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계시의 폭설1

아빠와 함께 2022. 2. 20. 13:37

내가 있는 그 장소를 나의 무덤으로 만들어버리는 폭설같이 내리는 이 계시. 이게 계시의 능력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뭐냐 하면 ‘해석 필요 없음’. 중요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한테는 이 쌓인 폭설이 보이지 않아요. 폭설이 보이지 않고 폭설 내린 것에 대해서 계시 주신 것에 대해서 기뻐하는 이것만 보이죠. 그렇다면 사람들한테는 내린 폭설은 안보이고 그냥 ‘나는 아니요’만 보이니까 계시는 뭐냐? 계시란 내가 사는 것, 이게 계시가 되는 겁니다.내가 누구냐 해석할 필요 없이 그냥 사는 것. 그리고 남하고 경쟁하는 것도 부질없이 그냥 사는 것. 더 확실하게 노골적으로 단적으로 말해서 내가 사는 것은 나의 무덤 안에서 내가 죽은 채로 사는 것. 나의 무덤을 짊어지고 가고 결국 ‘모든 인간은 동일하다’라는 것이 계시로 밝혀져요.

`성도는 이것이 반갑고 기뻐요.나는 아니요’ 이것이 나의 무덤이죠. 숨 끊어지기 전에 산 채로 무덤이 됐다는, 진솔하고 확실한 나의 모습을 미리 체험한 이런 기쁨과 한번 대조해보세요.

예수님의 계시의 권역 안에서 가룟 유다는 인간이라는 것이 주님의 계시 앞에서 인간은 어떤 본성을 드러내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에 의해 선택된 자가 가룟 유다에요.

어떤 성경구절을 해도 ‘그러니까 너는 아니야.’라는 해석은 나와버려요. 아무데나 펼치겠어요. 시편 119편 나오네요. 눈에 띄는대로 하겠어요. 시편 119편 142절,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 해석은 어떻게 되느냐. 그러니까 넌 죽어야 돼. 아멘. 그것을 듣고 싶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듣고 싶은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성경의 계시를 주신 분만이 계시의 본뜻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분이에요. 

성경을 보면서 제일 잘못된 해석이 뭐냐? 그러니까 제가 그 말씀을 지키겠나이다, 이거에요. 지킬 것 같으면 주님이 왜 오셨습니까? 네 자입니다. 지키지 마! 지키지 마. 지키라고 준 말씀이 아니에요. 못 지킨다고 주신 말씀이에요, 못 지킨다고.

계시가 덮쳤다는 말, 이게 놀랍게도 계시의 자체적인 실현입니다. 이게 계시의 자체적인 실현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계시가 완성이 되면 우리보고 가리키면서 ‘너 죽었어.’ 이런 손가락질, 이게 계시의 실현, 완성이에요. 그래서 여기 계시의 폭설 안에 자기 자리, 자기의 무덤이라 했잖아요. 죽은 무덤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가 산 채로 있는 무덤이에요. 세상 사람들은 이 폭설이 안 보이니까 계시가 안 보이니까 우리는 길에 콩나물 사러가고 차타고 자기 딴에 움직이겠죠. 움직이는 것은 마치 거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의 거북이 같은 그런 양상이죠. 거북이가 가는데 뭘 뒤집어쓰고 왔다갔다 그냥 가는 거예요. 서울 대전 부산 찍고 목포까지. 어디를 가도 주님의 계시가 함께 따라가서 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모든 공간에 대한 점유. 계시가 모든 공간에 대한 점유입니다.

변화산은 모든 공간을 점유했습니다. 어느 쪽이냐, 어느 국소 지역을 의미할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어요. 계시가 인격화되고 말았어요. 예수님이라는 인격으로 이것이 흡수 통합되어 버려요.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심으로써 온 지구상 온 우주에 다시 재림하십니다. 강림하십니다. 그럼 예수님의 인격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죠. 내가 올 때 어떤 자도 숨을 곳이 없다, 이 말은 모든 공간이 예수님의 권세로 이미 접수가 된 상태에요.
변화산에 나타났던 그 계시가 전 지구상을 다 덮고 있는 거예요. 다 덮고 있단 말이죠. 마치 노아 홍수가 특정 지역의 홍수가 아니고 전 지구적인 홍수인 것처럼. 이 말은 뭐냐. 내가 하나님의 계시에 해당되지 않는 어떤 특별한 중립지역, 특수한 지역을 하나님께서 남겨둔 적이 없습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이 아니요’라고 했죠. 여러분들 이야기해보세요, 아시는 거니까.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난 게 아니라 했죠. 사사롭다는 것은 20절에 나와 있고. ‘사람의 뜻이 아니요’라고 했죠. 사람의 뜻이 아니요, 계시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그냥 일방적이다 이 말이죠. 19절에 봅시다.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샛별, 새벽에 떠오르는 그 금성, 샛별이 떠오를 때 여러분들이 샛별보고 ‘떠오르지 마. 떠오르지 마. 오늘은 나 바쁘니까 너하고 상대해줄 시간이 없어. 내일 떠. 내일 떠.’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인간이? 안되죠. 그냥 일방적으로 떠올라버리죠.

세상이 쏘아대는, 우리를 검사하고 조사하고 평가내리고 측정하고, 너는 금메달, 너는 은메달, 너는 동메달, 너는 스케이트 타다가 노선 벗어나서 예선 탈락, 이렇게 심사를 하는 세상의 무기가 뭐냐 하면 이런 말이에요.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다’
이성적이라는 말은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합치되는 이 체계를 그들은 진리체계라 하는 겁니다. 진리라는 것을 우리말로 하면 참되다 또는 올바르다. 참되고 올바른 것을 모아서 그것이 나 자신을 명령하도록 하는 체제, 그게 이 세상입니다.
이게 이성적이라 했죠, 이성적. 여기서 이성적이니까 진리체계라 하면 이성이 동의할 때만 진리가 되겠죠. 그러면 이성이 가만히 있는 게 아니고 이성이 누적되고 축적되죠. 이성이 축적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이 진리체계가 하나로 고정된 게 아니고 점점 더 흔히 말하는 발달을 하게 되는 거예요, 발달을. 그러니까 진리체계란 변동이 일어나요. 변하니까 이것은 진리가 아니죠. 이걸 뭐라고 하느냐? 이걸 가지고 지식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식. 지방 신학교 말고 서울대학 나온 목사, 연고대 나온 목사, 미국 유학 갔다 온 목사, 그 목사가 큰 교회 후임자로 오잖아요. 보다 잘 심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모든 것이 바로 사사로이 푸는 것이고 이 모든 것이 ‘아니요’에 해당되는 거예요, 이 모든 것이.이 세상은요. 지식의 레벨에 준해서 직업을 서열화 시킬 수 있는 세상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이것을 건드렸다는 거예요. 이 속에 속한 누구, 아까 이야기한 가룟 유다를 자기 열두 제자들 가운데 집어넣은 거예요. 집어넣으니까 이 세상은 주님으로부터 이미 주님의 계시에 의해서 처벌받아야 될 대상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렇게 가룟 유다를 집어넣었을 때 가룟 유다가 한 것은 예수님을 팔아먹은 거잖아요. 제발 죽어줘. 이 말이죠. 예수여, 당신 제발 없어져줘. 죽어줘. 이것이 이 세상에서 하나같은 그들의 뜻에 대한 마음을 대변해주는 겁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게 있어요. 베드로가 이것은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나왔다고 하잖아요. 21절에 사람의 뜻은 일단 아니고(X) 그다음에 O는 뭡니까? 성령을 받은 사람이 풀어준 것이라 되어있죠. 이 말을 할 때 항상 이 말을 누가 하는가를 보세요. 이 말을 누가 합니까? 베드로, 야고보, 요한 자기가 변화산에서 세 사람을 봤죠? 이 사람들도 사도니까 나중에 성령을 받을 게 아니겠어요. 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사람들을 성령 받았다 하지 말고 이 세 사람이 변화산에서 변화된 계시의 원형에 어떤 위치에 놓여있었는가, 그 본래의 자리를 찾아갈 필요가 있어요, 본래의 자리를. 계시는 하나님의 성령 받은 것이다. 끝. 이런 게 아니라 내가 받았던 계시의 산, 아까 변화산 있죠, 지극히 큰 영광 중에 그 산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가 직접 들었다 했죠. 직접 들었다 할 때 그 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있었습니까? 그 현장에 또 누가 있었습니까? 예수님하고 네 사람만 있었습니까, 아니면 또 누가 있었어요? 모세, 엘리야죠. 그러면 모세, 엘리야가 이 베드로의 원형이 되는 거예요. 모세, 엘리야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주님의 영광스러운 계시를 봤지만 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해같이 빛났습니까? 빛났어요, 안 빛났어요? 안 빛났어요. 자, 그러면 여기서 질문은 해같이 빛나지도 않는데 과연 그들이 예수님의 계시를 전달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변화되지 않았잖아요. 모세와 엘리야가 해같이 빛났습니까? 누더기 걸치고 돌아다녔어요. 무슨 해같이 빛나요. 모세와 엘리야가 앞에 지나가면 아이고 눈부셔. 눈부셔서 못 보겠어. 이건 모세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 때뿐이지 내려와가지고 함께 있을 때는요, 벌써 마찬가지 똑같이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신기한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 실제로 모세와 엘리야가 우리가 보기에는 우리와 동일한 육적인 사람이다 이 말이죠. 육적인 사람인데 육적인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의 계시를 전할 수 있는 자격이 되느냐 이 문제를 생각해봐야 됩니다, 육적인 사람이. 그게 풀어져야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해같이 빛나지도 않는데 예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된다, 가 정립이 되거든요. 상당히 난해한 문제죠.
보고 들었다는 이 자체가 과연 계시 전달자로서의 자격이 되냐 이 말입니다. 자격이 되지 않습니다, 보고 들은 걸로는. 다른 게 있어줘야 돼요. 다른 요소가 있어야 돼요.

그것은 모세와 엘리야가 그 때 그 시대에 당한 현실을 우리가 파악해줘야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잠시 미루고요. 모세와 엘리야가 그 시대 때에 그들은 어떤 초월적 계시를 받았느냐 또는 계시에 의해서 움직여나갔는가. 그걸 생각을 해봐야 돼요. 모세와 엘리야의 그 계시는 어디서 왔느냐 하면 위에서 받았고요. 모세도 마찬가지죠, 시내산에서. 계시를 받았고 위에서 내려온 방향은 어디를 향했습니까? 땅으로 향했죠. 그러니까 계시의 출처가 위니까 이것은 영광스러운 거예요. 영광스러운 계시가 땅에 내려왔다는 말은 계시의 처음 출발점이 영광스럽기 때문에 이것은 영광스러운 곳으로 돌아갈 그런 계시가 되는 겁니다. 영광스러운 곳으로 돌아갈 계시가 돼요. 그러면 모세, 엘리야가 이 땅에서 초라하게 산다는 것은 한시적이고 일시적인 현상이 되는 거예요. 한시적이고 일시적인 현상.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전에 고기 잡던 사람이에요. 처음부터 위에서 내려온 게 없었습니다. 그러면 여기 무슨 조치가 있어야 돼요. 위에서 내려온 게 없고 그냥 주님의 영광을 봤죠. 봤는데 제가 초막 셋을 지어서 여기에 본인이 합류하려고 애를 쓴 거예요. 그러나 합류하려는 자체를 주님으로부터 거부당합니다. 너는 지금 합류하면 안 돼. 모세, 엘리야, 예수님의 영광에 지금 합류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다른 곳을 경유해야 너도 예수님처럼 모세처럼 엘리야처럼 영광스럽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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