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하나님 앞에 떨어져 나가는 존재임을 파악하는 자, 그런 자를 로마서 9장 27절에서는 남은 자라고 합니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주님께서는 남은 자만 건지십니다. 오늘 말고 지난 주일날 설교에서 이야기했어요.
예수님께서 풍~덩 하고 구정물에 들어오시면서 그 구정물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 뭐냐 하면 더러운 땟물이 떠오른다고 했지요. 그 더러운 땟물을 건져내시면 그게 구원이에요. 집에서 간장을 담가 보시면 이해가 가는데 그 위에 올라오는 것을 걷어내면 그게 구원이에요. 풍덩하지 않으면 떠오르지 않는 더러운 땟물, 더러운 죄의 물, 그것을 건져서 구원하시는 거예요.
한 분은 들어오고 그렇게 위로 더러운 것이 표출되면서 떠오르고요. 그게 남은 자예요. 이 시대에 어떤 공동체에서 사람을 추방하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건 공동체에 전혀 기여한 바 없고 흔히 말해서 그걸 죄인이라고 하죠. 죄인은 영원히 사회와 격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광주강의에서도 언급했는데 이은해라는 여자가 공범인 한 남자와 함께 보험금 8억 노리고 남편을 고의로 물에 빠뜨리고 건져준다고 하고 안 건져줘서 살인한 사람인데 판사가 판결하기를 너같은 사람들은 너무나 죄가 악랄하기 때문에 이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되어야 한다고 해서 여자는 무기징역이고 남자는 징역 30년을 내렸어요.
악랄한 죄가 이거예요. 우리가 너로 인해 피해를 본다는 겁니다. 그래서 광주강의에서 제가 물었죠. 이은해는 이런 판결을 받았는데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 때 무슨 판결을 받았죠? 무슨 판결을 받았기에 사회에서 격리 정도가 아니고 영원히 죽어 마땅한 판결을 받았습니까? 오늘 이 시간처럼 답변은 제가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너(예수)를 버렸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버렸기 때문에 내가 너(예수)를 버렸다는 겁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자기들은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데 예수님은 자기가 믿는 하나님에게 버림받았다면 오늘 예레미야는 바리새인과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속였다고 이야기해요. 다르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속였다는 이야기이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하나님이 우리를 속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레미야는 구원받는 거예요. 그래서 바리새인은 지옥 가는 겁니다.
한번은 하나님이 우리를 속였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어야 해요. 이것은 나 자신의 본성에 대한 눈치이고 낌새입니다. 내가 뭔가 잘못되어있다는 것에 대한 낌새. 지금 내가 하나님 믿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인정하지만, 은연중 우리는 이것이 나의 일이 되어버린 겁니다. 나의 일로 구원되는 일은 없어요. 다시 말하면 남은 자라 하는 것은 튕겨 나가야 해요.
더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나답지 않은 것은 내가 골라내서 내 바깥에 던져버려요. ‘이 나 같지 않은 거’라고 던져버려요. 주님께서는 내가 싫어서 던져버린 그것을 주워서 주님이 그것을 구원한다고요. 왜 던져버립니까? 내가 나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던져버린 거예요. 나의 동질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나는 늘 착하고, 나는 늘 훌륭하고, 나는 늘 이쁜 것만 생각하고, 아름다운 것만 생각하고, 좋은 것만 생각하는 나, 이런 나에게 나쁜 것은 어울리지 않는 겁니다.
나에게 오래 두면 이것은 내 가치를 손상해. 내 가치를 손상하는 이런 일은 절대로 나에게 일어난 적이 없어. 나는 그런 일을 내가 저주할 거야. 그것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악하다고 여기는 것은 내 쪽에서 쫓아내려고 애쓰는 겁니다. 제가 오후에 기도 제목을 뭐라고 했느냐면 과거는 사라졌으니 잊어버리라고 했지요. 몇 분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여러분, 과거에 잘난 것을 기억합니까, 못난 것을 기억합니까? 잘난 것을 버리고 못난 것만 모읍니까? 아니면 잘난 것만 모으고 못난 것은 내 칩니까? 어느 쪽이세요?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자기를 선한 쪽으로 데려갑니다. 그건 역주행이 아니에요. 정상적인 주행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남은 자가 될 수 없는 겁니다. 스스로는 남은 자가 안 되고 현재 기존의 보수진형, 우리 모습 자체가 보수적이에요. 좌파도 오래 하면 보수가 됩니다.
우리가 보수적이 되고 상투적이 되죠. 상식적이고 기성품이 된 거예요. 한마디로 역주행할 줄을 모르죠. 이 몸은 내 몸을 내가 지키는 방식과 주님이 지키는 방식이 다르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주님께서 많은 여분의 경우를 우리에게 줘요.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됫박에 이렇게 담습니다. 시장가면 밤이나 땅콩이나 대추같은 것을 팔 때 됫박에 달아서 팔잖아요. 팔 때 흘러넘치는 것이 있을 거예요. 그 넘치는 여분의 것, 통속으로 못 들어가고 바깥으로 흘러나가는 거.
이미 건전한 나, 우수한 나, 괜찮은 나, 누구 앞에 내놔도 자랑스러운 나, 그 나에게 우리는 괜찮은 것을 다 담아요. 주님은 그런 나를 몽땅 다 버리는 겁니다. 네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네가 배척한 것을 끌어모아서 새로운 나를 만드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그 바깥에 안목을 가지고 나를 볼 때 내가 괜찮다고 여기는 것에 끼어들지 못하는 나가 진정 나예요.
건전한 나로부터 쫓겨난 나가 진짜 나예요. 그게 남은 자입니다. 남은 자는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의 열심을 행함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직 은혜만 이야기해요. 나에게도 추방된 나, 나에게도 밉상 받은 나, 그 모습이 진짜 하나님께서 찾고자 하는 나의 진실한 내 모습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창세기 6장 6절에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스스로 인간을 만들어놓고 스스로 인간이 죄를 지으니까 하나님께서 쓸어버리겠다고 이야기하셨거든요. 이 말씀에 대해서 노아는 조금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보통 인간들은 뭐냐 하면 ‘만들어놓고 왜 버리느냐’라고 나와요. 현재 이스라엘을 대변하는 것이 예레미야예요. 예레미야도 이스라엘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 이스라엘을 지켜 준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지켜 준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나를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나로 인해 버림받은 돌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그 돌을 지키는 겁니다. 그 주님을 지키는 거예요. 여러분도 자신이 미울 때가 있죠. 우리가 우리 자신이 미워질 때 그 미워지는 그것을 주님은 굉장히 사랑하고 있어요. 이제는 네가 정신을 차리는구나.
내가 나에게서 꼴 보기 싫어서 버린 그 쓰레기를 주님께서는 귀하게 수집하십니다. 병 하나에 십 원씩 받듯이. 우리가 소주 마시고 갖다 버린 소주병같은 그 쓸모없는 나가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 거예요. “너 나랑 같이 세상에서 쫓겨난 인간으로서 남은 자 되자”라고 하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세상에서 쫓겨난 그 예수님을 믿는 것이 믿음이에요.
예수님의 역주행을 믿는 거죠. 그러면 오늘날 성도는 역주행합니다. 세상 사람과 전혀 의사소통되지 않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