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되면 인간은 없는 존재, 즉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이 다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다루시면서 인간들이 기대하는 결과보다 세상의 운영 규칙을 나타내십니다. 이 운영 규칙이 언약입니다. 이 언약을 위해 마지막 때에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 곧 주님이십니다. 평소에 선지자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살아왔습니다. 이는 인간이란 결코 뼈다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안목을 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안목을 아는 자라는 겁니다. ‘산다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통해서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식으로 우리 성도는 살아 있었던 겁니다.
하늘의 땅을 몰고 오실 분이 메시야로서 그분에 의해서 천국과 지옥도 나뉘어지게 됩니다. 언약적 차원으로 보면 이 세상은 전부가 지옥문입니다. 어디에 살던지 상관없이 넓은 길로 가면 지옥입니다.(마 7:13)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매일 삶이 늘 처음 자리로 되돌아가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항상 죽은 자로 빨리 원위치, 빨리 제자리로 돌아가야 해요. 계시는 분은 하나님이 계시지 내가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계신 분이 계신 그 활동을 하게 되면 그 생산되는 결과가 나니까요. 이럴 때, ‘오늘도 내가 살았구나. 신난다’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일관된 정확한 규칙대로 시행하셨음을 감사하는 거예요. 그 규칙에 해당되는 분이 누구냐 하면 진리요, 생명이고 길이 되신 예수님을 예수님답게 활동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그냥 겉저리로 주님의 보이지 않는 활동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거울 앞에 있는 내 모습이 보이는 겁니다.
땅에 지옥문 없어요. 그냥 잡초를 뽑고 있지 지옥문 찾고 있는 거 아니거든요. 천국 문 없습니다. 없는데 한쪽은 지옥 가고 한쪽은 천국 가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이 알고 있는 땅에 사건이 플러스 되는 거예요.사건(십자가)이 일어나 버리면 땅 자체에서 하나님이 생각하는 두 종류의 땅으로 분류가 됩니다. 그것이 언약 사건인데 하나님의 언약이 품고 있는 새로운 땅, 볼펜 심 같은 예수님이 같이 몰고 오시는 새 하늘과 새 땅과 함께 예수님이 앞장 서버리면 예수님이 뾰족한 심이 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천국과 지옥 이야기를 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이야기를 들은 그 땅은 비로소 지옥문이 되고 천국 문이 되는 겁니다. 한 몸에서 나오거든요. 골로새서 3장 3절에 보면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고 되어있습니다. 예수님 안의 차원에서 이야기한다고요. 그런데 지상에 있는 인간들은 ‘자, 한번 천국 가볼까, 지옥 가볼까, 뭘 믿으면 되지?’라고 이러고 있으니까 자기 쪽에서 출발해서 어떻게 천국 문을 찾아가서 자기가 믿음으로 들어가면 구원받는 줄 알고 있어요. 그게 아니고 주님이 사건으로 덮쳐야 해요. 두 사람이 매를 갈고 두 사람이 잠을 자도 그냥 이미 다른 차원에서 보면 이 땅이 곧 천국의 문이 되고 이 땅이 곧 지옥의 문이 되는 거예요. 땅의 개념을 메시아를 통해서 언약을 통해서 그 개념을 확대해버리는 겁니다. 지옥이 어디냐? 어느 곳도 지옥이 되고, 천국이 어디냐? 어느 곳도 천국이 되는 거죠. 내 주 모신 곳이 천국이고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 천국이죠. 이것이 인간의 과학적 인식을 하고 그것이 진리라고 우기는 인간에게는 납득이 안 되죠. 납득이 안 되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교만이라고 합니다. ‘이 교만한 욥아, 네가 의가 어디 있냐? 너는 의 없어. 너는 애초부터 교만했다’라고 이것을 주님께서 질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그냥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해줄게. 그러한 정답이 덮치게 되면 우리 인생은 뭐냐 하면 주께서 주의 말씀대로 오늘 하루하루 말씀의 사람으로 살려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