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6장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언급했잖아요. 특수한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그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발언은 뭐였습니까? 나와 함께 하는 새로운 공간이 형성되려면 조건이 있지요.
어떤 조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러니까 자신의 무의미를 받아들이라 이 말이죠. 자신이 의미 없다는 것은 사적인 행동 하나하나가 의미 없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천국이나 지옥이나 둘 다 공간 문제지 개인의 역량에 따라서 본인이 선택하거나 본인이 거기서 있겠느냐, 말겠느냐, 빠져나오겠느냐 하는 그런 사적인 영향력은 천국, 지옥을 결정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바르게 사느냐가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어제 주일하교에서 그런 설교했습니다만 내가 찔찔 운다고 죄인이 의인 되는 것 아니에요. 개인적으로 찔찔 짜는 게 전혀 자기의 운명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나 말고 특수한 언약적 관계에 있는 그 한 분에게 일어난 일이에요. 한 분에게 일어난 일이 하나님 앞에 의미가 있다면 그 외에 나는 의미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의미가 없는 거죠.
교회가 예수 안 믿고 예수 믿는 척하고 있는 것은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자기가 자기 믿음의 내용에 발을 못 빼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 개인적인 행위가 내 인생을 결정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자기를 무의미하게 내버려두지 않고 자꾸 내 결정과 내 믿음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사적으로 시작되는 나만의 공간을 우리는 그게 참 편하고 좋은 걸 어떡해, 이러고 있단 말이죠. 사적인 공간을. 그러나 언약은 다윗에게 찾아와서 특수한 공간이에요. 그로 인하여 다윗과 함께 있을 것이냐, 말 것이냐를 결정하는 다윗을 떠나버리는 멀리 가버리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도마가 나옵니다. 도마가 제시한 조건은 이래요. 자신이 보고 믿겠다는 자기의 의미 있는 결정을 본인은 유지하고 싶었던 거예요. 흔히 말해서 불신앙이라 하는데 그런 상투적인 말을 하지 말고 내가 눈으로 보고 결정한 것을 나는 그걸 진리로 인정하겠다. 왜? 내 눈이 의미 있는 눈이고, 내 결정도 나는 의미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게 도마의 사전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도마 앞에 예수님이 등장했잖아요. 예수님이 여기 있네, 이렇게 해서 도마에게 자기 부인되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님 보니까 예수님 부활한 것 맞구나, 이렇게 되면 그거는 세상에서 가짜로 이야기하는 부활의 세계지 내가 부인되는 천국의 세계는 아니에요. 나의 의미와 가치도 살아 있고 그런 조건 하에 주님도 같이 의미 있게 한 통속이 되었다. 이거는 인간들이 구상하고 있는 상상적 세계에요. 그런 천국은 없습니다.
주께서 제시한 것은 뭐였습니까? “나 여기 있는 것 보이지?” “보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 구원 받은 거야.” 주님께서 이렇게 했습니까? 주님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는 방법은 뭐였던 거예요? 나 여기 있잖아, 가 아닙니다. 뭐였습니까? 주님이 받았던 상처 난 자국을 보여주지요. 그 상처 날 때 열두 제자 다 어디 갔습니까? 한 제자는 팔아먹고, 열한 제자 다 어디 갔어요? 아무도 없었지요. 관람했지 그 현장에 같이 십자가 달리고 그런 것 없지요. 아무도 없었습니다.
시편 38편에 11. 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나의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내가 상처 받을 때 그들은 떠났다는 말씀이 누구에게만 그 말씀을 누가 책임진 거예요? 제자들이 책임진 거예요, 예수님만 책임진 거예요? 예수님만 책임진 거예요. 예수님만 그것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 38편 말씀을 왜 인용 못했습니까? 그들이 자질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그들은 다른 공간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다른 공간, 모든 일반인이라면 다 같이 공유하는 공간 있잖아요. 납득되는 공간, 눈에 보이는 공간, 각자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여기 오늘 38편의 내용대로 망자존대하는 그러한 공간, 각자 지 주먹 흔들고 만나서는 동우회 결성하면 되는 공간, 누구도 그걸 탓할 수 없는 공간, 나는 내 인생 산다고 의연히 그리고 뿌듯하게 주장할 수 있는 그것이 용납되고 허락되는 공간 그들의 집단이 뭐냐? 열두 제자 집단이었어요.
말씀에 대해서 하나도 지키지 못하면서 죽어서 주님 따라서 좋은 천국에 가려고 시도하는 그러한 공간에 속한 인간들이 유의미, 가치 있다고 보는 그 세계. 주께서 제시한 것은 상처뿐이었습니다. 내 못 박힌 손을 만져봐라. 그리고 찔린 창 자국을 봐라. 이 말은 쉽게 말해서, “도마야 네 옷 올려봐. 네 손 한 번 내밀어보자. 네 손에 뭐 있냐?” “없나이다.” “네 손에 창 박힌 적 있나?” “없나이다.” “그럼 아니네. 그러면 아닌 거야. 네가 보고 믿겠다는 그 결정은 의미 없는 거야.”
의미 없는 거죠. “도마야 새로 시작하자.” 어디부터 새로 시작하는가? 상처부터 새로 시작하는 겁니다. 도마에게 놀라운 현상은 도마가 복을 받아서 상처 보고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게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내가 너를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한다는. 아마 도마가 도망치면 끝까지 상처 보여줬을 거예요.
상처만 보고 오라. 딴 거 보지 말고, 멀쩡한 네 몸 보지 말고, 거울 앞에 선 네 몸 보지 말고 상처 난, 너한테 난 상처 말고 나한테 난 상처 오직 한 분, 언약을 다 이루신 예수님의 살과 피, 그분의 상처만 바라보고 떠나지 말고 합류하라. 날 버리지 말고 합류하라 이 말이죠. 그러면 그건 하나님의 한 식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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