벅찬 오해
2022년 5월 15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후서 2:11-12
(2: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2: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했다’는 말로는 우리 인간의 가치를 배제할 근거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했다’가 되어야 창조된 세계에서의 인간의 관여가 배제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배제하고 오로지 예수님과 더불어서만 일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악을 만드시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악을 계속 만드시는 이유는 이미 악의 우두머리가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엡 4:8) 따라서 주님께서 무엇을 사로잡으셨는지, 그 사로잡히므로서 인간들은 얼마나 반대로 현실 세계를 이해해 왔는지를 성도를 통해서 전달코자 하십니다.
인간의 지식들은 살아 있으면서 그들이 의식적으로 수집하고 모아놓은 지식에 준해서 판단하고 결정하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만약에 그들의 판단하고 마음먹은 것을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인간들은 “내가 고통스러운 나를 죽음 수도 있겠다”까지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생각하는 죽음도 아직 죽지 않고 죽기 전까지의 생각입니다.
인간들은 따라서 죽으면 자신의 모든 것도 끝이 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끝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지옥 간 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눅 16:23-24)
인간은 지옥가서 또 살아있습니다. 인간은 죽지 않습니다. 못 죽도록 창조된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이라는 창조물이 미워서가 아니라 인간 창조보다 먼저 설정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의(義)요 악(惡)입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미리 창세전에 설정한 이 의와 악을 증거하기 위해 지음받은 겁니다.
인간에게 없는 진정한 죽음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손에 죽으신 하나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죽음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이 죽으신 것을 영원한 말씀 완성을 위해 필요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생각하는 죽음이란 기껏해야 생물적 죽음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성도를 생산하기 위해 자신의 죽음으로 그들을 같은 죽음 안으로 집어넣으십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에게 도저히 있을 수 없었던 ‘나의 죽음’이 십자가 앞에서는 끝이납니다. 그렇다면 성도로서 사는 삶이란 언약적 죽음 이후에 새로 생긴 하나님의 원초적 속성인 의의 관계 안에서 사는 삶이 됩니다. 이 안에서 뭐든지 의가 됩니다.
누가복음 16장 초반부에 예수님께서 불의한 재물을 자신의 장래를 대비하는 일꾼의 지혜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언급하십니다. 그는 여태껏의 자리가 아닌 다른 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던 겁니다. 인간의 삶이 스스로 공포스러워 ‘공포 인생’으로 사는 이유는, 자기를 지키기 위한 처소가 불안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인정된 자리를 어떻게 확보하느냐에 관심두게 되면 이는 어디까지나 자신이 죽기 전의 인식입니다. ‘죽음 이후의 인식’은 ‘왜 내가 굳이 죽어야 하는지’그 이유와 관련된 삶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 의할 것 같으면 하늘에 전쟁이 있었고, 악마와 그 졸개는 하늘에게 쫓겨나 인간들만의 세상을 접수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은 단순히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 정도가 아니라 진리를 불의로 둔갑되는 세상이 됩니다. 거짓이 진리로 유통되고 만연되는 세상입니다. 즉 이 세상에서의 진리와 불의는 인간들 끼리의 토론과 논쟁을 거쳐 정착됩니다. ‘맞다, 틀리다’는 정치적 권력에 의해서 최종 판가름됩니다.
악마는 인간 세계를 지배하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등록과 허가라는 행정 방침으로 복잡한 구조 안에 담아 단순화시켜놓았습니다. 이제 국가 말을 듣지 않는 것이 불의가 되고 악이 되도록 조치한 겁니다. 이제 보편적 세계가 악마가 막돌아다니는 세계가 되었습니다.(욥 1:7) 인간의 생각이 곧 악마의 생각과 합치되니 인간들은 특별히 악마를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평범한 이 세상에서 아무리 오묘한 하나님의 세계를 못보지만 결국에는 악마 세계에서 못벗어나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그 이유는, 악마는 인간들에게도 자기네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할만한 조건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마가 인간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과실을 따먹으라고 하므로서 왜 악마와 주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주시에 따르지 않겠다는 버팀입니다. 자신을 독보적인 단독자로 행세하고 싶었던 겁니다. 사무엘상 9:3에서, 평범한 사람 사울은 자기 집안의 암나귀를 찾으러 길을 떠납니다. 하지만 찾는 와중에서 그는 성신이 임하는 자리에 참여하게 됩니다.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삼상 10:6-7)
그러나 사무엘상 19:9-10에서는 소년 다윗을 죽이기 위해 악신이 시키는 대로 힘껏 창을 던집니다. 이처럼 소년 다윗의 개입은 그 어떤 인간도 자기 운명을 바꿀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는 소년 다윗과 비교해 볼 때, 그는 결국 악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피조물인 인간은 어떻게 노력해서도 지정된 저주의 처소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1:9-11에 보면, 일방적인 주님의 일이 나타납니다. “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어떤 인간들의 견해나 의논도 개입되어 있지 않는 순수한 하나님만의 일입니다. 이런 일 우리에게 알려졌다면 우리는 그냥 이 일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일을 삭제하고 포기하면 될 일입니다. 이 주님의 일이 얼마나 큰 안정감을 줍니까? 그것은 주님의 일이야말로 최종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즉 그 어떤 인간도 이러한 주님의 일을 반길 수 있는 자는 자기 죽음 이후의 의식으로 되돌아와야 가능합니다. 주님의 의식에 공유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더는 자기를 위한 다른 처소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날마다 자신은 삭제당하는 즐거움으로 삽니다. 그 이유는 “다 이루었다”는 압도적 안정감 때문이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이 불의로 날마다 생중계됨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허락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강-데살로니가후서 2장 11-12절(벅찬 오해)220515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 11-12절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11-12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 보고 인간들이 심판받는다, 라고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고요, 인간이란 자체가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심판만 존재하지요. 심판을 심판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시고 그리고 성도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이 말은, 인간이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이기 때문에 피조물은 나중에 의미를 갖게 돼요. 창조주가 먼저 의미를 갖고 피조물은 나중에 의미를 갖습니다. 창조주의 의미를 갖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으로 세상을 창조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요. ‘내가 왜 있는가? 신이 창조해서 있다.’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하는데 그 말이 잘못된 말이에요.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신이 하나님이 창조했다는데 이 자체가 역시 인간에게 먼저 의미를 두기 때문에 그러한 오해가 생기는 겁니다.
인간의 창조는 입에 담을 이유가 없어요. ‘하나님이 인간을 왜 만들었느냐?’ 하는 말과 ‘우리를 누가 만들었느냐?’ 하는 말과 같은 질문이 되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것은, 인간들이 흔히 말하는 신이 우리를 창조했기 때문에 아니라 하나님 내부에 인간이 관여하기 이전에 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누구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한 거지요. 인간은 거기서 빠져야 돼요. 인간의 의미라는 것은 챙기면 안 됩니다. 인간의 의미 챙기면 그것은 종교가 돼요. 종교는 오락이에요. 이것은 친목이고 오락이고 자기 즐거움이고 그냥 자기행복 챙기는 것뿐이에요. 그게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미혹’이라는 거예요.
기독교가 기독교를 미혹하고, 기독교가 만들어낸 모든 개념들, 삼위일체 하나님, 예수, 이것이 인간을 망치게 만들어버렸지요. 어떤 이야기, 어떤 어휘, 어떤 단어를 동원해도 ‘그래서 나는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이런 것으로 마지막에 나와 버리면 그것은 누가 누구를 만든 거예요? 인간이 신을 만든 게 아니에요?
그리되면 인간이 신을 요청한 거예요. 인간이 신을 필요로 해서 개념화시킨 겁니다. 신은 인간이 자기를 이상화시켜서 그것을 신이라고 규정해버린 거예요. 종교의 특징이 바로 그런 겁니다. 신은 죽더라도 자기는 안 죽겠다는 자기의 본심이 그대로 종교에 다 반영되고 있습니다.
인간을 만들기 전에 먼저 의미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의가 먼저 있었고 하나님의 심판이 먼저 있었습니다. 인간보다. 그래서 다시 정리해드리면, 심판을 위해서 인간이 만들어진 거고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인간이 만들어진 겁니다.
하나님의 일을 제발 하나님께 좀 맡겨 놓으세요. 우리가 거들지 말고, 나대지 말고, 전도, 선교, 이러지 마시고 예배, 찬송, 헌금, 교회 세우기, 이런 것 좀 하지 마시고 그냥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께 내맡기세요.
우리가 아무리 교회 다니고, 아무리 설교 듣고 기도해도 마음이 편치 않은 이유가, 본인이 자꾸 다리를 거기에 집어넣기 때문이에요. 본인이 자꾸 거기에 들어가요. “주여, 내가 주를 위해서 뭘 하면 됩니까?” 거기에 대한 답변은 간단해요. “좀 빠져줄래? 좀 가만 있으면 안 되겠어? 왜 자꾸 내 일에 네가 끼어드냐.” 그 말이지요.
사는 게 공포스러워서 그렇습니다. 나 죽고 난 뒤에 지옥갈까봐 두려워서 그렇습니다. 그것은 네 사정이고, 그것은 네가 잘못된 거고 주의 일을 생각하면, 주께서 하신 것만 생각하면 돼요. 제가 예를 하나 드릴 테니까요, 이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벅찬 감격인지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1장 9, 10절에 보면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거 우리가 저질러놓은 일입니까? 우리가 시행한 것, 우리가 계획 잡은 거예요? 일방적이잖아요, 일방적.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하늘이 갈라지고, 주님에게 성령이 임하고. 14, 15절에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이거 우리가 계획한 일이에요? 아니지요. 그냥 일방적으로 주께서 하셨잖아요.
그러면 이게 얼마나 압도적인 안정감입니까? 우리가 나댈 이유가 없지요. 저쪽에서, 하늘 쪽에서 뭐 했다는 것, 우리가 그저 알면 되잖아요. 뭐가 그리 복잡합니까? “내가 너희 데리러 올게. 내가 너희 데려다 천국 갈게.” “어떻게요?” “그것은 나한테 맡기고, 네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고 내가 하늘 쪽에서 구멍이 나게 하시고 거기에서 주께서 성령 오셔서, 예수님 태어나셔서 이제 내가 하는 말은 천국의 말이니까 받고 인정하면 돼. 수긍하면 되는 거야.” 이게 그렇게, 그 바라보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에요?
어떤 사람은 교회 목사, 장로, 집사, 되어서 50년, 60년 교회 다니고, 개척교회 열 군데 하고 예배당 스무 군데 세워도요, 나이 90 가까이 되어서 발발발, 떨면서 살아가요. 왜? 본인이 한 일만 기억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믿은 적 없어요. 오롯이 주의 일을 주의 일답게 받아들인 적이 없어요. 평생을 살면서 자기 가치와 자기 고유의 의미를 못 놔서 그래요. 그걸 놓지를 못해서 그래요.
얼마나 수월하고 얼마나 이게 편한 일입니까? 이게 바로 최종성이 주는 안정감입니다. 최종성이 주는 안정감.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땅에 오셔서 주의 일을 벌이시는 이유는,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 오셨어요. 말썽이 한두 번이 아니거든요. 죽이기 위해서 오셨는데 문제는 이 지옥 가는 사람들, 악마, 악한 천사의 졸개들, 이 악, 이 악의 특징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그들이 죽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들에게는 끝이 없어요. 사람이 살다가 고달프면 자살하면 그만이에요. 번개탄으로 하던가,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리든가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목매 죽는다든지 그런 것이 있겠지만 그냥 살다가 끝을 보면 그 순간에 다 해소된다, 그런 아이디어는 누구나 갖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살해도 안 죽는다는 이 엄청남을 어떻게 감당하려고요? 자살해서 죽으면요, 누구나 자살하면 되지요. 문제는 인간이 안 죽는다는 거예요. 악마의 괴로움은 죽지 않는다는 거예요. 지옥의 괴로움은 죽지 않고 고통이 영원토록 계속된다는 이게 문제거든요.
생물학적 죽음은 죽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죽고 난 뒤에는 본격적으로 또 살아요. 그러니 구더기도 밟으면 죽는데 인간은 밟아도 죽지를 않아요. 구더기도 뭐 죽지 않겠지만 하여튼 인간은 밟아도 죽지를 않아요. 죽지 않으니까 이게 골칫덩어리에요. 김 골칫덩어리, 박 골칫덩어리, 이 골칫덩어리, 골칫거리입니다.
죽음이라는 것, 인간이 자살하고 싶을 때는 뭐냐? 내 인생 끝장내고 싶어서 끝을 보고 싶은데 인간에게는 끝은 허용된 적이 없어요. 악마를 악으로 만드신 이유는 끝을 넘어선 경우에서 배제 시킨다는 겁니다.
끝은 누가 끝이냐? 예수님이 와야 제대로 죽습니다. 제대로 나를 끝낼 수가 있어요. 예수님이 오셔야. 우리의 의식, 우리가 아는 지식, 우리의 경험, 우리의 모든 것, 아, 우리는, 이게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받아주지 않으면 이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억이 끝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고통도, 우리의 공포감도, 두려움도 지옥까지 연장됩니다.
죄지어서 교도소 가는 것도 힘들지만 그래도 교도소 가는 사람에게도 희망이 있어요. 뭐냐? 교도소생활 하지만 나중에 정 힘들면 교도소 독방 창살에 묶어서 그냥 자살하면 되지 않겠느냐, 희망 같은 게 있는데 주님의 지옥에는 “희망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런 희망을 주께서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끝이 없게 만든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 이전에 악이 있었고 인간 이전에 의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이 피조물이에요. 하나님이 생각한 악, 하나님이 생각한 의, 그 범주에서 인간은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게 피조물의 운명이고 어떤 경우도 자신의 운명은 자신의 방법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운명이라 하는 것은 확정되었는데 그 운명은 끝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운명입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운명. 따라서 끝이 있다는 것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습니다. 살다가 살다가~, 노래하면 안 되지요. 살다가 살다가 끝나면 돼요. 그러면 모든 것을 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끝은 생물적 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속성으로 끝내주는, 하나님의 본질로 끝내주는 거예요. 피조물의 생활을 끝장내주는 그 본질, 그 본질로 갈아치우게 해주시는, 그래서 끝장나는 거예요.
이제는 나의 이름으로 하던 생활은 끝났고 이제는 주님의 의가 담긴 생활을 영원토록 이어가는 곳,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이게 내 문제기 때문에 내 문제는 내 손에서 처리가 될 수가 없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죽어도 안 끝나니까 문제가 된 거예요.
우리가 창조주가 아니기 때문에, 피조물이기 때문에 피조물의 운명은 창조주에게 달렸고 창조주는 인간을 만들기 전에 의와 악, 그리고 죄와 의, 이 두 가지의 속성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그 분류에서 도망칠 수 있는 그러한 경우는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한번 보게 되면 11, 12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간추려서 말해서 하나님이 악을 만드시는 분이라는 말이지요, 악을. 악을 만들어내요. 이 피조물이 “하나님은 선하신데 어떻게 악을 만듭니까?”라고 피조물이 이렇게 반발하면 “피조물 주제에 네가 뭘 모르면서 왜 까부냐?” 이렇게 나와요.
너는 내가 만들었기 때문에 만들기 전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는 인간은 모르게 되어 있어요. 인간이 아는 모든 것은, 인식과 의식은요, 죽기 전에 본인이 본인의 욕심으로 수집한 것들이에요. 그것도 다 수집한 것도 아니고 본인이 탐을 내서 수집한 것이 인간의 의식이고 인식이고, 의식과 인식에서 나온 것이 그것이 지식이고, 지식에서 나온 자기의 매 순간의 판단력이 그 지식의 빅데이터, 정보의 빅데이터에서 결정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에서 내뱉어지는 모든 말들은 죽기 전에 기껏 자기가 안다고 한 그것, 그것이 자기의식이고 자기의 판단이에요. 거기에서 인간들은 뭘 하느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 지 자기네끼리 논쟁이 활발하지요. 논의하고 논쟁하고. ‘난 진리 쪽에 속하겠어. 너는 불의한 쪽에 속해라.’ 너무나 일방적인 그러한 어설픈 결정들을 해나갑니다. 저는 그걸 ‘잔챙이들의 논쟁’이라고 하는데 이 ‘잔챙이’라는 것, 이것은 성경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7절에 보면,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쌔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여기 용만 있는 게 아니고 거기 잔챙이들이 있어요. 그 똘마니들이 있다고요. 그의 사자들,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8절에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그래서 9절에 보면,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어디로 쫓기느냐? 사람 사는 동네로 와버린 거예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이 사는 동네로, 에덴동산도 마찬가지인데 그곳으로 용이, 사탄이 들어와 버렸어요. 땅으로 내어 쫓기지요. 그러니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늘나라 차원에서 무엇이 옳은가 그른가의 그 논쟁이 땅으로 확산 되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땅으로 확산 되면서 그 악마와, 여기서 악마라 하는 것은 처소를 떠난 천사를 말합니다, 처소를 떠난 천사와 예수님과의 논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악마가 자기가 결정이 옳았다는 것을 위장하기 위해서 인간에게 찾아와서 인간을 자기 편으로 만들었어요.
자기편으로 만들 때 뭐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부추긴 거예요. 악마가 인간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부추긴 이유가 뭐냐 하면, 이미 하늘나라 전쟁에서 악마가 하는 모든 행위가 불의한 것으로, 옳지 않은 것으로, 악으로 규정 내었음을 감추는 용도에요. 선과 악을, 선을 악으로 바꾸고 악을 선으로 바꾸기 위해서, 가치관이 전도되기 위해서 악마는 인간에게 선악과를 따먹어서 자기와 한통속이 되게 했던 겁니다.
그러고 난 뒤에 이 악마는 인간세계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마음대로 활개 치고 돌아다니는 거예요. 왜? 인간들 생각과 악마의 생각이 똑같기 때문에 인간들이 악마를 알아보지를 못합니다. 악마가, 사탄이 인간세계에 돌아다니는 이야기가 욥기 1장 7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 왔나이다.”
여기저기 다녀도 경찰 지구대에서 체포 못 합니다. 인간들의 사고방식과 악마의 사고방식이 일치되기 때문에 하등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지요. 도리어 이상하게 느끼는 것은 하늘의 전쟁을 땅에까지 확대시켜서 땅에 가서 악마를 체포하러 온 주님의 생각이, 악마뿐만 아니라 인간들 생각까지 모두에게 이상하지요. 실망스럽지요. 예수님의 생각이.
그래서 열두 제자도 예수님을 실망스럽게 여기고 떠나버렸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 당시 모든 인간들은 예수님이 꼭 죽어야 마땅한 사람으로 간주했어요. 그 판단, 그 의식, 인식, 예수님은 죽는 것이 마땅하다는 그러한 지식, 거기에 대해서 인간은 거기에 문제 있다고 전혀 생각 못 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들이 자기가 살아가고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자기가 그만큼 옳은 생각을 갖고 바른 생각을 하기때문에 살만한 가치가 있어서 산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자기 보기에 자기가 옳기때문에, 자기의 판단과 자기의 경험 체험과 자기아는 지식이 옳기때문에 살아가는 것, 이것은 혜택이라고 보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보는 거예요.
오히려 몸이 아프다든지, 시름시름 앓다 죽는다든지 이러면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들에게 중독들이 많이 있거든요. 마약중독, 노래중독, 놀러 가는 중독 등 많이 있지만 인간들의 가장 근원적인 중독은 뭐냐 하면, 본인이 살아야 된다는 중독이에요.
뭐 이유가 어쨌든, 남이야 전쟁을 하든 말든, 코로나든 뭐든 무조건 사재기해서 나만 살면 된다, 언제까지 사는가는 모르겠다만 하루하루 내가 살아남는 이것이 진리고, 나한테 옳은 일이고, 나의 판단은, 내가 살겠다는 판단은 천하 누가 뭐래도 이것은 합당하고 옳은 판단을 내렸다고 자부하는 것이 인간이 악마한테 배운 습성입니다. 죽지 않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죽지 않으려고 한다는 이것, 이것은 바로 죽음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 악마한테 속아 넘어간 거예요.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악마가 인간세계에까지 도피하게 만들고 도망쳐서 거기서 인간까지 유혹하도록, 사전에 방비하지 않고, 선악과 다 치워버리지 않고, 선악과나무 근처에다 25만 볼트 전기 철망을 쳐서 따먹지 못하게 사전 조치하지 않고, 심지어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도록 유혹적으로 해놓고, 누가 와서 언제라도 따먹을 수 있도록 해놓고 따먹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아담이 태어나서 2천 6백일 동안 선악과 안 따먹었다 치더라도 그다음 날 2천 6백하고 하룻날 따먹으면 앞엣것은 다 무효가 돼요. 아무리 안 따먹으려고, 안 따먹으려고, 안 따먹으려고 노력을 해도 계속 선악과는, 그것도 한 모퉁이가 아니고 중앙에 서서 유혹하는 것 같아요. 따먹어라~ 라~라~라~라~라~라~라~, 먹고 싶지~지~지~지~지~지~지~지~!
악마가 이 세상에 왔는데 주께서 왜 그렇게 하는가? 그것은 인간에 관여되지 않은 외부세계를 주님께서는 그 잔챙이들과 더불어 이 세상을 인간의 내부세계로 바꾸고, 그 내부세계를 다시 외부세계로 구체화 시키는 작업 중 하나입니다.
첫 번째, 그 외부세계라 하는 것은 감추어진 외부세계인데 그것은 악마와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에서 이미 전쟁이 터졌다는 그것과, 내부세계는, 내부사건은 뭐냐, 악마가 이미 인간의 정신머리를 완전히 세뇌시켜 가지고 반대로 바꾸어 놓았을때에 인간에게는 알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이 생긴다는, 마음속에 있는 불안정성, 뭔가 해야 된다는 것,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불안정성, 전쟁의 갈등이 인간의 내부갈등, 마음의 심적 갈등으로 번진 것이 인간의 내부사정이고 내부사건입니다.
그리고 최종적인 것이 뭐냐? 최종적으로 악마는 사로잡혔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다 이루었다 할 때 악마는 체포되었어요. 에베소서 4장 8절에 나옵니다.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로잡을 자를 사로잡았다. 오야붕을 사로잡은 거예요. 사로잡아놓고 주께서는 풀어주는 겁니다.
계속해서 주께서 심판을 위해서 심판받아야 되고 지옥 가는 사람들을 생산해내기 위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이 있는 겁니다. 12절에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얼마나 명쾌하고 명확한 주의 일입니까?
예수님이 요단강 세례받을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왔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 복음이 시작되었다. 이게 얼마나 명쾌하고 명백한 일입니까? 그것 못지않게 오늘 본문 9절부터 보게 되면,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걸 제가 같은 뜻인데 달리 이야기하면, ‘주님께서’라고 이렇게 주님을 앞장세우는 겁니다. 괄호 열고, ‘주님께서’ 넣고 괄호 닫고, 즉 (주님께서) 악한 자로 일하게 하사 그들로 하여금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수를 멸망하는 자들에게만 주어지게 하는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진리의 사랑에서 배제되어서 기어이 구원함을 받지 못하게 하심이라.
이렇게 설명이 되고요, 11절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하나님께서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일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반드시 거짓 것이 입에 쏙 넣어지도록 믿게 해야 돼요. 믿게 하심은, 12절에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니까 이미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구원시킨 사람 빼돌려 놓고, 따로 제켜놓고 나머지 사람들은 기어이 그들이 죽기 전에, 그들이 지옥 가기 전에 그들이 지옥 갈 타당성을 주께서는 확보하는 식으로 이 세상에 악마가 설치도록 생중계를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이게 명쾌하고 신나는 일입니까! 그래서 성도가 이 땅을 살아가는 태도는 뭐냐? 날마다 불의와 죄지으면 되지요. 편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편안한 마음으로, 공포심 없이.
그 이야기가 누가복음 16장에 나옵니다. 성경에 다 있어요. 누가복음 16장 1-8절까 지 보게 되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어떤 청지기가 있는데 그 청지기가 사무를, 근무를 계속 못 할거라는 계산을 하고 주인을 속여서 장부를 조작합니다. 퇴직하기 전에 자기하고 짝짜꿍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서 생활을 해가려고 문서를 조작하는 일에 대해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느냐? 이걸 불의하다 했어요. 이게 자기 것이 아니거든요. 자기 것이 아니고 이게 주인 것인데 마치 자기 것처럼 횡령을 한 겁니다.
누가복음 16장 9절에 보면, 이걸 가지고 “불의의 재물” 거짓된 재물, 잘못된 재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잘못된 재물로 자기의 처소를 마련하는 이 불의한 직원, 청지기가 바로 전형적인 성도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이게 성도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지금 너희들이 이렇게 살 용기가 없다면 너희들은 믿음 없다는 뜻이에요. 내가 이 땅에서 불의하게 살 용기가 없다면 그 사람은 성도가 아닙니다. 주의 백성 아니에요. 그 사람은 아직도 죽기 전 의식으로 무장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될 이유를 이미 품었다면, 이미 죽고 난 뒤에 주님께서 무엇 때문에 죽었으며 나는 왜 주와 함께 죽은 자로 간주 되는 이유는, 지금 살아 있으면서 불의한 청지기의 두 번째 청춘을 살라고, 청춘, 예, 불의한 두 번째 인생을 신나게 살라고 주께서 이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정말 불의한 데서 구원받았다면 그 불의함을 이제는 왜곡되지 않게 진실 된 안목을 가지고 불의함이 뭔지를 체험을 해야 될 기회를 우리에게 한평생 부여하시는 은혜입니다. 스스로 장하다고 이야기해 주세요. 이쯤 해서 ‘장하다. 이 불의한 청지기야. 어떻게 무슨 용기로 그런 불의한 짓을 행하느냐? 이 장한 인간아. 아, 내가 생각해도 장해.’
우리가 주의 일을 알기 전까지는, 십자가를 알기 전까지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착해야 천당 가는 줄로 알았어요, 착해야. 헌금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선교하고, 예배 참석해야, 그래야 천당 가는 줄로 알았어요. 왜 그러냐 하면……, 아까 한 설교 다시 해야 되겠어요.
지금 이 세상이 불의가 진리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활개 치고 있고 하늘나라에서는 그것을 생중계하고 있어요. 왜 이 세상이 불의가 진리로 행세하느냐 하면, 인간과 인간, 너와 나와 논쟁하기 때문에 그래요. 국민의 힘하고 민주당하고 논쟁해서 그런 거예요. 청문회 하는데 질문하는 사람이 “잘 아시겠지요?” 하니까 장관후보자가 “예, 새겨듣겠습니다.” 그러니까 이수진이라는 의원이 “지금 비꼬는 겁니까? 지금 꼬는 겁니까?”
제가 지금 여러분을 꼬는 거예요? 맞습니다. 꼬는 것 맞습니다. 인간은 사는 게 너무나 공포스럽기 때문에 어쨌든 내 힘으로 내 인생을 한번 바꿔보려고, 내 운명을 바꿔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래 가지고 어딜 가느냐? 교회 다닙니다. 교회 가서 뭐하는데? 놀지요. 그냥 저희끼리 노닥거리면서 노는 거예요. 기도하고 놀고, 전도하고 놀고, 바자회 하고 놀고, 설교 듣고 놀고, 예배라는 쇼 구경하고 놀고, 그냥 노는 거예요. 성경 공부해서 지식으로 확보하고.
그런데 문제는 내가 언약적인,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다 이루었다, 에 해당 되는 죽지를 않고 있으니까 그런 식으로라도, 자기에게 밀려오는 ‘혹시 지옥 가면 안 된다’는 공포를 그런 식으로 어떻게 해결해보려고 아주 몸부림을 치고 있는 거예요.
압도적인 안정감이 없어요, 뭘 해도. 벅찬 감격도 없고요. 맨날 묻는 게 ‘주님, 뭐하면 구원받습니까, 뭐하면 감사가 생깁니까, 감사하라 했는데 뭘 하면 감사가 생깁니까?’ 답변은, 죽음 이전의 의식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심판하러 왔으면 흔쾌히 그 심판을 받아주세요. 이게 복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이 불의한 청지기야. 이 돈은 전부 다 더러운 창기의 돈이야.”라고 하면 “아이고, 고맙습니다. 제대로 이야기해 주신 분은 주님이 처음이에요.” 이러면 될 것 아닙니까. 이러면 되잖아요. 그게 뭐 어려워요?
“당신이 평생 동안 한 모든 짓거리는 나만 살기 위해서 한 짓거리였습니다.” “어째 알았지? 그 진리를 처음 알았네?” 이러면 되잖아요. 그게 어렵습니까? “당신이 몸 아픈 것은 당신이 죄 지어서 그렇다.” “어째 알았지? 어제부로 죽었어야 돼요. 사는 것 도 이상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에 비해서 세상 사람들은 아무것도, 죽음을 모르니까, 생물학적 죽음 말고 진짜 십자가가 와서 나를 죽였다는 그 내용 ‘네 죽음을 내가 다 이루었다. 네 죽음에 대해서 걱정하지 마. 내가 죽여 줬어.’ 그렇게 내가 다 이루심이 오기 전에는 그냥 강남 스타일이에요. ‘갈 때까지 가볼까, 뚜벅뚜벅’ 그런 것, 그냥 갈 때까지 가보는 거예요. ‘뭐 장로 집사 되면 뭐가 되겠지.’ 되긴 뭐가 돼요? 아무것도 안 되지요.
세상에서의 진리라 하는 것은 국가 차원에서 등록시킵니다. 허가시켜요. 등록되지 않고 허가되지 않은 것은 전부 다 불법이 되고, 등록되고 허가된 것은 진리로 행세합니다. 그것은 모든 복잡한 것을 악마는 이성적으로 도식화 시켜서 그래요.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이 시키신 이유가 뭐냐? 그것은 처음 전쟁을 뚜렷이 윤곽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처음 전쟁. 지상에서 잔챙이들에 의한 전쟁, 논쟁을 통해서 진리를 추구하는 이것을 학문이라고 이야기해요. 학문 또는 철학, 과학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하면서 처음 전쟁, 인간이 배제된 채 주님과 악마가 했던 그 전쟁, 그 전쟁에서 모든 의미가 확정되었다는 사실을 그걸 성도의 눈에 비로소 비취게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사무엘상 9장 3절에 보면 “사울의 아비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고 그 아들 사울에게 이르되 너는 한 사환을 데리고 일어나 가서 암나귀들을 찾으라 하매” 여기 사무엘상 9장 3절에 사울이라는 사람은 아주 중성적인, 중립적인 사람이에요. 옳고 그름과 상관없는 그냥 평범한 보통사람입니다.
보통사람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암나귀를 잃어버리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러다가 암나귀 찾으러 가는데 사무엘상 10장 6, 7절에 오게 되면,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사람이 되리라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여기에 갑자기 일반적이고 평범한 보통사람이 하나님의 예언, 하나님의 진리의 영역 안으로 들어와 버려요. 그야말로 새사람 되었어요. 그런데 사무엘상 19장 9-10절에 보게 되면 “사울이 손에 단창을 가지고 그 집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탈 때에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울의 앞을 피하고 사울의 창은 벽에 박힌지라.”
여기에 악신이, 여호와의 부리신, 여호와께서 친히 집어 넣어준 악신이, 여호와께서 사울에게 집어넣은 악마, 악신이 나올 때에 사울은 사무엘상 10장에서 분명히 성신을 받았고 하나님의 예언을 했던 그 사울이 여기서는 악신을 받아서 악신 받은 행위를 보여주게 됩니다.
평범한 것처럼 보이는 이 제한적인 한계가 있는 이 세상에서 사울은 진실의 영토에 접근했고 진실의 영토에 접근하면서 살아가는 순간 악이라는 것을 접하게 돼요. 그러니까 진리 안에 두 가지로 갈라지는데 진리 안에서 의가 생기고 악이 생기는 거예요. 의와 악이 두 개가 합해야 이게 뭐가 되느냐? 이게 바로 진리가 돼요.
그래서 불의한 청지기가 성도로 살면서 우리는 주께서 십자가 지기 전에 나의 역할은 악의 역할이다, 악마에 놀아나는 역할이다, 라는 것을 흔쾌히 받아들이면 되잖아요. “나는 죄인이다.” 왜 말을 못 해? 그거 하면 되잖아요. 하늘에 전쟁이 있었는데 하늘의 전쟁에서……, 계시록 앞에 유다서가 있거든요, 유다서 1장 6절에 보면,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
악마를 두고 자기 처소를 떠났다고 했어요, 자기 처소를. 자기 자리를 떠난 거예요.그러면 인간의 자리는 뭐냐? 이 땅이지요. 땅에 왔는데 자기 처소를 떠난 악마가 인간과 합세해서 이 세상의 왕으로서 악마가 등극하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이 더 이상 인간처소가 아니고 뭐냐? 악마가 자기 지위를 떠난 처소라고 규정을 받게 된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이 땅에 산다는 것은 이것은 성공한 인생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출세했다고 해서 대단한 것 아니에요. 처소 자체가 이미 수상하게 망가져 버렸어요. 이게 주님하고 대적하는 그러한 성질이 작동하는 세계, 진리를 불의로 보고 불의를 진리로 보는 세계에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냥 나오게 하는 게 아니고 왜 주님의 심판이, 심판주 되시는 예수님이 정당한 심판을 내리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에서 우리로 하여금 악마와 한통속으로 불의한 청지기의 삶을, 나밖에 모르는 삶을 살게 하는 거예요. 악이라 하는 것은 개인적인 고유의 자기 의미와 가치를 챙기는 것을 악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왜 그러냐 하면, 하늘나라 전쟁할 때 악마가 자기 처소를 떠난 이유가 있어요. 쫓겨난 이유가 전쟁에 져서 그렇지만 악마가 전쟁하는 이유가, 나는 그리스도의 명령과 지시를 받기 싫다는 것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거 아셔야 돼요. 악마가 왜 하나님과 등을 돌리는가? 하나님의 지시를 듣기 싫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지시를 듣기 싫어서 그런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중심의 종교는요,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누구나 다 생각하는 거예요. 그거 말고 진짜 성령이 오게 되면 정말 담백하고 명쾌한 예수님이 한 일 그것만 관심이 있고 다른 데는 별 관심, 자기 자신한테는 관심 둘 필요가 없지요. 관심 두나 안 두나 불의한 청지기인데 뭘 관심을 둬요.
벨기에 가면 시스루교회(see through church)가 있어요. 시스루교회가 뭐냐 하면, 멀리서 보면 교회 같은데 가까이 가서 보면 구멍 뚫린 철판만 되어 있어요. 멀리서 보면 교회 모습인데 철판 조각으로 쌓아 올린 교회가 있어요. 시스루 교회에요. 투명한 교회. 실체 없습니다. 교회라는 실체가 없어요. 시스루교회에요.
눈으로 그냥 통과하라는 그런 뜻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교회가 있다 하는 그 순간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처소 아니에요. 사람이 이 땅에서 오직 죄가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 죄라 했잖아요. 인간이 이 땅에서 너무나 사는 게 힘들기 때문에 자기의 자리를, 집터를 마련해요.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거기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리에 대한 제거, 삭제가 되지를 않아요.
야고보서 2장에 보면, 교회 조금 나온 사람도 몇 번 들었던 이야기가 나와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그 이야기 들어보신 적 있지요. 행함이 없는 믿음.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하니까 좋다 했는데 거기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니까 이번에는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행함을 추구하는 제대로 된 믿음을 받고 싶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해석이 왜 잘못되었느냐 하면, 거기에 행함이 있는 믿음의 예를 두 사람을 듭니다. 한 사람은 아브라함이고 한 사람은 기생라합이에요.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이 뭐냐? 자기의 처소가 삭제당합니다. 자기가 평생 살아 있으면서 자기가 의식하고 간직했던 자기 처소가 날아가 버려요. 하나는 자기의 자식을 죽이고 하나는 자기의 혈육을, 국가와 민족이라는 그 혈육공동체를 기생라합은 배신해버립니다.
왜 배신하느냐? 이곳이 나의 영원한 처소가 아니기 때문에. 처소를 떠날 때 인간은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죽기 전에 갖고 있던 모든 의식은 악이라는 것을 생각 못 하고 그저 붙들려고만 하는 거예요.
이런 노래가 있어요.
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는 날
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 밖을 나설 때
가슴 속에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지만
왜 아쉬움이 남아요? 꼭 옛날 여자들 시집갈 때 친정을 떠나는 기분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내 집인데 내 집과 나와 분리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동안 나름대로의 약간의 생활의 안정감을 누렸던 것은 결국은 이 땅에 나만을 위한 처소를 따로 내가 장만했다는 그 자부심 때문에 겨우 꾸역꾸역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악이라는 말이지요. 안 죽으려고 발악하고 있는 거예요. 이러한 자기가 자기를 지키려는 것 때문에 이 세상에 국가라는 이름으로 악마가 와서 설치면서 모든 것을 등록하고 모든 것을 허가하고 할 때 사람은 주저 없이 거기에 등록하고 허가해요. 왜? 그게 맞다는 거예요. 그게 맞다고 하는 것, 그걸 오늘 본문에서 불의하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한 거예요. 그게 불의한 거예요. 맞는 게 아니고 그게 틀린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날 성도는 뭐냐? 틀린 것만 골라 하면 되는 거예요. 참 쉽죠, 잉! 왜? 처소는 이미 내가 마련한 게 아니고 처소는 주께서 죽고 난 뒤에 이미 주께서 찾아오심이 그게 처소가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20장 17절에 보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를 때 너라고 부르지 않아요. ‘너희’라고 불러요. 그리고 ‘우리’라고 불러요.
부르면서 20장 19절에,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고 제자들이 벌벌 떨고 있을 때 문들이 닫혔는데 19절에, “문들을 닫았더니” 문이 하나가 아니고 여러개의 문이 있었던 모양이지요.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고 성령을 부여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처소는 나를 위해서 내가 만든 처소가 아니고 주께서 주님의 일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절차 중 하나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처소에 들어오는 일도 그중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거예요. 더 이상 나의 판단력, 식별력, 불필요합니다.
이 일 하고 난 뒤에 그때 그 자리에 도마가 없었어요. 도마라는 사람이 없었는데 주께서 오셨다, 평강이 있으라 하면서 성령 줬다, 하니까 나는 보지 않고는 못 믿겠다, 또 자기의 고유의 가치와 판단과 인식력, 지식, 이걸 동원해요.
주님께서 “그렇다면 네가 그 짓 하는 그것, 평소에 네가 살아오면서 재주가 그것밖에 없으니까 그래, 봐라! 봐! 자, 집어넣어.” 집어넣고 난 뒤에 도마가 하는 말이 이제 믿겠습니다, 가 아니라 “나의 하나님 나의 주십니다.” 곧 “주님께서 내가 창조 이전에 하나님이 예수님과 하시고자 한 그 일의 여파로 거기의 하나의 전개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피조물로 주의 일을 하게 되었군요.”라는 고백으로 나의 하나님을 자기 존재보다 앞장세우는 거예요.
이것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될 수가 없습니다. “그림 하나로 천 개의 말을 그릴 수 있다는데 왜 나는 그대를 그릴 수 없나요. 말로는 내가 아는 그대를 보여줄 수 없어요.” 이런 가사의 노래가 있어요. 그러니까 사랑하는 관계는 이래요
If a man could be two places at one time
한 사람이 동시에 두 곳에 있을 수 있다면
I’d be with you
나는 그대와 있을 거예요.
Tomorrow and today
Beside you all the way
내일 그리고 오늘 언제나 그대 곁에
And when the world was through
세상이 끝나고
Then one by one
The stars would all go out
하나씩 하나씩 별들도 사라질테고
Then you and I would simply fly away
그때도 당신과 나는 그저 저 멀리 날아가면 그만이지요.
“IF”라는 노래의 가사입니다. ‘함께 사랑’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이 행함이에요. 믿음의 행함은 사랑인데 그게 뭐냐? 나를 늘 삭제해도 괜찮아요. 살아봐야 불의한 청지기인데, 배운 것은 그것밖에 없는데, 맨날 죄만 짓는데 언제든지 삭제해도 괜찮아요, 라는 그 벅찬 안도감, 그리고 안정적인 처소, 주께서는 우리를 주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의 다 이루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마치 생고구마를 휴대용 칼 가지고 베어먹듯이 우리의 사람을 5월 13일, 잘라내 버리고 5월 14일, 잘라내 버리고 5월 15일은 아직 다 안 끝났으니까 남겨두고요. 오늘 지을 죄가 또 있어요. 지난 것 하나하나 고구마 잘라내듯이 다 잘라내 주시는 그게 왜 가능하냐? 이미 우리는 죽은 채로 사라지기 때문에 그래요.
그 사라지는 그것이 바로 성도의 성도다움입니다. 가볍게 사라질 수 있는 것. 자식 키우는 것 내 책임이고, 가정이고 뭐고 다 쓸데없는, 다 쓸데없는 소리예요. 지금껏 내가 책임져서 내가 살아온 것 단 하나도 없습니다. 주께서 이 세상이라는 무대, 연극무대에 우리를 아직도 올려놓고 일하시는 이유는 불의함이 만연되어 있고 이 불의함에서 벗어날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가룟유다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요한복음 13장 2절에 보면 사랑을 이야기할 때에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서도 2절에 보면 단언하여 ‘아니다. 한 사람은 뺀다.’는 겁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우리의 창조보다 주님의 사랑이 먼저 있고, 그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겁니다.
야곱이 아무것도 하기 전에 주께서 사랑했고, 에서가 태어나지도 않고 아무것도 한 적도 없는데 하나님이 너를 미워함을 위하여 에서가 태어난 거예요. 이게 의로운 거예요. 이게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 불의한 자는 자기가 죽기 전이기 때문에 죽기 전에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끌어모은 모든 지식, 빅데이터 정보는 그게 불의한 것으로 판정을 내릴 수밖에 없어요. 왜? 이 세상은 악마가 집어넣은 사고방식으로 만연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어떤 학문도, 어떤 테크닉 기술도, 어떤 공장 회사도, 어떤 가정도 불의가 진리인 척하면서 그 나름의 논쟁을 통해서 옳다 그르다, 를 판정을 내리는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게 계속 생중계되고 있다 했잖아요.
그렇게 옳고 바르게 살면서도 늘 불안하고 근심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끝이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방식으로 지옥 가서 맨 그 짓 하고 있는 거예요. 부자가 지옥 갔으면서도 아직도 자기가 잘난체하면서 “저 낙원에 간 거지 나사로 좀 불러내서 나에게 물 좀 찍어 주면 안 됩니까? 내가 지금 목이 너무 마릅니다.” 목이 마르다는 것은 지가 목을 축여야 될 정도로 나의 존재가 가치 있다고 우기는 이 세상 버릇을 못 버린 거예요. 아예 안 버리도록 주께서 해주십니다.
그래서 끝으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방향성입니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해도 여러분 신경 쓰지 마시고,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신경 쓰지 마시고 이 방향이 복음의 벅찬 최종성과 안정감과 관계되어 있는 행위냐, 이 방향이 복음이냐, 아니면 ‘이래도 뭐 살아야지. 이래도 갈 때까지 가 봐야지. 뭐 누가 알겠노? 누가 천국 가 봤나? 하나님 누가 본 사람이 있나?’ 이런 식으로 끝을 넘어보지 않은 사람, 이것은 하나님의 천국에서 배제된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아이디어를 제공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제공한 아이디어는 기껏 나 잘났다, 나 의롭다, 나 착하다, 나 훌륭하다, 나 살아 남아야 되겠다, 는 고집에 불과함을 이제는 깨닫게 해주시고 언제 죽어도 상관없을 정도로 주의 하는 일에 관심 두고 거기에 빠져드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