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기이함

아빠와 함께 2022. 5. 13. 21:50

 



아이들도 움직이고 또한 어른들도 움직인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인간은 왜 움직일까요?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성도에게 말씀이 오면, 말씀 자체가 눈에 보이지 않던 새로운 현실을 보게 한다. 그러면 이 세상자체가 흑암의 권세임을 동감하게 된다. 그냥 깜깜한 정도가 아니고, 거기에 권세가 작용한다. 계속해서 흑암이 흑암으로 유지되게 작동하는 보이지 않는 세력, 그런 인물이 있다. 선거를 하고 대통령이 바뀌고 하는 것들이 다 흑암의 권세다. '어둡다' 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어둡게 되도록 힘을 가하고 압박하는 세력이 있다. 평소에 이 세상을 보면서 이것을 느끼십니까? 그렇게 되어야 골로새서 1장에서 이야기하는 현실과 우리의 현실이 맞아떨어진다. 만약에 일치가 되지 않으면 우리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데, 즉 성경에서 말씀하는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꿈꾸고 있다는 것이 들통나게 된다. '권세' 라는 것은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것인데, 그러면 이것은 흑암의 권세자, 즉 악마인데, 모든 인간은 악마의 밥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악마를 키워내는 사료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는데, 즉 악마를 살찌우게 하는 먹잇감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흑암의 권세에서 누가 건져냅니까? 주님이 건져내어 주시는데, 그렇게 건져내어 주시니까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보이고 알게 된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그 안에 들어있으면, 자기가 마귀 밥인지 인디언 밥인지, 그것이 전혀 보이지가 않는다는 겁니다. 건져낸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마귀의 밥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흑암의 권세에서 누가 출세하고 성공하고 하는 것에 대해서 말이죠. 왜냐하면 그것이 다 마귀의 밥이기 때문에. 이것은 주님의 안목이고, 우리도 이와 동일한 안목을 가져야 한다. 그러니 주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빠져나오게 해주신다. 그렇게 해서 빛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면, 우리가 주님에게 더 요구할 것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니 인간들이 하는 기도는 근본적으로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주님의 뜻은 모르고 마귀의 밥이 되어서, 존재의 함성, 즉 내부적인 울부짖음이 바깥으로 튀어나는 것이 곧 기도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나 그것은 탐심이라는 겁니다.

주님의 모든 말씀은 기이한 것인데, 그러니 인간의 입장에서는 불가능하다. 주님이 우리를 선택했으면 우리는 더 이상 할 것이 없는데, 우리가 요구해봐야 그것은 탐심이다. 그러니까 주님이 개입했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기이하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기이한 것을 이 세상에서는 '어리석다' 라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흑암의 권세의 특징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야한다" 라는 식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악마가 부추긴다. 그래서 아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설치고, 어른들은 조절을 해가면서 설친다는 겁니다. 아이가 설치는 것은 충동적인데, 어떻게 자제할 수가 없어서 발산하는 것이란 말이죠. 그런데 어른은 이성이 있어서 주위의 눈치를 보고 약간 자제는 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 바닥에는 아이 때부터 지니고 온 감정의 폭발이 도사리고 있는데, 그러니 그게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인간은 목적이 없다" 라는 것인데, 맹목적이다. 그런데도 마치 목적이 있는 것처럼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인간은 어릴 때부터 한번도 달리진 적이 없다. 그렇게 달라진 것이 없으면 남아있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오늘 강의의 핵심 중의 하나인데, "인간은 연기한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인간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기가 혼자 있을 때말고 남들과 같이 있으면 자꾸만 자기 행동을 조작한다. 자기가 본 것을 시나리오로 해서 과도하게 연기를 한다. 교회에 가면 신앙인 연기, 동창회에 가면 동창인 연기를 하는데, 그것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과도하게 한다. 무엇인가를 감추고 싶다는 것인데, 하지만 이렇게 되면 인간은 둘로 쪼개진다. 하나의 '나'는 무엇인고 하니, 악마가 파견한 '나' 인데, 즉 "신앙인 행세를 하는 저놈을 끄집어 댕겨서, 계속해서 흑암의 권세에 머물게 해라" 라고, 그렇게 된다. 꼭 드라마에 출연해야 연기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니 결국은 자기가 자기에게 사기를 치는 것인데, 단 하루도 사기를 치지 않고 넘어가는 날이 없다. 자기 완벽, 자기 의로움, 거기에 허점이 보이지 않도록 철저함을 가한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매일같이 연기를 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성경은 철저함이 아닌 '기이함' 인데, 우수하고 완벽한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다. 주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없는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시는데, 즉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기를 원하신다. 그러니 분위기를 맞추어줄 필요가 없는데, 철저함이 아니라 '다름' 이다. 성도는 다른 존재이어야 하는데, 매일같이 성화가 되고 하는 우수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기이해야 됩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기이한 일을 하셨는데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믿고 싶어도 믿을 능력조차도 전혀 없는데, 그런데 그것을 주님께서 그것을 하셨다는.

 



그러니 자기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주님의 믿음이 우리에게 선물로 꽂혀서 구원이 된다. 그러니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 세상의 기분에 맞추어줄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것을 '자유' 라고 한다. 고스톱을 치면서 같이 놀 수도 있겠지만, 그런데 그렇게 같이 어울리는 것이 재미가 없다.그래서 그것을 거부하니 사기를 치려든 것이 들통이 나고 마는데, 그래서 화를 낸다. "다른 사람들은 교회에 다녀도 잘만 고스톱을 치던데, 형님만 유별나나?" 라고 나온다. 그러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순간이 온 것인데, "그것은 교회가 아니고 절이다" 라고 하면 된다. 그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우리 친구는 큰 교회에 다녀도 고스톱도 치고 점도 다 보더라" 라고 하면, "그것은 큰 절이다. 절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몰라? 자기가 복을 받으려고 다니는 곳이잖아" 라고 하면 되는데, 그렇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챈스가 주어진다.

어제 오후설교시간에 문제를 낸 적이 있는데, "십자가와 강냉이를 먹는 것의 관계는 무엇인가?" 엉뚱한 질문 같은데, 질문 자체가 기이하다는 말이죠. 답변은 간단한데, 튀긴 강냉이를 먹은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살기 위해서 먹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너는 이미 죽었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강냉이를 먹는 것조차도 죄가 된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알려주는 관계라는 말이죠. 어제 멀리 일본에서 오신 분이 있어서 예배를 마치고 나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분이 "기도를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고 해서, "기도하는 것도 죄입니다" 라고 했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그러면 기도를 하지 않아야 하겠네요" 라고 한다. 기도를 하던 무엇을 하던 간에 자기 자신의 가능성, 즉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구원에 이르려고 했다는, 그런 티가 확 난다. 불가능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모르고, 즉 주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나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데, 죄가 되기 때문에 말이죠. 기도는 어린아이의 까불거림이고 어른의 발작인데, 인간은 자기가 존재하는 이상 멈출 수가 없다. 답답해서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입을 테이프로 발라도 기도를 멈출 수가 없다. 매 순간 인간은 형식과 관계없이 계속해서 기도하게 되어있다. 한 순간도 인간의 존재성과 그 계획은 멈춘 적이 없다. 남의 자식들은 모두 제치고 자기 자식이 1등을 하기를 원하는데, 그것을 멈추는 법이 없다. 그게 죄라고 하면 자기는 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죄인이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있는가. 말은 죄인이라고 해놓고, 죄는 짓지 않겠다고 나온다. 사기도 이런 사기는 없는데, 죄인이면 할 일이 죄를 짓는 것밖에 없다. 그렇지요? 우리가 마귀의 밥으로 출발했는데, 그래서 할 줄 아는 것은 마귀의 짓뿐이라다. 그게 아닌 척을 하니, 그래서 연기가 시작된다. 모든 것이 조작이다. 존재에 대한 조작이죠. 왜 그렇게 합니까? 철저하고 싶어서 그렇게 합니다. "저는 이런 인간입니다" 라고 하면서 살아가면 되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알고 자기 본성은 그게 아니니, 그래서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철저함에 철저함을 더하는 것이죠.

(요 5: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여러분이 이 말씀을 가지고 전도를 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예수님을 믿으면 잘 됩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기이함, 이런 기이함이 포함된 내용을 전해보았습니까.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받아드릴 수가 없는 낯선 이야기를 전해보았습니까. 어떻게 하든지 꼬드겨서 교회에 데리고 나오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모든 인간은 무덤 속에 있어도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도망을 칠 수 있는 자리가 이 세상에는 없다는 말이죠. 평생을 도망을 치면서 살다가 죽으면, 결국은 예수님 앞에 끌려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 보면,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난다" 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기이함으로 구원을 받았는가? 그게 아니라면, 네가 할 수 있는 능력을 총동원해서, 그것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서 구원을 따내려고 했는가?"  즉 주님의 기이함이 그 사람을 장악하고 있는지, 그것을 가지고 주님은 심판을 하십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악마의 밥인데, "너는 왜 그렇게 어리석어. 정상적으로 살아라" 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어리석다' 라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자들이 하는 말인데, 기이한 요소에 대해서 어리석다고 평가를 해버린다는 말이죠. 남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난 것은 자기 능력이 아니고 주님의 능력이고 십자가의 능력이라는 것, 거기에 대해서 자기가 자기를 조롱합니다. "이런 인간아, 그런 것을 다 믿나? 정신을 차려라. 남들을 봐라. 그들은 다 정상이잖아. 그런데 너는 왜 비정상적으로 가나? 그래서 너희 집안은 화목이 되지 않잖아. 믿지 않는 남편과는 대화도 되지 않잖아. 자꾸 그렇게 해서 가정을 파탄으로 몰아넣을래? 그러면 자식들도 너를 존경하지 않아. 좋은 관계를 맺어야지" 그런데 이게 남들이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자기가 자기를 설득한다는 말이죠. 그럴 때 우리는 뭐라고 반응을 하면 될까요? "하나님, 저를 왜 이렇게 이상한 인간으로 만들어놓았습니까?" 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자가 진짜 성도라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납득할 수 없는데, 그런데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즉 흑암의 권세에 그대로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자기를 다 납득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의 능력과 실력으로 오늘날의 자기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자기 행동 하나 하나가 모두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할 수 있는 능력을 벗어나기 때문에, 외부에서 온 능력이 자기를 관여한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느끼기 때문에, 그런 전율로 인해서 "내 몸은 더 이상 내가 다룰 몸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자기가 알게 됩니다. 지금 여기에 파리 한 마리가 돌아다니는데, 그것도 우리 능력을 벗어나 있는 상태라는 말이죠.

* 기적과 표적 !!

인간의 능력으로 하는 일을 막는 것을 동원하는 방식을 '표적' 이라고 합니다. 기적과 표적은 엄밀하게 말하면 서로 다른데, 기적은 '놀랍다' 라는 반응이 나오지만, 표적은 사람을 화나게 만들죠. 인간들은 기적이라고 여기지만, 주님은 그것을 표적으로 바꾸십니다. 그 중의 하나가 '오병이어' 라는 것인데,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성인남자만 해도 5,000명을 먹이셨죠.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치면 8,000명 정도는 되지 싶은데 말이죠. 이 오병이어 사건으로 인해서 처음에는 사람들이 '놀라워라" 라고 했는데, 즉 기적으로 여기고 환호성을 내질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떡이 어디에서 나왔지" 라고 물으시는데, 그러자 사람들은 "떡에서 떡이 나왔고, 고기에서 고기가 나왔습니다" 라고 했죠. 하지만 주님은 이 기적으로 표적으로 바꾸어 버리시는데, 즉 "그것은 내 몸에서 나왔다" 라고 하십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의 반응이 그만 싸늘해지고 마는데, 왜 그러한 반응이 나옵니까? "당신은 왜 기이한 소리를 하십니까? 납득이 되는 이야기를 해주어야 믿어도 믿겠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능력을 믿습니다" 라고 하면서 따라온 자들인데, 즉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익을 제공해주시는 분이다. 저 분을 놓치면 우리는 손해다" 라는 입장인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떼를 지어서 따라왔죠. 그런데 예수님이 그런 기이한 이야기를 하실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다" 라고 하셨는데, 즉 "생명이 없는 것들이 기껏 구하는 것이 생명이 없는 육만 구하고, 배부른 것만 찾는다" 라고,

(요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여기 표적이 나오는데, 그 맞은 편에 배부름이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돈이 많다는 것인데, 그것으로 인해서 표적을 보지 못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흑암의 권세에 갇혀있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요즘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가 배부르기 위함인데, 즉 자기 행복을 위해서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으로 인해서 무슨 오류가 발생하게 됩니까? 주님의 표적을 보지 못합니다. 자기 유익과 자기 복을 챙기는데 정신이 다 팔려서 말이죠. 주님이 계신 곳에 자기는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는 주님 바깥에 존재하고 있죠. 왜냐하면 주님이 기이함을 내놓으라고 하니, 자기는 기이함을 내놓을 게 없습니다. 기이함을 받았다는 연기는 하지만, 정작 기이함은 없다는 말이죠. 이 기이함이 어느 정도 좋은고 하니까,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흑암의 권세에서 이미 건져냄을 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어라" 라고, 그렇게 됩니다.  "이것을 주세요. 저것을 주세요" 라고 할 게 없다는 말이죠. 주신 것 자체가 감사인데, 그러니 이제 더 이상의 자기 소망은 탐심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물론 남들이 보면 미쳤다고 하는데, 그런데 자기가 봐도 자기가 미쳤죠. 남들을 보고 욕할 이유가 없는데, 자기가 봐도 정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에 미치는 즐거움이 있어야 하는데, 그럴 때 모든 제도와 전통과 역사, 그리고 남들의 평가와 시선으로부터 해방이 되는데, 그게 바로 '자유'죠. 가정이라는 조직, 교회라는 조직, 국가라는 조직,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도 이 기쁨에서 벗어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죽음조차도 기다려지죠. 그러니 그 어떤 것으로도 협박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이함이 너무나도 기이하기 때문에 말이죠.

 


그렇다면 "이거 나 혼자 미친 것이 아니냐?" 라는 생각이 들 수 있는데, 성경을 보면 위로가 된다는 겁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어리석은 자들의 행렬이 나오는데, 그것을 성경은 신앙인들의 행렬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신앙인들은 기이한 것에 감격해서, 거기서 기쁨과 희열을 느끼는데, 즉 자유를 누립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게는 그야말로 미쳤고 또한 어리석은 것인데, 왜냐하면 누가 더 똑똑하다는 겁니까? 자기가 할 수 있는 능력과 재질을 최대한 발휘해서 자기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지혜롭다는 것인데, 그러면 누가 그것을 가르쳐주었습니까? 그게 바로 흑암의 권세이고, 그런 권세 아래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그런 주장을 하죠. 물론 우리는 여기 모여서 이런 이야기를 하지만, 이 세상에 나가보라는 겁니다. 전부가 이런 이야기인데, 즉 "내가 이렇게 해서 이렇게 얻었다" 라고 하는, 그런 것들만 쏟아진다는 말이죠.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기이한 자들이 나오는데, 제일 먼저 누가 나옵니까? 4절에 아벨이 나오는데, 그런데 그 아벨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었습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벨은 어리석기가 짝이 없다는 말이죠. 그리고 노아는 방주를 만들었는데,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그것은 아무런 짝에도 소용이 없습니다. 교회에 나가지 않는 집안식구가 뭐라고 놀립니까? "교회에 나간다고 하늘에서 쌀이 떨어지나? 무엇이 떨어지노? 그런데 왜 교회에 미쳐있노?" 라고 하는데, 그야말로 진지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조언을 한다는 말이죠. 물론 교회에 미치면 안 되는데, 그것은 그런 소리를 들어도 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미쳤다는 것은 자기 의로움에 미친 것인데, 그것에 미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죄인됨에 미쳐야 하죠. 이렇게 미친 사람들을 정말로 만나보고 싶은데, 저는 돌아가신 어머니보다도 그런 사람들이 더욱 더 보고 싶습니다.

아벨은 현 인간 세계를 통치하는 악에 의해서 살해를 당한 것이다. 하나님에 의해 붙잡힌 바가 된 인간에 대해서 이 세상의 악이 어떤 식으로 처단하는가를 명확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따라서 아벨을 잃은 것은 이 인간 세계가 자체적으로 희망이 없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준 일이다. 예수님을 살해한 것은, 이 땅에는 하나님이 없고, 악마가 그 자리에서 이 세상을 통치한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준 사건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인데, 그러니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십자가만 전해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죠. "당신이 교회에 나온 것도 죄입니다" 라고 증거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교회에 나오는 것은 자기 두 발로 운전해서 나올 수 있습니다. 납득이 되는데, 거기에는 자기가 운전한다는 자기 능력이 포함되어있죠.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인데, 기이한 것이 아니고, 자기 능력에 포함이 됩니다. 그래서 자식들을 보고 교회에 나오라고 하면, "제가 가고 싶을 때 갑니다. 저도 하나님을 믿는데, 지금은 너무 바빠서, 때가 되면 다 갑니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자기가 할 수 있다고 나오죠. 교회에 다니는 것을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데, 물론 교회에는 나올 수가 있지만 예수님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흑암의 권세 아래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하죠. 그래서 "기이한 것이 무엇이죠?" 라고 하면, "그런 게 왜 필요합니까? 노력하면 됩니다" 라고 나옵니다.

아벨은 자식을 두지 않고 죽었다. 하나님에 의해서 받아진 자가 이 땅에서 대가 단절된 채 홀연히 사라졌다. 이로서 인간의 혈육은 하나님의 구원을 계속 간직하고 후손에게 이어줄 능력이 자체적으로 상실되었음이 드러났다.
그러면 예수님에게 자식이 있습니까? 이런 질문은 처음 듣지 싶은데, 그렇지요? 예수님은 자식이 없는데, 왜냐하면 육의 인간은 받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은 육에게 죽은 인간은 받지만, 육의 인간은 받지를 않죠. 달리 말하면, 어리석은 자는 받지만, 이 세상의 지혜에 속했다고 하는, 소위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은 전혀 받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은 오로지 기이한 자들만 받죠. 그렇게 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받아진 자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됩니까? 여기 교재에 보면 "대가 단절된 채 홀연히 사라졌다" 라고 합니다. 그렇게 사라졌으니 우리가 찾아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 인간이 아무리 힘을 다해서 예수님을 찾아도, 인간은 예수님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요 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간증을 듣고 싶어하는 것이 탐심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이한 것은 기이한 것으로 보존을 해주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것을 자기가 이해하고 납득이 되는 것으로 전환을 시키는 것, 그게 바로 마귀의 지시를 받는 모습이죠. 마귀는 계속해서 흑암의 권세아래에 두려고 "믿을 만한 것을 믿어라" 라고 합니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히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히 11: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히 11: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히 11: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히 11: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히 11: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히 11:15)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히 11: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여기에 나오는 아벨을 하나님을 잘 믿다가 그만 형에게 맞아 죽었는데, 누가 봐도 재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 다음에 나오는 사람이 에녹, 노아, 그리고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이라는 겁니다. 에녹, 노아, 아브라함을 함께 묶게 되면,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고 하니, 이들은 이 땅에 부동산이 없는 자들이죠. 그런데 이 세상에 땅이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16절에 보면,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라고 하는데, 그게 하늘에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늘이 고향이고 본적지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이 기이한 소리인데, 이 세상에서는 미친 소리이고 말이죠. 그러니 이들은 이 세상에서 위암에 걸려서 죽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속시원하게 봅니다. 위암 4기가 되어서 그렇게 나오니, 옆에서 간병하던 사람이 미친 사람으로 여긴다는 말이죠. 그러니 신앙이란 것은, 마치 "강냉이를 먹은 것과 십자가의 연관성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처럼, 벌써 잊었지 싶은데 , 그러니 이 세상은 우리가 떠날 곳입니다.  
그 다음에 23절 이하를 보면 모세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모세는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고생길을 들어서게 되는데, 이게 누가 보더라도 미친 짓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성경은 이것을 지혜롭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과 반대가 되어야 마땅하기에 말이죠. 그래야 기이함이 살죠.

(히 11: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히 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히 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히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나는 네가 알고 납득하는 것을 믿지 않는다. 나에게는 네가 아무리 해도 뚫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라는 겁니다. 그것을 '접속면'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것이 무엇인고 하니, 서로 다른 상이한 영역에서 접점이 되는 것을 분명하게 표현해주는 것인데, 마치 투명한 유리판과도 같죠. 두 개의 나누어진 경계면을 형성하고 있는 접속면, 그것이 곧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믿음 안에 주님의 표적이 들어가 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 때 예수님과 민중들은 같이 있으면서도, 각기 다른 세계에 놓여있었습니다. 한 쪽은 떡을 먹은 배부름이고, 다른 쪽인 예수님은 "그것이 바로 너희들의 죄야" 라고 규정을 하시죠. 그러면 민중들은 "이것이 어떻게 죄가 됩니까? 우리도 먹고 살아야하지 않습니까?" 라고 나오는데,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들의 관심사가 납득이 되는 것에만 있는데, 그것이 바로 흑암의 권세이고, 그래서 그게 죄다" 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기이함이 있어야 하는데, 즉 "내 인생이 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가?" 라고 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그냥 안 된다고 해버리면 곤란하고, 그러한 것이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하, 이렇게 나는 나만 챙기는 죄인이구나.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도, 나는 예수님을 죽이는데 찬동할 수밖에 없는 심성을 가진 자로구나. 그것을 나는 내가 죽을 때까지 버릴 수가 없구나"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러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는데, 그러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자기 목숨보다도 예수님이 더욱 더 소중한데, 자기가 죽는 것이 겁나고 위험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생각하지 못한다고 하면, 그것이야말로 위험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공주의 아들됨을 거절하고, 요즘 말로 하자면 재벌 2세가 되는 것을 거절하고, 그야말로 생고생의 길로 접어들었죠. 이것을 교회에서는 보통 '믿음의 행렬' 이라고 하는데, 저는 이것을 '어리석음의 행렬' 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어리석음의 행렬에 저와 여러분이 감히 끼어있다고 하면, 그게 얼마나 좋으냐는 말이죠. 사람들이 "당신은 정말 어리석구나" 라고 하는 소리를 그야말로 행복하게 들을 수 있는 자가 된다고 하는 것, 그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런 소리에 화가 나는 것이 아니고, 기분이 좋어지죠. 그래서 속으로 "니가 자유의 맛을 알어?" 라고 하는, 즉 아무리 설명을 해도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 진리를 우리가 품고 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르겠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아벨은 자식을 두지 않고 죽었다. 하나님에 의해서 받아진 자가 이 땅에서 대가 단절된 채 홀연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로서 인간의 혈육은 하나님의 구원을 계속 간직하고 후손에게 이어줄 능력이 자체적으로 상실되었음이 드러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벨의 계열은 무(無)에서 새로 생겨났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아벨의 씨를 겨냥한 새로운 자식이 출현한 것이다. 사람들은 알았는데, 이것은 인간 육의 한계를 극복하고, 더 나아가서 악의 지배마저 극복한 다른 분에 의해서 주어진 결과인 것이다. 그 분이 과연 누구일까?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다.
인간의 대가 끊어진 지점이라야 비로소 등장하는 이름, 실제로 이 땅에 오신 어떤 존재, 그게 바로 주의 이름인데, 그 주의 이름이 무슨 일을 하십니까? 창세기 7장을 보면 노아홍수를 일으켰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이 땅을 완전히 작살을 내버린다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등장한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데, 즉 인간을 모두 죽이고 나서 하나님은 등장하신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터질 때, 그것은 바로 "모든 인간은 다 죽었다" 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라는 말이죠. 생명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있는데, 육의 세계에서는 생명이 없습니다. 육으로 태어난 것은 죽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것이죠. "아하, 나는 잘려야 마땅하구나" 라는 것인데, 육에서 생명은 오직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 한해서, 즉 주의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아는 자들에 한해서 주어집니다. 그게 곧 구원인데, 사도행전 2장 21절에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인데,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 너무나 마땅하다는 겁니다. 강냉이를 먹고 살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죽으려고 먹으면 되죠.
(행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니 죽고자 하는 일은 무엇인지 괜찮은데, 간증이 왜 문제입니까? 자기가 죽는 것이 아니라, 살려고 그런 간증을 좋아한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손자를 보더라도, "내가 손자를 보다가 죽어야지" 라고 하면, 그것도 역시 주의 일입니다. 실제로 몸이 죽어나는데 말이죠.

셋의 등장은 하나님의 이름 아래서 인간의 이름이 어떤 식으로 쓰여지느냐가 드러나게 하였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그냥 악마에 내맡겨지게 하여 순순히 죽음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아담의 형상'을 중심으로 등장하는 악마를 발각시켜 처단하는 계기로 삼으신다.
'쓰여진다' 라는 것은 "피조물로서 주를 위해서 사용되어진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주님과 같이 있는데, 주님께서 알아서 사용을 하시죠. 그래서 주님께서 가라고 하면 가면 되고, 오라고 하면 오면 되죠. 그게 바로 성도이고,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의 태도입니다. 저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많이 하는데, "구원받은 자는 어떻게 살면 됩니까?" 라고 말이죠. 그러면 저는 "막 사세요" 라고 합니다. 막국수를 아십니까? 그렇게 막 살면 되죠. 막 사는 것에 대해서 걱정을 한다면, 즉 "막 살다가 망하는 수가 있겠다. 그렇게 망하면 안 되지" 라고 한다면, 그것은 혼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의 본심이 정말로 한심스러운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 인간은 "나는 망할 자신이 없다" 라고 나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자기를 관리하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가 망하면 자기만 손해라고 여깁니다. 십자가에서 아무리 "너는 죄인이다. 너는 이미 죽었다" 라고 해도, 그런 성경말씀이 아무런 소용이 없죠. 본심은 "그러면 안 되지. 나는 망하면 안 돼" 라고 하면서 고개를 가로 젖습니다. 그렇게 자기가 망할 자신이 없다고 하는 것, 그게 바로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완벽하게 티를 내고 있는 모습이죠. 하지만 망해도 괜찮은데, 왜냐하면 망해도 우리의 본향은 하늘에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기가 좀 미안하기도 한데, 대번에 "니는 그렇게 살아?" 라고 따질 것만 같다는 말이죠.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망해도 영원한 생명이 있는데, 이게 바로 성도의 기이한 삶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는 기이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죠.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방식대로 이 세상을 살아가지 말게 해주시고, 오직 주님이 가게 해주신 그 기이함에 대해서 찬동하고 공감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그런 저희들이 되게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십자가마을 대구강의 "기이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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