 치면, 구땡하고 장땡하고 달라야 따먹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666, 777, 144.000, 숫자로 짜여 진 상징 질서를 이미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그걸 사용하면서 주께서는 그들의 숫자의 해석으로서 도저히 해석이 안 되게 막는 역할이 바로 숫자예요. 왜 그렇게 막아야 되느냐, 그렇게 막아야 누구든지 자력으로 십자가를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만들어요. 십자가 지신 예수를 믿지 못해야 피가 올게 아니에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 십자가 피를 믿어버리면 그 사람한테는 예수님의 피가 필요 없어요. 그냥 예수 믿으면 되잖아요. 예수의 피를 믿지 않고 구원받는 법은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 피가 유효하려면 모든 인간도 자력으로 예수님 믿는다? 못 믿는다? 믿지 못하게 돼야 돼요.

그걸 믿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상징 세계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게 자연적으로 나오죠. 갇혀 있는 세계에서 끄집어내는 방법은 그들이 있던 그 자리를 그대로 고수하면서 그들 힘으로 못 온다는 것을 분명히 해줘야 돼요. 생명나무 가는 길은 선악과 따먹은 자가 못 오게 한다는 걸 그 취지를 살려야 돼요. 그걸 안 살려 줘버리면 주님께서 이랬다. 저랬다 돼 버려요. ‘아이고, 내가 과거에 너희들 생명나무 못 따먹게 만들었어. 아이고, 내가 미안하다. 미안하다. 내가 왜 그때 그런 발언을 했나. 취소, 취소. 철회, 철회. 다시, 무효, 무효, 내가 구원해 줄게.’ 이게 오늘날 한국교회 가르침 아닙니까? 옛날에는 했지만 그때는 화내려고 일부러 쾍! 했지만 지금은 사랑의 하나님이라서 터뜨려서 주님이 생명이라 너희에게 맘대로 주신다는 거예요. 갑자기 주님의 취지가 바뀌었어요. 주님의 취지는 바뀌지 않습니다.

아까 이야기한 요한복음 5장처럼 오직 모든 권한을 예수님께 일임한 것은 어떤 인간도 예수 권한을 알리라. 어떤 인간도 예수가 될 수 없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누구를 안 믿고? 나를 안 믿고. 나를 믿는 놈 죽습니다. 저주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 믿는 걸 저주 받는 걸 아는 사람만이 예수 믿는 사람 이예요. 참 말도 어려워요. 그냥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러면 쉬울  텐데, 그건 상징 계 속한 것이기 때문에 흉내 낼 수 있어요. 상징 계가 이 땅에 거쳐서 갔던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건 뭐냐 하면 ‘내가 아니요, 자기 목숨을 사랑한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그걸 집어넣는 이유는 주님께서 그런 식으로 그런 것을 경과했기 때문에 그걸 그대로 우리한테 올 때도 그걸 그대로 되풀이 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아니요.’라는 말을 반드시 해야 돼요. ‘나는 이미 죽었고 내가 사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다.’ 나는 이미 죽었고, 를 여기다 반드시 집어넣는 이유가 우리가 조작해 내는 존재기 때문에 그래요. 뭐든지 흉내 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기존 교단이나 교회는 이게 안 돼요. 신천지고 구천지는 이게 안 된다 이 말이죠. 그저 한 수 배워서 흉내나 내고 구원받으려고 한다 이 말이죠.

제가 분명히 이야기하면 ‘그럼 이 많은 사람들 어떻게 하겠느냐’ 이렇게 나올 거예요. 쓰레기 많이 모아놓았다고 그게 신제품 됩니까? 여러분, 쓰레기는 모아놓으면 쓰레기예요. 신제품 안 나옵니다. 쓰레기 모아놓으면 신제품이 펑! 하고 나온다 안합니까? 그냥 쓰레기 더미에 불과한 거예요. 같은 쓰레기이기 때문에 자기가 쓰레기인 줄 모를 뿐이지.

예수님만 쓰레기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만 믿습니다. 쓰레기인 내가 예수 믿어서 우리는 천국 가는 거예요. 쓰레기 같은 강도, 쓰레기 같은 세리,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부러 세리, 강도, 창녀 이야기한 것은 ‘너희들도 보기에 쓰레기지? 내가 천당 가게 한다.’

어쨌든 간에 주님께서 이 땅에 왔다는 게 중요해요. 안 왔으면 구원 없습니다. 오셔서 분명히 사흘 만에 부활했어요. 부활해서 또 찾아왔어요. 성령을 통해서 또 찾아왔을 때, 그때 예수님 누가 죽였는가, 국가의 단위로, 개인이 죽인 게 아니고, 본디오 빌라도가 죽인 게 아니고, 안디바란 제사장이 죽인 게 아니고, 국가가 죽여요. 요한계시록에 나오죠. 국가,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짐승, 다니엘에서는 짐승이 바벨론, 그 다음 짐승은 메대 바사, 그 다음은 헬리 마케도니아. 헬라라 하는 것은 국가 이름이 아니고 헬라문명을 이야기해요. 마케도니아 국가예요. 그리스 북쪽이 마케도니아, 밑에는 아가야라 하거든요. 실제로 마케도니아가 그리스 북쪽에 있어요. 나라는 요만한데 전부 다 서로, 서로 지 땅이라고 지금도 싸우고 있어요. 크로아티아, 나라가 많아서 너무 복잡해요. 그 다음에 헬라 마케도니아 다음에 로마, 이 짐승을 무슨 짐승? 네 짐승, 네 짐승이 끝 이예요.

우리 다니엘에서 했잖아요. 마지막으로 로마는 특징이 뭐냐 하면 7머리, 10뿔, 7머리 10뿔이 뭔 뜻이라 했습니까? 자체적으로 아무리 경쟁해도 덩어리는 무슨 덩어리다? 로마다. 네 번째 짐승의 테두리를 벗어난다? 못 벗어난다? 못 벗어난다.

그럼 짐승의 역할은 뭐냐? 짐승의 역할은 바로 예수님을 어린양 되게 하는 역할입니다. 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요거 아까 두 번째 동영상 할 때 했죠? ‘진노의 얼음장’ 할 때 했죠. 국가라는 이름으로 예수님께 대들 때 아까 했잖아요. 매매를 못하게 한다. 그만큼 국가력이죠.

그러면 국가는 어느 국가? 북한? 중국? 한국? 어느 국가? 이 세상은 어느 국가가 아니고 전부 다 로마라니까요. 로마! 예수님은 어느 나라에 죽었어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어느 나라에 죽었어요? 네 번째 죽었어요. 네 번째 죽은 짐승을 세상 끝까지 밀어붙임으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주님께서 십자가 가지고 추궁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 겁니다. ‘니가 나 죽였잖아.’ 그러니까 그 뒤에 나오는 국가는 전부 다 로마 국가의 같은 속성을 지닌 거예요. 그 속성이 뭐냐 하면 짐승의 속성! 뭐냐 그리스도 복음을 훼방하는. 훼방한다는 말은 그게 음녀거든요.

음란의 포도주가 뭐냐 음란이라 하는 것은 만국의 음란의 포도주라고 요한계시록에 있다고요. 이게 뭐냐 하면 아름다움이 뭐로 바뀌었다는 거죠? 추함으로 바뀌었다는 거죠. 그러면 해를 입은 여자는 약한 것이 해를 입었으니까 약한 것이 묵시에서는 강하다. 두 증인이 순교 당한 장소가 십자가, 또는 소돔과 애굽이라 돼 있죠. 질문한 내용이 그거에요.

질문한 것이 예수님 십자가가 가지고 있는 속성 있잖아요. 그 속성을 이 상징적인 세계에 나타났을 때는 사람들한테 얼마나 무시당하느냐, 그 이야기라 말이죠. 그런데 그 무시 안 당하려고 사람 끌어 모아 보세요. 그게 악마 아닙니까? 주님은 소외되고 약하고 무시당하고, 그런데 종교란 이름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국가적인 형태를 갖춘다면, 그럼 적그리스도가 뭐예요? 짐승이 딴 게 아니고 뭐가 짐승입니까? 예수의 십자가 지신 그 속성과 그 취지와 대비가 되고 그걸 모독할 때, 그것이 이 땅에 나타난 가짜들입니다. 적그리스도! 마치 이 땅의 짐승, 양의 모습을 한 땅의 짐승, 결국은 요한계시록은 십자가를 내밀게 되면 해석은 안 풀리는 게 아니고, 전부 다 해석은 다 풀린 겁니다.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그 주체가 마귀적인 사고방식으로 무너뜨려요. 우리는 그걸 물을 주체가 없어요. 왜 그걸 묻는다 했죠? 이거 알면 혹시 천국 보내줄까 해서. 내가 천국 갈 사람이냐고 묻지도 않고 ‘무조건 나는 천국 가야 돼.’라는 사고방식으로 들이대다가는 어디 들어간다? 십자가 앞에 당하는 그런 마지막 넷 째 짐승의 시절에 이미 놓여있다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해석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참 우리 자신의 욕구와 육의 욕구를 무슨 수로 이깁니까? 주께서 그런 육을 주시면서 우리를 찾아오신 것은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인 것을 깨우쳐서 십자가 죽었던 이유를 증거 하라고 하신 뜻인 줄 아오니, 범사에 모든 것에 감사하면서 이렇게 되어 진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와 희생으로 공로로 주어진 혜택인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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