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미래의 종족

아빠와 함께 2022. 6. 29. 18:05

하나님의 정통성, 하나님의 언약의 정통성을 위해서 언약의 정통성에 삐져나간, 정통성에 끼어들 수 없다, 라고 규정된 민족들 가까운 위치에 종족들이 정착해서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방식과 언약에서 추방된 자들을 다루는 방식이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를 통해서 언약을 설명하고자하는 겁니다.

 


흘린 그 피로 생성된 환경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도대체 내가 밥 먹고 사는 게 뭐 그리 큰 죄라고 그것조차 죄란 말입니까, 하고 그게 죄라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 실제로 들어가요. 들어가 보니까 진짜 죄였어요. 그 이유는 내가 밥 먹고 사는 게 죄가 아니고 인간 자체가 시커먼 숯 덩어리였어요. 화로다 나는 숯이구나. 망해야 될 숯이다, 망해야 될 자다. 어느 정도로? 철판구이에 재료 얹어놓고 맹렬한 숯불로 위에 있는 제물이 한줌의 재가 될 정도로 우리는 검은 존재에요. 아무것도 아닌 먼지 같은 존재, 없는 존재, 그런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인간의 흙을 하나님의 언약으로 무슨 공사를 하느냐? 아스팔트 포장 공사를 해버린 겁니다. 포장 공사하는 덮는 아스팔트가 뭐냐? 이스라엘이에요. 시커먼 이스라엘을 지나가게 만들어요. 그 땅을 덮게 만들어요. 어디까지? 하나님의 땅까지. 그래서 하나님의 땅에는 오직 누구만 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백성만 오게 돼 있어요. 하나님의 땅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주지가 되고 나머지는 하나님이 안 계신다는 이유 때문에 아까 말한 에돔, 모압, 암몬, 그다음에 아람 나라, 이방나라를 배치해서 이방나라 쪽은 무엇에 탈락이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에서 탈락된 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그 자체 그런 차이를 보여줍니다. 신명기 2장에서 세일 산으로 에돔 지역으로 가고 있는 것은 지금 활발하게 포장공사를 하고 있는 겁니다. 덮자. 아스팔트 빛으로 덮어가는 거예요. 그냥 발라버리는 거예요. 이스라엘로 발라버리는 겁니다. 발라버릴 때 2장 전체 내용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아 아무나 먹지 마라. 언약을 들춰내기 위해서 너를 이동시키니까 같은 형제 에돔 땅은 그냥 봐줘라. 암몬도 봐주고. 그리고 중간 중간에 빠져있는 이방민족은 아주 용납을 하면 안 돼요.

여기 누가 다녀갔다? 하나님의 아스팔트, 하나님의 포장공사가 다녀갔다. 언약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것을 이 지역에 있는 이방나라를 통해서 언약이 살아 있네, 하나님의 약속이 살아 있다. 그래서 우리 몸이 재가 되더라도 주의 뜻은 우리 몸이 재가 되고 늙어죽어도 신경 안 써요. 뭐냐? 말씀만 그 재가 있는 자리에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빛이 나는 것, 이게 주의 뜻입니다. 아주 잔인하지요. 나는 네가 아프고 어떻게 되던 모르겠고 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만 생생하게 하나의 루비처럼 또는 진주처럼 캄캄함 속에서 빛나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말씀을 주님께선 간단하게 이야기해요. 빛이 되어라, 그다음에 소금이 되어라. 누굴 위함이 아니에요. 언약 자체를 위한 소금이요, 언약 자체의 발광체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발광체고 예수님이 소금이란 걸 알려주기 위해서 네가 내 빛을 받아서 나와 함께 소금과 빛의 기능을 하라, 이렇게 돼요. 여기서 말이 나왔으니까 하라, 하지 마라의 기능이 어떻게 되느냐? 이렇습니다. 하라, 하지 말라는 결과적으로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정황으로 내가 너를 몰아세울게, 이 뜻이에요. 하라, 하지 마라. 인간은 하라 하면 안 하고 하지 말라하면 하고, 이게 인간이잖아요. 그 말씀 못 지키는 그런 인간으로 어떻게 하라는 하라가 되고 하지 말라는 하지 말라가 되는 그러한 것이 현실로 드러나는지 주님의 솜씨, 일하심 그걸 증거하기 위해서 오늘날 성도를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일시키는 거예요. 그럼 내가 하는 게 아니고 내 안에서 기필코 그걸 해내시는 겁니다. 구약 때는 누가 하느냐? 이스라엘을 통해서 해내는 거예요. 그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내가 아까 아스팔트로 사용했고 했지만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과 다른 특징은 언약이 그들과 함께 앞장세워서 이끈다는 거예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왜 원망을 했느냐 하면 아까 분명히 하나님이 사는 땅이잖아요. 모든 초점은 하나님이 어떤 사느냐,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되는데 내가 사는 땅으로 생각한 거예요. 이 점에서 여러분들은 막 분노를 느껴야 돼요. 그런데 분노를 느낄 수 없는 이유가 천국은 누가 사는 땅이에요? 주님이 주님답게 사는 곳이 천국이에요. 내가 내 이익 보려고 목숨 거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한테. 이거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 자발적인 거예요.
나를 살리는 조건 하에 하나님을 믿을래, 아니면 나를 버리는 하나님을 믿을래? 하나, 둘, 셋 하면 우리가 미쳤나, 날 버리는 하나님을 믿게요. 안 믿지요. 그래서 주님이 먼저 죽었어요. 떠밀지도 않았는데 혼자 죽었어요. 그러니 이 세상이 하나의 무대라면 이 무대는 매일같이 우리는 주님을 건드리면서 살아가는 중입니다. 한 순간도 주님 앞에 시비 안 걸고 넘어간 적이 없어요. 그래야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가짜인지 들통 나요. 네가 예수 믿어라. 하라잖아요. 하라, 하지 말라. 예수 믿으면 그다음에 뭐 준다? 너에게 구원이 있으리라 했잖아요.그러니 중요한 것은 뭐냐? 구원이 탐이 나면 뭘 해야 돼요? 하라가 예수 믿는 행위가 나와야 돼요. 이 행위가 인간들이 본인에게 못 나오는데 나에게서 나왔다고 박박 우기고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자기 사랑하는 백성을 결코 너는 주님을 믿는 믿음이 너한테는 애초부터 아예 이거는 완전히 바짝 말랐어요. 나오지 않는 그런 마음을 지니고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선 의도적인 상황을 만들어주십니다. 나는 내가 상상한 세계만 사랑했다. 그게 천국인지 지옥인지 이름을 어떻게 붙이든 간에 그 내용을 상상한 거예요. 이게 독자성의 오류입니다. 홀로 모든 시작점을 나부터 시작한 것의 잘못이에요. 거기에 비해서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은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온다 할 때 가라는 명령을 누가 내립니까? 백부장의 상사가 있지요. 군대에서 자기 상사가 명령을 내리고 자기는 명령에 가시적인 어떤 모습을 드러낼 뿐이지요. 주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주께서 시키다가 그다음에 안 시키게 되면 그 사람은 안 하면 돼요. 시키다가 안 시키니까 지가 짜장면 시키고 있어. 교회는 있지 이미 자기 성령은 바닥났지, 전에 성령 받은 적도 없었지,  

그런데 실제로는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죄인 되게 만들어서 일을 시켜요. 반항기가 먼저 일어나요. 아닙니다, 싫소이다. 요나가 자기 계획이 있으니까 도망쳤고 주께선 드론 띄워서 기어이 “여기는, 여기는 드론. 꼼짝 마라. 요나. 너는 완전히 포위됐다. 알아서 바다에 몸을 던져라.” 요나는 죽었지요. 죽었는데 깨보니까 물고기 뱃속이었어요. 과학적으로 따지면 기가 막힐 일입니다. 그처럼 주님도 죽었다가 살아났잖아요. 그다음 차례는 저와 여러분 차례입니다. 이 고래 뱃속 같은 이 세상에서 여기가 어딥니까까까까? 여기가 죽음의 세계다. 돈이나 벌어라, 인간아. 니나 망가져라, 하는 그것을 완전히 여기서 살아 있을 동안 경험해라.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빨리 육신을 버리고 좀 이렇게 해방, 자유하고 싶은 거예요. 자유가 뭐냐? 자유란 자발적 종속이 된 것을 자유라 해요. 그래서 자발적이니까 자유가 기쁨이 되는 거예요. 사랑은 뭐냐? 나는 자발적으로 당신의 소유가 되겠습니다. 이것을 자기로부터 벗어난 이걸 자유라 하는 거예요. 나는 당신의 영원한 종입니다. 딸랑딸랑.  
예수 믿어줄게, 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나는 당신에 예속되겠습니다, 노예가 되겠습니다, 나는 종이 되겠습니다, 하는 그걸 자유라 해요. 얼마나 인간들은 자기를 위해서 산다는 게 악마의 노예가 되었다는 이걸 이제는 절실하게 느껴야 돼요. 내가 자유를 부르짖는 자체가 악마의 노예였다는 것. 내가 내 자유를 외치는 것에 여러분 지긋지긋해야 돼요. 이제는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사는 것에 대해서 환멸을 느껴야 돼요. 이게 뭐야, 이게 인생이야? 피조물다운 인생이 아니지, 라고 환멸을 느껴야 돼요. 복음을 아는 내가 되겠다는 이것이 곧 악의 족쇄다. 이게 바로 악마의 시험이라는 이걸 아셔야 돼요. 복음을 아는 내가 이것이 오히려 악마가 친 덫에 빠진 거예요. 내가 빠져야 되는데 안 빠졌잖아요. 이용할 대로 다 이용해 먹겠다는 거잖아요. 복음 없는 설교보다 복음 있는 설교가 더 좋다는 거예요. 마구 영끌, 막 끌어 모아. 복음 폐인. 막 끌어 모아서 많이 쌓았어. 이제는 어지간히 재림해도 많이 모아놔서 3차 대전 나도 천당 가겠지, 이런 꼼수는 쓰지 마세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주님께서 복음을 아는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께 바치고 영광 돌리려하는데 그런 식으론 영광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바친 걸 안 받습니다. 그럼 뭘 받느냐?  제치고 더, 내가 너한테 쳐들어가는 거예요. 네가 아부 식으로 뇌물주고 봉사하는 게 아니고 제쳐버리는 거예요. 주님, 좋은 관계? 좋은 관계 치워라. 제치고 일방적으로 침투해버려요. 이걸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납득을 이해를 못한 거예요. 왜? 자기가 아는 상상의 신은 인간과 좋은 관계를 갖고 싶어 하신다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오해를 한 거예요. 주님은 인간과 좋은 관계가 없습니다. 주님은 좋은 관계의 인간을 일부러 없는 인간을 따로 만들어요. 하나님 자신이 자기에게 좋은 관계에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생긴 그 주님과 좋은 관계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다. 주님과 관계에요. 그분이 하는 관계가 흘러넘치면서 없는 데서 생긴 단체가 진짜 찐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받은 세례가 성령세례에요. 요단강에서. 이상하지요. 분명히 누가 봐도 그게 무슨 세례입니까? 물세례잖아요. 물세례인데 유독 예수님한테는 물세례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알맹이는 뭐냐 하면 성령세례에요. 그러면 성도가 갈 길은 물세례부터 스타트 출발해서 어디까지? 성령세례까지 이어지는 그 없는 코스를 주님 이 땅에 와서 그 길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버렸어요. 그 만든 코스의 길이 뭐냐? 이스라엘도 광야에서 마찬가지지만 그 코스가 뭐냐 하면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선이 돼요. 인간이 제일 참기 어려운 것이 뭐냐? 억울한 일을 인간은 참기 어렵고 아무리 성격이 태평 같더라도 억울한 일을 당해버리면 인간에게는 뭐냐 하면 분노가 일어나야 돼요. 그래서 주님 가신 길은 억울하기 짝이 없는 길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갈 수 있는 좁은 길이란 것은 웃으면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고 생각하게 되면 분노해서 이 길 같으면 천국 때려치운다는 일이 벌어질 때 주께서 지금 여기부터 좁은 길입니다, 광고합니다. “아파트 주민들에게 광고합니다. 여기서부터 좁은 길로 들어섰습니다. 억울하지요. 화나지요. 자기 주체파악 안 돼서 그렇습니다.” 이것을 미리 당겨서 광야생활로 보여주는 거예요.

언약이란 인간에게는 알 수 없는 거예요. 알 수 있는 차원에선 해독이 안 돼요. 그게 설명이 안 되거든요. 자기 딴에 성의를 다해서 주님 우리가 이렇게 섬겼습니다, 하니까 치우고 악수 같은 소리하고 있네. 건성의 악수 필요 없다, 치워버리고 그것을 그들로 하여금 죄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기름 속에서 생고기가 튀김가루를 입는다.] 하여튼 이렇습니다. 생고기인데 빵가루 같은 튀김가루를 입혀요. 그러면 이게 뚝뚝 떨어지잖아요. 인간이 죄인이 안 된다고요. 그럼 어디 가느냐? 나와 똑같이 생활하는 이방민족을 통과하게 만들어요. 그거는 그 튀김가루가 묻어있는 생닭을 기름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 비로소 그때에 그 기름이 나의 몸과 일체가 되면서 스며들어서 달라붙게 돼 있어요. 거기다가 맥주 하나 하면 치맥이 돼요. 예수 믿는 사람은 술을 안 먹기 때문에 마음대로 이야기할 수 있어요. 이게 인간을 이스라엘을 뭐로 만드느냐 하면 기계로 만듭니다. 기계의 특징은 이겁니다. 이해하려고 하지 마. 이걸 네 자로 하면 ‘기쁜 소식’이고, 두 자로 하면 ‘복음’입니다. 내 인생 왜 이렇습니까? 네가 이해하려고 하지 마. 그럼 저는 뭡니까? 죄인 되는 거예요. 저는 죄 짓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생닭이지. 그러니까 생닭인 거예요.

주님께선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와요. 그러니까 죄인을 불러서 주님의 의가 달라붙어야 이게 의인이 되는데 의가 달라붙으려면 주님께서 잔소리해서 의가 되는 게 아니거든요. 주님께서 피를 흘려야 되거든요. 피를 흘리려면 충분히 저 상대가 죄가 있어야 돼요. 어느 정도냐? 요만큼의 의가 나올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아야 돼요. 뭘 해도 죄가 되는 수준이 돼야 거기서 하나님의 의가 죄로 코팅된 것 한 번 더 코팅 붙이지요. 사실은 인간은 자기가 아주 착하고 훌륭한 피부도 하얀 생닭인 것은 자체적인 오해입니다. 인간이 아는 건 오해밖에 없어요. 나 같이 착하고 괜찮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실제로 장차 주님 가신 길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야 됩니다. 가면서 그들에게 나온 것들은 찬양이었습니까, 원망이었습니까? 원망이었어요. 찬양은 잠시였습니다. 무슨 바다를 건널 때? 홍해를 건널 때 잠시였어요. 그다음부턴 원망이었어요. 원망하면서 무엇을 거쳐 지나가느냐 하면 아까 한 걸 다시 2장 33, 34절에, “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우리에게 붙이시매 우리가 그와 그 아들들과 그 모든 백성을 쳤고 그 때에 우리가 그 모든 성읍을 취하고 그 각 성읍을 그 남녀와“ 그다음에 뭡니까? 그 야들야들한 아기, 천지난만한 아기를 어떻게 하라? 하나도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 불가능한 거죠. 사람이 양심이 있잖아요. 양심이 있고 선을 아주 모르면 되는데 어린아이를 진멸하라는 이 말은 결국 뭐냐? 너희는 기계가 되어라.

마치 천사가 무감정으로 어린양의 피가 발리지 않은 애굽 나라의 전체 애를 다 죽여요. 심지어 갓난아기도 다 죽여 버려요. 인간은 그러지 못해요. 왜? 인간은 기계가 아니니까. 이미 선악체계가 있잖아요. 죽여선 않아야 될 사람은 죽여선 안 된다는 게 있잖아요. 인간은 천사처럼 잔인할 수 없는 거예요. 공자 논리에 보면 나오잖아요. 측은지심, 이런 것 있잖아요. 우물에 빠졌는데 어찌 구하지 않겠느냐. 공자가 하는 말이,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네가 남에게 대접하라. 공자의 말이 막 나와요. 자, 여기서 왜 못하느냐를 생각해보세요. 왜 우리가 남녀와 유아를 하나도 남기지 말고 진멸을 못하느냐? 못하는 이유는 극단적으로 이질적인 존재가 못 되기 때문에. 우리는 참 이런 어려운 이야기를 여러분들이 이 대목에서는 꼭 들으셔야 됩니다. 오늘 첫째 시간의 핵심이니까 핵심을 끝부분에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왜 사람들이 진멸을 못하느냐 하면 인간은 과거의 존재에요. 인간은 과거의 산물로서 진멸 같은 것은 과거에 해본 적이 없습니다. 인간이 잔인하고 싶어도 쉽게 잔인한 존재들이 아니에요. 그냥 인간들은 품성상 착하고 어질고 너그럽고 인격적이고 인간의 품위를 상당히 고려할 줄 아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이래서 이들이 이런 마음이 진멸당해요. 잘 이해가 안 되지요. 이유가 뭐냐?

바로 이스라엘은 미래의 종족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래요. 과거의 종족이 아니고 미래의 종족이에요. 미래는 모든 언약이 없는 민족은 진멸 대상이에요. 이게 확실한 미래는 우리가 부인하던 부인하지 않던 다가오는 미래의 모습입니다. 제가 어제 주일학교 설교하면서 노아언약 설교했어요. 노아가 비가 부슬부슬 올 때 급하게 배 만들었습니까? 말짱해요. 비가 없는데 배를 만든다. 이 논리를 논문으로 제출하라고 하면 제출할 수 있겠는지 물었어요. 노아가 배 만들어서 과거를 대비했습니까? 아니면 이미 배를 만든다는 것이 노아 생각입니까, 하나님의 언약 생각이에요? 언약 생각이에요. 언약이 옴팡 그냥 덮쳐버린 거예요. 상이 있으면 상보가 더 크잖아요. 상보가 덮어버리면 상에 뭐가 있는지 안 보이는 것처럼 그냥 노아 인생을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은혜로 덮어버려요. 은혜가 상보에요. 상보가 덮어버려요. 덮어버리면 노아의 행동 하나하나가 지금 현재 필요한 것도 아니고 미래의 그때가 먼저 여기에 시작이 된 거예요. 요새 은행 몇 시에 열지요? 아홉 시에 열지요. 아홉 시에 여는데 이미 은행직원들은 뒷문으로 여덟 시 반이나 혹은 여덟 시에 업무 보고 있는 거예요. 오늘 할 일 업무 보고 있다고요. 아홉 시에 문 여니까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하고 기다리고 있지만 그전에 이미 들어와 있는 거예요. 노아는 언약 속에 들어와 있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는 십자가 안에 들어왔어요. 십자가만 현실이고 자랑해요. 지 행한 것 자랑하는 게 아니고.

그러니까 성도에게는 뭐가 없느냐 하면 과거도 없고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는 예수 안에서 이미 시간 자체로부터 저촉 받지 않는 새로운 시간을 뛰어넘는 영적 공간, 묵시의 공간 안에 성도가 주께서 하라, 하라 말라를 여기서 완성시키고 있습니다. 미래의 민족이에요. 미래의 민족이 과거만 알고 있는 그 민족을 사그리 진멸합니다. 왜? 과거의 진멸 없이는 미래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지금 주님께서 실제적으로 앞당겨서 하나님의 땅 가는 도중에 그걸 적용시키고 있어요. 그걸 지금 주입시키고 있는 겁니다. 목표는 뭡니까? 하나님의 땅에서 살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밖에 없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시간을 초월한 하나님의 행위를 지금 대신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만약에 진멸할 대상 중에서 지 친구나 아는 사람 있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아아, 안 돼. 이러고 있잖아요. 인정사정. 그러나 과거는 철저하게 미래와 단절돼 있기 때문에 마음 놓고 진멸해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들, 그 어른들, 갓난아기들 그들이 뭐가 죄가 있느냐? 뭐가 죄냐 따지는 것은 과거의 어린아이가 했던 행색과 징벌을 자꾸 연관시키는 데 과거에 행한 것 말고 미래와 단절돼 있다는 그 사실 때문에 전체 어떤 걸 하던 과거의 시간 속에 있다는 그 자체가 저주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신명기 2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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