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사항

십일조140830

아빠와 함께 2023. 7. 1. 22:12

14-말라기 3 8-10 (십일조) 140824-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기 3 8절에서 10절입니다. 구약성경 1330페이지입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방금 읽었던 이 대목은 마치 한국교회를 지금까지 존재케 한 동기가 되는, 밑천이 되는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이제는 이것이 어떻게 파괴되어야 되는지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아봅시다. 창고가 넘친다고 했을 때,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비어있는 창고가 채워진다, 그렇게 생각을 하시는데 그 생각부터 뜯어 고쳐야 돼요. 우리의 창고, 우리의 은행통장의 잔고가 비어 있다면 그 자체가 저주가 되는 겁니다. 창고가 가득 채워 질 때, 그것이 하나님의 원하는 바라면 창고가 채워지지 않는 그 상태는 이미 저주받은 상태에요.

 

그래서 그걸 줄이면 이미 우리는 저주받고 있는 입장에 있습니다. 저주받는 자가 복을 받는다고 했을 때, 항상 자기는 어떤 상태가 저주받은 상태인가를 본인이 스스로 인정을 해줘야 돼요. 근데 사람들은 십일조를 생각할 때, 자기가 저주받은 상태를 인정하지 않고 더 끌어 모으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 지금 있는 것도 뭔가 숨 쉴 만은 한데, 성경에 보니까 이런 복 준다니까, 보너스 준다니까 이참에 십일조 해가지고 하나님이 있는지 시험도 해보고, 뭐 주면 고맙고 안줘도 뭐 십분의 일만 날아가니까 나중에 때가 되면 주시겠지. 그러나 이런 생각 자체는 저주가 아닐걸?” 그 자체를 저주가 아니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자신이 현재 살아가는 상태를 저주 상태라고 인정을 안 하고 있는 겁니다. 남들 그렇게 사니까 이정도 사는 것도 뭐, 착하고 바르게 살고 정상적인 삶이라고 우기는 버릇이 있습니다. 근데 하나님께서는 창고에 가득차지 아니하면 이미 너는 저주받은 상태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 저주받은 상태가 된다면 어느 인간이고 자기 창고가 가득 찬 인간 없거든요. 어느 인간치고 365일 늘 가득차지는 않는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저주가 해소되고 완전, 완전한 복이 주어져서 창고가 늘 유지되려면 그 창고는 우리가 상상해내는 그 창고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돼요. 창고 관리가 저주받은 인간 손에서 운영되지 않는다는 것을 감 잡아야 돼요. 뭘 통해서? 본문 말씀을 통해서.

 

이 본문 말씀을 통해서 여기에 있는 창고에 손대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 관리하에 되지 인간 관리하에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거는 상식선에서도 수용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점을 동일한 본문 보면서도 그게 감이 안 잡히는 것은, “, 이정도 살아도 남들 버는 것처럼 사는 거니까. , 됐심더.” 지가 스스로 됐대. 자기 스스로 그만 자기만족에 빠져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그 수준은 항상 창고가 가득차야 돼요. 여러분의 창고 지금 가득 차 있습니까? 내가 보니까 수심이 가득 차 있어요. 창고가 가득차지 않으면 여러분들의 생활이 지금 정상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정상이 된다는 것은, 니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뭔가 개입이 있어야 되는데, 그 개입은 십일조라는 율법의 개입으로 하나님께서 원하는 축복된 상태가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율법 개입을 들어왔었기 때문에 만약에 율법을 잊어버리고 놓친다면 우리는 그 자체가 저주상태가 되는 겁니다. 이쯤에서 한 번 정리합시다.

율법을 생각지 않는 것은 저주고, 

율법을 생각하면 축복인데, 율법을 생각한다고 축복이 아니고 율법이 요구한대로 충족된 결과가 나오지 아니하면 율법을 알아도 그것이 또 저주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십일조라는 율법은 무엇을 끌어 당겨서 십일조라는 율법을 주었는가. 이게 말라기 전체가 레위 언약을 위해서 하는 겁니다. 레위 언약. 말라기 2 8절에 보면,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파하였느니라 이래 되어 있거든요. 레위 언약을 유지하는 데는, 유지 하냐, 안 하냐의 측정을 십일조를 가지고 측정을 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십일조라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레위 언약을 언약답게, 하나님이 원하는 레벨답게 유지하는 데에 있어서 십일조가 거기에 관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십일조해서 돈 벌자가 아니라 십일조해서 레위 언약 유지하세. 이런 취지로서 십일조를 하느냐고 묻는 겁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십일조를 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거는 그들이 돈을 벌기 싫어서가 아니라 레위 언약이 당장 자기들과는 무관한 약속에 불과하다, 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는데 급급하다 보니까 하나님의 레위 언약이라는, 하나님의 체계와 시스템에 대해서 별로 관심사가 없었던 그게 문제에요. 지금은 무슨 언약이냐 하면, 레위 언약이 아니고 새 언약이거든요. 이 새 언약에 지금 현대인들이 관심 둡니까? 안 두지요. 자기 생활에 급급하잖아요. 그래서 십일조에 담긴 레위 언약과 십일조의 연관성을, 이게 상당히 복잡하기 때문에 그걸 먼저 간단하게 들어가기 위해서 베드로후서 3 6, 7절을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 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림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이래 되어 있어요. 세상에 있는 하늘과 땅, 우리가 보고 있는 별이 박혀 있는 하늘과 나무 초목이 자라나는 이 땅은 레위 언약에 의해서 불바다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말라기와 연관시키면. 근데 방금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사람들은 레위 언약에 관심없다고 했죠. 사람들은 자기 코앞에 있는 자기 생업만 유지되게 된다면, 참 좋은 세상, 살기 좋은 세상이에요. 더 이상 욕심도 내고 싶지 않아요. 창고 지어 놓고 반만 채워도 아이고, 고맙습니다.” 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어나요.

 

하지만 제가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창고가 꽉 차야 되고 꽉 찬 수준이 아니면 어떤 그것도 저주받은 티를 내는 창고가 되는 겁니다. 그것은 니가 잘 먹고 잘 사느냐의 차원이 아니고 레위 언약이 제대로 실시되고 있느냐에 대해서 니가 관심 두고 있느냐 아니냐의 여부를 따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레위 언약과 십일조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십일조 하는 것이 어떻게 레위 언약의 유지체계가 될 수 있습니까? 그런 질문이 나와야 되겠죠. 글쎄, 지금 그 질문에 제가 하고 있지 그 질문을 저한테 묻는 사람도 참 드물어요. 드문 게 아니라 거의 없어요. 민수기 3 11, 12절에 보면 레위인이 나오는데, 그 레위인의 존재 의미가 나와요. 그건 뭐냐 하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레위인들은 모든 자손 중에서 모든 첫 해에 처음 난 자를 대신한다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열 두 지파가 아니고 열 세 지파가 됩니다. 열 세 지파지만 열 두 지파로 만들어 놓고 한 지파를 따로 떼어내버려요. 그러면 그 떼어낸 지파와 나머지 열 두 지파가 일대일 대응이 되는 겁니다. 일대일 대응이 되어 가지고 대신한다, 누구를 대신한다의 대신하는 체제로 이스라엘을 운영해 나가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제사장나라 라고 하는 거예요. 전부가 나한테 오지 마라 귀찮아 죽겠다. 전부가 오지 말고 너희를 대표하고 대신한 지파하고 나는 상대하겠다 이 말입니다. 내가 대표한, 열 두 지파를 대표해서 독특한 한 지파하고 상대할 테니까 너희들은 그 뽑혀 나온 그 한 지파에 대해서 그 대표성을 인정하라는 겁니다.

 

그 대표성을 인정할 때, 어떻게 인정하느냐 하면 우리가 이 땅에서 나온 첫 소산물, 십일조라는 맏물을, 첫 소산물을 레위 지파한테 드림으로써 하나님이 설정해놓은 그 시스템, 대표 시스템을 우리가 인정합니다, 라는 표현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저 분들이, 레위 지파가 존속하게 되면 우리가 살고, 그 분이 완전히 꺾여 버리면 우리도 같이 꺾인다는 겁니다. 베드로후서 3장 이야기 다시 말씀 드릴까요? 그때는 물로 심판받았지만, 이제 앞으로는 하늘과 땅은 불로 심판받습니다. 불로 심판받는데, 불로 심판받는 근거는 어디 있느냐. 레위 지파의 온전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불로 심판받는 거예요. 율법의 완성에 의해서 심판받는 겁니다.

 

율법의 완성이 바로 새 언약이고, 레위 지파의 완성이 새 언약이고,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전체가 언약으로 되어 있어요. 옛날 언약은 구약이고, 새로운 언약은 신약이라. 신약과 구약 합해서 바로 약국이 아니고 이게 성경이에요. 그물망 같은 언약 체계로 되어 있습니다. 그물망 같은 언약 체계로 되어 있으면서 인간은 조금도 하나님의 일에 관여할 수 없음이 분명해져요. 십일조 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고 거예요. 십일조 하고 구원받게 되게 되면 반드시 이것은 언약에 의해서 어떤 것이 분석되느냐 하면, “, 왜 냈지? 왜 낸 거야? 그 귀한 돈, 니가 노동해서 얻은 귀한, 니가 피땀 흘려 얻은 돈 그거 왜 내지? ! 낸 만큼 더 얻으려고 하지?” 그러니까 너는 그 정신 상태가 레위 언약을 모독하는 겁니다. 대표성을 모독하는 거예요. 대신해줬다는 그것을 모독하고 무시하는 행위가 십일조해서 돈 벌겠다는 수작입니다. 십일조해서 욕 먹이는 거예요.

 

레위 지파의 대표성은 레위 지파가 십일조 받아 챙기는 데서 머무르지 않고 레위 지파 내부로 들어갑니다. 내부로 들어가면 십일조를 받은 레위 지파가 또 십일조를 내야 돼요. 그 십일조 받는 대상이 누구냐. 제사장입니다. 일반 백성들은 레위인에게, 레위인들은 제사장에게. 그러면 이 세 계급에서 두 단계가 나오는데 그 두 단계의 연결 고리에서는 십일조가 주어집니다. 그 십일조의 단계, 내용은 무엇이냐. 십일조에 드려야 할 모든 예물과 소산물은 어디서 나왔으며 어떻게 드리는가. 신명기 14 22절에 보면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해놓고 십일조의 내용이 나와 있어요.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유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누구보고 이야기 하냐면 레위인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레위인보고. 지금 대표자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레위인들은 백성들이 드린 십일조를 받는데 그것도 맏물, 제일 좋은 것을 받아서 그들은 존재하는 거예요. 생존하는 거예요. 레위인들이 생존해줘야 레위인 속에 들어있는 제사장도 생존하는 겁니다. 제사장은 레위 지파 사람입니다. 다른 지파 사람은 제사장이 안 되고 레위 지파 속에서 제사장이 유지되거든요. 제사장의 제사가 유지될 경우에만 현재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하는 그 땅에서 항상 좋은 곡물과 생산물이 이렇게 늘 발생되게 되어 있는 그런 구조가 되어 있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이런 겁니다. 니가 들어 온 땅은 너희들의 일반적인 땅이 아니라는 거죠.

 

제가 아침에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만나가 있을 때는 광야지만 만나가 끊어지면 약속의 땅이라 했잖아요. 약속의 땅에 왔을 때, 그냥 애굽에서 붕 날아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을 왜 광야를 거치게 하고, 거기 광야는 먹을 것 입을 것 없잖아요. 마실 것도 없고. 광야를 거치게 하고 광야를 종군해 다니면서 저들이 아는 음식을 주는 게 아니고 무엇이냐 하는 만나를 먹이시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애굽에서는 모든 양식은 그저 자기 배 채우는 양식이에요. 그저 내 사는 것이 시급하고 다급하고 존재이유는 뭐냐, 내가 존재한다는 것, 생존한다는 것 자체가 모든 존재 이유의 마감이고 목적이에요. 근데 그걸 없애는 거예요. 광야에서. 그래 가지고 천국에 못 간다는 거예요.

 

천국은 니가 살아야겠다고 하는 사람이 가는 것이 아니고 나는 죽어도 말씀은 살아야겠다는 사람만 가는 겁니다. 그래서 신명기 8장에 보면 만나를 만나라 하지 않고 뭐냐, 말씀덩어리, 말씀으로 봅니다. 니가 갈 나라는 니가 밥 먹기 좋은 나라, 살기 좋은 나라가 아니고 말씀이 말씀으로 완성된, 완성체 상태가 그 나라에 지금 니가 기어들어가든 당당하게 들어가든 들어간다는 겁니다. 정말 이거는 일반종교에서 말하는 이승에서는 고생하지만 죽어서는 호강한다는 그런 논리가 아니에요. 성경은 그런 논리를 거부합니다. 이 땅에는 니 위주로 살았지? 하지만 니가 가야될 천국은 니 위주가 아니고 말씀 완성 위주, 언약 완성 위주, 그 완성자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거든요. 예수님 중심주의, 예수님 자리로 가는 거예요.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끝에 보면,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니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 지구상의 온 천하가 결국 너의 자리가 예수님이 줄 너의 자리가 아니라는 거죠. 주님의 자리는 뭐냐 하면, 그 뒤에 말씀에 보면 이 중에서 내가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가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공하겠다는 것은 잘 먹고 잘 사는 그런 자리가 아니고 예수님이 왕이 됨이 보이는 그 자리에요. 봐라 이 예수가 왕이잖아. 세상의 주관자잖아.” 그것이 확연히 밝혀지는 그 상황, 그 상태의 나라가 바로 성경에서 그토록 이야기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이 땅에서 예수님이 왕 됨을 시답지 않게 여기고 관심이 없다면 이 땅에서도 천국 못 가고 죽어서도 천국 못 가고. 아예 못 갈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관심사가 일어나지 않는 법이에요. 어떤 의미에서 자기 빼놓고 남을 왕으로 친다하는 자체가 오히려 땅의 입장에서는 아주 정상적인 사람이에요. 아주 정상적인 사람이고. 나보다 예수님 위주, 이런 사고방식이 이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어떻게 보면 좀 비정상적인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니 몸뚱아리 가지고 니 몸을 위해서 살아야지. , 니 말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냐? 이 바보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럼 그 사람이 뭐라 합니까? “니는 레위 지파를 봐라. 레위 지파가 우리를 대신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생명은 없는 거야.” 그 레위 지파 안에 제사장 있고 그 제사장의 완성은 뭐냐 예수님이다. 그럼 예수님이 바로 제사장이고 왕이고 선지자가 되는 거예요.

 

지금 그 구조를 성경은 우리보고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성령을 통해서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이 가르침은 우리가 빈 마음에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역시 그래도 내 몸이 편한 게 최고야. 이것이 철석같이, 철판처럼, 완전히 이거는 고정불변의 상태로 있는 우리 몸을 향하여 지금 성경에서는 그 말씀을 뿜고 있는 거예요. 내지르고 있습니다. “십일조 해봐라 창고가 넘치지.” 그러면 우리는 아이고, 제가 무슨 욕심을 내겠습니까? 이만하면 됐심니더.” 이런 식으로 나온다니까요. 이게. “한 번 해볼까? 해보고 창고에 안 넘쳐도 괜찮지.” 괜찮은 게 아니라니까요. 이게. 그 창고가 주님 관리하에 창고기 때문에 레위 언약이 완성이 되면 그 창고도 완성이 돼요. 레위 언약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시스템 자체에 레위 언약 있으면, 십일조 있으면, 창고 있으면, 모든 것이 자기 자리에, 위치에 칩처럼 박혀 있어요. 이게 완성된다면 같이 완성이 됩니다.

 

그러면 그 창고, 하나님의 관리하에 창고는 뭐냐, 다른 말로 하면 천국이죠. 그러니까 천국이 복이 넘쳐나는 거예요. 그걸 말라기에서는 미리 앞당겨서 예고 한 겁니다. 이 창고는 레위인들의 창고예요. 레위인들의 창고라니까요. 그리고 레위 언약이 완성될 때, 그 창고도 완성이 될 겁니다. 그러면 그 완성된 창고가 뭐냐, 지금 천국이죠. 천국이 돈 모여 있습니까? 현찰로 되어 있습니까? 금괴로 되어 있습니까? 뭐로 되어 있습니까? 천국은 말씀의 완성으로 되어 있죠. 말씀의 완성으로. 말씀의 완성은 어떤 상태를 말하냐 하면, 예수님을 주 되심으로 모시는데 전혀 지장 없는 상태를 말씀의 완성 상태입니다. 이 세상이, 천국이 나를 살기 좋게 편하게 하는 세상이 아니고, 나 말고 주님을 주되심으로 높이는데 전혀 흠이 없는 완벽한 상태가 바로 천국이에요.

 

거기다가 나를 집어넣어 버리면 이거는 이야기가 소통이 안 되는 이야기에요. 섞이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섞는 셈이 돼요. “목사님, 천국가도 메시가 뜁니까?” “메시가 누군데?” “메시는 축구 선수인데, 나 축구 너무 좋아하는데 천국 가서 축구 없으면 나 천국 안 갈랍니다.” “천국 가서 골프장 있습니까?” “?” “천국 가서 골프 원 없이 한 번 쳐 볼래요.” 당구 좋아하는 사람은 천국에 당구장 있어야 되고, 축구 좋아하면 축구장 설비되어 있어야 되고. 노래방 좋아하면 천국에 노래방 기계가 전부 있어야 되고. 지금 그 상상은 레위 언약, 다시 말해서 이 무지몽매한 나를 누군가, 뭔가 대신했다는 그 대표성을 완전히 누락하고 놓치고 있는 입장이에요. 놓치고 있는 입장입니다.

 

십일조라 하는 것은 맏물이에요. 왜 십일조를 맏물을 드려야 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맏아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출애굽기 12, 13장에 보면 거기에 유월절이 나와요. 죽음의 사자가 와서 이스라엘 장자를 잡아 죽이려고 왔다가 그 문설주에 발린 어린양의 피를 보고 니는 면제!!” 해서 후딱 넘어갔다 해서 넘어가는 날. 넘어 갔던 날. 면제해 주셨던 날. 죽여야, 죽이기도 괜찮은데 안 죽이고 봐주신 날. 봐주시는데 대표성이 들어 있거든요. 진작 너도 죽어야 되는데,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죽어야 하는데, 너 대신 어린양이 죽었기 때문에 대신한 어린양 보고 후딱 넘어가 준 거예요. 그래서 어린양과 그 집에 살게 된 장자는 매치가 되고 연결되거든요. 연결되면서 이제부터는 그 집안의 장자의 생활은 끝나고 그 집안의 장자는 함께 살아도 하나님의 장자로서 등극이 됩니다. 등록이 돼요. 하나님의 장자로 등록이 되면서 장자들의 집합의 대표자가 누구냐. 하늘에서 이 땅에 장차 오실 맏아들, 그 장자가 기존의 장자들의 대표성 장자가 되는 겁니다. 이게 성경 내용이에요. 이게.

 

십일조 하면 복 받습니까? 이거는 성경 내용이 아니라니까요. 십일조 하면 내가 잘 됩니까? 이거는 성경 내용이 아니고 성경 내용은 맏아들, 맏아들 보여주기 위해서 맏물 드려라. 맏물 드려라가 십일조 하라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과 연관된 예물 드려라 그런 뜻이거든요. 따라서 예수님과 연관되지 않은 십일조는 십일조가 아닌 거예요. 그거는 30, 60, 100, 돈 놓고 돈 먹기 하는 거예요. 돈 놓고 돈 먹기 하는 수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완전히 교회가 도박하는 데에요. 창고가 넘친다 할 때 그 창고가 넘치지 않는 상태라면 이미 저주받은 상태에요. 저주받은 상태는 레위인 언약이 온전하지 않다는 거고 온전하지 않을 때는 그 온전하지 않은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모든 나라는 불로써 심판받게 되어 있다는 것이 이미 하나님의 확고한 법칙이고 원리입니다. 이거는 수정되지 않아요. 따라서 그게 수정되느냐, 수정되지 않느냐, 그게 헛말이냐, 진짜 말이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면서 모든 증거는 끝났어요.

 

사람이 어떻게 죽었다가 살아납니까? 살아나는 데는 이유가 있거든요. 그게 왜 살아났느냐 하면, 레위 언약, 너희들이 이루지 못한 십일조, 너희들이 이루지 못한 레위 언약을 내가 다 홀로 다 이루었기 때문에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심판밖에 없어요. “예수님!” “?” “예수님이 레위 언약 다 이루었지요?” “니가 아는구나. 구원받아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 “?” “예수님 좋아요.” “내가 누군데?” “모르겠습니다. 무조건 좋아요.” 이거는 말이 안 돼요. 그거는 말이 안 된다고요. 그거는 여호와 좋아요! 여호와 좋아요! 하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였던 사울하고 마찬가지예요. 여호와 믿어야 구원받는 줄 알고 예수 믿는 사람 다 죽이다가 다메섹에 내려가다가 누굴 만났습니까? 진짜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부터 이제부터는 예수님을 증거 하는 거예요.

 

광주에서 그런 강의를 했더니만 녹음되지 않았지만 어떤 분이 질문을 했어요. “, 목사님은 예수 믿으라 합니까? 삼위일체 하나님도 같이 믿어야 되는데 왜 예수 믿으라 합니까?” 이렇게 나왔어요. 그래서 그 이야기 할 때 했어요. 바로 사울이, 그랬던 사울이었어요. 그랬던 사람이었어요. 내가 하나님 믿지 않고 예수 믿는다는 말은 그전에 내가 하나님 믿고 십일조 했던 그런 체제 자체가 예수님을 욕 보였다는 체제였다는 것을 뒤늦게 인정하는 고백이어야 한다는 이 말입니다. , 예수만이냐. 예수도 해야 하고 삼위일체도 해야 되고, 뭐든지 해야만 한다는 그것이 바로 실제로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상태에 있는 사고방식이다 이 말이죠. 정작 예수님만 믿어 버리면 아버지는 거기 계시고. 믿게 하신 것은 성령이 하신 것이고. 삼위일체가 필요치 않거든요. 삼위일체가 필요치 않다 이 말이죠.

 

성령을 받게 되면 관심사가 뭐냐 하면, 지금 예수님 아니면,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대표자 되시는 주님 아니면 우리는 불심판 받아 마땅하다. 우리는 저주받아 마땅하다. 그 체제 속에 이미 우리가 지금 끌려들어 간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이 일이 뭐냐 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주님이 오게 되면 주님의 완성이 우리한테 덮친 거예요. 마치 루게릭병 선전한다고 이 더운 날 얼음바께스(버킷챌린저) 하잖아요. 제가 속으로 어디 겨울까지 하나 보자. 여름이니까 시원하니까 하지. 겨울 되면 법으로 막을 거야.” 주님의 이루신 완성 속에 뒤집어씌우면 그 이스라엘 제사장이 누구냐 하면 우리예요. 우리가 제사장이라니깐요. 우리가 십일조를 왜 냅니까? 받아야 내지. 구약대로 하면 우리가 십일조를 받아야 돼요. 지금도 우리는 십일조 받고 삽니다. 누구한테? 주님한테 받고 주님한테 드리고. 이 몸 자체를 드리고.

 

그래서 우리는 레위 언약, 레위 십일조 법칙 안에서 빙빙 돌고 있는 거예요. 전부 다 그 저촉을 받고 있습니다. 드리는 자와 받는 자가 전부 다 주님뿐이고. 우리는 주님의 지체일 뿐이고. 우리는 내가 하는 살아가는 모든 것이 지금 십일조 원리에서 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몸을 가지고 주님의 제사장 됨을 드러내는데 지금 활용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삶을 통해서 증거 하면 되는 거예요. 어차피 모든 것이 주의 것이고 내 것이 아닌 이상은 먹든지 마시든지 코를 후비든지 방구를 뀌든지. 그 모든 일들이 주님의 제사장 됨을 증거 하는 거예요. 그렇다고 방구를 뀌고 이러면 안 되고. 그냥 사시면 되는 겁니다. 그냥 사시면 되는데 그냥 제대로 살려고 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막 살기가 뛰쳐나오고, 막 살아서는 안 된다가 되어 버려요. 막 살든 안 막살든 손을 놔라 이 말이죠. 절벽에서 손을 떼야 돼요. 그러면 경상도 말로 늘쪄죽지요. 서울사람 이해 못하는. 늘쪄죽지요. 떨어져죽지요. 늘쪄 죽을 때, 죽어도 그걸 이미 죽음을 대표하신 분이 계시기에 절벽에서 손을 놓을 수가 있는 겁니다.

 

제발, 자기 의로움의 턱걸이에서, 잘남의 턱걸이에서, 선한 존재라는 턱걸이에서 이제부터 손을 놓으세요. 그리고 창고가 비어 있더라도 다른 창고 있으니까. 내 창고 비어도 다른 금고 있으니까 우리의 생명은 여기다 두지 마시고 땅에 쌓지 마시고 우리의 생명은 이미 하늘에 쌓아 둔 사람으로서 지금 주님께서 늘 대표성을 드러냅니다. 누가 구원받은 사람입니까? 주님의 대표성을 믿는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손을 놓고 살게 하옵소서. 운전대 잡더라도 손을 놓은 채로 주께서 잡았다고 생각하고 운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인생의 운전도 그렇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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