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YouTube강의(십일조에 관하여)121004-이 근호 목사
오늘은 십일조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성경에는 십일조란 말이 분명히 나옵니다. 십일조란 말이 나와서 사람들은 교회마다 교인들에게 십일조를 강요하고 또 교인들은 십일조를 해야 성숙한 신앙인, 수준 높은 신앙인, 믿음 깊은 그런 신앙인이라고 그렇게 교회에서 인정받게 되죠.
그런데 성령을 받은 신약의 사도는 이 십일조를 어떤 식으로 보았을까요? 그분들은 분명히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성경 해석에 있어서 어떤 하자가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 해석에 하자가 없는 그분들이 구약의 십일조를 어떤 식으로 어디에다 넣어서 무엇을 설명하려고 했던가? 단순히 ‘십일조가 있으니까 10분의 1을 내면 그만이다.’라는 식으로 해석을 했을까요? 아니면 구약에 나오는 그 십일조가 신약의 무엇을 증거 하는데 하나의 배치되는 하나의 재료와 구조로서 거기에 들어가는가. 그걸 한번 생각해 보아야 됩니다.
히브리서 7장에 보면 거기에 십일조란 말이 나옵니다. 신약에 있는 이 십일조가 이 히브리서 7장에서는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용도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간단합니다. 나로 호라는 그 우주선을 올리는데 거기에 많은 부품들이 있습니다. 그 부품들을 아주 철없는 초등학교 애들한테 부품들을 나누어 줬을 때 그 애들은 그걸 가지고 그냥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가 버리겠죠. 자기 편한 대로 해석하고 편한 대로 이해하면서 ‘이게 뭘까? 그래, 우리 즐기는 대로 즐기고 우리 하고 싶은 대로 하자.’ 그런 용도로 부품들이 쓰여 질 것입니다.
십일조라는 이 구약의 용어가 이처럼 성령 받지도 않고 그리고 이런 사도들이 십일조를 사용하는 그 취지에 대해서 모르게 되면 바로 철없는 어린아이 같이 십일조를 ‘십일조 내면 복 받겠지.’ 이런 식으로 쓰여 지는 겁니다.
히브리서 7장에서의 십일조는 이렇습니다. 먼저 아브라함 이전에 제일 먼저 십일조를 드린 분이 있는데 아브라함입니다. 그리고 그 십일조를 받으신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이 멜기세덱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십일조란 그 멜기세덱과 아브라함 사이에 처음으로 성립했습니다. 그러면 멜기세덱이 어떤 분이냐, 멜기세덱은 히브리서 7장 3절에 보니까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라고 돼 있습니다.
십일조를 받으시는 분은 그 십일조를 받는 이유가 십일조를 내는 사람의 모든 운명과 팔자와 그리고 그들의 장래, 그들의 구원까지 십일조를 받으시는 분이 책임지고 있다는 그러한 약속 관계에 도입된 것이 십일조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십일조를 받으시는 분은 십일조 내는 사람에게 이미 영생을 주었기 때문에 ‘이미 받은 영생을 주신 분은 바로 이분입니다.’라고 영생 주신 그분을 소개하면서 내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아브라함 때에는 바로 멜기세덱이라는 분이 십일조를 그때 받았는데 이분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히브리서 7장 뒤에 보면 아주 복잡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 복잡한 내용을 간단히 추리면 이렇습니다.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멜기세덱이 받은 것은 그 뒤에 아브라함 자손들 가운데 레위 인이 있습니다. 그 레위 인이 십일조를 받거나 내는 것은 단순히 레위 인들이 십일조를 받아서 생업에 보태 쓰라는 것이 아니고 그 레위 족속은 이미 죽었던 아브라함 족속의 허리에 이미 거기에 약속대로 묶여져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 허리에 묶여져 있다는 말은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낼 때 이미 그 허리에 있는 레위 족속이 받고 또는 레위 족속이 내는 십일조는 어디와 연결되게 돼 있느냐 하면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냈던 그 멜기세덱의 세계, 그 영역과 연결돼 있습니다. 연결됐다는 그것이 십일조라는 것을 가지고 이렇게 표현해 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뒤에 일반 사람들이 레위 인에게 십일조를 내는 것은 일반 사람들이 레위 인에게 십일조를 내고 레위 인은 그 안에 있는 아브라함의 약속 때문에 받고 그 아브라함의 약속이 멜기세덱에게 바친 그 십일조의 정신이 그대로 연결되어서 일반인과 옛날 적 사람 멜기세덱의 위치와 이렇게 엮여져 있습니다.
자, 십일조를 이렇게 지상에서 하늘까지 연결시키는 사다리처럼 그렇게 연결됐다는 이 말은 이 십일조라는 율법을 레위 인들이 십일조를 온전히 드리고 온전히 받고 그렇게 했더라면, 구태여 다윗언약에 속한 다윗의 자손이 오실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를 성령 받은 사도가 히브리서 7장에서 하고 있습니다.
십일조의 10분의 1을 내는 것이 뭐가 그렇게 어렵냐 하지만 하나님께서 레위 인들이 하는 십일조 주고받고 하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치 않은 십일조의 취지를 보여주는 거라고 보는 거예요. 레위 인들이 온전한 십일조를 드렸더라면 절대로 그 메시야는 레위 지파를 통해서 오게 돼 있는데 여기 히브리서 7장 11절부터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은 율법이 반드시 변경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유다로부터 좇아나신 분이 레위 지파가 하지 못한 제사장 직을 대신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유다 지파로 오신 분이 누구냐, 그분이 바로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말을 쉽게 간추려 드리면 사람이 제대로 율법을 못 지킨 것을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제대로 십일조라는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도 모르고 그냥 하는 그 모든 불완전한 그 완성을 예수님께서 대신 치러서 이 지상에 있는 죄인과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엮여서 천국 백성 천국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십일조는 어디로 가버렸죠? 바로 십일조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릴 때에 모든 것을 다 이루신 겁니다. 십일조라는 그 율법마저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릴 때 이미 십일조로 받아서 영광 받고 기쁨 받겠다는 그 하나님의 취지가 예수님께서 대신해서 십자가에 피 흘릴 때 이미 십일조를 받아야 느껴지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이미 다 받은 셈이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자신이 십일조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이 십일조가 되어서 그 십일조를 제대로 받았다는 그 증거가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말합니다.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이 복음이라고. 이게 기쁜 소식이라 이 말이죠.
만약에 십일조를 못해서 구원이 될지 안 될지 모른다면 그건 절대로 기쁜 소식이 아니고 완료된 소식이 아니고 불완전한 소식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 믿으면 십일조 하지 않으면 저주 받는다면 이건 저주가 항상 옆에 찾아온다는 뜻이 돼요. 그리고 그것이 못 마땅해서 그것을 불안해서 ‘수입의 십일조를 교회에 내자.‘ 이렇게 돼 버리면 무엇을 모독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 완성하신 것에 대해서 ’난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행동적인 선언이 되는 겁니다.
나는 예수님이 피 흘림으로 말미암아 옛날에 구약 말라기에서 말하는 십일조를 받아내는 모든 법을 이제는 예수님의 피로써 모든 걸 받아낸다는 그 사실을 나는 도저히 못 믿겠으니까 따로 내 개인적인 복을 얻기 위해서 예수도 믿지만 십일조도 교회 갖다 바치겠다.‘ 그런 식으로 나온 겁니다. 그러면 교회 내는 십일조는 누구한테 내야 됩니까? 교회가 십일조를 새삼스럽게 받는 하나님과 관련돼 있습니까? 이미 하늘의 하나님의 주님의 자리는 이미 예수님이 거기에 가 계십니다.
이미 가 계신 예수님에게 십일조를 드리면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이걸 왜 바치느냐? 내가 십일조를 대신해서 다 완성한 십자가 피가 그렇게 니가 못 믿어지고 못 마땅하더냐?’라고 오히려 추궁을 당하고 꾸중 당할 게 뻔한 겁니다.
따라서 신약 시대에는 십일조라 하는 것은 내서 복 받는데 소용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구약의 십일조의 용어가 거기 들어가는 겁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모든 도는 예수님의 십일조 되심에서 그냥 공짜로 얻어 받은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