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주님을 찾기 전에 주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는 거예요. 구원하려고? 아니요. 말씀이 이렇게 실제로 살아서 움직인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한 증거용으로 우리에게 온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내가 이렇게 했습니다, 하는 게 아니고 그건 말씀이 약속대로 약속이 약속대로 했을 뿐이에요. 그래서 내가 구원받은 것이지 내가 뭘 했다고 구원받겠습니까? 그냥 약속이 쑥 들어온 거죠, 쑥. 쑥 들어온 거예요. 뭐를 목격케 하느냐. 악마와 이 세상의 육적인 것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있는가를 목격하게 만들죠. 그 목격되는 저주받는 현장에 말씀을 전파하고 외치고 그렇게 하게 하신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안에 있는 말씀이 그렇게 시켰기 때문에 그냥 외치는 거죠. 구약에는 말씀, 신약에는 성령. 성령께서 우리를 이 육의 현장에다 두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복음이 터져나오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시는 겁니다. 느긋해요. 내 일이 아니니까요. 내가 혼신을 다하여 뭘 해야 획득할 수 있는 나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내 일이 아니고 남의 일, 주의 일이기 때문에 느긋하게 언제든지 거기에 동참할 수 있고 참여할 수 있는 겁니다.
성도를 통해서 무슨 이야기가 들려지느냐 하면 이 옛 세상과 다른 새 세상이 그들을 통해서 소개되었다는 이 사실, 하나님의 언약의 사람을 통해서 서로 대비되는 두 개의 세상을 비쳐 나타내 보이는 역할을 하나님의 성도들이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이 이 일을 해야 돼요. 이 일을 한다는 말은 우리가 일을 한다는 게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세요. 옛 세상과 새 세상의 차이점을 분간할 수 있는 안목을 성도는 간직하고 있어야 됩니다. 옛 세상 사람은 어떤 누구도 용서치 아니하고 새 세상에서는 어떤 사람도 다 하나님의 의가 되는 그러한 결정이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제공되는 겁니다. 분류죠, 분류. 영원히 같이 할 수 없음을 알려주는 분류. 이 분류를 율법에 보면 거룩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분류되는 사건 중 하나가 출-애굽 사건. 애굽에서 탈출함으로 말미암아 홍해를 중심으로 애굽 사람들, 군사들은 홍해에 빠져 죽죠.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뿐이라고 하잖아요, 사도 바울이. 십자가가 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부러 허락한 길이에요, 우리가 십자가를 믿음으로 용서받는 게 아니고 십자가 자체적인 효과를 증명하기 위해서 임상 실험용으로 우리를 자기의 택한 백성에게 찾아온 거예요. 실험 정도가 아니죠. 확실한 거죠. 십자가가 십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일방적으로 용서를 해주신 것. 피와 우리의 죄를 만나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그 시스템에 우리를 집어넣은 거예요. 누구를? 노아, 롯 그리고 택한 백성들을. 활동하신 주체는 주님 쪽이에요. 우리는 그냥 주님 하신 일에 증인으로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 증거하는 용도로 그냥 채택될 뿐이에요. 주님이 하는 일의 실습용이죠, 실습용. 그러니까 이거는 내가 저 사람보다 더 뛰어나다든지 성질이 좋다든지 하는 것과 아무 상관도 없는 거예요. 예수 믿었으니까 성질 좋아야 된다. 그게 바로 마귀적인 거예요. 채택된 그 자체로 종결되어버렸는데 채택된 걸로 모자라고 성격이 온화한 성격으로 바뀌어야 구원받는다는 이게 바로 악마가 발목 잡는 거예요. 무슨 할 일이 남아있는 것처럼.
베드로후서 2장 6절 봅시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여기에 음란, 무법의 기준이 뭐냐 하면 이 기준은 육의 선악기준이 아니에요. 이 기준을 인간이 아는 그 기준으로 생각해버리면 그것은 구원되지 않는 육적인 한계에 그냥 머물러 있는 거예요. 이 기준은 언약에서 나온 거예요. 음란이라든지 불법은 언약이 기준 되어서 언약이 나왔을 때 음란과 불법이라는 것이 비로소 성립되는 겁니다. 그럼 언약의 최종 주인공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죠. 그래서 요한복음 3장 36절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어요?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는 영생, 아들을 순종치 않는 자들에게는 저주. 맞죠? 얼마나 깔끔합니까? 얼마나 깔끔해요. 그래서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을 때 여기서 행함책이 동원됩니다. 행함책은 하나님이 남긴 모든 율법과 선악체계에 의해서 처벌받게 되어 있어요. 선이라는 것은 단 하나도 없고 모조리 악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최종 기준은 예수님이 하신 일이 기준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신 일이 의가 된다면 예수님이 하시지 않은 일은 뭐가 되겠습니까? 이게 악이 되고 음란이 되고 불법이 되는 거예요.
인간이 있는데 ‘나는 음란하지 않았다. 나는 불법 안했다.’ 가 되어버리면 그 가치가 주님께 갑니까? 본인의 의로 되돌아옵니까? 본인의 의로 되돌아오는 거예요. 이게 선악체제의 딜레마에요, 딜레마. 악을 저지르지 아니하면 선한 자가 누구입니까? 악을 저지르지 않은 자가 선한 자가 돼요. 그러니까 자기 한계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요. 내 잘남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자, 그게 바로 악한 천사가 하는 짓이에요.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보고 평가하지 말라, 심사하지 말라는 거예요. 나는 선악체제를 알아서 내가 심사하고 내가 심판내리고 내가 평가하겠다는 겁니다. 자기 혼자 야구하고 자기 혼자 세이프하고 자기 혼자 야구하고 자기 혼자 안타하고. 자기가 출제하고 자기가 정답이고. 이거 미친 거 아닙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 미친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이에요, 이 세상에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논리를 내세우는데 보면 미쳤어. 모든 평가가 자기 정당성에서 멈추고 말았어요. 그게 최종 종착점이 되고 말았어요. 나의 의. 이게 로마서 10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이 자기 의에 미쳐가지고 그리스도의 의를 배격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저주받게 하는 거예요. 악마가 지배하는 옛 세상의 치명적인 약점은 모든 가치와 판단이 악마에게 또는 인간 자체적으로 거기에서 스톱이 된다는 그 점이에요. 제3의 심판자를 인간들은 용납 안하고 그것을 강력하게 반발합니다.
-십자가마을 의존교회강의 "회수되는 자기 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