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사항

십일조140214

아빠와 함께 2023. 7. 1. 22:05

안양20140214a-히7장2절(십일조) - 이 근호 목사

 

십일조이야기입니다. 십분의 일만 내면 되죠, 라는 이야기죠. 십분의 이도 아니고 삼도 아니고 “십분의 일만 내면 더 이상 하나님 돈 요구 안할 거죠.” 그게 십일조거든요. 그러니까 십분의 일만 내고 더 이상 그 다음부터 십분의 이, 십분의 삼 강조 안 할 테니까 차라리 하나님께 세금 십분의 일이다. 그렇게 알고 있는 게 십일조잖아요. 하나님과 우리 관계를 돈 관계로 보는 거예요. 십분의 일이라는 것은.

 

 

돈을 주게 되면 십분의 구는 누구 것이 되죠? 우리 것이 되죠. 그럼 십분의 구가지고 우리가 뭐합니까? 나의 것을 따로 챙길 수 있다는 그러한 다짐이 되는 겁니다. 십분의 일은 뜯겼지만, 십분의 구는 더 이상 안 뜯길 것이라는 이것은 하나님이 와도 내거라는 확정된 십분의 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 뜯겼지만, 아홉이 남았으니까 남은 장사라고 여기는 겁니다.

 

 

거기다가 십분의 일을 줬다고 해서 거기다가 축복까지 준다고 하니까 말라기에 이게 얼마나 확실한 말이냐 하면, 아주 시험 테스트까지 해보라고 장담했으니까 누구 쪽에서? 하나님 쪽에서. 해보라니까 줬던 십분의 일보다 준 십분의 일이 근거가 되어서 추가적으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면 100%에서 잠시만 90% 줄었다가 110% 늘어날 수 있는 장사라면 그거 괜찮은 장사지요.

 

 

그런데 그걸 주저하면 믿음 없는 거고 주저 안하고 해보면 믿음 있는 거고, 그러니까 내가 믿음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십분의 일을 내면 믿음 있는 거고, 믿음 있으면 그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했으니까 천국 가는 거고, 그 믿음 없으면 지옥 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문제가 모든 것이 뭐냐 하면, 인식이 법적이죠. 율법적이죠. 이 십일조 법이 성립되려면 돈 내는 쪽이 있어야 되겠지요. 돈 받는 쪽이 있어야 되고. 돈 받는 쪽은 누구냐 하면, 바로 옛날 같으면 레위인들이 돈을 받았어요. 레위인들이 돈을 받았고 레위인들이 자기가 착복하는 것이 아니고 레위인들도 십일조를 제사장한테 바쳤고. 그럼 제사장도 다 착복하느냐, 다 착복하지요. 그걸로 마감 끝났어요.

 

 

십일조가 법인데 이 법이 내는 자있고 받는 자있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하고 직접 관계 안 해도 되지요. 구원받는데 있어서 십일조 요구하는 사람에게 돈 십분의 일주는 걸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사되었다고 그렇게 다짐을 할 수 있는 확정된 즐거움이 있잖아요. 십일조를 내게 되면. 목사가 와서 십일조를 가지고 갔다. 목사인지 교회인지 십일조를 가지고 갔다면 그것은 목사나 교회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왔기 때문에 내가 십분의 일만 내면, 하나님께서 나의 것을 더 이상 요구하지 않을 것이고 그리고 십분의 일 줬다고 해서 연말정산 때 오히려 십분의 일보다 더 많은 걸 도로 주겠다니까 잠시 가져가지만 하나님께서 불려서 더 많이 주시겠다니까 절대로 내거 손해 보는 일이 없다 이 말이에요.

 

 

그리고 이러한 십분의 일이 달아나는 끊어지는 잠시 아픔도 더 많은걸 주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기대하는 것. 기대하면 더 추가적으로 주어지는데 요런데서 내가 인정하게 되면 그걸 믿음이라고 하고 결국 믿느냐, 안 믿느냐하는 것은 추상적인 문제가 아니고 십분의 일내느냐 그러면 믿음이고, 안내면 믿음 아니고 그렇게 되는 거죠.

 

 

따라서 믿음이라는 것도 결국은 뭐로 전환된다? 믿음이라는 것도 법으로 전환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법은 내가 십분의 일내는 순간 법을 지킨 게 되니까 십분의 일, 십일조를 완수하게 되면 나는 믿는 게 확실하게 되지요. 그래서 이모저모로 교회에서 믿음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해도 그것은 하나의 양심적이고 도덕적이고 추상적인 문제이지만, 구체적으로 교회라는 게 어떤 부동산을 안고 서있고 나는 참석해서 교회제도에서 십일조 있는 제도에다가 내면되니까 서로가 아주 탄탄하게 믿음이 흔들릴 필요가 없는 그런 입장에 있으니까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 신앙 없이도 신앙생활 하는 것이 되는 비법이 바로 십일조가 되는 겁니다. 신앙이 없어도 신앙생활 되게 하는 것. 돈만 내면 되니까. 돈이 신앙생활 대신 해주니까 얼마나 편리해요. 참 편리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뭐냐 하면, 법이 있는 곳에 저주가 있다 했지요. 법을 준 것은 저주를 유발시키기 위해 있다. 그러면 그 법에 십일조가 포함될까요? 안 될까요? 포함되지요. 그럼 안식일, 주일성수도 안식일이라 하는데 안식일이 있는 것은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저주를 유발시키기 위해 하는 거죠.

 

 

자, 그러면 여기서 난해하지만 생각해 봅시다. 십일조 하라고 함으로서 십일조 돈 내는 거니까 나도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그 순간 그들은 저주받은 자의 모델이 되는 겁니다. “법을 지켰습니다.”하는 자체가 저주받아 마땅함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저주 받는 이유가 뭐냐, 갈라디아서에 보니까 그들이 율법을 의지해요. 율법에 잔뜩 기대했다는 자체가 시선이 어디서 옮겨졌는가 하면, 십자가에서 옮겨졌다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그러면 십자가 보지 않고도 어디 간다? 천국 간다. 요거 마귀전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귀가 어디 있는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법을 준 거예요. 법을 줌으로서 지킬 수 있습니다. 하는 순간 바로 그 곳에 마귀가 있는 곳이에요. 마귀가 아니면 그런 아이디어가 안 나오게 돼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율법의 완성은 십자가입니다. 다 이루었다 했으니까. 율법의 완성은 십자가고, 십자가 있는 곳은 사람이 못 들어가는 곳이에요. 사람이 육으로 못 들어가는 곳이고 하늘나라는 육으로 못 들어가는 곳이에요. 성령이 와야 들어갈 수 있는 게 하늘나라입니다.

 

 

지금 제 말이 틀린 게 아니지요. 육으로 못 들어가지요. 요한복음3장에 그렇데 돼 있다 말이지요. 영이 온다는 것은 곧 성령이 온다는 것이고 고린도전저 2장에 보면 성령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성령이 왔다, 안 왔다하는 것은 무엇으로 판정한다고 했습니까? 무엇을 알면 성령을 받은 것이고 무엇을 모르면 성령 못 받은 것이다? 십자가 알면 성령 받은 것이고 십자가 모르면 성령 안 받은 것이 되지요.

 

 

그렇다면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모든 율법은 십자가에서 이루었다, 이 노선이라 말이죠. 철로가 2개가 있다면, 이 노선이 천국 가는 노선이다 말이죠. 그러면 다른 노선은 뭡니까? 천국 가는 노선이 이미 하나로 확정돼 버리면 나머지 노선이 천개든 만개든 다 어디 가는 노선입니까? 지옥 가는 노선이지요.

 

 

그러면 천국 가는 사람은 지옥 가는 노선이 무엇이다, 라는 것을 알지요. 성령이 왔기 때문에. 성령 없이 천국에 가겠다는 인간들이 아는 아이디어가 바로 무엇이 없다? 십자가 통하지 않고 가겠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십자가는 율법의 완성이다 말이죠. 십자가가 율법의 완성이 되면, 십자가 지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그럼 율법은 누가 졌어요? 예수님이 졌지요. 다 지시고 완성을 했잖아요. 그러면 그것이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 의의가 우리에게 줬다는 말은 우리가 법에 대해서 지킬 필요도 없이 뭐만 오면 된다? 십자가의 능력만 임하면 그게 구원의 능력이에요. 십자가의 능력이 오면 우리는 구원되는 겁니다.

 

 

그 점에서 아직도 구약은 미흡해요. 십자가 지기 전까지는 구약은 아직도 미흡합니다. 만약에 어린양을 잡았다. 어린양 피 바르면 구원됩니까? 고 애굽에서는 구원되는데, 여전히 어린양 피 바른다는 그것도 전부 다 율법의 계속 추가적인 율법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할례를 행하는 자는 양을 잡아야 되고 그 다음 피를 발라야 되고 나중에 제사제도까지 되면 그게 반복돼요. 상번제로 반복해야 되고. 아직도 추가적인 법이 계속 기다리고 있어요.

 

 

한 코스 끝나고 어린양이 다 이루었다가 아니고 제사지내면 다 이루었다가 아니고 제사지낸 거 가지고 법이 또 추가돼요. 제사도 드려야 되고 십계명도 지켜야 되고 끝난 게 아니에요. 성전 지어야 되고, 율법시대라 하는 것은 계속 법이 추가되는 겁니다. 추가되면 추가 될수록 우리의 고집도 따라잡으려고 애를 쓰겠지요.

 

 

중학교 같은 경우에 여름방학 하는데 생물선생님 오셔가지고 학생여러분, 요번 여름방학 숙제는 딱 하나입니다. 나비 한 마리를 잡아오세요. 애들은 “야, 여름방학 때 나비 한 마리 잡는 거 그 것뿐이네. 그 것 뿐이네.” 이리 하거든요. 그 다음에 영어선생님이 오셔가지고 이번 방학숙제 딱 하나 밖에 없어요. 영어대화 600개 외우세요. 딱 그겁니다. 보세요. 영어선생님은 분명히 하나지요. 그런데 학생들은 몇 개입니까? 벌써 두 개 됐잖아요. 그 다음에 교련선생님, 체육선생님 와가지고 온갖 다 하게 되면 애들은 숙제가 늘어나잖아요. 구약은 계속해서 애굽에서 나왔는데 양을 잡았다. 그러면 되는데 계속 추가되어서 나중에는 뭐하느냐 하면, 민수기18장에 보면 십일조 해야 돼요.

 

 

그런데 민수기의 십일조이전에 레위인을 섬겨야 돼요. 그러니 숙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그런데 나중에 사도바울이 왜 이리 숙제가 많은가 보니까 이 숙제가 나보고 하라고 하는 숙제가 아니고 숙제하라 해놓고는 창세전에 이미 우리를 구원한 그 분이 해야 될 숙제를 가지고 우리는 창세 안에 들어있다는 이유 때문에 마치 나한테 숙제를 하라 한 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착각을 했지요. 나중에 성령이 와서 보니까 법이 온 이유는 우리를 죄인하게 함이고, 그 법을 주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성령께서 모든 상황을 우리에게 다 알려줍니다.

 

 

에베소서1장17절을 봅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되어 있지요. 계시의 정신을 주게 되면 우리 또 숙제 있는 거예요? 계시의 정신을 줘가지고 우리를 알게 하면 그럼 알아야 될 숙제를 우리가 또 해야 됩니까? 그 숙제 못하면 지옥 가는 겁니까? 여기 계시의 정신을 준다는 것은 한꺼번에 다 알게 하시는 거죠. 그게 뭐예요? 십자가는 성령이 아니면 모른다고 했지요. 십자가 알면 성령 받은 사람이고 십자가 모르면 성령 안 받은 사람이잖아요.

 

 

그럼 계시의 정신은 뭐냐 하면, 모든 일은 주께서 다 이루었고, 우리는 그 덕분에 무슨 짓을 해도 어디 간다? 영생 얻는다. 그걸 아는 거예요. 그럼 살아가면서 계속 아는 것은 뭐냐 하면, 이 사실을 반복해서 아는 겁니다. 내가 어떤 짓을 벌리고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그게 나는 분명히 정당한 행동인데 그게 왜 죄가 되는지를, 열심히 복음대로 설교했는데 그 설교가 왜 죄가 되는지를 설교하는 가운데 살아가면서 그걸 알게 되지요.

 

 

오죽했으면 예수님이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건 또 나이 몇 살 먹어야 되는 겁니까? 나이 한 90되어서 치매 걸리면 왼손이고 오른손이고 다 잊어버릴 테니까. 치매 걸려서 다 잊어버렸으니까. 개그콘서트에 코미디 프로에 보면 이런 코너가 있어요. 16년째 여자 친구가 안 생긴다는 두 남자가 나와서 그런 이야기하는 게 있어요. 이래도 안 생기고 저래도 안 생기고. 인간은 무슨 짓을 해도 안 생겨요. 무슨 짓을 해도 성령이 안 생긴다니까요. 천국 갈수 있는 영이 우리 속에서 안 생겨요.

 

 

십일조라는 것은 율법에 포함돼 있고 그 율법 노선은 십자가를 겨냥해서 돼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강의한 것을 정리해 봅시다. 십일조는 무엇을 겨냥한다? 십자가를 겨냥한다. 십일조해석은 십자가로 해석하면 돼요. 그러면 십일조를 주면서 우리 인간에게는 저주에 저주를 유발케 하지요. 왜 저주 받는다 했습니까? 십일조는 예수님이 지키는데 우리는 마귀의 꾐에 내가 십분의 일을 돈 냈으니까 지켰고 지켰으니까 그게 믿음입니다. 라고 우기는 겁니다.

 

 

그 우기는 식으로 뭐를 대체하는가 하면, 십자가의 구원의 능력을 그걸 차버리고 그 자리에다가 십자가가 있을 자리에다가 십일조를 했습니다, 를 집어넣고 나, 믿음 있으니까 이제는 죽어도 천국 가겠죠, 라고 하는 반십자가를, 십자가를 헛되이 만드는 그러한 작용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 현상이 바로 저주의 현상인데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지옥의 현상입니다.

 

 

성도로 하여금 이제는 지옥 구경 못해요. 하나님께서 아쉬웠는지 살아생전에 지옥 실컷 보고 오라고 우리 주변에 이런 지옥의 교회들을 날로 부흥케 하시는 거예요. 지옥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지옥이 보고 싶습니까? 큰 교회 한 번 예배참석해보세요. 그곳이 지옥입니다. 다 자랑 짓하는 자랑질의 경연대회. 자랑질의 K-팝, 자랑질의 서바이벌 대회 벌이는 그 곳. 그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인간의 욕망의 구체화지요.

 

 

내가 갖고 있던 욕망이 실제로 교회라는 이름을 통해서 성스럽고 싶습니까? 성스러운 그 교회에 성스러움이 있고요, 감미로운 성가가 듣고 싶습니까? 수 백 명의 성가를 들으시면 그게 내가 갖고 있던 욕망의 현실화로 나타나지요. 웅장한 성가대, 파이프 오르간 소리, 감동, 그리고 은혜가 넘치는 것, 그 모든 것은 마귀가 깔아놓은 십자가를 가리기 위한 배치물들입니다.

 

 

십자가는 절대로 감동이 아니에요. 십자가는 그렇게 아름답지를 않습니다. 십자가는 외면하고 싶어요. 두 번 다시 보기 싫어요. ‘흥, 내가 죽으라고 했나?’ 이런 마음이 들 정도로. ‘내가 죽으라고 했어? 내가 죽으라고 했으면 진짜 큰 일 나겠네. 본인이 알아서 죽어놓고 저걸 가지고 보라 해. 나는 보기 싫어. 나는 내 하는 일의 성과만 보겠어. 당신이 알아서 한 일을 나하고는 관계없어.’ 라고 외면하고 싶지요.

 

 

그래서 우리의 남은 과제는 뭐냐 하면, 이 십일조가 어떻게 십자가와 연관되느냐, 율법 속의 십일조 드리는 십일조가 어떻게 십자가와 연관되느냐, 요 과정을 이제는 그것이 알고 싶다. 이제 추적해야 돼요. 법이라는 것이 우리를 지킨다고 하는데 사실은 우리 자신을 숨기지 못하는 내 가치가 빛나기를 원하는 숨어있는 욕구를 이 법이 성취시켜 줍니다.

 

 

“너는 착해, 지킬 수 있어. 할 수 있어. 니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너는 이 믿음을 지킬 수가 있어.” 이리 하는 겁니다. 전에 있던 해외에 계시는 정 석훈 목사님이 이야기하는 가운데 어릴 때 이야기를 해줬어요. 어릴 때 부흥회를 하는데 부흥사가 하는 말이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긴다는 그 소리를 듣고 박사교회 근처 모학산이 있어요. 자기는 시험을 해봤답니다. 산이 옮겨지는지를. 그 자리에 모학산 아직 있어요. 안 옮겨져요. 모학산 옮겨지는 일이 안 생겨요. 아마 여자분 같은 경우는 산 옮겨지라고 기도하지 않을 거예요. 젊어지라고 기도할 가능성이 있어요. 젊어지라고. 주여, 믿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 있으면 다시 청춘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눈에 속눈썹 안 끼고 주름살은 보석효과 나겠지요. 이렇게 기도하는데. 백날해도 안 생겨요. 그런 일이 안 생겨요.

 

 

성경은 간단합니다. 죽는 게 기적이라는 거예요. 요나의 기적이거든요. 모든 기적은 요나의 기적으로서 최종정리가 돼요. ‘아! 내가 죄 값으로 죽는다는 사실은 내가 왜 평소에 이것이 놀라운 기적인 것을 말씀대로 되어가는 현상인 것을 내가 왜 몰랐던가! 바보같이.’ 이걸 깨닫는 게 기적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갈비탕 먹으면 체하겠습니까? 안 체하겠습니까? 지금 하늘나라에 계시는 주님이. 안 체하지요. 나는 체하거든요. 왜냐, 육에 속했거든요. 이게 아담의 형상이거든요. 그러니 체하는 게 당연하다 말이죠. 오래된 썩은 것을 먹으니 체하지요. 그러니 이 얼마나 육에 속한 것이 없어져야 명품 몸으로 되는데. 바꿔치는 이것이 얼마나 기적입니까. 그러니 내 이 몸이 썩어 문드러진다는 사실이 하나님께서 지금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그 자체가 기적이 되는 겁니다.

 

 

교회 없어도 초대교회 없어도 믿음으로 구원받았잖아요. 그렇다면 우리교회 없어지는 거 기적이고 감사할 일이에요. 하나, 둘 빠져나가고 다 빠져나가도 감사할 일이죠. 예수님만 있다면 괜찮아요. 그런데 교회가 막상 목회에 교인들이 빠져나가 보세요. 목사는 아주 된 통으로 스트레스 받아요. 안절부절 어쩔 줄 모릅니다. 심방 갔다가 철야했다가 기도원에 갔다가 갑자기 안하는 짓들을 하고 가관이라니까요. 사람이 기도를 열심히 하고 새벽기도를 나온다는 것은 노림수가 있어요. 아주 수상해요. 수상한 여인이라. 아주 이상해요. 뭐가 그렇게 집착이 있어가지고 그렇게 해야 됩니까? 죽음인데.

 

 

자, 이제 본격적으로 십일조가 어떻게 십자가가 되는가, 십일조 계명이 민수기18장에 나옵니다. 그리고 십자가 있지요. 우리 같으면 십일조에서 십자가 예수님 당시로 시간을 따라서 갈 수 있어요. 그런데 해석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십일조를 뒤로 돌아가서 위로 올라가게 만들어요. 해석이. 뒤로 돌아가서. 뒤로 돌아 갓!

 

 

민수기에 십일조 하라. 십일조하려면 아까 십일조 내는 자있고, 받는 자있지요. 내는 자, 받는 자 합해서 이스라엘이라 합니다. 십일조 내는 자는 어떤 자냐 하면, 제사에 종사하지 않는 자, 제사 작업에 종사 안 함. 받는 자는 제사 작업에 종사함, 이게 받는 거예요. 물론 지금은 십일조 없지요. 왜냐 하면, 제사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지금은 제사 받을 사람이 없다니까요. 누가 받는데요?

 

 

어디에 내는데요? 국세청에 낼까요? 낼 사람이 없는데요. 목사가 제사장이잖아요. 목사가 제사장하려거든 모든 성도가 다 제사장 하던지 목사만 제사장하는 건 없습니다. 그러니 십일조를 자기가 자기한테 내면 돼요. 왜? 자기가 제사장이기 때문에. 교회어디에 낼까요? 교회 화장실에 낼까요? 수돗가에 낼까요? 어디에 낼까요? 묻고 싶어요. 교회 앞자리에 낼까요? 강대상에 낼까요? 헌금 통에 낼 테니까 헌금 통 손도 대지 말라고 하세요. 헌금 통에 낼 테니 헌금 통 가만히 놔두라고 해. 손대면 안 돼. 십년 째 헌금 통 아무도 자물쇠 따면 안 돼. 도둑놈은 따겠지만.

 

 

제발 저를 좀 속여 달라는 거죠. 나는 신앙은 없고 성령을 안 받았으니까 법 밖에 모르니까 법이라도 내려주소서. 내가 믿음 있는 척이라도 할 수 있도록. 내가 믿음 있다는 걸 보장하는 법이라도 제공해 달라고 요청하기 때문에 목사가 맞장구 쳐서 한 거예요. 목사는 고수에요. 아니라~~오. 부르면 옆에서 얼쑤! 하잖아요. 아니라~오, 광대역. 할 때 얼쑤! 하잖아요. 그러니 판소리할 때 옆에서 얼쑤! 하는 것은 고수에요. 맞장구 쳐주는 거예요.

 

 

교회는 목사가 만든 게 아니고 교인들이 만들었어요. 자, 뒤로 가서 위로 올라간다 했어요. 뒤에 누가 있느냐 하면, 아브라함이 나와요. 창세기14장을 봐도 되고요, 히브리서7장 봐도 나와요. 여기에 누가 대기하고 있느냐 하면, 십일조를 뒤로 가니까 십일조 받는 자가 있었고, 주는 자가 있었습니다. 창세기14장에서는 주는 자는 아브라함이었고 받는 자는 멜기세덱이 받았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십일조 한 그 십일조는 어디서 왔느냐 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농사지었습니까? 아니잖아요. 아브라함이 노력한 게 아니지요. 십일조의 원조가 뭐냐 하면, 자기가 일하지도 않고 노동하지도 않았는데 얻은 거예요. 말라기의 십일조도 마찬가지에요. 말라기를 십일조하려면 의식이 뭐냐 하면, “내 것은 일체 없습니다.” 라는 것이 될 때만 말라기의 십일조가 성립이 되는 겁니다.

 

 

그런 인간은 결국은 이스라엘 내에 있었다? 없었다? 없었어요. 십일조라 하는 것은 어떤 인간도 십일조 지킬 인간은 이 땅에 없다 이 말입니다. 이미 이스라엘 선배들이 해봤어요. 유다 선배 해봤어요. 없어요. 십분의 일은 내고 나머지는 내거라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원합니다.” 할 때 집사님이 십일조 준다 말이지요. 방금 십일조를 챙겼어요. 또 “십일조를 원합니다.” 그럼 뭐라고 합니까? “아까 가지고 갔잖아요.” 이리 합니다. 그게 십일조가 아니고, 십일조 원합니다, 하면 예, 방금 받아놓고 또 돌아서 십일조 원합니다, 하면 다 가져가세요. 그런데 다 가지고 가는 것은 십일조 아니에요. 다 주는 것은 에이~씨, 니 다해먹어라, 이런 오기밖에 안되니까 그러면 안돼요.

 

 

아브라함이 냈던 것은 그 전에 전쟁이 있었어요. 창세기14장에 보면, 전쟁이 있는데 318명가지고 많은 군사를 이겨서 자기 조카를 구하고 전쟁에서 난 전리품이 있었습니다. 이기고 돌아올 때에 뭔가 어느 사나이가 등장합니다. 누구냐 물으니까 예루살렘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아브라함이 이번 승리에 대해서 본인도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이번 승리에 대해서.

 

 

그 전에 아브라함은 창세기12장에서 아브라함이 그냥 보통 인간이 아니고 창세기11장에서부터 본토 아비 집을 떠나야 됐지요. 떠날 때 갈 곳이 없어요. 그러면 결국은 자기 지방에서 떠났다 정도가 아니고 갈 곳이 없다, 라는 말은 육지에서 몇 미터 뛰면 하늘로 올라갈 수 있습니까? 팔짝 뛰면 됩니까? 아무리 땅에서 뛰어봤자 도로 중력에 의해서 떨어지잖아요. 그러니 하늘나라를 간다는 게 성립이 안돼요. 하늘 높이 올라가도 또 떨어지니까. 심지어 중력에 의해서 튀어나가도 그 쪽도 땅이에요. 결국은 갈 곳이 없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자기 본토 아비 집에 있어도 갈 곳이 없었고, 거기서 나와도 갈 곳이 없었고,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갈 곳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은 자기 본토 아비 집을 떠나서 정처 없이 나그네 식으로 가는 그 과정, 과정 속에서 삽입하듯이 뭔가 순간, 순간 개입되는 사건들이 있어요. 그 사건들이 어디서 온 사건인가 하면, 결국은 아브라함이 죽어서 가야될 그 본향에서 투입된 사건들입니다. 창세기14장에서 5나라의 연합군이죠. 이 연합군과 싸워서 이겼습니다. 그러면 이 사건은 어디서 온 사건이냐 하면, 지극히 높은 나라에서 온 사건이에요.

 

 

자, 그러면 원인을 계속 추적해 따져봅시다. 롯이 만약에 그 다섯 왕에게 안 잡혔으면 아브라함이 전쟁을 벌릴까요? 안 벌릴 까요? 벌릴 필요가 뭐가 있어요. 그건 도박이지요. 해봐야 패배하는 전쟁을 왜 합니까? 안 하지요. 그러면 애초부터 롯이 소돔과 고모라 땅에 살지 않아야 되지요. 김연아가 만약에 어릴 때 피아노를 잘 쳤으면 스케이트 하겠습니까? 안 하지요. 피아니스트 되려고 애썼겠지요. 원인을 계속 추적해 보자 말이지요.

 

 

롯은 왜 소돔 땅을 원했느냐, 아브라함이 “얘, 조카야” “예” “너, 소돔 땅 가” 이렇게 했습니까? 아브라함은 롯한테 맡겼지요. 롯한테 맡겼다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 맡긴 거예요. 맡겼더니만 롯이 에덴동산 같아서 소돔 땅을 택했고 소돔 땅이 저주 있기 전에 했고, 그 땅이 좋으니까 탐을 냈고 그래서 포로 잡혔고 그래서 아브라함이 개입했고 승리했고 십일조했다 말이죠. 그러면 롯을 자기가 구원했지만 그 구원한다고 아브라함 본인이 구원받는 건 아닌데 그 롯을 구출하는 과정 속에서 뭐가 담기느냐, 롯 본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요소가 거기에 개입되어서 유발된 전쟁입니다.

 

 

나를 구원해주는 전쟁에 휘말린 거예요. 그 전쟁을 회오리바람으로 해봅시다. 토네이도라는 휙 감아 도는 그 바람 속에 이걸 대전에서는 사건이라 했는데, 사건 속에 휘말릴 때 그 휘말린 사건 속에서 발생된 게 뭐냐 하면, 십일조란 율법이 새롭게 발생된 거죠.

 

 

결국 십일조는 사건 일으킨 유발자와 관련성이 있다? 없다? 있는 거예요. 이제는 “십일조를 어떻게 합니까?”가 아니라 “십일조가 누구십니까?” “십일조를 제정한 분이 누구십니까?” 이리 되는 거죠. “십일조 드린 사람은 누구십니까?” 십일조 드린 자는 정해졌지요. 아브라함이 아니고 아브라함 되게 하는 하늘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개입이고 십일조 드린 자 되게 했고, 그럼 십일조 받는 사람은 누굽니까?

 

 

받는 사람은 그 근처 살렘왕 제사장이죠. 하지만 제사장은 그냥 제사장이 아니고 지극히 높으신 자의 제사장, 그러니까 받는 멜기세덱이나 드리는 아브라함 사이나 멜기세덱 제거하고 아브라함 제거하면 남는 건 뭐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주선, 왕 그것만 남는 겁니다.

 

 

그러면 멜기세덱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왕이요, 왕인데 그게 제사장이죠. 그러면 그 직분은 십일조가 담겨있는 어떤 인물의 특성을 두 가지 직책으로 이야기했지요. 그게 히브리서7장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멜기세덱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같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되어 있지요.

 

 

히브리서7장21,24절에 보면, 네가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 되어 있지요. 영원한 제사장, 영원히 계신 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라 하는 것은 영원해야 돼요? 영원 안해야 돼요? 영원해야 돼요. 완성 태로서.

 

 

십일조는 영원하다는 말은 예수님이 영원히 계시다. 그러면 십일조가 영원하다는 말은 주는 자 있고 받는 자 있지요. 십일조가 영원하다면 십일조 받는 분도 영원해야 되고 십일조 주시는 분도 영원해야 되고. 그러면 영원한 분을 묘사하기 위해서 영원한 분이 십일조 드렸고 영원한 분이 십일조 받았다면 그래서 십일조 영원하다면 거기서 누가 누락됩니까? 예수님 오신 후에는 인간이 십일조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지금 설명하는데 40분밖에 안 걸렸어요. 십일조. 자, 그러면 봅시다. 십일조에서 십자가 가는 길에서 바로 가지 말고, 뒤로 돌아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만나라 했지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아브라함은 자기 갈 바를 몰랐지만, 아브라함이 갈 바를 몰라서 우왕좌왕하는 나그네 생활하는 그 과정에 순간, 순간 그게 개입되는 것이 아브라함이 가야 될 그 나라의 속성이 되고 요소가 되는 겁니다.

 

 

그 중의 한 사건이 뭐냐, 십일조 드리는 사건에 맞닥뜨린 거예요. 전쟁에 승리해서 전리품가운데 십일조를 드리면서 “이것은 제가 얻은 게 아니고 지극히 높으신 분이 주신 겁니다.” 결국 십일조 하는 법을 생산하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켰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주는 자, 멜기세덱으로 하여금 받는 자, 요런 세팅, 세트로 주어서 십분의 일이라는 게 성립된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왜 십분의 이가 아니고 십분의 삼도 아니고 왜 십분의 일이냐 하는 그 문제가 남아있지요. 그런 세밀한 문제는 아브라함이후에 민수기에서 밝혀집니다. 그럼 아브라함과 민수기사이에는 연결되어 가는 거예요. 그게 연결되는 게 히브리서에서는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하면, ‘허리’라고 하는 거예요. 허리.

 

 

허리라는 말은 창세기32장에 보면, 얍복강가 나오지요. 야곱의 허리에서 왕들이 나온다는 대목이 나와요. 야곱의 허리에서. 그러니까 이것은 허리라는 말은 뭐냐 하면, 자식을 계속 생산할 수 있는 신체의 특정부위를 말하는 겁니다. 야곱이 한 대 까였잖아요. 까여서 욱하고 지팡이 집게 되었습니다. 그 부분이 뭐냐 하면, 야곱이 자식을 생산하는 그 부위입니다. 남성의 힘이라 하지요. 그 쪽이 까인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뒤에 나올 후손들은 무엇의 되풀이고 반복이냐 하면,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그 사건이 그 실 뭉치에서 풀리듯이 나오는 겁니다. 어릴 때 어머니께서 가을만 되면 벌써 실 뭉치를 사와가지고 드라마 보면서 떠요. 스웨터, 장갑, 조끼도 뜨고 일본 실뜨기 책이 있어서 보면서 잘된 것은 가게에 팔기도 했어요.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니까 실 뭉치인데, 뭔가 솜씨를 부리니까 어떤 조끼가 되는 거예요. 조끼는 형태일 뿐이지 구성성분은 뭡니까? 실 뭉치에요. 실 뭉치에 불과한 겁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야곱에서 나온 거고 야곱이란 실 타래 속에서 이스라엘 나라가 나온 거예요. 야곱의 허리에서. 그러니까 야곱이라 하는 것은 야곱개인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야곱과 만났던 지극히 높으신 분의 전략, 그걸 어려운 말로 ‘언약’이라 하는데 언약에 의해서 야곱은 새로운 경험이 되고 그 새로운 경험이 바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갈 바를 알지 못했던 그 갈 바라고 하는 갈 바에 해당되는 그 영원한 본향, 그 본향이 수시로 내려오지요. 그걸 요번에 저는 대전강의에서 존재라 하지 않고 ‘사건’이라 했지요. ‘언약사건’입니다.

 

 

언약사건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나는 주님께 대드는 하나님의 웬수입니다.”라는 것을 느끼게 만드는 사건이에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라는 사건,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는 사건, 갈비탕 먹고 아픈 사건, 왜 먹을 때 감사기도 하고 먹으면 되는데, 감사기도 대충했기 때문에 했긴 했는데 대충해가기고 주여, 아파도 좋습니다. 이거 먹고 죽겠습니다. 이런 기도 안하고 맛있게 먹겠습니다. 이래 가지고 일어난 사건, 나로 하여금 죄를 더욱 더 죄가 되게 하는 사건, 그것은 하나님과 만남이 이루어진 거죠. 거기서 만남을 통해서 나온 게 뭐냐, 바로 ‘죽음’입니다.

 

 

언약적 죽음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줘요. 언약적 죽음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생명이고 뭐고 없습니다. 그냥 자살하면 안 되고요, 언약적 죽음. 어떤 목사처럼 그냥 자살하면 안 되고 언약적 죽음이에요. 언약적 죽음은 다른 게 아니에요. ‘나는 살아도 산 것도 아니고 죽어도 그만이다.’ 이런 생각, ‘아이고, 나 같은 인간이 살 필요 있나? 지금 죽어도 반항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생각, ‘이렇게 욕심내고 이렇게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 살면 살수록 주님께 누를 끼칩니다.’라는 느낌, 그게 언약적 죽음이에요.

 

 

야곱은 분명히 죽었어요. 죽었는데 이스라엘은 다시 살아났잖아요. 살아도 야곱은 자기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도 자식 죽이고 항상 자기를 죽인자라는 생각이 들 거라는 말이죠. 그것을 반복하기 위해서 어린양의 죽음을 이스라엘 내에 상번제로 드린 거예요. 멀쩡하게 이스라엘은 살아있어도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늘 이렇게 이스라엘은 죽어야 돼! 죽어야 돼! 하는 것이 늘 아침, 저녁마다 되풀이 되는 거예요. 제사로. 그 연기가 흠향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민수기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원조가 야곱이고 야곱이 만났던 언약사건에 의해서 거기에 하나님께서 실타래 있으면 거기서 실이 줄줄 나와요. 나오면서 조끼가 이스라엘 나라가 돼요. 이스라엘 나라가 조끼가 되어야 돼요. 그 나라 속에서 야곱이 받았던 그 사건을 그 곳에서 반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실 원래 색깔이 빨강색인데, 조끼가 파랑색이면 있을 수가 없는 거죠.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실타래가 빨강색이라면 조끼도 빨강색, 예수님 피가 빨강색이면 우리는 빨갱이, 십자가 믿는 우리는 빨갱이, 성령 안에서 빨갱이, 같은 색깔입니다.

 

 

민수기에서 왜 십분의 일이냐 하는 거예요. 민수기를 봐야죠. 18장15절,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생물의 처음 나는 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네 것이로되 사람의 처음 난 것은 반드시 대속할 것이요” 26절, “너는 레위인에게 고하여 그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취하여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취할 때에” 십일조 드리죠. 여기 십일조가 제일 끄트머리 입니까? 제일 좋은 거예요? 김밥 썬 나머지 꽁지입니까? 아니면 김밥 제일 좋은 중간분이에요? 제일 좋은 부분이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왜 십분의 이가 아니고 십분의 삼이 아니고 십분의 일이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사가 십분의 일에 있다는 거예요. 십분의 일에.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 승리하게 해서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릴 때에 십분의 일을 드렸거든요. 드리는 것은 그것은 사건의 응어리체인데 사건의 응어리가 나중게 인간이 되면 예수님이 되는 거예요.맏물이 돼요. 맏물.

 

 

예수님은 누구냐, 하나님의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입니다. 처음 낳은 거예요. 부활의 첫 열매가 누굽니까? 에녹이에요? 뭐예요? 엘리야 입니까? 에녹도 죽음을 보지 않았는데. 엘리야도 불 수레타고 올라갔는데. 부활의 첫 열매아니잖아요. 부활의 첫 열매는 누굽니까? 예수님이라고요.

 

 

부활의 의미는 십자가 지신 분만이 부활의 의미를 줄 수 있지, 에녹이나 엘리야는 부활의 의미를 줄 수가 없어요. 왜? 율법을 다 이룬 적이 없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다 이룬 적이 없기 때문에. 처음 난 것을 주목한다는 것은 나머지는 안 보겠다는 거예요. 처음만 있으면 전부가 있는 거예요. 처음 있고 나머지 있는 게 아니고 처음이 전부에요.

 

 

그 분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의 기뻐하는 자라, 그분만이 아들이에요. 그것은 뭐냐,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난 뒤에 하나님이 언약을 줄 때 언약 안에서 뭔가 인물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꿈틀거리고 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오해해가지고 ‘야, 우리가 살겠다.’라는 생각을 하지요. 그 다음이야기는 10분 쉬고 합시다.

 

 

안양20140214b-히7장2절(십일조) - 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에 해야 될 게 뭐냐 하면, 십일조와 십자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제가 첫째시간 마지막에 뭐라 했는가 하면, 맏물을 이야기했지요. 맏물, 맏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한테는 관심 없고 맏물에 관심 있다고 했어요. 요게 사건이 응어리지게 되면 그게 하나의 형체가 나오는데 그게 맏아들 같은 형체가 나온다. 그렇게 하여튼 머리에 넣어주시면 되는 겁니다.

 

 

그럼 출애굽 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함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구원하기 위함입니까? 이렇게 물으면 정답은 하나님의 아들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왜냐 하면, 출애굽기4장에 보면, 이스라엘을 내 아들이라 했으니까. 그러면 ‘아들을 구원하는 것이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과 동일하지 않겠느냐’ ‘동일하잖아, 똑같잖아.’ 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에요.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라 했으니까, 문자 그대로 맞고 이스라엘을 만들어서 구원하니까 어린양을 구원하니까 맞고 그러면 되는데 왜, 맏물이 튀어나오느냐 말이죠. 그 이스라엘 중에서 둘째, 셋째는 아무 영향도 없고, 애굽도 둘째 셋째는 관심 없어요. 하나님의 어린양 지시를 따르지 않으니까 둘째 누나가 죽었어요? 막내가 죽었습니까? 애굽에서. 맏이가 죽었고 동시에 이스라엘도 누가 살았다는 말입니까? 죽어야 될 맏이가 저쪽하고 비교해 볼 때 연관해서 보면, 여기도 맏이가 살아났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출애굽하면서 누가 죽었어요? 어린양이 죽지요. 어린양이 죽었는데 살기는 누가 살았습니까? 맏이가 살아났지요. 그럼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어린양이 죽었는데 그 죽음이 대신 죽음이 되어서 맏이가 살아났다면, 어린양은 결국은 하나님이 맏이가 되는 공식이 되는 겁니다. 만약에 이 유월절을 되풀이 한다면 계속 초점이 어디가 있어요? 먼저 태어난 것. 그러니까 먼저 태어난 걸 자꾸 강조하는 거죠.

 

 

음식 할 때 보면, 밑에 가라앉는 것이 중요한 것 같지만, 어떤 때는 물에 뜨는 것을 국자로 건져서 그것만 따로 건져야 가치 있는 그런 것도 있지요. 약이라든지. 탕 끓일 때. 뜨는 그게 중요한 게 있지요. 뭔가 자꾸 일을 일으키면 뜨는 게 있는데, 그 뜨는 게 맏이가 되는 겁니다. 출애굽기13장11,12절을 볼게요. 유월절은 절기인데 절기라 하는 것은 되풀이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네 조상에게 맹세하신대로 너를 가나안 사람의 땅에 인도하시고 그 땅을 네게 주시거든 너는 무릇 초태생과 네게 있는 생축의 초태생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나귀의 첫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꾸 뭔가 물에 뜨는 거,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발생된, 구별된 어떤 것. 그것만 국자로 뜨란 말이죠. 하여튼 둘째도 필요 없고 셋째도 필요 없다는 거예요.

 

 

맏이만 계속 중요하게 되는 거예요. 그 맏이를 가지고 이스라엘 나라가 있는 이상,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이상, 출애굽이 반복되는 이상, 맏이가 계속 중요해서 마지막 신약 때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 하시고 그 분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의 맏아들 되시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8장에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오늘날도 성도는 여전히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맏이 덕분에 사는 사람. 맏이가 살았기에 덩달아 둘째 셋째도 다 같이 사는 것.

 

 

시형제 결혼법이라는 게 있어요. 시형제 결혼법이 뭐냐 하면, 맏이가 자식 없이 죽을 때는 그 형수가 그 형의 동생들하고 결혼해라, 결혼하는 목적이 뭐냐 하면, 그 맏이의 자식이 생산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난이라는 사람은 지 자식 안된다고 삐져가지고 형에게 아들을 얻게 아니하려고 해서 벌 받아 죽었잖아요. 하여튼 하나님은 벌 내리는 이유도 가지가지라, 내 정자주고 내 자식 되겠다고 하는데 그게 안 된다고 해서 삐져버리니까 그걸 또 쳐버리니까 어쩌란 말이에요? 십일조만 하라는 게 아니고 이제는 완전히 정자은행에서 정자 주라하는 것도 있다니까요.

 

 

첫째 없으면 둘째, 둘째 없으면 셋째 이렇게 가서 기어이 형수는 죽은 자의 자식을 비록 아버지는 죽었더라도 자식은 죽은 자의 자식이 멀쩡히 살아있도록 해라, 이리 되거든요. 사람은 아버지는 죽었더라도 아버지 대행자로 말미암아 생긴 자식은 대행자의 자식이 아니고 그 죽은 자의 자식이 되는 겁니다.

 

 

그 모든 율법의 엉켜 있는 원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밖에 없어요. 성경은 내게 대해서 증거 하는 것이다. 어떻게, 무엇을 지키면 착합니까? 이거하고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무슨 의를 쌓으면 그 의를 근거로 구원받습니까? 아무 그런 내용도 없어요. 오직 예수님이야기에요. 예수님에 의한 일으킨 사건의 파급 그리고 예수님 십자가 원리의 반복입니다.

 

 

십자가의 반복이라 하는 것은 십자가는 곧 무엇의 반복이다? 모든 율법의 완성이 십자가고, 그러니 십자가가 뜰 때마다 모든 율법도 같이 완성체로 반복해서 뜬다 말이죠. 그 뜸의 효과가 우리를 받아서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맏아들 형상 때문에 맏아들 본받기 위해서 태어난 이 땅에서 성도로 사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가면 모든 면류관을 누구한테 바쳐야 돼요? 주님한테 바쳐야 돼요. 제가 쓰는 건 합당치 않습니다. 우리는 다 주의 것이고 주는 하나님의 것이다. 고린도전서3장에 보면 나오듯이 그 이야기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유월절의 반복은 맏이, 맏아들에 대한 강조의 반복, 그 강조점의 반복이 되는 겁니다. 이제 민수기 18장12절 봅시다. 설명할 게 있어요.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첫 소산 곧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을 네게 주었은즉” 첫 소산 나오지요. 땅이 있어야 농산물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그 땅이 무슨 땅이라 했습니까? 아무 땅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신 땅이지요.

 

 

그러면 아까 출애굽기13장에서 보았듯이 네가 유월절을 어디서 지키라고 합니까? 약속의 땅에 들어가거든. 못 들어가면, 못 지키는 거죠. 그럼 들어가면, 들어가면 지켜야 돼요. 그러면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땅은 그냥 내가 이스라엘이 살기위한 땅입니까? 아니면 거기서 무슨 일을 해야 될 땅입니까? 어떤 일을 해도 기념해야 될 땅이지요. 그러면 땅이라 하는 것은 땅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거기서 기념되는 일이 중요한 겁니다.

 

 

아까 아브라함이야기 다시 할게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 땅을 떠났습니다. 꼭 출애굽 같아요. 떠났습니다. 스가랴에도 그런 내용이 나와요. 마치 애굽에서 나온 그 때라 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아브라함이 자기 아비 본토의 집을 떠났습니다. 떠나고 난 뒤에 갈 바를 알지 못했지요. 그럼 아브라함이 살 땅은 어디냐, 이 땅에 없어요. 살 땅이 없어요. 살 땅이 없으면 괜히 나왔네요? 아니에요. 살 땅이 없는데 살 땅이 없다는 걸 말하면서 그래도 갈 곳이 있잖아. 라고 헤매는 가운데서 소개되고 알려지는 그 땅, 그것은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본향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냥 본향이었어요. 그런데 그것이 출애굽을 통해서 출애굽12장을 통해서 보다 구체화돼요. 그 땅은 그냥 땅이 아니고 무슨 일이 있어야 돼요. 무슨 일이 되풀이되고 반복되는 땅다. 출애굽기12장,13장 입장에서는 유월절을 되풀이하는 땅이 되는 겁니다. 천국은.

 

 

안산홍 집단도 그러할 거예요. 유월절 지킨다고 하니까. 뭐든지 제사나 절기를 되풀이하게 되면, 지금도 안동권씨 제사지내고 사당 같은 게 있잖아요. 제사지내면 제일 먼저 중요한 게 뭔 줄 알아요? 돈 문제에요. 그 손님들 비빔밥 해주려면 제사음식 다 하려면 돈이 있어야 돼요. 천주교가 미사를 계속하려면 뭐가 있어야 합니까? 신부들 먹여 살릴 돈이 들어가고 인건비 들어가요. 봉사해주는 수녀들 인건비 들어가요.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데 돈 내라 이 말이거든요. 예배시간에 그냥 빈손으로 오지 말고 돈 가지고 오라, 니가 하나님의 앞에 나올 때는 빈손으로 오지 말라는 구절이 나오거든요. 복음이 다른 게 복음이겠습니까? 교회에서. 국회의원 출판기념회할 때 빈손으로 오지 말고 봉투에 돈 넣어 오라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에요.

 

 

제사가 되려면 땅이 있어야 되고 땅이 없는 데는 온전한 제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천국이라 하는 것은 내가 가는데 주안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뭘 해야 된다는데 주안점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뭘 해야 되는가, 제사지내야 되지요. 그럼 제사지내려면 제단 있어야 되지요. 제단 있고 제사장 있어야 되고, 제사지낼 제물 있어야 되고 요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히브리서에서는 이걸 가지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걸 ‘그림자’라 해요. 그림자.

 

 

그림자라 하는 것을 이렇게 예를 들면 쉬워요. 하늘나라와 이 땅 사이에 얇은 천으로 돼있고 얇은 천에 조명시설이 빵빵하게 쫙 쬐인다 합시다. 안에서 뭔가 꿈지럭 꿈지럭 움직이게 되면 그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그 그림자가 비치겠지요. 그럼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사를 지낸다. 이건 뭐냐, 그림자에요. 울산강의 할 때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그림자는 실체가 아닌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오해한 거예요. 그림자라는 실체가 따로 있는데 그림자 노릇하는 자신이 실체라고 여긴 겁니다. 그거 아니다 말이죠. 그런데 실체 노릇하는 사람이 무려 오십만 명이라, 그런데 실체는 몇 명입니까? 단 한 명이에요. 어떻게 한 명의 그림자가 하나가 아니고 오십만이 되지요? 그러니까 인물 대 인물이 아니고 기능 대 기능이죠. 오십만이 모여서 해야 될 그 기능이 한사람이 해야 될 기능이 되는 겁니다. 기능 대 기능이에요.

 

 

아브라함 자손이 많더라도 오직 아브라함 자손은 한 분 밖에 없어요. 그들이 오십만이 모여서 해야 될 기능은 오직 하나로 모아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땅에서는 출애굽을 되풀이하고 출애굽은 만물을, 하나님께 속했다고 고걸 드러내는 그림자 게임을 하고 있는 거예요. 사실은 우리가 이 땅에 안양에 사는 것도 그림자입니다. 우리도 갈 바가 없어요. 미국 이민 가봐야 내 몸이 거기에 따라가는 한 이 같은 이 몸이 거기가도 마찬가지로 똑같은 이 몸이 설치는데 지금도 시간이 지나면 늙어가고 모든 게 망가지고 어깨도 아프고 전부 다 주저앉게 돼있어요.

 

 

이번에도 대전강의에서 했지만, 사람이 시간의 무게를 우리가 벗어날 수 없어요.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하신 게 아니고 시간을 창조했다는 이야기를 했지요. 밤이 되고 낮이 되니 그 날이 무슨 날이라, 첫 째 날이라. 날을 창조한 거예요. 그리고 날은 양발이나 속옷 넣어두는 서랍장처럼 규격화되어 있어요. 그 규격화된 이유가 그 마지막 날이 무슨 날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감하는 날이에요. 시간이 시간대로 규격화될 때 비로소 그 시간의 완성이 바로 하나님의 안식하는 완성이에요.

 

 

우리는 그 시간을 지켜줘야 될 사람입니다. 안식일 날 제대로 지켜줘야 될 사람입니다. 그것 때문에 피조물은 만들어졌어요. 우리의 노동이 아니고 하나님의 노동, 우리는 노동덕분에 산다는 거예요. 이런 것이 뭐라 했습니까? 그림자지요. 안식일 지키는 것이 그림자, 그건 실체가 아닙니다. 주일성수 안했다고 벌 받는다, 이건 마치 주일성수 안식일이 그게 실체라고 착각한 거예요.

 

 

맏물을 보여주기 위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갔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모든 제사는 출애굽을 반복하는 겁니다. 어린양의 죽었던 기능과 그 덕분에 살아났던 맏아들의 기능이 합체가 돼요. 하나가 되면 그 하나 된 분이 모든 율법을 유월절로 다 이루었기 때문에 그 분이 어린양이 되어서 죽으시고 살아난 그 분이 그만큼 기다렸던 구약전체를 그림자로 만들게 했던 그 실체되신 분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겁니다.

 

 

결국은 십일조는 뭘까요? 십일조는 그림자지요. 예수님의 위상을 보여주는데 십일조를 한다는 것은 제일 좋은 것을 드리는 겁니다. 그럼 제일 좋은 것 되게 하는 하나님의 개입된 사건으로 인하여 우리는 그 덕분에 우리는 지극히 높으신 나라의 속성을 이 떠나야 될 세상에서, 이 땅위에서, 맛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떠나야 될, 그 곳을 가고 있는 움직이는 나라 곧 이스라엘입니다.

 

 

요한복음1장에서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누구하나 등장하게 되면 괜히 시기심이 나요. 학급에서 담임선생님이 누구하나 특히 사랑하게 되면 그 애 빼놓고는 너머지 다는 질투의 시선을 보냅니다. 치~ 지가 뭔데. 그 다음부터 흠집 잡기에 나섭니다. 예수님께서 누구 하나 특히 칭찬해버리면 다른 사람은 삐지게 마련입니다. 나다나엘이 12제자 가운데 하나입니까? 아닙니까? 아니지요. 참 신기한 일이지요. 우리 같으면 우수한 인재, 우수한 인재 뽑아서 12제자 하게 되면,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얼마나 빛나겠습니까?

 

 

요번에 제가 서울에서 누구를 만났는데, 그 분 아는 사람이 어떤 회사에 사람을 뽑는데 8명 뽑는데 5천명이 왔답니다. 자기 부서에 8명중 1명을 배당받는데 딱 2사람이 걸리는데 서울대학 나와서 부산의 로스쿨 출신자냐, 아니면 고대 대학원 나왔는데 로스쿨 출신자냐, 제일 말단 사원 뽑아요. 그런데 스펙이 그 정도입니다. 신입사원이 변호사급이에요. 그게 공기업이거든요. 대단하지요.

 

 

그러니 어느 정도로 스펙을 쌓아야 되겠습니까? 박 윤진씨 회사에 신입사원을 뽑는데 자기 교수가 추천하는 아가씨가 37인데 박사랍니다. 그런데 37살 박사를 뽑는데 뽑기가 주저된다는 거예요. 왜, 경력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그 아가씨는 스펙 쌓으려고 미국 갔거든요. 박사래요. 박사도 안돼요. 박사라도 안돼요.

 

 

들어갈 곳이 없다는 거예요. 8명 뽑는데 5천명 왔다니까 놀라지요. 그런데 더 놀라운 이야기를 박 윤진씨가 하는 거예요. 뭐냐 하면, 기계로 먼저 훑는다는 거예요. 기계로 어떻게 훑느냐면, 예, 아니오, 뭐 가지고 있습니까? 있으면 예, 없으면 통과, 기계로 추려내고 시작하는 거예요. 인맥이고 뭐고 필요 없어요. 기계로 훑어내는 거예요. 미국도 그렇게 한답니다. 이게 바로 아브라함이 거느렸던 땅입니다. 세상에 기업도 들어가기 힘들거늘 하물며 단절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이건 60억대 1이에요. 이건 산을 옮기는 그 기적은 이유도 안 됩니다. 엄청난 스펙 쌓아도 소용없고요, 창세전에 기계가 가동되어야 돼요.

 

 

사랑할 자에게는 사랑해 주고 미워할 자는 미워하는 그 기계가 작동이 되면 그 작동이 되게 되면, 그걸 느끼는 사람 같으면 세상이 일체 부럽지가 안지요. 나다나엘은 어떤 스펙을 쌓았습니까? 없지요. 자, 나다나엘은 12제자에 들어갔습니까? 안 들어갔습니까? 안 들어갔지요. 우리 생각 같으면 12제자는 우수한 인재가 들어가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절대 그런 방법을 쓰지 않아요.

 

 

나다나엘은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이 이스라엘 될 때, 나다나엘이 간사한 게 없다고 했지요. 그러면 우리는 나다나엘의 품성을 추적하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보면,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에서 홀로 기도할 때에 주님이 이미 보시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나다나엘이 간사한 게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나다나엘을 철저하게 이용하시는 겁니다.

 

 

그 당시에 제자들이나 유대인들에게 너희들이 어떻게 하면 구원 받습니까? 하는 그 질문 자체가 성립이 된다? 안 된다? 성립이 안돼요.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하나님이여, 무화과나무에 있는데 찾아오세요.” 이런 짓 안했다 말이죠. 나다나엘이 몰랐어요. 그러나 주님이 이미 보고 계신 거예요.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은 이렇게 정리됩니다. “이미 주께서 알고 계신다.” 간단한 문제입니다.

 

 

오천 대 일, 오백 대 일 관계없어요. 오만 대 일 하면 신나요. 20억대 일하면 더욱 더 신나요. 왜, 이미 지정돼 있으니까. 창세전에 이미 정해져있으니까. 내가 정해진 사람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살려내는 그 솜씨를 우리는 이 안양에 사시면서 평생을 누~~ 려, 그 짜릿함을 한 번 맛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경우라도 십자가에서 외면케 하지 않는 그 주님의 솜씨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이게 성령의 기적이 아니면 아무도 십자가는 보지 않게 돼있어요. 십자가 마음껏 욕하라 하세요. 욕할수록 우리는 짜릿, 짜릿함을 느끼는 거예요. 너희들이 게 맛을 아냐, 갑자기 게 맛이 당기네.

 

 

십일조를 정결한 것을 드릴 때에 이건 그림자입니다. 그림자인데, 그 그림자의 의미가 민수기18장23절에는 좀 더 확대됩니다. 요번 강의는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요. “오직 레위인은 회막에서 봉사하며 자기들의 죄를 담당할 것이요 이스라엘 자손 중에는 기업이 없을 것이니 이는 너희의 대대에 영원한 율례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 고로” 그러면 물어봅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 땅을 약속의 땅을 기업이니까, 상속받지요. 이스라엘이 땅을 상속받지요. 레위인은 이스라엘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이스라엘 사람 맞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땅을 상속 받지요. 약속의 땅을.

 

 

그러면 레위인은 땅을 상속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같은 이스라엘인데. 안 받지요. 레위인들이 거의 십분의 일이에요. 그러면 십분의 일은 약속의 땅을 상속 안 받지요. 땅이 없어요. 뭐 먹고 살라고? 걱정하지 마세요. 땅을 가진 쪽에서 농사짓게 되면 그것도 제일 좋은 거, 사과도 제일 굵은 거, 밤도 제일 좋은 거, 귤도 제일 좋은 거, 고것만 모아서 누구한테 바친다? 하나님께 바치는 요량으로 레위인들에게 바치는 거예요.

 

 

레위인들이 그걸 받을 때 자기 자위로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걸 받는 거고 주는 사람도 니한테 주는 게 아니야, 하나님이 주라하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입장으로 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레위인이 받은 땅은 어느 땅이냐, 약속의 땅이 아니고 지극히 높으신 자의 땅을 차원 높게 보여주는 게 돼요. 땅은 없되 그림자에서 나온 땅 가지고 하늘나라의 땅을 표현해 내는 기능을 하는 겁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 제사고 그 제사는 어떤 제사냐, 그냥 제사가 아니고 대속의 제사, 대신 용서해 주는 제사, 레위인은 얼추 십분의 일이에요. 그들에게 십일조를 받아주게 되면 제사장은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제사를 드리면 그 제사를 가지고 죄를 용서하는 기능이 돼요. 자, 여기서 또 어렵습니다. 왜 제사를 지내면 죄 용서가 될까요? 뻔하게 우리가 안다고 생각했는데, 안다는 게 함정일 수가 있거든요. 안다고 넘어갈 게 아니라 따져보자는 말이죠.

 

 

제사 지내는데 왜 죄 용서받지요? 이게 앞뒤가 안 맞는 거예요. 내가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제사를 받고 하나님께서 너희 죄를 사하노라, 이렇게 했을 때에 제사 드리는 행동은 죄에 해당될까요? 해당 안 될까요? 그러면 죄 지은 제사가 온전한 제사일까요? 아닐까요? 아니지요. 그러면 온전한 제사가 아니니까 제사 드린 게 됩니까? 안 드린 게 됩니까? 제사 안 드린 게 되지요.

 

 

그러면 제사 드리면서 제사 안 드린 게 되는데 그러면 용서는 어디서 받았어요? 제사 받고 용서해 준다는데 제사 드린 적도 없는데 용서는 어디서 온 겁니까? 그게 바로 그림자 기능이죠. 제사 드림으로서 니 제사 받는 게 아니고 다른 분의 제사를 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사를 드리는 자가 이스라엘에서 십분의 일을 차지하지요. 맏이 차지하지요. 그럼 그 레위인들이 맏이에요? 맏이 아니에요? 맏이 티를 내는 그림자 기능을 하고 있지요. 그럼 맏이는 따로 있지요. 그럼 이스라엘 전체에 50만명이 모여서 하는 기능은 결국 누구를 이야기 한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그 엔진이 가동되는 겁니다.

 

 

영화관에 보면, 큰 스크린에 그림이 나오잖아요. 사진이 나온다고요. 그 사진이 어디서 나오느냐, 옛날 고려시대, 조선시대 사람들이 저 사진 어디서 나왔어요? 하면 에이, 작은 화가들이 한 이십육만오천 명 매달려가지고 1초 때마다 그 때 그 때 그림을 그려야 된다는 생각이죠. 그 당시에는 그 그림이 나오는 그 그림의 공간성에서 그 그림이 나오려면 손수 그리는 방법 외에 다른 대안은 일체 없지 않습니까? 뭔가 투여한다는 개념이 없잖아요.

 

 

그림이라 하는 것은 그리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실제로 그려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림이 너무 자주 바뀌니까 요건 수십 번의 요정이고 얼마나 빠른지 0.001초 만에 그림 한 장씩 만들어 내는 그런 요정이 한 오십만 명이 매달려서 그려내면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그렇게 생각했다니까요.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받고 다른 나라를 이기는 것은 우리가 열심히 제사 드려서 했다고 이렇게 생각한다니까요.

 

 

우리 말고 다른 분이 용서한다는 생각은 못하고 열심히 제사 드리고 예배드리고 십일조 내는 우리의 행동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나는 더러워서 십일조는 못하겠어. 나는 안식일 안 지킬 거야. 나무할 거야.”이러면 어떻게 돼요? 안식일에 나무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죽여 버리지요.

 

 

죽이는 이유가 뭐냐 하면, 죽는 것도 기능이에요. 그러니까 안식일 하는 사람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진적에 그들은 죽어야 마땅한 사람들의 집합이에요. 그런데 어떤 분에 의해서 용서 받았기에 안 죽고 사는 거예요. 그러면 안식일을 지키지 않겠다는 것은 뭐를 금하겠다? “나는 그 따위 용서는 필요 없어.” 라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받아 죽은 겁니다.

 

 

마치 노아식구가 분명히 홍수에서 구원받았잖아요. 구원받아놓고 저주받았어요. 이게 어떻게 됩니까? 구원받는 게 좋습니까? 저주받는 게 좋습니까? 구원받아 놓고 저주받을 거 같으면 아예 구원 안 받는 게 더 나을 뻔한데 함과 가나안은 구원 받아 놓고 저주 받았어요. 뭐 때문에? 아버지가 받은 은혜를 그 은혜를 까먹고 얼레리 꼴레리 했고 수치를 드러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그 축복받은 사람은 우리가 이렇게 구원받았다고 그 수치스러움을 부끄러운 부분을 가려내요. 그러니까 우리는 부끄러운 부분이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늘 살아나야 돼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쳐야 돼요. 이 몸이 부끄러움이 있어야 돼요. 늘 은혜로 덮어줘야 돼요.

 

 

그런데 살다보면, 덮는 은혜는 차버리고 죄 짓는 것 가지고 어떻게 착한 일해가지고 내가 지은 죄 이상으로 착한일 많이 해서 이 죄에 대한 저주가 상쇄돼서 안 오는 방향으로 우리의 선악과 기재, 메카니즘이 마구 작동을 해요. 이게 성령 안 받은 사람의 특징이잖아요. 우리도 그런 생각 들지요. 그런데 그 때마다 십자가를 알게 하니까 ‘아, 또 다시 부질없는 죄를 지었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한 거 정리하게 되면, 땅이 있어도 그 땅은 어떤 장차 오실 지극히 높으신 자의 나라를 보여줄 그냥 땅이에요. 그 땅도 그림자를 위한 세트장이고 거기서 제사지내는 것도, 십일조 하는 것도, 레위인들이 복장 갖춰서 예배 제사 기능하는 것도 전부 다 오실 분의 그림자가 되는 겁니다. 물론 아브라함도, 멜기세덱도 마찬가지로 다 그림자에요. 그렇게 할 때, 이미 예수님은 이미 관여했다는 게 제 이야기입니다. 이미 이스라엘 속에 관여한 거예요.

 

 

그 크레용 팝이라는 가수가 춤췄던 것을 가지고 5기통 엔진 춤이라 하지요. 자동차 엔진부분에. 레이디 점핑! 헬멧 쓰고 올라가는 거 있잖아요. 이스라엘 내부로 보시면 됩니다. 굉장히 분주해요. 그래서 성도는 노는 사람이 아니고 이 땅에서 오기통 춤을 추는 크레용 팝이에요. 늘 죄짓고 십자가로 용서받는 거 깨닫고 죄 짓고 용서받는 거 깨닫고 늘 오기통 춤을 추고 있는 사람입니다. 부단히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 땅은 어차피 우리가 영원히 살 땅은 아니니까. 훌쩍 떠나고 싶지만 죽을 때까지는 오기통 춤을 춰야 되네. 어쩔 수 이. 레이디 점핑! 해야 된다니까요. 헬멧 쓰고.

 

 

신약에는 십일조가 없습니다. 십일조가 하나도 없는 이유가 십일조 없는 게 아니고 율법 전체 행함의 의무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율법에 만약에 해당되면 이것은 다시 저주 아래로 들어가는 거예요. 율법 아래로 들어가는 거예요. 율법 아래로 들어간다는 말은 이것은 무엇의 모독인가 하면, “나, 구원받기 싫어!” 하고 똑같은 거예요. “나, 구원 안 받을래.” 아까 이야기했지만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으면 천국은 없습니다. 어린양의 죽음을 경유하지 않으면 천국은 없습니다.

 

 

“나보고 죽었다는 소리 하지 마! 나는 살아서 법 지킬게.” 이러면 그 노선이 어떤 노선이냐 하면, 십자가의 실타래에서 나오지 않은 그런 조끼에요. 하나님께서 뜨개질하는데 빨강색 실이 천국이라면, 파랑색에서 나오는 마귀가 또 뜨개질하고 있다고요. 마귀에서 나온 뜨개질이 뭐냐 하면, 법 아래에 있는 거예요. 갈라디아서3장에 법 아래에 있는 거예요. 찢어버렸는데 사람들은 또 풀 가지고 붙여요.

 

 

아까 했지요. 자꾸 제사 드리라 하는데. 제사는 항상 돈과 관련되어 있어요. 교회가 사람들을 구원하는 단체라고 주장하는 순간 교회는 돈을 요구하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교회가 생겨난 것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을 나쁘다고 보지 말고 다 우리 이야기고 ‘저게 바로 구약의 한계였구나!’ 라는 것을 아는 계기로 삼으시면 돼요.

 

여전히 구약 속에 살아서 십자가를 모독하기를 작심했던 자들의 그런 태도와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보면 돼요. 가운 걸치고 거창하게 하는 거. 자기들이 제사장이라고 하는데. 그러면서 그들이 하는 소리가 있어요. 내가 제사장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고 다 교인들 천국으로 모으기 위한 하나의 상징적이다. 이리 이야기하거든요. 천국은 이미 확정됐는데, 지가 왜 하나 더 꾀이려고 하는데. 지가 왜? 지가 뭔데?

 

 

자, 진도 나가 봅시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게 이스라엘에 누가 있다? 맏이가 있다. 예수님이 계시다. 맏이가 있지요. 그럼 맏이가 솔솔 실타래를 풉니다. 풀게 되면, 맏이가 나왔잖아요. 맏이가 무슨 일을 하는가, 자손을 만들지요. 맏이가 자손을 만들면, 그 맏이의 자손에서 뭐가 나오는가 하면, 또 맏이가 나와요. 맏아들에서 자손이 나오면 맏아들 된다니까요. 하나님이 자기를 낳는 게 돼요.

 

 

성부가 누굴 낳았어요? 성자를 낳았잖아요. 그 과정을 보여준다니까요. 아까 말한 떠오른 것만 국자로 뜨듯이 달여 놓고, 끓여놓고 뜨는 그것만 골라가듯이 계속 맏이만 골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십일조 함으로서 니가 맏이 덕분에 사는 줄 알아라, 이것들아, 니가 맏이 됨을 보여주는 기능을 해줘야 너희 속에서 맏이라는 게 떠오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옛날 어린양이 곧 장차 맏이로 오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실 분이라는 것을 늘 생각하게 하기 위함에서 제사를 드려야 된다 이 말이죠. 맏이에서 자손을 낳으면 또 맏이가 돼요.

 

 

이제 히브리서7장5절 봅시다.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이게 뭐냐 하면, 백성들의 십일조를 누가 받지요? 레위인이 받지요. 레위인 자기가 착복합니까? 안한다 했지요. 그거 누구한테 바칩니까? 그 십분의 일을 제사장에 바치지요. 그러니까 레위인자체내에서 또 뭘 바쳐야 한다? 십일조를 바치는 자야 되고 또 레위인중에서 제사장된 쪽은 십일조를 받는 자가 되는 거예요. 그럼 바치는 자와 받는 자가 같은 레위 지파 안에 같이 들어있지요.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멜기세덱과 아브라함의 만남에서 어떤 원리적인 것이 받아지는데, 그 원리적인 것이 실타래 풀리듯이 풀리면 그게 폭이 점점 더 넓어지면서 그 안에서 그 맏이 되시는 분, 맏아들 되시는 분이 어떤 일을 하실 것을 보여주는 연극배우들이 보다 많아지면서 생겨난다는 거예요. 하나는 레위와 제사장의 차이를 통해서 고 주고받는 기능이 장차 멜기세덱과 아브라함이 있던 그 기능에 반복과 연장이 된다 이 말이죠.

 

 

그것이 아브라함 허리에서 나온 자신들은 그냥 허리에서 태어나면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기능의 반복의 임무와 사명을 띠고 계속해서 반복이 되는 겁니다. 그 반복이 나중에 이스라엘까지 이어지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맏아들을 낳고 되어 진 맏아들이 새로운 이스라엘을 낳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뭘 낳고요? 방금 맏아들을 낳는다 했지요. 이스라엘이 맏아들 낳고 그 맏아들이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10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내가 온 것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얼마 전에 지난 주일날 설교했는데 엄청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이 말의 뉘앙스를 들어보면, “유다 너는 이스라엘이라고 우기지. 내가 보기에는 아니야.“ 그럼 아니라면 왜 남의 나라에서 일하지 유다에서 일하느냐, 이스라엘에서 뭘 낳고? 맏아들을 낳아야 돼요. 낳을 때 그냥 낳는 게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죽음을 유발시켜야 돼요. 자기 백성한테 죽음을 당하는 자로 해서 다시 살아나게 되면 이스라엘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걸 하나님께서는 미리 만들기 위해서 제자의 숫자를 정해졌어요. 제자가 몇 명입니까? 12명으로 정해졌습니다. 12명의 의미가 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오병이어 기적가운데 등장합니다. 오병이어 기적가운데서 12제자를 통해서 12제자가 손수 고기와 떡을 나누어 주었더니만 남는 광주리가 12광주리가 남았어요. 그걸 나눠줬던 제자들은 곧 12지파와 관련된 사람이고 12지파가 되려면 어린양이 등장해야 돼요. 맏물이 등장해야 돼요. 어린양이.

 

 

그 어린양이 지극히 높으신 정보를 갖고 있을 때 이 땅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한 나그네 같은 사람들도 지극히 높은 정보의 과정에 함몰이 되고 거기 안에 엮여지게 되면, 그들이 바로 그들의 고향이 하늘의 예루살렘의 고향으로 삼을 수가 있는 겁니다. 제자들이, 12사도들이 아브라함이에요. 이 땅의 갈 바를 알지 못한 사람들이에요. 밧모 섬에 갇혀있던 사도요한도 마찬가지에요. 자기 본향은 따로 있어요. 밧모 섬이 땅값 오른다고 거기에 살 사람 아닙니다. 귀양살이하고 있으니까.

 

 

나그네 삶이죠. 집사님도 마찬가지고. 그냥 오기통으로 하면서 날마다 죄짓고 용서받고 죄 짓고 용서받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것은 그림자로 살아가는 것이고 맏아들의 그림자에요.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이런 말이 나오죠.

 

 

그런데 여기서 어려운 점이 하나가 있어요. 뭐냐 하면, 자식을 낳을 때 허리에서 자식을 낳는다 했잖아요. 자식을 낳을 때 ‘아, 자식을 낳았으니까 하나님의 맏아들에 속했구나!’ 이러지 말라는 겁니다. 물 위로 떠야 돼요. 자식이라고 다 자식이 아니다 말이죠. 노아의 자식이 다 복 받은 게 아니지요. 떠오르면 하나님이 새로운 지극히 높으신 계기가 사건이 그 사람에게 임해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건이 임해야 돼요.

 

 

그래서 레위인들은 다 구원받는다. 왜? 레위인들은 민수기에 보면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기 때문에. 아니에요. 레위인이 뭡니까? 유다도 마찬가지고. 어떤 지파도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그냥 기능을 했을 뿐이지 떠오른 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해진 사람만 자기 아들로 떠오르게 돼있고 떠오른 사람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맏아들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 이 말이죠.

 

 

자,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7장11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이 아론이라는 것은 제사장이죠. 아브라함에서 이삭이 나오고 이삭에서 야곱이 나오고 야곱에서 12아들 나오지요. 아들 중에 하나가 뭐냐, 레위지요. 그럼 레위에서 누가 있습니까? 제사장 있지요. 그럼 레위 제사장은 아브라함 허리에 있습니다.

 

 

레위 제사장이 있는데 아브라함에 속했다. 끝이냐 할 때 히브리서7장은 끝이 아니다. 이들이 제사장이었다면 다른 제사장이 필요 없을 건데 여기에 새로운 아브라함 노선 말고 멜기세덱의 노선을 쫓는 새로운 제사장이 또 등장하는 거예요. 그러면 제사장끼리 경쟁되겠지요.

 

 

레위에 속한 제사장과 또 하나는 뭡니까? 또 다른 제사장. 그 제사장은 뭐냐, 그 제사장은 유다지파를 말하는 게 아니고 유다지파가 제사장이 아니고 유다지파를 통해서 제사장이 나타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제사장은 한 번으로 땡이에요. 다 끝났어요. 영원한 제사장이에요. 영원한 제사장은 반복되는 레위지파가 아니라 다른 지파, 멜기세덱의 지파이기 때문에 멜기세덱을 닮았어요. 레위지파은 아브라함을 닮았어요. 왜? 그 허리에서 나왔으니까.

 

 

그런데 영원한 제사장은 멜기세덱에서 나왔어요. 멜기세덱을 닮았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그래요. 그런데 제사장 아브라함이 레위지파가 무슨 역할을 한다? 십일조를 받는 역할을 하고 내부에서는 또 주는 역할, 십일조와 관련된 기능을 이 안에서 하고 있었던 거예요. 하고 있었는데, 하고 있던 이 노선이 아니라는 말이죠. 아니지만, 십일조와 관련된 일은 어디로 이동되느냐 하면, 영원한 제사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십일조는 누가 받고 누가 한다? 주님이 하고 주님이 받고 이미 끝났다는 이야기가 히브리서7장의 스토리입니다. 이야기의 전개입니다. 이제 풀렸지요. 하늘의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땅에 깔아놓은 이 그림자 쪽으로 접근해서 “그건 아니거든” 이라고 설명하면서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히브리서 자체가 지금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이미 이루었기 때문에 없어진 거예요. 우리 땅의 쪽에서 없어진 거예요. 그러면 도대체 이런 이야기를 기독교사가 몇 년 됐습니까? 무려 2000년 됐잖아요. 왜들 그래요? 아직도. 아니 성령 받은 사람 없었습니까? 왜 아직도 십일조 달라하는 사람이 대다수이지요. 마귀의 기능도 해야 돼요. 지옥에 지옥을 마구 보여줘야 될 그 기능을 해야 돼요. 천국과 지옥은 간단한 거예요. 법에 매에 있으면 지옥이고, 여러분들도 법에 매여 있을 때는 순간 지옥 같아요.

 

 

주여,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얼마나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했기에 내 아이가 뒤로 엎어져서 기부스를 했나, 나 때문에 자식 저주 받았어. 저주를 풀어야 돼! 안 다쳤을 때도 저주였어요. 멀쩡할 때도 저주였고, 시험에 합격할 때도 저주였고, 축복은 오직 십자가 안에서만 축복이고 나머지는 다 저주에요.

 

 

예수님이 이야기하면 대번에 튕겨 나오는데 그게 저주의 힘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는 하나님의 저주가 있다. 성경이 너무 명확해서 문제라, 성경은 융통성도 없고 봐주는 것도 없고 스펙 쌓는 것도 없고 신앙생활 50년 했습니다. 그것도 귀담아 듣지도 않고, 예수 있으면 영생이고, 예수 없으면 저주다. 아주 단호하게 합니다.

 

 

징계요? 징계는 꼭 얻어맞아야 징계가 아니고 멀쩡해도 징계를 느낄 때가 있어요. 그게 제대로 된 징계에요. ‘내가 이리 살면 안 돼!’ ‘이건 아니야.’ 그게 이미 아무 일 없었고 돈 한번 안 빼앗기고 다친 데도 없어도 마음이 그리 오게 되면 그 안에 이미 징계가 담겨 있는 겁니다.

 

 

매일 멀쩡하게 징계 받으시기 바랍니다. 배탈 나지 마시고 그냥 멀쩡하게 살아있어서 멀쩡하게 자전거 탈 때도 그냥 오늘 자전거가 왜 이리 잘 달리지. 이런 것 전체가 자기 아들이기 때문에 진짜 아들이기 때문에 우리를 늘 이렇게 평생 동안 징계 속에 있게 하시는 겁니다. 아버지를 잊지 말라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일조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구원 될 수도 없는 자, 그냥 법 지킨 거 자랑 질하는 저희를 상관치 않고 십자가를 지셨사오니 십자가만 자랑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참고사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십일조160508  (0) 2023.07.01
십일조140830  (0) 2023.07.01
십일조140810  (6) 2023.07.01
십일조121004  (0) 2023.07.01
십일조110410  (0) 2023.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