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전쟁
2023년 4월 2일 본문: 디모데후서 2:1-7
(2: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2: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2:3)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2:4)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2: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2:6)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2:7)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면류관의 가치를 놓고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전쟁에 투입시키십니다. 이 면류관은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곧 영생입니다. 과연 인간이라는 작자들이 영생을 받을 자격들이 될까요? 물론 안 됩니다. 하지만 그러하기에 전쟁에 투입되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벌리시는 영생과 관련된 전쟁에서 인간들은 철저하게 배제되는 식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전쟁을 야기하게 된 원인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철저한 하나님의 예수님 사랑으로 인해 최고위급 천사의 자리에 앉아있었던 악마는 하나님에게 반발하게 된 겁니다. 즉 왜 피조물의 전폭적인 봉사와 헌신과 복종과 충성을 왜 하나님께서 마다하시느냐에 대한 반발입니다. 사단은 신의 사랑과 총애를 받기 위한 경쟁상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등장한 것에 대해서 분노를 갖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서 한 여인이 한 아들을 임신한 것에 대해서 하늘의 용은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기쁨과 사랑을 받는 자리를 놓고 벌리는 전쟁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한결같습니다. “나는 창조 전에 이미 아들을 주로 만들기 위한 합의를 끝낸다”입니다.
따라서 사단이 되었던 그 어떤 피조물도 그들에게 뿌리도 없고 살 명분도 없습니다. 하니님께서 영광이 되는 뿌리는 이미 예수님으로 확정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뭐냐? 이점은 이스라엘이 벌리는 전쟁을 통해서 밝혀져 왔습니다.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피곤한 이스라엘 대열에 뒤에서 아멜렉 족속이 급습해 옵니다.
원치 않는 이 전쟁에 방식은 출애굽기 17:11에 나옵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는 완벽하게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을 배제한 전쟁임을 하나님께서 알려주십니다. 이것은 곧 모세는 ‘하나님의 흔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실 때에, 이 아드님이 인간들에게 결국 ‘사라진 하나님’의 상을 충분히 구현케 하게 하셨습니다. 인간들은 예수님 죽였다고 더는 예수님이 없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라진 하나님의 흔적’을 남기셨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죽음’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존재 뿌리는 ‘하나님의 죽음’입니다.
이로서 이 세상 모든 이는 다 죽은 겁니다. 악마의 입장에서는 자기 안에 예수님의 뿌리가 없음을 알고 이미 멸망당한 대상인 것을 눈치 챘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조치에 반발하는 방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인간을 볼모로 잡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이 누락된 인간을 구원시킨다면 이는 곧 그 인간을 붙들고 있는 악마에 대한 정죄도 풀릴 수 있는 논리가 성립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조치는 단순하십니다. 모든 인간을 다 죽이는 겁니다. 즉 천국이란 모든 인간을 지옥에 보내는 대가로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 천국을 ‘아들의 나라’라고 합니다.(골 1:13)
아들의 나라는 오직 아들만 들어가 살라고 만드신 나라입니다. 그렇게 해야 악마에 대한 영원한 저주가 정당하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아들 편중의 하나님 조치가 부당함을 펼치면서 인간들을 동원해서 이 반발하게 만듭니다. 그러기 위해 악마는 인간들에게 악마 자신의 품성을 뿌리로 제공합니다. 그것은 곧 ‘아들 없이’ 직접 신과의 대화에 나서겠다는 겁니다. 정의에 대해서, 착함과 선함에 대해서, 반성할 줄 알고 회개할 줄 아는 겸손한 덕성을 토대로 해서 하나님에게 잘 보여보겠다고 나섭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인간들은 매일같이 구성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매일같이 그 구성된 것을 해체시킵니다. 인간들이 선악 판단으로 매일같이 구성하는 것은 여전히 ‘나의 것’을 장만해 보려는 생각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 여지를 없애는 전쟁을 벌리신 겁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죽고 부활되는 자아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활은 오직 예수님만 부활하고 나머지는 다 탈락시키는 부활입니다. 인간 세계는 철저하게 죄와 율법과 사단과 죽음의 힘을 갇혀 있습니다. 빠져나갈 그 어떤 틈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께로 가는 조금만 구멍을 뚫어놓았습니다. 거기에는 오직 예수님만 통과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자기 뿌리 근성은, 죽은 나가 산 나가 되는 희망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그러한 시도를 철저하게 뭉개버리십니다. 그 내용이 갈라디아서 2:20에 나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모든 인간을 죽은 자로 취급하십니다. 즉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생각 자체가 부끄러운 짓이라는 겁니다. 그 죽은 자를 군사로 모집한 것은 더는 “내가 또 살아나야지”라는 노림수를 차단하기 위함입니다. 사신 분이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되게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성도는 ‘예수님의 것’으로 살아나는 겁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의 부활 능력이 작용하는 장이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이란 악착같이 살겠다는 모든 모든 이들을 악착같이 죽이시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은 마치 파동과 같은 비-접촉성 현상입니다. 악마가 인간들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 것들끼리의 싸움을 붙여 자멸토록 해놓고서는 자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접촉성 존재로 배후로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마가복음 5:25-34에 나오는, 12년 동안 혈루병 들린 여인의 경우처럼, 뿌리가 교체되는 이 과정에서 예수님의 비-접촉성은 최소한 접촉성, 곧 옷단을 간신히 만진 여인의 행동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여인이 옷가를 만나고 난 뒤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옷을 손을 대었느냐?” 즉 여인은 예수님의 옷을 만진 것으로 받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뿌리를 만진 것으로 예수님께서 받아주신 겁니다. 여인은 그 순간, 12년 동안 피가 흘렸던 그 혈루의 근원이 말랐다고 되어 있습니다. 접촉적이고 가시적인 이 세상에서 성도는 하나님의 군사로 부름받았습니다.
따라서 이미 생명의 면류관을 쓴 자들은 이 세상에서 원없이 망하고, 원없이 실패하고, 원없이 아파도 상관없습니다. 그 모습 하나하나가 주님의 뿌리를 나타내는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이 작용하는 내부를 주목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강-디모데후서 2장 1-7절(뿌리 전쟁)2304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후서 2장 1-7절까지입니다.
디모데후서 2:1-7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수 있으리라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찌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군사라는 것은 전쟁하기 위해서 모집된 사람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일은, 전쟁으로 초청받은 그런 처지가 성도의 입장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 전쟁 외에 남의 전쟁에는 별로 관심 없거든요. 우크라이나 러시아전쟁이 우리 전쟁이 아니기 때문에 별로 관심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군사로 모집 당한 사람은 이 전쟁이 자기 전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전쟁에 휘말려 들어갑니다. 어느 정도로 휘말려 들어가느냐 하면, 자기 생활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까지 요구받게 되는 겁니다. 그 말은, 인간들이 평소에 자기를 위한 자기 전쟁을 하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성도를 주님이 일에 집어넣을 때는 자기 전쟁을 스톱시키고, 그것을 거부하고 오직 주님의 전쟁에 몰두하게 하십니다. 그 전쟁은 어떤 전쟁이냐 하면, 오늘 5절에 보면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라고 되어 있으니까 어떤 전쟁을 하느냐? 하나님이 창세 전에 정해놓은 규칙과 법이 있어요. 그 법을 사수하고 그 법을 드러내는 전쟁에 모든 성도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전쟁하게 되면 피곤해요. 전쟁 없는 세계를 원하고 있는데 그러면 왜 이런 전쟁이 끝나지 않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가? 그것은 면류관, 5절에 ‘생명의 면류관’이 나오지요. 생명의 면류관의 가치를 드러내는데 전쟁방식으로 거기에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군인의 모습으로 참여하게 되어 있어요. 전쟁하면서 이 면류관이라는 것이 세상에서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월등하게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날마다 더 깊이 깨닫게 되는 거지요.
그러면 이 면류관이라는 것이 없다면 전쟁할 필요도 없다는 논리가 성립되지요. 전쟁이 왜 있느냐? 하나님 자체가 분란의 시발점이라고 성경에서는 소개하고 있습니다. 전쟁은 왜 일어나는가? 하나님 때문에 전쟁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왜 하나님 때문에 전쟁이 벌어지는가?
그것은 요한계시록 12장에 그 내막이 나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 한 아들이 등장해요. 여인이 임신한 아들, 그 아들이 등장하는데 그 아들 때문에 조용했던 하늘나라가 전쟁터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여자가 낳은 아들 때문에 하늘에 있는 용들이, 붉은 용들이 자극을 받아서 들고 일어난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공평하게 창조했다’라고 우리는 흔히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님은 절대로 이 세상을 공평하게 창조한 적이 없습니다. 분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소지를 남기고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했지요. 그 분란이 뭐냐? 하나님의 자기 아들에 대한 특혜 때문에 벌어진 거예요. 자기 아들에 대한 편애.
그 편애 때문에 요한계시록 12장 7절에 보면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라고 되어 있어요. 다시 이야기하면 전쟁이라는 것은 하나님 때문에 생긴 거예요. 하나님 때문에 생겼고 하나님이 하는 그 조치 때문에 피조물이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그 피조물, 여기에 용이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가 흔히 아는 옛 뱀 8절에 나와요.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속여서 사람들을 꾀는 자라,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악마가 왜 하나님 앞에 반발할 수밖에 없는가? 악마 심정으로 우리가 돌아갑시다, 악마 심정. 돌아갈 필요도 없어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악마 심정이니까. 악마는 최고급 천사에요. 하나님과 대화가 가능한 자리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주고 받는 그런 정도의 피조물인 천사가 악마입니다.
악마는 하나님에게 지사충성하고, 봉사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모든 신명을 다하여 섬기는 천사에요. 그런데 이러한 충성과 봉사,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 적인 복종, 이게 소용이 없게 된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주도권을 자기 아들에게 일방적으로 확정지었기 때문에 이게 사달 난 겁니다. 사탄이 사달 난 거예요.
왜 피조물들의 충성과 봉사를 왜 안 받느냐 그 말입니다. 그것도 경쟁적으로 잘 하면 되지 않느냐? 하나님에게 무조건 복종하고, 순종하고, 명령대로 살고,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그걸 기뻐해야 되는 게 하나님의 바른 정의라든지, 사랑이라든지, 그런 지혜에 입각해서 그게 맞는 이야기가 아니냐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이슬람교, 이슬람이 믿는 알라신의 특징은 아들이 없어요. 아들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과 인간이 직접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신에게 무조건 엎드리고, 복종하고,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잘못했으면 회개하고 반성하면 하나님께서 그걸 어여삐 여겨서 받아주는 종교, 그게 바로 이슬람이에요. 알라신입니다. 천주교도 마찬가지겠지만. 요즘 뭐 기독교도 마찬가지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일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여자에게서 태어난 아이, 모든 기쁨과 영광을 오직 아이가 하신 그 단독행위, 그것만 받고 나머지는 일체 받지를 않습니다. 이게 사달 난 거예요. 전쟁의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전쟁의 빌미가 하나님의 자기 아들에 대한 편애 때문에 발생 된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로마서 11장 36절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간다.’ 다른 사람 상대 안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에베소서 1장 4, 5절에 보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창세 전부터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구원할 사람을 택했다.’
결정적인 것은 골로새서 1장 16절이지요.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세상에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천사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을 바로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졌고 예수님이 만들었다’고 되어 있어요.
세상 모든 것을 예수님이 만들고, 예수님이 아버지와 함께 창세 전에 다 계획했고, 모든 것이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면 악마가 이야기하는, 그 최고 천사가 주장하는 것, 직접 자기가 신에게 충성 봉사하고 대화해서 어떤 신의 기쁨을 누리겠다는 모든 시도는 좌절되는 겁니다. 아들의 존재가 가로막고 있으니까 좌절되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 피조물이 하는 모든 것을 왜 안 받는가? 그것은 이미 창세 전에 아들과 그렇게 합의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계약을 그렇게 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아들을 배제하고 본인이 직접 하나님과 대화를 시도하는 그것은 뭐냐 하면, 뿌리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받을만한 뿌리, 하나님이 좋아할 뿌리,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릴 때는 그 뿌리가 예수님과 관련성이 있을 때만 받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안 받거든요. 그래서 악마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모든 의미와 가치를,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게 다 돌렸다는 사실을 악마가 알고 있어요.
알고 있음으로써 자기에게는 근원적인 뿌리가 없는거예요. 악마는 아들에게는 복종하기 싫고 자기 자신부터 신과 대화할 그런 최고 자리를 유지하고 싶고,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 자신의 뿌리가 없다는 것을 간파해서 하나님의 뿌리가 된다고 여겼던 것을 파악한 거예요.
그게 뭐냐? 인간을 만들었는데 인간을 뭘 로 만들었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어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그 인간을 뿌리 없는……, 그것을 무저갱이라 하는데요, 뿌리 없는 악마가 갈 지옥을 무저갱이라 해요, 바닥이 없어요. 인간을 악마 자신의 뿌리로 삼아버린 겁니다. 그렇게 삼기 위해서 에덴동산에 와서 인간을 자기편으로 끌어당긴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되는 인간을 인질로 볼모로 잡은 겁니다. 악마가.
다시 말해서 ‘나를 치려거든 하나님이 만든 인간을 같이 쳐야 될 것입니다.’라는 것이 악마의 이야기였어요, 생각이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나옵니다. 지금 전쟁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는 거예요.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을 지옥으로 보내는 대가로서 내가 하늘나라를 만들겠다는 겁니다.
하나님도 지독하지요. 모든 인간을 지옥으로 보내는 그 대가로 아들의 나라를 만들겠다. 골로새서 1장 13절에 나오는데 천국을 ‘아들의 나라’라고 했어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고 아들의 나라, 자기 아들의 나라, 아들이 주가되는 그 나라.
그 대가가 뭐냐? ‘모든 인간을 지옥으로 보내는 대가로서 모든 인간을 죽여도 내 아들의 나라는 포기 못 하겠다.’ 이게 창세 전에 하나님과 아들 간에 합의한 합의서입니다. 합의한 내용이에요. 그 합의서가 복음입니다. 자, 이렇게 되니까 그 중간에 끼어있는 인간 입장에서는 난감하기 짝이 없습니다.
고생 많은 이 세상에서 고생 없는 저 세상으로 가려고 종교를 만들어놨는데 하나님의 합의서가 이렇게 성경으로 나와버리면 이생이 되었든 저 생이 되었든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어디든지 예수 없으면, 예수 모르면 이생도 지옥이고 저 생은 더 지옥이고. 난감하기 짝이 없어요. 희망 자체가 날아가 버린 거예요. 교회 와서 뭐 얻겠다는 그러한 기대 자체가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왜? 다 죽이겠다는데 뭐요.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냐? 다 죽여버리겠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인간들이 날 죽였잖아. 이제는 너희들 차례야. 내가 너희들 다 죽여버리겠다. 내 아들 왜 건드렸어?” 이거거든요, 십자가가.
인간들은, 우리가, 중간에 있는 우리가 왜 이런 수모를 당해야 되는가, 싶어서 계속 ‘그래도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했잖아요!’ 자신의 뿌리와 명분을 하나님의 창조에서 찾습니다. ‘바르게 살면 되잖아요.’ 하나님이 묻는 건 그거예요. 네가 바르게 사는 게 문제라는 거예요. 바르게 산다는 게 어디서 나온 지식이냐 하면, 선과 악을 아는 지식에서 나오는데 그 지식은 너의 삶의 명분이나 토대가 될 수 없다고 내가 사전에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일러준 바가 있는 거예요.
‘바르게 살다가 실수해서 죄지으면 반성하면 되잖아요. 스스로 손들면 되잖아요. 스스로 때리면 되잖아요. 회개하면 되잖아요.’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인간들은 말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대듭니다. 오히려 하나님 쪽에 대고 “그러지 마세요. 저 하나님이 만든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 있어? 없어. 내가 분명히 하나님형상으로 만들었거든! 하나님형상이 없는데 그래도 네가 인간이라고 우길래?”
마귀가 맨날 하는 게 우리의 뿌리가 없으니까 뿌리를 대행하는 업자가 마귀입니다. 마귀는 선악과를 따먹으라 해놓고 착하게 살면 뭔가 하나님께서 봐주는 게 있을 거라는 식으로 매일같이 꾀고 속이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 뜻은 이겁니다. “죄지은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고 살아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라. 아이고, 인간아! 왜 사냐?”
살아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되는데 살아 있는 것은 자기 뿌리로 돌리고 살되 ‘아, 내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대로 바르게 못 살고 죄지은 이게 부끄럽구나. 그렇다면 죄지은 것에 대해서 회개해야지.’ 이런 식으로 자기의 끝까지 내가 살아 있는 이 정당성만은 안 놓으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자기의 명분이고 뿌리기 때문에, 내가 살아 있는 이 자체.
그러면 하나님의 전쟁은 어떤 전쟁을 하겠습니까? 인간을 배제하는 전쟁을 해버리지요. “살아 있느냐? 아무 쓸모 짝이 없어. 네가 살아 있다는 것이 아무 쓸모 짝이 없이 살아 있다는 것을 내가 알려주마.” 그래서 주님의 인간을 배제시키는 전쟁이 뭐냐? 인간의 뿌리를 노출하는, 그 뿌리를 보여주는 전쟁을 우리 주님이 하십니다.
그 전쟁 중에 하나가 바로 광야 때 출애굽기 17장,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광야 사막길에서, 피곤한 사막길에서 갑자기 급습했던 아말렉과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7장에 나오는 전쟁이에요. 별 무기도 없어요. 이스라엘 백성, 양식도 겨우 하루분 먹을 것밖에 없는 그런 피곤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진행하고 있는데 그때 8절에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싸움이 벌어집니다. 싸움이 벌어졌을 때 저쪽에서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덤벼들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이 벌이는 전쟁이 어떠한 전쟁이냐를 알리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아말렉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습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마치 양 떼를 늑대나 또는 표범이 덮치게 하듯이 그렇게 한 거예요.
9-11절에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지금 모세가 처한 이 형편과 입장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모세는 철저하게 허수아비입니다.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어요. 그야말로 인간을 배제하는 전형으로서 모세가 서 있습니다. 꼭두각시 인형이라는 것은 그냥 줄이 달린 거예요. 위에서 당기면 팔이 올라가고 안 당겨주면 도로 내려가는 거예요.
모세는 일종의 꼭두각시 같아요. 이 전쟁에서 아무 쓸모 짝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팔을 올리게 하면 어, 저 산밑의 이스라엘이 막 이겨요. 그러니까 모세가 손이 올라가는 것과 저 산밑에서 아말렉, 그 용맹한 아말렉 군사들이 밀리는 그 연관 관계가 인간의 지혜로서 성립되지 않습니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성립이 안 돼요.
열심히 지금 아말렉은 자기가 연마한 무술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전형적인 인간 대 인간의 전쟁하는 방식을 그대로 산 밑에서 보여줍니다. 그런데 산 위에서는 이 전쟁이 인간 대 인간이 하는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을 상대한다면 어떤 식으로 전쟁을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거기에 모세는 그냥 멀뚱히 있을 뿐이에요, 멀뚱히.
“지팡이를 올려라.” 올렸지요. 지팡이를 올렸지만 모세가 인간이라 힘이 빠지면, 마음으로는 올리고 싶지만 힘이 빠지면 이게 오십견에 걸렸는지 자꾸 내려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옆에 있는 사람이 ‘맞다. 이것은 모세의 능력이 아니고 오히려 모세의 무능력을 보여주는 전쟁이다.’ 해서 모세에는 관심 없고 모세가 들고 있는 지팡이에 주목합니다. ‘모세 너, 당신 말고 당신이 들고 있는 지팡이가 우리에게 중요해.’ 지팡이를 올리니까 전쟁에서 이기는 거예요. ‘인간은 지팡이보다 못한 존재다.’ 인간은 지팡이보다 못한 존재입니다.
이게 바로 흔적이라는 겁니다, 흔적. 신약 때 하나님께서 어떤 하나님을 보냈느냐? 자기 아들이 하나님이신데 어떤 하나님을 보냈느냐? 흔적없이 사라지는 하나님을 보낸 거예요. 흔적없이 사라지는 하나님. 흔적없이 사라지니까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손 털었어요. 왜? 없애버렸으니까, 그 실체를 없애버렸으니까 이제 없어진 거예요.
옛날에 죽었던 1598년 이순신 장군이 죽은 것처럼 이제 이순신 장군 없는 거예요. 예수님은 없는 거예요. 없는데 흔적 없이 사라져 놓고 그 흔적이 없는 흔적, 그 흔적이 없는 흔적을 대체해서 예수님의 흔적으로 있는 사람들을 등장시켜서 하나님은 자기 군사를 모집해버린 겁니다.
그자가 누구냐? 모세예요. 구약 때 모세. 바로 마태복음 17장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해같이 빛날 때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하십니다. 1-3절에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모세는 예수님의 흔적입니다. 예수는 빠졌지만 모세와 엘리야 류, 그런 분류에 속한 사람들이 오늘 디모데, 사도바울, 이 사람들에 해당되는 겁니다. 이 흔적에 해당하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죽었다는,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그 내용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그 흔적이 돼요.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인간에게 죽어버렸다는 사실을 품고, 그게 뿌리가 되고 그게 사는 존재의 명분이 되는 사람들. 하나님이 죽었다는 사실은 뭐냐? 이제 하나님이 죽었으니 모든 인간은 죽은 자에 해당된다는 것을 내용으로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흔적이 될 수 있는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죽여놓고 시작하는 전쟁에서 나타나는 흔적이 바로 성도에요. 모든 사람을 죽여놓고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산사람은 없어요. 그래서 제가 아까 했잖아요. 사람이 죄지었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내가 살아 있다는 의식 자체를 부끄럽게 여겨야 된다고요. 하나님마저 죽게 된 세상에서 우리가 왜 자꾸 살려고 애를 쓰느냐? 그것은 성립 자체가 되지를 않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을 하셨는데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었을 때 인간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죽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창세 전에 합의한 내용에 의하면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의 대상이 되는 근원, 뿌리가 되지 못하도록 그렇게 이미 합의를 보셨습니다. 왜냐? 이미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이 유일한 기쁨이 되기 때문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 이 땅에서 죽게 될 것을 이미 예수님도 알고 하나님도 알고 있었어요. 요한복음 10장에 나옵니다. 17, 18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너희가 나를 죽이는 게 아니고 내가 알아서 죽는다는 것, 아버지께서 나를 죽인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 마태복음 16장 21절에서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내가 고난받고 사흘 만에 살아난다는 이야기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미 언급을 하셨어요. 이미 알고 계셨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전략이 뭐냐?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살 수 없게 만드는 전략에 해당됩니다. 인간은 이 죽음의 세상에 태어나서 그냥 그 안에서 가마솥에 있는 것처럼 살다가 그냥 늙어 죽어야 돼요. 왜냐하면 뚫고 나가는 구멍이 없는 게 인간입니다. 인간은 그 죽음 바깥으로 뚫고 나올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셔서 아무도 뚫고 나올 수 없는 이 죽음에서 유일하게 구멍을 뚫은 거예요. 유일하게 빠져나오는 그 구멍, 그게 바로 부활의 구멍이에요. 어떤 인간도 못 빠져나옵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어떤 인간도 죽음이라는 것을 빠져나올 수 없도록, 죄와 죽음과 율법과 마귀의 손아귀에서 못 빠져나오도록 왜 그렇게 하느냐? 그래야 예수님만이 아버지의 유일한 기쁨과 영광의 토대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둑 두는 사람에게는 잘 이해가 되지만 바둑 두지 않는 사람에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예를 들겠습니다. 바둑에서 상대 돌을 완전히 포위하면 죽었다 해서 다 들어내요. 바둑알 흑, 백, 흑, 백, 서로 놓다가 흑돌이 백돌을 다 둘러싼다든지, 백돌이 촘촘하게 흑돌을 다 둘러싸 버리면 그 안에 있는 돌들은 죽었다 해서 다 들어내거든요.
그런데 죽은 돌을 드러내면 그 빈자리가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 빈자리에 또다시 바둑돌을 둘 수가 있어요, 바둑에서는. 그런데 예외적으로 한 돌이 죽은 자리에 다시 거기에는 돌을 못 놓게 되어 있습니다. 바둑알 두 개가 죽었다. 그러면 자리가 두 자리 비어요. 두 자리 중에 돌 하나를 놓을 수가 있어요. 열 개 들어냈다. 그러면 그 자리에 또 둘 수가 있습니다. 다섯 개가 비었다. 또 둘 수가 있어요. 그런데 한 자리만 남은 거기에 두는 것은 반칙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어떤 시도를 하느냐 하면, 내가 죽고 난 뒤에 다시 내가 살아날 계획을 갖고 있어요. 왜냐하면 내가 죽고 난 뒤에 다시 살아난다는 명분은 악마로부터 유입되었기 때문에. 악마가 우리에게 자꾸 그 뿌리를 제공했거든요. ‘너 인간아, 살아라.’ 이 말은 뭐냐?
네가 살면 악마도, 나도, 같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영원히 멸하지 않고 살려둘 이유가 발생되어 버려요. 인간 네가 살면. 인간은, 내가 죽고 난 뒤에 예수님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을 생각해요. 모든 교회가 다 그런 소리 하지요. 바둑돌 이미 죽은 자리에 다시 바둑돌 딱 놓으면서 ‘헤헤, 살았지?’ 이걸 인간들은 원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시도가 그 아이디어가 악마에게서 온 것을 아시고 그걸 거부해 버립니다. 내가 죽고 난 뒤에 내가 부활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어떤 자리만 부활되느냐? 예수님만, 죽었던 그 한자리, 그 한자리만 부활이 돼요. 예수님 자리만 부활이 돼요. 예수님만 부활되지 다른 사람은 부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리에 들어가야만 부활돼요.
거기에 관한 내용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자, 시작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이렇게 시작을 해요.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은 죽었던 나를 내가 살게 함이라.’ 이게 아니고, 그게 아니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보면 나는 죽음으로써 뭐가 확정되느냐 하면, 나는 죽었어도 부활 될 수 없는 존재인 것이 확정돼요. 확정되고 이제 내 안에 사는 것은 내가 아니어야 한다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그러면 왜 내가 아니어야 하는가? 나는 살아야 된다는 이것이 악마의 마음이기 때문에 그래요. 악마의 욕망이거든요. 인간은 자기 뿌리를 몰라요. 그냥 살고 싶어서 살 뿐이에요. 왜, 누가 나로 하여금 살게 했느냐? 몰라요. 성경 보니 마귀가 나로 하여금 ‘더 살아야 돼. 이왕 사는 것 잘 살아야 돼.’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나는 죽고 내 안에 사는 것은 내가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거예요.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리 제공했을 뿐입니다. 그게 부활이에요. 성도라 하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받은 겁니다. 구원 받았기에 성도가 되었으면 이제는 원 없이 망가지고, 원 없이 실패하고, 원 없이 아파야 돼요.
어떤 희망도, 건강이라는 어떤 희망, 성공이라는 어떤 희망, 건전하고 온전하고 바르게 살려는 어떤 희망도 그것은 마귀가 준 마귀의 강력한 voice, 소리입니다. ‘잘 되어야지. 예수 믿고 잘 돼야지.’ 계속해서 우리에게, 마귀가 우리 안에서 우리를 꾀고 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아까 말씀한 대로 ‘같은 피조물인 네가 살아야 우리도 희망이 있다. 너 붙들고 있는 나도 희망이 있다.’는 거예요.
처음에 이스라엘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찾아온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사사기 11, 12장에 나옵니다. 사사기 11, 12장은 입다라는 사람에 대해서 전반전, 후반전, 서로 다른 내용을 보여주는데요. 전반전의 사사기의 입다는 지난 수요설교에서 말씀드렸어요. 그때는 전반전만 이야기했어요.
암몬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힘깨나 쓰는 사람 없나, 보니까 잡류의 대장, 조폭 두목 입다가 힘깨나 썼던 거에요. 원래 힘깨나 쓰면 남성 답고 용감하니까, 목숨 안 아끼고 소위 ‘으리’ 의리 가지고 사는 사람이니까 “네가 나가라” 했어요. 그러니까 입다가 계약을 했어요. “그러면 내가 승리하면 대장시켜 줄래?” “오케이!” 이래서 입다가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입다도 이 전쟁에 대해서 하나님을 끌어당겨요. “하나님께서 이 전쟁에서 이기게 해주시면 우리 집에서 제일 먼저 마중 나오는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죽은 그 짐승 잡을 때 나 자신이 하나님께 헌신했다는 티로 받아주세요.’ 이런 생각으로 그런 소리 했어요. 그런데 승리하고 난 뒤에 제일 먼저 딸이 마중 나왔을 때 그 날이 입다로서는 최고의 참담한 날이었어요. 승리의, 기쁨의 날이 자기가 파괴되는 참담한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입다 딸이 뭐라고 하느냐? “아버지, 이점에 대해서 고민하지 마세요. 이번 전쟁도 하나님의 일이고, 아버지의 그 허세 때문에 끌려가는 저의 희생도 하나님의 전쟁의 일부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전쟁은 저의 희생 때문에 승리한 것이지 아버지의 허세 때문에 승리한 것이 아닌 것을, 제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계기로 사용해 달라, 그런 취지로 해서 남자도 몰랐던 처녀의 죽음이라 억울하다, 해서 두 달 동안 산에서 울었다고 되어 있어요. ‘청춘아, 이 솔로가 다 뭐냐?’ 해서 두 달 울고 죽었다는 이것이 전반전이에요.
그런데 후반전이 있어요. 사사기 12장 1절에 에브라임 사람들이 와서 입다한테 시비를 겁니다. ‘에브라임 사람 우리도 열두 지파 중에 하나인데 암몬이 이스라엘과 싸우는 그 거룩한 전쟁에서 우리를 왜 넣어주지 않고 어떻게 너 혼자 독식하느냐? 승리의 기쁨과 영광을 왜 너 혼자 누리느냐?’ 승리하고 나니까 그런 식으로 시비 거는 거예요.
그럴 때 입다가 화가 났어요. 왜 화가 났느냐? 이번 전쟁의 요인은 뭐냐 하면, ‘내 딸이 죽었단 말이야!’ 이거예요. ‘우리의 숫자, 쪽수가 저쪽보다 많아서도 아니고, 인간의 힘을 겨냥해서 이긴 것도 아니고, 남자도 모르는 처자가 죽었어! 처자가, 처자가! 허세 피우는 인간들, 나 같은 인간들, 그리고 에브라임 너 같은 인간들, 그런 전쟁 때문에 시집도 못간 내 딸이 죽었어!’
인간을 배제하는 하나님의 전쟁, 인간을 배제하는 이유는, 인간은 어떤 명분도 뿌리도 없다는 것, 없으면서도 마귀하고 결탁되어서 있는 것처럼 여기면서 승리? 왜 승리해야 되는데? 삶의 의미? 웃기고 있네! 무슨 너 같은 게 삶의 의미가 있어요? 이미 죽은 존재인데! 행복한 삶? 무슨 소리 하고 있는 거예요?
쓸데없는 인간들, 인간들의 겉치레 전쟁, 이런 허세 때문에 억울하게 죽었던 내 딸, ‘내 딸의 희생을 너희가 알아?’ 이래서 화가 난 입다가 그 사람들 죽이는데 사사기 12장 6절에 보면 그 숫자가 나와 있어요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명이었더라.” 같은 민족을 4만 2천 명 죽여버렸어요, 입다가. 이게 후반전입니다.
인간들의 할 일은 매일같이 자기를 구성해요. 그런데 주님은 매일같이 그 구성된 것을 해체시켜 버립니다. 인간들이 매일같이 내 것, 내 인생, 내 의미, 가치, 내 나와바리, 영역, 계속 구성하는 이유는, ‘다시 나의 것으로 장만할 게 뭐 없겠습니까?’ 이렇게 가는 거예요. ‘다시 나의 것으로, 나의 역사로 구성할 수 있는 게 없겠습니까?’ 주님의 해체는 이 여지를 없애시는 그런 전쟁을 하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매일같이 주님은 우리 자신을 뽑아냅니다. 그 뿌리를 뽑아내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의 이 복음은, 십자가 복음은 매일같이 우리의 신앙을 아예 뽑아 없애버리는 일이에요. 우리의 신앙 자체를 뽑아버리는 거예요. 제발 좀 신앙 좀 갖지 말라는 거예요. 속물이 딴 것 뭐가 속물이겠어요?
교회 속물은 뭐냐? 내가 만든 진리, 내가 만든 신앙, 내가 만든 천국, 내가 만든 거룩, 내가 생각하는 개념의 지옥, 이런 것 가지고 이런 지식 확대해서 주님하고 대화를 시도하는 거예요. 정의가 어떠니, 선함이 어떠니, 거룩이 어떠니, ‘하나님 바른 사회가 어떻습니까?’ 이런 식으로 내 방식대로, 마이웨이죠, 내 방식대로 하나님께 좋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하나님 곁에서 노닥거리려고. 그거 악마가 했던 짓이거든요, 성경에서.
주님께서는 주님만 뽑아내는 거예요. 예수님만 뽑아낸 겁니다. 예수님만 뽑아냈기 때문에 그 구멍이 예수님의 부활이고, 그 구멍에 어떤 인간도 부활 될 수 없는 거예요. 마가복음 5장에 보면 신약적 차원에서 전쟁은 어떻게 진행되는지가 나옵니다. 마가복음 5장 25-34절에 나와 있습니다. 25, 26절에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12년 동안 하혈하는 어떤 여자인데 이 병에 대해서 어떤 사람도, 고칠 수 있는 의사도 없었고 쓸데없이 병 고친다고 재산 다 허비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가 온다는 소문을 듣습니다. 저주받은 여자, 자기 쪽에서 더는 내세울 것이 없는, 하나님에 대해서나 주님에 대해서 더는 내세울 것이 없어요, 자기 쪽에서는.
여인이 사는 그 자체, 피 흘리면서 사는 그 모습 자체가 자신의 뿌리의 본모습을 다 드러냈어요. 뿌리의 본 모습, 지저분하고 더럽고 저주받은 모습, 옴팍 마귀가 들렸다면 이런 모습, 이런 모습의 인간인 것을 혈루증 걸린 그 여인 본인이 알아요. 남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물론 이지만 본인이 그걸 자기 것으로, 저주받은 존재라는 것을 자기 것으로 이미 받아들인 거예요. 내세울 게 없는 거예요.
내세울 게 없으니까 기껏 하는 게 뭐냐 하면, 예수님이 왔을 때 예수님에게 감히 말은 못 하고 예수님의 옷, 그것도 옷도 아니에요, 옷 가, 옷단의 제일 끝, 그 끝을 만졌어요. 이 행위는 자신의 모든 뿌리가 이미 다 노출되었고 더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 더 이상 나에게서 뿌리를 찾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이게!
내세울 게 있어야지요. 마치 막달라 마리아가 자신의 모든 향유를 주님께 다 허비하고 쏟듯이 이 여인이 옷 가를 만지자 주님께서 이야기했습니다. “누가 옷에 손을 대었느냐?” 누가 내 옷에 손댔느냐. 제자들은 이 말을 오해해서 ‘누가 건방지게 함부로 거룩하기 짝이 없는 하늘에서 오신 우리 주님을, 누가 감히 더러운 손으로 만졌느냐? 누구야?’ 이런 식으로 나무라는 것 같이 이야기를 했다고 오해했는데 주님은 이렇게 합니다.
‘누가 나를 제대로 알았느냐?’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근원이 옮겼으니까 혈육의 근원, 피 흘리는 근원이 이상하게 말라버려서 더이상 피가 흐르지 않았어요. 이것은 뿌리 교체입니다. 우리 존재의 뿌리가, 형상도 없는, 하나님이 원래 생각했던 인간에게 분명히 있어야 될 하나님의 형상이 이미 없는, 그래서 인간도 아닌 존재가, 새로운 하나님의 형상되시는, 유일하게 형상되시는 예수님이 자신의 뿌리로 옮겨진 거예요. 새로운 뿌리가 생겨버린 거예요. 그래서 이게 피의 근원 피의 뿌리가 말라버린 겁니다.
바로 이 전쟁을 주께서 지금 하신 거예요. 뿌리 교체, 파멸된 근원이 주님 쪽으로 옮겨진 거예요. 그러면 골로새서 1장 16절에, 세상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은 바로 그 뿌리 예수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이 예수님 자신의 기적을 통해서 뿜, 뿜, 계속 발산되고 있었던 거예요. 예수님만이 유일한 뿌리라는 말이에요, 예수님만이.
예수님이 나의 뿌리가 아니고, 내가 예수님 뿌리를 드러내는 하나의 흔적으로서 가담되고 있었던 거예요. 이게 피조물 역할이라는 겁니다. 원래 하나님이 생각하는 피조물 역할은 ‘예수님도 뿌리고 너도 뿌리고’ 그게 아니고, ‘예수님도 천국 살고 너도 천국 살고’ 그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은 뭐냐? ‘천국은 오직 예수님만 살고, 그 예수님 삶을 드러내기 위한 원래 피조물, 하나의 그릇으로서의 용도가 피조물을 창조했던 용도’였던 겁니다.
그런데 마귀는 따로 자기 나름대로의 뿌리, 근원이 없다고 불평하면서 반발한 거예요. 특히 마귀는 굉장히 법률적입니다. 딱딱 정죄하는 걸 좋아해요. 이 말은, 악마는 경쟁적으로 하나님께 어떤 피조물에도 뒤지지 않는 충성과 봉사를 하나님께 다 했다고 자부하고 싶은 거예요. ‘신이시여, 내가 모든 것을 다 했잖아요.’ 그런데 이미 하나님의 마음은 창세 전에 확정되었습니다. “너 말고 내 아들! 너 말고 내 아들!” 주님이 우리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 말고 내 아들!”
자, 이렇게 신약에서 뿌리가 교체됨으로써 주님의 자기 천국 백성을 군사로 모집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신약의 이 전쟁방식이, 구약에 여러 흔적들이 나옵니다. 많은 흔적들이 나오는데 여호수아 6장에 기생 라합이 나오지요. 기생 라합은 여리고 성에 있고요, 그 여리고 성을 누가 포위하느냐? 이스라엘이 포위합니다.
그리고 여리고 성이 마지막 무너질 때의 방법이 나옵니다. 여호수아 6장 20절,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이 장면이에요.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소리 질렀어요. 그리고 나팔 불었어요.
이 나팔이 신약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신약 때까지. 그러면 나팔 불고 소리 질렀는데 그 여리고 성, 그 이중으로 된 성벽이 왜 한꺼번에 그냥 와르르 무너졌는가? 지진이 일어났는가? 지진하고 관계 없어요. 그냥 무너진 거예요.
그것은 눈에 보이는 실체적인 접촉성 없는 방식의 전쟁입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접촉적인 것, 인간들의 어떤 눈에 보이는 칼이나 창이나 활 같은 것은 접촉되는 거예요. 활을 쏠 때 활이 저쪽에 꽂혀야 되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방식은 누군가를 때리려면 주먹이 와서 물리적 힘이 상대방 근육에 압력을 가해줘야 상대방이 아야, 하거든요. 전부 다 접촉성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접촉성으로만 모든 힘이 작동하고 작용한다는 그것, 이것은 악마가 인간에게 이미 그런 지혜를 줬습니다. 왜 그러냐? 악마가 인간에게 그런 지혜를 준 것은, 악마 스스로가 자기의 흔적이 인간의 눈에 띄지 않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래요. 악마는 영적 존재예요. 영적 존재는 인간의 논리 대상에서 제외 배제됩니다.
인간은, 인간의 마음은 누가 줬는가, 그것은 모르고, 그것은 모르겠고 눈에 보이는 인간들의 멱살만 쥐고 싸우는 거예요. 인간들하고만. 그런데 하나님의 전쟁, 이스라엘 전쟁은 비접촉성이에요. 반대로 인간이 인간을 접촉해서 죽이는 그것은 스스로 자멸하는 전쟁입니다.
사사기 7장 12절에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의 모든 사람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중다함 같고 그 약대의 무수함이 해변의 모래가 수다함 같은지라.” 미디안과 아말렉 사람들이 합세해서 이스라엘을 공격했거든요. 13만 5천명이에요. 엄청나게 많아요.
그런데 22절에 보니까 3백 명이 나팔을 불어요. 여기 또 나팔 나와요. 나팔을 붑니다. “삼백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적군으로 동무끼리 칼날로 치게 하시므로.” 그 적들이 어떻게 죽었는가? 어떻게 접촉해서 죽었는가? 같은 인간끼리 서로가 서로를 죽인 거예요.
여리고 성의 함락도 비접촉성이에요. 기생 라합은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기생 라합이 구원받은 것도 비접촉성이었어요. 뭐냐 하면, 그냥 창문가, 창문틀에 정탐꾼이 기생라합의 도움을 받아서 어떻게 탈출했는가, 그 경로를 표시한 붉은 줄, 그게 바로 기생 라합을 살게 한 겁니다.
정탐꾼이 말하기를 “대장님, 여호수아님! 제가요, 이 동네 정탐했는데요. 이렇게 해서 이 길로 해서, 다음은 이리로 해서 이리로 빠져나왔어요.” 그걸 빨간 표식으로 한 것으로 기생 라합이 여리고 성에서 빠져나온 겁니다. 예수님이 “내가 이 땅에 와서 이렇게 해서 죽었고요, 이렇게 해서 부활이라는 구멍을 통해서 빠져나왔어요.” 그 경로가, 기생 라합같은 우리가 유일하게 빠져나온 구멍이에요.
그걸 어떻게 비접촉성으로 표현하느냐? 그것을 물리적으로 표현하면 파동인데요, 나팔 소리, 파동, 비접촉성인 나팔 소리로 이걸 아는 사람은 서로 알게 하는 거예요. 이게 에베소서 5장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정말 이걸 알아듣는지는 모르겠고요, 5장 14절에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이게 바로 영적인 어떤 파동, 파동이 이 말씀을 전하면 죽은 자만 깨어나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죽은 자만! 이게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강림하실 때 죽은 자들이 그 소리를 듣고 일어난다는 거예요. 이게 파동 아니고 뭡니까? 죽은 자도 살려내는 파동, 저는 이걸 부활의 파동이라고 봅니다. 부활의 능력, 성령의 능력, 예수님의 능력.
이게 말씀을 통해서 이미 죽은 자, 예수님 빼놓고 다 죽었어요, 죽은 자에게 나팔 소리가 들리니까, 말씀 소리가 들리니까, 복음이 들리니까, 십자가의 의미가 와 닿으니까 평소에 인간 대 인간, 가지고 돈 자랑하고, 명예 자랑하고, 학식 자랑하고, 논리 자랑하고, 자기 착함 자랑하고, 교회 충성 자랑하고, 봉사 자랑하는 이러한 인간과 인간의 멱살 잡음과 다툼, 이걸 뚫고 ‘나 죽었는데 살았어.’ 싱긋이 웃을 수 있는 ‘나 죽었는데 살았어.’ ‘왜 살았어?’ ‘말씀, 복음, 말씀 속에 있는 그 십자가 복음 듣고 살았어.’라고 싱긋이 웃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제발 접촉성에 같이 여러분이 농락당하지 마세요. 눈에 보이는 것에 농락당하지 마세요. 파동이라 하는 것은 악착같이 살겠다는 인간들을 악착같이 죽여버리는 능력이 있어요. 뭐가? 예수님의 부활이. “나 빼놓고 다 죽었어. 악착같이 살아도 악착같이 내가 죽게 만들겠어.” 그 능력이 그게 바로 말씀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매일같이 원 없이 망하고, 원 없이 실패하고, 원 없이 아플 수 있다는 그런 자유가 있다는 기쁨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면 잠이 안 온다. 잠자려고 하지 마시고 이제부터는 잠 안 오는 사람이 되었다는 기쁨으로 24시간 꼭두새벽까지 눈 벌겋게 뜨고 있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그 자유함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의 모든 진리가 예수님 중심으로 확정되었음을 기쁘게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자꾸 살려고 하니까 모든 것이 막히고, 악마에 농락당하고, 속게 되고, 나 자신을 속이고, 무거운 짐을 떠안게 되는 그런 불상사가 일어났음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