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장 7절에 보면,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예수님 빼놓고 모든 자를 뭐로 규정하는가? 그를 찌른 자로 보는 거예요.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그 찌른 자가 누구냐 하면 군인들이에요. 그 군인들이 잘 찔렀는지 못 찔렀는지 자기가 예수님을 찔러놓고 찌른 것을 군인들이 그걸 봤어요.
요한복음 19장 다시 봅시다. 정신 바짝 차려야 됩니다. 이게 힘들어요. 성경구절 같이 연결시킬 때는 반드시 십자가 실로 꿰매야 돼요. 십자가 피가 통하지 않으면 성경해석 일체 되질 않아요. 십자가 피가 남는 해석이 돼야 되지 나 구원 받았다는 해석이 되면 안 돼요. 그거는 지는 마치 구원 받아 마땅한 잘난 존재가 되니까 그렇게 돌아오면 안 됩니다. 십자가 피만 나와야 돼요. 33절에서 찌르니까 피와 물이 나왔지요. 그러면 다 나온 거예요. 뼈 꺾는 이야기 나왔지요. 그다음에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37절) 이 말은 뭐냐 하면 찔린 자가 예수님이고 찌른 자는 그 당시에 누구냐 하면 군병이죠. 그 당시 군인들이죠. 그 군인들이 어떤 최후의 목격자 노릇하고 있는 겁니다.
모든 인류를 대표해서 십자가 현장에서 마지막에 성경말씀이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끝까지 쳐다보는 유일한 목격자가 찌른 자에요. 악입니다. 악의 지시를 받는 악인이 십자가의 유일한 목격자에요. “상관님, 지시대로 처리했습니다.” 없애버렸습니다. 이 전제군주사회에서 자본주의사회에서 아무짝도 소용없는 예수를 없애버렸습니다, 라고 보고할 수 있는 그 마지막 보고자가 직접 창을 들고 직접 예수님을 찌른 자, 바로 그 자가 악의 마지막 모습을 대신해서 보여준 자에요. 그러면 악은 뭡니까? 예수님의 존재도 아니고 예수님의 인물도 아니고 바로 십자가 사건을 유발할 때 거기에 참여된 자가 악이에요. 그게 악마에요.
십자가 사건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지요. 나는 십자가 지혜 외에는 다른 지혜로 간주하지 않는다고. 너희가 예수님 죽은 것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님이 죽은 것, 그 사건. 사도 바울이 왜 그런 이야기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부활해서 만날 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너는 나를 핍박한다. 그때 사울은 뭐하다가 예수님 만났습니까? 예수 믿는 자를 공격하러 가면서 예수를 만났잖아요. 그러니까 전 세계 모든 움직임이 십자가 그때 그 사건의 현장화 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래야 이 세상이 악의 천지고 저주받고 지옥이 된다 할지라도 그들은 할 말이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그게 바로 언약에 의하면 저주의 세계,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저주받는 하나님의 일관된 취지가 드러나는 현장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들이대지 아니하면 이 세상은 소위 잘난 자들이 등장해서 이거는 중구난방 아무 진리가 가려져요. 십자가 사건의 되풀이고 반복이에요. 그 말씀에 찌른 자도 볼 것이요,
했는데 스가랴에 의하면 그 찌른 것 때문에 그다음에 뭐냐? 애통하는 자가 등장해요.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애통했습니까? 애통 안 했지요. 걸음아 날 살리라고 도망쳤잖아요. 애통 안 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질 때 애통한 사람, 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도 될 자격 있는 사람,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성도는 찔림을 받은 자가 자기를 찔렀던 그 세계로부터 찔림을 받았다는 이걸 근거로 해서, 십자가 사건을 근거로 해서 주님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그 사람에게 그대로 일어나게 하는 대상이 된 자만 구원 받은 사람이에요. 이걸 미리 그 삶을 살았던 자가 오늘 본문에 누굽니까? 다윗입니다. 다윗은 훌륭한 사람이 아니에요. 얍삽한 사람이고 비겁한 사람이고 요령꾼이고 연기 피우면서 자기 살 길을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 과정을 겪으면서 다윗은 여호와께 피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 줄 알아요. 그게 말씀 완성의 세계에 피하는 거예요. 그때 피하면서 다윗은 통회해요. 애통하는 겁니다. 내 구원은 내가 알아서 할 문제가 아닌 것을 아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 34편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주께서 원하는 것은 무슨 심령이다? 상한 심령이다. 그 상한 심령의 당사자가 누굽니까? 다윗인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선 다윗을 세속사회에 보내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를 교회 마치고 자꾸 세속세계로 보내는 이유가 우리의 기도는 오직 회개하는 기도만 하라는 거예요. 계속해서.
㉮십자가 사건의 악의 조종을 받아서 ㉯예수님이 내 인생에 대해서 쓸데없는 대상인 것을 계속해서 내 내부에서 그게 끓어오름을 고백하면서 ㉰이미 구원 받은 자로서 예수님을 싫어하는 그 육신의 본성을 보면서 18절, 19절이죠.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시편 34편 18절을 그게 과거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현재 삶 속에서 시편 34편 18절이란 말씀이 늘 살아 있게 하시는 것,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의 증인되게 하시는 거예요. 뭐 느긋하지요. 왜? 이미 우리는 말씀세계에 있기 때문에, 주님께 피했기 때문에, 주님 안에 있기 때문에 이건 뭐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죽을 때까지 되풀이하는 거죠.
이 되풀이도 나중에 죽고 나면 뭐예요? 우리가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면 더 이상 세속세계에서 떠났기 때문에 육신은 죽었기 때문에 상한 심령이고 뭐고 할 수 없습니다. 지옥 같은 세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통회가 돼요. 우리 자신이 몰랐던 것 말씀이 와서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시편 34편에서 다윗은 감사하지요. 주의 환난에서 감사하고 뭐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느냐, 21절 보겠습니다.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 비로소 죄라는 게 뭔지 아는 거예요. 죄라는 것은 의인인 특이한 개인이 등장하지 않으면 죄를 몰라요. 내가 죄 사함도 감사하지만 내가 죄가 뭔지 근원적으로 알게 된 것이 감사하지요. 죄가 뭐냐? 주님 없었으면 죄가 없었다.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 비로소 저주가 개시되고요. “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하시나니 저에게(주께) 피하는 자는 다 죄를 받지 아니하리로다” 그 죄, 다시는 저주를 받지 아니하는 입장에서 시편 34편의 삶을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마음껏 재현해도 괜찮습니다. 죄를 받지 않기 때문에.
왜? 죄를 아니까. 내 힘으로 거기서 빠져나가지 못했고 흘린 피와 물로써 그 피로 누가 찔렀는데 찌른 자나 우리나 같은 통속이었는데 그 찌른 자도 볼 것이고 누가 찔림을 받았는지 누가 이 세상에서 밉상 받았는지를 이제 우리에게 찾아오신 그분이 나를 비롯해서 모든 사람에게 밉상 받은 분이 피로 말미암아 그 죄를 대신 담당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겐 죄가 없어진다는 이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