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
2022년 2월 27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5:24
(5: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미쁘시니’라는 뜻은 ‘믿음’에 관한 말입니다. 이 짧은 문장 안에는, ‘부르심’도 들어 있고 ‘믿음’도 들어 있고 ‘이루심’도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개념이 ‘부르심’에 종속됩니다. 즉 ‘부르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사전에 인간과 그 어떤 의논도 하시지를 않습니다.
같은 취지의 구절이 로마서 8:30에도 나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정했다’도 사전에 인간과 의논한 적이 없고, ‘의롭다 하심’도 사전에 인간과 의논하지 않고 ‘영광스럽게 하셨다’도 사람과 사전에 의논한 적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 모든 일이 예수님께서 홀로 해내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일체 끼어들지 못하게 하시면서 말입니다. 인간들이 내세우는 일에는 항상 ‘자기 보호성’이 기반으로 깔려 있습니다. 즉 “하나님 믿을테니 제발 내가 다치거나 망하지 않게 해주세요”라는 식입니다.
“시킨대로 다 할테니 제발 저를 때리지는 마세요”라는 식입니다. 따라서 예수님만 ‘부르심’의 취지를 홀로 달성하십니다. 이 ‘부르심’은 구약에서 그 개념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런데 도착한 그 땅에 기근이 일어나니 아브라함은 바로왕이 통치하는 애굽 땅으로 가게 됩니다.
그로 인해 바로왕은 큰 재앙을 받게 됩니다. 창세기 20장에 있는 아비멜렉 추장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에 오기전에 평온하기 짝이 없는 세월을 보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데리고 오면서 아비멜렉이라는 추장은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죽게 된다”는 통고를 받게 됩니다.
이처럼 ‘부르심’을 받은 자는 사적인 구원을 위해서 부름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을 뒤집어지도록 쓰여지는 사람입니다. 즉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폭력을 당해야 마땅한 대상이라는 사실을 부르심을 받은 자를 통해서 밝혀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폭력은 인간들 입장에서 생뚱맞는 일이 될 것입니다.
부름받은 모세가 애굽에 나타났을 때, 그 존재의 결과는 애굽의 왕으로부터 감옥에 있는 종의 집안까지 모든 맏이는 다 죽게 되는 됩니다. 그것은 세상을 붙들어 놓지 말아야 될 대상은 세상 나라가 같은 인간인 줄 알고 정치력에 행사하려고 한 겁니다. 즉 인간들은 정치력과 군사력 안에 놓여 있으면서도 그렇게 사는 것이 자연스럽고 정상인 줄 아는 겁니다.
하지만 실은 인간은 ‘죄의 힘’아래 놓여 있었던 겁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 실 때 일어난 상황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마 27:51-53)
이들 죽은 자들의 부활이 군사력으로 이겨낼 결과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지하벙커를 만들고 그 안에서 긴급구호물자로 연명해서 정신력으로 이겨낼 결과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 시체가 살아나서 세상에 나타난 겁니까?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효과’입니다.
십자가의 효과란, 예수님 자신의 죽음 사건에 관여하셔서 마무리를 지어주기를 바라면서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소환한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눅 23:46) 하나님의 비밀이나 암호는 부르심을 받은 자가 이 땅에서 망하고 죽을 때에서 비로소 그 비밀이 풀려지는 겁니다.
사사기 14:14에서는 삼손은 블레셋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를 냅니다.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그들이 삼 일이 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였더라”(삿 14:14)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조성된 이 수수께끼는 삼손이 여인들에 의해서 무너질 때, 비로소 ‘부름받은 자는 죽어야 그 사명이 이루어진다’는 원칙이 수립되는 겁니다.
즉 비밀을 제시한 쪽이 비밀에 의해서 죽임을 당해야지만 비밀은 현실로서 정착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쪽으로 부르짖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지켜달라는 겁니다. 예레미야 11:11,14에 보면,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 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그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곤액을 인하여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을 듣지 아니하리라”
이스라엘은 예수님처럼 살아가지를 않았던 자들입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이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의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만이 세상을 심판할 수 있는 기능을 발생시킬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깨서는 ‘부르심’ 자체를 지속시키고 지키려고 하십니다. 따라서 ‘부르심을 입은 자’가 성도가 되는데(롬 1:7) 이들 속에는 공통적으로 예수님이 들어계십니다.
예수님만이 진정한 주인공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 안에서 예수님을 끄집어내는 식으로 성도를 활용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5:45에 보면,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첫 번 아담은 ‘영’으로 묘사한 것은, 예수님 자신이 영이며, 그 영적 활동이 아담 때부터 일관성있고 동일한 예수님의 자신의 작업인 것을 말씀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 ‘산 영’은 고린도전서 15:22에 보면, 모두 죽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의 일관된 일은 ‘살려내는 영’이 됩니다.‘부르심 작업’ 안에는 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기 사랑, 자기 동정에 푹 빠져 있습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자기에서 자기를 비울 생각은 안 하고 반대로 지킬 생각을 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이 성령의 내용이 되어 성도에게 들어오게 되면, 성도의 내부는 십자가로 인하여 내부에 비워지게 되고 그 자리에 예수님이 자리잡습니다. 따라서 성도가 어디에 있든지 주님은 자기 사람들을 다 아십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 1:47-48)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개인의 구원을 위한 부르심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상을 다루시기 위해 성도를 세상에 꽂아두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7강-데살로니가전서 5장 24절(부르심)220227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24절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여기 ‘부르신다’는 말 나오고, 그리고 ‘미쁘시다’는 말이 나오는데 ‘미쁘시다’는 말이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속에서 이렇게 부르신다는 말이 전제가 되어 있고, ‘부르신다’는 말 자체가 인간이 끼어들 여지가 없게 만들어버려요. 그래서 우리가 두 개를 서로 나란히 한번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구원받느냐, 아니면 내 믿음으로 구원받느냐? 내 믿음으로 구원받게 되면 이것은 하나님의 믿음과 충돌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저기 하늘에 계시고 여기서 내가 믿습니다, 이렇게 되면 여기서 뭐가 빠져버리느냐 하면, 불러주심이 이게 날아가 버려요. 그래서 하나님이 구원하는 그 과정에 있어서 이 믿음이 놀랍게도 빠져 있습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로마서 8장 30절에 나옵니다. 로마서 8장 30절을 읽어보게 되면, 거기에 믿음이라는 게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정한 것부터 시작해서 영광스럽게 하는 것까지 일관되게 주께서 다 친히 하셨어요. 그것도 홀로 하셨습니다. 믿음은 나중이에요. 건방지게 믿음이 여기에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미리 정하신 그들” 할 때는 무슨 뜻이냐 하면, 네가 너를 지목해서 천국 넣어주세요, 할 수 있는 자격은 너에게는 아예 없다, 하나님이 저를 미리 정해주시고 저를 불러주세요, 라고 요청할 권한도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저 불러줬으니 의롭게 정도는, 의인 되게는 해주셔야지요, 라고 요구할 권한도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영광스럽게 할 권한도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다만 이 사실을 우리는 믿을 뿐입니다. 내가 거기에 끼어들 잽도 안되고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결과를 가지고 주님 하시는 것을 그대로 받을 뿐이지요. 따라서 우리 인간 쪽에서 먼저 믿음이 시작되게 되면, 그렇게 되면 성경에 나오는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정하지도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자기가 정했다고 억지가 거기에 개입되는 겁니다.
하나님 믿는다는 사람들 참 많이 있잖아요. 많이 있을 때에 그분들에게 한번 “당신이 부르심을 받았습니까?”라고 묻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내가 교회 왔는데 목사가 믿으라고 하니까 “예, 믿습니다”라고 한다든지, 아버지 돌아가실 때 “아버지, 믿습니까? 믿는다고 고개 끄덕끄덕, 하세요.” ‘끄덕끄덕, 됐냐?’ 이런 식으로 강요하는 것은 이것은 나를 지키려는 생존본능에서 뭔들 못하겠습니까?
‘내가 하나님 믿고 예수 믿어줄 테니 더 이상 이 귀한 나를 때리지는 말아주세요.’ 그런 심보 아니겠어요?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제발 나를 때리지 마세요. 꽃으로도 때리지 마세요.’ 이런 식이지요. 믿는다는 것은 일종의 소극적 대응책이에요.
“믿어줄 테니 제발 나를 힘들게는 하지 마세요.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요.” 이것은 조폭 앞에서나 하는 이야기고요, 이런 식이 믿음의 무슨 요소를 우리가 무시하느냐 하면, 부르심이라는 것, 이 부르심 자체를 우리는 생각도 하기 싫은 거예요. 내가 나서고 싶지 언제까지 불러주기를 기다릴까, 지루하고 지겨워서 못 기다리겠다는 이런 식으로, 성질 급해서 ‘아이고, 내가 믿고 치우지 뭐 기다리기는 뭘 기다려.’ 이런 식이 되면 곤란합니다.
성경에, 이 부르심이라는 것이 신약에 나와 있는데 신약에 개념이 뭐가 나올 때는 반드시 구약에서 이 개념 안에 주께서 먼저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뭘 심어놓았는가, 그걸 봐야 되겠지요. 구약의 부르심이라는 것은 두 가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을 부르심이지요.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을 불러서 어디로 가게 하느냐? 애굽으로 내려가게 해요. 잘 살아온 자기 동네 그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땅으로 가게 만들어요. 12장에 보면 드디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불러 가지고 이 가나안 땅으로 오게 되는데 12장 10절에 보면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잘 들으셔야 돼요. 부르시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애굽에 내려갈 때 아브라함이 자기의 아내를 누이동생으로, 여동생으로 속여서 갔는데 바로 왕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의 아리따움을 보고 궁으로 취하여 들였어요. 그리고 오빠라고 여기고 오해케 한 그 아브라함에게 대우를 잘해줬습니다.
그런데 1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이게 뭐냐 하면, 부르심이에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은 불러준 사람을 통해서 그쪽 세계를 하나님께서 표적으로 폭력을 유발시키는 작업이에요. 심판을 해버리는 겁니다. 고요하게 인간들끼리 잘 살아요. 잘 사는데 하나님께서 누굴 불러줘 버리면 부른 그 순간에 부른 그 지역이 하나님에 의해서 징벌을 받게 돼요.
이것은 사적으로 그 사람 천당 보내려고 불러주는 게 아니고 경상도 말로 확 디비뿌는 거예요. 그 표피, 껍데기 확 디비뿌는 거예요.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겁니다. 인간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그 세계를 확, 어떤 택정함을 꽂아서 그걸 뒤집어버리는 거예요. 그게 부르심이에요.
부르심, 이것은 내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의, 하나님의 일관된 본인 작업이에요, 부르심이. 구약에서 부르심이라 하는 것, 바로는 그냥 아브라함이 자기 여동생이라 속였기 때문에 동침을 하려 했지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바로가 난데없이 의문의 1패를 당하는 겁니다. 1패가 뭡니까? 완전히 낭패를 당하는 거지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창세기 20장 1-3절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하며 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보내어 사라를 취하였더니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택해서 불러줬는데 아브라함이 가는 곳곳마다 사달이 나는 거예요. 죽는 겁니다. 건들지 말아야 할 자를 건드린 거예요. 성경이요, 어떻게 구원받는가, 그것에 관한 책이 아닙니다. 세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되는가, 를 보여주는 거예요. ‘세상은 이렇게 설명해야 된다. 부르신 자를 주목해 봐라. 그리고 그 주변에 벌어지는 그 일을 주시하라. 세상은 네가 아는 세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택한 자를 위해서 완전히 세상을 디벼 버립니다. 뒤집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걸 ‘폭력을 부르는 부르심’이라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모세를 불러다가 어느 날 밤에 애굽나라에 딱 집어넣으니까 애굽나라에 있어서 모든 맏이는 다 죽어요. 애굽나라에 있던 바로 왕 맏아들부터 바로 왕의 옥에 갇힌 죄수의 맏아들, 죄수는 옥에 갇혔지만 그의 맏아들은 자기 집에 있을 것 아닙니까, 자기 집에 있던 네 살짜리 아들이 있었다면 그 네 살짜리 아이가 죽는 거예요.
이것은 이 세상에서 인격적으로 누가 훌륭하냐, 누가 많이 배웠느냐, 누가 돈 이 많으냐, 적으냐, 가난한 자, 어떤 인간도 그 차이는 하늘나라에서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잘난 자, 못난 자 할 것 없이 맏이는 다 죽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죽일 때에 누가 오느냐? 하나님의 천사가 거기에 등장해요.
이것은 러시아 군인이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 나타나는 것과 똑같아요. 어떤 할머니가 러시아 군인이 딱 오니까 ‘너 여기 왜 왔는데?’ 섬뜩함이지요. ‘네 나라 가야지 왜 러시아 군인이 우리나라에, 여기에 왜 오는데?’ 여러분, 대구에 인민군 와 보세요.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유명한 말이지요. “네가 왜 여기 있어?”
천사가 왜 옵니까? 인간이 사는데. 천사가 뭐 인간 됨됨이를 보고 뭐 네가 착했느냐, 그런 것 보지도 않아요. 딱 하나만 보는 거예요. 유월절 어린양의 피 있느냐 없느냐, 그것만 봐요. 융통성이라는 것은 손톱만큼도 없어요. 융통성이라는 게. “너 대기업 들어갔어?” 그런 것 보지도 않아요.
융통성이 일체 없는 그 이스라엘 집단의 그 부르심으로 인하여 벌어지는 새로운 현실상, 드러나는 새로운 현실상을 주께서 부르심을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시면 좋아요. 부르심이란 뭐냐? 부르심이란 전쟁의 동참시키는 거예요. 하나님이 벌이시는 전쟁인데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전리품을 수여 받는 것, 하나님이 전쟁을 벌여놓고 그 전쟁의 결과 승리에 대해서 수여 받는 것, 훈장 같은 것, 선물을 부여받는 게 그게 바로 부르심이에요.
에베소서 4장 1절에 보면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라고 되어 있거든요. 그 합당하게 행하는 게 뭐냐? 4장 8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선물 받은 거예요. 그 선물이 성령의 은사에요.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라고 에베소서 4장 4절부터 7절까지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이 인간세계가 난데없이 하늘나라 쪽으로 침범을 당할 때 벌어지는 현상이 부르심이에요, 부르심. 인간들 문제는 인간들끼리 또는 내가 해결하겠습니다, 하고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데 난데없이, 난데없이 그냥 침입한 거예요. 침략자예요 하나님은. 침범한 겁니다.
뭐 뭐 신앙생활 바르게 하고, 착하게 살고, 그런 것 아무 상관 없어요. 그냥 누가 침범한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손댈 수가 없어요. 그러면 침범했을 경우에 도대체 침범한 이유가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공격하는데 뭐 이유가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이유 없어요. 전혀 이유 없습니다. 자기 대통령 오래 하려고 하는 거지 뭐 아무 이유 없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유가 있어요. 하나님은 이 세상을 침략하고 공격하는 이유가 있어요.
그 침략군 러시아 군인이 남의 나라 우크라이나 네거리에 서 있을 때 얼마나 섬뜩하게 놀라겠습니까? 이게 굉장히 놀랍지요. 천사가 와서 애굽나라 맏이들 다 죽여버릴 때 굉장히 섬뜩하고 그것도 밤에 이루어졌으니까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런 것 놀라지 마세요. 최근 2022년도에 이 한국 땅에 성도가 있다는 것에 놀라시기 바랍니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네가 같은 인간이잖아.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나는 부르심을 입지 않았는데 네가 왜 부르심을 입어?’ 이거 놀라야 돼요.
그렇게 놀라기 전에 창세기 20장 그 부분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창세기 20장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아비멜렉이 그 일을 당하고 난 뒤에 아비멜렉이라는 그랄왕 추장이……, 아니 동침도 안 했어요. 동침할 뻔 했지요. 했는데 네가 오늘 밤에 죽는다고 했어요. 여자하고 동침하고서 자기 목숨하고 바꾸는 그런 심각한 일이 벌어진 겁니다.
아브라함이 침범한 거예요. 아브라함이 러시아 군인이라니까요, 러시아군인. 그래 가지고 6절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당신은 선지자잖아. 당신이 기도해서 우리에게 저주가 임하지 않게 해달라.” 그렇게 하니까 17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그다음 18절에 “여호와께서 이왕에” ‘지금까지’라는 뜻이에요.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연고로 아비멜렉의 집 모든 태를 닫”아 버렸어요. 임신이 안 돼요. 여자를 전부 다 불임 여자로 만들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이 말씀을 볼 때요, 여러분이 아브라함 편에 서지 마시고요, 여러분이 아비멜렉쪽에서 그들의 심정을 이해해보려고 하세요.
뭐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냥 새로운 사람이 있어 가지고 예뻐서, 나이 90 넘었지만 예쁜 것은 예쁜 거니까, 예뻐서 동침할 뻔했지요. 그런데 자기 집안의 모든 여자가 다 임신이 안 된 거예요. 태가 닫힌 거예요. 이것은 갑자기 하늘나라의 횡포를 당한 겁니다. 그래서 이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완전히 쫄아서 제발 좀 살려달라고 한 거예요.
이런 경우가 예수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 쫓아낸다고 해서 귀신을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하니까 데가볼리에 있는 그 축산업협회 종사하는 돼지 키우는 사람들이 예수님 보고 제발 비노니 우리 동네에서 제발 좀 나가달라, 했어요. 우리 동네에서. 지금 그 존재 상황, 예수님의 그 존재 상황이 성도에게 그대로 지금 덮쳐진 거예요. 성도에게.
여러분, 만약에 성령의 두루마리를 둘둘 감았다면 인간관계는 다 깨집니다. 인간관계 다 갈라져요. 이상하게 갈라져요, 이상하게. 뭐 나쁜 짓도 안 했는데요. 그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심을 받은 자를 잠입시켜서, 투입 시켜서 천사와 마찬가지지요, 투입 시켜서 이 세상의 내막을 확 뒤집어버리는 그 이유가 뭡니까?
사람들, 인간들이 뭐에서 근본적으로 오해했느냐 하면, 인간은, 우리가 군사력에 갇혀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군사력에. 여러분이 우크라이나 국민이고 러시아한테 침범당했다 할 때, 여러분이 평생 살았던 논밭 다 버리고 폴란드로 도망할 때 뭘 느끼냐 하면, ‘야, 군사력만 셌다면 우리가 러시아를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할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북한을 마주하는 우리도 마찬가지고요, 모든 인간은 자기가 어떤 문제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군사력만 있으면 우리는 편안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군사력. 그래서 군사력에 우리는 주눅 들고 있고 묶여 있다, 이렇게 보는데 성경은 뭐냐 하면, 죄의 힘에 묶여 있다고 보는 거예요. 군사력이 아니고 죄의 힘이에요. 사람들은 계속 오해하는 거예요.
만약에 지금 여러분들이 다 성령 받은 성도고 오랫동안 복음 다 안다 칩시다. 일단 쳤어요. 알 수 없지만 일단 그렇다 칩시다. 그런데 갑자기 북한 인민군이 서울까지 쳐들어왔다, 일주일 뒤에 대구까지 온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복음 생각하겠습니까, 곧 예수님 생각하겠습니까, 아니면 대피소 생각하겠어요?
지금 최후의 날에 대비해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게 자급자족이 가능한 지하벙커, 모듈주택구입에 관심들이 있어요. 거기 보게 되면 식품 같으면 5년이나 6년까지 가는 참치캔 그게 괜찮거든요, 식품과 기본 필수품, 그리고 이제 참치캔도 지겨워서 못 먹어요. 이것 먹고 있느니 차라리 나가 죽겠다, 하거든요.
그래서 수경재배할 수 있는 작은 농장을 안에 마련하고요. 그 모듈 주택 안에는 샤워시설, 사우나 시설이 되어 있고 의약품, 각종 장비, 세탁소, 공기정화시설, 에너지는 지열을 통한 지열 발전소가 있어서 에너지 돌려서 물은 땅속의 지하수 뽑아서 수경재배로 콩나물 채소 키워서 마지막 핵전쟁, 3차대전, 미국하고 러시아하고 3차대전 하든 말든 지하벙커에서 찬송하면서 예배드리면서 살 수 있는 것, 냉난방시설 다 되어 있고 거기에 정화시설까지 되어서 물을 처리하고 정화수로 처리해서 박테리아 줄이고 자외선 처리시설 만들고요, 문은 리모콘으로 개인만 열 수 있게 하고, 그리고 기관총 필요한데 왜, 삼시 세끼 떨어지면 도와달라고 오는 사람들 쏴 죽여야 되니까.
그 마지막 최후의 날에 생각할 것은, 이 지하벙커 마련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금부터 펀드 넣고 돈 모아 놔야 된다는 그 말이지요. 도대체 그 주택 얼마나 하는지 이것부터 생각하지 십자가부터 생각하겠어요? 인간은 본인이 몰라요. 군사력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고 죄의 힘에 갇혀 있다는 인물이 딱 떴을 때에, 로마의 군사력에 밀려서 우리가 하나님의 참다운 백성이 되지 못한다는 유대민족 지도자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전혀 세상 권세에 보태지 못할 존재기 때문에 미워하고 죽이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 입장 생각하지 말고 그 당시 예수님이 그런 이야기했을 때 그 당시 유대인 입장이고 여러분이 그 당시 하나의 백성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어느 말이 설득력이 있어요? 설득력, 지하벙커가 설득력이 있는지 아니면 십자가만 믿으면 된다는 이게 설득력이 있는지요? 남 보지 마시고요, 여러분 자신들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자신들을. 지금 인민군 쳐들어온다면.
우크라이나 지금 19세부터 60세까지 남자들 지금 밖에 못 나가요. 전부 다 강제동원했거든요. 저는 뭐 이제 군인도 못돼요. 나이가! 19세에서 60세까지에요. 아내들은 지금 애들 폴란드로 빼돌린 후에 남편 위해서 다시 들어오겠다는 겁니다. 남편 밥 해줘야지. 죽어도 남편 옆에서 죽어야지.
성경은 마태복음 27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그 때에 51-53절에 보면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효과입니다. 이게 군사력으로, 이게 지하벙커로 해결됩니까? 십자가의 효과로 인하여 어떻게 죽은 자들이 예수님 부활 할 때 같이 그들도 부활돼 가지고 “아빠, 엄마, 나 살았어!” 하고 돌아다니는 거예요. 이게 생수하고 참치캔 모은다고 이게 돼요, 이게?
예수님이 부르신다는 말은 그 전에 아브라함 불러내시고 또 모세도, 유월절 사건 때 모세도 부르시고, 아론도 부르시고, 이스라엘 불러내신다 할 때는 하나님이 다 계획이 있었던 거예요. 이건 개인 구원문제가 아닙니다. 믿습니다, 할 문제가 아니고 세상을 뒤집어버리는 거예요. 세상에 너희가 속고 있다는 거예요. 인간의 힘과 군사력, 정치적 힘에 속고 있다는 거예요. 정치적 힘에. 대선 누구 찍는다고 해서 우리 죽은 몸이 살아납니까? 안 살아나지요. 그런데 왜 그런 데에 신경을 써요? 초접전이라? 초접전이고 뭐고 천사 앞에, 그 피 앞에 유월절 피 없으면 너희끼리 초접전이에요 너희끼리, 너희끼리 쓸데없이 게임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마지막 때는 예수님을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이 부활되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인데 제가 어렵게 만든 게 아니고요, 사도바울이 어렵게 써놨어요.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여기서 뭐가 어려우냐 하면, 첫 사람 아담은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그 사람이라는 말을 뭐로 표현했느냐 하면, 산 영이 되었다, ‘영’이라는 말을 집어넣었어요. 그런 데 ‘산 영’이 된 그 아담이 같은 고린도전서 15장 22절에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것 같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거예요. 이 말을 왜 하느냐 하면, 사람이 죽었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영적으로 죽어 있다, 이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영적으로. 지금 죽은 사람은 물론 죽었고, 아직 태어나지도 않고 태어날 사람도 이미 죽었다는 이야기에요. 아담 안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의 영은 꼭 죽어야 될 영이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그 죽어야 될 영인데 그다음에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에요. 그러니까 앞에 있는 것도 영, 뒤에 있는 것도 영, 영과 영, 같은 단어를 쓴다는 것은 이게 지금 일관성 있는 동일한 아담 태어나고 예수님 태어난 이 모든 일이 주님 자신의 일이고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인 거예요.
그러니까 부르심이라는 것은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에게 일어났던 그 일이 지금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넘쳐서 너희들 속까지 내가 들어갈 거야, 그 들어간다는 것이 뭐냐? 불러주게 되면 나의 일에 이미 들어온 거야, 하는 뜻이에요.
그러면 첫 번째 부르심을 받은 주님 앞에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것이 바로 자신의 일에 있어서 아버지를 소환시키는 일을 하신 거예요. 예수님 아들이 하는 일에 아들이 아버지를 불러내는 거예요. “아버지, 창세 전에 하시고자 한 대로 했잖아요. 아버지, 어서 와서 이 일에 개입해주세요.”
첫 번째로 부르심을 받은 그 예수님, 그걸 선택이라 해요, 선택받은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하시면서 이 일에 아버지를 거기다가 끼워 넣는 겁니다. 아버지를 끼워 넣어요. 끼워 넣게 되면 누가복음 23장 46절이 되는 겁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곧 “아버지, 빨리 내 이 죽는 일에 개입하셔서 아버지의 그다음 작업을 하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유일한 부르짖음은 예수님만이 부르짖을 수 있어요.
이 말은, 인간의 부르짖음은 예수님의 부르짖음과 비켜나간다 이 말이지요. 이게 맞지를 않아요. 예레미야 11장 11절에 보면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약정, 언약이 깨졌기 때문에 그래요.
언약이 깨졌다는 것은 10절에 나옵니다. “그들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한 자기들의 선조의 죄악에 돌아가서 다른 신들을 좇아 섬겼은즉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이 내가 그 열조와 맺은 언약을 파하였도다.” 언약이 깨져버렸어요. 언약이 깨져버렸으니까 그들은 부르짖어도 내가 듣지 아니한다.
14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곤액(재앙)을 인하여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을 듣지 아니하리라.” 이스라엘 마지막 끝 장면에서 이스라엘은 어떻게 끝나는가? 그들의 기도조차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아니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왜? 계약이 우선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이 깨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이 깨졌다는 말은, 하나님은 언약 안에서만 일하지 사람하고는 일하지 않습니다. 그 언약의 당사자가 누구냐? 예수님뿐이에요. 다른 사람은 안돼요. 이스라엘을 뽑아 놨지만 이스라엘은 안 되잖아요. 이스라엘은 지금 언약을 깨트릴 수밖에 없는 그러한, 죽을 수밖에 없는 아담에 속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제외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이런 거지요. 교회 나와도 소용없다 그런 이야기지요. 뭐 믿습니다, 해도 소용없는 거예요. “나는 너하고 이야기 안 해. 너하고는 말을 안 해.” 이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속 시원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부르짖는 그것, 그것이 일종의 하늘의 암호인데요. 사사기 14장 14절에 보면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삼손이 수수께끼를 내요. 블레셋에게 수수께끼를 내는데 일종의 암호인데요, 그 암호가 언제 풀리느냐 하면, 암호를 낸 수수께끼를 낸 삼손 자기가 망가졌을 때 수수께끼가 풀립니다. 이것은 아무도 풀수 없어요. 삼손이 여자한테 빠져 가지고 헤벨레, 했을 때 그 암호가 다 깨져버려요. 나중에는 삼손의 머리카락의 암호까지 블레셋 여자한테 들켜 가지고 결국은 삼손이 그 여자 때문에, 들릴라 때문에 자기가 죽잖아요.
결국은 삼손이 죽으면서, 자기가 깨지면서 이 암호가 하늘나라 암호는 나의 목숨을 하나님의 택한 성신 받은 나를 죽게 하시려고 나에게 암호를 줬다는 사실을 발견해요. 그러니까 예수님도 마찬가지예요. 부르심을 받은 자는, 죄가 없는 상태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 죄가 없기에 죄 없다는 상태를 부각하기 위해서 이 죄 많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죄 없는 분이 돌아가셔야 돼요. 죽어야 돼요. 죽을 때 아버지여, 이 억울하게 죽는 여기에 하나님께서 개입해 달라는 거예요. 심판해 달라는 겁니다.
잠언서 22장 15절에 보면, 현대 부모들이 들으면 뜨끔한 소리가 나올 거예요.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별로 충격이 안되는 마음이지요. 잠언서 13장 24절 보겠습니다 “초달” 회초리지요 “초달(회초리질)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왜 부모가 자식을 못 때립니까? 인간은 자기를 못 때리니까. 이건 자식이 아닙니다. 나의 연장이에요. 나의 분신입니다. 내가 어떻게 나를 때립니까? 우리는 나를 때리기 전에 믿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일을 해요. “주여, 믿습니다. 주여,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나를 때리지 마옵소서.” 이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전부예요, 이게.
“하나님이여, 저를 저주하옵소서.” 이것은 예수님만 하신 거예요. 이건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못 해요. 그래서 인간의 부르짖음은 하나님께 통하지 않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불러내요. 자기가 자기를 불러낸다고요. 그러니까 그것은 가짜 엉터리지요. 인정 안 합니다. 주님이 불러내야 돼요. 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뒤집어놓기 위해서 그 사람을 불러내는 거예요.
인간에게서 뭘 끄집어내느냐? 인간에게서는 나를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고 나는 버려야 되고요, 예수님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이게 부르심이에요. 내 안에 들어 있는 예수님을, 하나님이 자기 아들 예수님을 끄집어내면서 딸려서 구원받는 것이 우리 모습이라는 이것이 부르심이에요.
미리 정하신 자, 예수님이지요. 부르신 자, 예수님이지요. 의로운 자, 예수님이죠. 영화롭게 되는 자, 예수님. 모든 것의 원형이 예수님 뿐이에요. 다른 사람은 없어요. 이게 바로 마지막 아담이에요. 살려내시는 아담이에요. 우리는 들러리지요, 뭐요. 성도라 하는 것이 부르심과 관련되어 있다고 로마서 1장 7절에 보면 나와 있어요.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 성도가 무엇이냐, 그 해석이 나와 있어요. 성도란 부르심을 입은 자를 성도라 해요. 자기가 자기를 불러서, 자기가 교회 와서 믿습니다, 이것이 성도가 아니라 주님이 불러낸 사람이 성도에요, 주님이!
그 불러준 사람은 주께서 일을 벌이려고 하시는 거예요. 군사력에 주눅 든 사람, 정치적 힘에 눌린 사람 아니에요. 오히려 그 정치적 군사력을 뒤집어버리려고 하는 사람이에요. 사람은 세상의 물리적인 힘에, 돈 힘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군사력에 주눅 들어 있는 그 죄, 나의 힘에 눌려 있는 그 죄, 그 죄에 눌려 있는 거기서 건져내려 하는 것이 바로 주의 일입니다.
너는 죄에 눌려 있고 악마에 눌려 있다. 주님께서 이러한 죄를 끄집어내는 이 작업, 이것이 바로 제가 아까 이야기한 죽음에서의 부활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이야기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주님은 왜 오셨습니까? 죽음에서 부활시켜서 오셨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죽을 용의가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어떤 절벽을 뛰어야 되는데 못 뛰고 어, 움찔, 하고 뒤로 물러서는 거예요. 그냥 나 온전하게 유지하면서 부활 되는 수는 없습니까, 라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지요. 이게 뭘 모르냐 하면, 하나님의 질투심이 포함되지 않는 부르심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질투를 하는데 어떤 질투냐 하면, 자기 자식이 지금 엉뚱한데 사로잡혔을 때 하나님은 맹렬한 그 질투심으로 자기 아들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런데 질투라 하는 것은, 이것은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유발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부르심을 입을 때는 무엇이 동반되느냐 하면, 정말 걷잡을 수 없는 분노도 같이 튀어나와 줘야 되는 겁니다. 프로이트라는 그 정신분석학자가 꿈을 꿨는데 그 꿈의 내용이 이거였습니다. “아버지여, 내가 불에 타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아버지여, 내가 불에 타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프로이트의 환자 가운데 그런 환자가 있었던 모양이지요, 아들이 열병으로 죽고 난 뒤에 장례식이 있는데 철야 한다고 노인들 일군을 사서 지키게 하고 아버지는 다음날에 있을 장례식을 기다리면서 깜박 잠이 들었어요. 그런데 꿈에 “아버지여, 내가 불에 타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해서 깜짝 놀라서 아버지가 ‘아이고, 내 자식 죽으면 안 되지.’ 이미 죽었는데도 꿈에서는 살아 있는 거예요. 내 자식 죽으면 안 되지, 하고 벌떡 깨보니까 본인이 있는 그곳이 진짜 불이 난 거예요.
그래서 죽은 자식이 자기를 살려낸 거예요. 이것을 설명할 때는 뭐냐 하면,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죄책감이 결국 본인을 살려냈다고 그렇게 설명하는 겁니다. 자식에 대한 죄책감, 잘만 하면 내 아들이 나보다 일찍 병들어 죽지 않았을 텐데 내가 어느 구석에서 잘못해서 내 자식이 죽었는가, 이게 가슴에 있는 채 자고 있는데 촛불이 넘어져서 불이 붙어서 열기가 전해져 오 겁니다.
꿈에서는요, 꿈이라 하는 것은 자기 보호 본능이죠, 죽음에서 보호하려는 본능으로 되어 있어요. 뜨거운 것이 있으니까 꿈에 그걸 해석하는 거예요. 뜨거운 불이다. 예를 들어 자는데 막 홍수 나지요. 그것은 빨리 일어나서 오줌 누러 가라는 뜻이에요, 그게. 뻔~해요. 자리 하나 깔까요? 뻔한 거예요. 뜨거우면 불났다는 거예요. 깨보니까 실제로 불이 난 거예요.
질투심이라는 것, 죄에서 건져내는 방법은 하나님은 보통 사랑으로 한다 하잖아요. 신약에도 많이 나와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으로 우릴 구원한다. 이런 식으로 요한1서에 많이 나오는데 그 사랑이 구약에서 뭐로 되어 있느냐 하면, 질투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질투심. 왜냐? 사랑은 나만 건지면 그만이지만 질투심은 뭐냐? 폭력을 유발해요, 폭력을.
셰익스피어(1564-1616)라는 사람이 지은 소설에 <로미오와 줄리엣> 들어본 적 있어요?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책에 보게 되면 몬태규 집안과 캐플렛 집안이라는 두 앙숙 집안이 있었습니다. 그 작품에 로미오의 친구 나오고 줄리엣의 사촌이 나오는데 두 집안이 앙숙으로 미워하다가 싸움에 휘말린 로미오의 칼에 줄리엣 사촌이 찔려 죽지요.
그 전에 로미오라는 이 남자가 어떤 여자를 너무 짝사랑하니까 친구가, 나이 열여섯 살 먹은 애가 공부도 안 하고 사랑에 미쳐 있으니까, 네가 한 여자만 보지 말고 다른 여자도 두루 봐라, 해서 가면 쓰고 줄리엣 집안의 파티장에 가서 줄리엣을 보고 난 뒤에 뿅 갔어요. 그리고 줄리엣도 로미오를 보고 완전히 반해버린 거예요.
그리고 몰래 빠져 나와서 줄리엣의 방으로 난 창가에 서서 하는 대화가 있어요. 그 대화를 셰익스피어가 이렇게 썼습니다. “저기 저 창문에서 쏟아지는 빛은 뭐지? 동쪽이군. 그렇다면 줄리엣 당신은 태양이야.” 이런 대사가 나와요. 아, 참 간지러운 대사지요. 아래층 밑에서 위층을 보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앙숙 간에 살인사건에 휘말린 로미오가 어쩔 수 없이 다른 지방으로 피신하면서 줄리엣과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되니까 헤어질 때 맨 그 창가에서 헤어져요. 헤어지면서 줄리엣이 하는 대사가 또 나옵니다. 동일한 창가인데 거기서 하는 대사가 뭐냐? “그대가 저렇게 아래로 내려가 계시니 무덤 속의 시체 같습니다.” 이제는 떠난다 그 말이지요. 슬픔이다.
제가 이 말씀 드리는 이유는, 인간은 사랑 앞에서 태양, 그다음에 무덤, 시체, 동쪽, 쏟아지는 햇볕, 이런 개념들을 그냥 막 집어넣는 거예요. 사랑 그리고 질투. 질투 앞에서 세상 모든 만물은, 사랑 앞에서 나 중심으로 전부 다 꽂아두듯이 나 중심으로 모든 것을 집약해서 해석하고 설명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사랑 앞에는 눈에 뵈는 게 없어요. 가문이 앙숙이고 뭐고 간에. 그리고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로미오와 줄리엣이 로렌스 신부한테 상담을 받아요. 너무 서로 사랑하는데 어떻게 대책이 없겠는가? 그래서 로렌스 신부의 대책이 있어요. 그 대책 이전에 젊은 사람들이 너무 그렇게 하니까 충고도 좀 하기는 했어요. 뭐라고 충고하느냐 하면, 극단적인 기쁨은 끝이 된다. 극단적인 기쁨은 끝이 된다는 것은, “사랑에 너무 미치지 마. 그러면 넌 끝장이야. 네 끝은 그렇게 끝나는 거야.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사랑 때문에 여기서 끝장 볼 거야?” 이런 식으로 충고했는데 뭐 말을 들어야지요.
그래 가지고 로렌스 신부의 방법은 뭐냐 하면, 캐플렛 집안에서 줄리엣을 강제로 결혼시키려고 했어요. 그런데 약혼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줄리엣이 로렌스 신부한테 상담하러 갔습니다. 로렌스 신부가 “그렇다면 내가 묘수를 줄게.” 해서 약을 먹되 약을 먹고 난 뒤에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깨어나는 약을 먹여요. 그래서 결혼식 하는 전날 그만 줄리엣이 그 약을 먹고 죽어 버려요.
죽고 난 뒤에 신부가 만토바라 하는 장소, 로미오가 피신한 그 장소에 몸종을 보냅니다. 즉 베로나라는 장소에서 만토바라 하는 장소로 연락을 취하려는데 전염병 때문에 연락을 못 해서 로미오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그런데 줄리엣은 죽었지요. ‘나중에 깨어나게 되면 조용할 때 둘이 만나게 해줄 게.’ 이렇게 되어 있는데 편지가 못 가게 된 채로 로미오는 와보니 자기의 사랑하는 자가 죽어 있거든요.
그 자리에서 패리스라는 줄리엣과 약혼이 되어 있는 그 사람을 만나니까 성질 나서 그 사람을 죽여버리고 자기도 거기서 죽지요. 자살합니다. 그다음에 아무것도 모르는 줄리엣은 눈 떠서 보니까 로미오가 죽어 있거든요. 그걸 보고 자기도 단칼에 죽어버리고. 치안을 담당하는 영주가 두 집안이 하도 싸우지 말라고 해도 앙숙이 되어서 싸우니까 결국 로미오와 줄리엣이 죽고 난 뒤에는 서로 화해를 하기는 했는데 그 영주가 이걸 두고 구슬픈 평화라고 해요. 구슬픈 평화, 슬픈 평화.
자, 여기서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아무리 복음이고 뭐 우크라이나고 대선이고 하지만 인간은 어디까지나 자기에 대한 애착과 자기 사랑에서는 무슨 수를 다 해도, 심지어 자기 목숨을 빼앗긴다 할지라도 자기는 자기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단순히 우리가 아담 속에서 나는 고생한다, 가 아니라 우리는 죄 안에, 나라는 죄 안에 갇혀 있는 겁니다. 교회 60년 다녀도 소용없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아무리 교회 나와서 하나님 믿고 예수 믿고 신앙생활 잘해도 내 사랑을 무슨 수로 내가 빠져나갑니까? 세상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도, 어떤 일이, 3차대전이 일어나도, 만약에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두 손 꼭 잡고 이 밤에 같이 죽자.” “그래, 너무 좋아요.” 하고 같이 죽을 건데요. 그 정도로 인간은 자기 애착과 자기 사랑에서 못 벗어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질투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예수님만 사랑해요. 그래서 예수님이 벌여놓은 그것만 사랑해요.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위하여, 오직 나만 사랑하라고, 너 사랑하지 말고 나 사랑하라고 불러낸 사람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47, 48절에 보면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부르심 이전부터 다 알고 있었어요. 네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냈는지, 희미한 등불 밑에서 뭘 했는지 다 알고 있어요. 옥경이 불러내듯이 다 불러낸 거예요. 미리 정했거든요. 로마서 8장 30절의 미리 정하신 자, 그다음에 나만 달랑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아브라함을 불러내듯이, 삼손을 불러내듯이, 모세를 불러내듯이, 엘리야를 불러내듯이 부르시고, 그 부르신 자가 어디서 무엇을 하면 어떻게 하는지 이미 익히 다 아시고, 끝까지 추궁하는 것은 뭐냐?
너는 내가 아니면, 내 십자가 죽음 아니면 너는 부활 되지 못한다는 그 사실입니다. 그겁니다! 네가 까불고, 찧고, 예수 믿고, 교회 다니고, 소용없어요. 십자가에요, 십자가! 예수님 십자가 효과! 그걸 우리한테 집어넣기 위해서 우리를 불러내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선물을 받은 거예요. 은사에요.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는 겁니다.
그게 그 결과가 뭐냐? 선물로 온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미리 정하시고, 부르신 것도 주께서 알아서 하시고 내가 원하지 않았고, 의롭게 되는 것도 ‘아, 의롭게 되어야 죄없이 천당 가는 데……’ 하고 내가 원하지 않았고, 주께서 그냥 십자가 피로 의롭게 하셨고, 그래서 성도라 불러주시고, 예수 안에서 뭐 뭐 주께서 다 하셨고, 그 불러준 사람을 성령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에 의해서 살려냄을 받는 영이 되게 하셨고, 이제는 육이 아니고 영이 되게 하셨고, 융통성 없는 천사처럼 되게 하셨고, 우리를 로마서 같으면 로마에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확 뒤집어놓는 현상들이 성도 중심으로 벌어지게 하셨고, 우리가 할 것은 뭐 아무것도 없네요. 오늘 제목 ‘뭐’로 할까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주께서 자기의 부르심을 스스로 보호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거예요. 이제 오늘 본문으로 갑시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5절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믿음직하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우리는 그냥 말려든 거예요. 주의 일에 걸려든 겁니다. 아무것도 할 게 없어요. 아무것도 할 게 없다고 주께서 미리 아셨어요. 할 게 없다고 까불다가 엎어지게 하는 것도 주께서 미리 아셨어요. ‘내 자빠질 줄 알았지.’ ‘할 게 없으니까 내 맘대로 살겠습니다.’ 그게 바로 뭐냐 하면, ‘예수 믿었으니까 이제는 나 안 다치게 해달라.’ 다시 자기에 대한 애착, 자기에 대한 사랑, 내 것 내가 지키려고 ‘모든 것을 빼앗겨도 내 것은 빼앗기면 안 돼. 나다운 것은 유지해야 돼.’ 요거, 그거 주께서 확 디벼 버립니다. 세상 뒤집기 전에 너부터 디벼버려요. 주님의 질투심으로.
내 안에 주님이 있어야 되는데 그 빈자리에 자꾸 내 것이 채워지니까 주께서 내 것을 끄집어내는데 그게 바로 자기 백성에 대한 징계에요. 회초리 들고 때리는 거예요. ‘그 빈 구멍 내가 남겨 놔라 했잖아. 왜 자꾸 네 것으로 채워.’ 빨리 그걸 빼버리고 주 예수님으로 그걸 채우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부르짖음, 우리의 기도와 주님의 기도가 비켜나도록 해주시는 것, 그거 주님의 부르심의 일관된 지켜주심이고 이루심인 것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다시 보게 하옵소서. 나만 잘되면, 나만 천국 가면 모든 것이 만사형통이라고 여겼던 그것이 얼마나 지독한 나의 애착이고 나의 동정심인지 깨닫게 해주시고,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질투가 우리 자신을 빼내고, 살려내시는 주님의 십자가를 꽂아주시는 이 이루심에 대해서 범사에, 모든 일에 항상 기뻐하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