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둘째 아담 예수님

아빠와 함께 2022. 7. 21. 21:44

예언은 인간이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언 하나하나가 기적에 해당됩니다. 만약에 우리 안에 예언이 들어오고 하나님의 계시가 들어왔다면 내가 일구어놓은 내 인생 그것과 주님이 친히 일구어나가는 예언의 인생과 어떤 차이성을 나타내고 있는지를 우리 인생을 통해서 그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지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긍휼, 자비, 용서를 주셨지만 이스라엘은 그걸 알지 못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멸망합니다. 그런데 그 멸망한 이스라엘, 여기 “다시”라는 말이 나와요, “다시” again, “다시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셔서” 이 말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긍휼에 의해서 나타나야될 하나님의 나라였다, 라는 그 점을 다시 상기시킵니다. “긍휼이 빠졌는데 이제 긍휼 집어넣어 줄게.” 그런 뜻이에요. 긍휼을 베푸시는데 그 긍휼이 우리 내부에서 어떤 작용을 하느냐?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깊은 바다에, ‘어디 갔지?’ 아무리 찾아 헤매도, 평생을 찾아 헤매도 나의 죄를 발견 못 하게 만들겠다는 것이 예언이 품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긍휼의 기적입니다. 이 기적이 아브라함과 그리고 야곱의 후손들에게 이스라엘에게 주어진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18절에 다시 보게 되면, 이와 같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는 거예요. “주와 같은 신이 어디있으리이까” 이 대목이 상당히, 굉장히, 아마 성경에서 가장 난해한 대목입니다. 주와 같은 이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시는 분은 누구냐 하면, 하나님 자신밖에 없어요. 하나님 자신밖에 없는 하나님이 하나님 스스로 자기를 칭송하면서 나와 같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하나님 자기를 대상으로 자기가 고백을 해버리는 거예요. 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것은 난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그 이유 때문에 아무리 발버둥쳐도 하나님이 하나님 아는 만큼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구약에서의 죄라는 것은 시편 32편 5절에 보면 회개한다는 조건 하에 죄사함이 주어집니다. 구약에서는. 시편 32편 5절 읽어보면,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그런데 신약에는 죄사함부터 먼저 주시고 그 죄 사했다는 것을 통보할 때 그 통보받는 것을 가지고 회개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미 죄사함이 다 성립되고 난 뒤에 “너 합격이야. 너 죄사함 받았어.” 통지서 날라오는 것 있잖아요. 그게 회개에요. 신약의 회개는 내가 죄사함 받아야 되겠다는 그 세계, 나의 중심이 확장되는 나의 세계 자체를 포기하는 걸 회개라 하는 겁니다. 내가 구원받아야지,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까,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해서 구원받아야지, 라는 그 체계 자체가 이게 버려야 될, 이걸 깊은 바다에 빠트려야 될 버려야 될 나 중심의 세계가 되는 거예요.그 이유가 뭐냐 하면, 죄사함은 인간세계에서는 알 수가 없고 죄사함은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핫라인, 연락라인에서만 제대로 거기에 밝혀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걸 한꺼번에 말하면 “죄사함은 인간세계에는 없다.”가 돼요.

신약에 오게 되면 찌릿찌릿, 두 사람이 아니에요. 여기 찌릿찌릿, 한 사람이 더 등장합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언약이 어떤 방향성을 갖고 점점 더 움직이고 있다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 중 곧 그 중에서 죽으리라.”(겔33:13) 어떤 바르게 살았던 의인이 있는데 그 의인은 하나님의 죄사함도 믿는 그런 의인이겠지요. 그렇게 있는데 그 의인이, 죄사함도 받고 다 아는 그런 의인이 죄를 짓는다면 그 전에 의롭게 한 것은 다 무효가 되면서 “너는 죄악 중에 의인 되지 못하고 네 죄악 중에 죽으리라.”라고 에스겔 33장 13절에 나옵니다. 언약의 최종성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을 때 그 전의 계약, 그 전의 언약, 그 전의 율법과 말씀에 의해서 의인이라고 자부된다 할지라도 그 이후에 새로운 계약에 의해서 죄 지어버리면 앞의 계약에서 의인 된 것은 의인이 아니고 무효가 된다 그 말입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내가 죄사함 받아서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회개하고 말씀을 지키는 이것이 바로 불신앙이라는 거예요. 세 번째 분을 감안하지 못하고 ‘이방 민족과는 달리 거룩한 민족이 되게 되면 나는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살 수 있다.’라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기존의 율법이 표준이 되어서 과거의 언약이 나를 살릴 것이라고 여기는 그 자체가 최종적 언약에 대해서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런 오류를 범한다는 거예요. 인간은 그동안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이게 최종적인 언약이에요. ‘나는 에서는 안 될래. 야곱 될래.’ 이런 의식인 거예요. 싸움의 대상이 같은 인간을 향하여 싸웠던 거예요. 그러나  모든 인간들이 이미 예수님을 상대로 해서 싸우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 최종에 가야 다 들통이 나요. 구원받고자 애쓰는 이 자체가 예수님이 하시는 공로를 모독하는 원수 짓이라는 것을 마지막 언약에 가서야 알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에게는 죄사함은 없는 겁니다. 그러면 뭐냐? 예수님은 인간으로 쌍둥이였어요. 인간이 아담이라면 예수님은 같은 아담 쌍둥이, 아담, 그리고 마지막 아담, 두 번째 아담으로서 오신 거예요.

첫 번째 아담들이, 이스라엘 포함해서 첫 번째 아담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알 수 없는 것을 두 번째 아담은 비로소 하나님의 제대로 된 이스라엘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모든 연락체계가 원활하게 작용하고 그분이 하시는 일, 행동 하나하나가 모든 것이 언약의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의 긍휼, 이스라엘의 기본은 바로 오신 예수님이 품고 있어요. 예수님이 품고 예수님 하신 일이 긍휼을 생산하고 진리를 생산하는 그런 분이에요. 그러니 예수님 빼놓고 아버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겁니다.

 

에서와 야곱의 싸움에서 야곱이 거짓말을 하든 어떻든 간에 마지막 아버지의 복은 야곱에게 돌아갑니다. 그러면 에서는 왜 등장합니까? 들러리지요. 야곱의 승리와 대비시키기 위해서 에서가 등장하는 겁니다. 똑같은 쌍둥이 구조에 의해서(첫째아담과 들째아담)  첫째아담에 속한 아담의 속성과 DNA를 받은 우리는 왜 등장해야 됩니까? 모든 승리는 예수님에게 간다는 것, 우리에게 오는 승리는 없다는 것, 우리가 원하는 대로 세상은 되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그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을 계속해서 사용하시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히10:9)  이스라엘이 인간을 대표해서 했던 그 제사를 주님께서 폐하러 오신 거예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이게 끝이에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 성령께서 오신다는 거예요. 이게 끝이에요. 그러면 그 전에 우리는 뭐냐? 고아지요, 뭐, 고아. 고아는 스스로 해낼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돌보지 아니하면 이미 죽은 상태입니다. 죽은 자에요. 우리 자신의 끝은 이미 우리가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고, 그저 하나님이 말씀 가지고 지키려고 애쓰는 이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자라는 사실입니다. 구약에서는 회개해야 죄사함을 준다는 조건을 걸었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최종적인 언약이 아니고 중간과정이었어요. 최종점에 가게 되면 어떤 누구도 회개해도 그 사람은 죄사함을 받지를 못합니다.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회개라는 것은 인간과 인간끼리 누가 누가 잘하나, 너는 회개하지 않았지만 나는 회개했다, 이 둘 사이의 비교로서 회개가 종결되는 것이 아니에요. 최종적인 의미가 아니에요. 인간이 아무리 회개한들 하나님께서 그걸 안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그 순간이 최종적입니다. 나의 회개조차도 주께서는 받지를 않습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사43:25) 

이게 왜 충격적이냐 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인간에게 죄를 사해준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자기의 죄사함을 노리면 안 돼요.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위배 됩니다. 그러면 신약에 와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 사하시는 이유가 뭐냐? 우리가 의인 되는 것? 아닙니다. 그러면 뭐냐? 우리가 의가 되는 거예요. 죄가 없는 것을 의라 하거든요 우리가 의인 되는 게 아니고 우리가 의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그걸 의의 종이라고 이야기해요.

회개라는 것은 내가 나 반성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 사태파악을 하는 거예요. 도대체 이 시대가 예수님 시대지 내가 앞으로 잘 하면 잘 하겠다는 뭔가 아직 내 시간이 남아 있는 그런 시대가 아니에요. 이미 끝나버린 시대에요. 주님께서 모두 접수한 시대입니다.

이 접수한 시대에 주께서 자신이 갖고 있는 자기 의를, 죄사함의 그 공로, 능력을 우리에게 퍼부어서 주님에게 있는 죄사함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는 것, 이것이 바로 제3의 인물, 예수님을 위한 하나님의 백성, 진짜배기 하나님의 백성 된 이스라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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