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덩어리
2022년 2월 20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5:23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인간 세계에서 생각한 자아성은 외부와의 관계를 통해서 영과 혼과 몸으로 이해되었습니다. 플로티누스(204-270)라는 사람은 그 시대보다 몇 백년 전부터 내려오는 인간들의 지혜에 의해서 인간을 다음과 같이 구조를 이렇게 탐사하고 정리해놓았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오늘날 교회의 정통 교리로 자리잡습니다.
“인간은 감각적인 몸과 자율적인 영혼으로 나누어져 있다. 영혼은 신체와 다른 운명으로 태어났다고 본다. 영혼은 몸의 형상이 아니라 신의 형상이다. 영혼이 만약에 자기 존속을 위해 몸에 의존적이라면 육체의 죽음과 더불어 존속의 기반을 잃을 것이다. 따라서 영혼의 불사(不死)가능성을 위해서라도 영혼은 육체에 의존적이지 않다.
인간의 구조에서 최상의 요소인 영혼은 불멸과 불사의 성질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그야말로 신성하고 축복받은 것이라고 본다. 영혼이 자신의 정신을 통해 영원한 신성, 즉 정신적 세계를 바라봄으로써 그것에 동화되어 마침내 스스로 하나의 신으로 승격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이 영혼은 이 세상의 ‘신성한 원리‘을 통해서 더 높은 신성에 참여할 수 있는 존재라고 보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짐승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플로티누스는 육체적 활동이나 육체가 없이는 있을 수 없는 활동을 ‘짐승’ 곧 영혼과 몸의 결합체로 보고(혼) 육체가 필요 없는 활동을 이성적 영혼(상위 영혼, 혹은 영)의 고유한 활동으로 간주합니다. 그는 육체와 거리두기를 통해 감정과 욕망의 지배에서 자유로우며 정신적 활동에서 덕을 발휘할 수 있는 영혼이 바로 ‘참된 인간형상’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2:12에서는 이러한 인간들이 인간 이해를 가지고 ‘육’이라고 합니다. 즉 이런 주장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기에 나온 결론들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2-14)
즉 사도는 인간에게는 나온 모든 것을 십자가와 관련없는 인간의 지혜라고 단정짓습니다. 망가진 몸과 망가진 혼과 망가진 영을 통해서 자체적으로 정립된 구원의 아이디어는 인간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을 무산시키는 시도가 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만남에서도 이런 대립이 발생합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발을 씻는 대목이 나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행위를 정중하게 가로막습니다. 제자가 스승의 발을 씻어 섬기는 것이 옳다는 겁니다. 그리고 발만 씻지말고 전신을 다 씻어달라고 말합니다. 베드로의 혼의 세계나 영의 세계에서는 일부를 씻겨도 전신이 다 씻긴 것이라는 논리가 성립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더나아갑니다. 아예 그 어떤 신체적 접촉없이 몸과 몸이 단절된 상태에서 자기 제자들에 대한 ‘죄씻음’이 가능한 조치에 돌입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양들을 다 흩어지게 하시고 난 뒤(마 26:31), 홀로 십자가 지셔서 죽는 일입니다. 제자들나 인간들은 자신의 몸과 혼과 영이 망가진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구원을 고대합니다. 그들은 진정한 ‘죽음’도 모르고 영문도 모르는 채 죽어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아무리 예수님을 죽이려고 못을 박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려도 그들은 온전히 사람을 죽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죽으신 지 사흘만에 되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끝에 인간들은 도달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죽음의 끝에 도달됩니다. 거기에 악마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치 어떤 차가 정문을 가로 막고 있는 쇠사를 박차고 돌진했을 때, 쇠사슬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양쪽 기둥에 있는 쇠사슬 뭉치가 쑥 빠져 그 원래의 자리 내막을 노출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이 뽑을 때. 잇몸까지 다 뽑히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숨겨진 사실이 밝혀집니다. 그것은 그동안 악마가 인간을 꼼짝마라는 상태에서 가두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악마는 자꾸 예수님보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합니다.(마 27:40)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즉 혼적인 지성으로 서로 대화하자는 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만을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를 떠납니다. 종교를 떠납니다. 몸과 혼과 영을 떠납니다. 하나님께서 만날만한 장소는 친히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십니다. 솔로몬 성전에 있는 두 기능의 이름이 이를 말해줍니다. ‘야긴과 보아스’입니다. 야긴이라는 뜻은 ‘저가 세우리라’이며 보아스의 뜻은 ‘그에게 능력이 있다’입니다.
이 성전 내부는 성막과 같이 온통 피로 범벅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9:19-22에 보면,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전에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가 됩니까? 출애굽기 24:5-8에 보면, “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개개인이 율법을 지켜서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자기 백성을 박스에 담아 그 뒤에 피를 부어버리는 식입니다. 그 피는 진정 악마의 내막까지 노출시킨 완전한 죽음에서 나온 피입니다. 이로서 성도는 이 피안에서 거룩함을 얻는 겁니다. 신체적 접촉없이도 오순절 성령에 의해 주어진 성령이 오심으로서 성도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님과 만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으로 오신 사랑은 인간쪽에서 아무리 지우고 버리고 비워도 어느 새 가득차 버린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행함이 아니라 성령의 씻음으로 거룩하게 됨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6강-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성령덩어리)220220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여기에 나오는 몸과 혼과 영, 이것은 세 개가 서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인간을, 자기 자신을 바깥으로 표현하는데 있어서 이것은 내 몸이다, 이렇게 표현해도 되는데 자기 자신을 표현하면서 몸으로도 이야기하고 혼으로도 이야기하고 영으로도 이야기한다는 것은, 인간이 ‘나 여기 있다’ 이걸로 족한 것이 아니고 뭔가 노림수가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과 같이 있을 때 ‘나도 인간이고 너도 인간이라면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그 공통점을 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사람하고만 공통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짐승하고도 공통점이 있거든요. 짐승하고도 공통점이 있다면 짐승을 볼 때 ‘어, 저 코끼리는 덩치가 있네. 육신이 있네.’라고 이야기하면서 ‘저 육신이 움직이네. 오, 본능을 갖고 있네’ 이럴 수도 있거든요.
그럴 때 그것은 그 짐승에게 있는 것과 인간에게 있는 것과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걸 혼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전도서 3장 21절에 보면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짐승에게도 혼이 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몸이라는 거울에 비친 내 육신, 그것은 눈에 보이는 거거든요.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은 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남하고 어떤 의논을 한다는 것, 다른 사람과 어떤 공통적인 관계를 이룬다는 거예요. 그런 것을 몸에서 나온 혼이라고 치자.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눈물은 몸에 해당 되지만 사랑은, 슬픔은, 이것은 혼에 해당 된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러면 옛날 사람들은 짐승도 혼이 있고 우리 인간도 혼이 있다면 그러면 인간과 짐승이 다를 바가 뭐냐? 여기까지 생각하는 거예요. 다른 게 뭐냐 하면, 영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영은, 육이 있고 생각하는 혼이 있으면 되었지 영은 왜 있느냐?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죽고 난 뒤에 하나님도 만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사는 것으로만 끝나면 안 되고 죽고 난 뒤의 일이 불안불안 하다 그 말이지요. 그럴 때는 하나님과의 공통점, 하나님 생각의 공통점, 그걸 영이라 하자 이렇게 정한 겁니다.
이게 그 시대의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자기 자신을, 자아를 표현하는 방법의 최대치,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최대치, 또는 한계치의 개념, 이방 나라에서는 그런 식으로 통용이 되었습니다. 오늘 주보에 이번 주 설교 요약이 되어 있지요. 세상 사람들은 육과 혼과 영을 어떤 식으로 그 개념을 동원해서 어떤 식으로 자기를 표현했는가? 그걸 제가 위에서 세 번째 줄부터 후딱 읽어볼게요.
【인간은 감각적인 몸과 자율적인 영혼으로 나누어져 있다. 영혼은 신체와 다른 운명으로 태어났다고 본다. 영혼은 몸의 형상이 아니라 신의 형상이다. 영혼이 만약에 자기 존속을 위해 몸에 의존적이라면 육체의 죽음과 더불어 존속의 기반을 잃을 것이다.따라서 영혼의 불사(不死)가능성을 위해서라도 영혼은 육체에 의존적이지 않다.】
영혼이라는 것이, 그 영이라는 것이 몸에 붙어 있다면 죽고 난 뒤에 이것은 완전히 무생물같이 되어서 희망이 없다 그 말이지요. 따라서 영혼은 불사의 가능성, 영원히 죽지 않는 가능성을 위해서라도 영혼은 육체에 의존적이지 않고 하나님께 의존적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인간의 구조에서 최상의 요소인 영혼은 불멸과 불사의 성질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그야말로 신성하고 축복받은 것이라고 본다. 영혼이 자신의 정신을 통해(정신은 혼입니다. 영혼이 자신의 혼을 통해서) 영원한 신성, 즉 정신적 세계를 바라봄으로써 그것에 동화되어 마침내 스스로 하나의 신으로 승격될 수 있다”】라고,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정한 거예요. “……라고”
제가 방금 후딱 읽어드렸으니까 가만 들어보니 이게 분명히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인데 이게 삼분설이라는 이름으로 기독교에 유통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처음 나온 사람은 육의 단계, 몸의 단계라면, 그래서 교회 좀 다니면 이제 정신적으로 혼의 단계가 되어서 성경에 대해서 지식이 좀 확보가 되고 그래서 혼의 단계가 되고, 그런데 그 정도 가지고는 안되고 이것은 지금보다 더 고차원적으로 성화 단계를 거쳐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여러분은 육에서 혼으로 거듭나야 되고 혼에서 영으로 거듭나야 되는, 그래서 두 번씩이나 점핑, 도약을 해야 되는 이중구원설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이중구원설, ‘워치만 니’ 같은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그 워치만 니에 대해서 불평을 갖고 있는 기존교회는 뭐냐? ‘그게 아니다. 육이 있고 영혼은 같이 묶어 버리자. 왜? 육은 눈에 보이는 것이니까 이것은 뭐 짐승이나 인간이나 똑같은 것이고 혼과 영을 합쳐서 이걸 영혼이라 하자. 영혼이 되려면, 하나님과 결합이 되려면 여기서 한 번만 거듭나면 된다’ 이걸 가지고 이분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육과 혼과 몸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삼분설, 아니야, 인간은 육과 영으로 되어 있다는 이분설. 그래서 이분설은 삼분설 보고 이단이라 하고 삼분설은 이분설 보고 이단이라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둘 다 이단인데요. 성경 데살로니가전서에 나왔다고,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 나오는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이것 때문에 삼분설이 옳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주장을 하는데요.
이 자체가 철학입니다. 이게 어디에 해당 되느냐 하면, 혼에 해당 되는 거예요. 혼이라는 것은 뭐냐? 육이 뭔가 이상적이고 자기가 바라는 이상적인 세계, 이상적인 내 모습을 구현하려면 몸이 자기 스스로 눈에 보이는 것을 멈추지 않고 이 머리, 생각이 동원돼요. 마음이 동원되어서 최상의 내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인간은 멈추지를 않습니다.
교회 가든 절에 가든 뭘 하든 간에 ‘내가 이 짐승같이 이렇게 바닥 인생을 더는 살 수 없다. 천사가 별거냐? 나도 천사 될 수 있다. 교회 다니면 천사처럼 살 수 있다.’ 뭔가 인간은 가만있지 못하고 보다 자기가 의롭고 순수하고 순결하고 품위 있는 고결한 삶에 대한 야망과 욕망을 인간은 멈추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아이디어를 끄집어냈는가? 몸에 멈추지 말고 혼으로 살고 혼은 윤리적 이고 도덕적인 것, 그리고 윤리적인 것에서 더 나아가서 영, 종교적 존재, 영적 존재가 되게 되면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완전한 존재가 된다. 이것을 철학에서도 추진하고 있고요, 철학은 윤리 도덕적이니까 종교에서도 그것을 하나의 상품화시켜서 종교단체가 운영되고 돈 받아 챙길 수 있는 근거로서 이 내용을 설교에 담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담아버리면 교인들끼리라도 ‘저 사람은 지금 혼의 단계인가, 영의 단계인가?’ 살펴야 돼요. ‘아, 혼까지는 왔는데 아직 영 단계는 못되었어.’라고 하든지 혹은 ‘저 사람은 아직 육의 단계도 못 벗어났어.’ 그런 식으로, 성경 66권을 그런 식으로 다 해석을 해버리는 거예요. <누가 누가 잘하나> KBS 어린이 노래 자랑하는 <누가 누가 잘하나> 있잖아요.
시합을 붙이는 겁니다. 시간 바치고 돈 바치고 정성 바쳐서 하나님께 정성을 다하면 이것은 육에서 혼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된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종교가 그런 식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가시적인 인간의 몸을 포기하는 게 아니고 이 몸을 어떻게 잘 가꿔서 이 몸의 욕망이 원하는 최고치의 거룩의 열매를 내 힘으로 한번 만들어 볼까, 라는 시도를 하는 겁니다.
그것을 꾸준히 해왔던 선배들이 있어요. 그들이 누구냐?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나중 후반기에 북쪽 나라가 잘리고 난 뒤에 남쪽 나라만 남았는데 그 남쪽 유다 지파 중심의 이스라엘의 남은자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그게 유대 나라에요. 열두 지파가 유다 지파 중심으로 하면서 이름이 유대 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 유대 나라의 지도자들이 종교인들이에요.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사두개인들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바로 인간 자신의 육을 하나님이 원하고 있는 영적 존재로 바꾸기 위해서 그들은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사람이에요. 그중 한 사람이 누구냐? 바로 사도가 되었던 사울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이 편지는 누가 썼느냐? 사울이었던 사람이,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그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사도가 되고 난 뒤에 지금 이 말씀을 우리에게 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영과 혼과 몸이라는 것은 이방 세계에서, 이방 세계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의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탐구하고 분석해놓은 하나의 방법이에요. 이게, 이방인들에게.
그러면 유대인들은 뭐냐? 유대인들은 몸과 혼과 영이 아니고 뭐냐? 그들은 몸과 영혼으로 되어 있어요. 시편을 보든지 구약성경을 보든지 그리고 예수님의 표현도 그렇고 모든 것이 몸과 영혼으로 되어 있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보고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왕상 2:2)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떠날 때 “영혼이 떠나시다”(마 27:5)“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리고 창세기 2장 7절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그러니까 몸과 영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짐승에 대해서는 혼으로 따로 했지만 시편에서 대부분은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그렇게 되어 있다고요. 내 영혼아 어찌하여 불안하여 하는고.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뭐냐 하면, 육은 그냥 눈에 보이는 근육 덩어리고 그 안에 있는 내용인 영혼은 하나님과 접선이 가능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능한, 하나님과의 관계형성에 바탕이 되는, 그 인간 속에 있으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의 바탕 근거가 될 수 있는 그 무엇, 요소, 그걸 영혼이라고 본 거예요.
그 생각이나 아까 주보 되에 나왔던 플로티누스가 정리했던 그 당시 시대의 사람들이나 별 차이가 없지요. 불멸의 존재, 불사의 존재, 그것은 짐승과는 달리 인간 속에 있는 그것을 영혼이라 하자.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망하는고. 그런 식으로 다 표현이 되어 있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아, 이분설이나 삼분설로 가져가도 언제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이 후딱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자기 내부에 있는 영혼을 잘 접촉해서 그걸 잘 관리해 가지고 이제는 하나님의 만족 스런 영혼으로 탈바꿈하게 되면 그것이 구원이다.” 그렇게 이야기한 반면에 디도서 3장 5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여기에 성령을 언급하기 전에 뭐부터 언급했는가를 유념해 보세요.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사도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자기의 육과 영혼을 총동원해서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서 밝혀보니까 우리의 영혼이라는 것, 우리의 육, 그리고 거기에서 확장된 영혼이라는 것은 선을 행하고 싶어도 거기에 뭐가 있느냐? 악이 거기에 들어와 가지고 내 선보다 악이 더 우선적이고 우세하다는 사실을 로마서 7장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나는 선을 행하고 싶어도 악이 먼저 튀어나온다.” 이것은 뭐 내가 한 개가 아니고 내가 두 개가 되고 말았어요. 그 대목을 말씀드리면 로마서 7장 19, 20절에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절에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악이 함께 있다. 22, 23절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선을 행하고 싶어도 누가 이기느냐 하면 내 속에서 죄가 나의 선을 이기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는 말이,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나는 갇혀 있다. 아무리 어떤 수단을 써봤자, 몸과 혼을 아무리 영을 단련시키고 도를 닦아봤자 죄가 나로 본래의 죄 아래로 사로잡아 오는 거예요. 끌고 오는 거예요. 이게 네 자리라고.
그러니까 지금 사도바울은 성령을 통해서 율법을 해석하면서 무엇을 아느냐 하면, 내가 나의 몸, 나의 혼, 이방인들이 이야기하는 것, 혼과 육으로 나눈다면 나의 몸과 혼과 영이 모조리 다 망가졌다는 거예요. 다 무너져 내린 거예요. 옛날 시지프스 신화라고 있습니다. 인생을 어떻게 표현했느냐 하면, 인생이라 하는 것은 무거운 짐을 지고 정상까지 꾸역꾸역 힘들게 낑낑거리면서, 끙끙거리면서 그 무거운 돌멩이를 이고 정상까지 딱 도달하면 그 정상에서 돌이 떼구르르 굴러 가지고 지금껏 살아온 모든 것을 헛수고로 만들면서 도로 떨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칠전팔기라고 “그래, 요시! 내가 다시 일어서서 열심히 해 볼게” 그래 가지고 돌을 이고 인생을 또 열심히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데 애써봤자 또 떼구르르 굴러서 “이 무거운 짐을 정상까지 올려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 인생이라 하는 것은 그냥 무거운 돌멩이를 지고 계속해서 힘들게 살아가는 그것이 인간이고 인생이 아니냐, 인간 세월이 아니냐. 거기에 어떤 희망이 없다.” 그렇게 세상 지혜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을 바꿔보세요. 본인이 돌을 들고 낑낑거리면서 내 인생 살겠다고 정상으로 올려세울 필요가 없어요. 제가 이번에 안양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정상을 찍지 말라. 정상은 없다” 했습니다. 정상이라는 게 인간에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인간이 돌을 밀지 말고 돌이 있는 곳에 인간이 가면 되거든요.
그러면 돌은 어디에 있느냐? 제일 바닥에 있어요. 바닥 상태에 돌이 놓여 있어요. 그러면, 그 옆에 있으면 그게 인생 아닙니까? 뭘 돌을 낑낑대며 올립니까? 돌은 자연스럽게 에너지가 제일 낮은 바닥 상태로 가면 본인도 그 바닥 상태에 가면 되잖아요. 쉽게 말해서 내가 육이고 몸이면 그냥 육으로 몸으로 혼 되려고 하지 말고, 영 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만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육으로 나서, 흙으로 나서 흙으로 그냥 죽으면 되잖아요.
뭐 인생이 그렇게 힘듭니까? 뭘 자꾸 꿈을 꿔요? 환상을 꿉니까, 망상을 꾸고 있어요? 왜 이상적인 천사가 되려고 하고 하나님을 만나려 합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안 만나주겠다는데 왜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종교가 하는 짓이 다 거짓이에요. 망상들을 사람들에게 세뇌 시키고 주입 시키는 게 종교단체가 하는 짓들이에요.
성령을 받은 사도는 그렇지 않았어요. 마태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3장 9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돌 되어도 괜찮아요. 돌들로도 천국 백성 되게 하시는 능력이 주님한테 있습니다.
문제는 돌이 안 되려는 것이 문제예요. 돌 자리에 가면 되잖아요, 그냥. 시지프스, 끙끙 정상까지 돌 올리지 마시고 그냥 내려오세요. 산에서 내려오면 되잖아요. 자연인 폼으로 있습니까? 그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렸거든요. 기다리는 메시아를 어디서 만나느냐 하면, 공중에서 만나겠다고, 감람산에 오신다니까 자기들은 감람산에서 만나겠다고 그들은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를 해왔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서 2장에 보면 주님은 어디로 오느냐 하면, 자기를 만나겠다는 인간 군중을 헤치고요, 아무도 가지 않는 곳, 인간으로서는 제일 기피하는 그 자리에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니까 그 유대인들이, 마태복음 27장 40절에 보면 그 당시 사람들 유대인들은 자꾸 예수님 보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래요. 내려와서 자기들과 혼(魂) 적으로 대화하자는 겁니다. 같은 인간끼리 공통점이 있으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결과를 낳자는 거예요.
마태복음 27장 39, 40절에 보면,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 십자가라는 것이 제일 처참한 죽음이거든요. 죽음이라도 제일 처참한 죽음이고 어떤 동정도 받지 못하는 망가진 죽음이잖아요.
그래서 그 당시 유대인들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나무 위에서 죽는 것이라 해서 하나님도 저주한 가장 저주스러운 죽음이 나무에 달려 죽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도 그게 나와 있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13)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요. 빌립보서 2장에 보면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졌다고 합니다. 인간들은 좋게좋게 우리 말로 합시다, 우리 기도로 해결합시다, 예배드려서 해결합시다, 세례식이나 성만찬가지고 해결합시다, 이런 식으로 거룩한 종교단체 만들고 거기서 집사 장로 목사 세워 가지고 좋은 게 좋다고 찬양대 만들어 가지고 찬양하면서 하나님 만나겠다는 거예요.
왜? 때려 죽여도 십자가에 죽기는 싫기 때문에. 주님은 거기서 기다리는데 우리는 십자가가 싫어요. 왜? 인간이 망가져도 가장 망가진 모습이 십자가거든요. 주님께서 십자가에 가신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은 제대로 남을 죽일 수가 없는 존재라서 그래요. 인간은 죽어가면서도 내가 제대로 자기 죽는 이유를 모르고요, 자기 죽는 이유뿐만 아니라 남을 칼로 찔러 죽이더라도 제대로 온전한 죽음, 완전한 죽음에 이르를 때까지 사람을 죽일 수가 없어요.
총을 백 발을 쏘고 만발을 쏴도 그 사람을 온전히 죽일 수가 없어요. 왜? 죽음 자체가, 죽음 자체가 인간에게는 비밀로 감춰져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가 완전한 죽음, 죽음의 끝을 모르기 때문에 사는 이유도 몰라요. 죽는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사는 이유도 몰라요. 그냥 갈 때까지 가 보자는 식입니다.
인간들은, 그 당시 예수님 죽을 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예수님을 끝까지 죽였다고 생각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거든요. 그들은 사흘 뒤를 상상도 못 했습니다. 죽이려고 쫓아가서 죽였는데 사흘의 텀을 건너 가지고 도로 살아나 버렸어요. 이게 죽음입니까? 그게 온전한 죽음이에요? 그게 온전한 살인입니까?
남을 죽여도 온전히 죽이지 못한다는 것은 내가 죽어가면서도 왜 죽는지 온전히 알 수가 없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생각할 때 거울에 비친 저 육신이 내 것이라는 것도 이것도 망가진 몸이고요, ‘거울에 비친 내 몸이 아마 내 몸이니까 앞으로 저 몸으로 내가 출세해야지’라고 사적으로, 혼 적으로 생각을 하고 힘을 갖는 그 혼 적인 작용도 망가진 혼이고, 내가 바르게 살고 교회 다녀서 나중에 천국 가야지, 하는 그것도 망가진 영적 모습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따라간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어요. 주님은 육과 혼과 영으로 기껏 그 최대치의 개념, 그것밖에 모르는 우리를, 곧 ‘나’를 떠난 게 아니에요. 주님은 ‘우리’를 떠났어요. ‘우리’ 내가 꼴 보기 싫은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인간을 떠나버린 분이 주님이에요.
그 이야기가 요한복음 13장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어 줄 때에 베드로의 대화하고 예수님의 대화가 이게 맞지를 않아요. 베드로가 뭐라고 하느냐? 이렇게 이야기해요. “선생님은 제자의 발을 씻어 줘서는 안 되고요 제자가 선생님에게 교훈을 받았으니까 가르침을 받았으니까 제자가 존경한다는 의미에서 스승의 발을 씻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베드로가 은연중에 자기의 몸과 자기의 혼과 자기의 영의 생각을 노출 시켰어요.
그러니까 발을 씻기려고 하면 물을 떠야 되지 않습니까? 물을 뜰 때 이 근육질, 손과 발이 동원되겠지요. 머리의 두뇌가 동원되겠지요. 이것은 몸이고요, 이 손이 동원되어서 영글어내는 그 생각, ‘내가 선생님을 모셔야지’ 하는 그 생각은 혼이고, ‘이렇게 모시게 되면 나중에 하나님 보시기에 메시아를 섬겼으니까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에서 나를 받아주겠지’ 이것은 영적인 거고요, 베드로가 그 생각하면서 이 생각들 몸과 혼과 영이 다 망가졌다는 것을 상상도 못 한 거예요.
망가진 게 그것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죄를 씻기 위해서, 내가 모든 것을 다 씻기 위해서 너의 발을 씻는다” 이렇게 하니까 베드로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러려면 발만 씻지 말고 전신을 다 씻어 주세요”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발만 씻어도 네 몸은 전신이 다 나로 인하여 깨끗하게 씻긴 것이 된다”라고 예수님께서 이야기했거든요.
부분을 씻겼는데 전체가 된다는 것, 이게 베드로의 몸과 혼과 영의 세계에서는 이게 있을 수 없는 거거든요. 왜? 혼과 영의 생각은 몸의 생각, 눈에 보이는 생각의 확장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과 모순되게 되면 혼도 영도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몸에서 일어난 그 범주 안에서 혼과 영의 활용도가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게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듣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발만 씻겨도 네 전신이 이미 깨끗하다, 또 다른 말로 하자면 전신이 깨끗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발만 씻긴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를 베드로와 이 인간세계에서는 그게 한계입니다. 최대치입니다. 그게 개념의 한도에요.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게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발을 씻겨서 깨끗하게 하는 게 아니고 아예 베드로하고 몸과 몸을 떨어지게 해요. 격리시켜요. 절단시켜 버립니다. 베드로로 하여금 십자가 질 때 도망치게 만들어요. 십자가의 그 몸으로 인하여 그 도망친 몸이 나중에 접촉도 전혀 되지 않았는데 그 사람의 몸이 용서받고 깨끗하게 되고 거룩하게 되는 이 방식을 베드로 쪽, 인간 쪽에서는 상상도 못 한 겁니다.
발을 씻겨준 정도가 아니고 아예 접촉도 안 했어요. 접촉도 안 했는데 용서받고 천국 가는 거예요. 이게 가당키나 한 이야기에요? 이게 가능한 일이냐, 이 말이지요. 쉽게 말해서 헌금 한 푼 안 했는데 천당 가 있더라는 이야기지요. 쉽게 확 알아듣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교회 한 번도 안 나왔는데 천국 갔어요. 이게 돼요? 이게 되냐고요? 하나님께 찬송 한 번 한 일 없는데 천국 가 있어요. 이게 됩니까?
인간은 뭔가 기여한다고, 내 구원에 내가 뭔가 보태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주님의 방식은 그게 아닙니다. 떼놓아야 되는 것을 떼놓을 때 주님에 의해서 혼과 영과 몸이 거룩하게 되는 그 법칙은 떨어져야 돼요. 떨어져야! 그 떨어지는 방법은 출애굽기 24장 6절에서 8절에 나옵니다.
출애굽기 24장 6-8절에 보게 되면 시내산에서 내려왔던 모세가 피를 취하지요.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했지요.
그러면 피의 절반은 지금 딱 대비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양푼에 담은 제물의 그 피를, 소의 피의 절반은 하나님의 율법서, 자기가 기억해서 썼던 그 율법책에 뿌리고 나머지 남아 있는 그 절반의 피는 백성들에게 뿌린 거예요.
그러면 율법에 담긴 그 피와 백성의 피가 동일한 피에요. 똑같은 피입니다. 그 피는 어디서 나오는가? 백성들에서 나온 피가 아니에요. 그것은 모세에게서 나온 피가 아닙니다. 그것은 희생되어야 했던, 죽어야 했던 그 죽음에서 나온 바로 제물의 피에요. 그 피를 그들에게 다 뿌려버립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육과 혼과 영을 이걸 묶어서 그 자체를 육으로 취급해버린 거예요. 인간들의 생각은 육 따로, 혼 따로, 몸 따로인데 주님의 십자가 피 앞에서는 네가 혼을 주장하든 몸을 주장하든 영을 주장하든, 삼분설로 하든 이분설로 하든 전부 다 더럽고 추잡한, 엉터리같은, 내가 스스로 나를 구원하려는 하나의 철학적 시도에 불과한 거예요. 그 자체가 육이에요.
아주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중국집에 가서 탕수육 시키는데 탕수육에서 돼지고기 조각 튀긴 것 따로, 소스 따로 해서 이걸 찍어 먹을 것인가, 부어 먹을 것인가, 그 문제거든요. 개개인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이걸 ‘찍먹’이라 찍어 먹는다고 해서 ‘찍먹’ 소스를 탕수육에 붓는 이것을 ‘부먹’이라 그냥 부어서 먹는 거예요.
주님은 ‘찍먹’이 아니고 ‘부먹’이에요. 소스 찍는 내 몸과 혼과 영이 동원될 이유가 없어요. 그냥 부어지는 거예요. 그냥 피, 삼분설 생각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냥 피로 구원받는 거예요. 부어진 피로. 그러니까 이 피는 나의 요소에서 나온 게 아니에요. 발을 씻겨주었던 베드로, 결국 목자를 치니 양이 흩어져야 돼요. 목자 앞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아야 돼요. 어떤 인간도 남아 있지 않아야 돼요.
그들은 개개인만 주장하는 돼지고기 조각 튀김이거든요. 다 가야 돼요. 그다음에 피가 마련되게 되면 그 피가 한꺼번에 부어져서 그들은 뭐가 되느냐? 육이 아니고 영이 되는 겁니다. 그 이야기가 누구보다 철저하게 율법적으로 살았다고 자처했던 사도바울에 의해서 고린도전서 2장 12-14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여기에 육에 속한 사람이 뭘 주장하느냐? 육과 혼과 영을 주장하는 사람이 육에 속한 사람이에요. 이게 이방인의 철학이에요. 이게 삼분설과 이분설이에요. 그거 유대인들이다 이미 했던 겁니다. 이방 철학자들이 한 이야기에요. 그들이 말한 영과 사도바울의 영이 달라요. 그들은 육에 속하면서 육의 범위 안에서 육과 혼과 영을 주장하는 겁니다.
구원은 피지, 인간의 삼분설 이분설이, 신학이 아니에요. 피를 부음으로써 완성된 어린양의 피를, 어린양의 피, 유월절의 피를 부음으로써 우리가 용서받는 겁니다. ‘부먹’이에요, ‘부먹’이라니까! ‘찍먹’이 아니고. 그래서 놀라운 사실은요, 12절에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이렇게 되어 있다고요.
세상의 영이라는 게 어디에 나오느냐? 에베소서 2장에 보면 그게 바로 악마의 영을 말하는 겁니다. 인간이 악마의 영을 받았으니까 신학이라는 것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철학이라는 것을 만들어내고 과학이라는 것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철학, 신학, 과학, 그거 왜 만듭니까? 학문 왜 합니까? 이 육을 발전시키고, 문명화시키고, 나중에 죽어서 천국까지 들어갈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정립하기 위해서 신학이라든지 철학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에베소서 2장 1절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고린도후서 4장에도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이 세상 영, 이것은 곧 마귀의 영이에요. 복음을 가리는 영, 자꾸 예수님 보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래요. 내려와서 좋게좋게 이야기하자는 겁니다. 신학적으로 설교 은혜롭게 하재요. 설교 은혜롭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베드로의 발을 씻겨준 그 주님께서 베드로하고 빠이빠이, 해요. 빠이빠이, 하고 따로 홀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십니다.
이 말은, 베드로가 전체 다를 씻겨줬으면 좋겠다, 한 이 말은 뭐냐? 예수님의 손이라는 그 몸, 그 몸으로 나의 몸을 전체적으로 더듬어주면 더듬어진 흔적마다 죄씻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들의 망가진 육에서 기껏 나오는 한계가 그겁니다. 안수를 한다든지, 생수를 마신다든지 뭔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처방전, 조치를 취할 때 뭔가 나의 구원으로 확 와닿는 거예요. 확 그냥 와닿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생각하는 자체가 베드로가 뭘 모르느냐 하면, 내가 예수님 보고 죄 씻음, 깨끗하게 씻겨달라고 요구할 권한 자가 아니고 그럴 자격조차 없다는 것을 베드로가 몰랐던 겁니다. 이게 베드로가 망가진 점이에요. 나는 구원될 자격이 없다는 그 사실을 모른다는 그 점, 그러니까 인간은 죽고 난 뒤에 어떻게 되느냐, 하는데 인간은 죽음을 몰라요. 죽음은요, 주님만 알고 있어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여도 제대로 못 죽인다니까요? 칼로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도 그들이 생각하는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이 달라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부대에 간첩이 들어왔다 칩시다. 억지 스런 예지만 간첩이 들어왔다 치고, 간첩이 정보를 빼내서 지프를 몰고 탈출하다 들켰어요. 그래서 “잡아라!” 하니까 간첩이 지프를 몰고 정문을 향해서 그대로 돌진합니다.
정문에는 양쪽에 기둥이 세워져 있고 차량을 차단하기 위해서 그 중간에 쇠사슬을 걸어놓잖아요. 그런데 그 간첩이 쇠사슬을 향해서 지프를 몰고 그대로 돌진한 겁니다. 그러면 쇠사슬이 끊어지는 게 아니에요. 쇠사슬을 묶어놓았던 그 두 개의 기둥 그 뭉치 원래 있던 자리가 훅 빠지는 거예요. 쇠사슬은 안 끊어지고.
주님께서 이 세상을 돌진할 때 사람들 보기에는 예수님이 까불다가 십자가에서 정치범으로 죽었다, 이것만 보이지요. 주님께서는 그걸 보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통과함으로써 그동안 인간들에게 숨어서 인간을 뒤에서 조종했던 악마의 그 본래 인간에게 박혀 있던, 인간존재에 박혀 있던 악마의 자리까지 들통나게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주님의 작전이에요.
진짜 죽음을 아는 것은 악마예요. 악마가 그동안 자기 정체를 숨긴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이 뽑으려 하다가 잇몸까지 다 뽑혔다 그 말이에요. 잇몸까지. 에베소서 2장에서는 그러한 악마의 본거지, 악마의 본거지를 뜯어내면서 바로 2장 2절에서 이 공중권세 잡은 자속에 네가 있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에베소서 2장 9절에 보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따로 정해놓은 몸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그 몸을 몸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 몸을 영이라 해요. 영, 성도가 거울에 비추는 몸이 있잖아요. 그걸 몸이라 하지 않고 그걸 영이라 하는 거예요. 또는 그게 어려우면 그냥 성령 받은 몸, 영적 몸이라 하는 겁니다. 그게 아까 이야기한 고린도전서 2장에서 육에 속한 사람 따로 있고 영에 속한 사람 따로 있다는 그 말이 그 말이에요. 인간의 몸과 혼과 영에서 영의 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은 없어요.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실, 왜 예수님께서는 홀로 십자가에 죽으셔야 되는가? 그것은 이스라엘 속에 율법으로, 몸과 혼과 육으로 하는 그런 이방 민족 말고 이스라엘에는 특별히 율법적 신호가 이스라엘 신체에 주어졌습니다. 그것이 에베소서 2장 11절에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이 말이 상당히 어려운데 쉽게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할례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할례가 뭐냐 하면, 바로 인간의 피를 내는 방법이에요. 인간에게서 피가 나오면 죽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 죽음, 죽는 이유를 모르고 왜 죽는지, 어떤 죽음이 죽음인지 아무것도 몰라요. 율법이 와서 인간을 건드려줘야 인간은 죽음이라는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겁니다. 그 죽음을 체험하라고 인간에게 할례를 행하거든요.
출애굽기 4장에서는 할례를 행할 때 십보라가 모세보고 하는 이야기가 당신은 ‘피남편’이라 했어요. 이 피남편과 관련해서 이 피, 할례, 이 할례라는 율법이 어디를 주목하고 집중하느냐 하면, 남성의 생식기에 집중한 율법이에요. 다른 율법은 마음으로 혼으로 지키면 되는데 이 할례는 그런 것이 아니고 몸을 잘라버려요. 몸의 생식기의 일부를, 그것도 다른 것이 아니고 생식기의 일부를 잘라버립니다.
그게 하체와 관련되어 있는데 창세기 3장 7절에 보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왜 이게 치마냐, 이 말이지요. 머리 수건을 안 만들고, 왜 양말 안 만들고 하체에서 부끄러운 게 왜 나오느냐 하는 겁니다. 그 뒤에 이 율법은 인간의 하체를 주목하게 되어 있어요.
남자의 하체는 할례의 율법이라면 여자의 그 하체에 대해서는 월경으로 피의 근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20장 18절에 보면 “누구든지 경도하는 여인과 동침하여 그의 하체를 범하면 남자는 그 여인의 근원을 드러내었고 여인은 자기의 피 근원을 드러내었음인즉”
인간 육은 이렇게 망가졌다는 거예요. 남자도 망가졌고 여자도 망가졌고, 인간의 깨끗한 피가 아니고 더러운 피로 말미암아 인간은 근원적으로 인간 자체가 이미 죽음 속에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에게만 특별히 율법을 통해서 알려준 거예요. “살아봤자 너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너에게는 죽고 난 뒤에 어떻게 잘 될 것이라는 것은, 아예 그따위 생각은 처음부터 너한테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면 인간이 죽은 존재임을 알려주는, 그 알려주는 율법의 완성에서만 인간이 몰랐던 진짜 죽음이 그 안에 있는 거예요. 그것이 뭐냐? 인간의 피가 아니에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피를 말합니다. 그래서 양푼 가지고 어린양 제물의 피를 확 뿌려버리지요. 그러면 개인은 사라지고 그게 하나의 집단, ‘우리’가 돼요, 우리가. 우리가 되면서 그 피 중심으로 새로운 우리가 모이는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뭐가 되느냐 하면, 그게 성전이 됩니다, 성전.
성전이라는 것은 뭐냐? 박스 안에, 곽 안에 사람들 집어넣고 그 위에 피를 확 부어버리는 것이 성전이에요. 열왕기상 7장 21절 보면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이 두 기둥을 전의 낭실 앞에 세우되 우편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이라 하고 좌편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보아스라 하였으며”
‘야긴’이라는 뜻은 ‘거기 세우리라’ ‘보아스’라는 뜻은 ‘그에게 능력이 있다’ 성전은 없어야 돼요. 없는데, 성전은 없는데 하나님이 친히 성전을 만듭니다. 성전 만들 때 하나님이 친히 만들어요. 사람이 만든 게 아니고, 사람이 먼저 제안해서 만든 게 아니고 하나님이 친히 성전을 만들었다는 그 표식을 성전 안에 야긴과 보아스로 집어넣은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다윗의 자손으로 오는 거예요. 다윗, 성전 지으려고 제안한 것은 다윗이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에게 성전을 지으라고 하는 것은 그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 하나님과 아들 사이, 메시아와 아버지 사이의 관계를 미리 다윗과 솔로몬 관계로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걸 쉽게 말하면 사무엘하 7장 12, 13절에 보면, 내가 친히 아들을 만들 것인데 그 아들이 바로 성전이 될 것이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그 아들은 성전이 성전 되기 위해서 그 사람 안에 진짜 하나님이 거하시는 공통의 처소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뭐가 필요한가? 죄인들이 필요한 거예요. 그 죄인들은 하나님이 성전 짓는 자원입니다. 재료고 원료가 돼요. 여러분이 석탄 캐는 것 알잖아요. 석탄은요, 식물이 노아의 홍수 시기에 모든 지질이 강한 압축 때문에 단시간에 식물이 썩어서 탄소성분이 압축된 그것이 석탄이에요. 그러면 석유는 뭐냐? 식물 말고 동물이 거기에 끼어들면 그것이 석유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석유와 석탄을 캐낸다는 것은 죽은 것을 캐내요, 죽은 것을. 어떤 개그맨이 이런 개그를 했어요. 우리나라 성씨 가운데 제일 많은 성씨는 사람들은 김 씨, 이 씨, 최 씨, 이러거든요. 그게 아니고 그 개그맨이 하는 말이 고씨랍니다. 왜? 고(故) 아무개, 고(故) 아무개. 웃지도 않고……, 그냥 넘어갑시다. 고씨가 제일 많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의 어줍잖은 죽음, 죽음도 모르는 죽음, 이 죽음이 모여서 원료가 되고 재료가 되고 자원이 되어서 진짜 진짜 죽음은 하나님만이 죽어야 죽을 수 있는데 그래야 악마, 악마의 본바탕이 다 들통나는 거예요. 이것은 영적 전쟁이에요.
그래서 그 성전의 내막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 핵심은 히브리서 9장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히브리서 9장 19-22절까지 보면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이것이 바로 거룩이고 이것이 정결함이에요. 혼이 되었든 육이 되었든 영을 말하든 네가 어떻게 인간을 묘사하고, 그 시대의 어떤 인간의 개념을 동원해도 상관없이 그 자체는 더러운 것이고 중요한 것은, 진짜 하나님이 원하는 백성은 인간의 몸과 혼과 영의 개념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오직 피에서부터 나오는 거예요. 피로부터 새로운 백성이 나오는 거예요, 피로부터. 주님의 피로부터, 우리의 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피로부터.
온전한 죽음에서 온전한 생명이 나오는 겁니다. 온전한 타락에서 온전한 구원이 나와요. 타락을 비켜간다고 구원이 되는 게 아닙니다. 그 타락에 참여해야 돼요. 하나의 자원으로서, 재료로서. 그럴 때 ‘아, 우리는 구원받을 자격조차 없었구나’를 깨닫게 되는 겁니다.
레위기 1장에 보면 그 제사 지낼 때가 나오거든요. 그 제사장이 하는 일이 무조건 피만 내요. 피를 내서 제단이고 성막 여기저기 막 뿌립니다. 그러니까 성막, 성전 자체가 온 천지가 피범벅이에요, 피범벅. 혼이고 영이고 육이고 전부 다 피범벅. “이 망가진 인간아! 엉터리 이 가짜 야!” 진짜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이지 나의 죽음은 죽음도 아닙니다. 죽어도 죽음을 몰라요, 인간은. 왜? 마귀를 모르니까.
율법이라는 것 그리고 인간의 몸, 그러니까 인간의 몸조차도 율법이 말하는 그 희생의 피를 증거하기 위해서 남자도 이용하고 여자도 이용하는 그 역사가 바로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에베소서 2장에 보면, 이 피에 대해서 1장 보시고 2장을 보면 1장 7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죄사함은 예수님의 피입니다. 우리의 혼으로 만든 지식, 정신 아닙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2장 13절에,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되어 있는 겁니다. 몸과 영혼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피로 하나에요. 서로가 피를 보는 거예요. 그럴 때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 찾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의 피 안에 들어온, 피로 뿌림을 당한, ‘찍먹’이 아니고 ‘부먹’당한, 피의 소스로 완전히 범벅이 되어버린 사람, 그 유월절 피를 보고 죄를, 우리를 넘어가는 거예요. 심판의 하나님이. 용서를 받는 거예요. 뭐 어려워요? 쉽잖아요!
나를 보지 않고 피만 바라보는 거예요. 나의 죽음을 생각하지 말고 주님의 죽음만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는 나의 죽음을 걱정할 자격도 없어요. 왜? 쓰레기니까. 쓰레기가 쓰레기 되는데 그거 뭘 걱정해요? 그런데 세상의 인간들은 육에서 혼으로, 영으로 자꾸 뭔가 발전을 기대하고 성공을 기대하니까 이 세상이 그리 만만치 않거든요.
이 세상 인간은 마치 압력밥솥에서 살아가요. 계속해서 뭔가 밥은 되는데 압력이 더 세져요. 살아보려고, 살아보려고, 사는 게 뭔지도 모르고, 죽는 게 뭔지도 모르고 그냥 살면 되는지 알고 살아보려고 하니까 스트레스 받잖아요. 그렇게 이 몸이 괴로울 때 혼도 괴로우니까, 혼이 괴로우니까 영적으로 깨끗하게 하자, 해서 뭘 집어넣는가? 몸에다가 술을 집어넣어요. 술을 퍼먹는다고요.
술 먹든지, 담배 피우든지, 점 치든지, 사주보든지. 영적인 세계의 희열을 미리 보려고 하는 거예요. 직장에서 세상에서 당해놓고 이 잔인하기 짝이 없는 세상아, 이런 식으로. 뭐 세상이 잔인해? 너도 똑같아! 뭘 잔인해! 너부터 잔인해요.
술과 담배를 하고 점을 친다는 이것이 뭐냐? 성경에서 이걸 교만이라 해요. 교만하고 싶어서 허세를 부리는 거예요. 청소년들이 술먹 고 담배 피우는 것은 다 허세 부리는 겁니다.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에베소서 2장 4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큰! 사랑으로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사랑이라 하는 것은 그 앞에서 우리 자체가 아무 무의미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 사랑이, 그 십자가 피 흘린 그 사랑이 베드로를 찾아오거든요. 요한복음 13장 1절 보게 되면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하지만 단 한 사람은 아니에요. 가룟유다 빼놓고 자기 택한 사람은 끝까지 사랑해요. 이 사랑을 받은 사람은 아무리 내 몸 내 몸 위주라 해서 그 사랑을 “지우고 버리고 비워도 어느새 가득 차 버린 내 사랑……” 이게 임창정이 불렀던 <내가 저지른 사랑>이라는 노래에요. 줄여서 ‘내저사랑’이라는 노래인데 거기 보면 “지우고 버리고 비워도 어느 내 가득 차 버린 내 사랑” 아무리 ‘나 주님 사랑 안 해’ 아무리 떨어져도 또 찾아오는 거예요. 또 찾아와요.
이 지긋지긋한 성령 덩어리야! ‘성령 덩어리’에요. 우리는, 성도는 ‘성령 덩어리’에요 오순절에 성령이 왔거든요. 성령으로 이제는 육의 사람이 아니라 영의 사람이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랑은 찾아왔기 때문에 내 쪽에서 거부할 수가 없어요. 마치 폭설이, 홋카이도에 4미터 폭설이 온 것처럼.
서울강의에서 “계시의 폭설”이라 했습니다. 그냥 폭설이 온 거예요. 인간들은 기존의 허세와 허망한 것, 자기의 교만과 허풍, 남한테 육으로 행세하려고 으스대면서 주님의 거저 주신 사랑을 계속 밀어내지요. 그러나 지우고 버리고 비워도 어느새 가득 차 버린 이 사랑, 그때 우리는 마지막에 이런 고백을 해야 돼요. “모든 것이 나 때문인데 왜 네가 더 힘들어? 네가 왜 내 마음을 위로해?” 집에 가서 내가 저지른 사랑 한번 들어보세요.
<내가 저지른 사랑, 임창정>
떠나거든 내 소식이 들려오면
이제는 모른다고 해줘
언제나 내 맘속에서
커져만 갔던 너를
조금씩 나도 지우려 해
사랑해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늘 미안하다고만 했던 나
잊고 잊혀지고 지우고
처음 만난 그때가 그리워진 사람
다시 못 올 몇 번의 그 계절
떠나버린 너의 모습을
지우고 버리고 비워도
어느 새 가득 차버린 내사랑
안 된다고 사랑하면 안 된다고
하지만 우린 함께했지
언제나 내 마음이라
사랑하던 맘이라
그리 아파할 줄 몰랐어
미안해 라고 안아주고 싶지만
점이 돼버린 그 뒷모습
잊고 잊혀지고 지우고
처음 만난 그때가
그리워진 사람
다시 못 올 몇 번의 그 계절
떠나버린 너의 모습을
지우고 버리고 비워도
어느 새 가득 차버린 내사랑
모든 게 나 때문인데
왜 네가 더 힘들어
네가 왜 내 맘을 위로해
잊고 잊혀지고 지우고
처음 만난 그때가 그리워진 사람
다시 못 올 몇 번의 그 계절
떠나버린 너의 모습을
지우고 버리고 비워도
어느 새 가득 차버린 내사랑
“사랑해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늘 미안하다고만 했던 나, 잊고 잊혀지고 지우고……” 이런 식으로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사랑에 대해서 우리는 본성 때문에 거부하더라도 감사할 이야기는,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주님 자신을 위한 죄 씻음이고 우리는 자기 사랑을 증거 하기 위한 자원이 되기 때문에 우리를 떠나지 않는 그 점에 대해서 영원까지 감사해야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신학 정리하고 성경 지식으로 구원받고자 시도했던 그 어리석음, 그게 마귀 생각이었던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이제는 밀쳐내도 밀리지 않고 떠나라 해도 떠나지 않는 주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서 육의 사람이었던 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성령의 사람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