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아들
2022년 7월 24일 본문 말씀: 디모데전서 1:1-2
(1: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1: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사도 바울의 아들이 디모데가 아니라 신앙의 자리가 디모데의 아버지가 됩니다. 사도의 자리는 예수님의 명령에 의해서 조성된 것입니다. 즉 디모데를 영적 디모데되게 한 것은 말씀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의 혈육의 자리로서 디모데를 규정할 수가 없습니다.
이점에 있어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성도는 자신의 자리가 자기를 압도하고 능가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성도가 놓여 있는 그 자리는 성도가 자신을 위하여 애쓴 결과가 아닙니다. 성도는 육적 자리는 ‘죽은 자’의 자리입니다. 성도는 자신이 이기지 못한 대상이 누군인지를 압니다.
그것은 죄, 곧 ‘악마’입니다. 이방민족에게 있어 율법없이도 구원이 되는지에 대해서 예루살렘 교회들은 무척이나 당황스럽게 의문스러워 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예루살렘에 회의가 있었는데 그 회의 주요 안건은 율법과 무관한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어떤 식으로 적용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베드로는 이렇게 이방인의 편에서 말합니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행 15:10) 즉 하나님의 율법의 무게에 대해서 이미 유대인의 조상인 이스라엘을 통해서 충분히 밝혀졌다는 겁니다.
그 어느 사람이라도 지킬 수 없는 내용이라는 겁니다. 율법 준수에 구원의 희망을 건 유대인 입장에서는 율법없이 구원받는 이방인들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가 궁금했던 겁니다. 그래서 기껏 타협점으로 내놓은 것이 타인의 평편을 고려한 윤리적 형식의 규정들었습니다.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행 15:20) 하지만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더 근원적으로 나아갑니다. 그것은 인간이란 이미 율법에 의해서 ‘죽은 자’로 밝혀졌다는 겁니다. 율법을 주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살아서 뭘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을 죽은 자로 규정한 그 말씀이 어떤 식으로 완성적으로 활동하느냐가 초점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의 혼인 방식으로 이방인건 유대인건 상관없이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점이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을 통해 언급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롬 7:1-4)
즉 율법은 성도의 새신랑의 효력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것이라는 겁니다. 율법과 인간의 만남을 통해서 성도는 ‘율법에서의 죽음을 통해 그 관계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는 겁니다. 즉 인간은 내부적으로 단순히 죽은 정도가 아니라 죄에 패배한 상태에서 죽은 자라고 규정받는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애초에 죄를 이길 형편이 아니었음을 확인해주기 위해 율법이 주어졌다는 겁니다. 이런 사실은 십자가 사건을 세강 끝까지 반복해서 적용시키겠다는 하나님의 거대한 취지에서 비롯된 겁니다. 요한복음 19:7에 보면,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서 죽으셔야했는지가 나옵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즉 예수님만이 독자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기에 기존의 유대신학, 이스라엘 신학에 입각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론을 거짓된 것으로 들통내게한 겁니다. 이는 모든 인류 중에서 예수님 빼놓고서는 누구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디모데가 ‘신앙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것은 그의 자리가 곧 십자가의 취지가 살아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소설에서 ‘하지 후 한 달’이라는 표현으로 7월 22일을 묘사하듯이, ‘십자가 후 적용되는 사건’으로서 성도의 출현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악이 성도의 육신을 대변합니다.
이런 처지에서 성도는 단순히 몇몇 교양적이지 않는 죄된 행위를 하지 않는 존재가 아니라 아예 죄로 인해 죽은 자가 됩니다. 십자가에 작용으로 움직이는 율법과 모든 말씀은 성도의 내부를 파고듭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는 더욱더 자신의 더 깊은 죄로 인도 받습니다. 그 죄는 다른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내가 존재하는 죄”를 말합니다.
이것은 다음의 성경 구절과 정면으로 충돌됩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 따라서 성도에게 십자가 효과가 적용되면 더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게 됩니다.
그 이유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게 되기 때문입니다.(롬 5:20) 즉 성도의 자아를 꼭지점으로 하여 죄의 원뿔과 의의 원뿔이 뽀족하게 만납니다. 성도의 자아에게 말씀으로 죄의 깊이가 더하면 더할수록, 현실을 둘러싼 의의 현실이 더 넓게 밝혀집니다. 마치 요슬글판과 같습니다.
글씨를 썼다가 윗 셀로로이드판을 들추면 썼던 글씨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처럼, 기입과 말소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말씀을 늘 들어오고 그로 인해 우리도 알지 못한 죄가 더 깊이를 더하면서 그만큼 우리도 몰랐던 용서의 세계가 더 넓게 펼쳐져 있음이 눈에 들어옵니다.
성도는 이처럼 자체적으로 의인됨을 허락되지 않습니다. 오직 십자가 피의 능력으로만 영생을 얻음을 증거하는 증거로서 매일 목숨이 연장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됨의 자리의 발원지 역할만 하게 하옵소서. 더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강-디모데전서 1장 1-2절(신앙의 아들)220717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전서 1장 1-2절입니다.
디모데전서 1:1-2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찌어다.”
여기에 디모데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보통 사람 등장하면 그 사람 신상털기에 나서지요. 디모데가 어떤 사람이냐? 그 신상이 주보 뒤편에 보면 설교 요약에 나옵니다. 위에서 네 번째 줄 “서기 17년경 소아시아 남부 지방 루스드라 출생으로……” 이렇게 시작되지요.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입니다, 트루키예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만, 터키 지방의 “루스드라 출생으로 어린 시절 어머니 유니게와 조모 로이스로부터 십계명과 모세의 율법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게 세상적인 디모데평가에요. 디모데 신상털기 할 때 ‘아, 이런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해서 디모데에 대해서 안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디모데를 평가하는 우리 자신이 평소에 내가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소개할 때 나는 고향이 어디며, 나이가 얼마입니다, 나는 어디서 무엇을 배웠고 무엇을 알고 있습니다, 뭐 이런 식으로 평소에 남들에게 자기를 소개하는 그 방법을 고수했다는 티가 나버린 거예요.
“디모데 그 사람 내가 알지. 성경에 나와 있대.” 이런 식으로 죽죽 나옵니다. 그 뒤에 보면 “이후 바울이 45년~46년에 현재 터키 지방으로 첫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도중 루스드라를 방문했을 때 그의 집에 묵은 것이 연줄이 되어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데모데를 매우 신임해서 두 번째 전도 여행에서 동반하고 세 번째 전도 여행에서도 예루살렘까지 같이 갔습니다. 그 이유는 디모데가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교우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았기 때문이었다.(사도행전 16:2)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간 바울이 체포되어 가이사랴 감옥에서 2년을 보내게 되면서 따로 떨어져서 에베소로 돌아옵니다. 그 뒤에 에베소의 감독이 됩니다.”
그래서, 그래서? 그 뒤에 뭐가 빠져 있습니다. “그렇게 살다 죽었다.” 그렇게 되는 거지요. 디모데가 어떤 사람이냐, 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런 식으로 파악해가지고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은, 우리가 남들에게 나 어디 출신이고, 고향 어디고,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내가 나를 안다고 자부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다른 관점이 필요해요. 사도바울이 터키 지방을 돌아다녔다, 사도바울이 지금의 터키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전도했다, 이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주의 땅을 밟았습니다.” 이게 성경적이에요. 사도바울이 하는 모든 결정과 행동은, 왜 그런가 하면 오늘 본문에 보면 1절에,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소개할 때 나 출신 어디고, 나는 얼마나 배웠고, 이것은 나중 문제에요.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서 내가 사도가 되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명령자가 눈에 안 보이는데요? 눈에 안 보이잖아요.
사도바울을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보면 사도바울을 뭐 사도로 인정했니 그런 이야기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그 당시 사람들이 사도바울을 그렇게 대단한 인물로 보지를 않았습니다. 왜? 자기 살기 바빠가지고, 자기 밥 먹고 살기 바빠서 ‘너는 네 인생이고 나는 내 인생이지,’ 이렇게 이해했다는 말이지요.
우리도 이 사도바울을 보기를 똑같이 봐요. 사도바울이 편지를 남길 때 ‘남겼구나. 사도네. 음, 사도구나. 그런데 내 한 달 수입하고 무슨 관계 있나?’ 마찬가지예요. 현실을 보는데 있어서 사도는 인간들이 파악할 수 있는 현실 그 너머 다른 보이지 않는 차원에 대해서 자기의 뿌리를 거기다가 두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뿌리는 어디입니까? 우리는 지금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어요? 사도가 디모데를 아들로 삼았다는 말은 디모데가 아들을 원했다, 가 아니고 디모데 아버지가 사도바울이라는 뜻이 아니에요. 디모데 아버지는 이 세상에 없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디모데 자신이 내가 이 세상 사람 아니라는 뜻이에요. 이게 사도의 아들이 아니라 신앙의 아들이에요. 이게 신앙의 아들입니다.
기존의 이 세상에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 육적관계로 유지되어 있어요. 육적관계의 특징은 개성이 가능합니다. DAN가 같다 그 말이지요. 생물학적으로 연결이 가능해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그런데 그게 디모데입니까? 그게 신앙의 아들이라는 표현의 전부입니까? 아니지요. 신앙의 아들이라면 지상의 개성이 가능하고 DNA적으로 추적이 가능한 그런 관계 말고 다른 관계로 아들이 아들다워야 돼요. 아들관계로.
그것을 어렵게 이야기해서 “인간을 규정할 때는 그 사람의 관계성으로 규정해야 된다.” 이렇게 압축할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그러한 변화, 그러한 모습으로 사는 것은 이런 세상적인 관계 말고 그 세상적 관계 떼놓고 다른 초월적인, 이 현실 세계 차원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그 사람은 어떤 관련성을 갖고 있었는가를 우리가 파악을 해야 돼요. 그래야 신앙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관계를 이제 파악하지 않으면 디모데를 모르니까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 무슨 뜻인지를 우리가 여기서 알 필요가 있지요. 그 아는 것은 성경 요한복음 19장 7절부터 시작을 하시면 되겠습니다. 요한복음 19장 7절에 보면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체포되어서 빌라도 앞에 설 때 예수님을 고소한 고소거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 사람을 고소해서 사형시켜 달라고 부탁드립니다, 빌라도여!”라고 그 당시 유대인들이 이야기한 거예요. “예수님이 무슨 죄를 지었는가?” 19장 7절에 보니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곧 “저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람을 체포해서 죽이는 것이 합당합니다. 빌라도여, 죽여주옵소서.”
하나님의 아들, 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죽여버려야 될 발언을 한 천하의 죄인으로 간주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과 그 인간 사이에 모든 인류를, 모든 인간을 배제하고 오직 아들이라는 분이 이 땅에 나타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어떤 개인이 독점해서 아버지라고 할 권한이 없다는 것이 유대인들의 주장이에요. 모든 인류의 아버지, 이것은 이방 민족에서 하는 거지요. 하늘 아버지, 하잖아요.
그리고 오직 여호와 율법을 믿는 우리 모든 이스라엘의 아버지, 이건 ‘여호와 아버지’예요. 그 정도까지만 하자, 그것까지만 하자. 특정 인물이 하나님의 아들로 등장해 버리면 이것은, 모든 인간들은요, 특정 인물이 되지 못하는 한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만이 독점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를 제거해야만 본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백성이다, 라고 자부할 수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제거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그 당시 유대인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도발한 거예요. 이거는 해서는 안 될 주장을 해버린 겁니다.
만약에 한국에서 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다른 사람은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사람들은 격분해서 “저 이단, 저 교주 죽여버리자.” 이렇게 나올 거잖아요. “윤석열 대통령님, 부탁합니다. 이 인간 죽여 달라”고 부탁할 거예요. ‘왜 너만 아들이냐?’ 이런 이유로 죽여버릴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으셨는데 그 죽었던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하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만 남기고 예수님은 떠나버렸어요. 사건만 남기고 떠나버렸습니다. 그걸로 사건은 종식된 것으로, 사람들 기억에 끝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추종해서 뭔가 예수님에게 얻을까 싶어서 무슨 새로운 세상이 등장할 걸로 기대했던 제자들은 뭐 예상대로 뿔뿔이 다 헤어졌지요.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그거 뭐 당연한 결과지요. 당연한 결과입니다. 여기서 ‘신앙의 아들’이라는 말은, 이것은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는 관계성을 신앙적인 관계라고 해요. 신앙적인 관계라는 것은 내가 예수 믿는다, 가 아니라 계속해서 주의 명령과 지시가 쏟아지는 파이프로 연결된 관계가 신앙관계에요.
주의 명령이 지시가 계속해서 주어지는 거예요. 그걸 신약성경에서는 성령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주라고 이야기한다는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나오는 그 말이 그 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즉 “내가 이 성령이라는 파이프를 통해서 계속 선물을 줄게.” 선물 주게 되면 특징이 있어요. 선물 주게 되면 이제는 더는 너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아니하는 그런 특징을 보인다는 겁니다. 제가 방금 중요한 이야기를 했어요. 뭐 성경 말씀 다 중요하지만요. 내가 신앙인이냐 아니냐를 어떻게 판정하느냐?
내가 하는 행동에 대해서 내가 잘했나 못했나, 따져버리면 그것은 신앙인이 아닙니다. ‘내가 바르게 살았지. 말씀대로 살았잖아. 그리고 저건 말씀이 아니잖아.’ 자기한테 그렇게 측정하고 평가하고 따지는 것은 그런 신앙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인자체가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 바탕이 내 안에 여기서 자리 잡고 있기때문에 그래요.
잘했든 못했든 우리가, 내가 왜 나에게 따집니까? 왜 내가 나의 관리대상이지요? 언제부터? 그것은 불신앙인들이 하는 거예요. 이게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나와 있습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줄여버리면 신앙인의 특징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는 일들만 자기로부터 계속 터져 나온다는 거예요. 나의 가치와 의미를 챙기지 않는 식의 일들이 계속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해요. “아, 자살하고 싶다. 진짜 자살하고 싶다. 자살이 답이다.” 이러고 있는데 자살하지 말고 죄용서 받으면 돼요. 자살하겠다는 것은 계속 자기가 자기를 측정하고 있는 겁니다. 평가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신앙인은 더 이상 평가할 내가 없어요. 내가 없다고요.
신앙 안에서,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디모데는……” 이렇게 간단히 나오지만 이 신앙이라는 것이 그동안 교회에서 워낙 엉터리로 신앙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성경적인 신앙을 이야기하게 되면 전부 다 멀뚱하니 멀뚱멀뚱, ‘뭐야? 첨 듣는데요?’ 이러고 있다고요. 세상적인 교회에서 신앙은 뭐냐? 쌍시옷 두 개 들어갑니다. 어떤 때는 세 개 들어갑니다. 믿씁니다, 무조건 믿씁니다, 믿씁니다. 그거 신앙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꼭꼭 행주 짜듯이 계속 짜고 있는 거예요. 짜다 짜다 더 짜면 자기 마음에 자기 손톱자국이 남아요. 너무 꽉 쥐어가지고, 너무 붙들어서. 그러니까 그것은 아무리 용을 써도요, 그것은 신앙적으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신앙이라는 것은 더 이상 챙길 내가 나에게 사라졌다. 사라지고 내 자리가 진짜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의 결과로 마련된 자리, 터전 위에서 주께서 나를 신앙 안에서 자녀로 새로 시작하려는 것, 그 모습이에요.
그러면 신앙은 주체가 내가 주체가 아니고 누가 신앙의 주체냐 하면, 우리 예수님이 신앙의 주체가 되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선물로서의 믿음이라 해서 에베소서 2장 5-8절에 나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내가 나의 행함이 아니고 거저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아,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선물로 준 믿음은 그냥 내가 짜내는 내 믿음과 내 안에서 경쟁 관계, 다툼의 관계를 형성합니다. 매일같이. 그 다툼의 관계를 형성하지요.
주님의 믿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보고 “언제 네 믿음 놓을래? 너 언제 네 믿음에서 손 뗄래? 너 자신에서 언제 손 뗄래?” 네가 현재 믿는 믿음은, 네 소망과 사랑은 너 자신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여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 이것은 하나님이 말하는 신앙 아닙니다. 그걸 가지고 오기라고 합니다, 오기. 점잖은 말로 신념이라고 하지요. 신념으로 똘똘 뭉쳐놓고 그걸 남한테 신앙이라고 가짜를 들이대는 짓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디모데가 사도바울의 아들이 아니라 신앙의 아들이 되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사도 자체가 디모데에게 아버지의 모습을 띠기는 띠는데 그 아버지 자신이 디모데전서 1장 1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그러니까 주님의 명령이 사도가 되었고, 그 사도가 디모데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 디모데는 그 명령의 아들로서 이 땅에 새로운 자리를 마련한 겁니다. 그래서 디모데는 어떤 역할이 있는데요, 기능이 있는데 그 기능이 싸움, 영적 싸움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8, 19절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덤터기를 쓴 거예요. 디모데에게 뭔가 덤터기가, 뭔가 큰 하나님의 업무가, 확정된 업무가 그에게 주어진 겁니다. 예언이지요, 예언. 그래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디모데전서에서, 주님께서 디모데에게 신앙의 아들로 삼았던 것은 디모데를 통해서 하나님의 예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 말씀은 선한 싸움, 전쟁을 위함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2절에도 똑같은 말씀이 나오지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유명한 말씀, 디모데후서 3장 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것은 뭐냐 하면, “디모데야, 네가 이 성경 말씀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이미 디모데에게 덧입혀진 그 디모데의 토대, 그 뿌리 자체는 인간의 신앙을 뿌리치고 인간의 소망, 사랑을 뿌리치고 예수님이, 참 아들 되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이 가졌던 그 영적인 자산, 영적인 결과물 그게 영생이거든요.
그 영생을 이미 디모데에게 깔아놓고 “이 영생과 이 구원이 어떤 말씀을 성취했기 때문에 이미 너희에게 선물로 주어질 수밖에 없었는가를 그걸 표를 내는 그런 선한 싸움을 디모데야, 네가 하라. 네 아버지나 사도도 그 일을 하고 있는데 이제는 아버지 하는 일을 그대로 네가 이어받아서 너도 이러한 선한 싸움을 하라.”는 겁니다.
이미 주어진 영생이 그 하나님의 어떤 말씀말씀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는가, 그 증인으로서 살라는 뜻이에요. 그 근거가 뭐냐? 디모데 아버지, 영적 아버지 사도바울이 이미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움직이는 사도기 때문에 그래요.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명령.
그러나 사도바울은 눈에 보이지요. 사도바울 위에 보이지 않는 영역이 여분으로, 추가적으로 따로 있는 겁니다. 그걸 자르지 마세요. ‘아, 사도바울에게 많이 배웠다.’ 그러지 마세요. 사도바울에게 배운 게 아니에요. 누가 누구를 가르칠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을 명령하고 지시했던 그 보이지 않는 주님이 사도바울을 다루었던 똑같은 방식으로 디모데를 다루는데 그게 “말씀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라.” 그런 거지요.
말씀 지켜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이미 영생 얻고 구원받은 사람에서 이 영생, 구원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로서 다 이루었는가를 그걸 증거 하라는 겁니다. 아까 제가 십자가 사건만 남기고 떠났다고 이야기했는데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보통 소설에서 이런 말이 있거든요. 오늘은 7월 22일……, 이렇게 시작해서 어떤 주인공이 나오고, 등장인물 나오고, 그렇게 쓸 수도 있지만 소설은 어떤 주제가 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씁니다. “하지 이후 한 달 후” 이렇게 하지 이후 한 달, 하지가 6월 20일, 그 한 달 후가 7월 20일, 하지 이후에 한 달, 외국 유명한 소설에 그 대목이 나와요. 그러면 지금 7월 20일 되었더라도 하지의 취지는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 디모데가 보여줘야 되고 디모데 있는 자리는 뭐냐 하면, 십자가 이후에 발생 된 낯선 현상들에 대해서 디모데는 자기 아버지 있더라도 그 아버지가 아니고 디모데를 디모데 되게 하는 것은 영적 아버지 사도바울이 새사람 되게 한 그 바탕이 아들 되게 하는 거예요.
그게 사도로 하여금 사도바울 된 바탕은 바로 십자가 복음입니다. 사도는 모든 성경해석을 십자가로부터 스타트, 출발시켜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요잇 땅! 거기서부터 요잇 땅, 되는 거예요. 시작.
십자가 위의 댐이라면 댐 그 둑을 터트려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아래쪽에 십자가 피의 효과가 죽 흘러가면서 이 모든 성경해석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다.’ 그것으로 완전히 발라버리지요. 뒤덮어 버립니다. 왜?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을 정확하게 확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거든요. 십자가 사건입니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 그게 바로 예수님께서 다 보여주신 거예요. 그 사건으로 아주 발라 버리지요. 그렇다면 이 사도바울이 디모데를 만나면서 우리가 다시 이점을 사도행전을 다시 한번 새롭게 볼 필요가있어요.
제가 아까 언급했지요.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인간의 땅을 밟은 것이 아니고 신의 땅을 밟았다. 그런데 사도행전 보면서 지명 외우고, 몇 년도에 거기 갔다, 그걸로 사도행전 이해하면 되는 줄로 알고 있어요. 전혀 사도행전 이해 못 하는 겁니다. 신의 땅을 밟고 하나님의 땅을 밟았는데 뭐 인간의 땅 위치가 어디고, 그거 해가지고는 안 되지요. 전혀 연결될 수가 없지요.
사도행전을 다는 할 수 없지만 핵심 부분을 제가 따내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회의가 일어났는데 그때 베드로가 뭐라고 이야기했느냐 하면, 15장 10절에 이런 말이 나와요.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이방인들이 성령 받아서 구원되었다’ 하니까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반대하고 나선 겁니다. “율법이 개입된 취지가 없잖아. 예수 믿는 건 좋은데 예수 믿고 난 뒤에 율법 지켜야지.” 이렇게 나온 것이 예루살렘 쪽에서의 주장이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베드로가 하는 말이, “그건 조상들도 짊어지기 힘들어서 빠개져 버린 그 멍에를 우리도 율법 못 지키는 그것을 이방인에게 짐을 지우냐, 이 사람들아!”라고 베드로가 대들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예루살렘 쪽에서는 “그러면 율법을 준 취지가 없잖아, 취지가! 이게 날아가 버렸잖아. 그러면 구약성경 읽지 말자는 이야기야? 구약성경 모르자는 이야기야? 구약성경 버리자는 이야기야?” 그 때는 구약성경 아니지요, 모세오경이지요, “모세오경 이거 왜 주셨는데? 하나님께서 모세 불러다 이거 왜 주셨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베드로도 그때는 잘 몰랐어요.
그래서 타협하고 협상한 게 뭐냐 하면 이거예요. 사도행전 15장 19-20절에 보면 야고보가,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율법 가지고 따지지 말고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이게 협상안이었습니다.
약간 이쪽도 양보하고 네 쪽도 양보해서 “그래, 전적으로 율법 버리고 그냥 개처럼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적어도 기본적으로는 이 정도까지는 지켜주는 것이 인간적으로 도리 아니냐.” 해서 협상안 제시한 것이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이 정도로 협상 본 거예요.
그런데 여기 현장에 사도바울은 없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났다.” 여러분, 차이점 무슨 차이점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살아 있는 인간이 율법은 너무 많아서 못 지키니까 그냥 우상, 더러운 것과 음행하는 것과 목매어 죽은 것과 피를 멀리하는 것, 이 정도까지는 이 육신으로 지켜주면서 예수님을 겸하여 믿으면 얼추 구원되지 않겠느냐, 이게 협상안이라면 사도바울은 “네가 살았냐?” 이걸 묻는 거예요. “너 죽었잖아. 죽은 자가 뭘 협상을 하고 뭘 지켜?”
사람들에게는 베드로, 야고보의 이런 주장, 이런 협상안이 더 확 다가옵니다. 왜? 무슨 법을 지킴으로서, 양심을 지킴으로서 아직도 자기 가치가 유효하다는 것을, 내가 그만큼 평생 동안 노력한 것이 유효하게 의미 있게 있다는 것이 흐뭇하거든요. ‘역시 내가 열심히 한 것이 보람 있구나.’ 이런 식이라고요.
그러나 사도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절대로 그런 이야기 한 적이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율법을 준 이유가 우리를 죽이라고 이야기했다는 거예요. 우리를 죽이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우리가 죽은 자라는 것을 언급하는 겁니다. 그냥 병들어 죽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네 안에 있는 악이 너를 이겨버렸다는 거예요. 로마서 7장에서.
로마서 7장 그 대목을 읽고 싶은데 읽으면 또 잠이 올까 싶어서 잠오는 것 더욱더 잠 올까 싶어 겁이 나서 말을 못 하겠어요. 율법이 오게 되면 누가 이긴 것이 확인되느냐 하면, 내가 율법을 지킨 내가 이긴 것이 아니고 내가 유의미, 의미 있는 존재가아니라 악이 나를 이미 나를 장악하고 있다는 이 사실이 폭로가 된다는 겁니다.
그 악이 있다는 것은요, 우리가 숨끊어져 죽었다는 말보다 더 센말이에요. 그게 아니고, ‘평생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그게 아니고 너는 악에서 못 벗어난다는 이야기에요. 사나 죽으나 악에서 못 벗어나는 거예요. 계속 악이 우리를 승리했기 때문에 그 악이 승리한 증거 중 하나가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겁니다. 그게 악의 혀에서 나온 거예요. 내 속의 악에서 나온 거예요.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좋으냐?” “좋아” “그거 누구 위함이지?” “사랑의 하나님이 날 위해서 했단다.” “그러니까 너 위함이 아직도 네 안에 생생하게 살아 있잖아.” 너 위함, 교회 다니고 충성 봉사한 게 전부 다 나 좋으라고 하는 짓이에요. 나 좋으라고요.
흔히 교회에서 말하는 신자는 ‘내가 옳은 선택을 해서 나는 이제 천당 가게 되었다.’ 그 자랑질하는 게 교인들로 보여주는 악이라면 불신자들의 악은 뭐냐 하면, 내가 지옥 가더라도 지옥 가면서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반항하는 그 순진한 나의 반항심을 끝까지 내가 목격하고 즐기고 싶은 거예요.
이게 불신자들의 쾌(快)입니다, 쾌. 쾌라는 것은 쾌락이라, 마지막 즐거움은 신에 대해서 아니오, 라고 할 수 있는 나의 자율성과 자유를 내가 만끽하는 것, 이게 인간이 맛볼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은 신에게 도발하는 이 자유를 내가 즐기는 거예요. 심지어 씩씩하게 지옥 불에 들어가는 내 모습에 내가 찬양하고 싶은 겁니다.
이게 불신자들이에요. 끝까지 하나님께 대드는 이 대단한 나, 그 나를 스스로 내가 증명하는 데의 우쭐댐이 있어요. ‘신? 하나님? 네까짓 게 뭔데?’ 인간들은 왜 하나님께 대들기를 욕망할까요, 하나님께 반항하기를 욕망할까요? 인간은 자기 맘이 자기 맘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마음 아닙니다. 아버지께는 효도하면서 하나님께는 대드는 그것, 그 욕망, 아버지에게 효도하는 욕망보다 하나님께 대드는 욕망이 더 나에게 쾌감을 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잔다르크가 어릴 때 신부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자기 어머니가 영국군에게 죽으니까 잔다르크가 화가 나가지고 장례식 마치고 신부한테 대들었습니다. “신부님, 왜 하나님은 내 엄마를 데려갑니까?” 신부가 말을 해서 뭐라 달래야 되지 않습니까? 신부가 하는 말이 “그것은 내가 답변할 것은 아니고 네가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네가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러니까 그 애가 하는 말이 “하나님과 함께 있으려면 어떻게 합니까?” 신부가 하는 말이 “미사 때 예수의 피와 예수의 떡을 미사 때 먹듯이 하나님의 그 살과 피를 먹으면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했거든요. 그 이야기를 듣고 소녀가 밤중에 몰래 집에서 먼 성당까지 갔어요.
성당 제단에 가니까 성찬식 하려고 포도주를 모아놓은 그릇이 있어요. 그걸 한 사발 들이킵니다. 왜? 하나님과 함께 있고 싶어서. 그 욕망, 그게 바로 악이에요. 그게 악마의 모습입니다. 왜 들이킬까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는 게 아니고 내가 하나님과 함께 있고 싶어서 그래요, 내가. 내가, 내가 제거되는 게 아니라 나 잘되도록 하나님을 그냥 내 편으로 끌어당기고 싶은 거예요.
비록 우리가 철딱서니 없이 그런 일을 하지는 않지만 나중에 어른이 되어도 마찬가지예요. 그 포도주를 한 사발 들이킨다는 것은 양적으로 작은 양보다 많은 양이 하나님과 함께 있는데 유리하다는 그런 논리거든요. 그게 그대로 한국교회에 기도 두 시간보다 네 시간, 밥 먹고 하는 기도보다 금식하는 기도, 혼자 기도하는 것보다 여럿이 합해서 기도하는 것, 다 이것이 1보다는 2, 3이 낫다는 거예요. 양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어서 그것이 나의 구원에 도움이 되도록 시도하는 그 더러운 버릇, 그게 악마의 버릇입니다. 그게 오늘날 한국교회를 그렇게 만들었어요. 전부 다 자기를 위해서예요. 그러니까 자기가 보기에 좀 나쁜 짓 했으면 막 가슴을 치면서 회개하나이다, 이 짓 왜 하는 겁니까? 나쁜 짓 하면 내가 지옥 가면 내가 손해 본다는 생각 때문에 이 짓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천국에 대한, 신앙인, 신앙 안에서의 아들의 증거입니까?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신앙인 아들의 증거는 더이상 나의 인생에 대해서 신경 쓰지 말라, 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만 아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와서 내가 끄집어낸 내 소소한 목적을 전부 다 소멸시키고 그걸 묵살시켜 버립니다. 나의 간절한 기도를 무색하게 만들어요.
그래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당당함,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당당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자체적으로 내가 의인될 수 있는 그런 것을 주께서는 애당초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내 행함으로 의인 되는 어떠한 방식을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남겨두지 않음에 대해서 감사합시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 대목은 오늘 제가 읽어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아서 읽어봅니다. 7장 1-4절까지요. 기니까 후딱 빨리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죽음, 자, 죽음을 당했다는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네 안에 네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너를 대표해서 악이 살아 있고, 악마가 살아 있고, 괴물이 살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너를 죽은 자로 보는 그 안목을 네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그 말입니다.
이것은 뭐냐? “독자적인 행위에 대해서 일체 너한테 입 다물고 묻지 않을게. 죽은 자가 죽은 자로 행동하고 율법의 죄인이 죄인으로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너한테 뭘 더 물어? 다만 네 남편 데려와. 네 남편 데려와!”
남편이 누구냐? 성령님이에요. 로마서 7장 1-4절에서 성령이에요. “네 남편 데려와.” 네가 너한테 지적을 받고 네 양심의 지적을 받는다 할지라도 이미 죽은 자기 때문에 내가 음부가 되지 아니한다는 거예요. 율법 위반자가 되지 아니한다는 겁니다.
그런 내용이 이 로마서에 있어요. 베드로같이 양보하고 타협해서 우상 섬기는 것 어쩌고, 그것 아니에요. 뭐 음행하는 이런 것으로 협상할 문제가 아니고 아예 우리를 죽은 자로 본다니까요. 이거 나 혼자 기뻐하고 있나요?
로마서 8장 9절에 보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네가 성령을 남편으로 간주하지 않으면 그리스도 사람이 아니라 그 말입니다. “네가 성령을 남편으로 간주하지 않으면 누가 네 남편이냐? 네 안에, 안에 있는 법이라는 것이 네 남편으로 자리 잡아가지고 계속해서 너를 추궁하게 되는데 네가 그걸 감당할 수 있겠어? 네가 그거 버틸 수 있겠어?”라고 묻는 겁니다.
남편이 결혼을 하면서 여러 가지 힘든 일이 있지만 그 힘든 일 중에서 남편이 말은 안 하지만 남편들 마다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는 제일 힘든 일이 뭐냐 하면, 마누라의 잔소리라는 거예요. 물론 잔소리 할 때는 아직 살아 있으니 좋은 날이지만 그래서 마누라의 그 힘든 잔소리를 들을 때 대책은 1번과 2번밖에 없어요.
1번은 뭐냐 하면, 참고 견딘다. 2번, 죽기를 바란다. 둘 중 하나밖에 없어요. 보통은 1번이에요. 참고 견디지요. 그 짓을 언제까지 하려고요? 참고 견디는 것. 3번으로 하나 알려드립니다. 내가 죽는다. 내가 차라리 잔소리 듣느니, 귀에서 피나느니 차라리 내가 자살하는 게 낫다.
3번, 그 3번이 바로 로마서 7장입니다. 차라리 죽어서 다른 사람하고 결혼하는 게 낫다. 그게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네가 죽었다는 이 말을 사도바울 전체 편지에서 다른 표현으로 이야기해요. 그게 뭐냐 하면, 네가 어두움에 속했다고 이야기해요. 네가 어두움에 속했다.
그것까지는 시간관계상 다 못 하지만 에베소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네가 어두움에 속하는데 왜 네가 어두우냐? 네가 죽었기 때문에 어둡다는 것이에요. 에베소서 5장 14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주님께서는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합니다. 그게 사도행전에 보면 나와요. 사도행전 설교에 나와요. “이 죽은 자들아, 이 말씀을 듣고 살아나라.” 그런데 이게 인간적으로 모순됩니다. 왜? 죽은 자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귀, 코, 눈, 다 막혔기 때문에 살 수가 없어요.
이 모순을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 모순을 어떻게 뚫고 나타날 수 있느냐? 사도행전 13장 48절에 사도행전에서 사도의 설교가운데서 나옵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여기에 작정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내가 하는 것은 인간들이 해석하는 이 현실, 인간 중심으로 해석하는 이 현실 말고 이 현실에서는 인간들이 측정할 수 없는 다른 여분의 차원이 있는데 그 여분의 차원은 영생주기로 작정 된 것, 다른 말로 하면 허락된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영생주기로 허락된 자는 다 믿더라. 따라서 사도가 설교를 잘한다고 해서 너희들이 구원받은 게 아니고 내 안에 주님의 지시가 있는데 이 지시를 지시대로 도착해야 될 그 사람, 맘속에 도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예요. 이 사람들이 도착을 해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도착을 해버리면 하나님의 말씀이 도착한 그 순간부터 이 세상이 내가 알던 범위의 세상보다 더 넓은 영적 세상까지 그 범위가 넓혀집니다.
뾰족한 두 원뿔이 자아 중심으로 만나게 되면 우리 내부의 죄가 더 깊이깊이, 죄가 더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바깥에 하나님의 의의 나라가 그 의가 얼마나 풍성하며 얼마나 대단한지를 더 넓게넓게 우리가 파악이 되는 거예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이 쪽으로 쌍둥이처럼 넘쳐나는 겁니다.(롬 5:20)
죄가 더한 곳에 주께서 우리를 죄를 짓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그 용서, 자살할 필요 없어요, 용서받으면 돼요, 그 용서하심이 얼마나 내 죄를 거뜬히 덮고 있는 은혜가 이만큼 현실로 이 안에 꽉 차 있다는 것을, 영생주기로 작정한 자는 다 그걸 받아들이게 되어 있어요. 다 믿더라. 신앙의 자리가 마련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도의 말씀은 우리가 멈출 수 없는, 이러면 내가 죄인 되는 데 여기서 멈춰야 되겠다, 멈춰야 되겠다, 를 더 뚫고 들어와요. 더, 더 뚫고 들어가요. 더 뚫고 들어간다고요. 그러면, 더 뚫고 나오면 내가 어둡구나, 내 마음이 참으로 어둡구나, 개 네 마리 키운다고 이 어두움이 밝아지는 게 아니거든요.
고양이를 키우든 뭘 키우든 내가 아무리 이 우울증을 벗어나고 내가 이 힘든 내 인생을 극복하려고 난을 치고 돈을 모으고 골프 치고 백날 해도 이 어두움이 더 어둡지 않게 나 자체적으로 방어를 하니까 주님이 준비한 죄 용서의 그 범주, 그 엄청난 분량을 내가 맛을 못 보는 거예요. 자기 단도리를 할 이유가 없어요.
이런 노래 가사가 나옵니다.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새벽을 찾아 떠난다~” 논산훈련소 간 사람들은 다 아는 노래에요.
종이 울리고 닭이 울어도 내 눈에는 오직 밤이었소
우리가 처음 만난 그때는 차가운 새벽이었소
주님 맘속에 여명 있음을 나는 느낄 수 있었소
오 주여 당신께 감사합니다 실로암 내게 주심은
나에게 영원한 사랑 속에서 떠나지 않게 하소서
멋도 모르고 신병들 이 노래 불러 제끼는데 이게 로마서 9장 7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날 때부터 소경 된 자가 깜깜한 어둠 속의 세계, 뭐 우상을 멀리하고 음행을 멀리하고 뭘 어떻게 하고, 아이고, 그래서 구원될 것 같으면요, 아예 세계 자체가 깜깜했어요. ‘그 깜깜함에 나름의 대처할 만큼 나는 양심은 괜찮다. 나는 소경이지만 나쁜 짓은 안 했잖아.’ 자기 나름대로 자기 자신을 버티는 거예요. 자기 착함, 자기 의로움.
그런데 그 주님이 우리가 처음 만난 그 때에 주님이 처음 만나러 왔을 때에 비로소 그는 여명을 본 거예요. 그래서 그게 여명의 눈동자에요. 여명을 딱 보고 난 뒤에 비로소 새벽을 맞이하고 난 뒤에 다시 자기를 보니까 주님 앞에 영생을 허락받고 난 뒤에 다시 자기를 보니까 자기는 깜깜한 어둠이었다는 사실을 환희와 기쁨으로 감격하여 받아들이기 때문에 더는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지요. 더는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는 거예요. 무슨 짓을 해봐야 그것은 죄기 때문에 자기 죄에 대해서 그렇게 신경쓰지도 않지요.
그래서 여기서 뭐냐 하면, 오직, “오 주여! 당신께만 감사합니다. 당신께만 감사합니다.” 이게 바로 사도의 삶이었고 디모데의 삶이었습니다. 나로 하여금 어두운 죄인 되게 하신 그 은혜에 감사하는 거예요. 내 잘난 체 하는 맛에 살던 나를 천하의 죄인으로 만든 그 은혜에 감사하는 거예요.
그게 이미 두 발이 여명으로 넘어왔어요. 여명이 와서 그 새벽의 눈동자처럼 여명으로 벌써 왔어요. 빛으로 오니까 이제는 비로소 로마서 7장이 보이고, 로마서 8장 9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왜 사도가 그렇게 했는지 비로소 그 뜻을 알게 된 겁니다.
예수를 위해서 더는 예수의 대신 죽으심을 믿는 자는 ‘하지 끝나고 한 달’이에요. 십자가 사건 터지고 난 뒤에 오늘날 우리입니다. 십자가의 그 취지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오늘날, “그래서 목사님 우리보고 뭐 어떻게 살라 이 말입니까?” 물으신다면 제가 끝으로 이 예를 드리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옛날 국민학교, 그때는 초등학교는 없었고요, 국민학교때 문방구에서 뭘 파느냐 하면, 글자를 위에다 시커멓게 쓰고 얇은 셀룰로이드판을 들추면 글자가 없어져요. 또 거기에 글씨를 쓰면 써지고 그게 있어요.
그걸 요술글판이라 해요. 글이 요술처럼 써진다고 요술 글판인데 그게 윗판은 셀룰로이드판이고 아랫판은 얇은 파라핀으로 된 반투명 종이가 깔려 있습니다. 이게 뭐냐? 기입과 말소가 계속해서 주기적으로 반복이 돼요.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아들 되게 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 사건의 취지를 계속해서 이어줘야 되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을 여기에 기입을 해요.
기입을 하면 밑판에 있는 종이, 우리의 육신에다, 위에서는 이미 하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했는데 우리 육신은 내가 열심히 해야 되지 않느냐, 하는 쪽으로 이게 자꾸 위에 있는 모든 은혜가 돌아서면 다 말소가 돼요. 돌아서지 말지. 복음 듣고 돌아서면 다 말소가 된다고요. 종이 들추면 글자 다 없어지는 것처럼.
그래서 주님께서 계속해서 반복해서 십자가 사건을 보여주는데 그게 아들 됨의 삶의 리듬입니다. 그 리듬을 위해서 하루하루가 우리 생명이 연장이 돼요. 어젯밤에 주무실 때 오늘 아침에 눈 뜬다는 보장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깨어나서 이렇게 만날 수 있잖아요. 주께서 연장시켜 주는데 그게 리듬이에요. 또 죄 지으라고요. 또 말씀 듣고 복음 듣고, 돌아서서 또 죄짓고 복음 듣고 또 죄짓고……, 그렇게 해서 나를 위한 구원은 아예 없었다는 사실, 오직 십자가 사건의 효과와 효력을 계속해서 우리를 통해서 전달전달하고 나타내기 위해서 신앙의 아들로 디모데를 삼은 겁니다. 그 안에서 말씀만, 다 이루어진 말씀만 계속 살아 있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피는 아스피린이 아닙니다. 내가 알아서 믿고 내 한 알 오르륵, 해서 먹고 그런 게 아니고 그냥 내가 알아서 예수 피 믿어야겠다, 가 아니라 그 삶 자체가 예수님의 피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죄인을 더욱 죄인 되게 하는 그 기능 자체가 요술 글판의 기능으로서 특이성을 가지고 성도를 이 땅에 살게 하는 겁니다.
성도만 알아요. 우리가, 이 땅에서 우리가 시도하는 모든 것은 결국은 다 헛방이라는 사실을 성도는 압니다. 그러면서도 돌아서면 또 우리의 육신은 무슨 성과를 내야 되겠다고, 나도 사람답게 살아야 되겠다고 또 성과를 내는 시도를 하지요.
그럴 때마다 말씀은 “네가 왜 그렇게 사느냐?”고 육신을 겨냥해서 또 말씀이 우리에게 파고 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어요. 우리가 지킬 때만 살아 있는 게 아니고 늘 성령은 살아 있어서 이미 주께서 주신 그 영생, 예수님의 성령 안에서 주님의 생명이, 예수님이 이 땅에 살 때 얼마나 많은 시련을 당했는지를, 얼마나 고난을 당했는지를 우리의 남아 있는 하나님의 자녀를 통해서 예수님의 시련과 억울함과 그 오해를 우리의 삶을 통해서 되풀이하도록 우리를 하나님의 친아들로 삼았던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이 살아 있지 우리가 살아 있지 않은데 우리는 반대로 내가 살아 있고 말씀을 내가 지킬 때만 내가 살아있다고 오해했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주님의 계심을 우리가 시시하게 보지 말고 우리의 뿌리인 것을 이제는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