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바울을 버린 이유

아빠와 함께 2023. 3. 26. 18:05

바울을 버린 이유

2023년 3월 26일             본문: 디모데후서 1:15-18

(1: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
(1:16)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1:17)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
(1:18) (원컨대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또 저가 에베소
에서 얼마큼 나를 섬긴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사도 바울을 버린 자들이 많았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사견을 전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성령으로 설교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사도를 떠난 것은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그 세상 분위가 조금도 달라진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사도 바울을 함부로 떠난 것이 아닙니다.

심사숙고 끝에 떠난 겁니다. 떠난 이유는, 그들 본인들에게 있었던 겁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지 않기 위해 하나님을 원했던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제거당하지 않기 위해 하나님에 나아오고자 했던 겁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옳은 선택이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그 어떤 선택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즉 인간들이 예수님을 선택하던, 아니면 예수님 버리던 그들의 운명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도리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오네시보로’라는 사람이 기이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신기할 지경입니다.

예수님 당시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사도 바울 당시에는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버렸습니다. 이제 사도는 디모데는 복음을 디모데에게 인수인계하면 인간의 시대상은 계속 견지되고 있음을 알립니다. 사람들은 그저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로서 자신이 보다 나아지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성경의 말씀에서 나타난 인간의 끝은 그렇지 않습니다. ‘중간’이 없습니다. 알곡 가리지입니다. 인간의 현질서상 도저히 나타날 수 없는 두 극단만 보입니다. 왜 중간이 없을까요? 그것은 가장 많은 숫자의 해당되는 중간계층이 많은 이 현질서체에서 낚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람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셨습니다.(마 4:19)

‘낚는다’는 말은 기존 질서를 버리고 빼내신다는 겁니다. 따라서 결과서 남아 있는 바는, ‘빼내었는냐’ 아니면 ‘버려둠을 당했느냐’ 뿐입니다. 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나 사도 바울을 버릴까요? 그것은 인간들이 해석하는 바가 ‘가라지 해석’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 ‘가라지 해석’은 주님의 원수가 와서 몰래 뿌리둔 겁니다.

인간들이 이 가라지를 뽑아내면 안 되는 이유는, 인간 본인이 ‘나는 가라지가 아닐 것이다’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에게 최종 심판을 맡기게 되면 악마는 자신을 천국 보낼자로 여기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최종 심판은 사람이 아닌 천사에게 맡겨집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마 13:37-40) 만약에 어떤 이가 성도라면, 그 사람은 무엇이 가라지인지 무엇이 알곡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는 방법은 본인 자신부터 ‘제거당하는 식’으로 성경을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사무엘상 3:14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여기에 등장하는 제물이나 예물은 모든 인류를 구원할 용도가 아닙니다.

엘리제사장 집안의 죄악에 대해서는 용서하지 않을 용도의 제물입니다. 이 말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도, 모든 인간을 구원할 용도의 용서의 피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점이 지니고 있는 취지를 제대로 아는 방법은, ‘인간 구원’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제물과 예물, 십자가 자체가 구심점이 되어 이 세상 속으로 밀고 들어오고 경우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제물의 피의 가치를 스스로 지키고 높이기 위해 이 취지에 부합되는 자는 제물의 피 자체가 사람을 가려가며 찾아드는 경우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원 작업에 있어 알곡과 가라지 모두가 겸비되어 말씀의 완성자 앞에서 판정받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설교에서의 판정자는 성령입니다.

이 성령이 하시는 말을 거부하고 기피한다는 겁니다. 곧 아무리 자신이 알곡이 되고 싶어도 그 사람은 가라지입니다. 말씀의 최종 판정자는 인간 본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을 낳은 한나는 아낌없이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녀는 주변으로부터 자식이 없다는 사실로 인해 저주받았다는 평을 받고 산 사람입니다.

여기에 맺힌 마음의 한을 풀기 위해 성전을 찾아 기도했는데, 비로소 그녀는 복과 저주가 자신이 판정내릴 사항이 아님을 압니다. 도리어 그녀 자신은 마땅히 저주의 자리에 가야 함을 압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나쁜짓해서 저주받고 지옥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남 자체가 지옥가고 저주받아 마땅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을 하나님께서 드리고 난 뒤, 한나 가정은 아들 세명과 딸 두명을 부여받습니다. 이는 곧 한나 부부가 이미 ‘죽은 자들’을 자임해야 하는 증거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짜 자신은 사무엘로서 이미 하나님쪽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 곧 저주에서 시작해서 생명에까지 이르는 절차는 인간의 시행하는 절차가 아니라 이 땅에 오실 하나님만이 개척해내신 절차입니다.

이 절차에 저주받아 죽은 자로서 참여하는 자가 그 마지막에 영생이 주어집니다. 따라서 성령께서의 기능이란 성도로 하여금 매사에 자기 자신을 제거하시는 일입니다. 즉 ‘나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을 원하는 바로 그 나’를 제거하는 작업이 성령의 일이니 많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버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사무엘하 16장과 17장에 걸쳐서 아히도벨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다윗과 압살롬 정권에서 정치에 관해 자문해주는 지혜자입니다. 그리고 사무엘하 17:23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아히도벨이 자기 모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 아비 묘에 장사되니라”

그 사람의 끝을 기점은 그 사람의 지난 날을 빠른 속도로 필름을 거꾸로 돌려보세요. 한때 대단하게 인정받고 존경받던 사람입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의 끝은 가라지에서 저주받아야 될 대상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말씀의 완성인 십자가 안에서 미리 알았기에 우리는 다음의 말씀에 감격합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2-3)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구원이 건져주심임을 매일같이 재확인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강-디모데후서 1장 15-18절(바울을 버린 이유)2303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후서 1장 15-18절까지입니다.

디모데후서 1:15-18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원컨대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또 저가 에베소에서 얼마큼 나를 섬긴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오늘 본문은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사도바울을 버린 사람들, 그리고 사도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 모든 사람들이 사도바울에 대해서 아끼지 않을 때, 별 가치 없다고 여길 때 참으로, 진정으로 가치 있고 소중하다고 여겨서 사도가 감옥에 있을 때, 사슬에 매였을 때 돌아봤던 사람, 구체적으로 오네시보로 라는 이름까지 거론하면서 언급을 해주고 있습니다.

사도바울 설교는 성령을 통해서 설교하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그 안에서 설교하신다.’ 이렇게 생각해도 괜찮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설교하는데 모든 사람이 마땅히 감동 받고 회개하고 사도를 버릴 사람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되기 쉽습니다만 오늘 본문에 보니까 우리의 예상 밖으로 벗어납니다.

“아시아에 있는……” 지금의 터키입니다. 지진이 일어난 그 나라에요.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찾는 사람보다 버린 사람이 더 많다, 그런 뜻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와서 설교하는데 하나님이 사람 건질 만한 능력이 없느냐? 사람 하나 감동시켜서 건질 만한 그만한 능력이 하나님께는 없다는 말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건지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몸을 건지지요. 그리스도의 지체를 건집니다. 이 말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버리기로 작심을 하신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네가 왜 나에게 버려져야 되는가?’에 관한 이야기를 내뱉으신 거예요. ‘왜 인간은 구원받지 못하는가?’

달리 말해서 인간들이 나쁜 짓을 많이 하고, 악한 생각을 많이 해서 이 세상에서 힘들게 살고 고생하는 게 아니고 인간으로 태어난 그 자체가 악한 거예요, 인간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인간아, 왜 태어났느냐?’ 인간으로 태어난 그 자체가 그게 악한 겁니다. 새삼스럽게 나쁜 짓 했다고 양심 가책 느끼고 그러지 마세요. 괜히 오버하고 있는 겁니다. 네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악으로 존재하는 거예요. 내가 살겠다는 것은 남한테 피해를 주고 있다는 것과 같은 뜻이에요.

이 말은요, 성경적으로 이렇습니다. “너 살고 싶어?” 하나님이 묻는 거예요. “너 살고 싶어?” “예” “그러면 내가 죽을게. 네가 살고자 하니까 내가 죽잖아.” 이런 뜻이에요. 이 세상이 인간들만의 세상인데 하나님이 이 세상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공동의 세상이 되었어요. ‘하나님처럼,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 이 땅에서 올바르게 사는 것인가, 아니면 기존에 전통적으로 역사적으로 인간이 살아왔던 방식이 옳은 것이냐?’를 두고 주님께서는 해석을 한 겁니다. 누구의 해석이 맞느냐를 두고 해석한 거예요.

그 해석이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알곡이고 하나는 가라지예요. 동일한 밭이에요. 밭이 동일합니다. 똑같은 밭입니다. 똑같은 밭인데 밭 자체가 알곡을 만들고 가라지를 만드는 그러한 개입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씨뿌리는 비유하고 달라요. 씨뿌리는 비유 그다음에 나오는 비유입니다.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제가 말씀드리는 거예요. 앞에 있는 씨뿌리는 비유 말고요. 그 뒤에 나와 있는 비유, 밭 비유입니다. 똑같은 밭이에요. 누가 봐도 똑같은 밭입니다. 누가 봐도 똑같은 세상이에요.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마태복음 13장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밭에 가라지가 생겼습니다.”라고 하니까 28절에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이렇게 이야기해요. 마태복음 13장의 그 말씀, 집주인이 밭에 가보니 가라지가 있는 거예요. 종들이 와서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럴 때 주인이 하는 말이 ‘사람이 잘 때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 뿌렸다.’ 그러니까 세상을 이해할 때 인간들이 주인이 되어서 이해하게 되면 자기중심으로 이해하지만 주님이 세상을 이해하게 되면 가라지의 존재를 항상 확인해요. 그리고 가라지의 존재를 확인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원수가 무슨 짓을 했는지가 같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종들이 와서 “뽑읍시다!” 합니다. “가라지를 뽑으면 되지 않습니까? 가라지 뽑으면 알곡만 남잖아요.” 할 때 주인이 “뽑지 말라” 하는 그 이야기가 중요합니다. 왜 뽑지 말라 했느냐 하면, 인간이 가라지를 뽑아버리면 본인이 가라지라는 사실이 감추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3장에서 “뽑지 말라. 그냥 놔둬! 놔둬라. 네가 가라지일 수 있잖아.” 가라지가 가라지를 뽑는 이 작업도 예수님의 원수가 하는 수작이다, 그 말이지요. 자기가 가라지인 것을 감추는 행동으로서 “가라지 어디 있어? 이단 뽑아야지.”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본인이 이단이면서.

성경에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가라지 뽑는데 인간이 손대지 마라. 인간이 관여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면 누가 하느냐? ‘마지막 때 천사가 와서 한다.’ 천사가 와서 가라지를 뽑아요. 사람은 손대면 안 돼요.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라지냐 알곡이냐’ 그걸 판단할 수 있는 해석능력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봐야 될 것은 ‘세상에 가라지와 알곡이 있다는 것을 감지하면서도 가라지와 알곡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왜 우리한테 없는가?’ 그걸 우리가 찾아봐야 돼요. 그 찾아본 중 하나가 오늘 본문 디모데후서 1장 15절에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 그 사실, 거기에 이름이 나오지요.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

많은 사람이 있는데 유독 사도바울의 기억에 남은 두 사람,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습니다. 있다고 언급을 했어요. 디모데에게 편지로 그걸 이야기하는 이유가 뭐냐? 이런 뜻이에요. 사도바울이 디모데의 등장을 보고 아주 신기하게 여기면서 자기가 죽고 난 뒤에 계속 할 일을 인수인계하는 겁니다.

인수인계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게 된 이유가 뭐냐? 하나님의 원수 마귀 때문에 죽게 된 거지요. 그러면 마귀가 상주하고 있는 이 세상 상황, 정황이 예수님 시대로 종결된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끝날 때까지 유지되고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그 당시 일했던 상태가 지금껏 계속 이어지면서 유지되고 있는 상태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인수인계를 제대로 합니다.

뭐냐 하면, 참 이런 게, 성경을 보면서도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인간이 예수를 믿으나 안 믿으나 달라진 게 없다는 사실이에요. 예수님께서 나를 믿으면 구원시켜 준다 했잖아요. 누구든지 내 이름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 그럴 때 이 이야기를 누구 보고 했느냐 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두고 우리보고 했다고 생각하는데 우리보고 이야기 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우리가 가라지거든요. 우리보고 이야기해버리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따로 모여서 종교를 만드는데 그 종교가 가라지 종교 돼요.

주님의 십자가, 여러분 다 아시지요. 십자가로부터 출발하는 것. 십자가는 뭐냐 하면, 인간들이 하나님을 원하는 이유가, 자기를 지켜달라고 하나님을, 아버지를 원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을 제거하기 위해서 보내신 거예요.

그러니 우리 인간들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가라지 다운 거예요? ‘하나님이여, 가라지인지 알곡인지 일체 저한테는 묻지 마시고요, 그냥 키워주세요. 그냥 살펴주세요. 그냥 도와주세요.’ 죽어서 좋은 데 가게 해달라, 천국 가게 해달라, 이러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해서 희생제물을 드리셨잖아요.” 이렇게 인간들은 이야기해요.

그 말이 과연 우리 인간들이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할 수 있는 소리냐? 그게 아닙니다. 그건 우리 인간들이 해서는 안 될 소리인 증거가 사무엘상 3장 14절에 나옵니다. 사무엘 이야기입니다. 사무엘 시대의 이야기 그것도 어린 사무엘이에요. 어린 사무엘에게 하나님이 세 번 찾아왔습니다.

사무엘이 잠을 잘 때 하나님이 애 잠을 못 자게 했어요. 전립선 비대증도 아니고 자다가 일어나고, 자다가 일어나고, 자다가 하룻밤에 세 번씩 일어나게 만들었어요. 사무엘을 세 번 일어나게 했어요. 좀 자려고 하면 불러대니 야근도 아니고 잔업도 아니고 이건 뭐예요.

어린 사무엘이 어릴 때부터 에봇을 입고 있었어요. 어린 사무엘이 자다가 깨서 하나님이 부를 일은 없고, 아직 신참이기 때문에 엘리제사장이 부른 줄 알고 가서는 “부르셨습니까? 저 자는데 깨우셨잖아요.” 하니까 안 불렀다는 거예요. 목소리가 딱 엘리제사장 목소리인데 안 불렀다는 거예요. 나중에는 알아요. 하나님이 세 번 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때 어린 사무엘에 감당하지 못하는 것, 90이 다 된 연세 많은 엘리제사장, 선배제사장의 운명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런 평가를 내렸습니다.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사무엘상 3장 14절, 이게 오늘날 우리에게도 굉장히 중요해요.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다시 말씀드립니다.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곧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나 영원히 죄용서를 얻지 못하는 죄다. 무슨 죄도 다 십자가 피로 용서된다면서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그거잖아요.

그런데 사무엘상 3장 14절에서는 ‘제물이나 예물로나 어떤 것도 용서받지 못할 죄가 네 선배 엘리 집안의 죄다’ 그리고 13절에 보면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오늘 설교 시작을 통해서 우리가 전제로 던진 것이, 같은 밭에 알곡 있고 또 가라지 있고,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 디모데후서 1장 15-18절에서 사도바울이 성령에 의해서, 사도바울 개인 의견이 아닙니다, 성령에 의해서 설교했는데 딱 두 종류의 인간이 등장해요.

이 두 종류의 인간이라는 말이 굉장히 쉬운 말이지만 얼마나 충격적인 이야기인지를 우리가 알아야 돼요. 뭐냐 하면, 중간이 없습니다. 1등하고 꼴찌밖에 없는 학급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이게 충격입니까? 수학시험을 쳤는데 백 점짜리와 빵점짜리 그 두 가지만 있고 그 나머지 75점이나 25점, 이런 것이 하나도 없어요. 이게 무슨 뜻이에요? 통계학에서 그래프의 중간이 하나도 없어요. 이게 뭡니까?

이게 세상의 인간질서가 아니에요. 신적 질서라 하는데 다가올 새로운 질서체제에 속한 사람이 사도바울이고요, 그 사도바울이 전하는 그 복음에 의해서 통계학적으로 배 불룩하니 중간숫자만 많은, 분포도가 중간만 많은 이 인간의 질서체제와는 전혀 다른 질서체제를 사도바울을 통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양극단만 있는 것, 극단, S극과 N극 두 개만 있고 나머지 하나도 없는 것, 중간이 없는 세계, 저는 충격인데 여러분은 뭐 별로 충격이 안되는 것 같아요. 여러분,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세상과 차이점을 한번 비교해 보라는 말이지요.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극단적이야?” 그런 소리를 여러분이 좀 들어봤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좀 잘해 보려고 애쓰는 것도 있고 좀 미진한 것도 있지 어떻게 끝과 끝이야?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어? 그렇게 살 수가 있어?” 여러분, 그런 이야기 많이 안 들어봤습니까? 성도라고 우기면서 딱 보게 되면, 성도라고 우기면서 살아가는 그 사람이 실패했다는 그 증거는 뭐냐? 새로운 형태의 일상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복음 알고 새로운 형태의 일상이 없어요. 새로운 형태의 일상이 뭡니까, 물으면 새롭게 주께서 마련한 신적인 질서체계를 일상으로 보여주지 못할 때 성도의 삶은 실패한 거예요. 그러면 새로운 신적 질서의 모습은 뭐냐? 제로 아니면 1이죠. 뭐 남극 아니면 북극, 적도 부근에는 아무도 안 살아요. 아무도 없어요. 딱 두 종류, 알곡과 가라지, 좋은 고기 나쁜 고기.

우째 그런 일이 있느냐. 우째 그런 일이 있느냐 하면요, 마태복음 4장 14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런 말씀을 했어요. 네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야 된다. 왜 두 극단이 생겼느냐? 따져보면 굉장히 간단한 문제에요. 그 새로운 신적 질서, 하늘나라지요, 영생의 나라는 이쪽에 살다가 저쪽으로 가는 나라가 아니고요, 누가 낚아줘야 되는 나라에요. 사람낚는 어부니까 누가 낚아주는 거예요.

우르르, ‘가자!’ 어디 뭐 소풍 갑니까? 가자, 하는 나라가 아니고 인간들이 여기서 평생 힘들게 살았다 죽어서 좋은데 가자, 죽~가자, 교회 가서 등록해서 천당 가자, 우르르. 주님의 뜻은 뭐냐? 오지 마라, 에요. 그런 식으로는 오지 말라는 거예요. “내가 낚아줄 때 와.” 네가 밀어붙인다고 될 게 아니거든요.

밀어붙여서 하는 짓은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하는 짓, 맨날 데모해서 하는 짓 많이 보고 있잖아요. 다수의 힘이 진리다, 밀어붙이는 것, 밀어붙이는 그런 것 통하지를 않아요. “우리 성경공부 하자. 성경공부 해서 ‘다 이해했나-이해했다.’ 이런 식으로 천국까지 밀어붙이자.” 주께서는 “오지 마!”

왜? “같은 밭에 성경해석이 가라지의 해석과 알곡의 해석 둘 다 네가 알고 있어?” 이걸 우리한테 묻는 거예요. “아이고, 제가 가라지 일리가 있습니까? 그래서 가라지의 해석까지 제가 알 필요 없지요.” 누구 맘대로 알 필요가 없어요, 누구 맘대로?

여기 사도바울, 성령으로 설교를 하는 사도바울의 설교를 듣고 아시아의 모든 사람이 떠나버렸는데요? 그 사람이 아이큐가 낮아서 떠났습니까? 거기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대표자로 거기에 있는데요?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것. 사도바울이 못생겼어요. 사도바울이 못생겼는데 인물이 별로 좋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인물은 별로인데 말발은 세다.’(고후 10:10) 이런 식으로 성경에 나오는데 사도바울을 왜 버립니까? 버릴만해서 버린 거예요, 버릴만해서. 그 당시 현지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왜 버렸습니까? 버릴만해서 버린 거예요. 우리보다 세상 사는 안목이 짧고 지혜가 모자라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게 아닙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감정이 나빠서 버린 게 아니에요. 이구동성으로 버린 거예요, 예수님을! 사도바울도 그때 상황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당부하는 거예요. 디모데야, 세상해석, 말씀해석 다시 하라는 말이지요. 어디서부터, ‘네가 가라지부터 시작해서 다시 해석하라.’ 건져냄이 유효해야 돼요, 건져냄이. ‘내가 열심히 해서 쳐들어가자.’가 아니라, 건져내지도 않았는데 지가 알아서 가는 것이 아니라 “가만있어. 내가 건질 때까지 가만있어.” 건져냄의가치가 유효하게 살아 있는 그 일상이 바로 성도의 일상입니다.

다시 사무엘상, 이게 너무 중요하거든요. 그 사무엘상 이야기를 다시 하게 되면 ‘너를 위한 어떤 제물이나 어떤 예물이나, 하나님이 준비한 어떤 율법도, 너를 건지기 위한 어떤 것도 너에게 준 적이 없다.’ 그 말이에요. 그렇다면 ‘그건 가라지한테나 해당되고 성도한테는, 다시 말해서 알곡한테는 그래도 죄용서 할 수 있는 제물이나 예물은, 그리고 십자가 피는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가라지 생각이에요. 방금 그렇게 생각하는 게 ‘저주받을 사람은 그런 것은 지옥 가라, 하고 그러면 우리는……’ ‘우리’라는 말은 천국 갈 사람인데 당연히 자기가 천국 갈 사람이라고 우기고 있어요. 아무 근거도 없이 우기고 있어요.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한테는 하나님께서 제물을 준비했지요?’

주께서 “너 누구를 말함인고?” “우리요” “우리가 누군데?” “저 알곡입니다.” 네가 알곡이라는 게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우리가 알곡이라는 게 성경에 나옵니까? 참 주님께서 같잖아서 말이 안 나오는 거예요. 네가 알곡이라는 게, 네가 가라지가 아니고 알곡이라는 게 성경에 어디에 근거해서 그런 게 나옵니까?

성경은 반대에요. 모든 인간은 저주받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무슨 알곡이 있어요? 전부 다 가라지인데요. 하나님의 원수가 뿌려놨어요. 하나님의 원수가 누구냐? 악마입니다. 악마를 다룰 수 있는 것은 천사예요. 우리는 그 악마의 후손들이에요. 아담의 후손이거든요. 성경해석을 알곡 적 해석을 하는 게 아니고 가라지 적 안목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해 가지고 자기가 알곡이라고 우기고 있네요.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피로써 용서받았다고.

여기 어린 사무엘이에요. 이것은 사무엘 개인의 사견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어렸다는 말은, 네 개인의 인생살이 지혜가 안 들어갔다는 뜻이에요. 순수하게 백 프로 하나님의 뜻을 어린 사무엘한테 이야기해서 어른제사장한테, 엘리 집안에게 “너희 집안 저주받았어.”라는 이야기를 세 번째 깨워서 이야기하는 그 대목입니다.

그러면 어린 사무엘에게는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가? 어린 사무엘 배후에 누가 있느냐 하면, 엄마가 있어요. 사무엘상 2장 2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한나를 권고하사 그로 잉태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아, 이게, 이게 얼마나 놀라운 말인지. 한나가 애기를 못 낳아요. 아기를 못 낳는데 아기를 못 낳는 여인에게 아기가 태어납니다. 한나는 비로소 왜 내가 아기를 못 낳는지를 비로소 그때 알아요. 하나님께서 아기를 줄 때, 사무엘을 줄 때 왜 내가 아기를 못 낳아야 되는지를 알아요. 압니다.

그리고 왜 주변에 있는 브닌나라는 여자가 자기를 보고 “너는 아기를 못 낳았으니 저주받은 여자야.”라는 그런 욕설을 들어야 될 이유도 비로소 납득이 가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본인을 안다는 것, 악마 때문에 가려서 본인을 아는 원초적 지점까지 인간을 갈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택한 백성에게 주위에서 어떤 욕설을 듣든지 간에 내가 해낼 수 없는 일, 다시 말해서 내가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되는가, 그 시작점으로 하나님께서 가게 하시는데 그 가는 방법에 내내 내가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그런 말씀해석, 내가 저주받아 마땅한 말씀해석으로 이해되도록 말씀으로 우리를 원래 지점으로 데려가는 거예요.

원래 지점으로 딱 데려갔을 때 거기서 한나는 비로소 사무엘, 이것은 나의 잘남 ‘나는 복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준 아들이 아닌 것을 알아요. 그렇다면 이 저주받은 자, 그 자리, 그 본래 내 자리에서 새로 시작해서 나오는 것이 뭐냐? 나의 해석이 아니라 말씀 자체의 해석이 됩니다.

말씀 자체의 해석 안에 비로소 가라지도 있고 알곡도 새롭게 정립되는 거예요. 말씀 자체에서 알곡과 가라지가 정립되어야 되는데 우리는 성질이 급해서……, 누구처럼, 그 성질 급한 게 저인데요, 성질이 급해서 성경에 알곡과 가라지가 나오니까 ‘가라지, 이건 남의 이야기인데 왜 튀어나와? 알곡은 내 이야기네.’ 자기하고 알곡하고 성급하게 결부를 시키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를 50년 다녀도 아무 소용이 없어요. 날 지켜달라고 하나님 믿는 거예요. ‘하나님, 시키는대로 하겠습니다. 예수 믿으라면 예수 믿고, 성령은 성령대로 받고 다 하겠습니다. 나만 지켜주신다면.’ 하나님 뜻은 이거예요. ‘네가 뭔데 왜 내가 너를 지켜야 되느냐?’ 그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보고 따지지요. ‘하나님, 저 안 지키고 누굴 지킬건데요?’ 나온다 그 말이지요.

사무엘상 3장 14절이 중요한 이유는, 주님의 모든 뜻은 예물과 제물 자체를 지키기 위함이에요.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제사와 예물을 드리는 게 아니고 예물과 제물의 인격화, 예물과 제물이 되시는 그분을 탱크 앞장세워서 천안문에 들어가듯이 그걸 앞장세워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모든 말씀은 예수님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다.(요 5:39) 비켜라 인간들아! 탱크로 밀기 전에 비켜라.”

아, 그럴 때 우리가 흔히 아는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는 의미, 예수를 믿어서 구원 받는다는 의미가 내가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주님이 주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새로이 내 안에 있는 믿음 말고 주께서 주님 자신의 믿음을 레이저광선으로 미리 쏴서 선물로 줘놓고 그 선물로 준 그 믿음을 자기에게로 릴 낚싯줄로 끌어당기는 거예요. 이걸 낚았다, 낚시, 낚는 거예요. 자기 것 집어넣고 자기 것을 회수하는 그 과정이 구원입니다.

그 구원과정에서 예수님 스스로 제물 되신 그 입장에서 성경해석 다시 해보라는 말이지요. 다시 하면, 알곡이 뭐며 가라지가 뭐며, 좋은 고기가 뭐며 나쁜 고기가 뭐며, 예수님이 피 흘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오늘 본문 해석까지 다 풀리는 겁니다. 왜 사도바울이 성령으로 설교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의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버렸습니까? 그게 이상한 게 아니지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반대로 해석해야 될 이유가, 디모데후서 1장 16절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이게 신기하다는 이야기에요. 예수님이 처했던 그 상황이 사도바울에게 계속 유지가 되고 연속되거든요. 지금 사도바울이 놀란 것은 뭐냐? 놀랐다는 말을 디모데서 설교하면서 여러 번 했는데요.

“디모데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네가 왜 예수를 믿어?” 이게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디모데, 네가 왜 예수를 믿게 되었어? 네가 왜?” 똑같은 상황으로 오네시보로가 등장하는 거예요. 정말 오네시보로라는 사람에게만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했을 수도 있어요.

“야, 다른 사람들은 나를 감옥에 집어넣었어. 너 알잖아.” 로마에 있을 때 사도가 사슬에 매였다, 하니까 사도를 감옥에 집어넣은 거지요. “사람들이 나를 감옥에 집어넣었어. 마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듯이 집어넣은 거야. 그런데 왜 너는 나를 돌보는 거야? 도대체 뭐야?” 너 정체를 밝혀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아시아에 있는 어떤 사람이 나를 버린 게 아닙니다.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거예요. 어떤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버린 거예요.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는데 다시 말씀드립니다. 중간은 없어요. 자, 사무엘상 2장으로 다시 와서요. 사무엘상 2장 21절 “여호와께서 한나를 권고하사 그로 잉태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이게 뭐냐 하면, 한나가 낳은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서 가져갔잖아요. 가져간 것은 뭐냐? 한나가 그토록, 진짜 “술 먹었냐?”라고 엘리제사장한테 욕까지 얻어먹으면서 기도했던 그 한나의 기도의 응답은 한나의 소유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누가 그냥 빼앗아 갔느냐 하면, 하나님이 그냥 빼앗아 간 거예요.

기도는 한나가 했는데 기도 응답은 하나님이 가져간 거예요. 그것은 뭘 보여주느냐? 그것은 무슨 절차를 보여주느냐? ‘한나야, 저주받은 네가 어떤 식으로 낚여서 어떤 식으로 구원받는가의 그 절차, 너에게 도달한 하나님의 뜻이 너로부터 출발해서 하나님께로 도착하는 경로에 네가 소속되어 있는 것을 가지고 네가 감사하라.’는 뜻이에요. 이게 오늘 성도의 일상입니다.

빼앗겼다는 것, 내가 주님한테 제거되었다는 것, 그 제거된 증거가 뭐냐? 아들 셋, 딸 둘이에요. 아들 셋 딸 둘. ‘아, 하나님께서 아들 세 명, 딸 둘 줬구나. 야~, 빼앗긴 것은 숫자로 카운트하면 하나인데 하나를 잃고 다섯을 얻었네.’ 이게 아니에요. 이게 아니고 다섯 명 자녀가, 이게 바로 내가 죽었다는 것의 증거용으로 주께서 다섯 명의 자녀를 준 거예요.

어떤 사람은 자녀가 둘 있어요. 구체적으로 그 애들 이름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애가 둘 있다는 말은, ‘진짜 나는 주님한테 빼앗기고 내가 가짜로 이 땅에서 시작해서 가짜로 끝나야 마땅한, 저주받은 가라지는 이런 꼴이 나야 마땅함.’이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애 둘을 준 거예요.

한나의 진짜 아들은 어디 있느냐? 예수 그리스도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아브라함이 예수님 보기를 원했어요. 다시 살아나온 이삭을 보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을 보는 거예요, 예수님을! 이삭이 있다는 것 이것은 뭐냐? 내가 진즉에 죽어야 된다는 것을 증명해 주기 위해서 이삭이라는 아이를 자기한테 남겨준 거예요.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그 작용을 하셔야 될 미래의 메시아를 위해서.

그래서 이 땅에서 살면서 성경해석은 뭐냐 하면, 나를 제거하기 위한, 제거하는 목적으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게 하시는 겁니다. 진짜 나는 벌써 빼돌렸어요. 이걸 아까 기도하실 때 뭐라고 했느냐 하면, 다 이루었다, 하는 겁니다. 이걸 골로새서 3장에 의하면 이렇게 합니다. “너, 너 하늘에 있어.”

이것은 너무 좋은 대목이라서 골로새서 3장 3절을 안 읽어볼 수가 없어요. 골로새서 3장 2절에서 3절까지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너희 생명, “너, 너 하늘에 있어. 너 하늘에 있다고! 이 땅에 있는 것, 이것은 죽은 거야.” 죽은 것이란, 없다는 말이 아니고 죽은 내가 있어 줘야 절차가, 주님이 낚은 절차가 유효하게 유지가 될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아프지 말고 행복하게, 아프지 말고 이 땅에 사세요. 열심히 아프지 말고 행복하게 잘 사세요.

왜냐하면 주님 주신, 죽었다는 그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물이기 때문에 잘 보관을 하셔야 됩니다. 맨날 빌빌 감기 걸려서 그러지 마시고요. 이미 죽은 거예요. 이 땅에 숨 쉬는 것, 이게 죽은 거라니까요. 죽었는데 왜 살아 있습니까? 죽었으니까 살아 있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이 증거가 필요한 거예요. 애 다섯이 필요한 거예요. 내 몸뚱이가 아직도 필요한 거예요.

이게 뭐냐? 이게 알곡이에요. 알곡 상상도 못 했지요. 상상도 못 했어요. 나 살기 위해서 교회 나왔잖아요. 내가 원해서 교회 나왔잖아요. 이것은 엉터리죠. 구약에서 가라지, 가라지 운명 그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게 구약 사무엘 하 16장, 17장에 나옵니다.

그거 하기 전에 오늘 본문에 아시아에서 모든 사람이 사도바울을 버렸다고 되어 있는데 여러분이, 사도바울이 어떤 사람인지 여러분이 좀 아실 필요가 있어요. 이것은 복잡하지 않게 간단하게 성경에 나오는 대로 하면 됩니다. 로마서 1장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택정함을 받았어요. 모든 편지에 다 나와 있으니까요. 갈라디아서 1장에서는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요.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이런 이야기 들으면 “너 뭐야? 하늘에서 뚝 떨어졌어?” 하거든요. “그래, 뚝 떨어졌어. 그래, 나 뚝 떨어진 거야.”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외치는 모든 것은 철학도 아니고, 과학도 아니고, 그런 것들 아니라는 거지요.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기가 자기를 못 버리거든요. 자기를 못 버립니다. 못 버려서 하나님을 찾는 거예요. 자기를 못 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1장에서 사도는 말하기를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이렇게 시작되는 겁니다.

도대체 우리가 알아야될 것은, 왜 사람들이 사도바울을 버렸느냐 그 말입니다. 왜 버렸는가? 이유는 단 한 가지, 사람들이 세상을 해석하고, 구약성경 신약성경을 해석하면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나 어떻게 살릴 거냐?’ 나, 나를 어떻게 버릴 거냐가 아니라, ‘하나님이여 저를 어떻게 제거할 겁니까?’가 아니라 ‘하나님이 저를 어떤 식으로 지켜줄 거예요?’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사도바울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도바울을 과연 지금 버리고 있는지, 아니면 사도바울과 같은 쪽에 있는지 어떻게 파악하는 방법이 없겠습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제가 그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사무엘하 16장에 아히도벨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아히도벨은 다윗 시대에 제갈공명 같은 존재예요.

정치는 어떻게 해야 사람의 마음을 임금에게로 끌어모을 수 있는가에 대한 귀재 같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 아히도벨은 인간의 심리뿐만 아니고 대중들의 집단화된 인간들의 심리까지 파악하는 사람이에요. 개인의 심리뿐만 아니고 집단화된 인간의 심리를 너무나 잘 꿰뚫고 있는 사람이 아히도벨이에요. 그래서 다윗이 아히도벨을 등용한 겁니다.

다 설명하려면 기니까 짧게 하겠습니다. 아히도벨은 너무나 뛰어난 사람이거든요. 압살롬이라는 다윗의 셋째 아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아히도벨이 시키는대로 했어요. 아주 쉽게 하면 이런 겁니다.

“지금 백성들이 임금님 만나서 자기의 어려운 점을 고하기가 힘드니까 당신이 중간에 대행자가 되세요. 그래서 ‘임금님 만나고 싶은 사람 이리 오세요. 내가 다음에 차기 왕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하루만 살 것 아니잖아요. 일단 나에게 오시면 제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백성들에게 어필하는데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허락받지 말고 그냥 알아서 하세요. 당신도 재벌 2세로서 클만큼 컸잖아요.”(삼하 15장) 이렇게 하도록 시킨 거예요.


그렇게 시키는 대로 압살롬이 해보니까 압살롬의 인기가 하늘을 쳐 올라갈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아, 정치는 이렇게 하는구나. 사람의 마음을 끌어야 정치지 백성들 마음과 동떨어지게 하는 것은 정치일 수가 없다.’ 이걸 압살롬은 알았던 거예요. 압살롬이 그걸 아는 동시에 아히도벨의 영향력은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다윗시대의 사람들은 뭘 믿었는가? 하나님을 믿었는가? 아니지요. 다윗을 믿었는가?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를 지켜주는 사람을 믿어요. 왜냐하면 인간의 선택지는 이미 정해져 있어요. ‘나한테 유리한 사람은 나의 친구다.’ 이미 정해져 있어요. ‘나한테 잘해주면 하나님 믿겠다.’ 이미 확정된 겁니다.

구약성경은 그 사실을 알려줘요. 임금이고 뭐고, 압살롬이고 뭐고 관심 없어요. ‘내 억울한 일, 내 한 맺힌 일을 풀어준다면 나는 아낌없이 그 사람을 지도자로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이게 모든 인간의 조직사회, 집단사회에 통하는 유일한 원리입니다. 아히도벨이 그걸 했어요.

그런데 아히도벨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는 이유가 사무엘하 17장 23절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17장 23절 “아히도벨이 자기 모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 아비 묘에 장사되니라.”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단한, 그걸 정치 9단이라 해요. 김종필입니까, 그 사람만 정치 9단 아니에요. 아히도벨이, 이렇게 했던 사람의 끝이 뭐냐?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는 거예요. 자, 내가 가라지인지 내가 알곡인지 아는 방법은, 사무엘하 17장 23절 아히도벨의 경우처럼 목매어 죽은 것부터 시작해서 필름을 반대로 한번 돌려보세요.

목매어 죽었다, 부터 시작해서 영화를 반대로 돌리는 거예요. 휘리리리리리릭, 돌려가게 되면 자기가 목매어 죽기 직전, 한 달 직전, 6개월 직전, 1년 직전에 그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대단한 환호를 받고, 인기가 충천하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했던 그 사람들의 모습을 필름을 거꾸로 돌려서 보라는 겁니다.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 끝은 바로 자살이었습니다. 자, 이제 제가 준비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말씀에 알곡이 있다. 가라지, 쭉정이는 저주받지요. 이 알곡은 어디서 생기는가? 예수님 자신이 탱크 몰 듯이 성경 말씀을 앞장세웁니다. 앞장세우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오되 주께서는 뭘 보느냐? 열 두 제자를 뽑았어요.

예수님이 앞장서서 말씀을 완성하는 그 절차에 의하면 모든 사람을 뽑은 게 아니고 열 두 제자를 따로 선택해서 뽑았습니다. 그 열둘 중 하나에 누가 있느냐? 가룟 유다가 들어 있어요. 이 말은 가룟 유다를 나머지 열 한 제자가 통제하거나 관리할 수 없었다는 겁니다. 그게 열두제자를 뽑았던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숫자로 11대 1이잖아요. 이게 열하나가 하나의 결정을 이기지를 못한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그 가룟 유다 요소가 모든 인간의 각자 개인 속에 다 들어 있어요. 다 들어 있어서 아무리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 믿고, 성만찬하고, 세례받고, 교회가 시키는 대로 다 해도, 다 해도 내 속에 있는 가룟 유다가 내 손으로 삭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삭제되는 방법, 뿌리를 뽑을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인간들은 뭘 하느냐? 중간을 채택해요. 백 점 아니면 빵 점인데 인간들은 뭘 하느냐? 선악 체제가 있잖아요. ‘바쁜데 주일 안 빠지고 꼬박꼬박 교회 나왔잖아요 백점은 아니더라도 80점이나 85점은 주세요. 주기철 목사는 남들이 다 잘했다 하니까 95점 주고 나는 80점은 주셔서 나중에 하늘나라 갔을 때 80점짜리 상 정도는 주세요.’ 이렇게 나오는 것이 인간이에요.

중간은 자기가 만들어요. 없는데, 중간이 없어요. 가라지 아니면 알곡, 알곡 아니면 가라지에요. 그리고 알곡과 가라지를 처리하는 처리전담반이 있어요. 마태복음 13장 그 대목을 읽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3장 37-40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이 말씀을 우리가 해석해서 우리가 실시하지는 않고 예수님 자신이 직접 이 말씀을 가지고 말씀의 원칙대로 실시해 버리는 겁니다. 우리는 중간쯤을 원하는데요.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주님께서는 이 중간쯤을 어떤 식으로 도중에 작살 내고 끊어버리느냐? 이렇게 나와요. 이 대목을 읽어보시면 중간쯤 하겠다는 소리는 쏙 들어갈 거예요.

마태복음 19장 27-30절까지 좀 길지만 제가 빨리 읽겠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제가 천천히 읽은 대목을 여러분이 비교해 보세요. 여기에 중간점수가 하늘나라에서 통하는지. 통하지 않습니다. 영생은 그렇게 만만하게 넣어주시는 게 아니에요. 영생 얻을 자는 없습니다. 누구치고? 인간치고! 우리 속에 가룟 유다 있습니다. 이거 못 뽑아냅니다. 왜 사람들이 사도바울을 버렸습니까? 자기 속에 있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은 그 가룟 유다의 심성이 사도바울에게 똑같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보내신 사람이에요. “내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다. 내가 사람에게 배운것도 아니다.” 왜 그럼 사도바울은 사람들을 좋게 할 수 없었던 가요? 그것은 바로 사도바울은 성령으로 설교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행전 끝부분에 나옵니다. 성령으로 설교 했는데 사람들은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했어요.

주님께서 우리를 말씀을 앞장세워 대할 때는……, 우리는 나름대로 성경해석 했잖아요. 그러니까 ‘주님, 반가워요. 보고 싶었어요. 주님, 사랑했어요. 저를 사랑해주세요.’ 이렇게 나서잖아요. 주님께서는 우리 눈도 안 맞춰요. 우리를 기피하고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구원하는 방법이.

왜냐하면 필름을 거꾸로 돌려버리면 알곡의 특징은 뭐냐? 아까 본 한나처럼 이미 자기가 죽었고, 내 속에서 나의 것이 제거되었고 빠져나갔다는 그 증거로 나머지를 현재 우리가 지니고 살고 있는 거예요, 나머지를.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피가 보여주는 그 죄 용서의 효과를 위해서 뭐가 필요하냐 하면, 제거되어야 될 우리가 필요한 거예요. 세 아들과 두 딸처럼.

징징거리는, 늘 징징거리는 우리가 필요한 거예요. 제거되어야 될 대상으로서 필요한 거예요, 대상으로서. 그래서 사도바울의 그 편지에 보면, 늘 우리와 눈도 마주치지 않는 그런 내용들이 사도바울 편지에 보면 나와 있어요.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이거 누가 하느냐 하면 우리가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맨날 가라지가 마지막에 천사가 와서 또는 성령이 와서 우리를 심판해버리잖아요. 마지막 필름의 모습이 우리에게 이미 증거물로 장착이 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알곡입니다. 왜? 가라지가 누구라는 것을 본인이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가라지와 알곡은 둘 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 들어 있고 이 말씀 속에 들어 있는 이 안목을 같이 공유하고 있는 자가 성령 받은 성도입니다. 이제 이해 되시지요? ‘가라지 알곡 둘 중 어느 것 할래?’가 선택을 우리가 하는 게 아니고 그 자체를 ‘가라지 알곡 둘 다 있어.’라는 그 자체를 우리 안에 담아버리는 거예요.

우리 안에 담아버리면 우리는, 성도는 뭐냐? 가리지의 끝을 알아요. ‘아, 가라지는 심판이구나.’ 그게 십자가 심판에 동참, 주님이 십자가 심판에 우리를 끌어안고 같이 십자가에 죽게 된 이유를 알아요. 우리가 가라지기 때문에 죽어 마땅함을 아는 자가 살아 있는 주님의 성령 받은 사도와 같은, 이 시대의 사도와 같은 주의 복음을 전하는 성도입니다.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 인생을 갈 때 흘깃흘깃 가로질러 가는 사람이 있거든요. 산짐승 아니면 애비로드(Abbey Road)라 해서 비틀즈 앨범 자켓에 보면 횡단보도 건너는 비틀즈 멤버들 모습이 나옵니다. 비틀즈 알아요? 비씨 집안의 밴드 있어요.

왜 횡단보도냐? 다른 사람들은 다 한 쪽 방향으로 가는데 비틀즈 멤버들, 폴 메카트니(Paul McCartney),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링고 스타(Ringo Starr), 존 레논(John Lennon), 이 네 사람이 횡단보도 건너는 모습은, 우리가 보고 있는 방향을 가로질러 가거든요. 주께서 우리 인생을 사는 동안 내 뜻을 잘라버리는 일들이 흘깃흘깃 나타나시거든 성도인줄 아세요. ‘아, 이게 성도구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나의 일을 가로막고, 힐끗힐끗 내 뜻을 좌절시키고 단절시켜서 주님의 십자가로서 나를 보는지, 아니면 내 성공을 위해서 살아가는지 돌아보게 하는 이 성령의 일, 우리는 이 성령의 일을 하시는 성령을 버리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주일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의 흔적  (0) 2023.04.03
뿌리 전쟁  (0) 2023.04.02
주님 것 찾기  (0) 2023.03.19
원칙 안에서  (1) 2023.03.13
미친 인생  (0) 2023.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