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는 보세요. 성도는 본인의 손으로 성전을 짓지 않는 거예요. 뭘 해내지를 않는 거예요. 무슨 개가 주인을 위해서 집을 지어드려요. 개인데 개가 솜씨를 부려봤자 그것은 개집 되지요. 개집 된다고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악마가 인간을 다루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다룹니다. 이미 완성된 안에서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에 의해서 이 시간은 우리 인간들이 그동안 악마한테 사로잡히고 농락당했던 시간과 공간이 아니라 이 말이죠.
악마에 사롭잡힌 시간과 공간. 먼저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어디까지나 누구를 위한 시간이다? 나를 위한 시간이다. 이 시간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앞으로 더 발전할 것이고 어느 정도 능력이 대단한가를 스스로 자기 증인되기 위해 사용하는 시간과 공간이었어요. 불안감이 없어졌습니까? 더 생기죠. 뒷산에 올라가니까 더 높은 산이 그제서야 보이는 거고 그게 자기를 미치게 만들죠. 공간은 더 어려워요. 공간은 어렵기 때문에 수요일에 했던 것을 잠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수요 설교의 주제는 이거였어요.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이고 예루살렘이고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베들레헴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적 의미는 지상에 처음부터 없었어요. 예수님이 태어나는 장소가 베들레헴 되도록 미가 5장 2절에서 예언되어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우선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성도되고 내가 천국 간다는 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런 구원은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복음이 올 때, 택한 백성이라는 새로운 의미가 주님의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내 시간과 같이 만남으로써 비로소 말씀은 생겨나는 거예요. 베들레헴이라는 세상적인 지명은 무엇과 결합되느냐 하면 인격, 베들레헴에서 일어날 사건의 의미를 완성시킬 인격, 그 분과 결합될 때 베들레헴은 완성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 성경은 전부다 언약개념인데 전부다 자기를 위해서 성경을 도입하니까 뭐 좋다고 하면 막 끌어다 쓰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전 이런 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패치 또는 파스. 거미줄 나부랭이. 여호와의 증인처럼 성경 말씀 아는데 걷어내면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어요. 파스도 그렇지만 얼굴 팩. 붙이고 난 뒤에 떨어지면 그만이에요. 성경말씀이 이상하게 안 붙어, 이게.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주지 않아요. 그냥 내가 알던 시공간이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 있어요. 뭐 설교야 듣죠. 생중계로 듣고 하는데 떼버려요, 그냥. 예배 듣다가 돌아다니면서 떨어지는 경우도 있고 얼굴 팩하는 것도 아니고...... 파스야 떼면 그래도 다리털이라도 뜯어져 나오죠. 이건 뭐 생생하게......그냥 거미줄 귀찮아서 걷어내듯이 인간 본인이 얼마나 위험하다는 사실을 십자가 앞에서 아시기 바랍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서 인간은 탈피하지 못합니다. 못 벗어납니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인간이 죽는 순간 시간은 멈추고 지명이 되어버리죠. 인간이 죽는 순간 시간은 멈추고 지명이 된다. 이 지명이 바로 지옥이죠. 모든 세상 인간은 원래 죽기 위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또는 저주받기 위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또는 심판의 대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인간에게 주님의 시간이 덮쳐서 지옥이 이렇게 만들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시간은 나중에 공간으로 바뀌죠. 요한계시록 21장에 새 하늘과 새 땅. 또는 그 이전에
예수님의 성령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은 뭐냐. 예수 안이라는 공간 개념이에요. 공간 개념. 그러니 성령 안에 있으면, 성령이 처소니까요, 내가 처소를 마련하면 나 있는 곳에 너희를 있게 하리라. 이 말은 뭐냐 하면 너 있는 곳은 나 있는 곳의 바깥이라는 뜻이죠. 예수님이 완성한 곳 그 바깥에서 무슨 몸부림을 쳐도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시간과 공간을 적용시키면 이 세상은 전부가 애굽이 되는 거예요.
세상 전부가 애굽이 돼요. 계시록 11장에 나오는 이야기죠. 전체가 애굽이 되어야 구약 때의 출애굽 사건의 신약적 최종 완성을 보는 구약이 바탕을 제공했다는 것이 성립되는 겁니다. 출-애굽이니까. 출-애굽 이것이 바로 구원이잖아요. 애굽이라는 지명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그러나 인간은 이미 공간적으로 이 땅을 애굽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고 뭐로 이해합니까? 내가 살 땅으로 이해하는 거예요. 근본 된 토지로 이해하고 있어요, 창세기 3장에서. 근본 된 토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만들어서 그 근본 된 토지의 성격을 규명해버리죠. 그게 하나님 언약의 입장에서 출애굽 되기 위한 전부가 애굽이 되게 하는 거예요. 그 애굽에 살던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나옵니다.
이제부터 좀 어려워요. 애굽에 살던 히브리인들을 데리고 나올 때 히브리인들은 전부다 오해했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줄 알았어요. 진짜 인간들이 생각하는 구원이 되려면 하나님이 외부에서 구원될 자기 백성을 끄집어내는 방식이 되어야 인간들이 이해하고 있는 구원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는 게 아니고 누구를 구원하느냐 하면 주의 이름을 구원해버려요. 외부에서 끄집어 당기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같이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받아버려요. 고난받아버린다고요. 그러면 주의 이름만이 구원되면서 무엇이 떨어져나가느냐 하면 소위 애굽에서 구원되었다는 사람은 광야 40년 동안 다 떨어져나가죠. 탈탈 털어버리면 다 떨어져나가죠. 그렇게 되면 주의 이름 안에 무슨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나타나느냐 하면, 이게 이제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이야기에요. 주의 이름이 하신 안에 용서기능이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용서기능. 용서기능이 발견되려면 용서기능이 나타나려면 용서받아야 될 자가 있어야 되겠죠. 그 기능을 누가 하느냐? 바로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신나게 구원받았다고 우기는 그들이 ‘구원받았음’ 이것이 바로 죄가 되게 하는 거예요. 궁극적인 구원은 궁극적인 죄가 발생될 때 비로소 의미가 동반해서 같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궁극적인 죄가 뭐냐. 자기가 구원받을 자격도 안되는 게 구원받고자 하는 그 의지가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그 의지는 누가 심어준 거예요? 악마가 심어준 거예요. 악마가 심어준 그 자체를 애굽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그들과 함께 동행하시는 겁니다.
좀 천한 예가 될 수도 있는데요. 큰 솥에다 국물 해놓고 오뎅을 꼬치에 꽂아놓고 빼먹는 그런 길거리 음식이 있다고 합시다. 이게 아주 온도 높은 뜨거운 솥이라 할 때 여기 꼬치에 어묵이라든지 떡가래 있고 소고기 비싸서 안 되고 닭고기가 이렇게 있다고 할 때 주님께서 “뜨겁지? 내가 구원해줄게.” 하고 꼬치를 그냥 끄집어내면 구원되는데 그렇지 않고 본인이 여기 같이 꽂혀버린 거예요. 본인이 꽂혀버린 거예요. 아버지께서 아들을 용서하시는 형식을 취하면서 아들에게 같이 꼬치에 꽂혔다는 이유 때문에 죄 없는 아들이 죄라는 같은 전기에 감전되도록 죄가 스며들도록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의 일이 되려면 ⓐ첫 번째, 주의 이름에 죄가 스며들어야 한다. ⓑ두 번째 그 주님을 아버지께서 구원하신다. 아직까지 베드로는 못 가죠. ⓒ세 번째, 주님께서 자기가 함께 있었던, 자기가 선택한 자기 사람을, 아버지도 선택할 수 있지만 아들도 자기 사람을 선택할 수가 있어요, 선택한 사람은 그들의 죄에 같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을 건져낼 근거를 확보한 거죠. 이렇게 해서 구원이 진행되는 겁니다.
불러주는 것도 주님 몫이죠.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주님께서 죄가 스며든다는 이 작업을 놓쳐버리면 구원 자체를 완전히 모르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다윗이 먼저 성전 짓겠다 했죠. 그게 죄가 되죠. 그리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내가 어디 사람 손으로 지은 집에 있지 않다. 그 입 다물라.” 그럼 일을 끝내야 되잖아요. 그런데 다윗 너는 자재를 준비하고 아들 솔로몬이 하라고 왜 그런 걸 시키는 겁니까? 이게 1번 작업이에요. 인간들의 그 철딱서니 없음에 주께서 합류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다윗의 생각이 엉터리니까 죄니까, 죄라 하는 것은 아까 시간과 공간을 자기를 위한 시공간이라 생각하는 게 죄라 했죠, 그러니까 그 성전이 어떻게 돼요? 허물어져야 되죠. 인간 손으로 지은 것은 다 허물어져야 되죠. 성전이 파괴된다 이 말이에요. 성전파괴가 바로 소선지서의 주된 내용입니다. 이건 소선지서뿐 아니라 에스겔도 마찬가지고 다니엘, 이사야 전부다 성전파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들의 시간과 공간 입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시간 공간 속에 삽입되어 들어와서 하나님의 일이 인간 역사 속에 같이 끼어있다고 했는데 그럼 성전이 파괴되면 결국 인간의 시간과 공간은 의미 없이 되고 이것은 죄악된 것이 되어가지고 성전이 없으면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구심점이 날라가버려서 죄가 그대로 있겠죠. 이것은 인간 세계의 파멸로 이어지는 겁니다. 파멸.
미국의 뉴 멕시코주에서 첫 원자폭탄 실험을 할 때 촬영한 동영상을 보게 되면 저 사막에서 원자폭탄을 뚝 떨어뜨리고 저 먼 바깥에서 그걸 관찰해요. 관찰할 때 이 열기 때문에 공기가 진동해서 여기까지 열기가 전달되는 게 카메라에 잡혔다고요. 성전이 파괴되면 그 파괴된 파열된 에너지와 그 성전 파괴될 때 하나님의 진노의 위력이 하나의 진동을 일으켜서 전체 인류의 파괴로 이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성전 때문에 인류는 멸망합니다. 인류는 멸망해요. 그러니까 성전은 인류를 파괴시키기 위한 빌미 제공차원에서 허락하신 거예요. 성전 깨어지면 이 성전은 원자폭탄 같아서 다 망해버리죠.사도행전 17장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17장 30절에 보면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알지 못하던 시대 그다음에 “이제는” 그러죠. 이제는. 그러니까 알지 못하던 시대와 이제를 어떻게 합니까? 가름하죠. 구분하죠. 그럼 알지 못하던 시대와 이제를 가름하는 그 경계막, 그게 뭐냐? 성전의 파괴에요. 예수님의 몸이 성전이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말은 성전이 깨진 거예요.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전에는 이스라엘만 작살냈다가 이방인에게는 허물치 아니한 거예요. 그러니까 댐하고 거리가 먼 곳은 그냥 방치한 거예요. 그러나 이스라엘 자체에 원자폭탄이 안에서 터져가지고 그 에너지가 흘러넘쳐버린 거예요. 성전이 깨어지면서 그 성전을 깨시는 하나님의 저주가 온 지구상에 모조리 다 흘러넘치게 되었습니다. 그 취지가 사도 바울의 설교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성전이 있고 성전과 가장 근접한 데 사는 자들이 누구죠? 바로 이스라엘이죠. 예루살렘 이스라엘 사람들이죠. 그럼 더 멀리 있는 사람들은 이방나라죠, 이방나라. 이걸 요한계시록은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물론 선지서에 보면 이스라엘과 관계되어 있는 형제 나라, 에서 또는 세일산 민족. 에서니까 이게 에돔이죠. 그리고 이스라엘과 근접해 있는 나라가 모압과 암몬. 원래 지중해에 사해 있고 갈릴리 있으면 사해 근처에 에돔, 모압과 암몬이 있죠. 암몬이 지금 요르단 나라에요. 이 나라들은 하나님께서 신명기에 보면 자기 기업으로 허락을 안 했어요.
혈육으로 잘 아는 사이니까. 에돔은 에서, 야곱의 형의 나라이고 모압, 암몬 이 나라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자기 딸하고 관계해서 나온 나라가 이 두 나라에요. 그래서 이 나라 건드리지 말고 가라고 한 거죠. 그런데 건드렸다가는 작살나죠. 봐주는 겁니다. 어째든 봐준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지금 이스라엘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뜻을 더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중심부를 차지하는 거예요. 중심부=자부심이에요. 중심부가 자부심이에요. 인간이 살아갈 때 자부심 없이는 늘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감정적으로도 그렇고. 자기와 라이벌 관계가 딱 튀게 되면 막 흔들리고 괴로워하고. 실제로 그런 일이 있어요. 초등학교 4학년인데 숙제를 내줬어요. 강낭콩 키워서 알 가져오너라. 초등학교 4학년 자기가 옥상에다 강낭콩 키워보니까 4개나 싹이 난 거예요. 사진 찍고 좋아가지고 선생님한테 자랑하려고 하는데 다른 애가 8개 키웠어요. 그다음부터 울고불고. 다른 아이들은 하나도 안 될 줄 알았죠.
이것은 공포일까요, 불안일까요? 불안입니다. 이게 불안이에요. 성전은 인간이 예상치 못한 거예요. 따라서 성전 자체는 불안을 야기시키고 결국 인간 내부에서 지은 성전이 무너지고 외부에서 새로운 성전이 등장하게 되면 이건 공포가 되는 거죠.
더 함축해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이 세상은 어떠해도 공간도 없고 어떠해도 시간도 없고 오직 인격과 인격뿐입니다. 인물과 인물들밖에 없어요. 지명을 통합하면 인물이 되고 이쪽 반대편 지명을 통합하면 인물이 되고.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두 인물밖에 없어요. 인간들은 이 지명과 이 시간을 그만큼 오해하고 있었던 거예요. 땅은 우리가 하기 나름이지 땅 자체가 어떤 인격을 지닌다는 생각은 못했죠. 그런데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난 뒤에 누가 고소합니까? 땅에서 하늘로 고소하죠. 세상에 땅이 하나님과 같은 편일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죠. 그냥 바보같이 개간하면 개간당하는 줄 알고 그냥 멍청하게 때리면 때리는 대로 파이고 쌓으면 쌓이는 대로 쌓이고 그런 줄 알았죠. 인간은 피할 곳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땅을 건드린다는 것은 주의 몸체를 건드린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되어버리는 거죠. 주의 몸체를 건드린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동화 있잖아요. 푹신푹신해서 이 침대 괜찮네, 하고 누워 있다가 아침 되어 보니까 코끼리 등짝이었다. 이 세상에는 땅도 없고 하늘도 없고 시간도 없고. 다만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은 그동안 주님을 향하여 소집당하는 시간과 공간인데 오해를 한 거예요. 인간들이 오해를 한 거예요.
이제 70년이 70이레 된 이유를 아시겠죠? 70×7,이거 아니에요. 70×7이라 하는 것은 (뒤의 7의 의미가) 주님의 시간, 주님의 일이 기존의 인간 시간에 내용물로 거기에 삽입되어버리면 여기서 나오는 것이 사건, 주의 이름이 일으킨 사건으로 특이성을 가지고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지금 이 이야기를 p.219부터 하고 있지만 p.220까지 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의 시간의 문제점은 이런 거죠. 여러분, 신문을 한 부 사는 게 아니고 길거리 신문을 한 50부 사면 거기서 새로운 사건이 터집니까? 그렇지 않죠. 집에 다들 성경책 열댓 권 있죠? 특히 집사님 열댓 권 되잖아요. 성경책 많이 사면 갑자기 거기서 은혜롭게 되는 사건 나옵니까? 그렇지 않죠.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거예요. 요한복음 5장 39절. 예수님을 증거하는 거예요. 이 말은 성경을 누가 다룰 수 있다? 주님만이 다룰 수 있습니다. 성전은 누가 다룬다? 주님만이 다룰 수 있는 거예요. 인간이 성전을 유지, 보수, 관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전이 무너졌다는 말은 사실 건물 하나 무너진 게 문제가 아니고 바로 너 자신이 마땅히 죄로 인하여 무너져야 된다는 거예요. 무너지면 구원받습니까? 물어봅시다. 무너지면 구원받아요? 아니죠. 아까 구원절차 1번, 2번, 3번 있죠. 우리가 무너지고 나 죄인입니다, 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놀라운 사건은 주님이 먼저 자기에게로 죄가 스며들게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요단강 세례 받는 장면이에요. 이것도 하나의 사건이잖아요, 사건. 시간+공간에서 언약적 사건이 나오도록 하면서 언약 사건이 인간 시간 공간 속에 삽입되어서 이 시간 공간이 주님을 위한 시간 공간으로 다시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게 하시는 겁니다.
세례 요한이 말렸어요. “아이고, 선생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제가 세례를 받아야 되는데 제가 어떻게 세례를 줍니까?” “고만 됐네. 빨리 내가 시키는 대로 세례 하라 하면 빨리 해.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거야.” 하나님의 의가 뭐겠어요? 아버지하고 예수님하고 의논된 대로 일이 착착착 진행된다는 뜻이잖아요. 그게 왜 일이 진행되느냐. 세례 받을 때 다른 사람 보기에는 그냥 물속에 들어간 걸로 합류한 걸로 되어 있죠. 그러나 여기 비둘기가 예수님 머리위에 있죠. 성령이 비둘기 형식으로 모습으로 왔다는 말은 비둘기는 소식을 전달하는 거니까 예수님 자신이 사명자로서 이제 일을 개시했다 그런 뜻입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하면 인간 존재가 죽는다, 이것은 아니라 했죠. 다른 존재도 마찬가지지만 그럼 인간 존재는 뭐냐. 죽음에 붙어있는 땟물. 얼룩 같은 게 인간입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죽게 되어 있고 죽음에 인간이 붙어있는 거예요, 죽음에. 죽음을 죽음 되게 확연하게 죽어 마땅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이 말이 마음에 많이 안정이 되죠.
인간의 모든 죄는 살고자 하는 데에 있어요. 제발 내 인생 내 식대로 살도록 좀 내버려두세요. 지적질, 간섭질 하지 마시고. 제발 나다움을 견지하도록 좀 지켜보시고 도와주시면 안돼요? 하는 그것. 안 됩니까 하는 그거에요. 나다움. 자기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도저히 내 존재가 그냥 두고 보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결단을 내려야 돼요. 내가 죽든지 하나님이 죽든지 해야 되죠. 그래서 누가 죽었어요? 하나님이 죽으셨잖아요. 그게 바로 복음 아닙니까. 복음. 네가 나를 죽였잖아, 그게 복음이에요. 죽인 이유는 뭐냐? 인간은 존재하기 위해서 소유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마저 인간은 소유하려는 거예요. 내 손안의 하나님이 되어야 돼요. 그게 우상인데 이 손안의 하나님이 말을 안 들으면 어떻게 되어야 돼요? 나의 나다움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둘 중에 하나는 죽여 없애야 되겠죠 주님께서 그 인간에게 찾아올 때 반응이 뭐냐? 극렬하게 반발을 해야 그 죄가 주님한테 스며들 수가 있어요. 이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나씨 집안, 나아만 장군입니다. 멀쩡한 인간이 졸지에 코로나 걸렸어요. 참 코로나가 아니지. 멀쩡한 인간이 졸지에 문둥병 걸렸습니다. Why me? 왜 제가 코로나 걸립니까? 우리나라 33%래요, 걸린 사람이. 뭐 외국에는 거의 60~80%이니까 아직 걸릴 사람들이 66%남아 있어요. 지금 순서표 받고 있습니다만. 왜 하필 저에게 이런 게 걸리게 하십니까? 주님께서는 진짜 꿀떡같죠. 니가 뭔데? 아직도 너를 몰라? 너는 아직도 너 자신을 몰라? 모른단 말이냐? 이런 뜻이겠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걸 받아내요. 문둥병 그걸 받아냅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 문둥병 걸린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잖아요. 우리 눈에는 문둥병 걸린 자가 예수님께서 기도하니까 나았다, 그걸로 보이죠. 그러나 예수님이 문둥병 걸렸다는 생각은 차마 못하잖아요. 주님이 걸리지 아니하면 그 문둥병은 낫지를 않아요.
이게 구약에 문둥병 걸리고 난 뒤 제사법에 나옵니다. 흐르는 물 위에서 문둥병 걸렸다고 씻는다 하는데 애꿎은 새 두 마리가 날라가버렸어요. 죽어버려요. 그 새는 죄가 없는 새에요. 죄가 없어서 병이 나은 게 아니에요. 더 중요한 것은 죄가 있어서 문둥병 걸린 게 아닙니다.
인간의 존재 자체가 그게 죄다. 오늘 제목 멋지다. 존재가 죄. 인간 자체가 죄인 것을 인간은 그동안 몰랐죠. 그런데 인간의 모든 경험이라 하는 것은 실제로 살아보면서 시간과 공간 속에서 경험케 해요. 경험한다고요.
나아만 장군이 난데없이 문둥병 걸렸습니다. 그러면 문둥병 걸린 나아만 장군과 멀쩡한 나아만 장군, 이 둘 중에 나아만 장군의 자아는 과거에 멀쩡했던 것, 지금은 문둥병 옴팍 뒤집어씌워진 것 둘 중에 어느 것이 내 몸인가를 본인이 소급해서 과거로 소급해서 인정을 해줘야 돼요. 왜냐하면 문둥병 걸렸다가 나은 게 아니고 멀쩡했다가 걸렸기 때문에 문둥병 걸린 당사자는 과거의 자기와 동일 인물인 것을 본인이 받아들여야 돼요, 동일 인물인 것을.
그러면 그동안 문둥병에 진작 걸려야 했던 것이 이제야 발현된 거죠. 잠복되어 있는 그것이 발현된 거예요. 그러면 문둥병 걸리지 않은 나아만 장군의 부하들, 그 사람이 국방부 장관이니까 그 밑에 부관들, 그 사람들은 멀쩡해요, 멀쩡 안 해요? 왜 문둥병이 잠복되어 있는 거예요?
망대가 있는데 넘어졌어요. 하필이면 그 시기에 18명이 죽었습니다. 제자들에게 탁 튀어나온 말이, 말은 안 했지만 그 느낌이, 제자들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느낌은 참 안 됐다. 참 불쌍하다. 이게 뭔 뜻이에요? 휴우, 나는 다행스럽다, 하잖아요. 이 얼마나 본인을 너무 모르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또 가르쳐주십니다, 친절하신 예수님께서. 망대에 죽었던 사람이 너보다 죄가 더 많다고 생각하지 말라. 똑같다.
망대 넘어져서 18명 죽었잖아요. 그런데 마지막 18번째에 죽어가고 있으면서 숨은 깔딱깔딱 넘어가고 있는 사람이 그 이야기를 들었다 칩시다. 퍽이나 위로가 될까요, 안 될까요? 아, 나만 죄 있는 게 아니구나, 하고 아이고 기꺼이 죽겠습니다. 이러겠어요, 안 그러겠어요?
그게 뭐가 위로가 돼요? 인간은 자기가 사는 게 소망인데요. 내 사는 걸 건드리면 누구나 적이 되는데요, 인간은. 내 존재 있고 난 뒤에 하나님 있다는 거예요, 인간들 입장에서는. 하나님은 나를 살려야 된다는 거예요. 그럴 때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내가 그렇게 좋은 호감을 보여주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둥병자 나아만은 뭐에요? 멀쩡했어요. 멀쩡했는데 문둥병이 걸렸다면 자, 멀쩡한 것 1번, 문둥병 2번이라면 묻습니다. 2번에서 1번으로 돌아갈 방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자기가 본질인데. 자기가 본질이란 말이죠.
어떤 사람이 가난한 이웃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약간 무게 나가는 한 5kg 가까이 되는 요만한 크기에다가 예쁜 포장지를 딱 했어요. 하얗게 포장지를 했다고요. 가난한 이웃에게 겨울철 잘 보내라고. 그 사람은 뭐 조그만 간이 스토브나 보낸 줄 알았더니만 연탄 한 장 탁 튀어나왔다 봅시다. 그러면 그 연탄이 하얗게 될 수 있는 가능성 있어요, 없어요? 없죠. 연탄은 시커매야 연탄이지, 허여면 그게 무슨 연탄입니까? 그건 포장지죠. 포장지를 까면 본질 나와요. 그건 연탄이었어요.
그래서 문둥병 나아만은 낫겠다는 생각을 해서는 돼요, 안 돼요? ‘반갑다, 친구야. 나의 본색은 이제 발각되었구나. 내가 내 힘으로 발각시킬 수 없는 나의 본질을 이렇게 문둥병 걸려도 마땅하다는 사실을 그게 진짜 내 진면목인 것을 알려줘서 감사합니다.’ 이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뭐 죄인이 괜히 죄인이겠습니까.
강력하게 반발합니다. 안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부하들이 간청해서, 가보세요. 나을 수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나 문둥병 걸려서 그냥 죽을래.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 짓는 게 기뻐, 이래야 되는데 그건 신약 성도에게나 일어날 일이고. 아니 신약 성도라도 나 코로나 잘 걸렸다. 주여, 죽여주옵소서. 걸린 사람들은 그런 생각이 들던가요? 안 그러면 Why me? 제가 복음을 위해서 생각 안한 적이 있던가요, 주님? 갑자기 엉뚱한 소리하고 있는 거예요. 네가 아픈 게 복음이야, 이런 뜻인데 제가 왜 하필이면...... 하고 나를 따로 등장시키죠.
나아만 장군이 치료받으러 갔다는 자체가 아직 주제파악을 못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가니까 요단강을 건너려고 하는데 엘리사, 의사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그냥 게하시를 통해서 전달만 합니다. “앞에 뭐 보이시죠?” “뭐?” “개울가 보이시죠? 요단강 보이죠?” “그래서?” “일곱 번 들어갔다가 나오시랍니다.” 여기서 나아만 장군이 화를 낸 거예요.
자, 나아만 장군의 선악 체계를 한번 보세요. 인간은 성전을 감독 못하는 이유를 지금 설명하는 거예요. 인간은 성전을 유지할 수 있는 자질이 없어요. 선악체계에 있어서 선은 깨끗함이에요. 악은 반드시 뭐가 되겠어요? 그 반대, 더러움이겠죠. 그러니까 나아만 장군은 그냥 속이 텅텅 빈 사람이 아니고 뭐로 꽉 차있어요? 선악체계로 꽉 차있습니다. 평소에 자기 자신은 선악체계에 입각해서 그동안 평생을 살아왔고 자기 관리에 나선 사람입니다.
마치 이것은 신약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그 부자청년하고 똑같은 거예요. 부자청년이 자기 돈 자랑하면서 영생 얻으려 했습니까? 아니죠. 돈은 다 숨기고 자기는 어릴 때부터 십계명에 충실했습니다, 그것가지고 들이미는 거예요. 왜냐하면 십계명 충실한 것이 선악체계에서 선이 될까요, 악이 될까요? 선악체제에서 인간들은 십계명 지키는 것을 뭐로 봅니까? 선이라 보죠. 이때 학교 같으면 분필 날아갑니다. 옛날 학교 같으면. 이 쪼다야! 율법을 지키는 것이 어떻게 선이냐? 이게 악이지! 그게 마태복음 19장에 부자청년한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본심은 뭐냐? 나쁜 짓 안하는 것이 선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선과 악은 악 속에서 선과 악을 나누는 그 작업 자체, 선악과 따먹어서 그 심판 기준을 본인이 갖고 있기 때문에 본인 안에서 선과 악을 따로 규정하는 이것이 주님 보시기에 이 전체가 악이 되는 겁니다. 인간은 본인을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이 없는데도 선악체계 지식을 가동시키니까 이게 악이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나아만 장군을 아시고 깨끗한 것, 더러운 것 중에 더러운 그 요단강에 들어가라 한 거예요. 뭐 예상대로죠. 이 더러운 물, 이것보다 우리나라의 강이 훨씬 더 깨끗하다. 야, 가자 가자 가자. 믿었던 내가 바보지. 믿었던 내가 바보다.
자, 평소에 나아만 장군은 신앙인입니까, 신앙인 아닙니까? 신앙인이죠. 모든 인간은 선악 종교를 믿는 신앙인들이에요. 따라서 예수 믿는다는 것은 개종한 거예요. 자기 종교를 바꾸는 것이지, 나 종교 없는데 하나 생겼다, 가 아닙니다. 그러면 진짜 복음을 알면 지금껏 자기가 믿었던 것이 우상이고 거짓된 종교인 것을 인정해야 되죠. 인정해야 됩니다.
그러면 성도의 삶의 불편함은 세상과 달리 살게 된다는 점입니다. 성도의 삶이 불편한 것은 세상과 다른 방향으로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악이라 하는 것은 선으로 선이라 하는 것은 악으로 규정해야 돼요. 그 규정하는 안목을 지닌다는 점이 얼마나 주위 일가친척 가족들과 등 돌리는 일인지 몰라요. 등 돌리는 식구를 내 쪽으로 보라 하지 말고 그냥 하시던 대로 가세요, 밀 수 밖에 없어요. 그들에게 문둥병 걸리기 전에 코로나 걸리기 전에. 그들이 죽는 게 아니고 본인이 그냥 죽음의 일부로 짧은 인생을 보낸다는 사실을 주께서 알릴 때까지 그냥 가시던 길 가세요. 여기서 나오는 유명한 사자성어, 보람상조. 고인 가시는 길 고이 모셔드리겠습니다. 보람상조. 우리는 상조회사 직원 같아요. 그냥 고이 보내드려야 되죠.
더 나아만 장군이 삐쳐가지고 그냥 갈 때 또 붙들고 간청해가지고 들어가 보자 했습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한번만 들어가 보라 했으면 한번 들어가 보고 삐쳤을 건데 일곱 번이라 하는 것은 들어가는 순간부터 내 신앙을 포기해야 된다는 것을 일곱 번의 반복 속에서 인정해야 돼요. 이제 나는 없다. 내가 결정할 것도 없고 내가 선택할 것도 없다. 내가 판단할 것도 없다. 일곱 번 들어갔다 나오니까 몸이 깨끗해졌죠.
그러면 깨끗한 몸은 본인이 일곱 번 들어갔다는 공로냐? 만약에 일곱 번 들어가서 낫게 했다면 이것은 본인의 의중에 다시 깨끗하게 되겠다는 뜻이 은근히 가장 깊숙한 곳에 남아있다는 뜻이 되거든요. 그런데 막상 병 낫고 보니까 이것은 엘리사의 하나님 앞에 내가 좋은 의미로 놀아났다는 기쁨이 희열이 확 밀려오는 거예요. 왜 진작 나는 주님 앞에 놀아나지 않았는가. 왜 진작에. 진작부터 놀아났으면 내가 일찍부터 하나님의 증인 돼서 살았을 걸. 내가 나의 소유대상이 아니고 내가 유지할 대상이 아닌 것을 왜 이제 알았는가.
그때부터 이 사람은 남들 보기에 미칩니다, 여호와한테. 갖다 바치고... 어느 정도로 미쳤느냐. 땅까지 파죠. 흙 파가지고 내가 비록 아람, 지금의 시리아죠, 그 나라에 갈지라도 나의 공간은 엘리사가 있는 그 공간에 같이 합류되어 있다는 그것으로 자기 신앙고백을 같이 하면서 나아만 장군은 흙 파가지고 갔습니다. 돈 내지도 않았어요. 흙 파가지고 그냥 갔습니다.
그렇다면 나아만 장군의 시간은 어떻게 되죠? 나아만 장군의 시간은 진짜 내 모습을 내가 응시하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그 시간은 날라가버리고 내가 태어날 때부터 군대장관 된 지금까지의 모든 시간이 나는 오해해서 나를 위한 시간인 줄 알았더니만 나를 위한 시간이 아니고 나와 만나는 주님을 드러내는 그 사건을 드러내기 위해서 차근차근 준비된 시간인 것을 나아만 장군은 알게 됩니다.
이제 나아만 장군 눈에 뵈는 게 없죠. 소개하니까. 주님만이 구원자요 주님만이 창조자인 것을 이제는 소개하는 업무가 과다해요. 이거는 아이들 상담 그 정도가 아닙니다, 지금. 24시간 전체가 주님 소개하는 업무로 인하여 그 명분과 자부심이 발생된 거예요, 자기 존재에.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의 이름에서 주의 이름으로 바뀌는 거예요. 이게 신약에 보면 고린도전서 3장과 고린도후서에도 나오지만 성전이라고 하는 거예요, 성전. 성전은 더 이상 죄가 없어요. 그리고 죽음도 없고 저주도 없고 심판도 없어요. 단 조건은 이 성전은 함께 하고 있다는 거예요. 함께.
제가 아까 예를 들어 개집이라고 했잖아요. 개집이라 하지 말고 개집이라 해도 되지만 성경대로 한번 봅시다. 시편 84편 3절요. 누가 크게 한번 읽어보세요.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이 시편에서 예언하시기를 너희는 제발 참새가 되도 괜찮고 제비가 되도 괜찮은데 중요한 것은 네가 지금 기껏 새냐고 하지 말고 네가 있는 공간이 어떤 공간이다? 그냥 상투적인 성전이라 하지 말고 소위 경상도 말로 꼽사리 끼었다, 주의 나라에 꼽사리, 겸연쩍게 미안스럽게 끼어든 거예요.
애들 커가지고 자기 방에서 자는데 나중에 엄마 아빠 이불 밑으로 기어들어오잖아요. 엄마, 번개 치는 게 무서워, 하면 엄마가 일어나서 마리아처럼 노래 불러주고 따다다다단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것처럼 인간의 공포와 인간의 불안, 그것은 홀로 살기 때문에 그래요. 주와 더불어 있다면 이제는 우리의 할 일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누구만 증거하면 돼요? 주님이 심판주요, 심판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했다는 그것을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전이 건물이 아니라 마땅히 건물은 무너지듯이 저희들도 같이 무너지는 게 마땅하고 우리 몸은 무너져도 주 안에 주의 몸으로 다시 창조 받았음을 감사합니다. 나아만 장군처럼 얼마나 극렬하게 반반하고 대드는지 똑똑하게 그 모습을 우리가 자각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이미 용서해주신 주님의 시간과 공간과 주 안의 세계를 찬송하면서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스스로 자기 증인되기 위해 사용하는 시간과 공간. 자기 증인. 자기를 위한 시간이죠. 자기를 위한 공간이죠
지금까지는 시간을 이야기했고요. 이제는 공간입니다. 공간은 더 어려워요. 공간은 어렵기 때문에 수요일에 했던 것을 잠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수요 설교의 주제는 이거였어요.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이고 예루살렘이고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베들레헴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적 의미는 지상에 처음부터 없었어요. 예수님이 태어나는 장소가 베들레헴 되도록 미가 5장 2절에서 예언되어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우선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성도되고 내가 천국 간다는 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런 구원은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복음이 올 때 택한 백성이라는 새로운 의미가 주님의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내 시간과 같이 만남으로써 비로소 말씀은 생겨나는 거예요. 베들레헴이라는 세상적인 지명은 무엇과 결합되느냐 하면 인격, 베들레헴에서 일어날 사건의 의미를 완성시킬 인격, 그 분과 결합될 때 베들레헴은 완성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 성경에서 전부다 언약개념인데 전부다 자기를 위해서 성경을 도입하니까 뭐 좋다고 하면 막 끌어다 쓰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전 이런 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패치 또는 파스. 거미줄 나부랭이. 여호와의 증인처럼 성경 말씀 아는데 걷어내면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어요. 파스도 그렇지만 얼굴 팩. 붙이고 난 뒤에 떨어지면 그만이에요. 성경말씀이 이상하게 안 붙어, 이게.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주지 않아요. 그냥 내가 알던 시공간이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 있어요. 뭐 설교야 듣죠. 생중계로 듣고 하는데 떼버려요, 그냥. 예배 듣다가 돌아다니면서 떨어지는 경우도 있고 얼굴 팩하는 것도 아니고...... 파스야 떼면 그래도 다리털이라도 뜯어져 나오죠. 이건 뭐 생생하게......그냥 거미줄 귀찮아서 걷어내듯이 인간 본인이 얼마나 위험하다는 사실을 십자가 앞에서 아시기 바랍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서 인간은 탈피하지 못합니다. 못 벗어납니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인간이 죽는 순간 시간은 멈추고 지명이 되어버리죠. 인간이 죽는 순간 시간은 멈추고 지명이 된다. 이 지명이 바로 지옥이죠. 모든 세상 인간은 원래 죽기 위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또는 저주받기 위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또는 심판의 대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인간에게 주님의 시간이 덮쳐서 지옥이 이렇게 만들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시간은 나중에 공간으로 바뀌죠. 요한계시록 21장에 새 하늘과 새 땅. 또는 그 이전에 예수님의 성령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은 뭐냐. 예수 안이라는 공간 개념이에요. 공간 개념. 그러니 성령 안에 있으면, 성령이 처소니까요, 내가 처소를 마련하면 나 있는 곳에 너희를 있게 하리라. 이 말은 뭐냐 하면 너 있는 곳은 나 있는 곳의 바깥이라는 뜻이죠. 예수님이 완성한 곳 그 바깥에서 무슨 몸부림을 쳐도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시간과 공간을 적용시키면 이 세상은 전부가 애굽이 되는 거예요. 세상 전부가 애굽이 돼요. 계시록 11장에 나오는 이야기죠. 전체가 애굽이 되어야 구약 때의 출애굽 사건의 신약적 최종 완성을 보는 구약이 바탕을 제공했다는 것이 성립되는 겁니다. 출-애굽이니까. 출-애굽 이것이 바로 구원이잖아요. 애굽이라는 지명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그러나 인간은 이미 공간적으로 이 땅을 애굽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고 뭐로 이해합니까? 내가 살 땅으로 이해하는 거예요. 근본 된 토지로 이해하고 있어요, 창세기 3장에서. 근본 된 토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만들어서 그 근본 된 토지의 성격을 규명해버리죠. 그게 하나님 언약의 입장에서 출애굽 되기 위한 전부가 애굽이 되게 하는 거예요. 그 애굽에 살던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나옵니다.
이제부터 좀 어려워요. 애굽에 살던 히브리인들을 데리고 나올 때 히브리인들은 전부다 오해했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줄 알았어요. 진짜 인간들이 생각하는 구원이 되려면 하나님이 외부에서 구원될 자기 백성을 끄집어내는 방식이 되어야 인간들이 이해하고 있는 구원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는 게 아니고 누구를 구원하느냐 하면 주의 이름을 구원해버려요. 외부에서 끄집어 당기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같이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받아버려요. 고난받아버린다고요. 그러면 주의 이름만이 구원되면서 무엇이 떨어져나가느냐 하면 소위 애굽에서 구원되었다는 사람은 광야 40년 동안 다 떨어져나가죠. 탈탈 털어버리면 다 떨어져나가죠. 그렇게 되면 주의 이름 안에 무슨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나타나느냐 하면, 이게 이제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이야기에요. 주의 이름이 하신 안에 용서기능이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용서기능. 용서기능이 발견되려면 용서기능이 나타나려면 용서받아야 될 자가 있어야 되겠죠. 그 기능을 누가 하느냐? 바로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신나게 구원받았다고 우기는 그들이 ‘구원받았음’ 이것이 바로 죄가 되게 하는 거예요. 궁극적인 구원은 궁극적인 죄가 발생될 때 비로소 의미가 동반해서 같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궁극적인 죄가 뭐냐. 자기가 구원받을 자격도 안되는 게 구원받고자 하는 그 의지가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그 의지는 누가 심어준 거예요? 악마가 심어준 거예요. 악마가 심어준 그 자체를 애굽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그들과 함께 동행하시는 겁니다.
좀 천한 예가 될 수도 있는데요. 큰 솥에다 국물 해놓고 오뎅을 꼬치에 꽂아놓고 빼먹는 그런 길거리 음식이 있다고 합시다. 이게 아주 온도 높은 뜨거운 솥이라 할 때 여기 꼬치에 어묵이라든지 떡가래 있고 소고기 비싸서 안 되고 닭고기가 이렇게 있다고 할 때 주님께서 “뜨겁지? 내가 구원해줄게.” 하고 꼬치를 그냥 끄집어내면 구원되는데 그렇지 않고 본인이 여기 같이 꽂혀버린 거예요. 본인이 꽂혀버린 거예요. 아버지께서 아들을 용서하시는 형식을 취하면서 아들에게 같이 꼬치에 꽂혔다는 이유 때문에 죄 없는 아들이 죄라는 같은 전기에 감전되도록 죄가 스며들도록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의 일이 되려면 ⓐ첫 번째, 주의 이름에 죄가 스며들어야 한다. ⓑ두 번째 그 주님을 아버지께서 구원하신다. 아직까지 베드로는 못 가죠. ⓒ세 번째, 주님께서 자기가 함께 있었던, 자기가 선택한 자기 사람을, 아버지도 선택할 수 있지만 아들도 자기 사람을 선택할 수가 있어요, 선택한 사람은 그들의 죄에 같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을 건져낼 근거를 확보한 거죠. 이렇게 해서 구원이 진행되는 겁니다.
불러주는 것도 주님 몫이죠.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주님께서 죄가 스며든다는 이 작업을 놓쳐버리면 구원 자체를 완전히 모르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다윗이 먼저 성전 짓겠다 했죠. 그게 죄가 되죠. 그리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내가 어디 사람 손으로 지은 집에 있지 않다. 그 입 다물라.” 그럼 일을 끝내야 되잖아요. 그런데 다윗 너는 자재를 준비하고 아들 솔로몬이 하라고 왜 그런 걸 시키는 겁니까? 이게 1번 작업이에요. 인간들의 그 철딱서니 없음에 주께서 합류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다윗의 생각이 엉터리니까 죄니까, 죄라 하는 것은 아까 시간과 공간을 자기를 위한 시공간이라 생각하는 게 죄라 했죠, 그러니까 그 성전이 어떻게 돼요? 허물어져야 되죠. 인간 손으로 지은 것은 다 허물어져야 되죠. 성전이 파괴된다 이 말이에요. 성전파괴가 바로 소선지서의 주된 내용입니다. 이건 소선지서뿐 아니라 에스겔도 마찬가지고 다니엘, 이사야 전부다 성전파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들의 시간과 공간 입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시간 공간 속에 삽입되어 들어와서 하나님의 일이 인간 역사 속에 같이 끼어있다고 했는데 그럼 성전이 파괴되면 결국 인간의 시간과 공간은 의미 없이 되고 이것은 죄악된 것이 되어가지고 성전이 없으면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구심점이 날라가버려서 죄가 그대로 있겠죠. 이것은 인간 세계의 파멸로 이어지는 겁니다. 파멸.
미국의 뉴 멕시코주에서 첫 원자폭탄 실험을 할 때 촬영한 동영상을 보게 되면 저 사막에서 원자폭탄을 뚝 떨어뜨리고 저 먼 바깥에서 그걸 관찰해요. 관찰할 때 이 열기 때문에 공기가 진동해서 여기까지 열기가 전달되는 게 카메라에 잡혔다고요. 성전이 파괴되면 그 파괴된 파열된 에너지와 그 성전 파괴될 때 하나님의 진노의 위력이 하나의 진동을 일으켜서 전체 인류의 파괴로 이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성전 때문에 인류는 멸망합니다. 인류는 멸망해요. 그러니까 성전은 인류를 파괴시키기 위한 빌미 제공차원에서 허락하신 거예요. 성전 깨어지면 이 성전은 원자폭탄 같아서 다 망해버리죠.사도행전 17장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17장 30절에 보면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알지 못하던 시대 그다음에 “이제는” 그러죠. 이제는. 그러니까 알지 못하던 시대와 이제를 어떻게 합니까? 가름하죠. 구분하죠. 그럼 알지 못하던 시대와 이제를 가름하는 그 경계막, 그게 뭐냐? 성전의 파괴에요. 예수님의 몸이 성전이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말은 성전이 깨진 거예요.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전에는 이스라엘만 작살냈다가 이방인에게는 허물치 아니한 거예요. 그러니까 댐하고 거리가 먼 곳은 그냥 방치한 거예요. 그러나 이스라엘 자체에 원자폭탄이 안에서 터져가지고 그 에너지가 흘러넘쳐버린 거예요. 성전이 깨어지면서 그 성전을 깨시는 하나님의 저주가 온 지구상에 모조리 다 흘러넘치게 되었습니다. 그 취지가 사도 바울의 설교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성전이 있고 성전과 가장 근접한 데 사는 자들이 누구죠? 바로 이스라엘이죠. 예루살렘 이스라엘 사람들이죠. 그럼 더 멀리 있는 사람들은 이방나라죠, 이방나라. 이걸 요한계시록은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물론 선지서에 보면 이스라엘과 관계되어 있는 형제 나라, 에서 또는 세일산 민족. 에서니까 이게 에돔이죠. 그리고 이스라엘과 근접해 있는 나라가 모압과 암몬. 원래 지중해에 사해 있고 갈릴리 있으면 사해 근처에 에돔, 모압과 암몬이 있죠. 암몬이 지금 요르단 나라에요. 이 나라들은 하나님께서 신명기에 보면 자기 기업으로 허락을 안 했어요.
혈육으로 잘 아는 사이니까. 에돔은 에서, 야곱의 형의 나라이고 모압, 암몬 이 나라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자기 딸하고 관계해서 나온 나라가 이 두 나라에요. 그래서 이 나라 건드리지 말고 가라고 한 거죠. 그런데 건드렸다가는 작살나죠. 봐주는 겁니다. 어째든 봐준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지금 이스라엘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뜻을 더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중심부를 차지하는 거예요. 중심부=자부심이에요. 중심부가 자부심이에요. 인간이 살아갈 때 자부심 없이는 늘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감정적으로도 그렇고. 자기와 라이벌 관계가 딱 튀게 되면 막 흔들리고 괴로워하고. 실제로 그런 일이 있어요. 초등학교 4학년인데 숙제를 내줬어요. 강낭콩 키워서 알 가져오너라. 초등학교 4학년 자기가 옥상에다 강낭콩 키워보니까 4개나 싹이 난 거예요. 사진 찍고 좋아가지고 선생님한테 자랑하려고 하는데 다른 애가 8개 키웠어요. 그다음부터 울고불고. 다른 아이들은 하나도 안 될 줄 알았죠.
이것은 공포일까요, 불안일까요? 불안입니다. 이게 불안이에요. 성전은 인간이 예상치 못한 거예요. 따라서 성전 자체는 불안을 야기시키고 결국 인간 내부에서 지은 성전이 무너지고 외부에서 새로운 성전이 등장하게 되면 이건 공포가 되는 거죠.
더 함축해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이 세상은 어떠해도 공간도 없고 어떠해도 시간도 없고 오직 인격과 인격뿐입니다. 인물과 인물들밖에 없어요. 지명을 통합하면 인물이 되고 이쪽 반대편 지명을 통합하면 인물이 되고.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두 인물밖에 없어요. 인간들은 이 지명과 이 시간을 그만큼 오해하고 있었던 거예요. 땅은 우리가 하기 나름이지 땅 자체가 어떤 인격을 지닌다는 생각은 못했죠. 그런데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난 뒤에 누가 고소합니까? 땅에서 하늘로 고소하죠. 세상에 땅이 하나님과 같은 편일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죠. 그냥 바보같이 개간하면 개간당하는 줄 알고 그냥 멍청하게 때리면 때리는 대로 파이고 쌓으면 쌓이는 대로 쌓이고 그런 줄 알았죠. 인간은 피할 곳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땅을 건드린다는 것은 주의 몸체를 건드린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되어버리는 거죠. 주의 몸체를 건드린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동화 있잖아요. 푹신푹신해서 이 침대 괜찮네, 하고 누워 있다가 아침 되어 보니까 코끼리 등짝이었다. 이 세상에는 땅도 없고 하늘도 없고 시간도 없고. 다만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은 그동안 주님을 향하여 소집당하는 시간과 공간인데 오해를 한 거예요. 인간들이 오해를 한 거예요.
이제 70년이 70이레 된 이유를 아시겠죠? 70×7,이거 아니에요. 70×7이라 하는 것은 (뒤의 7의 의미가) 주님의 시간, 주님의 일이 기존의 인간 시간에 내용물로 거기에 삽입되어버리면 여기서 나오는 것이 사건, 주의 이름이 일으킨 사건으로 특이성을 가지고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지금 이 이야기를 p.219부터 하고 있지만 p.220까지 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의 시간의 문제점은 이런 거죠. 여러분, 신문을 한 부 사는 게 아니고 길거리 신문을 한 50부 사면 거기서 새로운 사건이 터집니까? 그렇지 않죠. 집에 다들 성경책 열댓 권 있죠? 특히 집사님 열댓 권 되잖아요. 성경책 많이 사면 갑자기 거기서 은혜롭게 되는 사건 나옵니까? 그렇지 않죠.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거예요. 요한복음 5장 39절. 예수님을 증거하는 거예요. 이 말은 성경을 누가 다룰 수 있다? 주님만이 다룰 수 있습니다. 성전은 누가 다룬다? 주님만이 다룰 수 있는 거예요. 인간이 성전을 유지, 보수, 관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전이 무너졌다는 말은 사실 건물 하나 무너진 게 문제가 아니고 바로 너 자신이 마땅히 죄로 인하여 무너져야 된다는 거예요. 무너지면 구원받습니까? 물어봅시다. 무너지면 구원받아요? 아니죠. 아까 구원절차 1번, 2번, 3번 있죠. 우리가 무너지고 나 죄인입니다, 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놀라운 사건은 주님이 먼저 자기에게로 죄가 스며들게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요단강 세례 받는 장면이에요. 이것도 하나의 사건이잖아요, 사건. 시간+공간에서 언약적 사건이 나오도록 하면서 언약 사건이 인간 시간 공간 속에 삽입되어서 이 시간 공간이 주님을 위한 시간 공간으로 다시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게 하시는 겁니다.
세례 요한이 말렸어요. “아이고, 선생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제가 세례를 받아야 되는데 제가 어떻게 세례를 줍니까?” “고만 됐네. 빨리 내가 시키는 대로 세례 하라 하면 빨리 해.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거야.” 하나님의 의가 뭐겠어요? 아버지하고 예수님하고 의논된 대로 일이 착착착 진행된다는 뜻이잖아요. 그게 왜 일이 진행되느냐. 세례 받을 때 다른 사람 보기에는 그냥 물속에 들어간 걸로 합류한 걸로 되어 있죠. 그러나 여기 비둘기가 예수님 머리위에 있죠. 성령이 비둘기 형식으로 모습으로 왔다는 말은 비둘기는 소식을 전달하는 거니까 예수님 자신이 사명자로서 이제 일을 개시했다 그런 뜻입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하면 인간 존재가 죽는다, 이것은 아니라 했죠. 다른 존재도 마찬가지지만 그럼 인간 존재는 뭐냐. 죽음에 붙어있는 땟물. 얼룩 같은 게 인간입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죽게 되어 있고 죽음에 인간이 붙어있는 거예요, 죽음에. 죽음을 죽음 되게 확연하게 죽어 마땅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이 말이 마음에 많이 안정이 되죠.
인간의 모든 죄는 살고자 하는 데에 있어요. 제발 내 인생 내 식대로 살도록 좀 내버려두세요. 지적질, 간섭질 하지 마시고. 제발 나다움을 견지하도록 좀 지켜보시고 도와주시면 안돼요? 하는 그것. 안 됩니까 하는 그거에요. 나다움. 자기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도저히 내 존재가 그냥 두고 보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결단을 내려야 돼요. 내가 죽든지 하나님이 죽든지 해야 되죠. 그래서 누가 죽었어요? 하나님이 죽으셨잖아요. 그게 바로 복음 아닙니까. 복음. 네가 나를 죽였잖아, 그게 복음이에요. 죽인 이유는 뭐냐? 인간은 존재하기 위해서 소유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마저 인간은 소유하려는 거예요. 내 손안의 하나님이 되어야 돼요. 그게 우상인데 이 손안의 하나님이 말을 안 들으면 어떻게 되어야 돼요? 나의 나다움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둘 중에 하나는 죽여 없애야 되겠죠 주님께서 그 인간에게 찾아올 때 반응이 뭐냐? 극렬하게 반발을 해야 그 죄가 주님한테 스며들 수가 있어요. 이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나씨 집안, 나아만 장군입니다. 멀쩡한 인간이 졸지에 코로나 걸렸어요. 참 코로나가 아니지. 멀쩡한 인간이 졸지에 문둥병 걸렸습니다. Why me? 왜 제가 코로나 걸립니까? 우리나라 33%래요, 걸린 사람이. 뭐 외국에는 거의 60~80%이니까 아직 걸릴 사람들이 66%남아 있어요. 지금 순서표 받고 있습니다만. 왜 하필 저에게 이런 게 걸리게 하십니까? 주님께서는 진짜 꿀떡같죠. 니가 뭔데? 아직도 너를 몰라? 너는 아직도 너 자신을 몰라? 모른단 말이냐? 이런 뜻이겠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걸 받아내요. 문둥병 그걸 받아냅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 문둥병 걸린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잖아요. 우리 눈에는 문둥병 걸린 자가 예수님께서 기도하니까 나았다, 그걸로 보이죠. 그러나 예수님이 문둥병 걸렸다는 생각은 차마 못하잖아요. 주님이 걸리지 아니하면 그 문둥병은 낫지를 않아요.
이게 구약에 문둥병 걸리고 난 뒤 제사법에 나옵니다. 흐르는 물 위에서 문둥병 걸렸다고 씻는다 하는데 애꿎은 새 두 마리가 날라가버렸어요. 죽어버려요. 그 새는 죄가 없는 새에요. 죄가 없어서 병이 나은 게 아니에요. 더 중요한 것은 죄가 있어서 문둥병 걸린 게 아닙니다.
인간의 존재 자체가 그게 죄다. 오늘 제목 멋지다. 존재가 죄. 인간 자체가 죄인 것을 인간은 그동안 몰랐죠. 그런데 인간의 모든 경험이라 하는 것은 실제로 살아보면서 시간과 공간 속에서 경험케 해요. 경험한다고요.
나아만 장군이 난데없이 문둥병 걸렸습니다. 그러면 문둥병 걸린 나아만 장군과 멀쩡한 나아만 장군, 이 둘 중에 나아만 장군의 자아는 과거에 멀쩡했던 것, 지금은 문둥병 옴팍 뒤집어씌워진 것 둘 중에 어느 것이 내 몸인가를 본인이 소급해서 과거로 소급해서 인정을 해줘야 돼요. 왜냐하면 문둥병 걸렸다가 나은 게 아니고 멀쩡했다가 걸렸기 때문에 문둥병 걸린 당사자는 과거의 자기와 동일 인물인 것을 본인이 받아들여야 돼요, 동일 인물인 것을.
그러면 그동안 문둥병에 진작 걸려야 했던 것이 이제야 발현된 거죠. 잠복되어 있는 그것이 발현된 거예요. 그러면 문둥병 걸리지 않은 나아만 장군의 부하들, 그 사람이 국방부 장관이니까 그 밑에 부관들, 그 사람들은 멀쩡해요, 멀쩡 안 해요? 왜 문둥병이 잠복되어 있는 거예요?
망대가 있는데 넘어졌어요. 하필이면 그 시기에 18명이 죽었습니다. 제자들에게 탁 튀어나온 말이, 말은 안 했지만 그 느낌이, 제자들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느낌은 참 안 됐다. 참 불쌍하다. 이게 뭔 뜻이에요? 휴우, 나는 다행스럽다, 하잖아요. 이 얼마나 본인을 너무 모르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또 가르쳐주십니다, 친절하신 예수님께서. 망대에 죽었던 사람이 너보다 죄가 더 많다고 생각하지 말라. 똑같다.
망대 넘어져서 18명 죽었잖아요. 그런데 마지막 18번째에 죽어가고 있으면서 숨은 깔딱깔딱 넘어가고 있는 사람이 그 이야기를 들었다 칩시다. 퍽이나 위로가 될까요, 안 될까요? 아, 나만 죄 있는 게 아니구나, 하고 아이고 기꺼이 죽겠습니다. 이러겠어요, 안 그러겠어요?
그게 뭐가 위로가 돼요? 인간은 자기가 사는 게 소망인데요. 내 사는 걸 건드리면 누구나 적이 되는데요, 인간은. 내 존재 있고 난 뒤에 하나님 있다는 거예요, 인간들 입장에서는. 하나님은 나를 살려야 된다는 거예요. 그럴 때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내가 그렇게 좋은 호감을 보여주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둥병자 나아만은 뭐에요? 멀쩡했어요. 멀쩡했는데 문둥병이 걸렸다면 자, 멀쩡한 것 1번, 문둥병 2번이라면 묻습니다. 2번에서 1번으로 돌아갈 방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자기가 본질인데. 자기가 본질이란 말이죠.
어떤 사람이 가난한 이웃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약간 무게 나가는 한 5kg 가까이 되는 요만한 크기에다가 예쁜 포장지를 딱 했어요. 하얗게 포장지를 했다고요. 가난한 이웃에게 겨울철 잘 보내라고. 그 사람은 뭐 조그만 간이 스토브나 보낸 줄 알았더니만 연탄 한 장 탁 튀어나왔다 봅시다. 그러면 그 연탄이 하얗게 될 수 있는 가능성 있어요, 없어요? 없죠. 연탄은 시커매야 연탄이지, 허여면 그게 무슨 연탄입니까? 그건 포장지죠. 포장지를 까면 본질 나와요. 그건 연탄이었어요.
그래서 문둥병 나아만은 낫겠다는 생각을 해서는 돼요, 안 돼요? ‘반갑다, 친구야. 나의 본색은 이제 발각되었구나. 내가 내 힘으로 발각시킬 수 없는 나의 본질을 이렇게 문둥병 걸려도 마땅하다는 사실을 그게 진짜 내 진면목인 것을 알려줘서 감사합니다.’ 이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뭐 죄인이 괜히 죄인이겠습니까.
강력하게 반발합니다. 안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부하들이 간청해서, 가보세요. 나을 수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나 문둥병 걸려서 그냥 죽을래.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 짓는 게 기뻐, 이래야 되는데 그건 신약 성도에게나 일어날 일이고. 아니 신약 성도라도 나 코로나 잘 걸렸다. 주여, 죽여주옵소서. 걸린 사람들은 그런 생각이 들던가요? 안 그러면 Why me? 제가 복음을 위해서 생각 안한 적이 있던가요, 주님? 갑자기 엉뚱한 소리하고 있는 거예요. 네가 아픈 게 복음이야, 이런 뜻인데 제가 왜 하필이면...... 하고 나를 따로 등장시키죠.
나아만 장군이 치료받으러 갔다는 자체가 아직 주제파악을 못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가니까 요단강을 건너려고 하는데 엘리사, 의사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그냥 게하시를 통해서 전달만 합니다. “앞에 뭐 보이시죠?” “뭐?” “개울가 보이시죠? 요단강 보이죠?” “그래서?” “일곱 번 들어갔다가 나오시랍니다.” 여기서 나아만 장군이 화를 낸 거예요.
자, 나아만 장군의 선악 체계를 한번 보세요. 인간은 성전을 감독 못하는 이유를 지금 설명하는 거예요. 인간은 성전을 유지할 수 있는 자질이 없어요. 선악체계에 있어서 선은 깨끗함이에요. 악은 반드시 뭐가 되겠어요? 그 반대, 더러움이겠죠. 그러니까 나아만 장군은 그냥 속이 텅텅 빈 사람이 아니고 뭐로 꽉 차있어요? 선악체계로 꽉 차있습니다. 평소에 자기 자신은 선악체계에 입각해서 그동안 평생을 살아왔고 자기 관리에 나선 사람입니다.
마치 이것은 신약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그 부자청년하고 똑같은 거예요. 부자청년이 자기 돈 자랑하면서 영생 얻으려 했습니까? 아니죠. 돈은 다 숨기고 자기는 어릴 때부터 십계명에 충실했습니다, 그것가지고 들이미는 거예요. 왜냐하면 십계명 충실한 것이 선악체계에서 선이 될까요, 악이 될까요? 선악체제에서 인간들은 십계명 지키는 것을 뭐로 봅니까? 선이라 보죠. 이때 학교 같으면 분필 날아갑니다. 옛날 학교 같으면. 이 쪼다야! 율법을 지키는 것이 어떻게 선이냐? 이게 악이지! 그게 마태복음 19장에 부자청년한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본심은 뭐냐? 나쁜 짓 안하는 것이 선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선과 악은 악 속에서 선과 악을 나누는 그 작업 자체, 선악과 따먹어서 그 심판 기준을 본인이 갖고 있기 때문에 본인 안에서 선과 악을 따로 규정하는 이것이 주님 보시기에 이 전체가 악이 되는 겁니다. 인간은 본인을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이 없는데도 선악체계 지식을 가동시키니까 이게 악이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나아만 장군을 아시고 깨끗한 것, 더러운 것 중에 더러운 그 요단강에 들어가라 한 거예요. 뭐 예상대로죠. 이 더러운 물, 이것보다 우리나라의 강이 훨씬 더 깨끗하다. 야, 가자 가자 가자. 믿었던 내가 바보지. 믿었던 내가 바보다.
자, 평소에 나아만 장군은 신앙인입니까, 신앙인 아닙니까? 신앙인이죠. 모든 인간은 선악 종교를 믿는 신앙인들이에요. 따라서 예수 믿는다는 것은 개종한 거예요. 자기 종교를 바꾸는 것이지, 나 종교 없는데 하나 생겼다, 가 아닙니다. 그러면 진짜 복음을 알면 지금껏 자기가 믿었던 것이 우상이고 거짓된 종교인 것을 인정해야 되죠. 인정해야 됩니다.
그러면 성도의 삶의 불편함은 세상과 달리 살게 된다는 점입니다. 성도의 삶이 불편한 것은 세상과 다른 방향으로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악이라 하는 것은 선으로 선이라 하는 것은 악으로 규정해야 돼요. 그 규정하는 안목을 지닌다는 점이 얼마나 주위 일가친척 가족들과 등 돌리는 일인지 몰라요. 등 돌리는 식구를 내 쪽으로 보라 하지 말고 그냥 하시던 대로 가세요, 밀 수 밖에 없어요. 그들에게 문둥병 걸리기 전에 코로나 걸리기 전에. 그들이 죽는 게 아니고 본인이 그냥 죽음의 일부로 짧은 인생을 보낸다는 사실을 주께서 알릴 때까지 그냥 가시던 길 가세요. 여기서 나오는 유명한 사자성어, 보람상조. 고인 가시는 길 고이 모셔드리겠습니다. 보람상조. 우리는 상조회사 직원 같아요. 그냥 고이 보내드려야 되죠.
더 나아만 장군이 삐쳐가지고 그냥 갈 때 또 붙들고 간청해가지고 들어가 보자 했습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한번만 들어가 보라 했으면 한번 들어가 보고 삐쳤을 건데 일곱 번이라 하는 것은 들어가는 순간부터 내 신앙을 포기해야 된다는 것을 일곱 번의 반복 속에서 인정해야 돼요. 이제 나는 없다. 내가 결정할 것도 없고 내가 선택할 것도 없다. 내가 판단할 것도 없다. 일곱 번 들어갔다 나오니까 몸이 깨끗해졌죠.
그러면 깨끗한 몸은 본인이 일곱 번 들어갔다는 공로냐? 만약에 일곱 번 들어가서 낫게 했다면 이것은 본인의 의중에 다시 깨끗하게 되겠다는 뜻이 은근히 가장 깊숙한 곳에 남아있다는 뜻이 되거든요. 그런데 막상 병 낫고 보니까 이것은 엘리사의 하나님 앞에 내가 좋은 의미로 놀아났다는 기쁨이 희열이 확 밀려오는 거예요. 왜 진작 나는 주님 앞에 놀아나지 않았는가. 왜 진작에. 진작부터 놀아났으면 내가 일찍부터 하나님의 증인 돼서 살았을 걸. 내가 나의 소유대상이 아니고 내가 유지할 대상이 아닌 것을 왜 이제 알았는가.
그때부터 이 사람은 남들 보기에 미칩니다, 여호와한테. 갖다 바치고... 어느 정도로 미쳤느냐. 땅까지 파죠. 흙 파가지고 내가 비록 아람, 지금의 시리아죠, 그 나라에 갈지라도 나의 공간은 엘리사가 있는 그 공간에 같이 합류되어 있다는 그것으로 자기 신앙고백을 같이 하면서 나아만 장군은 흙 파가지고 갔습니다. 돈 내지도 않았어요. 흙 파가지고 그냥 갔습니다.
그렇다면 나아만 장군의 시간은 어떻게 되죠? 나아만 장군의 시간은 진짜 내 모습을 내가 응시하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그 시간은 날라가버리고 내가 태어날 때부터 군대장관 된 지금까지의 모든 시간이 나는 오해해서 나를 위한 시간인 줄 알았더니만 나를 위한 시간이 아니고 나와 만나는 주님을 드러내는 그 사건을 드러내기 위해서 차근차근 준비된 시간인 것을 나아만 장군은 알게 됩니다.
이제 나아만 장군 눈에 뵈는 게 없죠. 소개하니까. 주님만이 구원자요 주님만이 창조자인 것을 이제는 소개하는 업무가 과다해요. 이거는 아이들 상담 그 정도가 아닙니다, 지금. 24시간 전체가 주님 소개하는 업무로 인하여 그 명분과 자부심이 발생된 거예요, 자기 존재에.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의 이름에서 주의 이름으로 바뀌는 거예요. 이게 신약에 보면 고린도전서 3장과 고린도후서에도 나오지만 성전이라고 하는 거예요, 성전. 성전은 더 이상 죄가 없어요. 그리고 죽음도 없고 저주도 없고 심판도 없어요. 단 조건은 이 성전은 함께 하고 있다는 거예요. 함께.
제가 아까 예를 들어 개집이라고 했잖아요. 개집이라 하지 말고 개집이라 해도 되지만 성경대로 한번 봅시다. 시편 84편 3절요. 누가 크게 한번 읽어보세요.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이 시편에서 예언하시기를 너희는 제발 참새가 되도 괜찮고 제비가 되도 괜찮은데 중요한 것은 네가 지금 기껏 새냐고 하지 말고 네가 있는 공간이 어떤 공간이다? 그냥 상투적인 성전이라 하지 말고 소위 경상도 말로 꼽사리 끼었다, 주의 나라에 꼽사리, 겸연쩍게 미안스럽게 끼어든 거예요.
애들 커가지고 자기 방에서 자는데 나중에 엄마 아빠 이불 밑으로 기어들어오잖아요. 엄마, 번개 치는 게 무서워, 하면 엄마가 일어나서 마리아처럼 노래 불러주고 따다다다단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것처럼 인간의 공포와 인간의 불안, 그것은 홀로 살기 때문에 그래요. 주와 더불어 있다면 이제는 우리의 할 일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누구만 증거하면 돼요? 주님이 심판주요, 심판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했다는 그것을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전이 건물이 아니라 마땅히 건물은 무너지듯이 저희들도 같이 무너지는 게 마땅하고 우리 몸은 무너져도 주 안에 주의 몸으로 다시 창조 받았음을 감사합니다. 나아만 장군처럼 얼마나 극렬하게 반반하고 대드는지 똑똑하게 그 모습을 우리가 자각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이미 용서해주신 주님의 시간과 공간과 주 안의 세계를 찬송하면서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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