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니

아빠와 함께 2022. 5. 5. 16:20

요한복음 11장 25, 2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주님의 뜻은 ‘내가 생명과 부활을 준다는 게 아니라 내가 부활이고 내가 생명이다.’ 그 말이지요. ‘너는 내 앞에서 좀 없어져 줘. 시간의 법에 의해서 사라져 줘. 내가 부활이고 내가 생명인 것을 쳐다보는 그걸로, 네가 그동안 살아온 것은, 네 오빠 살아온 것은 오빠 일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 나의 일이고 내 일의 전개였고 확산이었다.’ 그 말이지요. 왜 깔대기 속의 한 지점으로 빨려 들어갈 줄을 몰라요?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가.

빨랫감 세탁기에 넣어 보세요. 나중에 세탁 끝나고 보면 소매 다 배배꼬여서 한 뭉치로 모여 있잖아요. 풍부한 나의 나 됨은 주께서 세탁기에 집어넣어 버리면 이게 꼬여가지고 이 표면적이 하나의 선이 돼요. 새끼 꼬듯이 한쪽으로 빨려들어간다고요. 내가 이렇게 면적이 있으니까 ‘주님, 나한테 뭐해줬습니까? 부활 주세요, 생명 주세요, 천국 보내주세요……’ 확 꽈버려야지. “너는 없어져야 돼.” 너는 없어져야 된다고요. 시간이 그래서 고마운 거예요. 뭉개지게 해주고 사라지게 해주는 겁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확대되는 겁니다. 그게 성도입니다. 애초에 내가 버티고 있으니까 맨날 나의 일이에요. 맨날 나의 일 아닙니다. 모든 것이 주의 일입니다. 그게 바로 성도가 주님을 만났을 때……,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예요. 앗수르가 와가지고 유다나라를 작살내요. 이스라엘을 박살 냅니다. 그렇게 좋아했던 그 나라가 도리어 그 나라한테 배신당하게 만들어버리지요. 그러면 앗수르가 누구냐? 강대국, 물론 강대국도 앗수르입니다만, “네가 앗수르야, 네가! 네가, 세상을 좋아하고 세상에서 출세 성공하기 바라는 네가 앗수르고, 네가 영웅이고, 네가 니므롯이었다는 거예요. 창세기 10장에 니므롯 그 자리가요, 무슨 자리냐 하면, 바벨탑 쌓았던 그 자리에요. 영웅 자리에 탑을 쌓는 법이에요, 영웅 자리에.

누가복음 15장에 탕자 나옵니다. 탕자가 참 행복이 뭐냐 하면, 자기가 아무리 망해도, 어떤 경우를 당해도 다시 돌아갈 자리가 있다는 겁니다. 그 자리가 뭐냐? 아버지의 집. 아무리, 아무리 험한 꼴을 당해도 돌아갈 자리가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늘에 계신데요. 우리 아버지 하늘에 계시고 저와 함께 계신데요.” 이렇게 돌아갈 자리 안에, 예수님 안에, 하나님 안에 있게 되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 만드는 최종 목표점입니다. 내가 그동안 내 주인이었는데, 내 일은 어디까지나 나의 일인데, 나의 자존심과 나의 명예와 관련된 나의 일인데 주께서는 그걸 아주 지독한 악마의 병으로 간주해서 치료해주시려고 하는 겁니다. 치료할 때는 내가 미처 몰랐던, 내가 이런 더러운 병이 있었구나, 를 끄집어내는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으로 하여금 지독하게 세상 사람들한테 모멸감과 모욕감을 당하게 하는 방식으로 주께서는 사용하십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에게는 앗수르였습니다. ‘우리가 앗수르 같은 신, 앗수르 같은 방식으로 신을 섬기면 우리가 앗수르 같은 강대국이 될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하스 왕은 이미 앗수르에 매료되었기 때문에, 그게 자기의 통치이념이 되었기 때문에, 통치이데올로기 이념이 되었기 때문에, 통치법칙이 되었기 때문에 다른 법칙은 씨도 먹히지 않는 거예요. 이게 환자입니다. 이게 병든 거예요. 이게 오늘날 우리 모습, 우리 일상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예요. 우리가 평강을 새삼스럽게 원한다는 말은 아직 우리가 안 깨어졌다는 뜻이에요. 우리는 깨어져 버리면 내가 평강을 가질 자격도 없고 그럴 권한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평강은 주님 자신이 평강이에요. 주님 자신이 평강이에요! 우리가 평강해서 뭐하는데요? 우리가 이 땅에서 살고자 하게 되면 맨날 만나는 것이 앗수르의 횡포, 앗수르의 횡포만 매일 직장생활을 통해서 가정생활을 통해서 만나게 될 겁니다. 좀 가졌다고, 좀 잘났다고, 많이 안다고, 그리고 권력 있다고 얼마나 갑질을 해대는지요. 참 서럽지요. 여러분, 서럽지 않습니까? 서럽게 느끼는 여러분이 여러분만 못한 사람에게 갑으로 이미 등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몰라요. 강한 자에게는 굽신거리지만 못한 자에게는 어렵게 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라, 하는 이것은 도저히 인간에게는 성립이 안 되고 성령이 와야 가능하고요. 왜냐하면 성령은 십자가의 영이니까. 십자가의 영이라는 것은 내가 뭘 할까요, 가 아니라 내가 뭘 할 하등의 존재 자체가 안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십자가 지는 것을 무슨 아골골짜기에다, 굶어 죽고, 아프고, 병들고, 아주 처참한 그런 것만 생각하는데 진정한 십자가는 참 평안합니다. 마음에 원하지도 않는 고요가 찾아오고요, 평강이 찾아와요.

자, 다시 오늘 본문에 들어가 봅시다. 본문 미가 5장 4절에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 그 근본이고 태초고 하나님이신 평강이 이제는 그들에게 들어오는 절차가 앗수르가 그들을 일단 칩니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 대항할 수 있는 어떠한 능력은 없습니다. 여기서 그들의 목자, 종교적이고 정신적인 지도자지요, 목자, 그리고 군왕들, 그들의 왕, 방백들, 공무원들 그동안 뭐했습니까? 뭐 했어요? 아무 짝도 소용없지요. 요런게 어려워요. 무슨 뜻이냐 하면, 세상 모든 일이 하나의 물 빠지는 욕조처럼 뱅뱅 말려서 사라지는 그러한 과정 속에 있는데 그러면 그 속에서 인간과 인간들의 상호작용은 어떤 효과가 있느냐? 효과 없어요. 여기서 주님의 작용이 압권입니다. 주님의 작용이 뭐냐 하면,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킨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목자는 정신의 지도자고 군왕은 외부의 적을 치는 거예요. 그런데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이 전에 이스라엘 유다나라에서는 일곱 목자 있어도, 여덟 군왕 있어도 아무짝도 소용없었어요. 왜? 그들은 뭐냐? 베들레헴 에브라다의 그 ‘작을찌라도’의 취지를 전혀 이해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저 강해야 강대국을 이긴다, 그것만 생각했지 왕과 목자가 자기 십자가를 져야 된다는 사실, 자기 십자가는 희생한다는 뜻은 아니고요, 나는 별 볼 일 없다, 나는 무능하다, 모든 일은 주께서 알아서 하신다, 그런 자세로서 봉사하는 자세가 되지 않으면 그것은 제대로 된 목자나 왕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만난다고요? 우리로 하여금 다 큰 어른이라도 젖먹이와 어린아이 취급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어린아이. “나는 너한테 어떤 힘도 요구한 일이 없어. 내가 알아서 하는 것 다 알지?” “알지요” 이게 바로 주님과의 만남이에요. 자기가 어떤 내세울 게 없으니까, 능력이 없으니까 평강이 안 올래야 안 올 수가 없어요. 꾸역꾸역 자기 자존심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는 게 아니잖아요. 자기만의 어떤 구상한 일, 이것만은 꼭 이루어야 될 그런 일이 없어졌잖아요. 그러니까 남은 것은 주님이 주신 평강만 남은 거예요. 그것이 십자가 안에 있는 상태입니다. 어떻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현 상태지요? 현 상태라니까 또 주무시는 상태 말고 현 상태지요. 지금껏 살아온 것이요 기적입니다.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은 지금껏 내가 살려고 애썼는데 그 죄 있잖아요, 그 죄가 깡그리 다 용서받았다는 것. 일곱 목자 여덟 군왕은 전에 철저하게, 일곱이니 여덟 자체가 밟은 데를 또 밟아주고 밟은 데를 또 밟아주는 거예요, 철저하게 사람 하나에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이 밟아준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성공과 출세, 왕, 영웅화, 나 자신이 위대하게 되려는 그것을 고맙게도 밟아주고, 밟아주고, 부숴주고, 깨주고, 꼼짝 마라, 해주시는 그 은혜, 그 은혜로 인하여 우리는 평강을 얻게 될 겁니다.  

 

세상 모든 것이 하나의 토네이도 같은 바람이라면 그것이 빠져 들어가는 그 지점이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출생한 그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멀쩡한 오빠가 죽어서 화나는 나사로 가정에서도 주께서는 평강을 주셨습니다. 주님 자신이 평강이 되셨던 것을 그들은 그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나만의 평강, 나만의 행복 주께서 짓밟아 주시고 주님이 생명이고 주님이 부활됨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어린아이 같은, 젖먹이 같은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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