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사세요.”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라고 되어 있어요. 죄에 대해서 죽은 자, 라는 이 말이 뭐냐 하면 죄가 계속 살아나기 위해서는 우리는 계속 죄에 대해서 죽은 자 이어야 하는 겁니다. 왜, 그래야 죄가 영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는 영원히 살려내고 우리는 이 땅에 짧게 살다가 짧게 죽어야 되고, 죄와 사망은 영원히 이어지도록 우리가 협조하는 식으로 이 땅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줘야 되는 거예요."(130512 로마서 6장 8-11절의 우리교회 설교)
죄에 대하여 죽은 자, 가 뭔지 궁금해서 이걸 풀기 위해서 신학교에 갔다 해도 과언 아닐 것이다. 이 구절로 졸업논문을 쓰려고 이 책 저책 기웃거리고 이 논문 저 논문 기웃대다 가닥조차 잡지 못하고 헤매다 자책만 하다가 그냥 졸업하고 어쩌다가는 이 주제가 잊을 만하면 그랬었지, 하고 생각났다가 잊을 만하면 그랬었는데, 하고 또 생각나곤 했다.
신학교 들어가기 전에 교회를 다니다가 믿음문제(정확히는 믿음의 주체문제)로 고생했었는데 학교도서관 서가에서 로이드 존스목사의 책 로마서강해를 읽다가 궁금증이 해소되는 기쁨을 맛봤었고 그 길로 에베소서 강해까지 청계천 헌 책방에서 사다가 한 달음에 읽었는데 나중에 보니 에베소서 강해 시리즈는 저자 본인이 앞에서 한 믿음에 관한 주제를 도리어 전부 헤집어서 혼란스럽게만 하는 내용으로 영전투쟁이니 영적 뭐니 하는 것들이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인간의 믿음이란 주님의 믿음이 만들어내는 결과물, 선물로 설명해서 인간이 주체적인 의지나 행위를 아예 근절해서 믿음의 실체를 분명히 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신자의 믿음에 대한 반응을 열렬히 주장하는 것으로서 결국 언약의 구조 안에서만 이해되는 성경의 용어들에 대한 오류를 그대로 드러냈다. 인간구원에 천착한 탓이다. 이건 인간구원에서 시작하면 필히 이 귀결 말고는 없고 이것이 종교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런 육적심상에 말씀의 진의가 새겨질 수 없다. 종교적인 심성으로는 로마서 6장이 이해되지 못한 채 인간구원을 위한 도구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임을 아는 자란 하나님을 대하여 산자에 한해서뿐이다. 즉 하나님을 대하여 산자들에게만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의 진의가 새겨진다. 한시적 생명현상인 인간은 죄를 끊임없이 베껴내기 위한 기능적 존재로서 이 지상에 출현했고 그 죄와 결합해서 새 언약의 구조를 완성시켜 그 구조 속에서 자기이름만 영원토록 주의 자리로서 높임 받겠다는 취지를 그대로 수용하는 의의 관계성만 믿음관계다.
우리는 무조건 죄인의 자리에 영원히 우리 이름을 고정하고 역시 고정된 주의 이름의 자리에서 무조건 하사하는 긍휼(용서)를 영원히 받기만 해야 하는 위치, 그 위치에서 오직 주의 이름만을 높이기만 하는 자리, 혹은 기능으로서의, 혹은 목격자, 혹은 증인으로서 갖게 되는 존재의미를 일컬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라고 사도바울은 했던 것이다. 이렇게 죄에 대하여 영원히 죽은 자로서가 아니면 진정 하나님을 대하여 산자이신 유일하신 분을 알 수도 그 하나님을 대하여 사신 유일하신 분에 의해서 사는 자가 되는 일도 영원히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죄에 대하여 이제는 산자라고 나대는 자 하나같이 하나님을 대하여 죽은 자라는 뜻이고 그들이 증언하는 십자가는 필연 사기다.
941056 내 신대원학번이다. 어떤 교수도 어떤 목사도 어떤 선배나 후배기독교인도 이걸 알려주지 못하더니, 그리고 숱하게 복음적 설교 듣고 강의 듣고 지지고 볶고 살면서도 대충 알듯 모를 듯 그러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살았더니 2013년 5월 12일자 우리교회 주일설교 내용을 5월 14일에 녹취하던 그 “때”(그게 언제냐고 물으면 되지 않는)에 선명하게 그 뜻을 알게 되다.
그 뜻은 이렇단다.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라고 되어 있어요. 죄에 대해서 죽은 자, 라는 이 말이 뭐냐 하면 죄가 계속 살아나기 위해서는 우리는 계속 죄에 대해서 죽은 자 이어야 하는 겁니다. 왜, 그래야 죄가 영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는 영원히 살려내고 우리는 이 땅에 짧게 살다가 짧게 죽어야 되고, 죄와 사망은 영원히 이어지도록 우리가 협조하는 식으로 이 땅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줘야 되는 거예요."(130512 로마서 6장 8-11절의 우리교회 설교, 죽음 안에서 산자, 이 근호 목사)
목사님은 그 뜻을 한 마디로 이렇게 많이 여러 번 말했다.
"막 사세요."
이런 깊은 뜻이 담겨 있었군요.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사시는 것 맞지요?"
그런데 왜 들 이 말 갖고 거품을 무는가?
죄에 대하여 아직도 산자라고 우기고 싶은 거지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를 가지고 영원한 저주, 절대형벌에까지 밀어붙이는 그 십자가가 꼴 보기 싫다는 말인 거지요? 그래서 하나님을 대하여 산자, 를 죄에 대하여 산자, 로 살짝 바꿔치기해서 계속 사람 구원이라는 상품가지고 장사하려는 거지요? 죄에 대하여 산자로 있어야만 구원 장사를 계속 할 수 있잖아요. 보세요, 구원되니 이렇게 사람이 착한 사람으로 변했잖아요, 라고 해야 장사가 되잖아요.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속지 않는답니다. 왜 그런지 아시나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사신 분은 따로 있고 그 사신 분으로 말미암아 늘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기 때문에 그렇답니다. 한 마디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기 때문이죠.
하늘의 별들조차 속삭이는 말, "막 사세요." 그렇게 이 지상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를 찾는 이들이 영원히 그리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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