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약정파기와 새 언약

아빠와 함께 2022. 3. 13. 10:4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또 이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 하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니”(렘21;8)

신약 때 성도도 똑같은 기능과 역할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개여울이라 하는 것은 작은 시내에요, 졸졸 물이 흘러오다가 바위 하나 돌출되어 있으면 물이 둘로 갈라져요. 바위 하나 때문에 물이 양쪽으로 돌아가죠.
완료가 된 성령이 왔다는 말은 쉽게 말해서 성령이 우리 몸을 둘둘 감았다고 칩시다. 둘둘 감아놓은 그 자체가 완성이 되는 겁니다. 완성했기 때문에 인간에게 찾아올 수 있는 거예요.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이미 죽은 자가 되고요. 언약의 완성 내용이, 우리는 이미 죽은 자인데 동그라미 종이 심에다가 성령의 두루마리로 둘둘 감아버립니다. 그러면 이 감긴 내용은 누구 공로냐 하면 여러분 아시다시피 예수님의 공과, 예수님의 공적, 업적입니다.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해서 생명으로 감아버리면 이 안에서, 그것을 ‘성령 안’이라 하는데 ‘성령 안’과 같은 말이  ‘십자가 안’,  ‘예수 안’, 이미 우리는 여기서 죽은 자이기 때문에 우리 고유의 목적이나 이런 것은 안 통합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둘둘 감아놨으니까. 주님의 하신 일, 주님이 다 이루신 일이 우리 몸을 둘둘 감는 거예요.
우리 할 일은 뭐냐. 바로 이거에요. 우리가 개여울의 하나의 돌출된 돌처럼 있으면 내려왔던 모든 것은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로 나뉘어지는 겁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25장에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라는 그 말씀 나오죠. 성령 받은 성도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하나님이 택한 자를 네가 어떤 안목으로 어떤 인식을 가지고 보느냐에 따라서 사망과 생명으로 나뉘어지는 겁니다.
십자가의 사건에 휘말린 그 사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살아있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이 이 성도를 보고 뭐라하면 성도는 십자가 사건에 관해서 고백하면 돼요. 십자가 사건에서 본인은 죽은 자가 되죠. 죽었다는 것은 너의 행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 쪽에서는 일체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예요. 받지도 않을뿐더러 아예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예요.

내가 만드는 말, 언어죠, 말하는 것, 내가 만드는 말과 하나님이 만든 말과의 차이점은?  

내가 만들어내면 이 안에 나의 역할, 나의 장점, 내가 살아야 될 이유 이런 것들이 여기 섞여서 막 나오는 거예요. 말씀이 진리인데 말씀 외에 나도 진리라고 우길 수 있는 근거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말씀 외에 진리라고 우길 수 있는 근거는 없죠. 사망의 길과 생명의 길을 가름하는 그러한 갈림길이 될 수 없죠. 그런데 사람들은 무심코 사람한테 이야기할 때에 주님이 만드신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내가 만든 이야기를 계속 내놓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냐”(렘23;18)
“참석했어, 안 했어?” “못했어요.” “못했는데 네가 왜 옳다 아니다를 결정하는데?” 이렇게 되겠죠.
성도도 말을 하죠. 말을 하는데 성도의 말은 개여울의 돌멩이처럼 두 가지가 나와요. 이게 사망의 길이고 이게 생명의 길이다. 두 가지가 나와요, 두 가지가. ‘하나님께서 일을 할 때 사망의 길과 생명의 길 둘로 나누는데 어떻게 예수님의 피가 사망의 길과 생명의 길을 결정짓는 최종 것이 되느냐’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렘31;22)  
 
하나님이 인간하고 의논하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인간에게 이스라엘에게 줬던 그 언약을 전부다 다 파기시켜버립니다.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죠.왜 그런겁니까? 이게 복음의 비밀입니다.(렘33;19-26)
하나님의 언약궤 안에 상자가 있는데 상자 안에 들어가 있는 돌판은 원래 깨진 돌판이 아니고깨진 돌판을 대신한 돌판이거든요.‘대신’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에 대해서 대신하는 거예요. 사람에 대해서 대신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람 안에 집어넣고 그 사람을 데려가는 것이 아니고 사람 속에 하나님이 끼어들어서 이 하나님마저 사람과 함께 죽게 만들어요. 죽게 만들어서 죽은 하나님이 하나님이 하는 일을 대신해서 도로 끄집어내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언약궤 상자가 길이 2.5규빗, 너비 1.5규빗, 높이 1.5규빗 이렇게 있는데 이 안에 돌판이 있다했죠. 돌판은 깨진 돌판을 대신한 거죠. 그리고 언약궤 위에 뭐를 부어요? 피를 바른다고요, 피. 희생제물의 피를 발라버려요. 그러면 이 피가 흐를 수밖에 없는 내력을 함유한 피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 속에 들어와서 지내던 그 이야기, 스토리에서 뭐가 발생된다는 말입니까? 피가 발생되는 거예요, 피가. 그런데 그 피가 되려면 이건 사단난 거잖아요. 이게 죽음이잖아요.
피가 무엇을 겨냥하느냐 하면 상자 위에, 언약궤 위에 피를 뿌려요. 피는 뚜껑 열고 들어가는 게 아니고 뚜껑 위에 있다고요. 그럼 피는 이 안에 하나님의 언약이 왔는데 깨어져버린 그 이야기, 그 내력과 관련되어있는 피가 되는 겁니다.
‘언약이 깨어졌다’가 현실 세계에서 나타나는 표식, 표시는 피로서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피는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언약이 좌절되었다. 언약과 언약 사이에 좌절, 다른 말로 하면 단절. 끊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약이 끊어진 거예요, 인간세계와. 끊어졌기 때문에 사망의 길과 생명의 길이라 하는 것은 인간에게 사치입니다. 인간의 머리에서 나올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피는 무엇과 싸우겠습니까? 인간으로 출발한 사망의 길, 생명의 길의 기준과 싸우는 거예요.
왜? 피는 하나님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생명이라는 게 없습니다. 언약이 깨어졌잖아요. 박살나서 새로 만든 거예요. 예수님의 피를 보면 알 수 있어요. 단절이에요. 예수 피 믿으면 내가 구원받는다는 이게 말이 안 되는 소리에요. 인간에게는 구원이라는 게 없어요. 따라서 성도는 개여울의 돌로서 성령으로 두루마리처럼 감긴 성도는 자기 내부에서 이 전쟁이 일어나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해서 나는 사망의 길로 가지 않고 생명의 길로 갈래.’하는 그 나와 싸워야 될 성도로서의 나와 싸우기 위해서 주께서는 성령을 둘둘 감아놓은 거예요. 평화 시에는 의미라는 게 없습니다. 평화  자체가 한시적이고 임시적이에요. 언제 의미가 나타나느냐. 바로 전쟁 때에요, 전쟁 때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아는 거예요. 평화로울 때는 몰라요. 그래서 주님은 날마다 성도를 통해서 전쟁을 벌이는 겁니다. 성도에게 평화란 없습니다. 내가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고 불화를 일으킨다. 의미는 평화 때가 아니고 전쟁 때 의미가 굳어지는 겁니다. 아, 이런 뜻이구나. 단란하게 평화롭게 산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전쟁의 지속 또는 전쟁의 반복 속에서 십자가의 의미는 계속 나옵니다. 세상에 대한 전쟁이죠. 인간의 내부적인 전쟁인데 내부적인 전쟁의 구성은 이렇게 하면 알기 쉬워요.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죽어서 천국 가겠습니까?’ 이것하고 ‘내가 세상을 어떻게 설명해야합니까?’ 자, 이 두 문장의 차이점을 한번 보세요.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겠습니까?’ 하는 것은 자기 구원받을 것만 챙기고 돌아서면 그만이겠죠. 그럼 자기 안에 평화가 오겠죠. 그런데 ‘내가 세상을 어떻게 설명해야합니까?’ 하는 이 말은 세상은 누구에 의해 돌아간다는 거예요?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서 돌아가죠. 그렇죠? 세상은 하나님이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성격이 이 세상에 그대로 있단 말이죠. 그걸 설명하는 거예요. 이걸 설명해버리면 내 생각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 챙기기를 할 수 있어요, 없어요? 못하죠.

세상은 계속 물결치고 있잖아요. 변화되고 있잖아요. 변화될 때마다그때그때 설명해야 될 임무와 역할을 우리로 하여금 하게 하는 겁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전쟁 중이니까. 그래야 말씀의 심층까지 내려갈 수 있어요.  ‘개인과 전체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습니까?’ 우리 평소의 관심사, 남한테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하고 이야기할 때 나오는 그 내용하고 정말 상당히 거리가 참 멀다는 것을 내가 느낍니다. 성령이 둘둘 감아야 되는데 성령이 둘둘 감은 게 아니고 자신의 과거 기억이 둘둘 감겨 있어요. 과거의 기억이. 돈에 종속되어있으면서도 돈 없는 천국을 간다? 그게 앞뒤가 안 맞죠. 나 돈 있다, 그거. 나 아이고 돈 없다. 생각이 돈, 자본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이걸 가지고 양적(量的)이라고 해요. 인간은 양(quantity)의 구조 속에 놓여 있는 거예요. 모세가 돌판을 다시 만든 것 기억납니까? 너희들은 계약 파기자라고 하는 것은 그 계약 파기한 돌판의 내용을 그들에게 알려줘서 아, 우리가 파기되어 마땅하구나, 이렇게 아는 게 아니고 그들이 평소에 하던 그 본색, 자기 마음에서 나온 행동대로 여호와를 위해서 금가락지 뽑아서 소를 만들어놨는데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그게 바로 계약 파기라는 거예요. 진짜 어렵죠. 죄가 뭐냐 하면 일상의 일이 죄가 된다는 거예요, 일상의 일이! 따라서 예레미야 31장에 나오는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라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만 해당되느냐 하면 계약 파기를 경험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에요, 계약 파기를 경험한 사람에게만. 나는 인간도 아니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만 해당 돼요, 이게. 그냥 일상의 일이 죄라니까요. 일상의 일이 죄에요. 그래서 그들은 죄에서 일을 한 거예요. 죄=일상의 일, 이렇게 할 수도 있지만 equal(=) 하지 말고 화살표(⇒)로 죄⇒일상의 일이라 하면 죄가 확대되니까 일상의 일이 되는 거예요.
자, 개인과 전체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여기에 뭘 집어넣어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언약을 파기함으로 말미암아 개인이 전체로 확장되는 그 원리원칙은 오직 죄밖에 없는 거예요. 인간은 죄로 한통속이 되는 겁니다. 죄로 한통속이 되는 거예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31;31-33)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2)  

 

인간은 죄를 몰라요.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은 죄에 대해서 죽은 자가 먼저 만들어져야 그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죽어 마땅하구나, 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겁니다. 한번 적어볼게요. ‘이미 죽은 자를 살려서 생전에 해야 될 일을 주께서 하게 하신다’ 이게 죄에 대해서 죽은 자에요. 이미 죽은 자. 인간은 계약 파기로 인해 이미 죽었어요. 살아있는 것은 이미 죽은 자를 생전에 해야 될 일을 위해서 주께서 하게 하시기 위해 살려준 거예요. 이미 죽은 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주께서 일방적으로 만들어주신 것이라 이 말입니다. 뭐 확인하라고? 이미 죽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걸 한꺼번에 한 문장으로 줄여서 하게 되면 “죄에 대해서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가 되는 거예요.
죄에 대해서 죽은 우리가, 일상의 하는 모든 일이 죄라고 하는 우리가 어떻게 따로 내가 나를 살려내야지, 하는 그 짓을 할 수 있느냐는 말이에요, 이미 죽었는데. ‘주님이 살게 했다’만 나와야지, ‘주님이 살게 해준 것 믿어서 나는 살아야지’ 이러한 통밥, 이런 요령을 부리지 말라 이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계속 주께서 살려주시는 거예요, 계속.
우리의 모든 일과는요, 주께서 그렇게 조성해주신 거예요. 만들어 주신 거라고, 그게. 그래야 계약 파기, 아까 봤죠, 예레미야, 계약 파기되고 다시 새 계약을 만들어서 새 계약에 준해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자기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내는데 그 백성의 특징이 그 죄에 대해서 기억치 아니하는 거예요, 그 죄에 대해서. 왜냐하면 그 계약 안에 예수님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아예 인간 속에 하나님이 들어가시는 거예요. 사망의 길과 생명의 길의 갈림길이 되는 그 표징, 기호, 표증을 그 사람 속에다가 집어넣는 겁니다. 집어넣는 것이 뭐냐? 새 언약의 완성 곧 한 자로 하면 ‘피’가 돼요. 피를 집어넣어서 피를 집어넣었다는 그 조건 때문에 그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새 언약의 계약자가 되는 겁니다. 그 요소가 있기 때문에. 주님이 죽었죠. 돌판 깨졌죠. 돌판 깨진 것을 누가 다시 새롭게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었죠. 십자가 죽었죠. 부활하신 주님이 예레미야 31장 33절의 말씀처럼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줘서 이 성령이 오게 되면 껍데기에 있는 우리는 옛날 계약에 의하면 이건 완전히 죽어 마땅하고 그 안에 새 언약, 이게 새 언약이에요, 31절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뭘 세운다 했습니까? 새 언약을 세워서 집어넣어버리면 우리는 어딜 가도 뭘 해도 어디 먼 나라가도 우린 새 언약의 사람이어서 그 현장에서 무슨 역할을 합니까? 그냥 개여울의 돌부리 역할, 넌 사망의 길로 가라. 너는 생명의 길로 가거라. 우리의 역할은 그거에요, 그냥.

‘하나님께서 일을 할 때 사망의 길과 생명의 길 둘로 나누는데 어떻게 예수님의 피가 사망의 길과 생명의 길을 결정짓는 최종 것이 되느냐’ 사망의 길이 뭐냐. 바로 선악체계가 유지되는 거죠. 생명의 길은선악체계가 부정되고 생명나무의 거저 주시는 거죠. 그래서 생명의 길은 새 언약이 되겠습니다, 새 언약. 예레미야 31장 31절, “내가 새 언약을 세우리라” 새 언약이라는 말은 ‘언약(약정) 파기’가 포함되죠. 약정 파기가 되면서 무엇까지 파기하느냐 하면 날, 밤과 낮이 교체되는 것도 파기되고 자연에 있는 모든 질서도 전부다 파기된다 했죠. 33장에 나오는 말씀. 그리고 다윗 언약도 전부다 파기되어버리고. 그렇게 될 때 반드시 성도는 이 사망의 길을 거쳐서 생명의 길로, 약정 파기를 거쳐서 생명의 길 속에 있음을 깨닫는 겁니다.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이야기할 때 ‘너 죄가 뭐냐?’ 하면 이 죄가 선악체계에서 나온 죄 같으면 아직 죄를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의 죽음 사건, 피 사건, 하나님을 죽게 한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스스로 돌판을 깨게 하시고 그다음 언약궤 상자 위에 피를 냈죠. 그래서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모세가 율법서를 언급하고 율법서에 뭐를 발라요? 율법서를 그냥 언급하면 안돼요. 그럼 인간이 그 율법서를 지키려하기 때문에 피를 발라버리고 이쪽에 양푼 반에 있는 피를 백성들에게 뿌린다 했죠, 그러면 그 백성들과 율법 사이에 연결고리는 뭐밖에 없다고 했습니까? 오직 피로만 연결되어 있어요. 피 외에는 다른 걸로 연결되지 않아요. 그 피는 흠 없는 희생물이 흘렸던 피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왜 흠 없느냐? 한번 적어볼게요. ‘흠 없는 것은 이 땅에서 이 세상에서 죽음으로 끝나고’ 흠 없는 것이 죽음으로 끝난다는 말은 ‘흠 있는 것들은 이 흠 없는 것을 죽이는 것으로 자기의 본색을 다 드러내고.’

여기는 약속의 땅이고 다른 쪽은 바벨론 땅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땅에 포로 잡혀갔다가 다시 돌아와요, 이스하엘 백성이 움직이는 것에 따라서 여기 주변에 관련되어 있는 모든 이방나라의 운명이 결정돼요. 이스라엘 민족들이 바벨론에 포로 잡혀서 처참하게 망가지고 다시 돌아오면서 주변에 걸쳐있는 나라들의 운명이 결정되고 영향이 다 있는 겁니다. 운명이 결정되고 영향이 다 있는 거예요. 그러니 이 세상에 중심이 있다. 핵심이 있다는 거예요. 그 핵심이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이 옛 언약에서 어떻게 옛 언약의 약정이 파기되고 새 언약이 이루어지는가, 그 경로가 인류사입니다. 인류의 역사에요. 주변에 있는 모든 이방민족들은 거기에 따라서 전부다 작살나고 다 날라가고 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아까 첫째 시간에 했던 물음을 다시 한번 적어볼게요. 1번-주여, 내게 필요한 것을 주시옵소서, 이러한 관심사와 2번-내가 세상을 어떻게 설명할까요? 이 첫째 질문, 주여 내게 필요한 것을 주옵소서, 2번은 내가 세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됩니까? 첫 번째가 약정이 파기되기 전에 이스라엘이 하는 모습이라면 나중에 새 언약에 속한 이스라엘은 세상을 설명하는 핵심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그 새 언약 속의 이스라엘을 뭐라고 합니까? 에베소서 1장에서. 새 언약, 예수님의 피죠, 새 언약의 이스라엘을 에베소서에서 두 자로 뭐라 하죠? 이걸 가지고 에베소서에서는 ‘교회’라고 하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도가 되겠죠.

이걸 달리 한번 표현할게요, 췌장암 걸려서 6개월 남았거든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6개월 뒤에 죽는다, 이게 아까 1번 차원이에요. 그런데 이미 성도는 죽었잖아요. 이미 죽었고 주께서 계속 살려주잖아요. 그러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아휴 6개월 뒤에 나는 정말 죽는구나’가 아니라 ‘죽는 날 앞에 6개월 남았다’. 이상하네. 왜 6개월이나 남았지?  
어제는 어제부로 끝나야 되는데 오늘도 왜 살아있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어제부로 끝나도 괜찮은데...... 그 이유는 죄를 더 알기 위해서 더 살게 하시는 거예요, 죄를 더 알기 위해서. 사람이 죄를 더 알아야 내가 끄집어내는 말보다 나를 죄인 되게 하신 주님의 말이 흘러나오니까 하나님의 말이 흘러나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애굽 나라에서 누가 힘들었고 누가 괴로웠습니까? 남자 아기는 다 죽여 버려라. 그 처벌대상이 누구였죠? 히브리인들이죠. 히브리인들이 언약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바로 왕한테 설움 받고 학대를 받았잖아요. 그렇죠? 그렇다면 이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가면서 이스라엘에게 재앙이 떨어졌다는 말은 이 안에 누가 품어져있다는 말입니까? 누가 품어져있어요? 바로 진짜 새로운 언약에 준해서 살아야 될 백성이, 진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로 인하여 애굽 나라한테 학대받듯이 학대 받고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회의에 참석도 안한 거짓 선지자들이 그런 짓한 거예요, 거짓 선지자들이. 자, 그다음에 바벨론에서 다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올 때 재앙은 어디 떨어지겠습니까? 바벨론이죠.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리라”(렘25;12)

이 칠십년이 무슨 기간이냐 하면 바벨론 나라가 망하는 기간이에요. 망하는 기간인데 여러분들이 딱 생각할 때 칠십년이 무슨 기간이냐?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갔다가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는 그 기간이 칠십년이죠. 동일하게 칠십년이라고요. 한쪽은 칠십년 만에 돌아오고 한쪽은 이스라엘 건드렸다고 바벨론이 칠십년 후에 바사 나라, 페르시아 나라에 망합니다. 그러니까 이방 나라의 운명이 어디에 종속되어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이스라엘의 경로와 관련되어 있어요. 이것은 신약 시대에 인류사, 신약 시대 모든 이방나라, 현재 나라의 운명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일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떠나가시는 그 코스에 맞춰서 그 리듬에 맞춰서 그들의 운명은 끝장나는 거예요.
주님께서 성령의 덩어리, 성령의 두루마리로 쌌던 성도를 이 땅에 보냄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운명이 그 성도에 대한 태도에 따라서 결정 나게 하셨습니다. 이 소자, 제자, 의인, 선지자 그게 너희들이 천국 가는 여행사라는 거예요. 여행사 직원이라는 겁니다. 그 안에 주님이 들어있거든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하신 사건을 성령을 통해서 주게 되면 그 성령이 움직임에 따라서 각 하나님의 성도는 같이 움직이죠. 그렇게 되면 성도 안에 두 가지 지역이 있어요. 여기는 약속의 땅, 다른 한쪽은 바벨론이 있어서 성도 안에 주님께서 성령께서 예레미야의 말씀을 약속의 땅에서부터 바벨론으로 옮기고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고 또 옮기고 돌아오고 이걸 매일같이 매일 살아있는 삶을 통해서 아침마다 저녁마다 늘 반복시키는 겁니다. 반복하게 되면 성도는 잘했나 못했나가 아닙니다. 다시 한 번 볼까요? 사망의 길이 있고 생명의 길이 있는데 성도에게 사망의 길은 선악체계라 했죠,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생명의 길은 거저 사하여 주시고 더 놀라운 사실은 죄를 기억치 않는다. 이 기억치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요. ‘대신’의 작업, 업무, 업적, 성과를 드러내기 위해서 기억을 못하는 거예요.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는 거예요. 대신했음만 드러내요. 네 죄에 대해서 내가 대신 가져갔다는 것만 기억하기 위해서 네 죄에 대해서 다그치지를 않아요. 선악체계는요, 자신의 지은 죄를 자기가 잊질 못해요. 생명체계는 기억치 아니해요. 대신 가져갔으니까. 성도 안에서 약속의 땅과 바벨론을 오가는 것을 반복하면서 나의 착함과 의로움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죄 지었는데 용서받았어, 이게 아니라 언약과 언약의 이동이에요. 옛날의 계약, 약정은 파기되었다. 이것은 우리보고 물어보지도 않았어요. 그냥 일방적으로 파기시킨 거예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8)

여러분들이 성령의 두루마리처럼 성령으로 뒤엉켜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선악체제, ‘나는 이제 말씀대로 바르게 살아서 주께 영광을 돌려야지.’ 이런 선악체계로 완전 중무장되어있는 사람인지를 이 6장 8절만 봐도 대번 티가 나게 되어있어요. 이 6장 8절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왔죠. 이미 우리는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죽은 자. 6장 8절이 들어오면 “영생을 거두리라”에 우리가 참여하게 되는 거예요. 영생을 거두는 것은 우리 일입니까, 주의 일입니까, 이게 주의 일이 되죠. 쉽게 말해서 남의 일에 우리가 끼어든 게 돼요. 성령 거두는 일에. 그래서 어떤 것도 성령과 무관한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성령 받은 사람들은 다 아는 거예요, 성령 받은 사람은.  항상 성령의 일은 뒤돌아보면서 알 수 있어요. 소급해서 이해하는 거예요. 소급해서. 그런데 선악체제에 있는 사람은 이 말씀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신부될까? 필리핀 선교를 위해서 일할까? 교회에 충성 봉사할까? 이 사람은 뭘 구분합니까? 육의 일과 성령의 일을 자기가 임의로 구분하죠. 자기가 임의로 구분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첫째 시간, 둘째 시간에 공부한 것은 뭐냐. 구분을 누가 할 수 있어요? 이게 육인지 성령인지 구분을 어떻게 하느냐? 새로운 계약이냐, 아니면 옛날 계약이냐에 따라서 구분하는 거예요. 새 계약은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왔다니까요.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고 돌아보면서 죄 아닌 것이 없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식으로 죄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되죠.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은 미리 앞에서 아는 것이 아니고 소급해서 안다니까요. 그게 뭐냐? 세 자로 ‘막 산다’가 되는 거예요, 막 산다. 막 살고 있다, 가 아니고 막 살아온 게 돼요. 모든 게 막 살아온 거예요.

율법은 그 자체로서 완성을 향하여 진척을 보이는 거예요. 완성을 향하여. 율법대로 해서 벌 받았으니까. 저주 받았으니까. 비록 이스라엘은 저주 받았지만 ‘율법은 생생하게 살아있다’ 가 증명되었죠. 그 율법이 바벨론으로 갔다가 약속의 땅 이스라엘로 들어오는 거예요. 70년 만에 다시 돌아온다 했죠. 히브리서 10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런 얘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신 그들과 함께 하셔서 가고 옴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저주를 받았죠.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받을 재앙을 대신 다 받은 것으로 여겨요. 모든 재앙을 다 받은 걸로 여깁니다. 그렇다면 옛 언약에서 새 언약, 파기된 약정에서 새로운 약정으로 가면서 여기서 무엇이 형성되어야 하느냐 하면 죄에 대한 처벌이 다 완료된 바탕 위에 새 언약이 세워진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 수가 있죠,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재앙을 받아서 바벨론에 갔잖아요. 그러면 약속의 땅의 입장에서 여기 약속의 백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이 무대는 비어있어요, 지금. 주인공이고 조연이고 텅텅 비어있어요. 빈 무대입니다. 이걸 가지고 70년 동안 약속의 땅이 안식한다고 해요. 쉰다. 나가라, 그런데 인간들이 70년 만에 다시 돌아오잖아요. 다시 돌아올 때 전에 나갔던 이유가 뭐냐. 율법대로 못 지켜서 나갔잖아요. 그럼 다시 돌아왔다면 율법대로 지킬 수 있는 민족이 들어와야 이 무대장치의 취지가 살아난다 이 말이죠, 무대장치가. 하나님은 언약 중심이니까 언약에 합당한...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렘31;22)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거룩이고 이 나왔던 인간은 거룩하지 못하고. 이 나왔던 인간은 죄 지어서 나갔으니까 그다음에 올 때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죄가 없는 인간으로 되돌아와야 되거든요. 그러면 여기에 들어올 때 새 언약, 새로운 언약이 있는데 새 언약은 죄를 어떻게 한다고 했습니까? 죄를 다시는 기억치 아니하는 거예요. 율법대로 반드시 재앙을 받아야 돼요. 처벌을 받아야 돼요. 그 처벌에 대해 돌아오는 새 언약 안에 네 모든 처벌은 다 받았다는 내용이 함유된 채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와야 비로소 그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복을 받는 복된 백성이 되는 겁니다. 돌아올 때 약정이 깨어졌기 때문에 백성이 없으므로 모두 죽은 자가 돼요, 약속의 땅이 다 비어있기 때문에. 따라서 다시 이 무대를 채우려면 죽은 자는 못 들어와요. 죽은 자는 계약이 끝났잖아요. 그러면 새 언약의 주인공으로서 이 빈 무대를 채워야 될 분이 있어야 된다 이 말이죠. “패역한 딸아” 여성이죠, 남성이 아니고.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그러면 남자가 창조되었습니까, 여자가 창조되었습니까? 아니면 남자, 여자 다 창조되는 거예요? 어느 쪽입니까? 남자, 여자 다 창조되어야죠. 배우 새로 뽑는 거예요, 이 무대 배우를 새로 뽑는 거죠. 이 세상의 모든 배우들은 여자가 아니고 남자에요. 남자에 속한다고요. 여자라 하는 것은 남자 없이 등장한 여자에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 그거라 이 말이죠. 여자의 자손이에요.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오직 한 사람이 그 계약을 지키는 거예요. 그러면 로마서 5장에 의해서. 우리가 원수 되게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제물 있잖아요. 번제와 속죄제할 때 제물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고 제물을 죽이는 자도 있어야 되거든요. 제물이 제물 되기 위해서는 그만한 죄, 일상이 죄가 되는 우리가 죄인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겁니다. 이 죄인의 자리에 주께서 나 때문에 죽은, 죄인 때문에 죽은 이 피를 우리 안에 집어넣는 거예요.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10;22)그리스도 안에서 피 뿌림을 받은 자에게는 그 피가 우리를 주 앞으로 깨끗하게 새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거예요. 돌아온 사람 몇 명?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렇다면 이 70년은 예수님 죽으심부터 마지막 재림 때까지 모든 기간이 70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다니엘서에서 이 70년을 뭐로 바꿉니까? 70이레로 바꾸죠. 70년이 70이레로 바뀌는 거예요. 70년x7 할 때 이 7은 인간에게 없는 시간이에요. 주님의 완료가 70년을 완료시켰는데 그게 70이레에요. 그 70이레의 마감은 예수님의 십자가 오심. 예수님 안의 시간이에요, 예수님 안의 시간. 그래서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는데 이 70이레 동안에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너, 너, 너, 너 이리와. 뽑아서 선택해가지고 예수 안 성령 안으로 성령이 찾아오시고 예수 안으로 십자가 안으로 집어넣어버려요. 이것이 바로 말씀이 스스로 말씀되게 하는, 이 무대를 채우는, 하나님 백성을 채우고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완성된 새로운 언약이 들어있도록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갈라디아서 6장 8절, 그런 의미에서 다시 읽고 마치겠습니다. 다 같이 읽어보고 마치겠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자기의 육체가 있으면 안돼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영생은 이렇게 거두어지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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