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전에 빌립보에서 고난을 받고 모욕을 당하였으나, 심한 반대 속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담대하게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But even after that we had suffered before, and were shamefully entreated, as ye know, at Philippi, we were bold in our God to speak unto you the gospel of God with much contention.
예수님이 가신 길 자체가 고난과 능욕의, 능욕이라 하는 것은 개무시 당하는 거지요, 고난과 능욕과 무시당함과 거부당함으로 주께서는 일관되게 갔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 도망쳤습니다. 이상하게 예수님이 있던 공간과 다른 인간들이 있는 공간이 완전히 구별되었어요. 예수님은 홀로 남겨졌습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홀로 남겨졌어요. 아무도 예수님을 이해 못 할 자로서 그들은 이 땅에서 태어나서 그동안 살아왔던 겁니다. 내가 나를 위해서 산다는 그 사고방식은 결코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사고방식으로 둘둘 감긴 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모든 선택과 결정의 주인공은 하나님이 아니에요. 본인이 하는 거예요, 본인이. 왜?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었어요. 한 번도 거기에서 이탈한 적이 없어요. 끝까지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책임진다는 거예요. 너도 그렇게, 나도 그렇게. 그렇지 않은 사람 나와보라고 해요.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으니 그걸 옳은 길로 알았어요.
예수님이 사도바울에게 했던 첫 번째 말은 뭐냐 하면, 네가 나를 죽이는 공범자 중 하나다, 라는 뜻이에요. 네가 나를 핍박한다는 말은 그거에요. “너라는 존재는 하나님을 죽이기 위해서 너는 이 땅에 태어났다. 그걸 네가 이제는 알아야 된다.” 그 말이에요. 내가 태어난 이유는, 내가 이 땅에서 잘 먹고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죽이기 위해서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역사적 사명을 띄고. 여자고 남자고 모든 인간존재가 본심이 뭐냐 하면, 하나님 욕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그 거룩한 사명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하나님 욕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유도한 거예요. 하나님한테 욕이나 하고 죽어라, 그 말이에요. “너 하나님하고 그런 관계야.” 인간과 하나님 관계는 그런 관계라는 겁니다. 인간은 하나님 욕하는 대행자예요. 악마가 욕하는 대신 인간을 통해서 욕하고 하나님은 욕 얻어먹고, 욕 얻어먹는 하나님이 진짜고, 하나님을 욕하고 싶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하나님은 창작물이고 가짜고 우상이고 그런 겁니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요, 예수님의 환난을 끄집어내는 해석이 나와야 돼요. “네가 이런이런 욕을 했잖아. 네가 내 앞에서 잘난 체 하면서 너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께 이런 원망을 했잖아.” 그걸 끄집어내는 해석이어야 돼요. ‘하나님, 저 왔습니다. 복주세요.’ 이것은 하~ 진짜 이것은 마귀의 전당입니다. 악마의 전당이에요. 주님께서 일관되게 이야기하는 것은 욕해라, 다 욕해라, 다 욕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자기를 욕을 하게 만들었어요. 욕을 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고 예수님을 보고……,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왜 욕하느냐 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죽이려고 오신 분이에요. 그런 분이 예수님입니다.
성경에서 환난이라는 것을……, 설교 시작하고 나서 처음으로 중요한 것을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 환난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환난이라 합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다’는 그것이 반드시 거기 들어가야 돼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환난은요, 그것은 환난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영웅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된 거예요. ‘그렇다. 이 고난을 이기면 나는 영웅 된다. 이 난관만 벗어나면 나는 대단한 인물 된다.’ 그것은 하나의 춘향전이고 노림수지요. 영웅전이지요. 내가 영웅 되는 기회가 왔다. 그런 식이 돼요. 그런 것은 환난 아닙니다. 고난 아닙니다. 장난치는 거예요, 그것은.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서 경험했던 고난과 능욕에 누구를 참여시키느냐 하면, 사도들로 하여금 그곳에 참여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일체감을 느끼게 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 성령 준 자기 사도를 자신의 피부조직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사지, 팔다리로, 손가락 발가락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날 위해서 산다는 것은 날아가 버리고 내게 일어난 그리고 내 인생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경우도 이것은 자동적으로 다 누굴 위한 일이 되느냐 하면, 주님을 위한 일이 되어버려요. 길 가다가 노상방뇨하는 그것까지 이게 주님의 일이 되어버려요. 내 일이 남아 있지 않은 거예요.
주의 일은 뭐냐? 바로 과거를 절단시키는 거예요. 과거를 끊어버리는 겁니다. 사람이 힘들게 사는 이유는 과거의 자기를 위해서 살던 인생을 계속 견지하기 때문에 지금이 힘들어요. 성도에게 지금은 뭐냐? 주님의 고난과 능욕에 참여되는 세월들입니다. 그 고난과 능욕에 참여됨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위하는 일이라는 것은 아무리 둘러보고 찾아봐도 그게 자기 주변에 남아있지를 않아요. 누가 다 강탈해 갔어요. 다 빼앗아갔어요.
환난과 고난, 능욕이란 단어는요, 누구만 쓸수 있느냐 하면, 예수님만 쓸 수 있지 감히 우리가 우리 자신한테 나 고생했다, 인생 능욕 받았다, 복음 때문에 힘들었다, 그런 말은 주제넘게 내가 나한테 쓸 수가 없어요. 태어난 게 위기에요, 태어난 게! 이 땅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모든 게 위기였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주님의 복음의 입장에서 볼 때에 태어나면서부터 살아온 모든 것이 오직 자기만 위해서, 자기만 위해서 살기 때문에 그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것은 저주받을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For the love of Christ constraineth(compels,controls) us; because we thus judge, that if one died for all, then were all dead: And that he died for all, that they which live should not henceforth live unto themselves, but unto him which died for them, and rose again.(고후5;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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