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6:7-8 세상 속에서의 성도
하나님의 뜻은 세계 자체가 몽땅 없애려는 겁니다. 그 속에 죄가 만연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노아 홍수 당시의 조치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때는 물로서 심판했지만 지금은 불로서 뜨겁게 소멸시키십니다. 집에 불이 났을 때, 불의 온도 측정이나 불꽃 모습의 아름다움을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킬 생각을 못하지요. 그냥 낭패이지요. 나의 세계에 대한 모든 것들에 대한 낭패입니다. 절망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이 바탕 위에서 하나님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없앰의 대상이 우리 자신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을 그것도 모르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달라”고 외칩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는게 너무 없습니다. 평생을 곡해하면서 삽니다. 마치 살아 가는 것에 무슨 권리나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도리어 반대로 생각해야 합니다. “왜 나는 살 가치도 없는데 여전히 숨을 쉬어야만 하는가?”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멸망하는 세상이 왜 멸망해야 하는지 예수님과 동일한 안목으로 파악하고 이것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이 임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구원을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실 일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즉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이 세상이 꼭, 필히, 반드시, 망해야만 한다는 신호와 징조로 작용하는 겁니다. 멸망 소식은 인간들이 꼭 받아들여야 한다는 소식이 아닙니다. 그냥 통보하는 겁니다. 성도의 입이 스피커 기능을 해서 퍼뜨려지는 겁니다. 교회 생활을 몇 년 했는지는 총괄적으로 불구덩이가 되는 이 상황에 전혀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성도의 존재 의미는 바로 이 심판 소식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심판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인간들이 죽였다’입니다. 선악과를 인류의 조상 아담이 따먹었다’로 모든 인간이 계속 죽어나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따라서 먹는 것, 입는 것으로 놀라워야 합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죽은 시체를 계속 살려내시는 은총에 놀라야 합니다.
-십자가마을 "복음의 메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