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역할로서의 성도

아빠와 함께 2022. 2. 15. 09:48

역할로서의 성도 

2022년 2월 13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5:19-22

(5:19) 성령을 소멸치 말며

(5:20) 예언을 멸시치 말고

(5: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5:22)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이 본문이 스스로 ‘나’로서 살아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에게 주신 말씀인지 아니면 이미 자신은 죽은 자임을 인정하는 자에게 주신 말씀인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합니다. 만약에 지금 자신이 엄연히 살아 있는 것을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우긴다면 이는 예수님이 건너가신 그 세계를 부정하는 바가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성령을 통해서 주님 세계에서 인간 세계로 제시된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나는 살아 있다’는 것을 고집한다면 전혀 이 말씀이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이 현실세계에서 살아가는 자들은 모두 다 ‘자기 말’을 타인들이 들어주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솔직하고 순수한 자기 마음을 누구라도 알아주기를 원하면서 말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에게 쏟아진 말로 인하여 예언이 멸시받는 상황이 됩니다. 어떤 영화를 보면, ([최악의 하루] 2015 제작. 김종관 감독작. 주연: 한예리, 이희준 ) 어떤 유부남이 처녀와 계속 사귀기를 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앞으로도 불행하게 그리고 비참하게 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것은 지금의 아내와 재결합하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처녀는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어 다음과 같이 대꾸합니다. “그런 말은 왜 저에게 굳이 합니까? 그냥 당신 아내하고 같이 사세요”라고 하니 그 유부남이 하는 말이, “제가 당신과 계속 사귀고 싶은 것은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이렇게 아내와 재결합하는 이런 비참한 인생을 선택했음을 당신이 좀 알아주었으면 해서입니다.”

즉 인간은 자기 결정과 선택이 어떻게 되었든 남들이 나의 마음을 알아주고 이해하는데서 사람 사는 맛을 가질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입니까! 이런 경우가 나이 90이 넘어 요양병원에 홀로 누워있다가 자신의 죽음 순간을 감잡은 노인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평생 교회 다니고 성경 구절을 대하면서 지식적으로 하나님이 계시고 죽고 난 뒤에 심판도 있고, 예수님을 믿으면 죽어도 산다는 것을 다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이 자신의 믿음 자체가 자신이 믿지를 못하고 있는 겁니다. 즉 자신이 자기를 받아들이는 것이 영 미덥지 않고 불확실함을 본인이 너무나도 실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성경에서 제시한 믿음에 관해서 예수님께서 이미 언급해놓으신 게 있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 17:6) 이 기준에 의할 것 같으면 그 누구도 믿음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임종 직전에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뭔가 스스로 조치를 취하지 아니하면 자칫하면 지옥갈 수 있는 이 급박한 순간에 이 노인은 본인이 알고 있는 성경 지식은 수두룩하지만 하나님께서 내 믿음을 믿음이라고 인정주지 않을 것이라 경우를 고려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성경 내용은 그냥 일방적인 역사적 견해라고 치워버리게 되면, 지금껏 본인이 평생 살라고 애쓴 것이 다 부질없는 무의미한 순간이었음을 자인하는 바가 됩니다.

즉 긴긴 세월 힘들게 버텼지만 결국 마지막 돌아오는 것은 숨가뿐 죽음 뿐이라는 점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것입니다. 이럴 것같으면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더 좋을뻔 했다는 식으로 정리한다는 것이 비참한 심정입니다. 여기에 대한 해결책은 요한복음 20:19-20에 나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님께서는 손에 난 못자국과 옆구리에 난 창 자국을 보여주었습니다. 즉 이미 죽은 귀신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귀신의 세계가 진정한 하나님의 구성하려는 세계였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인간들이 아는 이 현실세계는 그 죽음의 세계에 흡수·통합되어 버린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이 살고 있다는 이 현실세계는 헛된 꿈의 세계입니다. 왜냐하면 그 세계에서 그저 ‘살려고 몸부림만 치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꼭 꿈 속같아요. 꿈 속은 늘 불만의 세계에서 벗어나야 될 필요가 있는 환경이 펼쳐집니다. 꿈은 꿈 꾸는 자가 임의로 변경하거나 조정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갇혀 있는 세계입니다.

그 세계에서 인간은 알 수 없는 공포와 위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나다움’을 버리지 못하는 형편에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조상 아담은, 신이 되어보겠다고 선악과 과실을 먹었습니다. 즉 하나님마저도 이겨보겠다는 악마의 심보 속으로 들어와서 악마의 통치를 받게 된 처지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악마가 너를 청구하려고…”(눅 22:31) 문제는 인간은 끝나 ‘나’의 가치에 미련두고 삽니다. 가룟 유다가 그러했습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 자수하고 자살했습니다.(마 26:24) 그러나 실상은 모든 것이 거대한 드라마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주관하시고 주역이 되시는 드라마에 성도는 야무지게 말려든 겁니다. 즉 성도는 하나의 역할을 받은 겁니다. 어떤 역할을요? 죽는 역할을 말입니다. 그것도 죄인으로 죽은 역할 말입니다. 성령이 있는 자는, 이 꿈같은 이 세상에서 인간들이 어떤 욕심으로 외부로부터 인정받과 하는 지를 체험케 합니다.

이 드라마는 확정된 내용이 박스채 담겨서 최초로부터 최후까지 전달됩니다. 이 드라마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즉 승리가 이미 확정났습니다. ‘나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상처난 손과 상처난 옆구리로 인하여 형성된 그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소망’이요 ‘우리의 사랑’입니다. 성도가 감사하고 기쁜 일은 자신의 죽는 역할이 끝나는 날이 있다는 점입니다. 즉 나를 죽이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는 삶입니다.

미안할 것도 없고 죄송할 것도 없습니다.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성도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 성도와 무관하게 주님과 관계되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게 자신을 죽은 자로 인식하는 자로서의 승리자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우리의 기억상실증이 치료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5강-데살로니가전서 5장 19-22절(역할로서 성도)220213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22절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9-22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18절 끝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바에 의하면 하나님의 뜻은 이미 나타났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하나님의 뜻은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새삼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세요,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제가 하나님의 그 뜻대로 살겠습니다, 자꾸 이렇게 우기는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요, 내 뜻, 내 가는 길을 알려달라는 그런 욕심에서 나온 거예요.

하나님이라는 분이 내 앞길 가는데 거기에 어떤 길이 가려 있으니까 그대여 이 길 터주세요, 나의 힘이 되어주세요, 어떤 노래 가사 좀 비슷하다만,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이끌어달라, 그렇게 하면서 주의 뜻이 무엇입니까, 주의 뜻이라면 내가 다 들어드릴 테니까 그저 저를 좋은 길로 선도해달라, 남들 보기에는 괜찮은 기도, 의당 나올 수밖에 없는 기도처럼 되어 있지만 그것은 주의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뜻은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그런데 그 뒤의 말씀이, 그렇게 하면 너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그 너의 뜻은 여기에 없어요. 하나님의 뜻에 우리가 흡수통합 되어야 되지 하나님의 뜻 따로 있고 거기서 빼먹을 나의 뜻 따로 챙기고, 그런 뜻은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적이 없습니다.

평생을 교회 다니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애를 썼지만 막상 교회 한 5십 년, 6십 년 다닌 사람이 나이 이제 90이 되었다 칩시다. 요양병원에 누운 지도 벌써 3년 지나 5년이 되었다 칩시다. 가족들도 지겨워서 더 이상 찾아오지 않고요. 그런데 드디어 어느 날 숨이 가빠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냥 감 잡아도 자기가 오늘 오전 내에 죽을 것 같아요.

간호사들이 그걸 알고 보호자 부르겠지요. 식구들 부르면서 “곧 가십니다. 어르신네가 숨이 가빠옵니다.” 그 이야기를 본인이 치매 걸리지 않은 이상에야 다 듣고 있지요. 헉헉, 숨이 차오르면서 곧 넘어갈 건데 아무리 봐도 10초를 못 넘긴다고 칩시다. 10초 남았다 칩시다.

숨이 10초 남은 그 상황에서 자기가 그동안 교회 다니면서 알았던 그 모든 성경 구절을 힘주어서 다 뽑아내요. 내가 살아야 되니까 힘주어서 모든 성경 구절 다 뽑아내지요. 자기가 알고 있던 것들, 죽을 때를 대비해서 생각해놓은 지식 있잖아요, 성경지식들.

날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그런 말씀들부터 해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고 그 뒤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그리고 첫째 부활 둘째 부활, 너희가 죽어도 살리라, 이런 성경 구절 다 뽑아서 마지막 힘을 짜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여, 저는 그걸 믿습니다. 이 말씀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그리고 뒤의 말이 뭐냐? “살려주세요”에요. “믿습니다. 살려주세요”

이렇게 마지막 힘을 다하여 그동안 교회 다닌 그러한 실력을 발휘해서 해 봤자입니다. 10초밖에 안 남았는데 가족들은 아직 오지도 않았어요. 목사 불러봐야 소용도 없어요. 내가 안 믿는데 자꾸 목사가 믿으세요, 그런 소리 하니까 ‘빨리 집에나 가라. 심방도 필요 없다. 가라’

문제는 내 문제에요. 내가, 그 말씀을 믿는다는 내가 안 믿어지는데 어떻게 합니까? 내가, 성경 말씀을 믿는다고 내가 주장하지만 그런 내가 나를 내가 못 믿어. 이거 어떻게 하면 좋아요? 지금 10초 남았어요, 10초. 자꾸 의심이 드는 거예요. ‘내가 천국이 있는 줄 믿사옵고 눈을 감으면 주께서 기다리는 줄 믿습니다. 아니 내가 믿습니다, 가 아니라 솔직하게 믿고 싶습니다’

그런데 믿고 싶습니다, 이게 지식이거든요. 내가 내 지식을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쪽에서 안 받아들이면 그 때는 어떻게 할거예요? 그 가능성도 생각해 봐야 되거든요. 나는 나를 믿는다고 해도 주님께서 안 믿는다고 한다면 나는 뭐가 되어버립니까? 마지막 다 와가지고. 그러니까 5십 년, 6십 년 교회 다녔지만 그 딴것 다 필요 없고요. 10초 상관이거든요. 마지막 아직까지 의식이 남아 있는 10초 상관이라고요. 10초 상관에 이게 흔들려버리는 거예요.

‘내가 어떤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식일 뿐이지 내가 진정 믿는 것이 아니다. 그게 내 모습이야.’라고 되어버리면 내가 그동안 교회 다닌 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심지어 성경 말씀에 이런 말씀도 나오거든요. 누가복음 17장 6절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너희들이 진짜 믿음이 있다면 저 뽕나무더러 “뽕나무야! 지금 저 지중해 바다에 빠져버려!” 하면 뽕나무가 뿅~, 하고 날아가서 바다에 빠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5십 년, 6십 년, 7십 년 교회 다녀도, 직분 백날 받아도 뽕나무는커녕 콩나물한테라도 명령해봐야 동해 바다에 빠진다든지 포항 앞바다에 빠질 그런 가능성은 전혀 없잖아요. 그런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말은 내게 뭐가 없다? 내게 믿음이 없다는 뜻이거든요.

누가복음 17장 6절 이걸 안게 탈이에요. 이걸 몰랐으면 그냥 넘어가는데 분명히 성경 말씀은 어디서 들은 것이 있어 가지고 뽕나무더러 명령하면 바다에 빠지는 경우에 한해서 내가, 주님 보시기에 믿음 있다고 쳐주고 만약에 뽕나무더러 바다에 빠지라고 명령했는데도 그냥 쓱, 쳐다보고 말면 이것은 믿음 없는 게 되고.

그러면 지금 10초 남았는데 이게 한 5년이고 10년이고 더 살아서 건강하게 산에도 왔다 갔다 다닌다면 믿음이 다음에 생기도록 노력이라도 해보겠는데 이것은 10초 남았어요. 그 생각한다고 벌써 2초 지났어요, 2초. 이제 8초밖에 안 남았어요. 이거 어떻게 하면 좋아요? 신학 다 알고 성경 구절 달달 외우고, 성경 구절 모르는 게 없어요. 다 아니 뭐합니까? 지식인데.

그래서 이제 8초 남았지요. 이제 8초밖에 안 남았습니다. 벌써 2초 지났으니까요. 8초 동안에 무슨 생각 하느냐 하면, ‘이 성경 구라다. 이거 거짓말이고 나 교회 안 다닌 것으로 치고 성경 일체 모른다고 치자. 그러면 속 좀 편하겠지. 왜? 사람은 아무도 모르니까. 죽고 난 뒤에 천국 갔는지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누가 가본 사람 있나? 뭐 아무도 없으니까. 성경에서 괜히 구라 떨면서 협박 공갈치고 있는데 그거 아예 무시해 버리면, 교회 안 다닌 사람처럼 되어버리면 그러면 죽고 난 뒤에 심판이 있으리라, 그것도 개무시해 버리면, 심판 후에 천국과 지옥도 없다면 그냥 지금 그대로 무기물로 사라지면 그만이지.’

이렇게 잠시 ‘그래. 교회 다닌 것도 무효로 하고 안 다녔다 치자. 성경도 모른다 치자. 성경은 하나의 견해에 불과하다. 아무것도 아니야. 인간의 역사 중에서 그 당시 어떤 자들의 하나의 의견에 불과하지. 그게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현실 그 자체는 아닐거야. 하나의 사견일뿐이야.’라고 마음을 그렇게 먹더라도 문제는 뭐냐 하면, 내가 살고 싶다는 이 포텐셜에너지(potential energy), 이 기본적인, 지금 내가 여기서 죽어버리면 무엇이 아까우냐 하면, 평생에 밥 먹고 살려고, 목숨 부지하려고 애썼던 것이 90년 지나서 혼자 요양병원에서 외롭게 누워있는 이 자체가 무의미하고 그동안 헛수고 한 거예요. 그동안의 인생이.

죽으려고 살았습니까? 그동안 왜 악착같이 그렇게 살았어요? 힘들게 무슨 명분으로. 그래서 무심코 욥이 하는 이야기가 툭 튀어나와요.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것 같으면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더 좋을 뻔 했습니다.”라는 말이 툭 튀어나오면 성경은 “그거 욥기에 들어 있어요. 네가 무슨 소리 한다 할지라도 성경은 이미 네가 뱉은 소리 다 한 겁니다.”

자 그거 한다고 다시 2초 까먹어서 이제 6초 남았어요. 6초 남은 사람 앞에 오늘 본문 말씀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라는 이 말씀을 준 이유가 뭐냐? 나는 지금 내 문제도 해결 안 되었고, 믿음이라는 것도 내가 안 믿어져. 내가 뭘 믿는다는 것, 하나님이 있는지 아닌지 그것도 모르겠고 하여튼 내가 나를, 너는 믿어도 내가 너를 못 믿겠어요. ‘내가 너 알거든!’ 내가 나에 대해서 전혀 신빙성이 하나도 없어요.

이처럼 사람이 자기가 살아 있다는 그 순간, 지금 6초 남았잖아요. 아직도 살아 있잖아요. 살아 있으면요, 어떤 행동을 하느냐 하면, 주위에 있는 식구나 남들에게 또는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이 나를 믿는 사람으로 쳐주기를 위해서 부질없는 추가적인 행동에 계속 나설 수밖에 없어요. 인간이 살아 있는 한 자기를 조작할 수밖에 없어요.

이게 한마디로 말해서 뭐냐 하면, ‘제발 내 말 좀 들어줘’ 이게 살아 있는 인간의 욕망이고 욕심입니다. 제발 내 말 좀 들어줘.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걸 정면으로 발라버립니다. 20절에 “예언을 멸시치 말라” 우리는 식구들이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저 하나님 말씀 믿습니다. 이 내 심정, 내 솔직한 마음, 순수한 마음, 이 내 마음 좀 알아주세요.”라고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걸 듣지 않고요. “예언을 멸시치 말라” 합니다.

예언을 멸시치 말라, 로 받아버립니다. 이게 뭐냐 하면, 확실한 내용이 박스 안에 담아 실린채 최초로부터 최후까지 이게 계속 전달되거든요. 하나님께서 전달한다고요. 그게 예언이에요. 예언은 이미 확정된 박스 안에 담긴채 그걸 끊임없이 이동시켰습니다. 이 세상 마지막 때까지.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계속해서 반대하고 공격하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여, 제 말 좀 들어주세요. 하나님이여 제 마음 좀 알아주세요.’ 식구들한테, 일가친척한테, 내 친구한테 내 마음 이런 마음 좀 알아달라는 그것만 계속 하소연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살아 있는 자의 욕심이에요 그게.

내 말을 절대적인 말로 좀 받아달라. 하나님은 “노! 절대적인 말은 네 말이 아니고 박스 안에 담겨 있다.” 하나님의 언약, 예언이란 박스 안에 담겨서 끊임없이 전달해 온 거예요. 더 쉽게 말해서 나의 믿음은 안 받아줍니다. 하나님의 믿음은 나의 믿음이 아니고 우리의 믿음이고, 나의 소망이 아니고 우리의 소망이고, 나의 사랑이 아니고 우리의 사랑이에요.

인간은 우리를 제켜 버리고 내 것만 고집한다고요. [최악의 하루](2015 제작. 김종관 감독작. 주연: 한예리, 이희준)라는 영화 대사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유부남이 마음에 맞는 아가씨를 우연히 만나서 그 아가씨한테 접적거리고 질척대기 시작합니다. 아가씨가 처음에는 유부남이라도 그 아저씨를 좋아하다가 자꾸 질척대고 들이대니까 짜증이 확 올라와서 “아저씨, 이제 찾아오지 마세요.” 이렇게 했어요.

그러니 그 아저씨가 “내가 우리 마누라하고 이혼하고 너하고 살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아가씨는 “그래도 싫어요.” 그러니까 나중에 몇 개월 지나서 그 유부남이 아가씨한테 찾아가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대사가 이래요. “나는 이제 행복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내가 이제부터 비참하게 살기로 했습니다. 나는 내 아내와 재결합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가씨가 “그 이야기를 나한테 왜 합니까?” 하니까 잘 들어보세요, “내가 불행해도 좋으니 아가씨가 내 마음 좀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이거였어요. 그 유부남이 아가씨 사귀려 한 이유가 자기 말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예요. 자기 사랑이었던 겁니다. 아가씨를 사랑한 게 아니에요. “내가 아가씨를 위해서 이 정도 희생한다는 것을 아가씨가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아가씨는 실익이 없어요. 아무 유익이 없어요. 그러면 내가, 요 내가 이렇게 아가씨를 좋아한다는 말을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아……,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유포되고 있습니다. 다시 정리할게요. 후딱 지나가서 못 이해하는 사람이 있는데 인간이 살아 있으면 어떤 짓을 하느냐 하면, 인간이 살아 있으면 ‘하나님이여, 예수님이여, 성령이여, 또는 뭐든 같은 교인들이여, 내 마음이 이런 마음인 것을, 제발 내 마음이 이렇다는 것을 좀 이렇게 좀 들어주시고 공감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살아 있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에요.

예언이고 뭐고 간에 예언 말 듣지 말고 내가 이런 순수한 맘 갖고 있다는 것을 당신이 옆에서 좀 들어주고 나한테 위로해주고 동감해주고 잘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나이 90 넘어서 요양병원에 들어가 누워서 숨넘어가기 10초 전까지는 그랬거든요. 10초 전까지.

그런데 문제는 10초 남은 상태에서 내가 살아 있는 인간이 남들이 나를 어떻게 위로해주고 나는 남에게 어떻게 인정받는가, 그런 식으로 90년 동안 살아왔는데 10초 앞두고 그것마저 내가 나를 속이는 짓이라는 것을 10초 앞두고 알게 된 거예요. 본인이. 자기한테 솔직하게 된 거예요. 이런 짓이 거짓이라는 것을 본인이 속일 수가 없거든요. 본인이 알아버린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대략난감이에요. 아무리 끄집어내고 끄집어내도 나 자신이 계속 살고 싶은 이 욕구와 욕망을 내가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죽을 때에도. 이제 6초 남았는데 6초 남겨두고 행여나, 행여나 진짜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다면 행여나, 지금 6초 남았는데 그동안 내가 잘못한 사람에게 미안해하고 지금 죄송하다고 속으로도 그런 소리 해서 빨리 6초 남은 그사이에 마음속으로 그 사람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게 되면 나의 죄가 사라지겠지,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보는 거예요. 6초 남겨두고서.

누구한테 미안하고 또 누구한테 미안하고, “여보, 미안해.” 또는 자식들한테 “미안해” 하는데 이 미안해하고 죄송하다고 생각하는 거요, 그것만큼 하나님의 복음에 상관없는 소리, 다시 말해서 관심사가 더욱더 자기한테 꽂혀 있는 표현이 이 표현이에요. 누구한테 미안하다, 죄송하다, 이렇게 함부로 살아서 미안해, 이것은 상대방을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끝까지 자기 사랑, 자기 의로움과 정당성을 포기 못 하겠다는 고집 같은 겁니다.

이것이 6초 남겨두고서도 그렇지만 평소에 건강하게 살아 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주를 위해서 선교하겠습니다”라고 한다면, 여기 오늘 본문 19절에 성령이 나오잖아요,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하는데 성령께서 뭐라고 하시는 줄 알아요? 이렇게 이야기해요. “내가 주를 위해서 남은 세월을 선교사로 바치겠습니다” 하면 “네가 그런 욕심을 어떻게 알았지?” “제가 남은 모든 재산을 교회에 바치겠습니다” 하면 “네가 그 욕심이 이제야 나왔어!” 그게 탐욕이고 욕심입니다.

도무지 주님은 우리한테 관심이 없어요. 네가 죄송하든 미안하든 내가 주께 모든 것을 바친다 하든 그것은 네 뜻이에요. 네가 얼마나 믿음이 없는가를 티 안 내려고 하는 조작된 거예요. 인간이 살아 있으니까, 살아 있으니까 하나님이 또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겠느냐, 살아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 자꾸만 내 심정과 솔직한 것을 좀 들어주기를 원하는 거예요. 알아주기를 원하는 거예요. 대화가 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살고자 하는 그런 마음 가지고 기도해봐야 오지게 응답이 안 돼요. 살고자 하는 것은, 살고자 하는 몸부림은 그게 뭐냐 하면, 그게 꿈속이기 때문에 그런 몸부림을 치는 거예요. 꿈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꾸 꿈속에서는 더 살고자 하는 거예요. 자꾸만 살고자 한다는 이게 실제현실이 아니고 꿈속에서 헤매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하는 일에 0도 신경 안 쓰고 있습니다. 아무 관심도 없어요. 이제 그것도 미안해한다고 벌써 3, 4초 지났어요. 이제 2초 남았어요. 이제 2초를 어떻게 유용하게 쓸 것인지, 숨은 벌써 헉헉, 산소호흡기 꽂고 온갖 장치 걸어놓고 측정해가면서 곧 갑니다, 곧 갑니다, 그런 소리 막 듣기는데 자기가 생각해도 이제 2초 지나면 끝나 인생 끝나요.

물론 천주교에는 연옥설이 있지만 연옥설은요, 그것은 보궐로 들어가는거고요. 추가합격이기 때문에 그것은 자존심 상해서 안 돼요. 이제 2초 남았는데 어떻게 이걸 해결할 것인가? 그게 오늘 본문의 하나님 뜻의 핵심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 세상은 모조리 다 연극이었습니다. 우리는 역할을 맡은 거예요.

이게 증거가 뭐냐 하면, 우리 인간이 있기 전에 먼저 선악과나무가 있었고 그리고 생명 나무가 먼저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주님이 먼저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 우리 개개 인간보다 먼저 계신 분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나와요. 말씀이 주와 함께 계셨다. 예수님이 먼저 계셨다는 말은 예수님이 만들어내는 연극에 우리 하나의 역할을 맡긴 겁니다. 이렇게 살다 죽으라는 역할을 맡긴 거예요. 거대한 드라마가 있었던 겁니다. 거대한 드라마의 하나의 역할이었던 겁니다.

이 연극과 드라마의 역할은, 이것은 내 뜻이 아니에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지정받은 거예요. 엑스트라가 영화에서 죽는 역할을 하면, 그냥 꼴까닥, 죽으면 돼요. 엑스트라가 지금, 지금 카메라 돌아가고 있는데 아, 8초 남았는데 ‘내가 지금 말씀 믿는데 믿는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안 믿을 수도 없고……’ 그런 고민은 감독한테 걸리면 혼납니다. “오늘 너 7만 원 없어! 저거 빼! 빼! 안 되겠다. 다른 사람 집어넣어야겠다.”

우리는 그냥 거대한 연극, 주님이 꾸민 드라마의 하나의 역할을 맡은 겁니다. 성도의 기쁨은 뭐냐? 내가 죽는 날이 있다는 것, 이 역할이 끝나는 기쁜 날을 위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내가 죽을 수 있다는 것, 나를 죽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합시다. 왜? 역할이 끝나는 날이거든요. 얼마나 기쁩니까? 5초 남았다고 벌벌 떨 게 아니고, 10초 남았다고 벌벌 떨 게 아니고, 이제 5초만 버티면 되는 거예요.

쓸데없는 목사고 뭐고 다 가라고 해요. 그 사람들은 지금 다 살아 있기 때문에, 장로님 돌아가시는데 내가 멋있게 위로해서 “장로님, 믿습니까? 믿으셔야 됩니다. 믿어야 천당 갑니다” 할 때 장로님이 고개 끄덕끄덕, 마지못해서 해줬지요. 고개 끄덕끄덕, (속으로는) ‘쓸데없는 소리 하고 있네.’ 하고 해줄 때에 ‘거봐. 나는 목사답잖아. 봐. 목회 잘 하고 있잖아, 봐. 그동안 10년 동안 교회 안 나온 장로도 이 목사의 마지막 말 듣고 구원받았잖아.’

철딱서니 없는 딸이 와가지고 “아버지(어머니)! 드디어 예수 믿고 천당 가게 되었군요” 아버지는 눈도 못 뜨지요. 이제 5초 남았으니 눈 뜰 힘도 없어요. ‘너 나 잘하세요, 너나! 너나 잘해 응? 네 걱정이나 해! 살아 있으니까 남 의식하는 거야, 네가.’

남들이 어떤 행동에 나서는 것은, 그 딸이나 자식이 목사 불러서 “성경 믿습니까? 사도신경 믿습니까? 날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이걸 믿습니까?” 해서 고개 끄덕끄덕, 믿는다, 하면 마치 효도 다 한 것처럼, 돌아가고 난 뒤에 마음의 짐이 얇아지고 좀 덜었다 할까요, 아버지가 좋은 데 가셨으니까 딸 입장, 자식 입장에서 자기 기분 편하고 행복하려고 그런 자기 뜻 가지고 밀어붙인 거예요. 하나님 뜻에는 관심도 없고 자기 뜻 가지고 밀어붙인 거예요.

무슨 하나님의 예언에 내 아버지 구원 받아야 된다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내 뜻, 내 아버지 천당 가야 된다는 그것이 바로 예언을 멸시하는 거예요. 그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겁니다. 성령의 일은요, 우리가, 내가 살아 있는 조건 하에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은 그냥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체험하는 게 성령의 일이에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요한복음 20장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에서 20절에 보게 되면,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자, 유대인들 그리고 제자들은 아직 안 죽고 살아 있어요. 죽으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니까 살아 있는 사람한테는 더 이상 예수님은 남이에요. 예수님은 바이 바이, 했어요.

이미 예수님은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리고 제자들은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내가 살고자 하는 잠재에너지 때문에, 더 살고 싶은 욕망 때문에 유대인들이 두려운 거예요. 그래서 자기들끼리 모여서 문을 닫았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다음에 중요합니다.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보이신 거예요. 다른 신체를 보여줘도 되는데 손과 옆구리를 왜 보여주셨습니까? 손에는 못 박혔고 옆구리는 창에 찔렸다는 것, 분명히 죽음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보여주면서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신 거예요.

이것은 뭐냐 하면, 흔히들 인간들이 살아 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 다, 이 세상 눈에 보이는 이것이 현실이다, 라고 하는 이것이 죽음의 세계에 흡수 통합되는 겁니다. 살아 있는 세계 이게 전부고 죽고 난 뒤에는 모르겠다, 가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이 모르겠다 하는 그 죽음의 세계가 이 인간들이 유일하게 살아 있고 유일하게 현실이라고 하는 이 세계를 잠식한 거예요. 다 삼켜버린 겁니다. 빼빼로 막 입에 넣듯이.

그렇게 삼켜버리니까 예수님이 죽었던 그 손자국과 못 자국, 그게 연결고리에요. 이게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이 있는 현실이라는 것이 죽음 세계까지 확대되고 확장된 겁니다. 십자가는 문턱이거든요. 문턱, 연결고리에요. 보이지 않는 죽음의 세계와의. 죽음의 세계가 살아 있는 세계보다 우위에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 눈에 보이는 세계는 꿈이고 진짜 현실은 살아 있는 이 세계를 십자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흡수 통합시키고 딸려 들어가게 되면 이 제자들의 모든 삶은 예수님이 꾸몄던 드라마, 진짜 거대한 드라마, 완성된 드라마에서 그들은 역할을 맡은 것뿐입니다. 하나의 역할 맡은 거예요.

지옥 같은 삶으로 살아 있으면서 네 역할 충실히 하라. 그 역할이 바로 내 뜻, 오직 나만 사랑하고 내가 남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그게 사는 이유다, 라고 느꼈던 그것이 결국 뭘 남기는가? 십자가 예수님의 죽음, 손에 못 박히는 것과 창에 옆구리 찔려야 될 이유를 제시한 죄악이 되고 허망한 꿈이었다는 겁니다. 이 세상을 잘못 보고 있었던 거예요. 나만 생각했던 겁니다.

이게 창세기 3장에 나오잖아요. 창세기 3장에 보면 뱀이 아담에게 따먹으라, 하는 것은 네가 따먹는 날에는 정녕 네가 하나님처럼 되리라 하는 배후의 악마의 조종을 받아서 우리도 하나님처럼 모든 것이 의미가 나한테 쏠리는 식으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이 현실이 전부라 여기면서 그동안 살아왔던 겁니다.

나라는 것밖에 몰라요. ‘우리’를 몰라요. 주께서 새로 만든 주님이 포함된 ‘우리’를 모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그들이 한데 모여 있을 때 주님께서 문 닫혔는데 쑥 들어와가지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 하고 뭘 주시는가? 요한복음 19장 22절에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성령이라는 것은 오늘 말씀에 의하면 성령은, 네가 현재 하는 모든 행동이 죄가 된다는 것, 실재가 아니고 환상, 꿈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진실로 믿는 네가 바로 죄가 된다는 거예요. 너 중심으로, 나 살리기 위해서, 나 구원받기 위해서 하는 이게 다 죄라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하나의 드라마가 생각나야 되는데 본인이 살려 하는 거예요. 엑스트라 주제에요. 얼마나 우리가 죄악된, 죄가 왕노릇하는 사고방식 속에 있다 보니까 나만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은정이 친구가 영미고, 영미 동생이 경애고요, 경애 친구가 선영이고, 이래서 ‘팀 킴’이 이뤄지는 겁니다. ‘팀 킴’, 우리나라 컬링 대표팀. 영미, 영미, 하다가 이제 초이, 초이, 하잖아요. 그게 팀이라는 말이지요. 그게 팀인데 여러분, 컬링 경기에서 재미있는 게 뭐냐 하면, 스위핑이라는 거예요. 치워버리는 거예요. 상대방을 다 치워버리는 거예요. 팀을 이뤄서 하나님의 드라마에 들어올 수 없는 인간을 다 치워버리는 겁니다. 그 국대, 국가대표선수들, 그게 오늘날 성도들이에요.

성령이 언급하는 우리, 그러니까 죽음의 세계에 함몰된 그러한 눈에 보이는 세계를 살고 있는데 그 우리의 세계로부터 성령이 오게 되면 나는 나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것은 바로 죄에 해당되어서 이게 치워버려질 대상이 되는 거예요. 놀라운 것은 처음부터 헛되었고 처음부터 죽음, 죽었습니다. 우리는 살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나를 남들이 알아주기를 원하지만 처음부터 우리는 죽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던 겁니다. 응답 되었다는 것은 전부 다 구라입니다. 진짜 응답은 하나밖에 없어요. “가서 죽어!” 이게 응답이에요. 모든 고민 해결은 이거 하나입니다.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 했지요. 귀신 영화 보면 귀신이 들려서 애 모가지가 막 돌아가고 눈 뒤집히고 그러지요. 그럴 때 퇴마사 신부가 와서 상투스, 상투스, 라틴어 하면서 “귀신아, 나가라” 하는데 만약에 저보고 모가지 돌아가고 귀신들린 사람 해결하라고 하면 저는 간단히 해결해요. “죽어버려. 그냥 죽어!”

그 드라마에서 우리 역할은 모가지 돌아가서 죽는 역할이에요. ‘아, 원래부터, 예수님의 손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면 처음부터 우리는 벌써 죽은 존재구나.’ 그거 알고 모가지 돌아가고 죽어버리면 천국 갑니다. 그걸 해결하려고 성경책 보고 기도하고 뭘 어떻게 하라고 하는데 그게 전부 다 바로 십자가에 나타난 주님의 예언의 완성을 거짓말로 취급하는 악마의 속임수에요.

미국의 B급 폭력영화, 스릴러 영화 보면 주로 이런 거예요. 먼저 기억상실증부터 나옵니다. 어떤 건장한 남자가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외딴섬에서 개 한 마리 키우고 낚시나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차 사고로 기억을 잃었어요. 깨보니 섬이에요. 친구가 가끔 와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돈 대주니까 개 한 마리하고 낚시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복면 쓴 웬 괴한이 들이닥쳐서 뭘 찾는지 집을 막 뒤지고 있는데 개가 짖으니까 개를 죽여버린 거예요. 그때 그 사나이는 자기가 키우던 개 죽였다고 복수에 나섭니다. 개 한 마리 죽였다고. 뭐가 뭔지 모르는데 지하실에 가보니까 웬 기관총부터 온갖 무기가 있고 과거에 내가 뭐한 사람인지 모르지만 괴한과 싸우는데 각종 무술과 사격술로 인하여 괴한들을 다 쳐부수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총을 잘 쐈어?’ 총 한 발 쏘면 두 명씩 죽어 나가고 나중에 알고 보니까 아내가 있었는데 아내가 세계 인터넷을 조종하는 인공지능 개발자였어요. 다 개발해놓고 그 열쇠가 있었는데 같이 개발한 사람들 숫자가 12명이었어요. 그중 하나가 배신자가 있었던 거예요. 그 배신자가 개발한 물건을 악당에게 넘기려고 한 거지요.

국가에서는 폐기처분하라고 했는데 폐기처분 하지 않고 아내가 개목걸이에 숨겨놨던 겁니다. 악당들에 의해서 차 사고로 위장해서 아내는 죽고 주인공만 기억이 상실된 채 살았던 거예요. 기억이 돌아와서 보니 개목걸이 십자가 펜던트 안에 열쇠가 들어 있었어요. 국가기밀열쇠.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 배신자가 친구라는 그 작자였어요. 잘해주는 척하면서 사실은 그 열쇠를 빼내서 이용하려 한 겁니다. 지금 너무 잘 듣고 계시네요. 영화 이야기에 불과한데. 열두 제자 가운데서 가룟유다의 죽음 묘사한 것을 유념해 볼 필요가 있어요. 마태복음 26장 24절에 보면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우리와 나, 우리와 나를 주님께서 구분합니다. 주님께서 생각하는, 인간들이 보기에 그 죽음의 세계, 사실은 그게 실재하는 현실 세계거든요. 그 현실의 세계에서 나 하나, 따로 나에게 가치와 나의 의미를 챙긴다면 그런 인간은 천국에서 안 받아줍니다.

그런데 가룟유다가 자살한 이유는 죄송하고 미안해서 자살한 거예요. ‘이래 살다 내가 나쁜 짓 한 것 있으면 자수하거나 자살하지.’ 자수하고 자살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나라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져야 돼요. 그런데 끝까지 가룟유다는 자기 자신을 놓지를 못했어요. ‘이 모든 성경 구절과 설교와 강의내용이 나 죽을 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런 계산을 계속하고 있는 거예요. ‘나 구원받는데, 죽어서 천당 가는데 얼마나 많은 이익이 되는 재료가 될까?’

그러나 그 B급 영화처럼 우리는 어떤 거대한 비밀의 프로젝트에 말려든 거예요. 오지게 말려든 겁니다. 그리고 나는 그 개목걸이의 십자가가 무슨 뜻인지를 몰랐어요.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우리는 세상에 놀아났지요. 어리석게. 나중에 알아보니까 제자들에게 손에 못 자국, 옆구리의 창 자국 그 연결고리, 현실 세계와 죽음의 세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으면, 그것도 십자가에 죽지 않았으면, 예수님이 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모를 뻔했고 예수님이 죽은 모습으로 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멀쩡하게 그 나라에 내 주장, 내 생각, 내 사랑 이대로 거기에도 그대로 통하는 줄 알았지요.

나 자체를 가위표 쳐야 되는데, 나 자체를 없애야 되고 하나의 연극의 역할로 맡아야 되는데 이게 내 문제인 양, 내 뜻인 양, 나를 위한 드라마인 양 이렇게 착각을 한 거예요. 이 세상에 이 연극에서 떠나 있으면 그게 바로 가짜입니다. 오늘 본문 보게 되면 “성령을 소멸치 말라”하는데 이 성령은 바로 양쪽 세계를 다 보여줘요. 십자가를 가운데 두고 이쪽 세계와 이쪽 우리가 현실이라고 아는 이 세계가 꿈이고, 예수님이 가셨던 그 세계 부활의 세계가 진짜 현실이라는 것을 성령께서는 양쪽을 다 같이 보여주는 겁니다.

보여주셔서 성령을 소멸치 말라, 하는 말은 성령이, 다시 말해서 예수님 손에 못 자국이 있고 옆구리에 창 자국이 있는 그 주님께서 부활의 영으로 우리에게 오셔버리면 우리로 하여금 너는 철저하게 그 마귀한테 속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매일매일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욕심을 게워내게 만들어요.

성령이 오게 되면, 안에 성령이 들어 있으면 우리의 감춰놓은 욕심을 바깥으로 죽죽 밀어내게 한다니까요. 그래서 선교하는 것도 욕심이고, 무슨 목사질 하겠다는 것도 욕심이고, 재산을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하고 재산 바치는 것도 다 욕심이고, 어느 것 하나 욕심 아닌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교인한테 받쳐서 교회 안 나오고 집에서 인터넷 예배드리는 그것도 욕심이고요, 모든 게 욕심 아닌 게 없어요. 성령이 있으니까 슬쩍 밀어내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그걸 배설물이라 했어요. 배설물. 날이 가면 갈수록 ‘아, 이러한 욕심들이 적체되어 있었구나’ 그게 나이 90 되어서 요양병원에까지 계속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90 되어서 그 젊은 목사가 와가지고 “장로님,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을 믿어야 됩니다.” 그러면 장로님이, 이제 5초 남았잖아요, 힘을 내서 “이 사람아, 이 젊은 목사야! 이 철딱서니 없는 목사야! 예수 믿는 것도 욕심이야. 네가 이걸 알기는 알아? 네가 게 맛을 알아? 네가 예수 믿는 것도 욕심이야. 그런 식으로 목사 하려면 때려치워 인간아!” 그러면 벌써 10초 다 지나갔어요.

개라도 짖는 것은 위협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왜 하나님 찾고, 왜 교회 찾는가? 뭔가 개 같아서 그래요. 위협이 되어서 그래요. 자꾸 무섭고 떨리는 겁니다. 사람이 살아 있으니까 위험을 자처하는 거예요. 살아 있으니까 이게 벌벌 떨면서 더 살고 싶은 거예요. 이런 노래도 있잖아요.

거리마다 불빛이
흐느끼듯 우는 밤
세월흐른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니
내 나이가 몇인가
꽃이 되어 진 세월
무던히도 참아왔던
외로움의 눈물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주님의 성령의 은사가 나타납니다.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사랑이라고 해요. 13장 5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4절부터 보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 그다음에 결정적이 아닙니까?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오늘 본문에 나온 것과 동일한 내용이에요. 그러니까 사랑을 받았다는 말은 주님의 성령을 받았다는 말과 같은 말인데 사랑을 받았다는 말은 네가 바로 승자라는 말이지요. 이미 네가 승리했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 안에 계신 분이 승리했지요. 그러나 우리는 덤으로 이미 승리 되어버린 거예요.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이 잡힌다는 소식 듣고 본인이, 자기가 스스로 승자가 되기 위해서 시도한 게 있어요. 33절에서 베드로가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할 때 그 앞에서 주께서 하신 말씀이 있어요. 이 말이 굉장히 중요한 말인데 왜냐하면 시몬이 아직까지 뭐가 뭔지 아무것도 몰라요.

그냥 예수님 만나서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 있는 중이에요. 나한테 이익이 되었다 생각하는 거예요. 손해 볼 일이 없고 예수님께서 날 사랑해주니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했으니까 자기는 뭐 구원받으면 된다,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게 아니에요.

31절에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악마가 너를 노렸다는 말이지요. 악마가, 사탄이 너를 청구했는데 네가 아무리 기도하고 아무리 몸부림쳐도 악마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악마는 나보고 ‘네가 절대자고 네가 신’이라고 이미 이야기했기 때문에 내가 절대자고 나 위주로 사는 것을 스스로 포기할 인간은 없잖아요.

이미 들었던 습관이 나뿐이거든요. 내가 절대자거든요. 마지막에 계산하는 것은 내게 무슨 이익이 되었느냐, 그것만 계산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도 이런 마귀의 마음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어요. 악마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고요. 다만 인간을 붙들기만 하면 된다고요.

인간의 조상 아담을 붙들었기 때문에 그냥 붙들기만 하면 되게 되어 있어요.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요. 악마는 그냥 너 하는 대로 하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벌벌벌, 떨면서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 하니까 악한 일 안 하고 모양이라도 버리고, ‘하나님, 어떻습니까? 제가 악을 버렸는데 제 모습 어때요?’ 맨날 인정받으려고 하고요.

유부남 주제에 아가씨한테 “너 사랑하는 내 마음 좀 알아줘” 이런 식으로 자기밖에 모르는 것, 그럴 때 악마가 너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를 청구하였음이다, 청구서 딱 내밀었거든요. 32절에 “그러나 내(예수)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믿음이 떨어지지 않는 방법은 내가 뽕나무 보고 “야, 뽕나무야! 바다에 빠져!” 하니까 뽕나무가 “예, 알겠습니다. 베드로님!” 이렇게 빠지는 게 믿음이 아니라 믿음의 단절성, 불연속성을 주는 거예요. 네가 믿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돌이킬 때 그게 바로 믿음이라는 거예요.

내가 믿음을 가질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거예요. 굳이 내 믿음을 내가 가질 필요 없어요. 내 소망 내 사랑을 가질 필요가 없어요. 2천 년 동안 교회가 사람들을 속인 것이고 교회조차 악마에게 속은 겁니다. 당신이 믿음 있어야 구원받는다고 그런 식으로 사람을 사기 치고 지금도 사기 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내 믿음, 내 소망, 내 사랑 필요치 않아요. 우리는 믿음에서 떨어져야 돼요. 그래야 주님의 믿음으로 교체가 되는 겁니다. 주님이 와야 ‘나’가 아니고 ‘우리’가 되어버려요. 주님, 형제, 나, 성령, 하나님, 다 한 처소를 마련한다니까요. 이 이야기 듣고 ‘잘 새겨듣겠습니다’ 하지 마세요. 지금 3초 남은 사람 있고, 5초 남은 사람 있고 여러분 누구도 아무도 몰라요.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지금 5초 남았다 해보세요. ‘다음에 잘 할게요.’ 그럴 여유시간 없어요. 지금 뭐냐 하면, 그동안 내 믿음, 내 소망, 내 사랑을 챙기려고 교회 다닌 그 자체가 이게 속임수에 넘어간 거예요. 우리가 기억상실증에 걸린 거예요, 기억상실증에.

진짜 선악과 따먹기 전의 내 모습을 잃어버렸어요. 악마한테 속임 당한 겁니다. 죽은 아내가 남긴 것이 우리를 구원해요. 그게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한번 읽어 드릴까요? 다 알지만 읽어드리겠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자의 후손이 와야 최종 승리가 결정 나는 겁니다. 그 여자의 후손이 승리했다는 소식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을 소멸하면 안 돼요. 성령 앞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바로 우리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현실 세계가 죽음의 세계에 흡수 통합되었다는 사실을 성령이 와야 비로소 아는 겁니다. 우리는 꿈속에서 살기 때문에.

우리의 소원은 남북통일이 아니에요. 우리의 소원은 나의 죽는 날이에요. 이게 사도바울이 고백하는 겁니다. 내 소원은 하나밖에 없다. 내가 죽는 날이 있다. 내가 죽는 기쁜 날이 있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요. 지금 내가 네 번째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살아 있으면요, 남들한테 인정받으려고 해요. 심지어 하나님한테도 인정받으려고 해요. ‘지금 제 믿음 괜찮지요? 제 폼 괜찮지요? 기도 폼 괜찮지요?’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이제 그 말씀 마지막으로 하고 마치겠습니다. 창세기 13장 9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언약의 핵심, 언약의 복의 근원이 된 자는 일반인과 차이 나는 길을 갈 수밖에 없어요.

네가 우하면 주님은 좌하고 주님이 우하면 우리는 좌하고, 우리의 가는 길과 주님이 가는 길이 달라져야 예수님의 손의 못 자국이 의미가 있고 예수님의 창 자국이 의미가 있는 거예요. 우리는 내 실력으로 내 믿음으로 구원받지 않는다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언약에 속한 사람은, 우리의 믿음이 아무짝도 소용없고 우리의 소망이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에 속한, 우리의 욕망은 욕망대로 다 거덜내고 그다음에 주께서 우리를 건져주신다는 것에 비로소 나의 유익을 구치 않고 주님 주신 것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길이 내 욕망의 끝이 되어야 돼요.

그 욕망의 끝이 창세기 35장 16-19절에 나옵니다. “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산하여 심히 신고하더니” 심히 아파하더니,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야곱의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레아와 라헬 두 사람은 경쟁적으로 남편 사랑을 차지하려고 하지요. 자기 사랑이지요. 사랑을 받아서 자식을 계속 낳는 그것으로 경쟁붙었는데 그 경쟁이 언제 끝나는가? 둘 중 하나가 죽었을 때, 욕망이 끝났을 때, 나의 욕망이 끝났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이미 우리는 승리자가 됩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의 믿음, 우리의 소망, 주님의 사랑 안에 내 유익을 구할 필요 없는 그 세계에 들어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성령 있는 성도라면 내게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서 나와 무관한 일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의 드라마와 관련된 일이고 주의 연극과 관련되어 있지 나 좋아라고 일어나지 않은 일, 누구한테 제발 미안해하지 마시고요, 누구한테 죄송스럽다고 말하지 마세요. 시건방지게 누굴 용서하지 마세요. 용서할 잽도 못됩니다. 우리는 그렇고 그런 인간,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나밖에 모르는 그것임을 우리가 들통날 때 이미 그 사람은 승리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승리한 입장에서 무슨 새삼스럽게 하나님 앞에 인정받으려고, 남한테 인정받으려고 할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동안 속은 것 자체도 우리의 역할인 것을 감사하고, 죽을 때까지 욕심이 나오는 것도 주께서 맡긴 배역인 것을 우리가 기쁘게 받아들이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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