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어려운데 그러한 단일의미성, 갑자기 제목을 <단일의미>로 하고 싶은데 이 단일의미가, 아무 문제없음이 지상에 내려올 때는 그냥 이것이 덕이고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절제고 이것이 인내고 이것이 형제 우애고 이게 사랑이고 이게 지식이다, 라고 오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단일의미에서 온 이 믿음은 지상에서 질적으로 거짓 영을 먼저 하나님께서 유포시켜놨거든요. 그 거짓 영에서 마중을 나오는 거짓 믿음이 있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럼 목사님, 우리가 또 거짓된 믿음에 대한 거짓 개념을 알아야 우리가 진짜 믿음의 의미를 추후에 아는 겁니까?”라고 물으면, 네가 평소에 거짓되게 살았잖아, 믿음을.
■사람은 믿음 없이 행동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파란 불에 건너가면 차들이 와서 나를 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하에 우리는 횡단보도를 파란 불에 건너가는 거예요. 모든 일이 믿음으로 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걸 쉽게 말해서 선입견이라 합니다, 선입견. 선입견에서 나 행복위주로 내가 의미를 내 쪽에서 출정(出征)해서 내 쪽에서 회수가 돼요, 나한테 유리하도록. 유리한 게 나에게 선이고 불리하면 악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이 세상은 고요하지 않아요. 각자 내뿜는데 자기가 신도 아니면서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이 주인공을 더욱더 기쁘게 하고 내 원래 의도에 부합되도록 의미를 던졌다가 거기에 걸려들어라, 해서 그 의미를 회수해서 오늘도 보람찬~ 하루를~ 이렇게 군가 부르면서 퇴근하는 겁니다. 오늘도 걸려들었어, 오늘도 성공했어, 이런 거요.
■의미라는 것은 의도가 있어요. 의도 없는 의미는 없거든요. 결국 나한테 유리하고 나한테 이익이 되는 조건 하에 사람들은 그걸 의미 있다고 일방적으로 그렇게 이야기해버려요.
■그러니까 주님은 이 땅에 와서 인간들과 싸웠던 겁니다. 의미를 놓고 싸웠던 거예요, 의미를 놓고.
■이 세상 사람들에게 믿음이라 하는 것은 자기를 위한 믿음이에요. 자기 잘 되기 위한 믿음이에요. 그럼 그 믿음에 어떤 내용도 포함되느냐 하면 하나님을 믿겠다, 오실 메시아를 믿겠다, 도 이 믿음 안에 포함되는 겁니다. 그런데 진짜로 메시아가 왔거든요. 진짜로 메시아가 왔을 때 그들의 믿음은 어떻게 활용되느냐 하면 진짜 메시아를 죽여 버리는 쪽으로 믿음이 적용되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이었습니다. 너희들의 믿음은 너희들을 지키기 위해서 너희들이 구원받기 위한 믿음인데 네가 구원받겠다는 그 믿음이 결국은 예수님을 살해하는 데에 써먹혔던 겁니다. 결국 하나님의 믿음의 의미는 그 안에 ‘나는 꼭 구원 받아야 돼’가 포함 안 되어 있어요. 나, 나는 꼭 구원해주세요, 라는 인간의 앞선 요구는 주께서 완전히 개무시해버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것은 주님을 이용한 거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저는 빠뜨리면 안 돼요. 저는 꼭 천당 가게 해주세요, 저들과 같지 아니하니까. 남은 지옥가도 나는 천당 가게 해주세요.’ 라는 요구조건은 삐- 주께서는 그걸 믿음의 내용으로 쳐주지를 않습니다.
■그게 왜 중요하냐 하면 베드로후서에 나오잖아요. “믿음에 덕을” 이렇게 나오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믿음에 덕이니까 자기 선입견부터 이제 출발해서 들어가는 거예요, 신의 성품이 되기 위해서. 이 세상은요. 모두가 자기 잘 되기 위해서 의미로 가득 찬 세상이잖아요. 그러면 이 세상 전체가 썩어질 세상이고 정욕이 파고를 치는, 정욕이 요동치는 세상이에요. 이 세상은 진공상태가 아닙니다. 비어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일부에요. 이 세상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산물이에요. 이 세상의 생산물이에요. 태어난 출발부터 내 마음대로 안 되면 누구 마음대로입니까? 그것은 천상회의 마음대로죠. 천상회의에 악한 영, 거짓 영도 있다 했죠? 우리는 그 하나님 세계에 농락당한 거예요. 우리는 자유의지가 없는 채로 움직입니다. 자유의지가 없으면서 새삼스럽게 자유의지가 있느냐, 없느냐, 결정권이 있느냐... 얼마나 없었으면 그거라도 이야기해서 위로 받는지. 아예 애초부터 우리 것, 내가 꾸려나가는 내 인생은 애초부터 없습니다.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마귀를 이 땅에서 통치자로 왕 노릇하라고 집어넣은 거예요. 왕이라 하는 것은 ‘꼼짝 마라’ 에요. 왕이 길 가는 노예보고 ‘게 섰거라.’ 하면 무조건 서야 돼요. 무조건 서야 된다고요. 평소에 내 팔은 내가 흔든다, 백날 해봐야 소용없어요. 못 씁니다. 얼어붙어요, 왕 앞에서. ‘게 누가 있느냐?’ 하면 ‘마마.’ 하고 엎드려야 되는 거예요. 이 세상은 수루메 게임입니다. 일본말로 수루메, 우리말로 오징어. 이 땅은 오징어 게임이에요. 좋든 싫든 게임 속에 빠졌어요. 계급사회입니다. 가진 자에게 아부해야 푼돈이라도 건져요. 이 구조를 내가 결정한 게 아닙니다. 태어나니까 맞닥뜨린 거예요.
■이거는 주님도 예외 없어요. 주님도 이 땅에 오니까 악마가 주님한테 길들이기 하는 것 한번 보세요. 신참 길들이기. 신입이~ 해가지고 예수님을 신입으로 보고 길들이잖아요. 돌이 떡 되게 하라고 이런 식으로.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요. 악마의 지시라고 우리가 못 느끼는 이유가 악마는 모든 의미가 예수님 하나로 종결되었음을 알았기 때문에 자꾸 우리 편에 서있는 것처럼 우리를 위로해줘요. 네 인생은 네가 개척하는 거야. 아무도 안 도와줘. 네가 열심히 해봐. 그러면 언젠가 너는 성공할 수 있어. 우리가 주의 일에 나설 수 없는 이유를 알겠죠? 모든 것을 주께서 어우르기 때문에.
■자, 정욕, 썩어짐. 이것이 베드로후서 1장 4절에 나오죠. 세상은 말씀대로 되어야 되겠죠. 그렇다면 주의 문제없음은 무엇을 끄집어내는가? 정욕이 이미 상주하고 있다는 것을 끄집어내는 식으로 문제없음이 작렬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이 세상은 썩어질 것들로 쓰레기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끄집어내는 식으로 주님의 복음은 우리에게 나타나는 겁니다. 우리가 기지국이기 때문에, 기지국. 우리가 주님의 호출대상이 되는 거예요. 여기서 통신의 연결고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주께서 함께 있으면 세상의 썩어질 것 속에 우리가 태어났으며 우리의 모든 일상의 사고방식, 선입견들이 주님 보기에 썩어질, 질적으로 이미 거짓 영에 휩싸여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어요, 발견하는 즐거움.
■따라서 드디어 신의 성품에 참여하죠. 신의 성품에 참여할 때 신의 성품이라 하니까 천사처럼 뭐 이렇게 생각하는데 신의 성품은 이미 이 땅에 오셨습니다. 행세가 초라하기 짝이 없는 그 분이 신의 성품이에요. 그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이에요. 내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이 보고 싶냐? 나 봤으면 하나님 다 본 거예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지는 것 외에 더 남겨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주님께 자를 대서 어디 한번 보자. 키가 얼마냐, 이거 뭐 양복 할 것도 아니고, 가슴둘레 얼마냐 이거 재고 하는 게 형상이 아니라 형상이라 하는 것은 하시는 일, 기능, 취지, 의미, 그게 형상이에요, 주님 하시는 일이. 신의 성품이 그런 거예요, 질적으로. 따라서 거기서 쏟아져 나오는 믿음, 덕, 이것은 내 일이 아니고 주께서 우리에게 꽂아주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일단 믿음이잖아요. 믿음이 우리한테 딱 들어오게 되면 ‘아, 썩어질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은 이런 걸 가지고 믿음이라고 악마가 거짓 영이 하는 것으로 속아왔구나.’ 그것을 파악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이 믿음에 문제가 없다는 거예요. 우리에게 주신 믿음에 문제가 없기 때문에 세상에서 준 믿음이 썩어질 믿음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썩어질 믿음을 발견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이유가 내가 이 육신이 그 따위 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지금도 매일같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나는 믿습니다. 나한테 이익 되는 것을 믿습니다. 이게 바로 썩어질 믿음 아닙니까?
여러분, 행복이라는 말은 이게 아주 위험한 말이에요. 우리는 행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불행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불행이 있어야 불행을 무서워하죠. 불행이 없는데요. 불행하고 싶어가지고 아예 자기를 불로 지져도 불행이 안 되는 게 문제가 돼요. 진정한 불행은, 문제는 우리가 아무리 불행해도 복이 된다는 그 자체가 불행이다. 아무리 지옥을 갈라 해도 갈 수가 없어요, 길이 막혔기 때문에. 기지국이 됐기 때문에. 기지국에서 본사가 철수하지 않는 한 우리는 기지국이란 이런 처지가 내 쪽에서 변계, 변경이 안 돼요. 완전히 몰수되었거든요.
마리아가 보여준 하나님의, 신의 형상은 뭐냐. 그냥 자기 인생을 낭비하는 거예요, 낭비하는 것. 그러면 그 낭비한 것을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마리아야, 너 낭비했지? 마리아야, 낭비했기 때문에 이제는 네 건 없지? 그럼 마리아 너를 내가 사용해도 되지? 할 말 없지? 네 것 다 빼냈으니까. 살림 다 나갔으니까. 낭비 했으니까. 그런 버려진 너를 가지고 뭘 하느냐. 마리아를 통해서 세상은 왜 가짜 믿음인가, 세상은 왜 가짜 덕인가, 세상은 왜 가짜 절제냐, 이걸 보여주는 데에 마리아가 한 행위 있잖아요, 그 낭비한 행위 그걸 앞장세워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마리아를 다 전개시켜버리는 거예요. 요한복음 12장 가지고. 이런 여인이 있었다, 이런 식으로 다 퍼뜨려버리는 거예요.
마리아가 향수를 뿌릴 때 그 향수가 예수님의 신체 앞에서 얼마나 오래 갔겠습니까? 1번, 5분. 2번, 2시간. 3번, 3일. 4번, 6개월. 몇 번이겠습니까? 이게 조금 뿌린 게 아니고 옴팍 뒤집어썼으니까 많이 가야 한 2시간 갔을 거예요. 그럼 또 2시간 뒤에 마리아가 향수 구해서 갖다 부어야 됩니까? 아니죠. 마리아가 향수 붓는 것은 하나의 작은 의미에요. 전체 의미를 아우르는 데에 작은 의미가 드디어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참여하게 되면 전체 하나의 바퀴로 돌아가게 되는 이 의미가 수레바퀴가 돌아갈 때마다 계속해서 마리아의 작은 일이 온 천지 구석구석까지 그 향기가 파급되는 거예요. 마치 놀이동산에 가서 회전목마를 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엄마는 어릴 때 기억으로 회전목마 타고 싶어서 타고 엄마가 안고 있던 애는 자기 남편한테 맡겼단 말이죠. 그러니까 자기 애가 아빠 품에 안겨서 엄마를 찾는데 엄마가 회전목마를 방금까지 타고 있다가 도니까 엄마가 안 보이는 거예요. 엄마 없다고 울고 있으니까 저쪽 편에서 또 튀어나오는 거예요. 엄마, 여기 있네. 아이가 좋다고 와~하는데 또 돌아서 가버린 거예요. 엄마는 지금 회전목마 속에 마리아의 향기를 뿌리고 있는 중입니다. 비록 엄마가 회전목마 회장님은 아니에요. 사장님은 아니지만 거기에 그냥 돈 주고 탔지만 회전목마가 돌아가는 그 업무에 참여했다는 것은 내가 특별한 일을 했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거예요. 주님이 하게 하셨다고. 그걸 믿는 게 진짜 믿음이에요. 진짜 믿음입니다. 내가 한 작은 일을 주께서는 크게 어여삐 여겨 예수님의 자신 일의 일부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한테는 두뇌가 없어요. 성도는 예수님의 팔이고 사지에요. 팔다리뿐이에요. 두뇌 부분은 주님이 독점하고 있습니다. 너 같은 거, 머리 쓰지 마. 머리 쓰지 마. 너 머리 없어. 너는 두뇌 없어. 이런 관계, 머리와 팔의 관계, 이것이 바로 믿음이고 이 연결고리가 덕, 이게 절제, 이게 지식, 이게 형제 우애, 이게 사랑입니다.
■썩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를 주님께서 이 땅에 두면서 우리 이 세상 전체가 썩어질 것이고 그리고 전부다 정욕에 휩싸여있다는 것을 주님이 다 이루신 입장에서 그 실재를 낱낱이 파헤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들이 가는 길이 성경에서는 고난이 많다 하잖아요. 고난이 많지만 사도 바울은 삼층 천을 보고 아주 즐거워했어요.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삼층 천에 올라갔잖아요. 삼층 천에 올라갈 때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거기서 사도 바울이 하는 이야기는 사자성어로 ‘나는 없다’에요. 왜냐하면 삼층 천에 올라간 그 사람이 누군지를 모르겠다 했으니까요. 본인이지만 본인이 본인을 잃어버릴 때 이것은 나한테 있던 나의 의미가 이제는 나의 의미를 떠나서 주님에게 있는 나의 의미로 의미가 전환되고 말았던 거예요. 의미가 바뀐 거예요. 그걸 예수 안에 있다고 하는 거예요. 예수 안에서의 나는 두뇌가 필요 없고 내가 따로이 나를 위한 의미를 가질 필요도 없어요. 그냥 선물로 부여받은, 할당받은 의미에요. 내가 어떤 향수를 뿌린다. 이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고 결과적으로 주께서 딱 그 공간에서 그 시점에 나로 하여금 하도록 하게 하신 거예요. 주께서 시키신 일이에요. 주께서 시킨 일이기 때문에 내가 나서서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한 어떤 일도 좀 뻔뻔스럽지만 문제가 없어요. 완벽하게 문제없습니다. 서울 시내에 시속 50으로 가야되는데 시속 100으로 가면서 아무 문제없어요. 그래가지고 미러 다 부숴지고 앞차, 뒤차 박아가지고 2000만원 물어줘도 아무 문제없어요. 왜? 주께서 시킨 일이기 때문에. 이정도하면 거의 미친 수준이에요. 광신수준이에요. 이게 믿음이고 이게 덕이고 이게 절제에요. 상상도 못하죠. 시속 50이구나. 절제해서 40으로 가자. 이게 절제. 그게 아니고 50인데 100으로 가는 이 절제.
■문제는 뭐냐 하면 100으로 가는 게 절제이기 때문에 내가 100으로 한번 가봐야지, 이게 믿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절제가 아니고 이게 덕이 아니라는 거예요. 주님이 주인공이어야 되는데 갑자기 내가 이 썩어질 육신이 하고 싶어. 이 정욕이 가만있지 않고 나대기 마련이에요. 주님 핑계대고 이 판에 한번 100놔봐? 내 차도 아닌데 주님 찬데 한번 박아봐? 벌써 이건 썩어질 정욕이에요. 그러니까 항상 내가 어떻다가 아니라 베드로후서 1장이 어떤 식으로 현실을 전개시키느냐가 중요하고 핵심이라는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구원 받냐, 안 받냐를 확인하는 게 아니고 역시 말씀은 말씀대로 빈틈이 없어. 나를 말씀에다가 집어넣어서 말씀이 스스로 기어이 말씀되게 실현시킨다는 그 놀라운 기적적인 신기한 일을 성도는 체험하게 되는 겁니다.
■남의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 이게 믿음이구나. 자기 이야기하는 거 아니에요. 자기는 두뇌가 없으니까. 아, 주님 주신 덕이 이런 거구나. 이게 지식이구나. 이게 절제구나. 이게 인내구나. 이게 경건이고 이게 형제 우애이고 이게 사랑이구나. 이런 걸 주께서 기지국이라고 나한테 계속 공급했구나. 그렇게 되는 겁니다.
■“믿음에 덕을” 자, 정답은 뭐냐. 예수님이 가진 믿음이 예수님 자신의 믿음에 의해서 덕을 거기다 드러내는 일을 예수님의 일대기를 통해서 하셨다. 그렇게 보면 돼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보고 뭐라고 하셨습니까? ‘독사의 새끼들아’ 했죠? 그게 덕이에요. 그게 덕이에요. 덕의 원형입니다. 참 덕스럽죠? 이 뱀 새끼야. 이게 덕이에요. 세례요한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지금 기웃거릴 공간인 줄 알아? 네가 어딜 함부로 끼어들어? 어딘데 네가 들이밀어? 야, 도끼 가져와. 쟤 잘라버려야겠다. 아이고, 얼마나 덕스러운지 몰라요. 얼마나 덕이 풍부한지 몰라요. 항상 원형을 예수님께 찾아야 되고 사도에게 찾아야 돼요. 사도 바울이 복음 모르는 사람을 얼마나 저주했습니까, 사도 바울이? 그게 덕이에요. 그리고 그게 절제고요. 그게 지식이고 그게 믿음이고 그게 경건이에요. 그게 형제 우애이고 그게 사랑을 거기다가 더하는 거예요.원형이 따로 있습니다. 나한테 의미되는 식으로 내가 이렇게 잘났다는 그런 노림수를 해버리면 그건 썩어질 품성이에요. 저주받을 품성에서 나온 거예요, 그거는. 아직도 자기한테 머리가 있는 줄 착각이나 하고요. 내가 하나님께 가는 통로를 내 쪽에서 뚫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은 복음을 빙자한 거짓 영이 하는 짓거리입니다.
덕은 그냥 주시는 거예요. 모든 게 선물이고 그냥 받는 거예요. 아침 9시에 보니까 믿음이 선물되어 있고 10시에 보니까 덕이 선물되어 있고 그날 바빴어, 여덟 가지 다 오느라고. 그다음 오후 2시에 절제가 선물되어 있고 오후 4시에 보니까 지식이 되어 있고 또 형제 우애가 공급되어 있고. 이게 공급하라 아닙니까? 계속 공급해 들어오는 거예요. 와~ 내꺼다. 니꺼 아니야. 내가 하나님의 기지국한테 보낸 거야. 너한테 보낸 게 아니고 네 안에 들어있는 주님의 성품에다가 신의 성품에다가 내가 배달한 거야. 신의 성품에는 아무 하자가 없다는 것을, 문제될 게 없다는 것을 확인차원에서 보냈단 말이죠. 절제 면에서도 문제없고 지식 면에서도 문제가 없고요.
■지식 면 한번 봅시다. 지식 면의 정답은 고린도후서에 나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 지식에 관해 나와 있어요.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잘 들어보세요. 이미 사도 바울이 이 이야기하기 전에 복음이 없는 세계, 썩어질 세계, 정욕대로 사는 세계는 그 방향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계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지식을 받았잖아요, 성령을 통해서. 성령을 통해 받은 지식으로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아까 얘기했습니다. 지식의 모든 의미는 단일의미라고요. 단일의미가 뭐냐?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는 거예요. 그들의 높아진 것을 없앤다는 말이 아니고요. 예수님께서 없앤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위해서 그런 거짓된 이론과 과학과 철학이 꼭 필요했었었다, 이 말이에요. 주님의 단일의미로 그 현상을 새로운 의미로 생각하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 왜 그렇게 하는가? 6절에 보면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네가 문제없을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 문제 있는 것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뭘 준다?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벌하려 하심이라. 벌 내리는 것도 누가 벌 받는다고 아쉬워하지 말고 벌 내리는 그것조차도 예수님이 궁극적으로 갖는, 하나로 아우르는 의미 속에 포함이 된 예수님 일의 일부에요, 벌 주는 게.
■어쨌든 저쨌든 간에요. 우리가 문제없어야 될 이유가 전쟁은 끝났어요. 끝났잖아요. 끝나고 난 뒤에 그 영화에 출연했던 게스트, 영화배우들 이름이 마지막 자막, 마지막 장면에서 올라가는 겁니다. 007역에 이 아무개, 이런 거요. 본드 걸에 누구 아무개. 이런 식으로 명단 올라가는 거예요. 우리는 이 땅에서 주님의 단일의미에 캐스팅된 하나의 배우들이에요. 그러니까 시나리오를 우리 두뇌에서 안 짜죠. 주께서 짜게 하시는 거예요. 너는 태어나면서 개 세 마리 키워라. 모든 계획이 나 좋으라고 했던 일이 아니라 주님 좋으라고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나를 거기다가 합류시킨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가지를 알아요. 세상에 썩어질 내 욕망에서, 정욕이라 하지만 요새 우리 아는 용어로는 욕망, 그냥 욕망이에요, 욕망을 나쁘게 하면 욕심, 이 욕심에서 나오는 이 믿음, 절제 이것이 어떤 것이고 주께서 이런 의미 말고 주님께서 주신 의미는 이런 세상적인 믿음과 절제의 한계를 주님이 믿음을 줌으로서 부딪침을 통해서 그 차이점을 알게 하는 거예요. 아, 절제가 절제가 아니고 믿음이 믿음이 아니구나. 내가 행복하고 내 뜻대로 잘 되었다는 것과 은근히 뒤로 비밀거래를 했다는 그것을 확연하게 드러내죠. 그러니까 우리의 죄를 또 깨닫게 되니 또한 추가적인 감사가 보너스로 또 주어지는 거예요. 야, 이거 뭐 복음 안다고 해놓고 또 나만 챙기고 있군요. 이런 것을 주께서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베드로전서 1장에서와 같이 피를 뿌려서, 피 뿌림으로서 이렇게 완벽히 문제없음을 만들어준 은혜에 대해서 또 감사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일상에서 계속 부딪쳐야 돼요. 부딪쳐야 이게 진리이고 이게 거짓 영이고 그걸 구분하는 그 작업에 충실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지식에 절제, 절제에 인내 이 원형은 전부다 누구라고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다 하신 거예요. 뺨 맞으시고 십자가 죽기까지 자기를 복종케 하셨으니 아버지께 복종한 거예요.
■인내, 그다음에 경건, 형제 우애. 형제 우애 . 두 사람이 있는데 두 사람이 복음 안에서 형제가 되려면 둘 다 마리아가 되어야 돼요. 둘 다 자기를 던져버려야 됩니다, 둘 다. 본인이 본인의 형제 우애를 가지고 오면 안돼요. 둘 다 단일의미로 던져버려야 돼요. 둘 다 두뇌가 없어야 되고 둘 다 자기 것이 없어야 돼요. 던져버려야 돼요. 그리고 단일의미에서 할당받을 때 형제 우애로 맺어지는 거예요.
■형제 우애 다음에 뭡니까? 사랑이죠. 전에 낮 설교 시간에 사랑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다시 이야기하면 사랑이라는 것은 죽어라고 싸워라, 둘 다. 죽어라고 싸우거든요. 왜 싸워야 되느냐 하면 싸울 때 자기 의미, 자기 행복 의미가 다 나옵니다. 인간은 자기 의미가 무기거든요. 내 걸 지키는 무기. 이걸 다 내놔야 돼요. 다 내놓을 때 더 이상 내놓을 게 없어요. 막 욕도 해보고 뭐라고 뭐라고 하고 욕하고 보복하고 질투하고 너 이제 죽었다 하고 막 꼬집고 온갖 거 다하고 난 뒤에 그래도 달라지지 않는 게 있거든 그게 바로 사랑이다.
많이 싸웠나? 왜 더 싸우지? 힘이 없어 못 싸우겠습니다. 왜 더 욕하지? 내가 아는 욕은 다 소모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욕이 없어 안 나옵니다. 싸우고 난 뒤에 아우르는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내가 사랑한다는 것은 나의 행복을 내가 지키기 위해서 남에게 좋은 이미지를 얻기 위한 하나의 무기술이에요. 이것은 사랑이 아니죠. 인간의 모든 사랑은 거짓 사랑이에요. 사랑하는 게 아니고 사실은 싸움입니다. 내가 사랑해 준만큼 네가 해준 게 뭐가 있느냐 하는 자기 사랑에 대한 열매를 자기가 만회하려고 하는 거예요. 제가 부산 강의에서 그런 얘기했잖아요. 사람들이 헌금할 때는 반드시 헌금 액수보다 회수될 용의가 있을 때만 헌금한다고요. 안 그러면 낭비가 되니까 낭비라는 미친 짓을 왜 하냐. 돈 갖다 뿌리는 짓을 왜 하냐. 이거 줘놓고 하나님께서 ‘네가 줬구나. 내가 30배 갚아줄게.’ 하는 그런 기대가 있을 때, 회수될 용의가 있을 때만 헌금해요. 돈이 아까워도 너무 아깝거든요. 돈이 어느 정도 아까우냐 하면 자기 부엌칼로 지 팔을 긋는 것과 같은 거예요. 이런 미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돈을 갖다 버리는 게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교회 헌금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이만큼 했습니다. 했씁니다. 했씁니다!’ ‘어쩌라고? 뭐 어쩌라고?’ ‘30배는 너무하고 본전이라도 찾게 해주세요.’ 그럴 경우 아니면 헌금 안합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인간은 그래서 죽어라고 나를 공격하고 싸워라. 그래도 뭔가 남는 게 있거든, 남는 게 없으면 그건 성령 안 받은 사람이고, 성령 받은 사람은 실컷 자기 본질 다 드러내놓고, 일종의 낭비죠, 마리아처럼 다 던져놓고 그래도 남는 게 있어요. 주께서 이런 못난 나를 대신해 채찍 맞아서 영생 주셨구나. 그게 바로 온전케 하는 단일의미에 흡수된 성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모든 사랑과 덕과 절제와 경건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셔서 평소에 우리가 갖고 있던 믿음과 절제가 얼마나 거짓되고 가짜인 것을 노출시키는 그 기쁨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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