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아닌 선택
2022년 5월 8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후서 2:8-10
(2:8)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2:9)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2: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구원받지 못한 자’가 있다는 것이 인간 세계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비록 자신이 구원받아도 구원받지 못한 자가 따로 있다는 사실로 인해 양심상 편치 못하게 합니다. 이럴 경우, 이 사람은 하나님보다 더 양심적이고 착한 사람으로 간주될 것입니다. 실상은 이러합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 자’입니다.
이 세상에서 ‘구원받은 자’는 오직 한 분, 예수님 뿐입니다. 예수님 한 분과 구원되었기에 자동적으로 세상의 모든 이는 구원받지 못한 자가 되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구원되시는 경로를 따라 보면, 왜 모든 인간들은 ‘구원받지 못할 자’인지가 드러납니다. 그들은 아직은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 ‘저주받은 천사’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정체불명의 존재, 악마가 이 세상에서 드러나기 전에 먼저 예수님께서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 개인에게 일어난 일이 인류 전체 모두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나타내셨습니다. 각자 인간들이 어떻게 살던 상관없이, 예수님에게 일어난 그 일이 전 인류의 운명을 확정지워버린 겁니다.
이러한 개인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두 번째 나타나실 때에는 최종 결선 대결자로서 그동안 인간의 정신을 지배했던 악마의 대변자가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구원되었기에 이제 남은 것은, 왜 이 세상에 악마가 어떤 식으로 인간 세계를 장악했는지를 알리십니다.
그것은 율법을 주어진 이스라엘을 통해서 대표격으로 보여집니다. 예수님을 가장 근접한 공간에서 예수님을 처리했던 자들은 이스라엘의 알짜배기라고 자부하는 유대민족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유일하게 율법이 주어진 것을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 깨끗한 희생 제물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알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산다와 죽는다’, 즉 ‘생명과 죽음’의 구분을 제대로 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은 살아있다고 여겼습니다. 이 땅에 살아있는 자신들이 죽어서는 좋은 곳에서 잘 살고 싶어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십자가를 알게되고부터는 비로소 살다/죽음이 오직 십자가를 근거로 주어진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즉 인간이 있기 전부터 생명과 죽음에 관한 나무가 먼저 에덴동산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선악을 아는 나무의 과실을 먹게 되면 죽고, 그렇게 되면 생명나무 과실도 먹을 수 없습니다.
즉 생명과 저주(사망)은 인간의 행함으로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었던 겁니다. 선악과 심은 이도, 생명나무 심은 이도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저주와 생명의 취지를 드러내기 위해 인간이 후차적 의미로 만들어졌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미 악마의 마음의 지배를 받게 된 인간들로서는 자기 선택과 자기 결정과 자기 의지를 철회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여기서 인간의 선택은 하나님의 선택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인간들의 견해에 의할 것 같으면,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만들어졌다는 그 사실만으로 인간은 사랑받을 권한이 하나님에게 있다고 우기게 됩니다. 이는 인간들의 마음이 이미 악마의 영향권 안으로 가두어져 있음을 인정못하는 태도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구원해내라고 하나님께서 요청할 권한은 없습니다. 이 요청할 수 오직 한 분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구원받을 이유’ 뿐만 아니라 ‘구원받지 말아야 할 이유’까지 함께 제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결정하는 것이 에베소서 1:7에 나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문장에서 두 개념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하나는 ‘그의’입니다. 다른 하나는 ‘죄 사함’입니다. 즉 모든 인간은 죄에 빠져 있습니다. 저주에 빠져 있습니다. 이 빠져 있는 저주는 보편적이라서 인간이 노력한다고 해서 영향력을 줄 수 없습니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저주의 의인화를 겨냥한 생명의 인물이 되신 예수님 뿐입니다. 즉 누구는 구원해주고 안 해주고를 결정할 결정권은 모든 인류로부터 버림받은 ‘예수님, 그 분의 피 뿐입니다.’그 누구의 피와 희생과 봉사에 이 피 안에 낄 수가 없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은 율법을 받았지만, 그 율법을 이해하고 실천을 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당합니다.(사 1:11-15)
이로서 인간이 율법 따라 저주받은 것은 지당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선지자들이 출현하는데 그들은 장래의 구원될 자를 미리 말씀 형식으로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나라는 이런 선지자를 몹시 핍박했습니다. 이러한 환경이 신약까지 이어어면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못박혀 죽게 되신 겁니다.
원래 구약 때의 성전은 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곳이었습니다.(왕상 8장) 그런데 마태복음 12:
6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고 나와 있습니다. 즉 모든 율법의 완결성이 성전에 있는데 기존의 성전은 틀렸다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이 성전 의미의 결정체라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만이 누구를 구원하고 누구를 버리를 결정짓는 최종 결정권자로 등극합니다. 이 사죄의 혜택은 아무나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자가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요 17:9)
예수님의 선택을 반발하는 세력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그들을 꾸짖습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롬 9:20-23)
인간은 창조자가 아닙니다. 그저 피조물입니다. 악마로부터 사면되는 대상이 된 피조물이라면 이 세상의 그 누구의 말도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고전 10:25,27,30)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 어떤 경우라도 주님의 일에 잘못이 없음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강-데살로니가후서 2장 8-10절(선택 아닌 선택)220508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 8-10절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8-10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여기 본문에 보면 ‘구원함을 얻지 못한 자들’이 생깁니다. 구원함을 얻지 못하는 자들의 원천을 성경에서는 알려줍니다. 8절에 ‘불법한 자’가 드러나지요. 이 불법한 자들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서, 악마의 주는 힘을 따라서 일하면서 이들에게 포섭된 자들이 누구냐? 10절에 보면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멸망하는 자들을 가지고 여기서는 구원함을 받지 못한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구원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필히 구원받지 못한 자들과 병행해서 같이 생각해 줘야 돼요. “당신은 구원받겠습니까?”라고 질문할 게 아니라 “당신이 왜 구원받지 못하는지를 아시겠습니까?” 이렇게 질문이 되어야 되겠지요. 구원이 되기 위해서는 구원받지 못하는 현상도 동반해서 필히 같이 일어나 줘야 돼요.
그래서 오늘 본문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왜 구원받지 못하느냐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지 못하는 그자가 눈으로, 이 세상적으로, 역사적으로 등장할 때가 나오는데 그때가 바로 최종결승자의 등장입니다.
최종결승자, 어떤 경기를 할 때 마지막 결승전에서는 두 사람 남지요. 우승자를 놓고 최종으로 붙잖아요. 결승이 될 때까지, 재림이 될 때까지는 최종자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등장하면서 최종자가 같이 등장해서 설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그러면 구원받지 못한 자라는 것의 뉘앙스가 좀 기분이 나쁘지요. 기분 나쁠 수가 있기 때문에 말을 바꾸겠습니다. 그러면 구원 된 자가 누구냐? 구원된 자는 이미 역사적으로 하나의 인물로 등장했습니다. 구원된 자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 구원되었어요. 그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 빼놓고는 구원된 자가 없지요.
그러면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 모든 인간들은 구원받지 못하는 자의 권력 속에, 권세 속에 있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간단해요. 예수님이 만약에 재림하지 않고 강림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이 구원받지 못함의 권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이 불법한 자가 등장해서 비로소 나타나는 사단의 역사, 사단의 힘이 모든 인간을 통솔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인간은 구원되지 못하게 만드는 힘의 지배하에 놓여 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참 쉽지요. 쉬운 것도 쉬운 거지만 이게 여러분에게 체험되어야 돼요. ‘아, 이게 구원이 안 되는 환경 속에, 집단 전체, 환경 자체가 구원이 안 되게 조성된 환경이구나. 구원이 있을 수 없는 환경 속에 우리는 태어났고 그동안 우리는 살아왔다.’ 그렇게 받아들이시면 되는 겁니다.
‘누구야? 구원 안 되게 한 게 누구야?’ 이게 뭐냐? 성경에서는 사단인데 정체불명의 적입니다. 정체가 불명한 이 적을 인간들은 마지막 때가 되어 사단의 종이 등장할 때까지 몰랐는데 그것을 우리 예수님께서는 미리, 이 땅에서 하나의 개인으로 오셔서 미리 보여줬어요. 왜? 이 세상 사람들은 내가 구원하지 않으면 구원되지 못하는 존재인가를 예수님 오셔서 그걸 보여주신 거예요.
이것은 예수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에게 있었던 개인의 문제가, 개인의 활동이 전체 인류의 운명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특정 개인이 어떤 일을 한다고 해서 전체 싸잡아서 전체인류가 그렇다, 이렇게 말 못 하잖아요.
종교라 하는 것은 자기 필요한 것 골라잡으면 되니까 부처야, 네가 뭘 하든 소크라테스가 뭘 하든 내가 안 믿으면 그 만이지요. 내가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내 운명은 어떤 특정 개인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이러면 우리는 사적으로 기분 되게 나쁩니다. ‘나는 뭐 로봇도 아니고 뭐냐?’ 이렇게 되겠지요.
오늘 본문에서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두 인물에 의해서 세상은 결정되었다고 보는 거예요. 하나의 인물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고 먼저 등장한 인물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등장하셔서 “너 나와!” 하고 불러내는 거예요. “사단 너 나와! 숨어 있지 말고 너 나와!”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모든 인간의 정신과 모든 인간의 문화와 모든 인간의 심리와 마음 상태를 지금도 장악하고 꼼짝 마라, 하는 너, 나와 우리 둘이 결선이다, 결선. 우리 둘이 결선이야.” 예수님께서 그러할 만한 권한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개인적인 문제가 그냥 개인적인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아직까지 태어나지 않은 그리고 죽었던 인류 모든 인류를 다 통할해서 그의 본질을 결정시켜줄 그러한 일을 주님께서 먼저 하셨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부터 시작했어요. 오신 것, 태어난 것부터 해서 도로 아버지에게 귀환될 때까지 거쳤던 관문들이 있어요. 관문 하나하나에 거기에 숨어 있던 최고의 결전자, 정체 모를 어떤 인물, 그것은 바로 저주받은 천사예요.
저주받은 천사가 평소에는 가만있다가 주님께서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줄 때 그때 탁탁 등장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이 출생할 때 베들레헴의 두 살 밑의 애들 다 죽었잖아요. 동방박사가 예루살렘 찾아올 때 그 헤롯왕이 뭐라고 했습니까? 죽여버려라, 했지요. 동방박사를 헤롯왕이 죽이려고 하는 이유는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어서 그래요.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어서.
예수님이 출생할 때, 처녀로 출생할 때 자기의 약혼자 요셉이 관계 끊으려고 했지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일을 저질러요. 분란을 일으키게 만들어버려요. 예수님 가신 길이 처음에는 바리새인들이 참으려고 했어요. “저러다 말겠지. 그런 인간이 한둘이야?” 자기가 교주라 여기고 추종자들 팬들 모집해서 돌아다니는 것 그게 어제 오늘 일이 아니거든요.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이 말이지요. 내가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것.
그런데 그 당시에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를 주께서 일으킵니다. 그게 뭐냐? 건들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려 버렸어요. 그게 성전을 건드린 겁니다. ‘더는 못 참겠다.’ 그렇게 나온 거예요 .성전을 건드린 거예요. 기적 행하고 뭐 말씀 좋다, 그 이야기는 뭐 그냥 세월 지나면 다 잊기 마련이지만 결정적으로 그 당시에 유대민족을 하나로 통솔했던, 통합했던 그 이념이 성전 이념이거든요.
무슨 뜻이냐 하면, 모든 율법은 어디에 집결되는가? 성전에 집결되어 있어요. 이유가 뭐냐? 어떤 경우를 당해도 유대나라가, 이스라엘이 어떤 경우를 당해도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게 되면 저주가 복으로 바뀐다는 그 열왕기상 8장에 나오는 그 하나님의 약속을 그들은 철석같이 진리로 믿고 있었던 겁니다.
성전이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이 세상의 어떤 민족과도 차별 나는 특혜를 받은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제공해주고 있는 그 눈에 보이는 건물이 성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스가랴같은 경우에 메시아는 어디에 오느냐? 그 성전에 와요. 감람산에 오게 되어 있어요. 성전에.
지금도 이스라엘은 제3 성전을 준비하기 위해서 큰 황금 촛대를 만들어 놨어요. 메시아가 현재 황금 돔이 있는 그 예루살렘에 오시기 때문에. 그런 최종적 진리체제가 없어 버리면 인생 힘들어 못삽니다. 뭐 믿는 구석이 있어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믿는 구석, 그것은 성전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은 다 용서가 되어도 성전을 뒤집어엎는 것 이것은 용납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선지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지 않는다, 는 이런 이야기를 하시면서 본인이 성전을 건드려 버렸습니다. 안 죽일 수가 없지요. 죽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리고 많은 유대인들 따르는 사람들은 “이게 어디서 까불고 있어. 한 뼘도 안 되는 게!” 끽소리도 못하고 체포되고 끽소리 못하고 죽는, “점점 심하게 나오는데 선을 넘지 말라고 했잖아. 넘으면 너 죽는다 했잖아. 결국 죽으면 네 책임이야.” 그래서 그렇게 죽음으로서 게임 오버, 끝났지요. 끝났어요.
그리고 제자들도 “한평생 참 헛짓했다. 참, 해프닝도 이런 해프닝이 어디 있어. 가자가자, 고기나 잡으러 집에 가자.” 이렇게 각자 농사지으러 갔어요. 모든 게 그렇게 끝났어요. “혹시나 했지. 예수라는 분이 뭐라도 될지 알았지. 진짜 메시아로서 하늘로서 구름 타고 올지 알았지 뭐. 기적 베풀 때 와, 나는 막 기대 부풀었어. 내가 그분의 말에 들떠서 모든 것을 걸었어.”
그런데 게임 끝났습니다. 어느 누구도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그런 경우는 없기 때문에. 그런데 사달 났습니다.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되었습니다. 부활이 되면 무엇이 소환되느냐 하면, 평소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살아계실 때 날렸던 모든 멘트가 이게 단순히 진리 정도가 아니고 인간들 모든 생각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최후의 결정자, 그동안 인간의 정신을 지배했던 구원 받지 못하는, 전형적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전형적으로 멸망 당해야 될 그 멸망의 사고방식 안에 모든 인간이 한통속이라는 사실이에요. 모두가 한통속이었던 겁니다.
단순히 예수님이 진리 정도가 아니에요. 가짜요 불의한 가운데, 저주받은 가운데서 그것이 진리인 줄 알고 인간들은 거기서 못 벗어난 채로 태어났고 살아가고 있고 죽어가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 그 나라가 어느 나라냐? 이방 나라냐? 단군의 자손이냐? 아니에요. 어느 나라냐?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유대민족으로 완전히 응축된, 엑기스된 나라 이스라엘 민족이, 액기스된 나라가 바로 유다 지파 유대민족이에요. 열두 지파 유대민족 그들만 남은 자라고 자부하는 유대민족, 그 유대민족의 바로 가장 근접한 상태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가장 가까운 상태에서 그들은 한목소리를 냈다는 게 중요해요. 한목소리를 낸 거예요. 예수는 가짜다. 그들은 이구동성 한목소리를 낸 거예요. 예수는 가짜다.
죽을 때까지만 가짜였던 겁니다. 죽어서 다시 살아날 때 예수님 보고 가짜라고 의견을 합의했던 그 합의가 가짜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그 가짜성에서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위인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쉽게 정리하겠습니다. 모든 인간은 구원받지 못한다. 모든 인간은 멸망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 따라서 인간 세상에서 내놓는 모든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는 구라입니다. 다 거짓말이에요.
구원이 될 수 없는데도 구원된다고 가르쳤던 겁니다. 도대체 그동안 이스라엘에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예수님께서 미리 모든 세상 끝장에 모든 인류가 진리가 아닌 것에 완전히 몰빵해서, 거기에 몰입해서 같이 망하고 멸망되고 같이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신의 단독구원으로서 그걸 증명해 냈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그 배후에 누가 있느냐? 저주 받아야 될 천사가 있었던 거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저주받을 천사에게 그 천사를 영원히 지옥에서 멸할 수 있는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거예요. 혐의를 찾아내는 거예요, 혐의. 수사관이 범인을 잡을 때 어떤 혐의가 있어야 되잖아요. 그 혐의를 찾는 겁니다. 주님의 작업이.
혐의가 정당해야 주님의 심판도, 하나님의 심판도 정당해지기 때문에 혐의를 찾는 거예요. 그 혐의를 찾는데 그 혐의를 찾는 대상이 뭐냐? 이스라엘이었던 거예요. 자, 이스라엘에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이스라엘은 이런 주장을 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서 깨끗한 제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스라엘 역사 내내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해석하면서 그걸 끄집어낸 거예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우리는 죄인인데 우리 죄를 위해서 깨끗한 제물이 대신 희생해야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게 악마의 최종적인 종교적인 시혜, 은혜 베풂이라는 사실을 여러분 상상도 못 했지요. 어느 교회가 이걸 상상하겠어요? 참 하나님 좋으신 분이다, 우리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 보내주시고 주님이 얼마나 고맙노, 그게 마귀 생각이라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게 악마의 생각, 2천 년 이어온 기독교의 정통교리입니다. 제가 언제 설교인가, 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 했어요. 인간이 범죄한 이유는, 인간이 죄짓는 이유는 사람이 무서워서 그래요. 사람이 무서워서 범죄해요. 남들이 나한테 거는 기대가 있잖아요. 기대에 내가 호응 못할까봐 내가 겁나서 급속도로 호응하기 위해서, 빨리 호응하기 위해서 범죄를 일으켜요. 도둑질을 한다든지 살인을 한다든지.
그러면 사람이 왜 무서우냐? 이게 한통속이기 때문에. 자, 어버이 주일에 부모에게 카네이션 꽂아주는 그 범죄, 그 범죄를 왜 저지르는 겁니까? 사람이 무서워서 그래요. 오후에 산책하는데 나이 많은 사람들은 전부 카네이션 꽂고 다니는데 만약 꽃 안 꽂고 다니면 다른 부인네들이나 아저씨들이 저 집은 자식도 없나, 저 집은 부모한테 효도할 줄 모르는 모양이다, 라고 구시렁거리는 그 소리가 무서운 거예요. 그게 무서운 거예요. 남들의 시선과 평가와 관찰이 무서운 거예요.
그래서 카네이션이 뭔지도 모르고 5월 8일만 되면 다 해야 되는 줄로 알고 있어요. 벌써 우리 외손녀는 만들어서 독일로 가기 전에 꽂아주고 갔어요. 왜 한통속입니까? 왜 인간은 모조리 한통속이고, 왜 이스라엘은 모조리 한통속이고 왜 그런 거예요? 한결같이 생각들이 왜 같은 겁니까?
그것은 인간이 산다는 개념에 대해서, 예수님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십자가 앞에 서기 전까지 인간은 산다는 개념이 동일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지금 숨 쉬고 있는 것을 산다고 여긴 거예요. 지금 이 땅에서 사는 것처럼 죽어서도 또 살고 싶은 거예요.
그 산다는 개념이 마귀적인, 악마에서 제공한 산다는 개념인 줄, 악마가 그렇게 산다는 개념을 가짜로 줬다는 사실을 어느 학문도 어느 철학도 어느 신학도 그걸 증명해 내지 못하고 있어요. 이건 사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이게 죽은 거예요.
‘돈이 없으면 가오라도 있지.’ 여러분, 지금 아카시아 냄새가 온 산하에, 강에 산에 풍기는데 아카시아 향기가 우리가 가오 있다고 준 겁니까? 가오 있는 사람에게만 아카시아 향기가 훅~ 하고 주어지는 거예요? “돈이 없지 우리가 가오가 없나?” 이것은 영화 찍으면서 강수연이가 이야기한 거거든요. 죽은 강수연입니다. 동명이인들 많아요. 영화배우 강수연.
우리가 강수연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우리 인생 억울해요, 억울 안 해요? 시집도 못가고 나이가 5십 다섯 살인데, 그것도 병들어서. 우리가 얼마나 억울합니까? 지금 문제가 뭐냐 하면, 왜 우리가 억울해야 되느냐, 를 우리가 문제 삼지 않고 있다는 게 문제에요. 우리가 왜 억울하게 느껴지느냐. 이게 악마의 마음이에요. 이게 마귀의 마음이에요.
하나님께서 나에 대해서 정당한 대우를 안 해줬다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에서 행정처리가 뭐가 잘못 되었다는 거예요. 나 같은 사람이 왜 고생하냐 그 말이에요. 이 점에 대해서 집에 6천억 7천억 갖고 있는 재벌도 똑같아요. 모두 다 한통속입니다.
그들은 산다는 게 뭔지를 몰라요. 생명을 몰라요. 그들은 들어본 적도 없어요. 교회 와도 생명을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자꾸 억울한 기분을 가지고 교회 오기 때문에 그래요. 아쉬워서 교회 오는 거예요, 아쉬워서. 내 인생 이렇게 사는 것이 내 인생 답지 않다고 여기는 거예요. ‘하나님 뭐하시노? 나한테 복을 안주고.’ 이런 마음을 가지고 오기 때문에 그래요. 이런 마음을 가지고 뭔가 내 인생이 이런 식으로 가는 게 뭐가 잘못 되었어, 라는 억울한 생각을 갖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몇 해 전에 세월호 침몰했지요. 진도 근처 바다에서 안산에 있는 학생들 제주도로 수학여행 가던 세월호 바다에 빠졌잖아요. 세월호 빠졌을 때 그 학생들 뭐 했느냐 하면, 자기 가방 챙겼습니다. 자기 가방 챙긴다고 세월호 빠지는 게 안 빠집니까? 방금 제 말에 여러분이 얼굴 막 찡그리고 싶어요. 불쾌하게 들려요. 왜냐하면 걔들을 동정하고 싶은 거예요. 걔들이 무슨 죄가 있냐, 이런 식이에요.
그러면 주님은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근본 자체가, 근본 자체가 뭔가 인간으로서 되게 억울하다는 생각을 태어난 모든 인간이 다 갖고 있다는 게 여러분 뭔가 수상하다는 느낌 안 듭니까?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 안 들어요? 복음 아는 사람들이 특히 우리 교회 교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전해봐요. 복음을 전하는데 안 먹히지요. 턱도 없이 안 먹히잖아요. 부인한테도 안 먹히는데요, 뭐.
안 먹힐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령을 안 받아서 안 먹힌다고 이야기하거든요. 지금 관점이 성령을 안 받은 관점이 아니고요, 그들은 자기가 하나님인 것을 포기하기 싫은 거예요. 인간은요 자기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자기가 하나님이에요, 하나님. 이걸 우리는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있는 거예요.
‘내가 왜 죽어야 돼? 남이 죽어야지 내가 왜 죽어야 돼? 내가 왜 가난해야 돼?’ 내가 신입니다. 신인데 이 고질병을 무슨 수로 고칩니까? 복음을 바로 전했으니까 그런 반응이 나오지요, 전하면요, 내가 신 노릇하는 것을 여기서 접기 싫다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 계속 전하면 ‘교회 안 다니면 되지.’ 그 모습 자체가, 그런 식으로 살아 있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그걸 죽었다고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거기에 뭐가 개입되었습니까? 내가 교회 안 나가면 되지. 여기에 뭐가 들어가냐? 선택이 들어가요.
오늘 본문 한번 보세요. 10절 끝에 보면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여기서 여러분은 뭘 끄집어낼 줄 알아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끄집어낼 줄 알아야 돼요.
이미 모든 인간은, 이 세상은, 아담의 자손들은 죄와 죽음과 사망과 저주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그들은 그 사실을 마지막에 오는 악마의 사자가 올 때까지는 왜 그런지를 몰라요. 그 이유를 몰라요. 인간이 왜 죽는지를 모른다고요. 강수연이가 왜 죽는지를 몰라요.
몸이 아파 죽는 게 아니에요. 처음부터 죽어 있었던 거예요.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말이지요. 강수연 걱정하지 말고 나도 지금 내가 죽는 이유를 내가 모르고 있는 이유가, 왜 우리가 죽습니까? 우리가 자칭 신으로 행세하고 있기 때문에 죽이는 겁니다. 누가? 하나님이요. 내가 신이거든요. ‘신을 신답게 대우하라. 이 하나님아!’ 이런 식이라는 말이지요.
거의 10년 가까이 되었나 잘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모임에서 포항 북구 해수욕장 근처에 해변전망대에 놀러간 적이 있어요. 아직도 있습니까? 그 전망대까지 놀러 간 적이 있는데 그때 대전의 김종인 권사님께서 같이 갔어요. 한 열댓 명 갔는가, 김종인 권사님이 사과를 가져 왔어요. 손수 가져와서 깎아서 쟁반에 담아서 전망대에서 구경하고 있던 우리 팀에게 돌아다니면서 하나씩 잡수라고 나눠줬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어떤 아주머니가 우리 팀도 아닌데 자기도 달라고 한 거예요. 권사님이, 물론 주기 싫어서도 그랬겠지만 우리 먹을 것도 모자라기 때문에 안 됩니다, 했다는 말이지요. 그 아주머니가 굉장히 화를 내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달라는 내 손길을 당신이 개무시했다는 거예요.
이게 인간입니다. 나 구원시켜 달라는 거에요.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예수님 믿고 피 믿고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나 구원해달라. 그 아주머니는 자기가 사과 달라는 권한이 없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김종인 권사님이, 오늘 권사님 이야기 자주 나오네요, 김종인 권사님이 이걸 주는 것은 뭘 계산하느냐 하면, 자신의 희생과 봉사가 전달 되어야 될 사람들을 따로 이미 정해놨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게 선택입니다. 그 선택의 권한은 유일하게,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밖에 없는데 유일하게 구원받는 사람만이 선택할 권한이 있어요.
다른 피는 안 됩니다. 다른 어떤 목사의 희생과 어떤 사도의 희생 그것은 구원의 근거가 되지를 못해요. 인간의 어떤 행위의 겸손함과 낮춤도 소용 없어요. 그게 에베소서 1장 7절에 나옵니다. 1장 7절에 우리가 충격을 받아야 될 단어 하나 나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다음에 나오는 충격적인 단어 하나가요, 우리의 목숨하고 바꿔도 괜찮은 단어 하나가 뭐냐? ‘그’에요 그, 그, ‘그의 피’에요. 다른 피는 안된다는 거예요.
김종인 권사님 피 ,그 노력도 안 돼요. 소용 없어요. 다른 피는 안돼요. 목사의 설교, 설교하는 목사의 피도 필요 없어요. 다른 피는 안 돼요. 오직 “그의 피”에요. “그의 피로 말미암아” 그다음에 나오는 단어 아시지요,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는 겁니다.
죄사함을 얻는다는 말은, 모든 인간은 이미 죄인이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사면하고 사면 안 하고 하는 것은 차기 대통령이 결정할 문제에요. 누구를 사면한다. 누구를 사면해준다는 이야기는 무슨 뜻입니까? 제발 너희들은 지금 교도소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네가 좀 그걸 분명히 알고 있어라, 그 말이지요.
“너는 신이고 싶지? 그게 바로 갇힌 거야.” 참 바보라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는데 그게 지금 마귀의 심정에, 마귀의 마음에 갇힌 거예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인데 지금 뭐하시노? 날 구원하지.’ 이게 악마의 마음이에요.
그래놓고 하는 말이 들은 풍얼이 있어 가지고, 우리는 율법에 의하면 죄인인데 우리 힘으로는 구원받지 못하고 오직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는다고요? 어디서 그런 구라를! 생각해 보세요. 본인이 구원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어디서 교리를 이용해서 어디서 예수님 하신 일을 이용하려 합니까! 그 아주머니 지가 뭔데? 지금 생각해도 화나는데 제가 옆에서 목격했거든요. 아주머니 지가 뭔데 사과를 왜 달라고 합니까? 진짜 포항 한 번 더 가고 싶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세 전에 예정해서 선택했잖아요. 누구 맘대로? 왜 본인이 본인의 선택을 결정해 버려요? 떡을 줄 사람은 꿈도 안 꾸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어요. 예정론 교리 안다는 거예요. 그거 알아서 지옥이나 가라! 그거 알아서!
구약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줬습니다. 율법을 줄 때 주께서 시험하신 거예요. 실습한 것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줬을 때 그들은 어디에 이용해 먹는지를 율법을 주시고 그들을 통해서 이런 반응들을 주께서는 끄집어냈습니다.
이사야 1장 11절에서 15절 상당히 깁니다만 길기 때문에 빨리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크리스마스, 부활절, 맥추절, 추수감사절, 전부 다 마찬가지겠지요,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금요철야기도회 많이 해도 내가 듣지 않는다는 겁니다.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왜? 그 당시 이스라엘에만 문제 있어서 그렇습니까? 아니에요.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유일하게 율법을 줬고 유일하게 율법대로 시행을 했던 유일한 민족으로 뽑힌 자고, 그 뽑힌 자가 이 율법의 제사가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그들이 우리를 대표해서 확인해주고 증명해 준거예요.
어떤 인간도 예배드려서 구원받는 인간 없고, 기도해서 헌금해서 전도 선교해서 구원받는 받는 사람 없다. 인간은 어떤 짓거리를 해도 구원받지 않는다. 심지어 자기 피, 자기희생을 해도, 순교자가 되어도 구원 못 받아요. 오직 그의 피뿐입니다. 그의 피.
설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특정인의 개인 문제가 인류의 전체의 운명을 결정짓는 문제입니다. 그 특정 인물이 누구냐? 예수님 빼놓고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이 모양 이 꼴로 어떤 일을 해도 구원받지 못하게 만든 그 당사자 누구야? 그것은 마지막 때 최후 결승선 상에 등장합니다. 주께서 “너 나와!” 하고 불러낼 거예요.
그 전에 미끼 던져야 되지 않습니까? 그 미끼가 뭐냐? 교회라는 거예요. 교회가 미끼, 보이지 않는 악마를 보이는 악마로 끄집어당기는 거예요. 그게 교회고 그게 천주교고 그게 불교에요. 그래서 만든 게 사월초파일이고.
그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나의 선택은 효과가 있다는 거예요. 나의 결정과 판단력과 나의 의지와 나의 결정은, 내가 나를 선택한 그 선택은 하늘나라까지 먹힐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효력 있는 피 흘린 자가 아니면 어떤 인간의 선택도 주께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피 흘린 자의 선택, 오직 주님의 선택만이 유효한 구원을 제공합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선택에 은근히 기대를 걸었습니다. ‘내가 부처 안 믿고 예수 믿는 이 장하디장한 이 선택을 하나님 인정해 주세요.’ 그것도 께름칙하니까 거기다가 하나 더 붙여요. ‘이것은 내 의지가 아니고 오직 성령의 은혜로 내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어디서 들은 구석은 있어가지고 그것 하나 떡 붙입니다. 주께서는 “혐의 있음!” 네가 그런 고백을 하는 그 자체가 혐의없음이 아니고 혐의 있음이에요. 혐의 있음.
남의 팀이 사과 갈라 먹고 있는데 지가 뭔데? 내가 그 아주머니라도 정말, 사과가 등장 안 하면 모르겠습니다만 그 현장에, 그것도 부사에요, 그 사과 등장하면 애들이 아무나 보고 초콜릿 달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달라고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주께서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십자가 지신 이유는, 인간은 저주와 생명의 그 원천이 인간보다 먼저 있다는 사실을 인간은 악마한테 속아서 그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생명이고 저주고 우리의 선택에 의해서 저주받고 선택에 의해서 생명 받는 게 아닙니다.
선악과 누가 심었어요? 우리가 심었습니까? 집사님이 심었습니까? 우리 권사님이 심었습니까? 우리 중에 선악과 심은 사람 아무도 없어요. 죽음을 유도하는, 죽음을 야기시키는, 저주를 야기시키는 선악과 심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생명 나무 누가 심었습니까? 어느 신학자가 심었어요? 칼바르트에요? 누구예요? 누가 심었어요? 없어요.
다시 말해서 이것은 생명이고 저주라는 것은 인간보다 먼저 있다는 거예요. 인간보다. 인간의 운명은 인간보다 먼저 있는 생명과 저주에 의해서 후차적으로 결정되지 태어나서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 저주와 생명이 아니다 그 말입니다. 종교, 교회, 전부 다 헛짓이에요. 그게 공연한 짓이에요. 소용없는 짓 한 거예요, 그거! calm down 좀 해야 돼요.
이스라엘 통해서 이야기했던 것, 예수님이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언되어 있던 그 성전, 그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린 그 성전, 그 성전 건드리면서 주님께서 이런 말씀 남겼습니다. 마태복음 12장 6절에 “성전보다 더 큰이” 끝났지요. 성전보다 더 큰 이, 눈에 보이는 건물보다, 부동산보다 더 큰이.
무슨 말입니까? 생명이 의인화되었다는 거예요. 생명이 사람이 되셨다는 거예요. 생명이! 건물은 가라 그 말이지요. 건물은 가라, 예배당 가라, 그 말입니다. 생명은 내가 아닌 다른 분으로 의인화되어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것은 영원히 저주받을 그 저주도 장래에 의인화되어서 등장하는 거예요. 악마로.
그러면 그 이스라엘에게 율법이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에 율법을 테스트 한 것은 그들은 생명의 의인화와 저주의 의인화, 마지막 때에 나타날 그 의인화를 그들은 생각 못 하고 지금 당장 자기 자신이 잘 풀려보려고, 내가 하나님 덕을 보려고 율법을 잘 지키면 복 받는다 했으니까 복이 되고 저주가 되는 그 주체자로 본인들 행함에다 그 바탕을 깔았던 거예요.
우리가 어떻게 행하면 복 되고 어떻게 행하면 저주 된다, 그 복과 저주의 출발선을 자기 자신의 행위와 실천력에 자리 잡고자 그 짓 한 거예요. 누가? 이스라엘이. 똑같은 그 잘못을 오늘날 교회들이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놀라운 사실이 한두 개가 아니라서 이제는 말하기도 부끄럽습니다만, 놀라운 사실은 개인 문제가, 지금 세 번째 이야기합니다, 개인 문제가 전체 인류 문제로 나아가는 우발적 사건의 출현 되는 현상으로 보거든요. 구약에 그게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선지자 안에 장차 올 구원받은 자가 일종의 배 불룩하게 임신을 했다고 보면 돼요. 선지자 속에 장차 올 구원자를 품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 선지자계열에 오신 예수님이 바로 성전보다 더 큰이가 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 보이지 않는 이스라엘이 보이는 이스라엘한테, 선지자 이름으로 등장하니까 이스라엘이 벌떼같이 그 선지자를 핍박해서 죽여버렸어요. 하나님의 신을 받은 사람을 죽여버렸습니다.
똑같은 현상이 바로 예수님 오실 때 일어나는 일들이에요. 다시 말씀드리면 인간들이 왜 이렇게 자기가 악마 들렸다, 귀신들렸다는 사실을 모르냐 하면, 십자가 사건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자기가 지금 살아 있는 것을 살아 있다는 개념으로 받아들인 거예요. 그리고 숨 끊어지면 죽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성경에서는 분명히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거든요. 살아 있더라도 죽은 것이고 죽어 있더라도 그게 산 것이 된다는 그것을 구약의 선지자를 통해서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 그래서 모세 엘리야가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잖아요. 그러나 멀쩡히 살아 있는 것도 그게 저주 그 자체임을 사울왕을 통해서 보여줬잖아요.
그걸 이스라엘 사람들은 파악을 못 하고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뿐이겠어요?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그렇다면 에베소서 1장 4절에서 말하는 창세 전의 선택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은 뭐냐? 그것은 에베소서 1장 4절에서 빠트리지 말아야 될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3절부터 보면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해놓고 4절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할 때 그냥 택한 것만 보지 말고 뭐냐,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했다는 거요.
‘그리스도 안에서’를 빼버리면 안 된다니까요. ‘그리스도 안에서’를 빼버리면 안 돼요. 죽은 자의 선택과 결정은 소용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가 결정해 주는가? 그리스도가 결정해줘서 그래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는 게 아니고 생명이 죄인을 품어버려서 생명을 얻는 거예요.
“우리가 생명 얻기 위해서 손들었습니다.” 그래서 생명 얻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생명이 오셔서 우리를, 우리가 죄인인데 저주받은 자를, 이게 저주받은 폭탄인데 이 저주를 생명 되시는 분이 우리를 품어 줌으로써 우리는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되고 생명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의 개인에게 일어난 사건이 전체 인류에게로 전체 인간사로 퍼진다는 이야기가 요한복음 17장 2절에 나옵니다. 1절부터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해놓고 이제 겟세마네 기도하는 거예요. 2절에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 왜 이재명 후보는 떨어지고 윤석열 후보가 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왜? 세상 모든 권세가 아버지와 아들의 예수 안에서의 선택을 위해서 일어나야 될 사건이기 때문에. 러시아가 왜 우크라이나를 침범했습니까?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서. 그러니까 조건이 있어요. 하나님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예요.
오늘 본문이 그 내용이잖아요. 사랑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멸망하는 거예요. 그들이 왜 지옥 갑니까? 그들은 원래 지옥 가야 돼요. 더 이상 말하면 안 돼요. 지옥 갈 사람에게 왜 지옥 갑니까, 물으면 안 돼요. 지옥 가는 것이 마땅히 지옥 가야 되지요.
반대로 해야 돼요. “왜 우리를 지옥 안 보내십니까?” 이렇게 물어야지요. 질문 하나도, 교회 그만큼 다니면서 질문 하나도 제대로 못 해요. “주여, 왜 저에게 영생을 주시는 거예요? 진짜 왜 주시는 겁니까!” 짜증 비슷한데 기쁜 이런 태도를 가지고 질문을 해야 돼요. “왜 주시는 거예요, 왜? 안 줘도 되잖아요.” 그거다, 그 말이지요. “사랑하는 자로, 사면되기로 사면대상에 네가 뽑혔기 때문에 그렇다.” 그 뽑힘을 가지고 선택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누군데요?” “예수 내가 뽑았다. 됐냐!”
요한복음 3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한다고 되어 있거든요. 이 대목을 가지고 올림픽 경기장에 그 구절 들고 쫓아다니는 사람도 있어요. John 3:16 써서 들고. 카메라에 보이면서 올림픽 중계를 통해서 전 세계에 전도하는 것.
그런데 그 세상은 이 세상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한 적이 없어요.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지옥이 없어야 돼요. 그건 여호와의 증인한테 가세요. 그들은 하나님이 사랑하기 때문에 지옥 없다는 거예요. 여호와의 증인들.
여기 9절에 나옵니다. 17장 9절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오.” 세상을 위함이 아니고! 성경에서 자꾸 뭘 빠트리면 안 돼요. 내가 세상을 위한 게 아니고 세상 중에서 아버지 것이, 사면대상 리스트가 따로 있는 거예요. 사과 줄 사람이 있는 겁니다.
또 김종인 권사님 이야기 해야 되겠네요. 사과 줄 사람이 따로 있어요. 지나 개나 사과 달라고 하면 안 됩니다. 영생 좋다고, 천국 좋다고 달라고 하면 안 돼요. 주님께서 여기에 실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6장 39절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이게 예수님의 일이에요.
그러면 이런 작업을 하시는 그것, 로마서 9장 19절에서 23절에 보면 이런 복음에 대해서 예수님을 미워했던 세상과 똑같은 세상이 사도바울이 이런 복음 전하니까 그들이 사도바울에게 얼마나 욕들을 했겠어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누구든지 구원받습니다. 모든 인간이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할 때 그 ‘모든’이라는 것은 예수님 십자가 지기 전까지 인간들이 악마의 생각에 의해서 갖고 있던 인간들과 인간들 합체를 ‘모든’이라 하는 거예요.
주님은 그런 것을 ‘모든’이라 하지 않고 그 ‘모든’이라는 말, ‘everybody’라는 말을 그런 식으로 사용한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말하는 ‘모든’이라는 것은 기존의 인간 ‘모든’이라는 개념 자체를 부수기 위한 ‘모든’이에요. 인간이 만든 체제 있잖아요. 우리끼리 한통속이라는 그 ‘모든’ 그 개념을 부숴서 그 개념에서 나온 것은 계층이나 계급 어떤 배운 사람만 구원받는다든지 신학교 출신자만 은혜가 된다 이런 계층화된 것을 다 끊어버리고 어떤 직업이든, 직업이 있든 없든, 어떤 가난한 자든 관계없이 구원될 자는 구원된다, 의 합체가 ‘모든’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복음 전할 때 얼마나 욕들을 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이 반격에 나섭니다. 로마서 9장 19-23절까지 보면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 하리요.”
즉 “내가 저주받기로 만들어 놨는데 네가 뭔데 주님보고 이렇게 만들어라, 저렇게 만들어라, 하느냐. 너는 피조물이야!” 그런 뜻이에요 “너는 피조물이야. 신이 아니야. 신과 피조물도 구분 못 해? 인간아!” 이런 뜻이에요. 지금 욕하는 것 아닙니다. 평생 교회 다니면서 그거 구분 못 했어요? “하나님, 저 피조물인데 구원해 주세요.” “가만있어. 내가 찾아갈 테니까 가만있어. 권한도 없으면서. 그것도 죄인주제에.”
로마서 9장 16절에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십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요한복음 10장 25절, 27절, 30절에 나옵니다. 뭐라고 되어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곧 “남들에게 묻지 마라. 네 인생 남한테 물어가면서 살지 마라. 이떡을 먹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묻지 마라. 먹고 싶으면 먹어라. 이걸 해야 돼, 말아야 돼, 묻지 마.” 왜? 피조물이기 때문에. 반드시 주님의 선택안에서 주님의 지시가 있을 것이고 그 지시대로 까라면 까면 되는 거지요
그런데 택함을 받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버림받은 자들은 이 말 듣고 한번 해 봐요. 해 봤는데 벌벌벌, 떨어요. 왜? 남들이 나보고 뭐라고 욕할까 싶어서. 꼭 한통속이에요. 여전히 똑같이 한통속이에요. 남들 보기에 그럴싸한 존재로 비치고 싶은 그 욕망을 그대로 갖고 있으니까, ‘이게 주의 뜻 맞는 것 같은데 나도 막살아도 됩니까?’
한번 막살아 보세요. 얼굴 새파래져서 벌벌벌 떨면서 ‘남들이 날 얼마나 욕하겠나? 나는 이제 망한다. 망하면 안 되는데.’ 왜 망하면 안 되지요? 왜 망하면 안 되지요? 그게 벌써 자기가 이미 망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가 안 망해야 된다는 이유가 뭐냐? 내가 신이거든요. 내가 신이에요. 하나님이에요.
이게 마귀 마음이었어요. 악마가, 사단이 오기 전까지 마지막 최후 결선 오기 전까지 벌써 모든 인간들은 악마의 품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우리 지키기 위해서 하는 일과, 주께서 십자가 다 이루셨다는 그 일과 그 차이를 아는, 비로소 알게 된 성도로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