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구원이란 아이디어

아빠와 함께 2022. 4. 24. 17:01

구원이라는 아이디어

2022년 4월 24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후서 2:1-4 

(2: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2:2)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

(2:3)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2:4)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인간은 자신의 뿌리를 잃어버리고 잊어버렸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뭘 잃어버렸는지조차 모르면서 열심히 살아갑니다. 자신이 이 땅을 떠나가면서 천국에 가 있는 자기 모습을 상상합니다. 이러한 시도는 탐심인 것을 사람들은 모릅니다. 천국이 어떤 나라인지, 어떤 분이 계신자도 모르는채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구원을 위해 천국을 준비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인간을 위한 나라’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심지어 지옥마저 ‘인간을 위한 나라’가 아닙니다. 이미 인간의 조상이 선악과 과실을 먹는 것으로 인간들을 위한 나라는 없습니다. 선악과 과실이란, 곧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쪽에서 모든 피조물, 천사를 심판하기 위해 지식이 담겨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인간을 치기 위해 만든 회초리같은 것은 인간이 뺏아버린 일이 곧 선악과 과실을 따먹은 일입니다. 그래서 심판을 하나님쪽에서 할 게 아니라 자신이 알아서 자기를 심판하겠다는 겁니다. 심판권을 인간들에게 두겠다고 겁니다. 자체적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겠다는 시도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대원칙은 이러합니다. “단 한 명도 구원되지 못한다”입니다. “반드시 죽으리라”가 그 뜻입니다.(창 2:17/롬 5:17) 한 사람이 죽으므로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겁니다. 따라서 “내가 죽는다”가 아니라 “죽음이 곧 나다”입니다. 이들이 구원을 시도한다면 이 구원시도가 곧 죄가 되며 이런 시도의 절정에 불법의 인물, 혹은 멸망의 자식이 등장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불법의 사람을 역사 끝지점에 등장시키신 이유는, 그 누구라도 구원될 자가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인간들의 모든 구원시도는 실은 멸망당한 자, 불법의 사람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현상을 일이나게 하는 동기입니다. 생각들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아이디어를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이 ‘구원받을 자가 전혀 없게 하신다’는 취지는 예수님의 살해당함과 관련있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만의 구원입니다. 이 예수님만의 구원은 모든 역사가 다 마감되고 난 뒤에서 일어날 일입니다. 이 시간 밖에서 최종 예수님을 위한 나라가 마련됩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시간 밖의 분’입니다.

반면에 인간 및 불법의 사람은 ‘시간 안의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선악체계와 생명체계, 둘 다를 경험하신 분이십니다. 반면에 인간들은 선악체계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자아성은 둘이 아니라 하나 뿐입니다. 사나 죽으나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매진할 뿐입니다. 자기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으로 알고 바들바들 떠면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두 개의 자아상을 지니고 있기에 이 땅의 운명으로 종결되는 선악체계의 자아성은 인간들의 죄로 인한 희생물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선악체계와 생명체계 사이에 연속성을 지닙니다. 반면에 인간들은 선악체계를 알고 있기에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습니다.(창 3:22)

이는 불연속적입니다. 단절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신학적 아이디어를 총동원해서 ‘믿고 의지한다’고 주장해도 이러한 시도의 방향성이 하나 밖에 없는 ‘선악체계의 자아성’으로 쏠리기에 자기 죄로 인하여 죽게 됩니다. 요한복음 8:34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종은 주인의 권세를 벗어날 수없습니다. 종의 주제에 주인과 대등한 처지에 놓인 게 아닙니다. 종속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쯤 천국에 가 있는 인물들은 어떻게 되어서 그곳에 가 있는 겁니까? 계시가 역사가 되도록 달라붙은 자들이 그들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이 찾아온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하나뿐인 자아의 가치를 지키는 전쟁에서 승리를 하기 위해 하나님을 위해 전쟁벌리는 우리아 장군을 죽여버렸습니다. 이로서 다윗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적-그리스도 양상을 드러납니다. 나단 선지자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 다윗에게 와서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요”(삼하 12:7)

즉 하나님에게 속한 자를 죽인 당신이 바로 율법 위반자로서 저주받을 자라는 겁니다.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레미야가 차고 있던 허리 띠를 유브라 강가, 바위틈에 감추고 다시 파보니 완전히 썩었습니다.(렘 13:1-7) 곧 그 띠가 보호하던 그 존재가 썩은 존재라는 뜻입니다.

에스겔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스겔 3:26에서는 에스겔 벙어리가 됩니다. 입을 벌려 말할 가치조가 없는 자들이 그당시 이스라엘이라는 말입니다. 즉 범죄한 이스라엘이 당한 재앙을 미리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에스겔 몸에서 일어나는 일로서 덧입혀집니다. 이는 선지자 입장에서 억울한 겁니다.

하지만 바로 적-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차이점에 여기에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의 머리카락이나 수염은 불로 태워지고 칼로 난도질 당하고 성읍 바깥에서는 쓰레기처럼 바람에 흩날립니다. 그리고 선지자의 몸은 390일+40일 동안 스스로 묶여서 살아갑니다. 불결한 음식을 먹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이 이미 사건 이후의 경우를 사건 터지기 전에 미리 선지자를 덮쳐졌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24장에서는 에스겔 선지자의 아내가 갑작스럽게 죽습니다. 선지나는 상갓집 음식을 먹어서도 아니되고 울어서도 아니됩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이스라엘 형편이 하나님께서 합당한 재앙을 내리는 점에 대해서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선지자의 모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사람들에게 싫어버린 바 된 그 지경으로 이 땅에 오셨기에 모든 인간이 구원이 대상이 될 수없음을 분명히 하시는 겁니다.

선지자의 구원은 바로 모든 시간이 다 마감되고 난 뒤에 일어나는 실제 능력이 미리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모든 성도는 자기 능력과 자기 관리의 대상으로 자아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생명의 자아성을 부각하기 위해 기존의 선악체계를 자아상이 주님으로 인해 파기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점을 즐기고 감사하세요. 이것이 ‘기쁜 소식’, 곧 ‘복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위해 사는 바로 그것인 악마의 모습인 것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7강-데살로니가후서 2장 1-4절(구원이란 아이디어)220424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 1-4절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1-4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여기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믿으면 구원되는 줄 알았는데 이건 마지막 관문인지, 이거 제껴야 구원을 달성하는 것인지, 하나님께서는 굳이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이 이 세상에 등장해서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는 그 일이 왜 꼭 일어나야 하는가, 그 점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관된 뜻이 있는데요. 인간으로 태어난 그 어떤 인간도 단 한 사람도 구원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확고한 원칙입니다. 단 한 사람도 구원되지 말아야 돼요. 그것은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에 이것은 하나님 쪽에서 인간을 심판하겠다는 그 심판권 자체를 인간이 탈취한 거예요. 하나님이 회초리를 때린다면 그 회초리를 맞아야 될 인간이 그 회초리 자체를 빼앗아 버리는 그런 일들이 일어난 거예요.

그게 심판권을 쟁취한 일이에요. 따라서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를 믿습니다, 할 때 도대체 어떤 의도로 어떤 목적으로 예수를 믿고 싶어하는지 그 정체부터 주께서는 들춰내야 되는데 그 방법이 뭐냐?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래서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이 등장할 때 이 사람의 그 모습, 등장한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 그 모습이 내가 구원받고자 시도하는 그 나의 자아상을 그대로 빼다 박은 거예요. 하나님의 원칙은 단 한 명도 구원되지 못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은 이렇게 하니까 구원되더라, 를 주장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된다고 가르치는 겁니다. 뭐 전 교회가 다 그렇지요. 모든 교회가 다 그렇지요.

마태복음 24장 26절에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주님께서 하는 방법은 믿으라, 가 아니라 믿지 말라, 에요. 그 누구도 믿지 말아야 되는데, 특히 누구를 믿지 말라? 본인을 믿지 말아야 돼요. 본인의 믿음을 믿지 말아야 돼요. 왜? 본인의 믿음 가운데는 내가 구원받아야 되겠다는 욕망과 의지가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교회 나와서 구원 받아야 되겠다. 이것은 그 심판권, 선악과를 빼앗아 버린 그 자체, 하나님의 심판권을 하나님께 둬야 되는데 “내가 앞으로 잘 할 테니까 내가 스스로 내가 심판해서 선과 악으로 심판해서 잘해보려 하니까 그러면 주님이 심판하지 말고 저한테 맡겨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 말이지요.

그래서 이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이 딱 등장하게 되면 사람들은 이걸 보면서 이제 마지막 난관이다, 마지막 장애물이다, 이것만 제끼면 천당 간다, 이런 식으로 가는데 그것부터 먼저 생각해야 돼요. 본인이 불법의 아들 아니십니까? 내가 나라고 해서 불법의 아들 되지 말라는 이유 없잖아요. 나라고 해서 멸망의 아들, 멸망 받을 자식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근거가 뭐냐? 내 쪽에서 제시할 수 있습니까?

적그리스도입니다, 주의하세요, 저건 사탄입니다, 주의하세요, 그렇게 주의하라, 주의하라고 외치고 있는 본인이, 본인이 바로 사탄이라면 그 문제 어떻게 해결할 겁니까? 제가 운동하는데 어떤 사람이 아침 이른 시간이라고 안일하게 개를 풀어놓았어요. 내가 다가가서 “개 목줄 하세요.”라고 오지랖 떨었지요.

그러니까 우리 개는 착하다는 거예요. 사람 물은 개중에서 안착한 개가 없어요. 돌발사태 일어납니다. 쉽게 말해서 당신은 당신의 개를 몰라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몰라요. 우리가 구원받겠다고 시도하는 이것과, 불법의 아들들이 주장하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단 한 명도 구원되지 말아야 되고 못 하는 그 증거로서 주께서 마지막에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을 딱 내세운 거예요. 그 사람의 뜻과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이 주장하는 것과 네가 주장하는 것이 같은 생각이라는 것을 딱 제시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성경에 나오는 구원받은 사람은, 천국 가는 사람은 기준이 뭐냐? 그 기준은 새로 정립되어야 돼요. 사도행전 1장 2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 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이렇게 해서 가룟유다가 빠져버린 열두 번째 사도의 자리에 조건을 제시하는 게 나와요. 그것은 뭐냐 하면, 세례요한부터 지금까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증거할 사람을 그 빈칸에다 집어넣는 겁니다. 이 기준에서 인간의 능력을 능가하는 기준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찾아온 사람이라는 조건이에요.

그러면 이 조건은 인간 쪽에서 만들어내지를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은 단 한 명도 구원될 수 없다는 이 원칙을 일관성 있게 그냥 밀어붙여요. 그렇게 되면 뭐가 드러나느냐 하면, 구원받겠다는 것은 인간들의 아이디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구원론 자체가 인간들의 아이디어에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생각한 적도 없어요. 자기들이 하나님 개념 동원시키고 메시아 개념까지 총동원 시켜가지고 어찌어찌하면 구원될 수 있다고, 죽어서 좋은 데 갈 수 있다는 거예요. 그 주장을 누가 하느냐? 그게 불법의 사람, 불법자 멸망의 아들이 주장하는 거예요. 그것이 적그리스도인데요, 성경에 적그리스도라는 단어가 나오거든요.

그런데 적그리스도는 예수님도 이야기했고 나중에 요한1서에도 나오지만, 적그리스도가 있다는 말은 무엇을 유념해야 되느냐 하면, ‘적하나님’은 없어요. ‘적하나님’은 없고요, 지나개나 하나님 영광 돌리고 다 믿어요. 그러나 마귀는 적그리스도 형식으로 자기 사람을 보냅니다. 멸망의 자식이니까, 악마의 자식은 적그리스도 형식이에요.

적그리스도 형식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식으로 만드느냐 하면, 영광스러운 예수님으로 이 지상의 모습을 조작해 내는 겁니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제시할 때 그게 사람들의 욕망의 완성체의 모습으로 사람들이 혹하게 만들, 사람들이 기대할만한 것을 뭔가 제시하는 모습으로 등장할 때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말라고 해도 믿어요. 좋은 건데 왜 안 믿어요? 그게 적그리스도적이에요.

그러나 예수님은 망가져 버렸거든요. 이사야 53장에 예언되기를 예수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냐? 그 현장에, 그 시대에, 그 현장에 있던 사람은 예수님을 어떤 식으로 평가했는가? 모든 사람으로 싫어 버린 바 되었어요. 모든 사람으로 싫어 버린 바, 싫다는 거예요. 나는 그따위 메시아를 원했던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열심히 기도하고 성전에서 하나님 섬긴 것은 당신 믿으려고 내가 그동안 순수하게 순결한 신앙을 보존한 게 아니라고, 주님으로부터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척받는 모습으로 오신 이유가 단 한 명도 구원될 자를 없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일관된 원칙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그리 많아요? 단 한 명도 없어야 돼요. 왜 그리 많아요? 전부 다 가짜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게 가짜에요. “목사님, 저는 행함으로 하지 않고 이제는 믿습니다.” 믿지 마세요. 믿음으로써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믿는다는 그 자신을 믿기 때문에 그 믿음이라는 것은 쳐줄 수가 없어요. 사람이 잠을 자다가 악몽을 꾸거든요. 악몽이라는 것은 뭐냐? 자기가 자기를 보는 것을 악몽이라 합니다. 이게 낮에 자기 보는 것은요, 조작된 나를 보기 때문에 이것은 악몽이 아니에요. 자기 자신을 멋있다고 보는 거예요.

꿈은 일종의 죽음입니다. 왜냐하면 의식이 중지된 상태니까 죽은 상태에요. 죽은 상태, 내가 죽은 상태에서 뭔가 활동하고 내가 활동하고 있어요. 활동하고 있는데 거기에 인간의 육체가 비틀려진다든지 육체가 뭔가 자세가 바르지 못하게 되면 여기서 가위눌리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자기 몸인데 낮에 활동할 때, 내가 살아 있을 때는 자기 몸이 어떤 몸인지를 몰랐지요. 그러나 자기의식이 끊기는 순간이 잠잘 때고요, 아무 생각 없지요. 그런데 의식은 끊겼는데 몸은 쉬지 않고 계속 움직이면서 진짜 내 모습을, 힘들 때 내 모습을 드러내는 그게 바로 악마의 모습, 흉측한 내 모습, 내가 기피하고 ‘나는 싫어, 싫어. 나는 그런 상황 싫어.’ 그 싫은 상황이 꿈속에서 현실로 다가오게 되면 꿈에서 몸부림칩니다. 너무 공포스러워요. 너무너무 무서워요. 그것은 산채로 자기 죽음을 보고 있는 모습이에요.

진짜 내가 그동안 낮에 애써 기피하고 감추고 했던 그 모습이, 진짜 숨어 있는 내 모습이 마귀의 얼굴로, 악마의 얼굴로, 흉측한 얼굴로 꿈은 정직하게 그것을 그대로 노출 시켰지요. 식은땀이 죽 나면서 꿈속에서 사투를 벌입니다. ‘제발 꿈을 깨라. 깨고 나와야 돼. 깨고 나와야 돼.’ 몸부림 치지요.

그래서 어쩌다 보니 꿈에서 깼어요. 땀에 흥건히 젖었지요. 그거 가짜 자아입니다. 진짜를 보고 가짜에서 안심을 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꼬깃꼬깃 깊숙하게 숨기고 싶은 것, 평소 일상이 그런 모습이에요. 진짜 내 면면은 감추면서 세상에서 들어온 풍월과 지식으로 포장된, 변신하고 위장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평소에는.

자기 욕망에 의해서 조작된, 내가 아니면서 다른 사람 보여주기식의 인생을 살아온 겁니다. 두 사람 만나면 서로가 서로를 속이면서 살아온 거예요. 인간은 죽는다고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틀린 말이에요. 인간은 내가 죽는 게 아니고 죽음이 곧 나예요. 죽음을 살리기 위해서는 내가 죽음이라는 그 속에 이미 하나님께서 태어나게 하신 겁니다.

이러한 악몽처럼 진짜 그리스도는 도저히 우리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못 믿을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진짜 그리스도를 대체한 조작된 가짜 그리스도가 뭐냐?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제가 옛날 아주 오래전에 서울의 결혼식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커다란 3층짜리 웨딩케익이 있었어요. 사람들은 전부 결혼식에 집중해서 웨딩케익에 신경 안 쓰고 있지요. 제가 딱 보니까 하객으로 온 어떤 사람의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살금살금 가서 웨딩케익 맛을 보니까 맛있거든요. 남들은 결혼식에 집중할 때 그 애는 웨딩케익 먹는 데 집중했어요. 웨딩케익 한 모퉁이가 무너지고 파괴된 거예요.

우리의 죄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파괴되고 무너진 겁니다. 우리 죄로 인하여. 그런데 우리는 그 죄라는 것을, 얼마나 그것을 포장을 하고 감추기에 급급한지 우리는 영광 받지 말아야 될, 절대로 우리에게는 영광이 주어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악몽으로 여겨서 세상에 나갈 때 그것을 성경적 개념 가지고 덕지덕지 포장을 해버려요.

내가 목사니, 성경을 백 독을 했니, 신앙 생활 50년 했니……, 어차피 구원받지 못할 거 그런 주장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어차피 구원받을 사람이 없는데, 아무도 없는데 괜히 헛짓하고 있는 거예요, 괜한 헛짓!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들이 주장하는 것은 뭐냐? 하나님을 의지하라, 메시아를 믿으라, 오직 예수를 믿으라, 그 이야기라는 말이지요. 그런 종류의 이야기 같으면요, 이미 바리새인, 사두개인, 유대인들이 다 했던 겁니다. 그거 다 했던 거예요.

그들의 주장은 딱 하나에요.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선물로 구원 받는다. 문제는 그 은혜와 선물을 지키는 것은 우리 몫이다.” 그게 바로 바리새인 서기관들의 주장입니다. 오늘날 교회 하고 차이 납니까? 차이 안 나지요.

바리새인들은 구약의 자기 역사를 끄집어냅니다. 그들이, “우리 조상들은 홍해 갈라져서 나왔다. 이게 엄연한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고 뭐며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 뭐냐? 이제 그들이 왜 멸망했는가? 왜 그들이 약속의 땅에 못 갔는가? 그들은 그 지키는 자기 역할을 소홀히 해서 그렇다.”

여러분, 그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자기에게 구원받지 못하게 한다는 그것은 알지도 모르고요, 그냥 납득이 되는 식으로 동일한 의견일치, 합치가 되는 식으로 성경해석을 그렇게 다 해버렸어요.

그렇다면 이 불법의 사람과 멸망의 아들은 그만큼 인간들이 본성적으로 신을 향하여, 천국을 향하여 나아가려 할 때 그들의 모든 의지를 집대성한 것이 불법의 사람이고 멸망의 아들이에요. 불법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진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진리는 예수님이 진리지요. 진리가 아닌데, 불법이지만 이것이 사람들에게 혹하는 겁니다. 사람들의 본성과 기대에 부응하고 있는 그러한 메시아이기 때문에 이게 적그리스도에요. 하나님을 거론하는 게 아닙니다. 적그리스도에요.

이게 적그리스도인 이유가, 너무나 그리스도를 주장하면서 인간들이 원하는 그리스도로 대변되어 있고, 그것이 인간들의 숨어 있는 본성의 구현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내가 믿는다면 바로 저런 예수 믿을거야, 라고 이상형식으로 나타난 게 마지막으로 불법의 사람이에요. 어느 누구도 걸려 넘어가지 않을 사람 아무도 없게 만들어버려요.

그러면 이 적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차이점이 뭐냐? 예수님의 자아상은 두 개입니다. 인간의 자아상이 두 개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생명나무이면서도 선악체계속에 들어왔거든요. 그러면 선악체계에서 만들어낸 자아상, 나 따로 있고 생명체계에서 나오는 나는요, 예수님 뿐이에요.

다른 사람은 선악체계 안에서 만들어낸 자아뿐이에요. 이것은 저주받아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아상을 두 개를 갖고 있습니다. 불법의 사람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자아상이. 선악체계 하나밖에 없습니다. 못 먹어도 고, 못 먹어도 나밖에 몰라요. 나만 살아야 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나는 살려야 돼요.

그리고 4절에 보면 이 불법의 아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우리 인간들하고의 공통점이 뭐냐? 스스로 자기를 고귀하게 여깁니다. 스스로 자기를 고귀하게 여겨요. 그러니까 이 단 한 명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대원칙에 입각해서 자꾸 뭔가 빼요. 사람들 중에 자꾸 빼는 사람이 있지요. 자꾸 움츠리는 사람이 있지요. 왜냐하면 스스로 자기를 고귀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중성은 어떻게 이중성이냐 하면 ,이미 예수님은 모든 시간을 다 겪었어요. 경과를 다 하고 난 뒤에 발생된 자아가 생명의 자아, 영생의 자아에요. 이것은 영원한 겁니다. 그런데 불법의 사람은 아직 역사가 다 끝나지 않았어요. 기껏 아는 게 역사 중간에 아는 것 긁어모은 지식과 지혜, 뭐 성경을 백독한다, 그런 거나 있어요.

나한테 채워진 지혜와 지식이 나를 살릴 수 있다는 아이디어, 그것이 구원의 결과를 낳는다는 그 아이디어, 이게 백퍼센트 인간의 아이디어입니다. 그 아이디어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지하자, 행함이 아니고 예수를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이런 것이 다 들어 있어요.

왜냐하면 방향성이, “저는 행하지 않고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할 때 묻고 싶은 것이 그거 그 방향성이 어디입니까? 결국 방향성이 어디에요? 내가 나를 건지겠다는 거예요. “당신을 건지겠다는 그것이 주의 뜻입니까?” 노골적으로 물으면, 그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그것은 주의 뜻이 아니고 내 뜻입니다.” 아마 그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또 숨기겠지요. “주의 뜻입니다. 주의 은혜로 창세 전에 택한 백성이…….”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당신이 예수를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하겠다는 것이, 예수 십자가를 믿겠다는 그것이 본인이 좋아서 믿는 거잖아요. 본인이 좋아서! 본인이 왜 좋은데요? 주님은 싫다는데 당신은 왜 좋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은 “나라도 챙겨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게 단일성인거예요. 자아가 하나밖에 없는 거예요. 둘이 아니고 폐기처분 되어야 될 자아를 계속 쥐고 있는 겁니다. 주께서는 자아를 두 개 준비했어요. 그렇게 해서 “선악체계에 있는 자아는 제발 좀 버려라. 그 쓰레기 좀 버려라. 성경 지식 같은 것, 요령 같은 것 집어넣지 말고 좀 버려버려!”

어제 진짜 고등학교 친구한테 전화가 왔어요. 내가 목사인 줄 알고 자기 아내가 다니는 그 교회 목사한테 세례받기 싫다고 하면서 “네가 나한테 세례 주면 안 되겠나?” “그거 왜 받아야 되는데? 20년 전에 하고 아직 한 적이 없는데 그거 세례 왜 받아야 되는데?” 하니 가만히 있는 거예요.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 받고자 하지.” “그러면 그냥 다니는 교회 목사한테 그냥 받아라. 어차피 장난인데.” 그러니까 이야기한다는 게 “그 목사가 세례 줄 때 ‘이젠 술 끊으시겠습니까?’ 이걸 묻는다.”는 거예요. 그게 짜증 나서 세례 못 받겠다는 거예요.

“어차피 그 사람도 세례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예, 해놓고 다음에 술 먹으면 된다.”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군위 토박이인데 세례 받아놓고 술 먹으면 사람들이 욕할 거 아니냐?”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다. ‘아이고, 술 먹으면서 어떻게 세례를 받았습니까, 하고 오히려 칭찬한다.” 도대체 어떤 행동에 나설 때 그 행동의 최종 방향성이 누구한테 꽂히느냐? 본인, 하나밖에 없는, 귀하디귀한 그 내가 나를 고이고이 간수하고 지켜내야 이게 인생성공이라고 본 거예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자기 성공하다가 된 통으로 불법의 사람, 멸망의 사람으로 간주된 사람 나옵니다. 다윗입니다. 사무엘하 12장 7절에 보면 나단, 나단 아시지요, 선지자입니다, 그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하나님이 다윗에게 언약의 사람으로 찾아올 때 그냥 약속 주는 게 아니에요 다 파냅니다. 네가 어디서 너 스스로 조작하고, 네가 얼마나 너 지키는 것을 면면히 언약 앞에 다 노출시키지요. 여러분, 알다시피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자기 자신이 들킬까 싶어 알리바이를 위해서 밧세바 남편까지 죽이려고 했거든요.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다윗은 생각을 했어요. 밧세바와 내가 관계한 유일한 남자여서는 안 된다, 해서 밧세바 남편에게 빨리 휴가를 줬어요. 우리아 장군이 지금 전쟁터에 있잖아요. 우크라이나 전쟁하듯이 전쟁터에 있는데 빨리 휴가를 보내요. 우리아 장군은 이게 웬일인지 영문도 모르지요. ‘휴가라니?’

휴가 왔는데 아내하고 잠자리를 하라고 강제로 밀어낸 거예요. 그 이유는 모르지요. 그런데 우리아장군이 ‘하나님의 궤가 전쟁터에 있고 많은 군사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죽어가고 있는데 내가 아내와 안일한 생활 못 한다.’고 자기 부하와 같이 술이나 먹고 그다음 날 진영으로 가버렸어요.

그러니까 남은 플랜 B가 뭐냐 하면, 우리아 죽여버리는 거예요. 왜 우리아 장군을 굳이 죽여야 되는가? 그래야 다윗이 승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승리한다는 것은, 내가 멀쩡하게 존재하고 정당성 있게 존재한다는 뜻이에요. 이게 이스라엘의 왕 이스라엘의 대표자요 인류의 모든 대표자입니다.

인류는 승리하고 싶어요. 그것도 가치 있는 존재로 승리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이 삶이 투쟁의 삶인데 도대체 투쟁의 의미가 뭐예요? 투쟁하는 이유가 뭡니까? 누구를 위한 삶의 투쟁이에요? 다윗도 마찬가지거든요. 세상 돌아가는 것은 나를 위해서, 내 승리와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게 제가 이야기한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과 인간의 공통점이 뭐냐? 모두 다 시간 밖에 못 벗어나고 시간 안에 있는 거예요. 선악체계 안에 있는 겁니다. 시간 안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거예요. 여기서 내가 지면 안 된다, 승리해야 된다. 단 하나밖에 없는 자아에요. 하나밖에 없는 자아.

따라서 인간이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과 인간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이 하나밖에 없는 자아니까 이것은 내가 알아서 조치를 해야지 누가 조치해주지 않는다는 생각을 아주 공고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뭐냐? 모든 인간은 모든 아담에 속한 인간은 다 구원받지 못해야 돼요. 그리고 천국 가는 사람은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져야 돼요. 그 만들어진 자아가 시간을 다 거쳐서, 예수님처럼 시간을 다 거치고 난 뒤에 “모든 사람은 죽었지, 그지? 살 사람은 아무도 없지, 그지?” 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새로 살려줄 때 그때 등장하는 공간이 뭐냐? ‘예수 안’이에요, ‘예수 안’

‘예수 안’에는 “선악체계는 잊어라. 윤리, 도덕 다 잊어버려라. 제발 잊어라. 그딴 것 잊어버려라.” 제가 말을 좋게 해서 잊어버려라, 지요. 골로새서 2장에서 그걸 뭐라고 합니까? 찢어버려라. 잊어버려라, 정도가 아니라 찢어버려라. 옛날 계약서 찢어버려라. 그 찢어야 될 것이 뭐냐? 율법입니다. 율법을 찢어버려라.

율법에 의하면 “이미 너는 폐기처분 되어야 될 죽은 자다.” 뭐 신앙연조가 몇 년이니, 직분이 뭐며, 세례를 언제 받았느니, 모태솔로, 모태솔로가 아니고 모태신앙이니, 유아세례를 받았느니, 선교사로서 뭐 어쨌다느니, 의사인데 대장암 걸려가면서까지 남수단에서 봉사했느니, 아, 제발 그만! 그만! 그 쓰잘때기 없는 소리 그거 다 위선이고 그거 가짜들입니다.

우리 소박한 신앙은 우리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자아가 뭉개질 때 같이 무너져야 돼요. 그 놀이동산의 <백설공주> 배우들이 캐릭터 탈 쓰고 백설 공주 공연할 때 애들이 얼마나 그 백설 공주에 빠져서 같이 울면서 그렇게 환호합니까? 그런데 그 백설 공주가 저 뒤쪽으로 가서 탈을 벗고 담배 피우는데요. 담배 피우는 백설 공주, 그것도 남자도 아니고 여자가 동심을 파괴해 버렸지요.

진즉에 파괴되라고 주어진 것이 바로 인류의 역사입니다. 역사 속에는 파괴될 것밖에 없어요. 나단선지자가 다윗에게 와서 “당신이 바로 당신 자신을 최종목적으로 해서 하나밖에 없는 나의 자아성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나는 이스라엘 왕이니까 어떤 흠도 없어야 된다.’는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과 전쟁을 벌이는 그 우리아 장군을 당신이 죽였습니다.”

불법의 사람 누구냐? 바로 당신이에요.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 그 말이지요. 그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은 모든 인간의 구현된 모습이에요. 우리의 본성이 구현된 모습, 이 적그리스도는, 예수님께서는 적그리스도가 멸망의 곳에 선다, 이렇게 한 사람으로 되어 있지만 요한1서 2장 18절에 보면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 많은 적그리스도지요,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적그리스도가 단수가 아니고, 하나가 아니고 계속 시대마다시대마다 여러 적그리스도가 등장해요. 그것은 단일성의 복제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말은, 여러 명이 등장한다는 것은 누구나, 적그리스도의 가능성이 누구나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요.

왜? 선악체계가 있으니까, 자기가 선인과 의인으로 간주해야 그리고 죽고 난 뒤에는 천국에 넣어주세요, 라고 말발이라도 서니까, 마지막 때 남는 것은 천당 가는 그것만 남는다고, 그게 나한테 이익이라고 그것만 어쨌든 챙기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열심히 교회 다니면서 목사가 시키는 대로 다 챙겼지요.

그러나 이 생명의 자아는요, 본인이 챙길 필요가 없는 거예요. 내가 지킬 필요가 없는 게 생명의 자아입니다. 주께서 만들어줘서 주의 안에 있기 때문에 주께서 그때그때마다 주실 사료를 주십니다. 마치 밖에 있는 붕어보다 어항에 있는 붕어는 주인이 매일같이 일용할 사료를 주듯이 주께서 그때그때마다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의 특징이 뭐냐?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느냐? 연속성, 연속성의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한 명도 구원되지 못합니다. 이게 하나님의 대원칙이에요. 이것은 양보할 수 없는 원칙입니다. 구원될 수 없어요. 구원은 인간의 아이템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뭘 모르냐 하면, 연속성을 주장해야 되기 때문에 아무도 구원 받으면 안 되는데 구원은 인간들이 원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자기가 구원 받아야 될 알리바이를 계속해서 만들어내는데 급급하고 열중을 합니다. 뭔가 믿든지 행하든지, 뭘 해야 된다는 거예요.

말씀을 듣기만 하지 말고 실천에 옮겨야 된다는 쉐마, 쉐마, 들으라, 들으라, 듣지만 말고, 듣는 데서 그치지 말고 실천에 옮겨야 된다고 온갖 아이디어들이 교회마다 신학 역사를 통해서 쏟아져 나오고 있어요.

요한복음 8장 34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이미 죄의 종이 되었어요. 죄하고 대등한 관계 같으면 죄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는 그런 입장이지만 종이 되어버리면 죄지으라는데 아니오, 라고 할 위인이 없다는 거예요.

요한복음 8장 34절에서 그런 말씀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고 바리새인보고 너희 아비는 악마라고 이야기하고 요한복음 7장 34절에서는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이게 바로 예수님만이 갖고 있는 예수님의 자아, 생명의 자아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자아하고는 다르지요.

한 명도 구원받을 수 없는데 구원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자기의 구원이기 때문에 이게 비로소 없는 데서 구원이 새로 발생되는 거예요. 그래서 새로운 생명의 자아가 오게 되면 기존의 선악체계의 자아는 이것은 폐기되어야 된다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내가 열심낸다고, 내가 정신 바짝 차리고 신앙생활 열중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그냥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파괴하는 그 현장에서 생명이 드러나는 겁니다. 과연 그런 사람이 있었는가? 있었습니다. 구약을 통해서 두 사람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는 예레미야 선지자입니다. 예레미야 13장 1절에서 7절에 보게 되면 예레미야 몸 자체가 하나의 생명이 찾아온 역사로서 표현되고 있어요.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베띠를 사서 네 허리에 띠고 물에 두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띠를 사서 내 허리에 띠니라.”

그러고 난 뒤에 “유브라데 강에 가라. 그래서 유브라데 강에 가서 그것을 바위틈에 감춰라.” 이게 4절입니다. “너는 사서 네 허리에 띤 띠를 가지고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거기서 그것을 바위 틈에 감추라 하시기로” 그래서 5-7절에, “내가 여호와께서 내게 명하신대로 가서 그것을 유브라데 물가에 감추니라 여러 날 후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하여 거기 감추게 한 띠를 취하라 하시기로 내가 유브라데로 가서 그 감추었던 곳을 파고 띠를 취하니 띠가 썩어서 쓸데 없이 되었더라.”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니까 우리 몸을 졸라매고 우리 몸을 간수하고 지켜주던 그 띠가 썩었어요. 이 말은, 띠 안에 있던 우리 몸도 하나님이 오니까 썩었어요. 우리는 썩은 것을 평생 귀하게 여기면서, 고이고이 간직하면서 피아노 배우고 영어 배우고 태권도 배우면서 오직 내 것 지키기 위해서 한 거예요. 열심히 띠를 띠고.

이상하게 허리끈은요, 매도 또 좀 있으면 내려가요. 아랫배가 있는 사람은 자주자주 내려가요. 띠가 썩었다는 것은 그 안에 보호받는 것이 같이 썩었다는 뜻이에요. 이게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몸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입니다.

이게 신약의 성도도 동일해요. 새로운 자아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내가 유지하고 간수 할 수 있는 내 자아는 계속 썩어 문드러져야 되고 흉측한 괴물의 얼굴, 악마의 얼굴로 꿈속에 나타나야 되지요. 자기의 진짜 모습을 자기가 직접 직면하고 대면해야 돼요. 십자가에서.

영광? 영광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영광 없어요. 우리한테 무슨 영광이……, 영광을 왜 기대합니까? 영광은 없습니다. 썩어가는 게 영광인줄 아시면 돼요, 썩어가는 게! 자기 지키려고 자꾸 빼지 마세요.

또 한 사람 나오는데 그 사람이 누구냐? 에스겔입니다. 에스겔 3장 26절에 에스겔이 갑자기 벙어리가 돼요. “내가 네 혀로 네 입천장에 붙게 하여 너로 벙어리 되어그들의 책망자가 되지 못하게 하리니” 그것은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 에스겔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진노가, 백성들이 잘못했는데 그걸 에스겔에다 먼저 뒤집어씌워요. 왜냐하면 에스겔은 그 재앙의 시간이 다 끝나고 난 뒤에, 끝나고 난 이후에 다시 에스겔에게 미래의 전조로써, 징후로서 미리 주어진 자가 에스겔이에요.

성령의 역사가 그래요. 일 다 끝나고 난 뒤에 다 이루었다, 해놓고 어떻게 어떻게 이루었는가, 그 절차에 대해서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이 죽기 전에 미리 오는 거예요. “실컷 망해라. 네가 파괴되는 것을 네가 즐겨라.” 이런 식으로 성령이 와요. 구약도 마찬가지지요.

그러니까 이것이 뭐냐? 불법의 사람, 나중에 데살로니가후서에도 나옵니다만, 불법의 사람, 멸망의 자식들의 특징은 사람들에게 혹할만한 것을 가지고 목회를 하고, 혹 할 만한 것, 사람들이 기대할 만한 것을 가지고 교회 성장 부흥이고 뭐 개척교회 해요. 사람들이 원하는 것.

예를 들어볼까요? “기존교회는 부흥을 외치고 성장과 돈을 원하지만 우리교회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주님만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그걸 외치는 진짜 교회입니다.” 그게 불법의 사람이에요. 그게 멸망의 자식입니다. 어디서 꼼수를! 복음도 아닌 것을 가지고 복음이라고 꼼수를 쓰고 있어요.

자기 자신에게 미쳐 있는 사람들이 거기 다 가요. 진짜 복음 전한다고. 자기한테 환장한 사람 거기 갑니다. 좀! 쫌~! 자기 좀 놔 줘요, 그냥. 그만 괴롭히고. 언제까지 그렇게 자기를 닦달 내고 자기를 꾸중할 겁니까? 차라리 합죽이가 됩시다, 합! 차라리 벙어리가 되는 거예요.

사람들로 하여금 “뭐냐, 너? 병신이야? 바보야?” 그게 예수님의 모습이에요. 그게 그리스도에요. 진짜 그리스도는 완전히 “웬일이야 당신? 왜 그래?” 하고 의아해하는 경우지만 적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게 적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못한 것 기도하면 된다. 하면 된다. 주께서는 희망의 하나님이다. 사랑의 하나님이다.” 이게 적그리스도에요. 자아가 하나밖에 없는 사람들, 거기에 다 매료됩니다. 왜 벙어리 되라 하냐면 말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 인간들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겁니다.

4장에 보면 아주 또 요란스럽지요. 4장에 보면 에스겔에게 좌편으로 390일 동안 누워있으라는 겁니다. 이거 담 결립니다. 그리고 390일로 끝나는 게 아니라 40일 동안은 또 우편으로 누워있으라 합니다. 390일,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해서 390일은 북쪽 이스라엘, 그들이 멸망해서 포로 잡히고 노예 생활 해야 될 세월입니다.

남쪽은 유다 나라가 노예가 되어서 재앙 받아야 될 그 세월을, 그들 유다와 이스라엘 그들이 받아야 될 것을, 몽땅 그것을 전조로써, 미리 징후로써 하나님의 신이 지시합니다. 에스겔 본인이 받아야 돼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가 만든 실존입니다. 자아가 두 개가 된 사람의 실존.

이 말을 하고 싶어서 미치겠어요. “그게 여러분입니다.” 아, 이 말을 하고 싶어서. “바로 여러분입니다.” 두 개의 자아를 갖고 있는 거예요. 하나를 거침없이 버릴 수 있는 사람. 뭐 달고나 먹지 말라고, 이빨 썩는다고? 그냥 먹고 죽을래.

그리고 이 백성들이 당할 시련을 에스겔이 먼저 받습니다. 그렇게 죽을 고생 하는데 그냥 하지 말고 떡을 먹는데 떡의 재료가 뭐냐? “그냥 피난할 때 먹는 재료의 떡을 먹으면서 그것을 더럽게 구워 먹어라. 인간의 똥으로, 인분으로 구워 먹어라.”

율법에 위반되거든요. 주께서 “네가 두 개의 자아 가운데서 선악체계의 자아가 떨어질 때 더럽게 떨어져라.” 더럽게 잘하잖아요. 우리 주특기 아닙니까? 더럽게 사는 것. 우리 아닌 척 하지만 본심은 그거예요.

잠언서에 보면 그게 나와요. 몰래 먹는 사과가 맛있다는 것, 사과의 당도, 브릭스 당도의 과학적 측정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역시 사과 중에 최고 맛있는 사과는 소풍 가면서 남의 집 과수원 사과 따먹는 게 제일 맛있어요. 지나가면서 남의 과수원 복숭아 따먹는 것. 교사들 가면서 애들 지켜야 돼요. 애들 대열에서 반이 빠졌어요. 다 과수원에 갔어요. 자기 가방에 사과 이미 넣어줬는데 그것은 맛이 없어요. 남의 것 따먹는 사과.

“그 더러운 식으로 더럽게 빠져나가라. 조금도 너의 의로움과 착함과 순결함을 찾을 생각을 하지 마라.” 그것은 폐기하는 주님의 취지에 위반됩니다. 그다음에 5장 1-2절에 보면 아주 난리도 아니에요. 에스겔보고 “인자야, 네 머리털과 수염을 좀 깎자. 깎는데 3분지 1씩 나누자. 머리털 3분지 1은 성읍에서 불로 태워라.”

아미노산 타는 냄새 지독할 거예요. 그 3분지 1은 성읍 안에서 태우고, 또 3분지 1은 칼로, 자 보세요, 보세요, 해놓고는 잘라버려요. 그리고 3분지 1은 바람에 날려 버리는 거예요. “인자야 너는 날카로운 칼을 취하여 삭도를 삼아 네 머리털과 수염을 깎아서 저울에 달아 나누었다가 그 성읍을 에워싸는 날이 차거든 너는 터럭 삼분지 일은 성읍 안에서 불사르고 삼분지 일은 가지고 성읍 사방에서 칼로 치고 또 삼분지 일은 바람에 흩으라 내가 그 뒤를 따라 칼을 빼리라.”

없어요. 흔적도 없지요. 불에 태워서 죽고, 그다음에 칼에 다 베여서 죽고, 바람에 날려서 죽어서 이 하나님의 거룩한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백성은 아무도 남지 않는 거예요. 찢어먹고, 데쳐 먹고, 볶아 먹고, 그런 거지요. 이게 바로 이스라엘 역사 속에 감추어진 적그리스도, 가짜 메시아 색출하는 현장입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우리는 죄의 종이기 때문에 색출할 능력이 없어요. 주인을 어떻게 색출해요? 종인데. 종이기 때문에. 우리는 다만 이거지요. 뭘 잊어버렸는데 뭘 잊어버렸는지를 몰라요. 찝찝하게, 평생을 찝찝하게 사는 거예요. 내 뿌리를 몰라요. 이거 해볼까,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닌 것 같고, 뭔가 내 모습이 뭔지를 모르겠어요.

하나님을 믿어도 처음 믿을 때는 울면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그 때는 좋았지요. 얼마 안 가니까 뭐 시들하고. 그래서 요한1서 4장 12절에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본 자가 없어요. 본 자가 없으니까 보여줄게, 가 적그리스도에요. 보여줄 게, 적그리스도. “이거 네가 원하는 것이다.”

누가 원하는 것? 죄의 종이 되었던 사람, 죄의 종이 되었던 사람은 모든 사람이지요, 죄의 종이, 우리가 원했던 메시아,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에게 들어 있는 속마음을 내가 하나의 인격체로 구현해서 역사가 끝나기 직전에 마감체로 너희에게 왁 쏟아지도록 해줄 게. 이게 진짜 네모습이다. 그 가짜 예수하고 짝짜꿍 잘 해먹고 잘 믿고 잘 해라. 신앙생활 잘~해라. 자~알 해라!”

이 말은, 그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잖아요. 모든 인간에 의해서 죽었다는 말이지요. 그 죽으신 것, 따라서 실상은 하나님의 죽음이에요. 그게 실상이고 나머지는 다 허상입니다. 생명은 어디 있는가? 그 죽음에 같이 집어넣어서 그 죽음에 동참하는 거예요.

에스겔처럼 동참케 하는 거예요. 볶아먹고 찢어먹고 하듯이 수염 깎아서. 제사장이 수염 없으면 이것은 권위작살 나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그 거룩한 제사장의 권위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바람에 날리고, 칼에 베이고, 불에 살리고, 어떤 인간도 구원될 자는 없다는 대원칙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봉을 인간들이 강탈해 갔으니까 마땅한 거지요.

그리고 에스겔 24장 15절에서 17절에 보면 에스겔 아내가 죽습니다. 죽는데 아내 죽는 것도 서럽지만 하나님께서 뭐라고 명령하느냐 하면, 절대로 상갓집 음식 먹지 말고 아내 죽더라도 울지 말라는 거예요. “우는 척도 말고 울지 말라.” 왜냐하면 “이 백성은 눈물도 아깝다, 인간들아! 울 가치도 없다.”

마땅히 멸망 당해야 될 자가 마땅히 멸망 당하는 거지요. 포도나무를 심어놨더니만,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어놨더니만 이건 뭐 다 썩어버렸어요. 죄의 종이니까. 그러니 이 이야기가 여러분에게 즐겁게 들려야 돼요. 신나게 들려야 됩니다. 왜? 두 개니까. “더 욕해 주세요. 더 욕해 주세요. 더 심한 것 없습니까?” 신나야 돼요.

차마, 내 힘으로 살아온 과거의 아름다움이 있는 이 좋은 나를 차마 내 손으로 어떻게 내칩니까? 그런데 고맙게도 주께서 시간 보내 가면서 내가 내칠 수 없는 나를 주께서 작살을 내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우리가 헤어져야 되고 이별해야 될 우리의 자아는 마치 옛 공원에 있는 낡은 벤치 같아요. 왜냐하면 그 벤치는 어릴 때 나의 자아가 앉았던 곳이고, 일곱 살 때 자아, 청소년 때 자아, 그리고 청년 때 자아, 내 기억들이 낡은 의자와 함께 퇴색되어 갑니다. 이게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이것을 가지고 복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참으로 기쁘다는 의미가 어째서 기쁜지를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살아가면서 하나둘 무너져 내리고 하나둘 없어져 가는 그것이 주의 징조로서 그리고 주의 증인으로서 주의 일에 동참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새로운 의미부여가 됨을 깨닫게 해주시고 이제는 내 잘남보다 생명만 증거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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