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욥기8: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아빠와 함께 2022. 5. 16. 10:01

하나님께서 중보자를 통해서 우리의 지을 죄는 죄다 짓게 해놓고서 끝에 가서 중보자 제도를 삽입시키는 이런 아이디어는 인간 머리에서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은 이런 중보자 제도보다는 하루하루 바르게 살아서 그때마다 칭찬받고 복 받는 그런 선악적인 체제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내부를 감추시고 일을 하시다가 욥기 마지막에서는 하나님 내부를 드러내시고 하나님은 뒤로 빠져버리죠. 그러면 ‘천지를 창조하시는 하나님 바르게 살겠습니다’라는 인간과 하나님 관계가 소멸되고 사라지고 ‘너희들 때문에 일곱 양, 일곱 염소처럼 내가 희생하마’라고 너희들 때문에 희생하는 새로운 하나님 모습으로 마지막에 드러내죠.하나님은 계시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익히 아는 하나님이에요. 그 하나님은 빠지고 하나님을 위해서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그 자체가 너희들이 잘못된, 하나님을 모르면서도 하나님이라고 우기는 그 잘못된 하나님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중보자가 되어야 한다고 등장하는 마지막 때 등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제대로 바꿔서 하나님 내부가 드러나는 시기가 이 세상이 끝장나는 때입니다.그리고 세상에 끝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세상에 끝에 예수님의 중보자적인, 희생제물이 되셨다는 그 시기가 되면 세상은 더 이상 진척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왜? 알 것 다 알아버렸으니까. 그러면 우리는 뭐냐. 히브리서 8장 5절에 보면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라고 간단히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모형이었다는 거죠. 마네킹이었어요. 인간이 모형이라는 말은 인간 속에 죄만 잔뜩 들어있다는 겁니다. 죄만 들어있는 마네킹이 바로 인간이었습니다.욥 자체가 하나님과 관련성이 없는 친구들로 인해서 희생제물이 되었다는 점에서 욥은 의롭게 될 수밖에 없는 노선에 해당 되는 사람으로서 활용당한 겁니다. 욥은 대게 억울하게 당한 거죠. 특히 욥이 중보자적 노선에 들었다는 증거는 욥 본인도 이해할 수 없었던 아주 처절한 고난과 아픔이 있었어요. 병이 들었거든요. 욥은 자신이 갖고 있는 의로움과 고난을 연계해보려고 그렇게 해석을 하려고 노력해도 하나님은 ‘쉿’ 입 다물고 계시지, 친구들은 무지하지, 본인도 그냥 무지하면 끝나는데 아픈 당사자는 아무 해결책도 없이 아프기만 하지요.그런데 그것이 나중에 보니까 하나님이 욥을 선지자로 사용하기 위해서 나의 아픔을 욥 너에게 집어넣었다. 이로써 너는 나의 의의 노선에 합세되고 들어온 사람이라는 해석이 됩니다. 욥이 잘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단지 십자가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욥이 의롭다고 판정받는 거예요. 이게 마태복음 5장 10절에도 나옵니다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시며 바로 선지자들처럼 너희도 그 의의 노선에 함께 있다고 하나님께서 평하십니다.


중보자라는 것이 얼마나 획기적인 것인지를 우리가 지금 상상도 못 하고 있어요. 우리가 그냥 이 세상에 남들과 같이 섞여서 살면 중간쯤은 갈 것이라는 사고방식 이것이 은연중에 예수님의 무덤에 보초 세우는 그런 어리석은 행동에 불가합니다. 그러면 무슨 출입을, 무엇을 바리새인들은 지키고자 했는가. 예수님의 세계관을 지키려고 했던 겁니다.예수님의 세계관을 왜 지키려고 했느냐.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마네킹이라는 것을 몹시 불쾌하게 느낍니다. 우리가 모형이라는 사실을 굉장히 불쾌하게 여깁니다. 물론 성령 받은 사람에게는 해당이 안 되지만 세상 사람에게는 이것이 대단히 기분 나쁜 이야기예요. 얼마나 하나님께서 욥의 친구와 욥을 이용했는지 마태복음 21장 42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라고 나옵니다. 기이하다는 것은 이상하고 생각도 못 한 일이라는 거죠. 지금 욥의 친구나 욥 전부 다 욥이 중보자가 되리라는 것은 생각 못 했어요. 기이한 일입니다. 기이한 일이 되기 위해서 필수 코스가 뭐냐 하면 버려져야 해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그러니까 건축 전문가들이 보기에 정말 아무 쓸데 없다고 버린 거예요. 우리는 남들이 나를 쓸데없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늘 초조함을 갖고 있습니다. 좀 자신감을 가지고 ‘네가 버려도 주님이 버림받은 것처럼 우리도 버려져 마땅하지’라는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고 버림받을까 봐, 그렇게 인생 실패로 끝날까 봐 겁을 엄청 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원리가 욥은 철저하게 건축자들이 버린 돌처럼 쓰이는 거예요. 일곱의 수송아지와 일곱의 수양처럼 본인들의 고유한 본인의 가치를 위해서 본인이 존재할 수 없다는 거예요.그냥 진짜 제대로 살아계신 분은 주님이고 너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는 모형으로써만 21세기 5월을 당연히 보내야지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이 뭐냐. 여러분들이 침대에서 주무시는 분이 계시죠. 잠이 잘 오는 이유는 ‘스프링아, 너 오늘 좀 혼나봐라’라고 그냥 자기 몸을 스프링에게 맡기고 사정없이 눌러버리는 거예요. 중보자를 중보자답게 하는 방법은 주님을 사정없이 핍박하는 거예요. 그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라고 하면 주님이 ‘너는 우리 사이에 미안하다는 소리 하면 안 돼’라고 하십니다. 주를 사정없이 핍박을 해줘야 합니다. 세상에 사울처럼 핍박을 한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였는데. 심지어 스데반집사 죽일 때도 가담했잖아요. 그럼에도 가장 중보자의 가치와 의미를 보여준 것은 사도바울이에요. 예수님을 가장 못살게 굴었으니까요. 그렇게 못살게 굴었으니 죄인 중에 괴수가 될 것이 뻔하고 이런 자기가 창세 전에 이미 구원받기로 확정되었다는 사실에 입을 다물 수가 없지요. 놀라버리죠. 이미 너무 놀라서 강도의 위협과 도적의 위협과 굶는 위협은 아주 사소한 거지 위협도 아니에요. 내가 한 짓을 생각하면 자기가 자기의 의로움을 챙길 수 있는 근거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욥기 본문의 핵심입니다. 네가 중보자가 된다는 말은 주님의 중보자 아픔에 욥이 참여되는 거예요. 아무리 하나님이 욥을 자랑해도 거기서 욥은 거기서 친구보고 ‘거봐, 내 말이 맞잖아. 하나님이 인정해 줬잖아. 까불지마’라는 식으로 나대지 못합니다. ‘주여, 제가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되어야 마땅합니다’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거죠.여러분도 그런 식으로 자기 인생을 주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신 존재로 받아들이실 거죠?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중보자라는 것은 나 구원받으려고, 나 예수 믿는 거 자랑하려고 아는 것이 아니고 아직도 내가 주를 핍박할 것이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침대 스프링을 그냥 눌러버림으로써 침대의 의미를 여과 없이 다 마음껏 쏟아내게 하는데 이 지독한 죄인을 사용하시는 것에 감사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욥기 8장 7절을 이제는 여러분의 고백으로써 한번 공격을 해보세요. 8장 7절에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이걸 공격해보세요. 여러분들이 회사 사장 아니면 교회 목사님 아니면 자기 농장의 주인 아니면 가정의 가장이라고 하고 아이들도 다섯 명정도 있다고 칩시다. 여러분이 어떤 모임이나 회의에 참여했는데 다른 부모들은 자기 자식 자랑합니다. 그들이 말합니다. ‘우리 자식은 처음에는 아무것도 못 하더니 나중에는 크게 성공했다. 창대했다’라고 합니다. 이제 여러분 차례입니다. 여러분이 그들을 어떻게 공격하겠습니까? 뭐 십자가 알고 부활 알고 중보자 알아놓고 막상 내 자식을 내가 공격하려고 하니까 ‘우리 자식은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나중에는 창대했어요’라고 하게 되면 오늘 본문에 보면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하지 못한 거예요.거기에 더더욱 정당하지 못한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우리 자식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안 바뀌었어요. 바뀐 하나님이 아니고 옛날 으레 남들이 믿는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우겼던 그 잘못된 오해한 하나님 가지고 자기 자식 출세한 곳에 바로 연결해 버렸습니다. 욥도 그랬던 사람이고요. ‘제가 자식을 위해서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우리 자식 잘되게 해주셨다’ 이런 이야기나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이야기나 여러분은 이게 칭찬이 아님을 아시죠. 칭찬이 아니면 남들을 공격하지 말고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의 이러한 본심을 한번 공격해보란 말이죠. 정답은 이것입니다. 같은 노선에서는 시작할 때 창대를 노리고 들어가요. 그러나 다른 노선이 와버리면, 예상 밖의 다른 노선이 와버리면 이것은 기존 노선에서 내가 생각했던 문제와 열쇠는 폐기되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내가 나중에 성공할 거라는 그 노선, 그 노선은 중보자의 관여 없는 동일 노선, 예수님의 모형으로 적절치 않습니다. 정말 여러분이 예수님의 복제물이고 예수님의 모형이라면 무엇을 날마다 떼 내야 하는지를 알 것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것을 이제는 여지없이 떨쳐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들이 이야기해도 우리에게 유리하면 진리라고 오해했던 저희들, 주님 십자가 생각해보면 어리석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키려고 문에 보초 세웠던 그런 양상으로 살아왔습니다. 주님의 부활, 십자가가 내가 나를 지키는 모든 것을 허사로 만드는 이 사실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내 생각 정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난이란?  (0) 2022.05.21
세속의 잠  (0) 2022.05.21
선택  (0) 2022.05.14
기이함  (0) 2022.05.13
남은 자  (0) 2022.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