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현실을 만드는 말씀

아빠와 함께 2022. 3. 11. 10:18

고통이 동반되지 않는 모든 교훈이라면 이것은 비현실적이지요. 교훈이라는 것은 고통을 받을 때 진가가 나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교훈과 말씀을 들으라는 것은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어느 정도로 위반상태, 그걸 지키지 못한 상태, 그 말씀과 떨어져 있고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우리 주변에 주어지는 삶의 고통을 통해서 연결시켜 보는 겁니다. 관련지어 보는 거예요. 실제 현실을 만들어가는 핵심이 바로 말씀이라는 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다시 한번 모든 인류에게 전달할 수가 있습니다.

백성은 좀 잘못해도 봐줄 수가 있지만 왕이 좀 비틀어지게 되면 가차 없이 하나님께서는 왕을 때려버립니다. 왜? 감추었던 하나님의 뜻이 이스라엘 왕을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한 구조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다윗언약이라 이렇게 해요. 다윗언약.
다윗언약 전에는 무슨 언약이 있었느냐 하면, 모세언약이 있었어요. 모세언약은 왕이 없습니다. 왕이 없고 모든 백성에게 율법,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이 다 제공되는 거예요. 이것은 왕뿐 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율법대로 살아야 돼요. 이스라엘 전부가 율법대로 살 책무가 있던 그것이 모세의 율법, 모세 언약 이후에 다윗언약이 되게 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운명을 한 사람에게 다 짊어지워 버려요. 한 사람에게, 왕에게 다 짊어지우는 겁니다.
이것은 무슨 징후냐 하면, 장차 하나님이 인간적인 왕으로 오실 징후를 보여주는 거예요.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대상 29:12-15)without hope.(NIV) there is none abiding.(KJV) there is no hope.(NASB) 

앞으로 이런 기준에 의해서 최종적인 하늘나라 왕국이 완성이 된다, 완결이 된다는 하나님의 계시 차원에서 하는 다윗의 고백이에요. 이 원리원칙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 원리원칙이 뭐 였던가요? 방금 우리가 보았듯이 세상의 모든 것 하나 주님께서 다 주신 것이라는 거예요. 모든 것 하나도. 그러니까 부한 자가 부하다가 자랑질하지 말고 가난한 자가 가난하다고 절망하지 말고 우울해하거나 하나님 앞에 원망하지 말라는 거예요. 가난하게 하신 것도 부하게 하신 것도 이것은 다 주님의 손에서 나온 것이고 주님의 손에서 다 받아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주님을 찬양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부한 자의 특징은 뭐냐? 부한 자의 특징은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고 고백할 수 있게 하는 겁니다. 가난한 자의 특징은 원래부터 내 것이 아무것도 없네요, 하고 고백하는 것. 둘 다 결과적으로 마찬가지 입장이에요.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이 말은 늘 만들어지는 과거 속에서 우리는 연속적으로 죽는다는 겁니다. 늘 만들어지는 과거 속에서 우리는 계속 죽어 나가고 있었던 거예요.
시간은 늘 우리를 토막 내서 매일 우리를 죽게 만드는 그 작동을, 작용을 시간을 주셔서 하게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편 39편 5절에 나옵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과거는 이미 없는 거예요. 계속 없음만 질질질질, 흔적만 남기면서 세상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없어요. 다시 말해서 어제의 나를 찾는다는 이것은 죽은 자를 찾는 겁니다. 어제의 나는 없어요. 앞에서 당기는 것도 죽음이고 뒤에서 미는 것도 죽음이고.

왜 우리는 이 세상에 없는 것이 되어야 되는가? 왕부터 만들어놓고 그 왕의 속성을 그대로 분양받고 분배받으면 거기서 새로운 백성이 나오는 거예요. 새로운 백성이. 그 방식을 사용하시는 거예요.
다윗언약이라 이지요. 모세 언약으로 조지고, 다 죽여버리고 모든 인간은 율법대로 살지 못해서 마땅히 저주받고 지옥 가야 된다는 것을 명백하게 만들어놓으시고, 그다음에 하나님의 자신이 생각했던 진짜 이상적인 하늘나라는 왕을 세우는데 그 왕을 하나님 자기 아들로 삼는 거예요. 아들로 삼아서 그 양자 됨의 영을 받은 자만이 뭐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새롭게 부를 수 있는 부활의 영으로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나라 꼴이 점점 더 황폐해지고 엉망진창이 되어가지고 가망성이 없네,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그게 바로 이방적 사고방식이고 그게 잘못된 사고방식이에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이미 범죄한 인간들입장에서 보기에 불공정한 재판을, 하나님께서 하늘의 법정을 열었습니다. 인간들 보기에는 이것은 너무나 불공정한 편파적 재판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 편파적 재판이 뭐냐? 권력층, 권력을 가졌다는 것, 힘을 가졌다는 그 자체만으로 피고로 만들 작정이었습니다. 이게 하늘나라 법정의 원칙이에요.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 최종 하나님의 재판이 이거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교만한 자를 발굴해내고 생산하는 일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해내시는 겁니다. 인간이 가진 모든 권세와 부함은 가난한 자를 착취하고 뺏지 아니하면 생겨나지 않는 그 구조를 이스라엘 내부에 덫을 놓듯이 그걸 마련했다 그 말입니다.  
겸손/교만이라는 것은 제대로 된 겸손의 기준을 만나지 않은 한 모든 인간은 교만해요. 극단적인 최후의 겸손한 자를 만나지 아니하면요. 주님께서 율법에 의해서 모든 인간을 이미 죄인으로 규정을 했다는 말은, 모든 인간은 다 교만하다는 뜻입니다.

하늘나라 성도의 특징은 과거를 자기가 계속해서 없어지는 존재로 보는 거예요. 심지어 오늘도 내일 되면 없어지는 존재예요. 나의 질량감이 없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주님만 살아계시면 돼요. 왕만 살아계시면 되는 거예요. 왕만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살아 있고 우리는 율법에 의해서 매일같이 삭제되어서 소거되고 없어져도 이것은 살아계신 주님에 의해서 제대로 일하신 하나의 증거로서 그걸로 우리의 의미는 충족된다는 겁니다. 내가 죽어 없어지는 이것이 살아계신 주님만 지금도 살아서 일하심을 증거한다면 그걸로 우리는 오케이가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성도란, 몸이라는 껍질 안에 십자가 자신 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있는 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아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세상 이스라엘은 교만한 자를 하늘의 법정에 피고인으로 세우려는 하나님의 덫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가난에 처하든지 부에 처하든지 모두 주님의 것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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