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하나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 마음은 바로 불가능성의 마음인데, 주님은 따로 일하신다 그렇게 주님이 따로 일하신다면,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궁금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지금 우리가 일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라고 할 수 있다 . 여기서 우리의 일을 그림으로 그려보게 되면, '언약이 실현되는 과정의 현실', 그게 바로 우리의 일이라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말씀이 어떻게 구약부터 신약까지 전개되었는지, 현재 우리의 몸이라는 육신의 껍질에 다 집어넣어서, 거기서 '우당탕탕' 벌어지게 한다. 그래서 성도는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말씀이 친히 작동하게 된다 여기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이스라엘의 패망, 반역, 불신앙과 같은 것들이 가득 들었는데, 그런 것들이 우리 안에서도 당연히 일어난다. 이스라엘이 죄를 짓고 율법을 어기고 반역하는 것, 그런 것들을 우리 육신을 통해서 되풀이하게 된다. 그러면 되풀이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러한 일들이 누구의 경력인고 하니,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경력이고 이력이다. 예수님께서 택한 자에게 자신의 이력을 되풀이해서 반복하게 함으로서 자기 사람으로 확인시키는 일, 그것을 지금의 우리 일로 작동을 시킨다.성도의 경우에는 매일의 삶이 주님의 일이기 때문인데, 즉 매일의 삶이 성경을 반복하는 삶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는 '우당탕탕'을 반복하는 삶을 매일 매일 살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은 레위기로 조져볼까? 오늘은 민수기로 조져볼까?" 라고 하시는데, "오늘은 하박국서로 해봐? 외양간만 있고 소가 없게 만들어봐? 포도원은 있는데 열매는 없도록 만들어봐?" 라고 하신다. "오늘은 가롯유다 역할을 한번 해볼래? 오늘은 베드로 역할이 좋겠다. 닭이 세 번 울면 나를 모른다고 해라" 라고, 그렇게 성경전체가 압축이 되어서,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반복된다. 왜냐하면 '나' 라고 하는 개인의 사적인 구원은 애초부터 없었는데, 그렇게 구원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예수님의 활동으로, 즉 예수님의 일하심으로 구원을 했다고 한다면, 그러면 그 구원하심의 증인이 되는 방법은 과연 무엇이겠느냐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이런 인간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고 하는, 그래서 인간의 행함을 매일같이 반복시킴으로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하신다는 겁니다. "오늘은 바리새인 노릇을 한번 해볼래? 선량하게 사는 것을 네가 좋아하잖아? 그렇지?" 라고, 그렇게 나오신다.
우리 안에 주님의 일을 벌이시는 것, 물론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인간에게 하시는 것이지만, 그게 들에 핀 꽃도, 하늘을 나르는 참새의 경우에도, 그 속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주님의 에너지가 들어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먹이시고 입히시고 하신다 그런데 여기서 인간에게는 더 추가되는 것이 있는데, 인간은 그것들처럼 먹고 입고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성도가 추구해야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인데, 그 나라의 의라는 말이죠. 그것을 증거하는 것이 성도의 존재이유다.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런 것이 튀어나온다고 해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게 아니고,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미 복음으로 완성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보여주면 됩니까? 이렇게 못난 찌질이들, 전혀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을, 주님께서 그 어떤 위대한 불가능성으로 구원을 하셨느냐는 말이죠. 우리는 '우당탕탕' 하면서 그것만 보여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