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제일 기분 나쁜 것은 누가 나에게 지적질 하는 거예요. 부부싸움의 99.9%가 지적질 때문에 싸우죠. 네가 나한테 뭐했다고 지적질 하느냐. 너 돈 얼마 벌어온다고 나한테 지적질 해? 결국은 돈 문제가 나오죠. 너한테 시집와서 고생한 거밖에 없는데 그것도 남편이라고 나한테 지적질 하나? 이런 식으로. 반대도 마찬가지죠.
깔끔합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순종치 않는 자에게는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다. 더 이야기할 게 뭐가 있어요? 없죠. 이 악한 마귀를 언급하는 것은...... 다시 하겠습니다. 마귀가 왜 자꾸 등장하느냐 하면 인간이 옛 세상, 새 세상이 뭔지를 전혀 감 잡지 못하고 그냥 있는 이 세상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마와 함께 있는 옛 세상이라는 규정을 인간들은 이해를 못하고 있는 거예요.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고 착실하게 살면 되잖아요. 앞으로 잘할게요. 잘할게요. 맨날 이런 식이에요.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어요. 사람이 회개하고 반성한다는 것은 자기 의를 감추기 위한 어설픈 연출이고 속임수에 불과한 거예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사실은 그 뒤에 말이 있어요. 이것만은 건드리지 말아주세요. 자꾸 뭐 앞으로는 잘할게요. 그러니까 나의 자존심과 나의 가치만큼은 좀 훼손되지 않게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거예요. 이 선악체계가 그만큼 독소요소로 우리의 뼛속까지 완전히 박혀서 이것을 못 빼냅니다. 차라리 옷을 벗으세요. 우리 옛 생활, 우리가 우리하고 헤어지세요. 바이바이. 안녕. 야곱과 에서가 쌍둥이죠. 우리는 우리와 쌍둥이 되었어요. 우리가 하나 더 생겨버리면 옛 쌍둥이는 잘 가, 인간아. 이 옛 세상에 속한 나야. 하고 좀 이제 보내주세요. 그 옛 세상에 속한 내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질책하고 벌 내리고 나무라고 꾸중하고. 너 그 따위 식으로 살아가지고 네 인생 성공하는가 보자. 너 정신 좀 안 차리나? 이런 식으로 계속 잔소리하고 있어요. 아무 상관도 없는데. 악마가 선악을 들먹여가면서 그런 식으로 우리를 온전케 하라고 보다 더 진전된 모습을 보이라고 계속해서 우리를 나무라고 촉구하고 있죠. 우리에게 할 일을 자꾸 만들어줄려고 하는 거예요. 끝났는데. 성령이 와야 지금 제 말을 이해합니다. 성령이 안 오면 이런 소리해요. “목사님, 어떻게 하면 성령 받습니까?” 아이고 참내. 주시는 분은 내가 아닌데 왜 저보고 이야기해요. 성령은 선물로 그냥 주시는 분인데 그분한테 이야기해야죠, 그분한테. 그러면 그 사람이, “예수님 저에게도 성령을 주시옵소서.” 그러면 예수님께서 “너 안 받았나?” “안 받았습니다.” “안 받은 주제에 왜 나한테 달라고 해? 안 받았으면 그걸로 끝났지.” “언제쯤 옵니까?” “네가 뭔데 내가 줘야 되는데. 나의 신은 나의 성령은 육과 함께 할 수 없는 거야. 성령을 달라하는 그게 바로 육이야. 너는 선악과처럼 그냥 망하면 되지 왜 그걸 네가 너를 살리겠다고 그런 노력을 하느냐. 그게 바로 육이야. 나는 너와 함께 할 수 없다.” 이런 판정을 받죠. 물론 그런 시나리오까지는 상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런 음성조차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이 악하고 불법이고 음란하다면 성도는 뭐냐. 성도에게는 감사가 나옵니다. 감사가 나오지 않는 것은 전부다 음란이고 불법입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감사와 기쁨과 고마움과 느긋함이 있어줘야 되고 이 일은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 나를 덮친 것이라는 사실을 본인이 기꺼이 수용해야 돼요. 집안에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일조차도 주께서 일으킨 일이라고 느긋하게 받아들여야 돼요. 옛 세상에 속한 것들은 고민과 걱정이 늘어지죠.
8절에 봅시다.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롯의 특징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에 속한 사람이에요. 그게 창세기 19장에 보면 나옵니다. 창세기 19장 29절에 보게 되면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아브라함에게 준 언약을 돋보이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조카가 있는 소돔과 고모라를 불바다로 만든 거예요. 하나님은 그만한 권한이 있습니다. 자기 언약을 언약대로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거칠 게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내가 이때쯤 태어나게 하시고 살게 하시고 왜 이 지역에서 서울이면 서울, 대구면 대구에서 왜 살게 하시는가. 그것은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하신 것처럼 주님을 생각해서 그들의 멸망하는 모습과 대비되는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아서 말씀전파의 일원으로서 우리를 사용하시기 위함입니다.
9절에 보겠습니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이렇게 되어있죠. 여기 4절도 그렇고요.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형벌 가운데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까지’라는 말은 그때부터 나온다는 뜻이 아니고 이미 형벌 속에 있고 이미 지옥 속에 있고 이미 심판 속에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이에요. ~까지. 주욱- 끝까지 간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을 시간의 흐름이라 하지 않고 이걸 ‘시간의 공간화’라 하는 거예요, 시간의 공간화. 시간이 어떤 공간 속에 이미 잠식되어 있는 거예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이 공간 밖을 못 벗어나는 거예요. 지옥 안에서 시간은 흐르고 천국 안에서 시간이 흐르는 것은 이 세상의 경우에 아직까지 모든 것이 세상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미 시작된 천국과 이미 시작된 지옥 사이에서 나름대로 시간이 흘러가는 거예요. 흘러가지만 이미 속성은 지옥은 지옥까지, 천국은 천국까지라는 말로 해서 이 속성은 달라지지 않고 그 안에서 진행되는 천국의 속성, 지옥의 속성인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롯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면 너희들이 마음껏 하나님 없이 살고 자기 욕심과 탐욕대로 해도 너희의 끝은 지금 하는 행세를 봐서 끝까지 그 행세를 유지할 것이고 ‘끝났다, 애들아. 끝났어. 너희들의 운명은 끝난 거야.’ 이런 뜻이에요. 어떤 남자가 그냥 그림을 그린 게 아니고 문신을 새겼다고 봅시다. 몸에 문신을. 그냥 그려버리면 목욕탕에서 목욕할 때 이게 지워져버리잖아요. 그게 아니고 몸에다가 이미지를 완전히 박아 넣은 거예요, 먹물로. 그러면 그 몸 가는 곳에 문신은 자동적으로 같이 합세해서 가게 되어있죠. 이게 지옥 가는 운명이고 이게 천국 가는 운명 같은 거예요. 나에게 천국 가는 요소가 주어졌기 때문에 이것을 내 힘으로 뽑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목사님, 제가 성도입니까, 성도 아닙니까?” 일부러 한번 해보세요. 그게 뽑히는가. 십자가의 고마움이 여러분의 힘으로 뽑히거든 그건 그림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내 뜻이 아니고 문신처럼 내 몸에 아예 자리 잡고 박혀버렸으면 이 십자가 은혜가 주님의 용서가 뽑히는 게 아니에요. 성령도 마찬가지에요. 성령이 와버리면 ‘성령, 나가. 훠이 훠이.’ 나가라고 한다고 ‘알겠습니다.’ 나가면 그건 장난치는 거죠. 그런 성령은 없어요. 인간이 여기 지옥 가는 문신이 있는데 아무리 교회 가서 말씀 듣고 성령 받았다고 아무리 행세해도 결국 그 사람은 자기의 문신따라 자기 운명이 확정됩니다. 바뀌지를 않아요. 바뀔 수가 없어요, 그것은. 나쁜 짓을 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깔끔하지가 않다는 거예요. 항상 뭐 예수 믿고 다 해놓고 늘 지저분해. 뭔가 깔끔해야 되는데. ‘아들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치 않는 자에게는 진노가 있다.’ 얼마나 깔끔합니까? ‘예수의 십자가 피로 용서받았다.’ 얼마나 깔끔해요. 뭐 군더더기가 필요합니까? 군더더기가 필요치 않잖아요. 정리가 되잖아요. 성도는 정리가 된다고요. 온갖 복잡한 일이 있지만 마지막 깔끔하게 한다는 것은 내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피 흘림으로 유월절 피를 보고 그냥 넘어가듯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넘어간다. 이것을 여러분 힘으로 ‘아니야. 이건 낭설이야. 이건 착각이야. 그건 기독교 교리에 불과한 거야. 그건 내가 배운 거야.’ 라고 스스로 자신을 의심해보세요. 의심해서 ‘내가 미쳤지. 내가 현실을 봐야지. 내가 왜 복음에 빠져가지고... 지금이라도 발 빼자.’ 빼세요. 그게 빠질 수 있거든 그동안 지식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10절에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육체가 있는데 정욕이 없을 수가 없죠. 육체가 있는데. 육체만 있어요. 성령은 없어요. 영은 없고 육체만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보고 뭐라고 나무랄 수가 없죠. 지옥 갈 행세를 하면서 지옥 가지 말라는 게 말이 안 되기 때문에. 육체밖에 없는데 그럼 지옥 가야지요. 어디 가는데요. 선악을 아는 것 자체가 죄가 된다면 자기가 선을 행해도 악이 돼요. 왜? 감사와 고마움이 없어요. 나올 수가 없어요. 무슨 뜻이냐 하면 감사와 고마움은 대상이 있어요. 내가 하지 않았는데도 이게 웬 떡입니까? 한다면 이 감사와 고마움은 누구한테 나아가느냐 하면 주님이 하신 십자가 다 이루었다, 거기에 하잖아요. 그런데 인간의 선악은 이 종착점이 누구입니까? 선을 행하고 악을 안 행하는 그걸 누가 했어요? 육신의 공로로 나의 잘남으로 결국 이게 귀속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자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자기 가치만 챙기고 있어요, 자기 가치만. 불신자들이 지금 이 시대에 위로받는 것이 주로 어디냐 하면 개와 고양이에요. 자기도 고양이 흉내 막 냅니다. 야옹~ 해가지고. 거기에 돈을 엄청 투자하고 하죠. 누가 나를 위로해줍니까? 여러분입니까? 누가 나를 위로해줘요? 내 공로, 내 성과의 업적과 실적은 내가 키운 개와 고양이가 가장 확실하잖아요. 내 작품이에요, 내 작품. 내가 공들인 것으로 나 스스로 내 가치를 확정짓겠다는 거예요. 나는 존재의 이유를 거기서 찾겠다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잘났으니까 나는 지금 죽기 싫다는 겁니다. 더 살아야겠다는 거예요. 그게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 사는 거예요. 10절 끝에 보면 결국 그 결과가 누구를 훼방한다고 했습니까?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한다고 했죠. 우리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 누구로부터 훼방당하거나 손해당하는 일은 없습니다.
11절에 봅시다.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라도 주 앞에서 저희를 거스려 훼방하는 송사를 하지 아니하느니라” 이 말은 악마가 설치는 것에 대해서 힘센 천사도 그냥 놔둬버리죠. 계획이 뭐냐 하면 끝까지 심판 가야되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들에게 이게 없어요. 구원이 없어요. 구원을 안 줍니다. 그들을 구원하지 않아요. 그게 주의 뜻이에요. 구원 받지 못할 자는 구원하지 않습니다. 생명책에 이름 없는 사람한테는 그걸 악마에게 위탁해서 악마의 손에 운명을 같이 하게 하셨어요. 구원이 없는 자에요. 나밖에 모르는 자와 구원이 없는 자는 같은 말입니다. 연세 많은 부모님 교회 데려가려고 얼마나 애를 많이 썼습니까? “어머니, 이제 나이도 많은데 마지막에 천국 지옥이 있어요. 자식 소원이니 교회 한번 가주세요.” “내가 거길 왜 가는데? 내가 평생 뭐 나쁜 짓 한 거 있다고? 내가 너 잘 키운 죄밖에 없다.” 이런 식으로 하죠. 그럼 자식 된 도리에서 그게 안타까워서 그렇게 하는데 사실은 그걸 안타까워하면 안돼요. 자기는 구원받은 것이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교회에서 애써서 간절히 기도해서 구원받았습니까? 그건 마귀들이 하는 짓이고요. 구원받은 이유가 없어요. 결정을 내가 한 게 아니고 사전에 협의한 게 아니고 일방적인 결정에 의해서 십자가로 용서받는다는 사실을 알았고 유월절 피로 말미암아 넘어감으로써 일체 정죄가 없고 있는 것은 천국의 복락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내가 알았기 때문에 이것이 너무나 기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 부모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부모한테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나한테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교회 가서 열심히 기도하시면 어머니 구원받으실 수 있습니다, 가 아니라 교회 안가고 가고가 중요한 게 아니고 나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났었습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믿든지 안 믿든지 좋을 대로 하세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주께서 마주치게 하시는 상황 속에서 ‘내가 아는 복음은 주께서 살아계셔서 이런 식으로 자기 백성을 일방적으로 건지십니다.’라고 함으로써 악마가 인간한테 시키는 모든 일 있잖아요. 열심히 해야 구원받고 교회 다녀야 구원받는다는 이 모든 악마의 그 거짓을 폭로시켜버리는 그 일에 여러분들이 주저하지 말고 달려드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일한 게 아니고 주께서 살아 일하심을 우리는 자주자주 잊어버립니다. 마치 내가 설치지 않으면 아무 일이 안 되는 것처럼 자주자주 오해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제는 육신에 속한 마귀의 일이고 마귀의 유혹인 것을 깨달았사오니 주님이 주신 기쁨으로 세상에 나설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십자가마을 의존교회강의 "회수되는 자기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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